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臺城與援軍信命久絶이라 援軍募人能入城送啓者러니 李朗請先受鞭詐爲得罪하여 叛投賊하여 因得入城하니
城中方知援兵四集하고 舉城鼓譟어늘 諸軍渡淮하여 攻東府前柵하여 焚之라
高州刺史李遷仕及樊文皎가 帥銳卒五千하여 獨進深入하니 所向에 摧靡라
至菰首橋東
注+① 五代志 “高涼郡, 梁置高州.” 菰, 音孤. 菰首橋在青溪上.하여는 景將宋子仙
이 伏兵擊之
하니 文皎戰死
하고 遷仕
는 遁還
하다
仲禮神情傲狠
하여 陵蔑諸將
하니 邵陵王綸
이 每日執鞭至門
호되 亦移時弗見
注+② 凡部將見主帥, 執鞭以爲禮.이라 由是
로 與綸及諸將有隙
하여 互相猜阻
하여 莫有戰心
이러라
援軍初至에 建康士民扶老擕幼以候之러니 纔過淮에 卽縱兵剽掠하니
由是士民失望하고 賊中有謀應官軍者나 聞之하고 亦止하다
目
胡氏曰 古之時에 禽獸常逼人矣하니 聖人教之罔罟佃漁는 則爲民除患而因以制禮라
然其爲敎戒甚備하니 則愛物之心을 亦可見矣라 故其效至於鳳凰儀鳥獸舞魚鱉咸若하여 反不可勝用焉이어늘
自佛以不殺爲敎로 謂犬豕牛羊이 皆吾宿世之祖考眷屬也라하니 信而行之는 莫甚於梁武라
其心未必不非笑堯舜周孔
하여 以爲不慈不悲也
라하리니 果有報應福利者
인댄 則梁之國祚靈長
하고 臣忠子孝
하고 叛亂不作
하고 壽考無期
라야 斯爲驗矣
注+① 靈長, 威靈久長也.어늘
乃一切不然하여 禍亂旣興에 骨肉相圖하여 太平之民이 十喪八九하니 然則向者茹蔬不殺之功이 果何在邪아
梁武行事는 殆天啓之하여 使破敗昭著하여 以警後來歟아 觀此하고 尙不知佛學之非하고 又從而爲之說하여 以自解焉하면 則亦末如之何矣로다
目
仲禮父津登城謂仲禮曰 汝君父在難이어늘 不能竭力하니 百世之後에 謂汝爲何오한대 仲禮亦不以爲意러라
梁主問策於津한대 對曰 陛下有邵陵하고 臣有仲禮로되 不忠不孝하니 賊何由平이리오하다
南康王會理與羊鴉仁趙伯超等으로 進營於東府城北하여 約夜度軍이러니 爲景所敗하다
景又求和어늘 梁主使御史中丞沈浚으로 至景所하니 見景無去志하고 發憤責之한대
景横刀叱之어늘 浚曰 負恩忘義하고 違棄詛盟하니 固天地所不容이리라 沈浚은 五十之年에 常恐不得死所로니 何爲以死相懼邪아하고 因徑去不顧라
目
初
에 梁主以河東王譽
로 代張纉爲湘州刺史
하고 徙纉
하여 代岳陽王詧爲雍州刺史
注+① 纘, 綰之兄也.러니 纉恃才輕譽
하여 迎候有闕
일새
譽至하여 留纉不遣한대 纉輕舟夜遁하여 將之雍部할새 復慮詧拒之라
纉與湘東王繹有舊라 欲因之以殺譽兄弟하여 乃如江陵이러니
及臺城陷에 諸王各還州鎭할새 譽歸湘州하고 信州刺史桂陽王慥는 留軍江陵하여 欲待繹至에 拜謁乃還이러니
纉遺繹書曰 河東欲襲江陵
이어늘 岳陽共謀不逞
注+② 逞, 快也. 不逞, 謂不得恣肆快意者也.이라하고
江陵軍主朱榮도 亦遣使告繹云 桂陽留此하여 欲應譽詧이라한대
繹懼하여 自蠻中歩道로 馳歸江陵하여 囚慥殺之하고 樹柵掘塹以自守하다
目
繹娶徐妃하여 生世子方等이로되 妃多失行이라 故方等無寵이러니
及自建康歸江陵에 繹見其御軍和整하고 始歎其能하여 入告徐妃어늘 妃泣而退한대
繹怒하여 疏其穢行하여 牓于大閤하니 方等見之益懼러라
湘州刺史河東王譽가 驍勇得士心이라 繹將討侯景할새 使督其糧衆호되 譽不與어늘
方等請討之한대 繹乃以少子方矩로 代譽하고 使方等으로 將兵送之러니
方等將行에 謂所親曰 是行也가 吾必死之니 死得其所면 吾復奚恨이리오하다
至麻溪
한대 譽擊之
하니 方等敗死
로되 繹無戚容
注+① 據水經註 “麻溪水口在臨湘縣北劉口戍南.”이러라
寵妃王氏生子方諸而卒
하니 繹疑徐妃爲之
注+② 疑其毒殺之.하여 逼令自殺
하니 妃赴井死
하다
目
【目】 정월 초하루에 柳仲禮가 군영을 大桁으로 옮겼는데, 마침 큰 안개가 일어나 韋粲의 군대가 헤매다가 길을 잃어 靑塘에 이르렀을 즈음에는 이미 한밤중이라 木柵을 세웠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侯景이 급히 정예병을 이끌고 위찬을 공격하자, 위찬이 軍主 鄭逸을 시켜 그들을 맞아 싸우도록 하고, 劉叔胤에게 명을 내려 水軍으로 그들의 후면을 차단하도록 하였는데,
注+① 〈“以舟師截其後”는〉 秦淮河를 건너는 길을 차단하는 것이다. 유숙윤이 감히 진격하지 못하니 정일이 결국에 패배하였다.
후경이 승세를 타고 위찬의 군영으로 들어가자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위찬을 이끌어서 적들을 피하려고 하였는데, 위찬이 움직이지 않고 子弟들을 꾸짖어 힘써 싸우게 하여 마침내 아들 韋尼와 세 명의 아우인 韋助, 韋警, 韋構 및 사촌아우 韋昻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으니, 친척으로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이었다.
注+② 韋助, 韋警, 韋構는 아우 세 명의 이름이다.
유중례가 밥을 먹다가 젓가락을 던지고 갑옷을 입고는 휘하에 있는 100명의 騎兵과 말을 달려 그를 구원하러 가서 후경과 전투를 하여 크게 격파하였는데, 수백 명의 목을 베었고 물에 빠뜨려 죽인 군사가 1천여 명이었다.
