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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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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亥年(207)
정해년丁亥年(207)
十二年이라 春二月 하다
나라 효헌황제 건안孝獻皇帝 建安 12년이다. 봄 2월에 조조曹操공신功臣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夏 操擊烏桓하여 秋八月 破之하고 斬蹋頓하니 袁熙, 袁尙 犇遼東이어늘 公孫康 斬之하다
】 여름에 조조曹操오환烏桓을 공격하여 가을 8월에 격파하고 답돈蹋頓을 참수하니, 원희袁熙원상袁尙요동遼東으로 달아났는데 공손강公孫康이 이들을 참수하였다.
曹操將擊烏桓할새 諸將 皆曰 袁尙 亡虜耳 夷狄 貪而無親하니 豈能爲尙用이리오
조조曹操가 장차 오환烏桓을 공격하려 할 적에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원상袁尙은 도망간 적일 뿐입니다. 오랑캐들은 탐욕스럽고 친애하는 마음이 없으니, 어찌 원상의 쓰임이 되겠습니까.
今深入征之하면 劉備必說劉表하여 以襲許하리니 萬一爲變이면 事不可悔注+說, 輸芮切.니이다
이제 깊이 쳐들어가 오환烏桓을 정벌하면 유비劉備가 반드시 유표劉表을 설득해서 허도許都를 습격할 것이니, 만일 변란이 일어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注+(설득하다)는 수예輸芮이다. 하였다.
郭嘉曰 公雖威振天下 胡恃其遠하여 必不設備리니 因其無備하여 卒然擊之하면 可破滅也리이다
그러나 곽가郭嘉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의 위엄이 비록 천하에 진동하나 오랑캐들은 거리가 먼 것을 믿고 반드시 대비를 하지 않을 것이니, 그들이 대비가 없는 틈을 타서 갑자기 공격하면 격파하여 멸망시킬 수 있습니다.
且袁紹有恩於民夷어늘 而尙兄弟生存하니 今舍而南征이라가 因烏桓之資하여 招其死主之臣하여 以生蹋頓之心이면
원소袁紹가 백성과 오랑캐들에게 은혜를 베풀었는데 원상의 형제가 살아 있으니, 이제 이들을 놓아두고 남쪽으로 정벌하였다가 원상이 오환의 물자를 이용하여 주군主君(원소와 그의 아들)을 위해 죽으려는 신하들을 불러 모아 답돈蹋頓의 마음을 동요시키면
恐靑, 冀非己之有也注+死主之臣, 言欲爲其主致死, 而留滯不得逞者.니이다 坐談客耳 自知才不足以御備 重任之則恐不能制
청주靑州기주冀州는 우리의 소유가 아닐까 두렵습니다.注+사주지신死主之臣”은 주군主君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고자 해서 〈떠나가지 못하고〉 체류하면서 뜻대로 하지 못하는 자들을 이른다. 유표는 앉아서 담론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재주가 유비를 제재하기에 부족하니 유비를 중용重用하면 제재하지 못할까 염려스럽고,
輕任之則備不爲用하리니 雖虛國遠征이나 公無憂矣니이다 操從之하다
가볍게 임용하면 유비가 그에게 쓰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우리가 비록 나라를 비우고 멀리 정벌하더라도 은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조조는 그의 말을 따랐다.
行至易注+易縣, 前漢屬涿郡, 後漢省.한대 嘉曰 兵貴神速이라 今千里襲人 輜重多하니 難以趨利 不如輕兵兼道以出하여 掩其不意니이다
조조曹操의 군대가 행군하여 역현易縣(역현)에 이르자注+역현易縣전한前漢 때에는 탁군涿郡에 속하였는데, 후한後漢 때에는 없앴다., 곽가郭嘉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대는 신속神速함을 귀하게 여깁니다. 지금 천 리 멀리 적을 습격함에 치중輜重이 너무 많으니, 승기勝機를 잡기가 어렵습니다. 경무장한 군대로 행군 속도를 배가倍加하여 출격해서 저들이 예상하지 못했을 때에 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袁紹數遣使하여 召田疇注+初平四年, 疇保無終.하고 又卽授將軍印하여 使統其衆호되 疇皆拒之
】 처음에 원소袁紹가 자주 사자를 보내어서 전주田疇벽소辟召하고注+초평初平 4년(193)에 전주田疇무종無終을 보전하였다., 또 즉시 장군將軍의 인수를 주어 그의 무리를 거느리게 하였으나, 전주는 모두 거절하였다.
