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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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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十二年이라
秦太初二 燕建興二 後秦建初二 魏登國二年이라
春正月 以朱序爲青兗刺史하여 鎭淮陰하고 謝玄爲會稽内史하다
◑ 燕 寇東阿하여 陷之하다
濟北太守溫詳 屯東阿注+① 初燕太子洗馬溫詳來奔, 以爲濟北太守, 屯東阿.러니 燕主垂 觀兵河上하여 分兵擊之注+② 觀, 古玩切.어늘 詳奔彭城한대 其衆皆降하니
垂以太原王楷 爲兗州刺史하여 鎭之하다
垂在長安 秦主堅 嘗與之交手語러니 冗從僕射光祚 言於堅曰注+① 漢制, 中宮冗從僕射, 宦者爲之, 主黃門. 冗從, 秩六百石. 陛下頗疑慕容垂乎잇가 非久爲人下者니이다
及燕取鄴 祚奔晉하니 晉以爲河北郡守러니 至是 詣燕軍降이어늘
垂見之하고 流涕曰 秦主待我深하고 吾事之亦盡이로되 但爲公猜忌하여 懼死而負之하니 每一念之 中宵不寐로라 祚亦悲慟하다
垂賜祚金帛한대 祚辭어늘 垂曰 卿復疑邪
祚曰 臣 昔者 惟知忠於所事러니 不意陛下 至今懐之 臣敢逃死리잇가
垂曰 此卿之忠이니 固吾之所求也 前言 戲之耳라하고 待之彌厚러라
封符纂爲魯王하다
自長安奔晉陽하고 襄陵之敗 奔杏城이러니 至是 秦主登 遣使하여 拜纂爲大司馬하여 封魯王한대
怒曰 渤海王 先帝之子 南安王 何以不立而自立乎
長史王旅諫曰 南安王已立하니 理無中改 今寇虜未滅하니 不可宗室中自爲仇敵也니라 纂乃受命하다
於是 盧水胡, 彭沛穀, 新平羌, 雷惡地等 皆附於纂하니 有衆十餘萬注+① 以登․纂連兵, 聲勢浸盛, 故相與歸之.이러라
擊張願破之하고 以慕容紹爲青州刺史하여 守歴城하다
青, 兗, 徐州郡縣壁壘 多降於燕이라 垂以陳留王紹 爲青州刺史하여 鎭歴城注+① 歷城縣, 自漢以來, 屬濟南郡.하다
夏四月 尊帝母李氏하여 爲皇太妃하다
〇 燕慕容柔等 自長子 歸于燕하다
燕主垂之子柔及孫盛, 會 皆在長子注+① 會, 盛之弟也.러니
謂柔, 會曰 主上中興 東西未壹注+② 主上, 謂燕主垂. 東, 謂燕主垂, 西, 謂燕主永.하니 吾屬 居嫌疑之地하여 爲智爲愚 皆將不免이니 不若以時東歸하여 無爲坐待魚肉也라하고 遂相與亡歸하다
垂問長子人情如何한대 盛曰 西軍擾擾하여 人有東歸之志하니 若大軍一臨이면 必投戈而來하여 若孝子之歸慈父也리이다
後歲餘 西燕 殺垂子孫하여 無遺者러라
五月 使其太原王楷 擊翟遼降之하다
高平人翟暢 執太守하여 以郡降遼어늘 燕主垂曰 遼以一城之衆으로 反覆二國之間하니 不可不討注+① 二國, 通鑑作三國. 三國, 謂晉及燕․西燕.라하고 乃帥諸將하여 南攻遼할새 以太原王楷 爲前鋒하니
遼衆 皆燕趙人이라 聞楷至하고 曰 太原王子 吾之父母也注+② 楷父恪相燕, 燕․趙之人懷之, 故云然.라하고 相帥歸之하니 遼懼하여 遣使請降하다
徵處士戴逵하니 不至하다
詔徵會稽處士戴逵注+① 逵, 逯之兄也.한대 逵累辭不就하니 郡縣 敦逼不已어늘
逵逃匿于呉하니 内史謝玄 上疏曰 逵自求其志注+② 論語 “隱居以求其志.”어늘 今王命未回하시니 將罹風霜之患이라 陛下旣已愛而器之하시니 宜使其身名竝存이니 請絶召命하노이다 帝許之注+③ 玄爲會稽內史, 故爲逵上疏.하다