유중례의 창이 막 후경에게 닿으려고 할 적에 적들이 뒤에서 유중례의 어깨를 베어 후경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후경은〉 감히 다시 남쪽 연안을 건너지 않았고 유중례도 기력이 쇠하여 다시 전투를 하자고 말하지 않았다.
邵陵王 蕭綸이 다시 흩어진 병력을 정비하여 동쪽 길에서 도착하여 大桁의 남쪽에 군영을 세우고, 역시 유중례를 추대하여 大都督으로 삼았다.
目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侯景이 강을 건널 수 있었던 것은 蕭正德이 배를 보내어 건너게 원조해주었기 때문이고, 소정덕이 배반할 수 있었던 것은 朱异가 그를 잘못 천거했기 때문이다.
후경은 본래 亂臣이며, 소정덕은 본래 賊子이기는 하지만, 주이는 亂臣과 賊子를 만들어낸 중개자 역할을 하였는데, 梁 武帝는 끝내 깨닫지 못하였다.
만일 주이가 은혜로운 영화와 봉록을 받아 장구한 계책을 생각했다면 소정덕이 외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돌아왔을 때 그의 죄를 바로 잡아 啓文을 올려 먼 변방 지역으로 내쳤다면 자식들 중에 不孝를 마음에 둔 자가 역시 경계를 할 줄 알았을 것이며,
注+① ‘遠服’은 ≪書經≫ 〈虞書 禹貢〉의 ‘要服’과 ‘荒服’이다.
후경이 자신의 나라를 배반하고 梁나라로 왔을 때 그의 실정을 밝혀 계문을 올려 국경 밖에서 막았다면 신하들 중에 불충한 마음을 먹은 자가 또한 두려워할 줄을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두 가지를 모두 그르쳤으니, 그렇다면 후경과 소정덕이 양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바로 주이가 멸망시킨 것이다.”
目
【目】 臺城과 지원군 사이에 서신과 명령이 오랫동안 끊어져서 지원군 가운데 성안에 들어가서 啓文을 전송할 사람을 모집하였는데, 李朗이 먼저 채찍으로 맞기를 청하여 거짓으로 죄를 얻은 것으로 꾸며 배반하여 적에게 투항하고 이로 인해 성으로 들어갔다.
성안에서는 지원병이 사방에서 모인 것을 알고 성 전체에서 북을 두드리고 떠드니, 諸軍들이 秦淮河를 건너 東府 앞에 있는 목책을 공격하여 불태웠다.
高州刺史 李遷仕와 樊文皎가 정예병 5천 명을 인솔하고서 단독으로 진격하여 깊이 들어갔는데, 향하는 곳마다 쳐부수고 쓰러뜨렸다.
菰首橋(고수교)의 동쪽에 이르러
注+① ≪五代志≫에 “高涼郡은 梁나라 때에 高州를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菰(향초)의 음은 孤이다. 菰首橋는 青溪 가에 있다. 侯景의 장수 宋子仙이 병력을 숨겨놓았다가 공격하자, 번문교는 전사하고 이천사는 달아나 돌아왔다.
柳仲禮는 정신과 성정이 오만하고 삐뚤어져서 諸將을 업신여기고 멸시하였는데, 邵陵王 蕭綸이 매일 채찍을 쥐고서 군문에 도착하였으나 역시 시간이 지나도 보이지 않았으니,
注+② 部將이 主帥를 알현할 때에는 채찍을 잡는 것이 禮이다. 이로 말미암아 유중례가 소륜과 제장들과 틈이 생겨서 서로 시기하고 저지하여 전투할 마음이 없었다.
지원군이 처음에 도착하였을 때, 建康에 사는 士民은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서 그들을 기다렸으나 겨우 진회하를 지나자마자 군대를 풀어서 협박하고 약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士民이 실망하였고, 적들 가운데 官軍에 호응하기를 도모하던 자들이 있었으나 그 소식을 듣고서 역시 그만두었다.
目
【目】 애초 臺城의 문이 닫혀 있을 적에 公卿들이 끼니를 걱정하여 남녀와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나가서 쌀을 지고 왔으며, 여러 창고에 저장되어 있는 錢帛을 거두어 德陽堂에 쌓아두었으나 땔나무와 꼴, 생선과 소금은 갖추지 않았다.
注+① 天監 6년(507)에 閱武堂을 고쳐 德陽堂이라고 하였으니, 남쪽 궐 앞에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서는 尙書省 건물을 부수어 땔감으로 썼고, 거적을 거두어 잘게 썰어서 말을 먹였으며, 군사들 중에는 갑옷을 삶아서 먹거나 쥐를 굽거나 참새를 잡아먹는 자도 있었고, 궁궐에서 말을 잡아서 人肉을 섞어 먹기도 하였으니, 이를 먹은 사람들은 반드시 병에 걸렸다.
注+② 薦(거적)은 마른 볏짚으로 만든 것인데, 깔고 자는 도구이다. 剉는 자른다는 뜻이다.
侯景의 무리 역시 굶주렸고 약탈해도 얻을 것이 없었다. 東城에는 1년을 버틸 수 있는 쌀이 있었으나 지원군이 그 길을 차단하니, 후경이 매우 걱정하였다.
注+③ 東城은 바로 東府城이다.
王偉가 청하기를 거짓으로 화친하여 기세를 늦추게 만들고 쌀을 石頭로 들여온 뒤에 병력과 말을 쉬게 하고 무기를 수선하여 적들이 나태한 틈을 타서 공격하자고 청하였다.
후경이 그의 말을 따라서 表文을 올려서 화친을 청하였는데, 太子가 梁主에게 보고하고 이를 허락하도록 하였다. 그러자 梁主가 진노하여 말하기를 “화친은 죽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니,
태자가 굳게 청하자 梁主가 머뭇거리다가 한참 뒤에 드디어 일어나 말하기를 “네가 스스로 도모한 일이니, 천 년 동안 비웃음을 살 짓을 하지 말거라.”라고 하고, 마침내 허락한다고 알렸다.
目
【目】 마침 南康王 蕭會理, 湘潭侯 蕭退, 西昌世子 蕭彧이 병력 3만 명을 합쳐 馬卬洲에 이르렀는데, 侯景이 칙령을 내려 그들을 남쪽 기슭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하니, 太子가 그의 말을 따랐다.