이나 毎忿烏桓多殺其本郡冠蓋하여 意欲討之而力未能注+冠蓋, 謂郡中名勝之士.이러니 至是 操遣使辟之한대 疇卽至하여 隨軍次無終注+凡師出, 一宿爲舍, 再宿爲信, 過信爲次.하다
그러나 전주는 매번 오환烏桓본군本郡(우북평군右北平郡)의 사대부士大夫들을 많이 죽인 것에 분노하여 그를 토벌하려고 마음먹었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였는데注+관개冠蓋”는 의 명망이 있고 뛰어난 선비(사대부士大夫)를 이른다., 이때 조조가 사자를 보내어 징소徵召하자, 전주가 즉시 와서 군대를 따라 무종無終에 주둔하였다.注+무릇 군대가 출동할 적에 하룻밤을 유숙하는 것을 라 하고, 이틀 밤을 유숙하는 것을 이라 하고, 이틀 이상을 유숙하는 것을 라 한다.
方夏水雨而濱海洿下하여 濘滯不通注+濘, 音佞, 淖濘也.하고 虜亦遮守蹊要하니 軍不得進注+蹊要, 徑路要處也.이라
이때는 한창 여름철이라서 비가 자주 내렸는데, 무종은 바다에 인접하여 지세가 낮아서 길이 진흙에 막혀 통하지 못하였으며注+이니, 진흙이다., 오랑캐 또한 요해처를 차단하여 지키고 있어서 군대가 전진할 수 없었다.注+혜요蹊要”는 지름길의 요해처要害處이다.
疇曰 此道秋夏有水하여 淺不通車馬하고 深不載舟船하니 爲難 久矣
이에 전주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 길은 가을과 여름에 홍수가 져서, 얕아도 수레와 말이 통행하지 못하고 깊어도 배가 통행하지 못하니, 길을 가기 어려운 지가 오랩니다.
舊北平郡治在平岡하니 道出盧龍하여 達于柳城注+前漢, 右北平郡治平岡縣, 後漢, 省平岡縣, 改治土垠縣. 集覽 “盧龍, 幽州屬郡名.” 正義 “柳城, 在北平郡東北.”하나니 自建武以來 陷壞斷絶이나 尙有微徑이라
북평군北平郡의 옛 치소治所평강平岡에 있는데 길이 노룡盧龍으로 나가 유성柳城에 도달하니注+전한前漢 때에는 우북평군右北平郡치소治所평강현平岡縣에 있었는데, 후한後漢 때에는 평강현平岡縣을 없애고 치소治所토은현土垠縣으로 바꾸었다. ≪집람集覽≫에 “노룡盧龍유주幽州에 속한 의 이름이다.” 하였고, ≪정의正義≫에 “유성柳城북평군北平郡 동북쪽에 있다.” 하였다., 건무建武 연간 이래로 함몰되고 무너져 길이 끊겼으나 그래도 작은 오솔길은 남아 있습니다.
若回軍從盧龍口하여 越白檀之險하여 出空虛之地하면 路近而便이니 掩其不備하면 蹋頓 可不戰而禽也注+白檀山, 在徐無山東北․北平郡南.니이다
만약 군대를 돌려 노룡의 어귀를 따라 백단白檀의 험한 곳을 넘어서 비어 있는 땅으로 나가면, 길이 가깝고도 편하니, 적들이 대비하지 않았을 때에 습격하면 싸우지 않고도 답돈蹋頓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注+백단산白檀山서무산徐無山 동북쪽 북평군北平郡 남쪽에 있다.
操令疇將其衆爲鄉導注+孫子曰 “不用鄕導者, 不得地利.” 注 “不任彼鄕人而導軍者, 則不能得道路之便利.” 一說 “鄕, 讀曰嚮.”하여 上徐無山하여 塹山堙谷五百餘里 經白檀, 歴平岡하여 渉鮮卑庭하여 東指柳城할새
조조曹操전주田疇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향도鄉導가 되게 하고는注+손자孫子≫ 〈군쟁軍爭〉에 이르기를 “향도鄕導를 사용하지 않는 자는 지리地利를 얻지 못한다.” 하였는데, 에 “그 지방 사람에게 맡겨 군대를 인도하지 않으면 도로道路편리便利함을 얻지 못한다.” 하였다. 일설一說에 “(향하다)은 으로 읽는다.” 하였다., 서무산徐無山에 올라가 산을 파고 골짝을 메워서 길을 낸 것이 500여 리였고, 백단白檀을 경유하고 평강平岡을 지나 선비鮮卑왕정王庭을 넘어가 동쪽으로 유성柳城으로 향하였다.