秋七月 西秦 擊鮮卑三部하여 降之注+① 三部, 謂密貴爲一部, 裕苟爲一部, 提倫爲一部.하다
◑ 後秦主萇 軍陰密하고 以太子興으로 守長安하다
◑ 魏王珪 以燕師擊劉顯하여 大破之하니 奔西燕하다
劉顯 地廣兵彊하여 雄於北方이러니 其兄弟乖争하니 魏張袞 言於魏王珪曰 顯 志在幷吞하니 今不乘其内潰而取之 必爲後患이니 請與燕攻之注+① 顯族人奴眞及弟肺相繼來降. 故云內潰.하노이다
珪乃遣使하여 乞師於燕이러니 柔然 獻馬於燕 而顯掠之注+② 柔然, 夷狄國名, 姓郁久閭氏. 始元魏神元之末, 掠騎得一奴, 髮始齊眉. 忘本姓名, 其主字之曰木骨閭, 木骨閭者, 首禿也. 木骨閭與郁久閭聲相近. 故後因以爲氏. 至其子車鹿會, 雄健始有部衆, 自號柔然, 魏太武帝以其無知, 狀類於蟲. 故改其號曰蠕蠕也. 蠕, 乳兗切, 蠕蠕, 動貌.하니 燕主垂怒하여 遣兵會魏擊顯하여 大破之하다
顯奔西燕이어늘 垂立其弟하여 爲烏桓王하여 以撫其衆하고 徙八千餘落於中山하다
呂光 殺張大豫하다
◑ 八月 立子德宗하여 爲皇太子하다
◑ 秦符師奴 殺其兄纂이어늘 後秦 擊走之而降其衆하다
秦馮翊太守蘭櫝 帥衆二萬하여 與魯王纂으로 謀攻長安이러니 纂弟師奴 勸纂稱尊號어늘 纂不從하니 師奴殺而代之
遂與師奴絶이러니 後秦攻之한대 師奴敗走하니 其衆悉降하다
秦主登 進據將軍胡空堡注+① 堡, 在新平界.하다
戎夏歸之者 十餘萬이러라
冬十月 翟遼復叛燕하다
◑ 十二月 後秦 攻秦하여 拔將軍徐嵩壘하니 死之하다
後秦姚方成 拔嵩壘하고 執而數之한대 罵曰
汝姚萇 罪當萬死어늘 先帝赦之하여 授任内外하시니 榮寵極矣 曾不如犬馬識所養之恩하여 親爲大逆注+① 謂殺秦王堅也.하니 汝羌輩 豈可以人理期也리오 何不速殺我하여 早見先帝하여 取萇於地下治之
方成怒하여 三斬嵩하고 悉坑其士卒注+② 三斬者, 斬其足, 斬其腰, 斬其頸也.하다 掘秦主堅尸하여 鞭撻剝裸하여 薦之以棘하고 坎土而埋之注+③ 堅葬於徐嵩․胡空二壘之間, 徐嵩之壘旣陷. 故萇得掘墓鞭尸, 以逞其忿. 剝裸, 謂剝衣倮形也. 薦, 藉也.하다
涼州大饑하여 하다


【綱】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12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登 太初 2년이고, 燕나라(後燕) 世祖 慕容垂 建興 2년이고, 後秦 太祖 姚萇 建初 2년이고, 魏나라(北魏) 太祖 道武帝 拓跋珪 登國 2년이다.
【綱】 봄 정월에 晉나라(東晉)가 朱序를 青州와 兗州의 刺史로 삼아 淮陰에 진주시키고 謝玄을 會稽内史로 삼았다.
【綱】 燕나라(後燕)가 東阿를 침략하여 함락하였다.
【目】 〈晉나라(東晉)〉 濟北太守 溫詳이 東阿에 주둔하였는데,注+① 처음에 燕나라 太子洗馬 溫詳이 달아나 晉나라로 오자, 晉나라에서 그를 濟北太守로 삼아 東阿에 주둔시켰다. 燕主 慕容垂가 河上에서 군대를 열병하여 무용을 보여주고 군대를 나누어 공격하자,注+② 觀(보여주다)은 古玩의 切이다. 온상이 彭城으로 달아나니, 그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다.
모용수는 太原王 慕容楷를 兗州刺史로 삼아서 이곳에 진주하게 하였다.