注+① ≪五代志≫에 “衡山郡에 湘潭縣이 있다.”라고 하였다. 蕭退는 蕭恢의 아들이다. 馬卬洲는 臺城의 북쪽에 있다. ‘南岸’은 바로 秦淮河의 南岸을 말한다.
후경이 또 啓文을 올리기를 “永安侯 蕭確, 直閣 趙威方이 빈번히 목책을 사이에 두고 저를 보고 꾸짖으며 말하기를 ‘天子께서 스스로 그대와 맹약을 맺으셨지만 나는 끝내 그대를 쳐부술 것이다.’라고 하니, 바라건대 영안후와 조위방을 불러들이시면 군사를 이끌고 즉시 길을 나서 北方으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하였다.
注+② 永安은 옛날 古縣의 명칭으로 侯國을 삼은 것이다. 吳나라 때에는 烏程縣과 餘杭縣을 분리하여 永安縣을 설립하고, 晉나라 때에는 고쳐서 武康이라 하였다. 蕭確은 蕭綸의 아들이다. ‘引路’는 병력을 이끌고 길을 나서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梁主가 소확을 불러들였으나 소확이 누차 사양하고 들어가지 않았다.
邵陵王 蕭綸이 울면서 소확에게 말하기를 “성을 포위한 지 이미 오랜 시일이 지나 聖上께서 근심하며 위태롭게 여기니, 신하의 마음은 끓는 물과 큰 불보다 절실하다. 이런 까닭으로 맹약을 맺어 그를 보내고 다시 후일의 계책을 펴려고 한 것이다. 명령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어찌 막고 어길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소확이 말하기를 “후경이 비록 떠나고 싶다고 말했지만, 긴 포위를 풀지 않았으니, 그의 뜻을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성으로 들어간들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륜이 크게 진노하여 소확의 머리를 베려고 하자, 소확이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성안으로 들어갔다.
梁主가 항상 채식을 하다가 이때에 이르러서는 채소와 버섯이 모두 떨어져 마침내 계란을 먹었는데, 소륜이 使者를 통하여 계란 수백 알을 바쳤다.
注+③ 먹을 수 있는 풀과 나물을 통틀어 ‘蔬’라고 하고, 먹을 수 있는 나물은 ‘茹’라고 한다. 茹는 人恕의 切이다.
目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는 禽獸가 늘 사람을 핍박하였으니, 聖人이 그물로 짐승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도록 가르친 것은 백성을 위해 근심을 제거하고 그로 인해 禮를 만든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과 경계는 몹시 완비되었으니, 사물을 아끼는 마음을 역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그 효과가
도리어 이루 다 쓸 수 없었다.
그런데 불교에서 살생을 하지 않는 것을 교화한 뒤로 ‘개와 돼지, 소와 양이 모두 내 전생의 조상이자 식구였다.’라고 하였으니, 이를 믿고 시행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梁 武帝보다 심한 자가 없다.
그 마음에 필시 堯임금과 舜임금, 周公과 孔子를 비난하고 비웃으며 자애롭지 않고 슬퍼하지 않았다고 여겼을 것이니, 과연 복과 이익으로 報應이 있다면 梁나라의 국운이 오래 이어지고 신하는 충성스럽고 자식은 효도하며,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기약 없는 장수를 누렸어야 징험이 된다.
注+① ‘靈長’은 신령함이 오래가는 것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아 재앙과 난리가 이미 일어나 골육 사이에 서로 죽여 태평시절의 백성이 열에 여덟아홉은 죽었으니, 그렇다면 지난번에 채소를 먹고 살생을 하지 않은 공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양 무제의 행동과 일은 거의 하늘이 열어주어 파멸과 실패를 분명히 드러나게 하여 후세를 경계한 것인가. 이를 보고도 오히려 佛學의 그릇됨을 모르고 또 따라서 說을 만들어 스스로 해명한다면 역시 어찌할 수가 없다.”
目
【目】 湘東王 蕭繹이 郢州의 武城에 진을 쳐서 河東王 蕭譽, 桂陽王 蕭慥와 함께 모두 머무르며 전진하지 않았다.
注+① ≪水經註≫에 “武口水는 위로 安陸의 延頭와 통하고 남쪽으로 武城에 이르러 大江으로 유입된다. 吳나라의 옛날 주둔지가 있던 곳으로 荊州의 경계가 여기에서 끝난다.”라고 하였다. 蕭慥는 蕭懿의 손자이다. 中記室參軍 蕭賁은 강직한 선비였는데, 소역이 일찍 내려가지 않은 일을 속으로 옳지 않다고 여겼다.
일찍이 소역과 雙六 놀이를 하다가 〈소역이〉 말을 잡은 다음에 놓지 않자, 소분이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전혀 말을 놓으실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소역이 그에게 깊이 원한을 품었다.
注+② 雙六은 놀이판을 이용한 놀이의 명칭이다. 종류가 다른 나무로 네모난 놀이판을 만들어 판에 彼此와 內外에 각각 여섯 梁이 있기 때문에 ‘雙六’이라고 부른다. 打馬(놀이 이름)에 子(말[馬])을 끌어오고 明瓊(주사위)을 살펴 標的을 삼는데, 圖諜(그림 표시 책)이 아니면 비슷한 것을 얻을 수 없다. ‘雙六’은 가장 近古에 호칭이 雅戲였다. 西竺에서 시작되어 曹魏로 유입되었으며, 梁ㆍ陳ㆍ魏ㆍ齊ㆍ隋ㆍ唐나라 시기에 성행하였다. 食은 타격하여 취하는 것이고, 子는 말[馬]이다. ‘未下’는 말이 타격을 받아 놀이판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雙六’의 놀이판 안에 彼此 각각 12梁이 있고, 白黑 각각 15말[馬]이 있는데, 이 말이 혼자 남으면 저 말이 타격할 수 있고, 두 말이 서로 나란히 함이 ‘梁’이 되는데, ‘梁’을 이루면 타격을 피하는 방법이다. 어떤 말이 타격을 만나면 나머지 말이 모두 움직일 수 없고, 반드시 타격된 말이 다시 〈놀이판에〉 들어간[下] 뒤에야 나머지 말이 움직일 수 있다. 이어서 彼內 6梁 가운데 빈 자리가 생기면 瓊色(주사위 색)을 만난 뒤에야 〈놀이판에〉 들어갈[下] 수 있다. 蕭賁은 蕭繹이 내려가지[下] 않은 일에 ‘雙六’을 빌어서 이야기하여 그가 君父를 구원하러 내려가지 않은 것을 풍자한 것이다.