未至二百里 虜乃知之注+此時, 鮮卑庭已在右北平郡界, 蓋慕容之先也하고 尙, 熙與蹋頓等으로 將數萬騎逆軍이러라
이때 유성과의 거리가 200리도 안 남았을 때에야 오랑캐들이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는注+이때 선비鮮卑왕정王庭이 이미 우북평군右北平郡의 경계에 있었으니, 이 선비鮮卑의 선조이다. 원상袁尙원희袁熙답돈蹋頓 등과 수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조조의 군대를 맞아 싸웠다.
八月 操登白狼山이라가 卒與虜遇하여 縱兵擊之하니 虜衆 大崩이어늘 斬蹋頓하니 降者二十餘萬注+白狼山, 蓋在凡城. 卒, 讀曰猝.이러라
】 8월에 조조曹操백랑산白狼山에 올라갔다가 갑자기 오랑캐 군대와 만났는데 군대를 풀어 공격하니, 오랑캐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답돈蹋頓을 참수하니, 항복한 자가 20여만 명이었다.注+백랑산白狼山범성凡城에 있다. (갑자기)은 로 읽는다.
尙, 熙犇遼東하니 尙有數千騎注+通鑑 “其衆尙有數千騎.”러니 勸操遂擊之한대
원상袁尙원희袁熙요동遼東으로 달아났는데, 아직도 수천 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그 무리가 아직도 수천 명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었다.” 하였다. 혹자가 조조曹操에게 그들을 추격할 것을 권하자,
操曰 吾方使公孫康送尙熙首하리니 不煩兵矣라하고 九月 引還이러니 果斬尙, 熙首送之하다
조조가 말하기를 “내 바야흐로 공손강公孫康으로 하여금 원상과 원희의 수급首級을 보내오게 할 것이니, 굳이 번거롭게 출병할 것이 없다.” 하고는 9월에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는데, 공손강이 과연 원상과 원희의 머리를 베어 보내왔다.
諸將 或問操한대 操曰 彼素畏尙, 熙하니 吾急之則幷力이요 緩之則自相圖하리니 其勢然也니라
장수들 중에 혹자가 그 이유를 조조에게 묻자, 조조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공손강公孫康이 평소 원상과 원희를 두려워하였다. 내가 급하게 몰면 저들은 힘을 합쳐 항거할 것이요, 느슨히 풀어주면 자연 자기들끼리 서로 도모할 것이니, 형세가 그러한 것이다.”
操梟尙首하고 令敢哭者하리라 牽招獨設祭悲哭하니 操義而擧之하다
조조는 원상의 머리를 효수梟首하고 명령하기를 “감히 그 앞에서 곡하는 자가 있으면 참수하겠다.” 하였다. 그런데 견초牽招가 홀로 제물祭物을 진설하여 제사하고 슬피 곡하니, 조조는 그를 의롭게 여겨 등용하였다.
天寒且旱하여 二百里無水하고 軍又乏食하여 殺馬數千匹以爲糧하고 鑿地三十餘丈이라야 方得水러라
】 이때 날씨가 춥고 또 가물어서 200리에 걸쳐 물이 없었고, 또 군대에는 양식이 다하여 수천 의 말을 잡아서 양식으로 삼았으며, 땅을 30여 깊이로 파야 비로소 물을 얻을 수 있었다.
旣還 科問前諫者하여 皆厚賞之注+科, 條也. 問前諫者, 科具其姓名也.하고 曰 孤前行 乘危以徼倖이라 不可以爲常이니
조조曹操가 돌아오자, 예전에 출병하지 말라고 한 자들의 성명姓名을 조목조목 물어서 모두 후하게 상을 주고注+는 조목이니, 예전에 출병하지 말라고 한 자들을 물어서 그 성명을 조목조목 갖추어 올리게 한 것이다. 말하기를 “내가 지난번에 출병한 것은 위태로움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란 것이니, 이것을 떳떳함으로 삼을 수는 없다.
諸君之諫 萬安之計 是以相賞하노니 後勿難言之하라
제군諸君들이 간한 것이 만전萬全의 계책이다. 이 때문에 상을 주는 것이니, 이후에도 간언하는 것을 어려워하지 말라.” 하였다.
封田疇爲亭侯하니 疇曰 吾始爲劉公報仇하여 率衆遁逃하여 志義不立하니 反以爲利 非本志也라하고 固讓不受注+劉公, 謂劉虞.하다
조조曹操전주田疇를 봉하여 정후亭侯로 삼으니, 전주가 말하기를 “나는 처음에 병력을 이끌고 도망하여 뜻과 의리를 세우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이것을 이익으로 삼는다면, 이것은 나의 본래 뜻이 아닙니다.” 하고는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注+유공劉公유우劉虞를 이른다.