【目】 처음에 慕容垂가 長安에 있을 적에 秦主 符堅이 일찍이 모용수와 손을 잡고 말하였는데, 冗從僕射 光祚가 부견에게 말하기를注+① 漢나라 제도에 中宮冗從僕射는 환관이 하였으니, 黃門을 주관하였다. 冗從은 秩이 六百石이다. “폐하께서는 자못 모용수를 의심하십니까. 모용수는 오랫동안 남의 아래에 있을 자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燕나라(後燕)가 鄴城을 점령하자 광조가 晉나라(東晉)로 달아나니, 晉나라에서는 그를 河北郡守로 삼았는데, 이때 연나라 軍中에 와서 항복하였다.
모용수는 그를 만나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秦主(부견)가 나를 깊이 우대하고 나 역시 秦主를 극진히 섬겼는데, 다만 두 公에게 시기를 받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秦主를 저버렸으니, 매번 늘 이것을 생각할 때마다 한밤중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이에 광조 또한 비통해하였다.
【目】 慕容垂가 光祚에게 금과 비단을 하사하자, 광조가 사양하였다. 모용수가 말하기를 “경이 다시 나를 의심하는가?” 하자,
광조가 말하기를 “신이 옛날에는 오직 내가 섬기던 분에게 충성할 줄만 알았는데, 뜻밖에 폐하께서 이제 〈제가 符堅에게 충성한 것에〉 유감을 갖고 계시니, 신이 감히 죽음을 피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모용수가 말하기를 “이는 경의 충성이니 진실로 내가 바라는 바이다. 앞서 한 말은 농담이다.”라고 하고는 더욱 후대하였다.
【綱】 秦나라(前秦)가 符纂을 봉하여 魯王으로 삼았다.
【目】 처음에 符纂이 長安에서 晉陽으로 달아났고, 襄陵의 전투에서 패하여 杏城으로 달아났는데, 이때에 秦主 符登이 사자를 보내어 부찬을 大司馬로 삼아서 魯王에 봉하자,
부찬이 성을 내며 말하기를 “渤海王(符懿)은 先帝의 아들이다. 南安王(符登)이 어찌하여 발해왕을 세우지 않고 스스로 즉위한 것인가.”라고 하였다.
長史 王旅가 간하기를 “남안왕이 이미 즉위하였으니, 중간에 바뀔 리는 만무합니다. 지금 오랑캐가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니, 宗室 안에서 스스로 원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부찬이 마침내 명을 받았다.
이에 盧水胡, 彭沛穀, 新平羌, 雷惡地 등이 모두 부찬에게 붙으니, 십여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게 되었다.注+① 〈盧水胡 등이 符纂에 귀의한 것은〉 符登과 符纂이 군대를 연합하여 聲勢가 점점 성하였으므로 서로 함께 귀의한 것이다.
【綱】 燕나라(後燕)가 을 공격하여 격파하고 慕容紹를 青州刺史로 삼아 歴城을 지키게 하였다.
【目】 青州, 兗州, 徐州의 郡縣에 있는 壁壘들이 대부분 燕나라에 항복하였다. 慕容垂가 陳留王 慕容紹를 青州刺史로 삼아서 歴城을 진주하게 하였다.注+① 歷城縣은 漢나라 이래로 濟南郡에 속하였다.
【綱】 여름 4월에 〈晉나라(東晉)가〉 황제(晉 孝武帝)의 모친 李氏를 높여 皇太妃라 하였다.
【綱】 燕나라 사람 慕容柔 등이 長子(西燕의 도읍)에서 燕나라(後燕)로 돌아갔다.
【目】 燕主 慕容垂의 아들 慕容柔와 및 손자 慕容盛, 慕容會가 모두 長子에 있었는데,注+① 慕容會는 慕容盛의 아우이다.
모용성이 모용유와 모용회에게 이르기를 “主上(모용수)이 중흥하심에 동쪽과 서쪽이 아직 통일되지 못했으니,注+② 主上은 燕主(後燕) 慕容垂를 말한다. 東은 燕主 모용수를 이르고 西는 燕主(西燕) 慕容永을 이른다. 우리들은 혐의스러운 처지에 있어서 지혜롭게 처신하든 어리석게 처신하든 모두 장차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다. 상황을 보아 동쪽으로 돌아가서 가만히 앉아 남이 죽여주기를 기다리지 않게 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함께 도망하여 돌아갔다.
