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李傕, 郭汜相攻連月하니 死者以萬數라 傕將楊奉이 謀殺傕이라가 事泄叛去하니 傕衆이 稍衰라
張濟自陝西至
注+陝縣, 屬弘農. 濟初平三年出戍焉.하여 欲和傕, 汜
하고 遷乘輿
하여 權幸弘農
하니 帝亦思舊京
注+舊京, 謂雒陽也.하여 遣使宣諭
하여 十反
에 汜, 傕
이 許和
러니
計未定에 而羌, 胡數來窺省門하고 曰 天子在此中邪아 李將軍이 許我宮人이러니 今皆何在오
帝患之하여 使謂將軍賈詡曰 卿이 前奉職公忠故로 升榮寵이러니 今羌, 胡滿路하니 宜思方略하라
詡乃召羌, 胡大帥하여 飲食之하고 許以封賞한대 羌, 胡皆引去하니 傕이 由此單弱하니라
目
【목目】 곽사郭汜가 이각李傕을 공격하는 일을 상의하였는데, 양표楊彪가 말하기를 “신하들이 함께 다투어 한 사람은 천자天子를 겁박하고 한 사람은 공경公卿을 볼모로 삼으니, 이렇게 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였다.
그러자 곽사가 노하여 직접 칼로 치려고 하였는데, 양표가 말하기를 “경卿은 국가國家(천자天子)도 받들지 않으니 내가 어찌 살기를 구하겠는가.” 하니, 곽사郭汜가 마침내 그만두었다.
이각이 강족羌族과 호족胡族 수천 명을 불러와서 어물御物을 그들에게 주고 궁인宮人을 주기로 허락하여 곽사를 공격하게 하고자 하였는데, 곽사가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밤에 이각의 영문營門을 공격하여 화살이 황제의 휘장에까지 날아왔다.
目
【목目】 만약 서주徐州를 공격하여 평정하지 못하면 장군이 장차 어디로 돌아가겠습니까? 또한 도겸陶謙이 비록 죽었으나 서주를 멸망시키기가 쉽지 않습니다.
저 서주徐州의 사람들은 왕년에 실패하였던 경험을 감계鑑戒로 삼아 틀림없이 성벽을 견고하게 수리하고 들판의 곡식을 모두 거두어들여서 미리 준비하고 장군을 기다릴 것이니, 서주徐州를 공격해도 함락시키지 못하고 노략질해도 얻는 바가 없으면 열흘도 못 되어 십만의 군대가 전투하기도 전에 절로 곤핍하게 될 것입니다.
예전에
서주徐州를 토벌할 적에 위엄과 형벌을 실로 행하였으니
注+〈“위벌실행威罰實行”은〉 도륙한 바가 많음을 이른다., 그
자제子弟들이
부형父兄들의 치욕을 기억하여 틀림없이 항복하려는 마음이 없을 것이요, 설령 서주를 격파하더라도 오히려 소유할 수 없을 것입니다.
注+서주徐州의 자제子弟들은 이미 부형父兄들의 원한이 있어서 반드시 조조曹操에게 진심으로 복종하지 않을 것이니, 비록 그들의 군대를 격파하더라도 오히려 그 땅을 소유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일에는 진실로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경우가 있으니, 큰 것을 작은 것과 바꾸는 것도 괜찮고, 편안함을 위태로움과 바꾸는 것도 괜찮고, 한때의 형세만 헤아리고 근본이 견고하지 못함을 근심하지 않는 것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지금 세 가지를 비추어보았을 때에 우리에게 이로운 점이 없으니, 장군께서는 심사숙고하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조조가 마침내 〈서주徐州의 공격을〉 중지하였다.
目
【목目】 여포呂布가 다시 진궁陳宮과 함께 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싸웠는데, 조조曹操의 군사들이 모두 보리를 수확하러 군영을 나가고 군영 안에 있는 자들은 천 명도 채 되지 못하였다.