操復欲封之러니 疇上疏陳誠하여 以死自誓 操使疇所善夏侯惇으로 喻之한대
뒤에 조조가 다시 그를 에 봉하고자 하였는데, 전주가 상소하여 진심을 아뢰면서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다. 조조는 전주와 친한 하후돈夏侯惇으로 하여금 타이르게 하였는데,
疇曰 疇 負義逃竄之人耳注+謂不能爲劉虞報讐, 自竄於徐無山也. 蒙恩全活하니 爲幸多矣 豈可賣盧龍之塞하여 以易賞祿哉리오
전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의리를 저버리고 도망하여 숨은 사람이다.注+〈“부의도찬지인負義逃竄之人”은〉 유우劉虞를 위하여 복수하지 못하고 스스로 서무산徐無山에 숨은 일을 말한 것이다. 은혜를 입고서 온전히 목숨을 보전하였으니, 참으로 다행이다. 그런데 어찌 노룡盧龍의 요새를 팔아서 祿을 바꾸겠는가.
必不得已인댄 請效死刎首於前호리라 言未卒 涕泣横流어늘 惇以白操하니 操知不可屈하고 乃拜議郎하다
반드시 그만두지 않고 〈나에게 높은 관직을 내리려 한다면,〉 내 목숨을 바쳐 그대 앞에서 목을 찌르겠다.” 전주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눈물을 줄줄 흘리니, 하후돈이 이것을 조조에게 아뢰었다. 조조는 그의 뜻을 굽힐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의랑議郎을 제수하였다.
◑操之北伐也 劉備說劉表하여 襲許호되 表不能用이러니 至是 表謂備曰 不用君言故 爲失此大會注+猶言大機會也.로다
조조曹操가 북쪽을 정벌할 적에 유비劉備유표劉表를 설득하여 허도許都를 습격하게 하였으나 유표가 그의 말을 따르지 못하였다. 이때에 유표가 유비에게 이르기를 “그대의 말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이 큰 기회를 놓쳤다.”注+〈“대회大會”는〉 큰 기회機會라는 말과 같다. 하였다.
備曰 今天下分裂하여 日尋干戈하니 事會之來 豈有終極乎리오 若能應之於後者 則此未足爲恨也니라
유비가 말하기를 “지금 천하가 분열되어 날마다 전쟁이 이어지고 있으니, 기회가 오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만약 뒤에 잘 대응하면 이번 일은 굳이 할 것이 못 됩니다.” 하였다.
冬十月 有星孛于鶉尾注+自張十二度, 至軫六度, 謂之鶉尾之次. 一說 “自張十七度, 至軫十一度, 謂之鶉尾, 於辰在巳.”하다
】 겨울 10월에 패성孛星순미鶉尾에 나타났다.注+장수張宿 12로부터 진수軫宿 6까지를 순미鶉尾성차星次라 이른다. 일설一說에 “장수張宿 17로부터 진수軫宿 11까지를 순미鶉尾라 이르니, 사방巳方에 있다.” 하였다.
◑孫權母吳氏卒하다
손권孫權의 어머니 오씨吳氏하였다.
오씨吳氏가 병이 위독하여 장소張昭인견引見하고는 사후死後의 일을 부탁하고 하였다.
유비劉備융중隆中에서 제갈량諸葛亮을 만나보았다.
琅邪諸葛亮 寓居襄陽隆中注+
諸葛亮諸葛亮
亮從父玄, 爲豫章太守, 將亮之官. 會, 漢朝以朱皓代玄, 玄與亮往依劉表. 亮家于南陽之鄧縣, 在襄陽城西二十里, 號曰隆中.
하여 毎自比管仲, 樂毅하니 時人 莫之許也로되 惟潁川徐庶 崔州平 然之러라 州平 烈之子也
】 처음에 낭야琅邪 사람 제갈량諸葛亮양양襄陽융중隆中우거寓居하여注+제갈량諸葛亮종부從父제갈현諸葛玄예장태수豫章太守가 되어 제갈량을 데리고 관청으로 부임하였는데, 때마침 나라 조정에서 주호朱皓를 보내어 제갈현을 대신하게 하니, 제갈현이 제갈량과 함께 유표劉表에게 가서 의탁하였다. 제갈량은 남양南陽등현鄧縣에 집을 마련하니, 양양성襄陽城의 서쪽 20리 지점에 있었는바 이곳을 융중隆中이라고 하였다. 매번 자신을 에 비유하니, 당시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았으나 오직 영천潁川 사람 서서徐庶최주평崔州平이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최주평은 최열崔烈의 아들이다.
