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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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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九年이라
秦主符崇延初元이요 燕建興九 後秦主姚興皇初元이요 魏登國九年이라
◑ 是歲 秦及西燕 亡하니 大三이라 小二하여 凡五僭國이라
春正月 三河王光 以秃髪烏孤 爲河西都統하다
烏孤 本鮮卑别種이라 與拓跋同祖러니 後徙河西하다 烏孤雄勇有大志하여 與大將紛陁 謀取涼州注+① 紛, 蓋夷姓. 謀取涼州, 欲幷呂光也.러니
紛陁曰 公必欲得涼州인댄 宜先務農講武하고 禮賢修政然後 可也라하니 烏孤從之하다
呂光 遣使하여 拜烏孤鮮卑大都統하니 群下皆曰 吾士馬衆多 何爲屬人이리잇고
石眞若留曰注+① 石眞, 蓋亦夷姓. 吾根本未固하여 大小非敵이니 不如受以驕之하여 俟釁而動이니이다 烏孤乃受之하다
夏四月 秦主登 及後秦戰하여 敗績하고 奔平涼하다
秦主登 聞後秦主萇死하고 喜曰 姚興小兒 吾折杖笞之耳라하고 乃留安成王廣守雍하고 太子崇守胡空堡하고 盡衆而東注+① 廣, 登之弟也.하다
後秦太子興 使尹緯 據廢橋以待之러니 秦兵 爭水不得하여 渴死什二三이라
緯與戰大敗之하니 其衆夜潰어늘 登單騎奔雍한대 崇廣 皆棄城走 登奔平涼하여 收遺衆하여 入馬毛山注+② 馬毛山, 蓋平涼之險要處也.하다
五月 西燕主永 及燕戰하여 敗績하다
燕主垂 以二月 部分諸將하여 出壺關滏口沙하여 以擊西燕할새 標榜所趣하여 軍各就頓注+① 滏, 音釜, 水名, 在鄴. 庭, 當作亭, 其地在鄴西南. 標, 卑遙切. 燕主垂時分道進軍, 攻西燕, 故立標揭榜, 分示諸軍所趣之路. 頓者, 軍行頓舍之地. 軍各就頓, 謂分處置兵以疑敵, 使不知所備.하다
西燕主永 聞之하고 分道拒守하여 聚糧臺壁하고 遣兵戍之注+② 水經註 “潞縣北對故臺壁, 漳水出其南, 本潞子所立也.”러니
旣而 垂頓軍鄴西南하여 月餘不進하니 疑垂欲詭道由太行入하여 乃悉斂諸軍하여 杜太行口하고 惟留臺壁一軍이러라
四月 垂引大軍하고 出滏口하여 入天井關하여 五月 至臺壁破之注+① 胡三省曰 “今澤州晉城縣, 有太行關, 關內有天井泉三所, 卽天井關也.”하다 召太行軍還하여 自將拒之어늘
垂陳于臺壁南하여 遣千騎伏澗下注+② 陳, 讀曰陣.러니 及戰僞退하니 永衆追之어늘 澗中伏發하여 斷其後하고 諸軍 四面俱進하여 大破之하니 走歸長子하다
後秦主興하다
◑ 六月 追尊會稽太妃鄭氏하여 曰簡文宣太后라하다
群臣 或謂宣太后 應配食元帝라하니 太子前率徐邈曰 太后平素 不伉儷於先帝注+① 言非正妃. 伉, 苦浪切, 敵也. 儷, 力計切, 竝也.하시니 子孫 豈可爲祖考立配注+② 爲, 去聲.리오
國學明教臧燾曰注+③ 國學明敎之官, 當置於明帝․簡文時也. 尊號旣正이면 則罔極之情申하고 别建寢廟 則嚴禰之義顯하고 繫子爲稱이면 兼明貴之所由 一擧而允三義 不亦善乎注+④ 嚴, 尊也. 禰, 父廟也. 繫子爲稱, 簡文繫之宣太后之上也. 春秋傳曰 “母以子貴.”잇가 乃立廟於太廟路西하다
秋七月 後秦主興 擊秦主登하여 殺之하니 秦太子崇하여 奔湟中하다
◑ 八月 尊太妃李氏하여 爲皇太后하다
居崇訓宮하다
燕主垂 圍長子拔之하고 殺西燕主永하다