조조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곳의 서쪽에 큰 제방이 있었는데, 조조가 제방의 뒤쪽에 군사들을 매복시키고 절반의 병사만을 내보내어 싸움을 걸게 하였다. 두 군대가 이미 교전을 하자 제방 뒤쪽에 매복하고 있던 군사들이 뛰쳐나와 여포의 군대를 크게 격파하여 정도定陶를 함락하고 군대를 나누어 여러 현縣을 평정하였다.
여포가 동쪽으로 서주徐州에 가서 유비劉備에게 의탁하였는데, 장막張邈이 여포를 따르고 그 아우 장초張超를 남겨두어 옹구雍丘를 지키게 하였다.
여포는 유비를 만나보고 매우 존경하여 유비를 자신의 장막 안으로 초청하여 그 아내의 침상 위에 앉히고 아내에게 유비를 향하여 절을 올리게 하고 주연을 베풀어 술을 따르고 음식을 대접하며 유비를 아우라고 칭하였다.
유비는 여포가 말에 조리가 없는 것을 보고 겉으로는 좋은 체하였으나 속으로는 기뻐하지 않았다.
目
【목目】 이각李傕과 곽사郭汜가 몇 달 동안 연이어 서로 공격하니, 죽은 자가 만 명으로 헤아릴 정도로 많았다. 이각의 장수 양봉楊奉이 이각을 죽일 것을 도모하다가 일이 누설되자 이각을 배반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떠나가니, 이각의 병력이 점점 쇠약해졌다.
장제張濟가
섬현陝縣에서 서쪽으로
장안長安에 이르러
注+섬현陝縣은 홍농弘農에 속하였다. 장제張濟가 초평初平 3년(192)에 이곳에 나가 수자리를 살았다. 이각과 곽사를 화해시키고
승여乘輿(
천자天子)를 옮겨서 잠시 동안
홍농弘農에 가 있게 하고자 하니, 황제 역시
구도舊都인
낙양雒陽을 그리워하여
注+구경舊京은 낙양雒陽을 이른다. 사자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기를 여러 차례 반복하자, 곽사와 이각이 화해할 것을 허락하였다.
이각이 화해할 계획을 아직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이각이 거느리고 있던 강족羌族과 호족胡族들이 자주 찾아와서 성문省門을 엿보고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이 안에 계신가? 이장군(이각)이 우리에게 궁인宮人을 주겠다고 허락하였는데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황제가 이를 근심하여 사람을 보내 장군 가후賈詡에게 이르기를 “경卿이 옛날에 직무를 수행함에 공정하고 충직하였기 때문에 승진하여 영총榮寵을 받았다. 그런데 지금 강족羌族과 호족胡族들이 길에 가득하니, 마땅히 방략方略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가후가 마침내 강족과 호족들의 우두머리를 불러서 술과 음식을 먹이고
을 내려주겠다고 허락하자 강족과 호족들이 모두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가니, 이각의 병력이 이로 말미암아 고단하고 약해졌다.
目
【목目】 이각李傕과 곽사郭汜는 양정楊定이 단외段煨를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불러서 함께 단외를 구원하고 이어서 황제를 겁박하여 서쪽으로 거둥하게 하고자 하니, 양정이 필마로 도망하여 형주荊州로 달아났다.
장제張濟는 양봉楊奉과 동승董承과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여 이에 다시 이각과 곽사와 연합하였다. 거가車駕가 마침내 홍농弘農으로 거둥하자 장제와 이각과 곽사가 함께 승여乘輿를 뒤쫓아가서 홍농弘農의 동간東澗에서 크게 전투를 벌였는데,
동승과 양봉의 군대가 패하여
백관百官과
사졸士卒로서 사망한 자가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어용의 물품,
부符와
책策,
전적典籍을 버려서 대부분 거의 다 유실되었다.
注+무릇 승여乘輿(황제)가 사용하는 물건은 모두 어물御物이 된다. 부符는 동호부銅虎符와 죽사부竹使符 따위이다. 책策은 간簡을 엮어서 만드니, 옛적에 고誥와 명命을 모두 책策에 썼다. 한漢나라 제도에 천자天子의 책서策書는 길이가 2척尺이다. 전적典籍은 내부內府의 도적圖籍과 상서대尙書臺 안의 고사故事 따위이다.