劉備訪士於襄陽司馬徽한대 徽曰 儒生, 俗士 豈識時務리오 識時務者 在乎俊傑이니 此間 自有伏龍, 鳳雛니라
유비劉備양양襄陽 사람 사마휘司馬徽에게 훌륭한 선비를 묻자, 사마휘가 말하기를 “유생儒生과 세속의 선비가 어찌 시무時務를 알겠는가. 시무를 아는 자는 준걸俊傑 중에 있으니, 여기에 본래 복룡伏龍봉추鳳雛가 있다.” 하였다.
備問爲誰 曰 諸葛孔明 龐士元也注+孔明, 亮字. 士元, 統字.니라 徐庶亦謂備曰 諸葛孔明 臥龍也 將軍 豈願見之乎
유비가 “누구입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제갈공명諸葛孔明방사원龐士元이다.”注+공명孔明제갈량諸葛亮이고, 사원士元방통龐統이다. 하였다. 서서徐庶가 또한 유비에게 이르기를 “제갈공명諸葛孔明와룡臥龍입니다. 장군將軍은 그를 만나보고 싶지 않습니까?” 하니,
備曰 君與俱來하라 庶曰 此人 可就見이요 不可屈致也 將軍 宜枉駕顧之니라
유비가 말하기를 “그대가 그와 함께 오라.” 하였다. 서서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찾아가서 만나야 하고 불러올 수 없으니, 장군이 마땅히 직접 찾아가 보아야 합니다.” 하였다.
備由是詣亮하여 凡三往 乃見하고 因屛人曰 漢室傾頹 姦臣竊命注+姦臣, 謂曹操也.하니 孤不度德量力하고 欲信大義於天下로되
유비劉備가 이 말을 따라 제갈량諸葛亮에게 찾아갔는데, 모두 세 번이나 가서야 비로소 만나보고는, 사람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나라가 기울고 무너짐에 간신姦臣이 황제의 명을 도둑질하고 있소.注+간신姦臣조조曹操를 이른다. 나는 덕과 힘을 헤아리지 않고 대의大義천하天下에 펼치고자 하나,
而智術淺短하여 遂用猖獗하여 至于今日注+信, 讀曰伸. 猖, 音昌, 披猖也. 獗, 通鑑作蹶, 顚蹶也.이라이나 志猶未已하니 君謂計將安出
지혜와 계책이 얕고 짧아서 마침내 전복顚覆되어 오늘날과 같은 지경에 이르렀소.注+(펴다)은 으로 읽는다. 이니, 피창披猖(낭패를 당함)이다. 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로 되어 있으니, 넘어짐이다. 그러나 이 뜻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으니, 그대는 장차 계책을 어떻게 내야 한다고 생각하시오?” 하였다.
亮曰 今曹操已擁百萬之衆하여 挾天子而令諸侯하니 此誠不可與爭鋒이요
】 이에 제갈량諸葛亮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조조曹操는 이미 백 만의 병력을 보유하여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諸侯들을 호령하니, 이는 진실로 더불어 칼날을 다툴 수 없습니다.
孫權 據有江東하여 已歴三世하여 國險而民附하고 賢能 爲之用하니 此可與爲援이요 而不可圖也
손권孫權강동江東 지방을 점거하여 이미 삼대三代를 지나면서 나라의 지형이 험하고 백성들이 잘 따르며 어질고 유능한 자들이 등용되고 있으니, 이는 더불어 원조援助가 되어야 하고 도모해서는 안 됩니다.
荆州 北據漢, 沔하고 利盡南海注+水經 “沔水, 出武都沮縣.” 註云 “東南注漢, 所謂漢水也.” 利盡南海, 謂自桂陽․蒼梧, 跨有交州, 則利盡南海也.하고 東連吳會하고 西通巴, 蜀注+會, 如字. 吳會, 謂吳地爲東南一都會也. 一說 “會, 工外切. 吳會, 謂吳․會稽二郡之地.”하니 用武之國이나
형주荆州는 북쪽으로 한수漢水면수沔水를 점거하고 남해南海의 이로움을 다 차지하고注+수경水經≫에 “면수沔水무도 저현武都 沮縣에서 발원한다.” 하였는데, 에 “동남쪽으로 한수漢水로 주입하니, 이른바 한수漢水이다.” 하였다. “이진남해利盡南海”는 계양桂陽창오蒼梧로부터 교주交州를 점령하고 있으면 남해南海의 이로움을 다 차지하게 됨을 말한 것이다. 동쪽으로 오군吳郡, 회계會稽와 연결되고 서쪽으로 , 과 통하니注+는 본음대로 읽으니, “오회吳會”는 지방이 동남의 한 도회지都會地가 됨을 이른다. 일설一說에 “공외工外이니, 오회吳會오군吳郡회계會稽의 땅을 이른다.” 하였다., 이는 무력을 쓸 수 있는 나라입니다.
