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에 秦나라(前秦)와 西燕이 망하니, 큰 나라(後燕, 後秦, 北魏)가 셋이고, 작은 나라(西秦, 後涼)가 둘이니, 합하여 僭國이 다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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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봄 정월에 三河王(後涼) 呂光이 秃髪烏孤를 河西都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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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秃髪烏孤는 본래 鮮卑族의 别種이어서 拓跋氏와 조상이 같았는데, 뒤에 河西로 이주하였다. 독발오고가 雄大하고 용맹하며 큰 뜻을 품어서 大將 紛陁(분타)와 함께 涼州를 점령할 것을 모의하였다.注+① 紛은 아마도 오랑캐 姓일 것이다. 涼州를 점령할 것을 도모했다는 것은 呂光을 합병하고자 한 것이다.
분타가 말하기를 “公이 기필코 양주를 점령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농업을 힘쓰고 무예를 강습하며 현자를 예우하고 정사를 잘 닦은 뒤에야 가능하다.”라고 하니, 독발오고가 그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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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呂光이 사자를 보내어서 秃髪烏孤를 鮮卑大都統으로 임명하니, 독발오고의 부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병사와 말이 많습니다. 어찌하여 남에게 소속됩니까.”라고 하자,
石眞若留가 말하기를注+① 石眞은 아마도 또한 오랑캐 성일 것이다. “우리는 근거지가 아직 견고하지 못하여 큰 나라이든 작은 나라이든 상대가 안 되니, 除授를 받아주어 저들을 교만하게 해서 틈이 있기를 기다려 움직이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독발오고가 마침내 그 말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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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여름 4월에 秦主(前秦) 符登이 後秦과 싸워 크게 패하고 平涼으로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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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秦主 符登은 後秦主 姚萇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어린아이 姚興을 내가 회초리를 꺾어 볼기를 치겠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安成王 符廣에게 남아서 雍州를 지키게 하고 태자 符崇에게 胡空堡를 지키게 하고서 병력을 총동원하여 동쪽으로 출병하였다.注+① 符廣은 符登의 아우이다.
後秦의 태자 요흥이 尹緯로 하여금 廢橋를 점거하여 상대하게 하였는데, 秦나라 군대가 〈後秦의 군대와〉 물을 다투었지만 얻지 못하여 목말라 죽은 자가 열에 두서넛이었다.
윤위가 秦나라 군대와 싸워 크게 패배시키니, 그 무리가 밤을 틈타 달아나자 부등이 한 필의 말을 타고 雍州로 달아나니, 부숭과 부광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부등이 平涼으로 달아나 남은 무리를 거두어 馬毛山으로 들어갔다.注+② 馬毛山은 平涼의 험한 요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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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5월에 西燕主 慕容永이 燕나라(後燕)와 싸워서 크게 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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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燕主 慕容垂가 2월에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고서 壺關과 滏口, 沙亭으로 출동하여 西燕을 공격할 적에 진격할 곳을 표시하여 군대마다 각각 주둔할 곳에 나아가게 하였다.注+① 滏는 음이 釜이니, 물 이름으로 鄴城에 있다. 庭은 마땅히 亭이 되어야 하니, 그 지역이 업성 서남쪽에 있다. 標(푯말)는 卑遙의 切이니, 燕主 慕容垂가 이때 길을 나누어 진군해서 西燕을 공격하였다. 그러므로 푯말을 세우고 榜文을 걸어두어 여러 군사들이 나아갈 길을 나누어 보여준 것이다. 頓은 행군하면서 머무는 지역이니, ‘軍各就頓’는 장소를 나누어 군대를 배치하여 적을 의심하게 해서 적군으로 하여금 대비할 방법을 모르게 한 것이다.
西燕主 慕容永은 이 말을 듣고 길을 나누어 막아 지켜서 군량을 臺壁에 모으고 병사를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注+② ≪水經註≫에 “潞縣의 북쪽을 마주한 곳에 옛 臺壁이 있는데, 漳水가 그 남쪽에서 발원하니, 이는 본래
이윽고 모용수가 鄴城 서남쪽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한 달이 지나도록 전진하지 않으니, 모용영은 모용수가 길을 속여 太行山으로 들어오고자 하는 것이라 의심해서 마침내 여러 군대를 모두 거두어 태항산의 입구를 막고 오직 臺壁에만 한 군대를 남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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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4월에 慕容垂가 대군을 이끌고 滏口로 출동하여 天井關에 들어가서 5월에 臺壁에 이르러 西燕의 군대를 격파하였다.注+① 胡三省이 말하였다. “지금 澤州 晉城縣에 太行關이 있고 태항관 안에 天井泉 세 곳이 있으니, 바로 天井關이다.” 慕容永은 太行山에 있던 군대를 불러 돌아오게 해서 자신이 직접 거느리고 燕나라(後燕) 군대를 막았다.
모용수가 臺壁 남쪽에 진을 치고 천여 명의 기병을 보내어 시내 아래에 매복하게 하였다.注+② 陳(진을 치다)은 陣으로 읽는다. 싸울 때에 미쳐 거짓으로 후퇴하니 모용영의 무리가 추격하였는데, 시냇 가운데에 매복했던 군대들이 일어나 후미를 끊고 여러 군대가 사방에서 함께 진격하여 서연의 군대를 대파하니, 모용영이 달아나 長子로 돌아갔다.
【目】 신하들이 혹 말하기를 “宣太后를 마땅히 元帝에게 배향하여야 합니다.”라고 하니, 太子前率 徐邈이 말하기를 “太后가 평소 先帝에게 짝이 되지 못하였으니,注+① ‘不伉儷於先帝’는 正妃가 아님을 말한 것이다. 伉은 苦浪의 切이니 대등함이요, 儷은 力計의 切이니 나란히 함이다. 자손이 어찌 祖考를 위하여 配位로 세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國學明教 臧燾(장도)가 말하기를注+③ 國學明敎의 관직은 마땅히 明帝와 簡文帝 때에 설치했을 것이다. “존호가 바루어지고 나면 황제의 망극한 심정이 펴지고, 별도로 寢廟를 세우면 아버지(元帝) 사당을 높이는 의리가 드러나고, 아들(簡文帝)과 연관하여 칭호를 하면 태후가 귀해진 이유를 밝히게 됩니다. 일거에 세 가지 의리에 부합하니, 좋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注+④ 嚴은 높임이다. 禰는 아버지 사당이다. ‘繫子爲稱’은 ‘簡文’을 ‘宣太后’의 앞에 연결하여 〈簡文宣太后라 한〉 것이다. ≪春秋公羊傳≫에
역주3鄭氏 :
晉 元帝의 후궁인 鄭阿春으로 晉 簡文帝의 생모이며 孝武帝의 祖母이다. 간문제가 즉위하여 1년도 안 돼서 죽자 추존하지 못하였다. 간문제의 아들 司馬道子에게 정아춘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는데, 사마도자가 會稽王에 봉해졌기 때문에 會稽太妃라 한 것이다.
역주4(下) :
저본에는 ‘下’가 있으나,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衍字로 처리하였다.
역주5어머니는……귀해진다 :
庶子가 지위를 계승한 경우 그 생모 또한 아들로 인하여 지위가 높아지는 것으로, ≪春秋公羊傳≫ 隱公 원년에 “桓公은 어찌하여 귀한가? 어머니의 신분이 귀하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신분이 귀하면 자식은 어찌하여 귀해지는가? 자식은 어머니 덕분에 귀해지고 어머니는 자식 덕분에 귀해지는 것이다.[桓 何以貴 母貴也 母貴則子何以貴 子以母貴 母以子貴]”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