困急하여 求救於晉魏러니 兵皆未至 將士開門納燕兵하니 燕主垂 執永斬之하고 得所統八郡七萬餘戶하다
秦主崇 及隴西王楊定 攻西秦이라가 兵敗皆死하니 定弟盛 遣使來稱藩하다
西秦主乾歸 攻秦主崇하니 奔隴西王楊定한대 帥衆三萬하여 與崇共攻乾歸라가 大敗見殺하니 符氏遂亡이라 乾歸 於是 盡有隴西之地하여 自稱秦王하다
定叔父之子盛 先守仇池하여 自稱秦州刺史仇池公이러니 乃遣使稱藩于晉하니 分氐羌하여 爲二十部護軍하여 各爲鎭戍하고 不置郡縣하다
遣使如燕하다
是後 姚氏 止稱秦하다


【綱】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19년이다.
【目】 秦主(前秦) 符崇 延初 원년이고, 燕나라(後燕) 世祖 慕容垂 建興 9년이고, 後秦主 姚興 皇初 원년이고, 魏나라(北魏) 太祖 道武帝 拓跋珪 登國 9년이다.
이해에 秦나라(前秦)와 西燕이 망하니, 큰 나라(後燕, 後秦, 北魏)가 셋이고, 작은 나라(西秦, 後涼)가 둘이니, 합하여 僭國이 다섯이다.
【綱】 봄 정월에 三河王(後涼) 呂光이 秃髪烏孤를 河西都統으로 삼았다.
【目】 秃髪烏孤는 본래 鮮卑族의 别種이어서 拓跋氏와 조상이 같았는데, 뒤에 河西로 이주하였다. 독발오고가 雄大하고 용맹하며 큰 뜻을 품어서 大將 紛陁(분타)와 함께 涼州를 점령할 것을 모의하였다.注+① 紛은 아마도 오랑캐 姓일 것이다. 涼州를 점령할 것을 도모했다는 것은 呂光을 합병하고자 한 것이다.
분타가 말하기를 “公이 기필코 양주를 점령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농업을 힘쓰고 무예를 강습하며 현자를 예우하고 정사를 잘 닦은 뒤에야 가능하다.”라고 하니, 독발오고가 그 말을 따랐다.
【目】 呂光이 사자를 보내어서 秃髪烏孤를 鮮卑大都統으로 임명하니, 독발오고의 부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병사와 말이 많습니다. 어찌하여 남에게 소속됩니까.”라고 하자,
石眞若留가 말하기를注+① 石眞은 아마도 또한 오랑캐 성일 것이다. “우리는 근거지가 아직 견고하지 못하여 큰 나라이든 작은 나라이든 상대가 안 되니, 除授를 받아주어 저들을 교만하게 해서 틈이 있기를 기다려 움직이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독발오고가 마침내 그 말을 받아들였다.
【綱】 여름 4월에 秦主(前秦) 符登이 後秦과 싸워 크게 패하고 平涼으로 달아났다.
【目】 秦主 符登은 後秦主 姚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어린아이 姚興을 내가 회초리를 꺾어 볼기를 치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安成王 符廣에게 남아서 雍州를 지키게 하고 태자 符崇에게 胡空堡를 지키게 하고서 병력을 총동원하여 동쪽으로 출병하였다.注+① 符廣은 符登의 아우이다.
後秦의 태자 요흥이 尹緯로 하여금 廢橋를 점거하여 상대하게 하였는데, 秦나라 군대가 〈後秦의 군대와〉 물을 다투었지만 얻지 못하여 목말라 죽은 자가 열에 두서넛이었다.