而其主不能守하니 此殆天所以資將軍也니이다 益州 險塞 沃野千里 天府之土
그런데 그 주인이 이곳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이로써 장군을 도우는 듯합니다. 익주益州(사천四川)는 험한 요새이고 비옥한 들이 1,000리이니, 천부天府(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한 지역)의 땅입니다.
諸葛亮이 天下三分의 계책을 말하다諸葛亮이 天下三分의 계책을 말하다
劉璋 闇弱하고 張魯在北하여 民殷國富而不知存恤하니 知能之士 思得明君이니이다
그런데 익주목益州牧유장劉璋은 우매하고 나약하며, 장로張魯는 북쪽에 있는데 백성들이 많고 나라가 부유하나 장로는 백성들을 구휼할 줄을 알지 못하니, 지혜와 능력이 있는 선비들이 현명한 군주를 얻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將軍 旣帝室之冑 信義著於四海注+冑, 裔也.하니 若跨有荆, 益하여 保其巖阻注+巖, 險也.하여 西和諸戎하고 南撫夷越하며
장군將軍은 본래 황실의 후손이고 신의信義사해四海에 드러났으니注+는 후예이다., 만약 형주荆州익주益州를 점거하여 그 험한 곳을 지키면서注+은 험함이다. 서쪽으로 여러 융족戎族들과 화합하고 남쪽으로 을 어루만지며,
外結孫權하고 内修政理하여 天下有變이면 則命一上將하여 將荆州之軍하여 以向宛, 洛하고
밖으로 손권孫權과 결탁하고 안으로 정치를 닦으면서 천하에 변고가 있으면 한 명의 상장군上將軍에게 명하여 형주荆州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완현宛縣낙양洛陽으로 향하게 하고,
將軍 身率益州之衆하여 出於秦川이면 百姓 孰敢不簞食壺漿으로 以迎將軍者乎注+宛, 南陽宛縣. 洛, 謂洛陽. 秦地四塞以爲固, 渭水貫其中, 渭川左右, 沃壤千里. 世謂之秦川.리오
장군將軍은 몸소 익주益州의 병력을 거느리고서 진천秦川으로 진출하시면, 백성 중에 어느 누가 감히 대그릇의 밥과 병의 음료를 가지고 와서 장군將軍을 맞이하지 않는 자가 있겠습니까.注+남양南陽완현宛縣이고 낙양洛陽을 이른다. 나라 땅은 사방이 요새로 되어 있어 견고하고 위수渭水가 그 가운데를 관통하는데, 위천渭川의 좌우에 비옥한 토지가 1,000리가 되니, 세상에서는 이곳을 진천秦川이라 한다.
誠如是인댄 則霸業 可成이요 漢室 可興矣리이다 備曰 善하다
진실로 이와 같이 되면, 패업霸業을 이룰 수 있고 나라를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가 “좋다.” 하였다.
於是 與亮情好日密하니 關羽, 張飛不悦이어늘 備解之曰 孤之有孔明 猶魚之有水也 願諸君 勿復言하라하니 羽, 飛乃止하다
】 이에 유비劉備제갈량諸葛亮이 날로 친밀해지니, 관우關羽장비張飛가 좋아하지 않았다. 유비가 이들을 이해시키기를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니, 그대들은 다시 말하지 말라.” 하니, 관우와 장비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徽清雅하여 有知人之鑑이러니 同縣龐德公 素有重名이라 徽兄事之하고 毎至其家 獨拜牀下하니 德公 初不令止러라
사마휘司馬徽는 인품이 깨끗하고 고상하여 인물을 알아보는 조감藻鑑(안목)이 있었는데, 같은 사람인 방덕공龐德公이 평소 높은 명망이 있었다. 사마휘는 그를 형으로 섬겼고 제갈량은 매번 그의 집에 갈 때마다 홀로 아래에서 절하였는데, 방덕공은 처음부터 만류하지 않았다.