모용수가 長子의 민심이 어떠한지 묻자, 모용성이 대답하기를 “西燕의 군대가 혼란해서 사람마다 동쪽으로 돌아갈 뜻이 있으니, 만약 대군이 한 번 왕림하면 반드시 창을 던지고 오기를 효자가 사랑하는 아버지에게 의지하는 것처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 1년 뒤에 西燕이 모용수의 자손을 죽여서 남은 자가 없었다.
【綱】 5월에 燕나라(後燕)가 太原王 慕容楷로 하여금 翟遼를 공격하게 하여 항복시켰다.
【目】 高平 사람 翟暢이 太守를 사로잡고서 高平郡을 가지고 翟遼에게 항복하자, 燕主 慕容垂가 말하기를 “적요가 한 城의 무리를 가지고 두 나라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注+① 두 나라는 ≪資治通鑑≫에는 세 나라로 되어 있으니, 세 나라는 晉나라(東晉), 燕나라(後燕), 西燕을 이른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여러 장수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적요를 공격할 적에 太原王 慕容楷를 선봉으로 삼았다.
적요의 병사가 모두 燕과 趙 지방의 사람이어서 그들이 모용해가 왔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태원왕(慕容恪)의 아드님은 우리의 부모이시다.”라고 하고注+② 慕容楷의 아버지 慕容恪이 燕나라(前燕)의 정승이었으니, 燕․趙 지방의 사람들이 그를 그리워하였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서로 무리를 거느리고 귀의하니, 적요가 두려워하여 사자를 보내어 항복할 것을 청하였다.
【綱】 晉나라(東晉)가 處士 戴逵를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目】 조명을 내려 會稽의 處士 戴逵를 불렀는데,注+① 戴逵는 戴逯의 형이다. 대규가 여러 번 사양하고 나오지 않으니, 군현에서는 계속하여 압박하였다.
戴逵戴逵
대규가 呉로 도망하여 숨으니, 内史 謝玄이 상소하기를 “대규가 스스로 자신 뜻을 추구하는데注+② ≪論語≫ 〈季氏〉에 “은거하면서 그 뜻을 구한다.”라고 하였다. 지금 왕명을 회수하지 않으시니, 장차 곤란한 근심에 빠질 것입니다. 폐하께서 이미 그를 아끼고 소중히 여기시니, 마땅히 그의 몸과 이름이 함께 보존되어야 합니다. 부르는 명을 거두어주소서.”라고 하니, 황제(晉 孝武帝)가 이를 허락하였다.注+③ 謝玄이 會稽內史가 되었으므로 戴逵를 위하여 상소한 것이다.
【綱】 가을 7월에 西秦이 鮮卑族의 세 部를 공격하여 항복시켰다.注+① 〈鮮卑族의〉 세 部는 密貴部, 裕苟部, 提倫部이다.
【綱】 後秦主 姚萇이 陰密에 군대를 주둔하고, 太子 姚興으로 長安을 지키게 하였다.
【綱】 魏王(北魏) 拓跋珪가 燕나라(後燕) 군대를 거느리고 〈匈奴族〉 劉顯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유현이 西燕으로 달아났다.
【目】 劉顯은 땅이 넓고 군대가 강하여 북방에 군림하였다. 마침 형제 사이에 틈이 벌어져 다투었는데, 魏나라 張袞이 魏王 拓跋珪에게 말하기를 “유현은 병탄에 뜻을 두고 있으니, 지금 내분이 있을 때를 틈타서 정벌하지 않으면 반드시 후일의 근심이 될 것입니다. 燕나라와 연합하여 공격하소서.”라고 하였다.注+① 劉顯의 族人인 劉奴眞과 아우 劉肺埿가 서로 계속하여 항복해왔으므로 ‘內潰(내분이 있다)’라고 한 것이다.
탁발규가 마침내 연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군대를 청하였다. 때마침 柔然이 연나라에 말을 바쳤는데 유현이 이를 약탈하니,注+② 柔然은 夷狄의 국명이니, 姓은 郁久閭氏이다. 처음 元魏(北魏) 神元帝(174~277, 拓跋力微) 말년에 기병을 노략질하여 한 종을 사로잡으니, 머리가 벗겨져 눈썹에 이르렀다. 본래의 성명은 잃어버렸고 그의 주인이 木骨閭라고 字를 지어주었으니, 목골려는 머리가 벗어졌다는 뜻이다. 목골려는 郁久閭와 발음이 서로 비슷하므로 뒤에 인하여 氏로 삼았다. 그 아들 車鹿會에 이르러 强健하여 힘이 있어 처음으로 部의 무리를 소유하고 스스로 柔然이라고 칭하였는데, 北魏 太武帝가 그들이 무지하여 모양이 벌레와 같다 하여 그 칭호를 고쳐 蠕蠕(연연)이라 하였다. 蠕은 乳袞의 切이니, 蠕蠕은 벌레가 움직이는 모양이다. 燕主 慕容垂가 노하여 군대를 보내 魏나라 군대와 함께 유현을 공격해서 대파하였다.