梁主의 칙령을 받게 되자 소역이 군대를 돌리려고 하니, 소분이 말하기를 “侯景이 신하로서 군사를 일으켜 궁궐로 향하였다가 지금 만약 군대를 놓아버리면 어린아이라도 그의 목을 벨 수 있으니, 반드시 〈군대를 놓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왕은 10만의 군사를 가지고 적들을 보기도 전에 물러나시니,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니, 소역이 기뻐하지 않았는데 얼마 뒤에 다른 사건을 빌미로 그를 죽였다.
目
【目】 侯景이 드디어 啓文을 올려서 梁主(蕭衍)의 열 가지 과오를 열거하며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허탄한 일을 숭상하여 꾸몄고, 사실대로 기록한 것을 듣기 싫어하여 요상하고 괴이한 것을 좋아하며 상서롭게 여겼고, 하늘의 견책을 잘못이 없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六藝를 자세히 설명하고 전대 유학자를 물리쳤으니 王莽의 법이고, 鐵로 화폐를 만들어 가볍고 무거운 것에 일정함이 없었으니 公孫述의 제도입니다.
注+① 漢나라 公孫述이 蜀을 점거하여 鐵錢을 사용하였다. 양고기를 요리하는 자에게 관리의 인장을 새겨주어 조정의 법도가 조잡하니 〈漢나라〉 更始帝(劉玄)와 晉나라 趙王 司馬倫의 일입니다.
注+② 漢나라 更始帝가 지나치게 관작을 제수하자 長安에서 그 일을 두고 말하기를 “양의 위장을 굽는 사람이 騎都尉가 되고, 양의 머리를 굽는 사람이 關內侯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晉나라 때 趙王 司馬倫이 지위를 찬탈한 뒤에 貂蟬冠을 쓴 高官들이 자리에 가득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 일을 두고 말하기를 “담비가 부족하자 개꼬리로 이었네.”라고 하였다.
豫章王 蕭綜은 아버지를 원수로 여겼고, 邵陵王 蕭綸은 〈아버지가 생존해 있었는데〉 冠과 布(喪服)를 착용하였으니, 石虎의 풍조입니다.
注+③ 豫章王 蕭綜이 아버지를 원수로 여겼고, 邵陵王 蕭綸이 冠과 布를 착용한 일은 모두 普通 6년(525)에 보인다. 의 太子 石邃가 李顔 등에게 말하기를 “官家(皇帝)로 호칭 받기 어려우니, 나는 처럼 행사하려고 하는데, 卿이 나를 따르겠는가?”라고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자 석호가 석수를 죽이고, 다시 아들 石宣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그 후에 석선의 아우 石韜가 총애를 받아 석호가 그를 태자로 세우려 하자, 석선이 楊柸와 趙生에게 말하기를 “그대들이 석도를 죽이면 석도의 國邑을 그대들에게 나누어 봉분해줄 것이다. 석도가 죽으면 主上이 반드시 喪에 행차하실 터이니, 내가 그 틈을 타서 거사를 일으키면 성공하지 못할 리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양배 등이 석도를 죽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석선이 죽임을 당하였다. 지금 梁主의 아들 豫章王 蕭綜은 아버지를 배반하여 北魏에 투항하였고, 邵陵王 蕭綸은 喪主의 喪服을 빼앗아 입고 梁主와 모습이 비슷한 사람을 데려와 곤룡포와 면류관을 착용하게 하고는 자리에 나아가게 하여 옷을 벗기고 뜰에서 채찍을 쳤으니, 모두 아버지가 안중에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侯景이 석호의 아들 석수․석선과 같다고 말하였으니, 모두 아버지를 시해하고자 하였다. 浮圖를 수리하고 건립하는데 四民이 굶주리도록 만들었으니 笮融과 姚興의 일을 번갈아 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注+④ 笮融은 漢 獻帝 때에 下邳相이 되어 크게 불교 사원을 지어 銅人을 만들고 黃金으로 몸을 칠하고 비단옷을 입혔으며, 〈塔廟에는〉 9겹의 銅槃을 내려 걸고 그 아래에 3천여 명을 수용할 수 있고 樓閣道를 만들었는데, 모두 佛經을 암송하였다. 姚興은 後秦의 군주로 鳩摩羅什을 國師로 삼고 寺塔을 크게 지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州郡이 그에 교화되어 열 집에 아홉 집은 불교를 섬겼다.
또 말하기를 “建康의 황궁은 사치를 숭상하고 폐하께서는 오직 主書(문서 담당자)와 함께 온갖 일을 결단하시어 정치는 뇌물로 이루어지고 환관들은 호화롭고 성대하며 승려들은 넉넉하고 풍족합니다.
皇太子는 珠玉을 좋아하고 주색에 빠졌으며, 邵陵王은 있는 곳이 쇠잔하고 파괴되었으며, 湘東王은 부하들이 탐욕하고 방종하고, 南康王 蕭會理와 定襄侯 蕭祗의 무리들은 모두 원숭이가 冠을 쓴 모습과 같을 뿐입니다.
注+⑤ 南康王 蕭會理는 당시에 廣陵을 鎭守하고 있었고, 定襄侯 蕭祗는 당시에 淮陰을 鎭守하고 있었다. 소지는 南平王 蕭偉의 아들이다.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작은 징계로 큰 훈계를 삼으시고 讒言을 내치고 忠言을 받아들이시어 신이 다시 거사를 일으키는 근심이 없도록 해주시고, 폐하께서는 농성하며 지키는 능욕을 당하지 않도록 하신다면 모든 백성들을 위해 다행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梁主가 啓文을 보고 부끄러워하고 진노하여, 3월 초하루에 후경이 맹약을 어겼다고 하여 봉화를 피우고 북을 울렸다.
目
【目】 처음에 성문을 닫던 날에 男女가 10여만 명이었고, 갑옷을 입은 병사가 2만여 명이었는데, 포위를 당한 지 오래되자 대부분 사람들의 몸이 붓고 숨이 가빠서 죽은 자가 열에 여덟아홉이었다.
注+① ‘氣急’은 숨을 헐떡이고 숨이 가쁜 것이다.
성에 오른 사람이 4천 명을 못 채웠는데, 대부분 모두 파리하고 숨을 헐떡였으며 가로놓인 시체가 길에 가득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음으로 여전히 외부에서 원조해주기를 바랐다.
柳仲禮는 오직 기생을 모아놓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풍악을 울렸는데, 장수들이 날마다 가서 싸울 것을 청하였으나 유중례는 허락하지 않았다.