龐德公龐德公
士元 名統이니 德公從子也 少樸鈍하여 未有識者로되 唯德公與徽 重之注+樸, 素也. 鈍, 不利也.러라
사원士元은 이름이 이니 방덕공의 조카인데, 어려서 질박하고 노둔하여 알아주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방덕공과 사마휘가 그를 소중히 여겼다.注+(질박함)요, 은 예리(영리)하지 못함이다.
德公 常謂孔明爲卧龍하고 士元爲鳳雛하고 德操爲水鑑이라 德操與備語而稱之注+德操, 徽字.하니라
방덕공은 항상 공명孔明와룡卧龍이라 하고 사원士元봉추鳳雛라 하고 덕조德操(사마휘司馬徽)를 수감水鑑(물처럼 사물을 맑게 비추는 거울)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사마휘가 유비劉備와 더불어 말할 적에 그들을 와룡과 봉추라고 한 것이다.注+덕조德操사마휘司馬徽이다.
역주
역주1 曹操封功臣 爲列侯 : “功臣은 누구인가. 袁氏를 멸망시킨 자들이다. 袁氏를 멸망시킨 자들이면 列侯로 봉하는 것이 당연한데, 어찌하여 曹操가 봉했다고 썼는가. 조조가 원씨를 멸망시킨 것은 漢나라를 위한 것이 아니니, 공신 또한 조조에게 공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조조를 앞에 놓은 것이다. 이 때문에 〈孫權에게〉 인질을 요구했을 적에 ‘조조가 요구하였다.’고 썼고 功臣을 봉할 적에 ‘조조가 봉하였다.’고 썼으니, 漢나라를 위한 것이 아님을 말한 것이다.[功臣 何 滅袁氏者也 滅袁氏者也 則其封侯 宜矣 曷爲以曹操書 操之滅袁氏 非爲漢也 則功臣亦有功於操而已矣 故以曹操冠之 是故責任子 書曹操責 封功臣 書曹操封 言非爲漢也]다” ≪書法≫
역주2 (瘣)[廆] : 저본에는 ‘瘣’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廆’로 바로잡았다.
역주3 慕容廆 : 晉나라 때 前燕의 始祖이다. 鮮卑族으로 字가 奕洛瑰(혁락괴)인데 영웅호걸의 자질이 있었다. 匈奴族의 침략으로 西晉이 망하자, 元帝인 司馬睿가 長江을 건너오니, 모용외는 劉琨과 함께 表文을 올려 帝位에 오를 것을 권하고 遼東公에 봉해졌는데, 얼마 후 鮮卑大單于라 스스로 칭하고 49년 동안 재위하였다. 아들 慕容皝이 즉위하여 國號를 燕이라 하니, 이것이 前燕이다.
역주4 劉公을……해서 : 劉公은 劉虞을 가리킨다. 유우는 宗室의 賢俊으로 幽州牧이 되었는데 유주 지방을 잘 다스려 大司馬와 太傅를 겸하였다. 公孫瓚과 함께 黃巾賊을 토벌하였으나 서로 不和하여 결국 공손찬의 공격을 받고 죽었다. 유우는 일찍이 右北平 사람 田疇를 長安에 보내 글을 올리게 하였는데, 전주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니 유우가 이미 죽었다. 그러므로 유우의 묘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황제로부터 받아온 글을 진열하여 復命한 다음 통곡하고 떠나가서 徐無山에 들어가 복수할 것을 도모하였는바, 본서 101쪽에 보인다.