윤위가 秦나라 군대와 싸워 크게 패배시키니, 그 무리가 밤을 틈타 달아나자 부등이 한 필의 말을 타고 雍州로 달아나니, 부숭과 부광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부등이 平涼으로 달아나 남은 무리를 거두어 馬毛山으로 들어갔다.注+② 馬毛山은 平涼의 험한 요새일 것이다.
【綱】 5월에 西燕主 慕容永이 燕나라(後燕)와 싸워서 크게 패하였다.
【目】 燕主 慕容垂가 2월에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고서 壺關과 滏口, 沙亭으로 출동하여 西燕을 공격할 적에 진격할 곳을 표시하여 군대마다 각각 주둔할 곳에 나아가게 하였다.注+① 滏는 음이 釜이니, 물 이름으로 鄴城에 있다. 庭은 마땅히 亭이 되어야 하니, 그 지역이 업성 서남쪽에 있다. 標(푯말)는 卑遙의 切이니, 燕主 慕容垂가 이때 길을 나누어 진군해서 西燕을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푯말을 세우고 榜文을 걸어두어 여러 군사들이 나아갈 길을 나누어 보여준 것이다. 頓은 행군하면서 머무는 지역이니, ‘軍各就頓’는 장소를 나누어 군대를 배치하여 적을 의심하게 해서 적군으로 하여금 대비할 방법을 모르게 한 것이다.
西燕主 慕容永은 이 말을 듣고 길을 나누어 막아 지켜서 군량을 臺壁에 모으고 병사를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注+② ≪水經註≫에 “潞縣의 북쪽을 마주한 곳에 옛 臺壁이 있는데, 漳水가 그 남쪽에서 발원하니, 이는 본래 가 세운 것이다.
이윽고 모용수가 鄴城 서남쪽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전진하지 않으니, 모용영은 모용수가 길을 속여 太行山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것이라 의심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모두 거두어 태항산의 입구를 막고 오직 臺壁에만 한 군대를 남겨두었다.
【目】 4월에 慕容垂가 대군을 이끌고 滏口로 출동하여 天井關에 들어가서 5월에 臺壁에 이르러 西燕의 군대를 격파하였다.注+① 胡三省이 말하였다. “지금 澤州 晉城縣에 太行關이 있고 태항관 안에 天井泉 세 곳이 있으니, 바로 天井關이다.” 慕容永은 太行山에 있던 군대를 불러 돌아오게 해서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燕나라(後燕) 군대를 막았다.
모용수가 臺壁 남쪽에 진을 치고 천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시내 아래에 매복하게 하였다.注+② 陳(진을 치다)은 陣으로 읽는다. 싸울 때에 미쳐 거짓으로 후퇴하니 모용영의 무리가 추격하였는데, 시냇 가운데에 매복했던 군대들이 일어나 후미를 끊고 여러 군대가 사방에서 함께 진격하여 서연의 군대를 대파하니, 모용영이 달아나 長子로 돌아갔다.
【綱】 後秦主 姚興이 즉위하였다.
【綱】 6월에 〈晉나라(東晉)가〉 會稽太妃 를 추존하여 簡文宣太后라 하였다.
【目】 신하들이 혹 말하기를 “宣太后를 마땅히 元帝에게 배향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니, 太子前率 徐邈이 말하기를 “太后가 평소 先帝에게 짝이 되지 못하였으니,注+① ‘不伉儷於先帝’는 正妃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伉은 苦浪의 切이니 대등함이요, 儷은 力計의 切이니 나란히 함이다. 자손이 어찌 祖考를 위하여 配位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國學明教 臧燾(장도)가 말하기를注+③ 國學明敎의 관직은 마땅히 明帝와 簡文帝 때에 설치했을 것이다. “존호가 바루어지고 나면 황제의 망극한 심정이 펴지고, 별도로 寢廟를 세우면 아버지(元帝) 사당을 높이는 의리가 드러나고, 아들(簡文帝)과 연관하여 칭호를 하면 태후가 귀해진 이유를 밝히게 됩니다. 일거에 세 가지 의리에 부합하니, 좋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注+④ 嚴은 높임이다. 禰는 아버지 사당이다. ‘繫子爲稱’은 ‘簡文’을 ‘宣太后’의 앞에 연결하여 〈簡文宣太后라 한〉 것이다. ≪春秋公羊傳≫에 라고 하였다. 이에 太廟의 길 서쪽에 태후의 사당을 세웠다.