安南侯 蕭駿이 邵陵王 蕭綸에게 유세하기를 “성의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은데, 都督이 구원하지 않으니 만에 하나라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전하께서는 무슨 낯으로 세상에 서시겠습니까. 지금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적이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 공격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소륜이 따르지 않았다.
目
【目】 柳仲禮의 아버지 柳津이 성에 올라 유중례에게 말하기를 “너의 君父가 어려움에 처했는데 힘을 다하지 않으니 후대에 너를 두고 뭐라고 하겠느냐.”라고 하였는데, 유중례는 역시 마음에 두지 않았다.
梁主(蕭衍)가 유진에게 계책을 묻자 〈유진이〉 대답하기를 “폐하께는 邵陵王(蕭綸)이 있고 신에게는 유중례가 있으나, 충성을 하지 않고 효도를 하지 않으니 무슨 수로 적들을 평정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南康王 蕭會理가 羊鴉仁, 趙伯超 등과 함께 東府城의 북쪽으로 나아가 주둔하여 밤에 군대를 건너게 하기로 약속하였는데, 侯景에게 패배하였다.
후경이 또 화친을 청하자, 梁主가 御史中丞 沈浚을 시켜 후경이 있는 곳으로 가도록 하였는데, 〈심준이〉 후경이 물러날 뜻이 없음을 보고는 분노하여 그를 질책하였다.
그러자 후경이 칼을 비껴 차고 〈심준을〉 꾸짖으니, 심준이 말하기를 “은혜를 등지고 의리를 잊고 맹세한 맹약을 어기고 내버렸으니, 진실로 하늘과 땅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오. 나 심준은 50의 나이에 항상 죽을 곳을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소.”라고 하고, 이어서 곧바로 떠나고 돌아보지 않았다.
目
【目】 이에 侯景이 다시 밤낮으로 쉬지 않고 성을 공격하였는데, 邵陵王의 世子 蕭堅이 太陽門에 주둔하면서 종일토록 도박을 하고 술을 마시며 관리와 병사를 돌보지 않았다.
注+① 太陽門은 臺城의 6개 문 가운데 하나이다. ‘蒱飲’은 도박을 하고 또 술을 마시는 것이다.
그의 書佐 董勛과 熊曇朗이 밤에 후경의 군대를 인도하여 성에 올랐는데, 永安侯 蕭確이 힘써 싸웠으나 물리칠 수 없자, 문을 밀치고 안으로 들어가 梁主(蕭衍)에게 아뢰기를 “성이 이미 함락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梁主가 편안히 누워 움직이지 않은 채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로 인해 얻고 나로 인해 잃었으니, 역시 다시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소확에게 말하기를 “속히 가서 네 아비(蕭綸)에게 二宮(황제와 태자)은 걱정하지 말라고 하거라.”라고 하였다.
目
【目】 侯景이 太極東堂으로 들어가 〈梁主(蕭衍)를〉 알현할 적에 갑옷을 입은 병사 500명으로 자신을 호위하게 하여 전각 아래에서 이마를 조아렸는데, 典儀가 그를 인도하여 三公이 앉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였다.
注+① 太極殿은 建康宮 안에 있는 正殿이다. 晉나라 초기에 12칸으로 축조하였으니, 12달을 본뜬 것이다. 梁 武帝(蕭衍) 때에 이르러 13칸으로 다시 만들었으니, 윤달을 본뜬 것이다. 높이는 8丈, 길이는 27丈, 너비는 10丈이며, 내외를 모두 아름다운 돌을 이용해 섬돌을 만들었다. 그 동쪽에 太極東堂 7칸이 있고, 그 서쪽에 太極西堂 7칸이 있다. 典儀는 조정의 의식을 담당하는 자이다. 唐나라에 이르러서도 전의의 직책이 있었으니, 殿上에서 贊唱하는 절차와 殿庭에서 의복과 지위의 차례를 진설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梁主는 정신과 얼굴빛에 동요가 없이 그에게 묻기를 “卿이 軍中에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수고롭지 않은가.”라고 하니, 후경이 감히 올려보지 못하고 땀이 흘러 얼굴을 덮었다.
〈후경이〉 다시 永福省에 이르러 太子를 알현하였는데,
注+② 永福省은 대궐 안에 있는데 宋나라 이후로 太子가 거처하였으니, 〈그 명칭은〉 나라가 영원히 복을 누리라는 의미에서 취하였다. 태자 역시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侍衛는 모두 놀라 흩어졌고, 徐摛와 殷不害만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서리가 후경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禮를 갖추어 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후경이 절하고 물러나 王僧貴에게 말하기를 “나는 항상 말안장에 걸터앉아 적진과 대치하여 화살과 칼이 서로 부딪치는 상황에서도 마음과 기운이 편안하고 느슨하여 전혀 두려움이 없었는데,
지금 蕭公(蕭衍)을 뵙자 사람을 절로 두렵게 만드니, 어찌 하늘의 위엄이 범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다시 소공을 뵐 수 없다.”라고 하였다.
目
【目】 이에 兩宮(황궁과 태자궁)의 侍衛를 다 물리치고 군사를 풀어서 수레, 복식, 궁녀를 모두 다 약탈하게 하였으며, 조정의 士人과 王侯를 체포하여 永福省으로 보내고
注+① 兩宮은 上臺와 東宮을 말한다. 詔書를 위조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侯景이〉 스스로에게 大都督 中外諸軍 錄尙書事의 직함을 덧붙였다. 建康의 士民이 난리를 도망쳐 사방으로 나갔다.
후경이 詔書를 내려서 밖에 있는 지원군을 해산하도록 명하자 柳仲禮가 장수들을 불러서 의논하였는데, 邵陵王 蕭綸이 말하기를 “지금의 명령은 장군에게 맡기겠습니다.”라고 하니, 유중례가 오랫동안 쳐다보면서 대답하지 않았다.
裴之高와 王僧辯이 말하기를 “장군께서는 군사 100만 명을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궁궐이 함락되고 말았으니, 힘을 다하여 결전을 치러야 하는데 어찌 많은 말을 할 것입니까.”라고 하니, 유중례는 결국 한마디 말이 없었고, 여러 군대는 마침내 흩어졌다.
소륜은 會稽로 달아났고, 柳仲禮, 羊鴉仁, 王僧辯, 趙伯超는 모두 진영의 문을 열어 적에게 항복하니, 군사들이 탄식하며 분개하였다.