역주5 12방위 : 12辰은 고대 중국의 천문학에서 天球를 12개로 등분하던 방법으로, 28宿와 일정한 대응 관계에 놓여 있다. 한 해에 태양과 달은 열두 번 만나는데, 태양과 달이 만나는 지점을 ‘辰’이라고 하며 地支를 가지고 표시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역주6 吳氏病篤……屬以後事而卒 : “孫權의 어머니를 어찌하여 썼는가. 어짊을 기록한 것이다.[孫權母 何以書 錄賢也]” ≪書法≫
역주7 劉備見諸葛亮於隆中 : “이는 특별히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들어와서 賢者를 만나보았다고 쓴 적이 없는데 이때에 특별히 썼으니, 〈諸葛亮과 그를 찾아간 劉備를〉 모두 인정한 것이다. 유비의 기업이 隆中에서 정해졌으니,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현자를 보았다고 쓴 것이 1번뿐이다.[特筆也 入綱目 未有書見賢者 於是特書 交予之也 備之業定於隆中 終綱目 書見賢一而已]” ≪書法≫ “三代가 衰하고 王政이 폐해짐으로부터 선비들 중에 세상을 따라 功名을 성취한 자가 많았다. 漢나라 말기를 당하여 群雄들이 구름처럼 일어나자 무릇 한 가지 지혜와 한 가지 재능이 있는 선비들이 모두 때를 타고 분발하여 자신을 드러내기를 바랐다. 孔明과 같은 한 시대의 人龍(준걸)이 바야흐로 隆中에 은거하여 무릎을 안고 앉아 길게 읊조리면서 당세에 조금도 뜻이 없고, 또 管仲과 樂毅로써 자신을 허여하는 자인 줄을 그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만일 昭烈(유비)이 삼고초려한 간곡한 정성을 보이지 않았다면 그는 장차 바위 동굴에서 말라죽어 초목과 더불어 썩어 없어졌을 것이다. 그가 한 번 세상에 나옴에 미쳐서는 功名과 事業이 찬란하게 드러나서 泯没될 수가 없었으니, 제갈량이 어찌 큰 소리만 치고 부합함이 없는 자이겠는가. 저 제갈량은 이치를 선택함이 매우 정밀하고 처신함이 매우 밝아서 자기 몸을 굽히고는 남을 곧게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구차히 영합하여 쓰이기를 구하지 않았고, 옳지 않은 곳에 몸을 의탁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참람하고 도둑질하는 자에게 구차히 벼슬하려 하지 않아서, 만일 때를 만나지 못하면 丘園(초야)에서 은둔하고, 道가 만일 행해질 수 있으면 事業에 뜻을 분발하였다. 그리하여 군주와 신하가 의기투합함에 마치 물고기와 물이 서로 기뻐하듯 하였으니, 大義를 天下에 밝혀서 쇠약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이어서 正統을 도와 붙들려는 뜻이 해와 별처럼 밝았다. 그런 뒤에야 찬탈하고 도둑질한 무리들이 그들의 죄가 비로소 천하에 드러나서 가릴 수가 없게 되었으니, 이 어찌 區區하게 세상을 따라 功名을 이루려는 한 가지 지혜와 한 가지 재능이 있는 선비와 동일선상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유비가 제갈량을 隆中에서 만나보았다.’라고 썼으니, 이는 成湯이 莘野에서 伊尹을 초빙하고 文王이 渭濱으로 姜太公을 방문한 것과 천 년이 지났어도 마치 한 자취에서 나온 것처럼 똑같다. 아! 누가 三代 이후에 출처의 바름이 공명과 같은 자가 있을 줄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군자가 이것을 표출하지 않았다면 공명 또한 後世의 人物이 되고 말았을 것이니, 아! 슬프다.[自三代衰 王政廢 士之隨世就功名者多矣 當漢之末 群雄雲擾 凡一智一能之士 莫不乘時奮發 蘄以自見(현) 孰謂一世人龍如孔明者 方且高臥隆中 抱膝長吟 略無意於當世 而又以管樂自許者哉 向使昭烈不垂三顧之勤 則將槁死岩穴 與草木俱腐耳 及其一起 則功名事業 彪炳顯著 不可得而泯没 亮豈大言無當者 彼其擇理甚精 而處己甚明 謂枉己不可以直人也 故不苟合以求售 謂托身不可以非所也 故不肯苟仕於僭竊 時乎未遇 則高蹈丘園 道苟可行 則奮志事業 君臣旣合 魚水相懽 則聲大義於天下 使興衰繼絶 翊扶正統之志 昭如日星 然後簒竊之徒 其罪始暴白而不可掩 是豈區區一智一能之士隨世就功名者 可同日語哉 書劉備見諸葛亮於隆中 其與聘莘野訪渭濱者 越千載如出一轍 嗚呼 三代而下 孰謂出處之正 有如孔明者哉 不有君子表而出之 則孔明亦後世人物耳 噫]” ≪發明≫
역주8 管仲과 樂毅 : 管仲은 춘추시대 齊나라의 名相으로 이름이 夷吾이고 仲은 字인데 字로 행세하였다. 桓公을 도와 富國强兵을 이룩하고 환공을 霸者로 만들었는바, 저서로 ≪管子≫가 있다. 樂毅는 전국시대 燕나라의 名將으로 昭王에게 重用되고 齊나라에 대한 복수전을 전개하여 齊나라의 72개 城邑을 함락하였다. 그러나 昭王이 죽은 뒤에 즉위한 惠王이 齊나라의 反間 술책에 넘어가 騎劫을 대장군으로 삼고 악의를 소환하였다. 악의는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趙나라로 달아났는데, 끝까지 신의를 지켜 燕나라를 공격하지 않았다.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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