유현이 西燕으로 달아나자, 모용수가 그의 아우를 세워 烏桓王으로 삼아서 그 무리를 어루만지게 하고 8천여 부락을 中山으로 옮겼다.
【綱】 〈後涼의〉 呂光이 張大豫를 죽였다.
【綱】 8월에 〈晉나라가 孝武帝의〉 아들 德宗을 세워 皇太子로 삼았다.
【綱】 秦나라(前秦) 符師奴가 그의 형 符纂을 죽이자 後秦이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그 무리들을 항복시켰다.
【目】 秦나라 馮翊太守 蘭櫝이 2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서 魯王 符纂과 함께 長安을 공격할 것을 도모하였다. 부찬의 아우 符師奴가 존호를 칭할 것을 부찬에게 권하였으나 부찬이 따르지 않으니, 부사노가 그를 죽이고 대신하였다.
난독이 마침내 부사노와 절교하니, 後秦이 공격하였다. 부사노가 패주하니 그 무리가 마침내 항복하였다.
【綱】 秦主 符登이 전진하여 將軍 胡空의 보루를 점거하였다.注+① 보루는 新平의 경계에 있었다.
【目】 戎族과 夏族이 귀의한 자가 십여만 명이었다.
【綱】 겨울 10월에 〈丁零의〉 翟遼가 다시 燕나라(後燕)를 배반하였다.
【綱】 12월에 後秦이 秦나라(前秦)를 공격하여 將軍 徐嵩의 보루를 함락하니 서숭이 전사하였다.
【目】 後秦의 姚方成이 徐嵩의 보루를 함락하고 그를 사로잡아 책망하자, 서숭이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 姚萇은 만 번 죽어야 할 죄를 지었으나 先帝(符堅)께서 용서하여 내외의 직임을 맡기셨으니, 영화와 은총이 지극하였다. 일찍이 자기를 길러준 은혜를 아는 개와 말만도 못하여 친히 대역무도한 죄를 저질렀으니,注+① 〈‘親爲大逆’은 姚萇이〉 秦王 符堅을 죽인 것을 말한다. 너희 羌族에게 어찌 사람의 도리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빨리 나를 죽여서 내 일찍 지하에 가서 선제를 만나 뵙고, 지하에서 요장을 잡아다가 죄를 다스리게 하지 않는가.”
요방성이 노하여 세 번 서숭을 베고 그의 병사들을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注+② 세 번 베었다는 것은 발, 허리, 목을 벤 것이다. 요장은 秦主 부견의 시신을 꺼내어 채찍질을 하고 옷을 벗겨 나체로 만들어서 가시나무로 싸고 땅을 파고 묻었다.注+③ 符堅을 徐嵩과 胡空의 두 보루 사이에 장례하였는데, 서숭의 보루가 이미 함락되었으므로 姚萇이 묘를 파내고 시신을 채찍질하여 그 분풀이를 한 것이다. ‘剝裸’는 옷을 벗겨 형체를 나체로 만든 것이다. 薦은 깖이다.
【綱】 涼州 지방에 큰 기근이 들어서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


역주
역주1 [二] : 저본에는 ‘二’가 없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자치통감≫ 註에 “二公은 長樂公 符丕와 平原公 符暉를 이른다.”라고 하였다.
역주2 張願 : 원래 東晉의 泰山太守로 太元 11년(386)에 동진을 배반하고 丁零인 翟遼에게 항복하였다.
역주3 (泥)[埿] : 저본에는 ‘泥’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埿’로 바로잡았다.
역주4 人相食 : “≪資治通鑑綱目≫에서 사람이 서로 잡아먹었다고 쓴 것이 10번이니,(漢나라 병신년(B.C. 205)에 자세히 보인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쓴 적이 없다.[綱目書人相食十(詳漢丙申年) 舍是無書者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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