目
【目】 柳仲禮 등이 성으로 들어가서 우선 侯景에게 절을 한 뒤에 梁主를 알현하였는데, 梁主가 그들과 말을 하지 않자, 〈유중례가〉 柳津을 뵈었는데, 유진이 통곡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 아들이 아니니, 어찌 수고롭게 서로 보겠느냐.”라고 하였다. 후경이 유중례를 司州로 돌아가게 하고 王僧辯을 竟陵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
애초에 臨賀王 蕭正德이 후경과 城을 평정하는 날에 二宮(황제와 태자)을 온전히 보호하지 않기로 약속하였는데, 성문이 열리자 소정덕이 군대를 인솔하여 칼을 휘두르며 들어가려고 하였으나 들어가지 못하였다.
후경이 다시 소정덕을 大司馬로 삼으니, 소정덕이 들어가서 梁主를 알현하는데 절을 하고 또 울자, 梁主가 말하기를
라고 하였다.
注+① 啜은 눈물을 많이 흘리며 그치지 않는 것이다.
目
【目】 애초에 梁主가 河東王 蕭譽로 張纉을 대신하여 湘州刺史로 삼고, 장찬을 옮겨서 岳陽王 蕭詧을 대신하여 雍州刺史로 삼았다.
注+① 張纉은 張綰의 형이다. 장찬은 재주를 믿고서 소예를 경시하여 그를 영접하여 기다릴 때에 禮節에 잘못이 있었다.
소예가 도착하여 장찬을 억류시키고 보내지 않았는데, 장찬이 작은 배로 밤에 달아나 雍部에 도착할 즈음에 소찰이 다시 자신을 거부할까 염려하였다.
장찬은 湘東王 蕭繹과 예전부터 교분이 있었기에 그를 이용하여 소예 형제를 죽이려고 하여 마침내 江陵으로 갔다.
臺城이 함락되자 여러 왕들이 각각 州의 鎭戍하는 곳으로 돌아갔는데, 소예는 湘州로 돌아갔고, 信州刺史 桂陽王 蕭慥는 강릉에 군대를 주둔시켜 소역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배알하고 돌아가려고 하였다.
장찬이 소역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하동왕이 江陵을 기습하려고 하는데, 악양왕이 함께 공모하여 불만을 품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注+② 逞은 즐겁다는 뜻이니, ‘不逞’은 마음에 즐겁게 제멋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江陵軍主 朱榮도 使者를 파견하여 소역에게 보고하기를 “계양왕이 여기에 머무르면서 소예와 소찰에게 호응하려고 합니다.”라고 하니,
소역이 두려워서 蠻中의 사잇길로 말을 달려 강릉으로 돌아와 소조를 감금하여 죽이고, 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서 스스로 수비하였다.
目
【目】 侯景이 董紹先을 江北行臺로 삼아서 〈梁 武帝의〉 勅令을 가지고 南康王 蕭會理를 불러오게 하였는데, 동소선이 잔약한 군사 200명을 데리고 廣陵에 도착해보니, 소회리의 군대와 말이 아주 성대하였다.
僚佐가 소회리를 설득하기를 “후경이 이미 京邑을 함락하여 諸藩을 제거한 연후에 황제 자리를 찬탈하려고 하니, 만약 사방에서 거절하면 〈후경이〉 즉시 패배하여 흩어질 것인데, 어찌 南兗州 땅 전체를 맡겨서 도적을 돕는단 말입니까.
동소선을 죽이고 군사를 출동시켜 굳게 지키고 西魏와 연합하면서 변화하는 상황을 기다리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소회리는 평소에 겁이 많아 곧장 城을 동소선에게 주었다.
目
【目】 王思政이 무리를 인솔하여 土山을 점거하고서
注+① 東魏가 토산을 쌓아 潁川을 공격하자, 王思政이 토산을 빼앗아 점거하였다. 그들에게 고하기를 “나의 힘은 꺾이고 계책은 다했으니, 오직 마땅히 죽음으로 나라에 사죄해야 한다.”라고 하고,
그로 인해 하늘을 우러러서 크게 곡하고 서쪽을 향해 두 번 절하고는 스스로 목을 베려고 하자, 무리들이 함께 그를 잡아 자결을 하지 못했다. 高澄이 趙彥深을 보내어 손을 잡고서 뜻을 말하고 맞이하여 예우하였다.
왕사정이 애초에 潁川에 들어갔을 때 병사 8천 명을 거느렸는데,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러서는 겨우 3천 명이었지만 끝내 배반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징이 영천을 鄭州로 명칭을 바꾸고 왕사정을 몹시 중하게 예우하자,
注+② 살펴보건대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潁川은 본래 長社에 治所를 두었는데, 鄭州로 명칭을 고치고 나서 치소를 潁陰城으로 옮기고 許昌郡, 潁川郡, 陽翟郡을 관할하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祭酒 盧潛이 말하기를 “왕사정이 죽음으로 절개를 지키지 못하였는데, 어찌 중히 여길 만합니까.”라고 하니,
고징이 말하기를 “내가 노잠을 곁에 두고 있기에 마침내 다시 한 명의 왕사정을 얻을 수 있었소.”라고 하였다. 노잠은 盧度世의 증손이다.
目
【目】 애초에 王思政이 襄城에 주둔할 적에 長社를 行臺의 治所로 삼고자 하여 宇文泰에게 啓文을 올렸는데,
淅州刺史 崔猷가 말하기를
注+① ≪五代志≫에 “淅陽郡은 西魏 때에 淅州를 설치하였다.”라고 하였다. 崔猷는 崔挺의 손자이다. “襄城은 京城(長安)과 洛陽을 통제하는 곳이라 실로 요충지이니, 만일 어떤 움직임이 있으면 서로 응대하여 연결하기가 쉽습니다. 潁川은 이미 적들의 경계 지역과 인접하고 또 견고한 산천이 없으니, 적들이 만약 전진해 오면 샛길로 성 아래에 도달할 것입니다.
양성에 군사를 주둔시켜 行臺로 삼고, 潁川에 州를 설치하여 장수를 보내어 鎭守하도록 하는 것만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안팎이 견고하게 연결되어 인심이 평안하기 쉬우니, 비록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기더라도 어찌 근심할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우문태가 최유의 계책을 따르도록 명을 내렸는데, 왕사정이 굳게 청하니 우문태가 마침내 허락하였다. 그런데 이때에 長社가 함락되자 우문태가 몹시 후회하고서 侯景이 바친 여러 성의 도로가 막히고 끊어졌다고 하여 여러 장수들에게 군대를 빼내어 돌아오도록 명을 내렸다.