【綱】 가을 7월에 後秦主 姚興이 秦主 符登을 공격하여 죽이니, 秦나라(前秦) 太子 符崇이 즉위하여 湟中으로 달아났다.
【綱】 8월에 〈晉나라(東晉)가〉 를 높여 皇太后라 하였다.
【目】 황태후는 崇訓宮에 거처하였다.
【綱】 燕主(後燕) 慕容垂가 長子를 포위하여 함락하고 西燕主 慕容永을 죽였다.
【目】 慕容永이 몹시 곤궁하여 晉나라(東晉)와 魏나라(北魏)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구원병이 모두 오기 전에 장병들이 성문을 열고 燕나라 군대를 받아들이니, 燕主 慕容垂가 모용영을 사로잡아 참수하고 그가 거느리고 있던 8개 郡의 7만여 호를 얻었다.
【綱】 겨울에 秦主 符崇과 隴西王 楊定이 西秦을 공격하다가 군대가 패하여 모두 전사하니, 양정의 아우 楊盛이 사신을 晉나라(東晉)에 보내어 와서 藩臣을 칭하였다.
【目】 西秦主 乞伏乾歸가 秦主 符崇을 공격하니, 부숭이 隴西王 楊定에게로 달아났다. 양정이 3만 병사를 인솔하고 부숭과 함께 걸복건귀를 공격하다가 대패하여 죽임을 당하니, 符氏가 마침내 망하였다. 걸복건귀가 이에 隴西 지역을 모두 차지하고서 스스로 秦王이라 칭하였다.
양정의 숙부의 아들 楊盛이 먼저 仇池를 지키면서 스스로 秦州刺史 仇池公이라 칭했는데, 마침내 사자를 晉나라에 보내어 번신을 칭하니, 晉나라에서는 氐族과 羌族을 나누어 20개 部의 護軍을 만들어서 각각 鎭戍로 삼고 郡縣을 설치하지 않았다.
【綱】 秦나라(後秦)가 燕나라(後燕)에 사신을 보내었다.
【目】 이후로 姚氏를 다만 秦이라고 칭하였다.


역주
역주1 (庭)[亭] : 저본에는 ‘庭’으로 되어 있으나, 아래 訓義에 의거하여 ‘亭’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 潞子 : 春秋時代의 인물로, 赤狄의 別種이다.(≪春秋左氏傳≫ 魯 宣公 15년 조)
역주3 鄭氏 : 晉 元帝의 후궁인 鄭阿春으로 晉 簡文帝의 생모이며 孝武帝의 祖母이다. 간문제가 즉위하여 1년도 안 돼서 죽자 추존하지 못하였다. 간문제의 아들 司馬道子에게 정아춘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사마도자가 會稽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會稽太妃라 한 것이다.
역주4 (下) : 저본에는 ‘下’가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衍字로 처리하였다.
역주5 어머니는……귀해진다 : 庶子가 지위를 계승한 경우 그 생모 또한 아들로 인하여 지위가 높아지는 것으로, ≪春秋公羊傳≫ 隱公 원년에 “桓公은 어찌하여 귀한가? 어머니의 신분이 귀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신분이 귀하면 자식은 어찌하여 귀해지는가? 자식은 어머니 덕분에 귀해지고 어머니는 자식 덕분에 귀해지는 것이다.[桓 何以貴 母貴也 母貴則子何以貴 子以母貴 母以子貴]”라고 보인다.
역주6 太妃 李氏 : 晉 簡文帝의 后妃 李陵容이다. 孝武帝의 생모로 孝武文皇太后이다.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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