황제가
조양曹陽에 이르러 노숙하자
注+한데서 묵어 여사廬舍가 없는 것을 노차露次라고 한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섬군陝郡 서쪽 45리 지점에 조양간曹陽澗이 있다.” 하였다., 동승과 양봉이 마침내 이각 등을 속여서 연합하는 체하고,
은밀하게
간사間使를
하동河東으로 보내어
注+휼譎은 속임이다. 간間(몰래)은 고현古莧의 절切이다. 옛
백파白波의 우두머리인
이락李樂,
한섬韓暹(한섬),
호재胡才와
남흉노南匈奴의
우현왕 거비右賢王 去卑를 불러들이니
注+영제靈帝 말엽에 황건적黃巾賊의 잔당인 곽태郭太 등이 서하西河의 백파곡白波谷에서 일어나니, 이로 말미암아 백파적白波賊이라고 불렀다. 섬暹은 음이 섬纖이다. 거비去卑는 우현왕右賢王의 이름이니, 대하大夏의 혁련씨赫連氏가 바로 그 후예이다.,
모두 각자 자기 군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함께 이각 등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目
【
목目】
거가車駕가 출발하여 동쪽으로 갔는데
注+〈‘차가발동車駕發東’은 거가車駕가〉 조양曹陽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간 것이다. 이각李傕 등이 다시 와서 싸우니,
양봉楊奉 등이 크게 패하여 사망한 자의 수가
동간東澗의 전투보다도 훨씬 더 많았다.
이락李樂이 말하기를 “일이 급박하니, 폐하陛下께서는 마땅히 말을 타셔야 합니다.” 하자, 상上이 말하기를 “백관百官을 버리고 떠나갈 수 없으니, 이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하였다.
군사들의 행렬이 길에 40리나 이어져
注+철綴은 주위株衛의 절切이니, 잇닿음이다. 섬현陝縣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군영을 만들고 스스로 지키니, 황제를 호위하는
호분虎賁과
우림羽林의 무사들이 백 명도 채 못 되었다.
이락李樂이 두려워하여 거가車駕를 배에 태워 지주砥柱를 지나 맹진孟津으로 나가 〈육지에 오르고자 하였는데,〉 양표楊彪가 황하黃河의 수로水路가 험난하다고 하여 이에 이락에게 밤에 황하를 건너 배를 준비하고 불을 피워서 신호로 삼게 하였다.
상上이
공경公卿과 함께 도보로 군영을 나섰고
황후皇后의 오라비
복덕伏德이 황후를 부축하여 배에 오르니, 함께 황하를 건넌 사람은
양표楊彪 이하 겨우 수십 명뿐이었다.
注+〈“동제자 양표이하재수십인同濟者 楊彪以下纔數十人”은〉 그 궁녀宮女와 이민吏民 중에 황하黃河를 건너지 못한 자들은 모두 군사들에게 약탈을 당한 것이다.
目
【목目】 원소袁紹가 마침내 병력을 늘려 맹공을 가하니, 성안에 양곡糧穀이 이미 다하였다. 장홍이 장수와 관원 및 사민士民을 불러서 이르기를 “나 장홍은 대의大義로 볼 때 죽지 않을 수 없지만 그대들은 이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성이 함락되기 전에 처자식을 데리고 성을 나가는 것이 좋겠다.”
注+선先(앞섬)은 실천悉薦의 절切이다. 하니, 모두 눈물을 떨구며 말하기를 “밝으신
태수太守께서는
원씨袁氏와 본래
혐극嫌隙(원한)이 없었는데 지금
본조本朝의
군장郡將(
장초張超) 때문에 스스로
잔패殘敗와 곤궁을 초래하였으니,
관리와 백성들이 어찌 차마 밝으신 태수太守를 버려두고 떠나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쥐를 잡아먹고 활 따위의 힘줄과 뿔을 삶아 먹었는데, 뒤에는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주방廚房에 쌀이 3되가 있었는데 이것으로 묽은 죽을 쑤어 군사들에게 두루 나누어 주고
注+“삼승三升”은 ≪후한서後漢書≫ 〈장홍전臧洪傳〉에는 “삼두三斗”로 되어 있다. 또 그
애첩愛妾을 죽여서 먹이니
注+사食(먹이다)는 사飤로 읽는다.,
장수와 사졸들이 눈물을 흘려서 차마 얼굴을 들고 바라보는 자가 없었다. 남녀 7, 8천 명이 서로 잇달아 죽었지만 떠나가 배반하는 자가 없었다.