目
【目】 蕭繹이 徐妃에게 장가들어 世子 蕭方等을 낳았는데, 서비는 행실에 잘못이 많았기에 소방등은 총애받지 못하였다.
建康에서 江陵으로 돌아오자 소역은 소방등이 군사를 조화롭게 잘 통제하는 모습을 보고 비로소 그의 능력에 탄복하여 들어가 서비에게 말하였는데, 서비가 울면서 물러났다.
소역이 진노하여 그녀의 더러운 행실을 기록하여 大閤에 방을 붙이니, 소방등이 이를 보고 더욱 두려워하였다.
湘州刺史 河東王 蕭譽는 날래고 용맹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다. 소역이 侯景을 토벌하려고 할 적에 使者를 보내어 그의 군량과 군대를 감독하도록 하였는데, 소예가 참여하지 않았다.
소방등이 그를 토벌하기를 청하자 소역이 마침내 어린 아들인 蕭方矩로 소예를 대신하도록 하고, 소방등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그를 호송하도록 하였다.
소방등이 출발할 적에 친한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번 행차에 나는 반드시 죽을 것인데, 알맞은 죽을 자리를 얻는다면 내가 어찌 다시 한스러워하겠는가!”라고 하였다.
麻溪에 도착하였는데, 소예가 그를 공격하자 소방등이 패하여 죽었으나, 소역은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注+① ≪水經註≫에 근거하면 “麻溪의 水口는 臨湘縣 북쪽과 劉口戍의 남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寵妃인 王氏가 蕭方諸를 낳고 나서 죽었는데, 소역은 서비가 왕씨를 죽였다고 의심하여
注+② 〈‘繹疑徐妃爲之’는〉 徐妃가 〈王氏를〉 독살했다고 의심한 것이다. 자살하도록 핍박하니, 서비가 우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目
【目】 蕭範은 臺城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경계를 엄히 하여 〈建康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僚佐가 모두 소범을 설득하기를 “지금 東魏 사람들이 이미 壽陽을 점거하고 있으니, 대왕께서 행보를 옮기시면 오랑캐들이 반드시 合肥를 엿볼 것입니다.”라고 하니, 소범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마침 高澄이 李伯穆을 보내어 합비를 압박하도록 하니, 소범이 한창 侯景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면서 동위에 의뢰하여 원조를 받고 합주를 이백목에게 넘겨주고 두 아들을 鄴城으로 보내어 군대를 보내달라고 요청하고, 〈소범은〉 濡須에 주둔하면서 상류의 군대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랜 시일이 지나도 도착하지 않았고, 동위 역시 군대를 보내지 않으니,
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소범은 군량이 모자라서 전진할지 후퇴할지 계책을 세우지 못하여 마침내 서쪽으로 올라가서 樅陽에 주둔하였다.
注+② ‘進退無計’는 전진하면 외롭고 힘없는 군사들로 侯景을 제압하기에 부족하고, 후퇴하면 合肥가 이미 東魏 사람들에 의해 점거됨을 말한 것이다. 樅은 七容의 切이다. 樅陽은 漢나라 때에 縣을 두어 廬江에 속하게 하였으며, 梁나라 때에 郡으로 고쳤다가 陳나라 때에 다시 縣이 되었다.
目
【目】 高澄이 衡州刺史 蘭欽의 아들인 蘭京을 잡아서 주방의 노예로 삼았는데, 난경이 여러 차례 직접 하소연하자, 고징이 그에게 곤장을 치며 말하기를 “다시 하소연하면 마땅히 너를 죽이겠다.”라고 하니, 난경이 그의 무리 6명과 더불어 난을 일으키려고 모의하였다.
고징이 琅邪公主를 총애하여 공주와 왕래하는 데 틈이 나지 않기를 원하여 侍衛를 항상 밖으로 내보냈는데,
注+① 間(틈)은 古莧의 切이다. 하루는 고징이 陳元康, 楊愔, 崔季舒와 함께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물리치고 禪讓을 받는 일을 모의하였다.
난경이 음식을 올릴 적에 칼을 쟁반 아래에 숨겨 고징을 죽였는데, 진원강이 몸으로 고징을 가려서 보호하다가 상해를 입었다. 高洋이 그 소식을 듣고는 안색에 동요가 없이 들어가 여러 적들을 토벌하여 목을 베고 살을 저미고는 비밀에 부치고 고징의 죽음을 공표하지 않았다.
目
【目】 陳元康이 손수 쓴 편지로 어머니와 하직하고, 입으로 읊어주어 功曹參軍 祖珽에게 편지를 쓰도록 하여 〈국가에〉 편리하고 마땅한 사항을 기술하게 하고는 밤에 이르러 죽었다.
공신과 귀족들은 중무장한 군대가 모두 并州에 있다고 여겨 高洋에게 일찍 晉陽으로 가도록 권하니 고양이 그 말을 따랐고, 밤에 督護 唐邕을 불러서 將士들을 나누어 사방을 진정시켜 막도록 하였는데, 잠깐 사이에 그 일을 마쳤다.
東魏主(元善見)는 〈고징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좌우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대장군이 죽은 것은 하늘의 뜻인 듯하니, 위엄과 권력을 다시 황실로 되돌려야 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目
【目】 侯景이 侯子鑑을 시켜 吳興을 침략하도록 하였는데, 오흥의 병력은 적고 약하였으며, 張嵊은 書生이어서 군사의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어떤 사람이 장승에게 袁君正을 본받아 후자감을 맞이하여 항복하자고 권하였다.
장승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袁氏는 대대로 충성과 정절을 이루었는데, 원군정이 하루아침에 무너뜨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注+① 袁氏는 袁淑에서 袁顗, 袁粲, 袁昂에 이르기까지 모두 충성과 정절로 절개를 드러냈었다. 내가 어찌 오흥이 오래 보전되기 어려운 줄 모르겠는가. 다만 몸을 나라에 바치기로 허락하였으니, 죽음이 있을지언정 두 마음을 먹지 않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장승은 전투에 패배하여 府로 돌아와 복장을 단정히 하고 편안하게 앉아 있었는데, 후자감이 그를 잡아 建康으로 보냈다. 후경이 목숨을 살려주려고 하자, 장승이 말하기를 “나는 외람되이 吳興太守를 맡아 조정이 위태로운 상황에 빠졌는데 구제하여 회복하지 못하였으니, 빨리 죽는 것이 다행스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후경이 여전히 그의 아들 한 명을 살려주려고 하자, 장승이 말하기를 “우리 가문은 이미 귀신의 명부에 올라 있으니, 너희 오랑캐에게 은혜를 바라지 않는다.”라고 하니, 후경이 진노하여 그들을 모두 죽이고, 沈浚도 함께 죽였다.
注+② 錄은 명부이다. 魏 文帝(曹丕)의 〈與吳質書〉에 “그의 성명을 보니, 이미 귀신의 명부에 올라 있다.”라고 하였다.
目
【目】 鮑泉이 湘州를 공격하자 河東王 蕭譽가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여 물러나 長沙를 보전하니, 포천이 그를 포위를 하였다.
岳陽王 蕭詧이 參軍 蔡大寳를 남겨두어 襄陽을 지키도록 하고 무리를 인솔하여 江陵을 정벌하여 상주를 구원하니, 湘東王 蕭繹이 크게 두려워하여 좌우에 있는 사람을 보내어 감옥으로 가서 王僧辯에게 계책을 묻도록 하였다.
왕승변이 책략을 갖추어 아뢰니, 소역이 마침내 그를 사면하여 城中都督으로 삼았다.
소찰이 강릉을 공격할 적에 마침 큰 비가 내려 평지의 수심이 4척이나 되어 소찰의 군대는 기세가 꺾였는데, 소역이 新興太守 杜崱과 친분이 있어 몰래 그를 맞아들이니,
注+① 漢 獻帝 建安 12년(207)에 雲中郡, 定襄郡, 五原郡, 朔方郡 4郡을 줄이고 郡에 하나의 縣을 세워 합쳐서 新興郡을 만들어 并州에 소속시켰다. 晉나라가 江左에 내려왔을 때 荊州의 경계에 신흥군을 僑置하여 세워 定襄縣과 廣牧縣 등을 거느리게 하였다. ≪五代志≫에 “南郡 安興縣은 옛날에 광목현과 정양현을 두었는데, 唐나라 때에 안흥현을 줄여 江陵에 편입시켰다.”라고 하였다. 新興은 진실로 荊州의 관할이었으니, 어찌 蕭繹이 예전의 친분이 있다고 하여 몰래 杜崱을 맞아들일 필요가 있었겠는가. 두즉이 비록 新興太守의 직임을 맡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종군하여 襄陽에 있었던 것이다. 崱은 士力의 切이다. 두즉이 부하들을 이끌고 소역에게 항복하였다.
그의 형인 杜岸이 500명의 기병으로 양양을 기습할 것을 요청하여 城과 30리 떨어진 곳에 이르자 城中에서 비로소 알아챘다.
채대보가 소찰의 어머니를 모시고 성에 올라 막으며 싸웠는데, 소찰이 그 소식을 듣고 달아나 양양으로 돌아가니, 두안 역시 도주하였다.
目
【目】 蕭繹이 마침내 王僧辯을 시켜서 鮑泉을 대신하여 長沙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邵陵王 蕭綸이 소역에게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지금 社稷이 위태롭고 치욕을 당하여 상처가 크고 고통이 심하니, 〈원수를 갚기 위해〉 오직 심장을 가르고 쓸개를 맛보아 피눈물을 흘리며 창을 베고 잠을 자고, 그 나머지 작은 분노는 너그럽게 넘겨야 하네.
注+① 創(상처가 나다)은 初良의 切이다. ≪禮記≫ 〈三年問〉에 “상처가 크면 날이 오래 걸리고, 아픔이 심하면 낫는 것이 더디다.”라고 하였다. ‘剖心’은 슬픔과 고통이 심하여 심장을 가르는 듯함을 말한 것이다. 春秋 때에 越王 句踐이 쓸개를 매달아놓고 핥고 밤에는 섶에 누워 자면서 吳나라에 복수하기를 바랐다고 하였다. ≪禮記≫ 〈檀弓〉에 “부모의 상을 치를 적에는 삼년 동안 피눈물을 흘렸다.”라고 하였다. 枕(베개를 베다)은 之任의 切이다. 晉나라 劉琨이 창을 베고 아침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역적의 머리를 효시하려고 마음먹었다. 貰는 용서하다는 뜻이다.
만일 외부의 어려움을 제거하지 않고 집안의 재앙이 그로 인해 발생한다면 〈그러한 나라는〉 고금의 역사를 헤아려볼 때 망하지 않은 경우가 없네. 정벌과 전쟁의 이치는 오직 승리를 구하는 것이지만, 골육지친 사이의 전쟁은 승리할수록 더욱 혹독하여 병사들을 피로하게 하고 의리를 잃어 잘못되는 경우가 많네.
아우가 만일 洞庭을 함락하고서 무력을 거두어들이지 않는다면 雍州 지역이 〈자신들을 핍박할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니,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는가. 반드시 西魏의 군대를 끌어들여 지원해주기를 바랄 것이니, 아우가 만일 불안해지면 나라는 끝장이네.”라고 하였는데,
注+② 湘州 지역은 洞庭湖로 에워싸져 있기 때문에 湘州를 洞庭이라고 말한 것이다. 雍州는 바로 襄陽이니, 梁나라에서 南雍州에 僑置하였다. 岳陽王 蕭詧이 鎭守하였다. 소역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소륜이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湘州가 만일 패배하면 나는 조만간 망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目】 宋子仙이 錢塘을 함락하고 승리의 기세를 타고서 浙江을 건너 會稽에 이르니, 邵陵王 蕭綸이 鄱陽으로 달아났다. 당시 회계는 물산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정예병이 수만 명이었고 양식과 병장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동부 지역 사람들이 侯景의 잔인함과 포학함을 두려워하여 모두 〈蕭大連을 위해〉 쓰이는 것을 즐거워했으나, 소대련은 아침저녁으로 술에 취하여 군대의 일을 걱정하지 않았고,
注+① 蕭大連은 梁主의 아들이다. 司馬 留異는 흉악하고 교활하며 잔인하고 포학하여 무리들에게 걱정거리가 되었으나 소대련은 군대의 일을 모두 그에게 맡겼다.
注+② 留異는 姓名이다.
송자선이 도착하자 소대련이 城을 버리고 달아나니, 유이는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여 송자선의 鄕導가 되어 소대련을 추격하여 붙잡아 건강으로 압송하였는데, 소대련은 여전히 취해서 알지 못하였다. 梁主(蕭綱)가 그 소식을 듣고는 소매로 가리고 울었다.
그리하여 三吳가 모두 후경에게 함락되자, 公侯 중에 회계에 있는 사람은 모두 남쪽으로 고개를 넘어 도망갔다. 후경은 유이를 東陽太守로 삼고, 그의 처자식을 잡아서 인질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