目
【목目】 공손찬公孫瓚이 이미 유우劉虞를 죽이고 유주幽州를 전부 차지하니, 자신의 재주와 능력을 믿고서 백성을 돌보지 않았으며, 남의 허물만 기억하고 좋은 점은 잊어버리고, 흘겨보는 정도의 사소한 원한에도 반드시 보복하였다.
의관衣冠을 갖춘 선사善士와 출중한 재능을 지닌 자들을 반드시 억누르고 곤란하게 하여 궁고窮苦한 상황에 처하게 하였다.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물으니,
공손찬이 말하기를 “의관衣冠을 갖춘 사대부士大夫들은 모두 자신은 직분職分상 당연히 존귀해야 한다고 여겨서 다른 사람이 베풀어준 은혜에 감사해 하지 않는다.” 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총애한 사람들은 대부분 장사치 따위의 용렬한 자들이어서 있는 곳마다 침탈과 포학함을 자행하니, 백성들이 원망하였다.
目
【
목目】 이보다 앞서
동요童謠에 “
연국燕國의 남쪽 경계와
조국趙國의 북쪽 경계에
중간中間이 합쳐지지 않은 곳이 크기가 숫돌만 한데, 오직 이 가운데에서만 난을 피할 수 있다.”
注+“여려如礪”는 그 크기가 〈숫돌만 하여〉 작음을 말하니, 태산泰山이 닳고 닳아서 숫돌만 해진다는 뜻과 같다. 하였다.
공손찬公孫瓚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
역현易縣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注+역易은 양익羊益의 절切이다. ≪한서漢書≫에는 “역현易縣은 탁군涿郡에 속하였다.” 하고, ≪속한지續漢志≫에는 “하간河間에 속하였다.” 하였다. 하여 마침내
역현易縣으로
진영鎭營을 옮기고
성루城壘를 에워싸는
참호塹壕를 열 겹으로 만들고 참호 안에 높이가 10
장丈인 큰
구릉丘陵을 쌓고서 그 위에
누樓(
망루望樓)를 만들되
철鐵로 문을 만들었다.
注+≪설문해자說文解字≫에 “경京은 사람이 만든 매우 높고 큰 구릉丘陵이다.” 하였다. ≪수경주水經注≫에 “역경易京은 역성易城의 서쪽 4, 5리 지점에 있으니, 역수易水가 그 남쪽을 지나간다.” 하였다.
그러고는 오로지 자신의 희첩姬妾과만 거주하고 빈객賓客들을 소원하게 대하여 가까이 신임하는 사람이 없으니, 모신謀臣과 맹장猛將들이 차츰 배반하여 이산離散하였다.
공손찬은 이후로 다시 공격하여 싸우는 일이 드물어졌는데, 어떤 이가 그 까닭을 묻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옛적에는 천하를 지휘指麾하여 평정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오늘날에 이르러 전쟁이 막 시작되고 있으니, 이것을 보건대 이는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군사들을 쉬게 하여 경작에 힘써서 흉년凶年을 구제하는 것만 못하다.
병법兵法에 ‘
는 공격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지금 나의 각 군영에는
누로樓樐(누로)가 수십 겹이고 비축한 양곡이 3백만
곡斛이니, 이 양곡을 다 먹으면 천하의 일이 판가름 나는 것을 충분히 기다릴 수 있다.”
注+노樐는 노櫓와 통하니, 성城 위에 수어守禦하는 망루望樓로 그 위에는 지붕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