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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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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八年이라
秦建元十九年이라
夏五月 桓沖 帥師伐秦하여 拔筑陽하다
桓沖 帥衆十萬하고 伐秦하여 攻襄陽할새 别將 攻筑陽拔之注+① 筑, 音逐. 筑陽縣, 漢屬南陽郡, 晉屬順陽郡.하다 遣慕容垂來救한대 進臨沔水하여 夜命軍士하여 人持十炬하여 繫于樹枝하니 光照數十里
하여 退還上明하여 表其兄子石民하여 領襄陽太守하여 戍夏口하고 自求領江州刺史하니 詔許之하다
秦王堅 下詔大擧할새 民毎十丁 遣一兵하고 其良家子年二十已下 有材勇者 皆拜羽林郞하다
又曰 其以司馬昌明爲尙書左僕射하고 謝安爲吏部尙書하고 桓沖爲侍中하여 先爲起第注+① 先爲之爲, 去聲.하라하다
良家子至者 三萬餘騎어늘 拜趙盛之하여 爲少年都統注+② 都統, 官名, 起於此.하다
是時 朝臣 皆不欲堅行호되 獨慕容垂姚萇及良家子勸之
陽平公融 諫曰 垂萇 我之仇讐 良家少年 皆富饒子弟 不閑軍旅하니 何可聽也리잇고 不聽하다
八月 遣融하여 督張蚝慕容垂等歩騎二十五萬하여 爲前鋒하고 以姚萇爲龍驤將軍하여 督益梁州諸軍하고
謂曰 昔 朕以龍驤建業하니 未嘗輕以授人이라 卿其勉之注+① 堅以龍驤將軍殺符生, 得秦國.하라
竇衝曰 王者 無戱言이니 此不祥之徵也니이다 黙然이러라
慕容紹 言於垂曰 主上 驕矜已甚하니 叔父建中興之業 在此行也니이다
遂發長安하니 戎卒 六十餘萬이요 騎二十七萬이러라 九月 至項城하니 涼州兵 始達咸陽하고 蜀漢兵 方順流而下하고
幽冀兵 至于彭城하여 東西萬里 水陸齊進하고 運漕萬艘
融等兵三十萬 先至潁口注+① 潁口, 潁水入淮之口也. 地理志 “潁水, 出陽城縣陽乾山, 東至下蔡, 入淮.”하다
詔以謝石爲征討大都督하고 謝玄爲前鋒都督하여 與將軍謝琰, 桓伊, 胡彬等으로 督衆八萬拒之注+① 石, 安之弟. 琰, 安之子也.하니 都下震恐이라
入問計於謝安한대 夷然答曰 已别有旨라하더니 旣而寂然注+② 夷, 坦也, 平也. 言坦然無異平日也.이라 遂命駕하여 出遊山墅注+③ 墅, 承與切, 園廬也.하니 親朋 畢集이라
與玄圍棊賭墅하니 安棊常劣於玄이러니 是日하여 便爲敵手하고 而又不勝注+④ 敵手, 謂下子爭行劫, 智筭相敵也. 玄意不在棊, 故不能勝安.하다 遂遊陟이라가 至夜乃還注+⑤ 遊陟, 遊山登高也.하다
桓沖 深以根本爲憂하여 遣精騎三千入援이어늘 固却之曰 朝廷處分已定하여 兵甲無闕하니 宜留以防西藩하라
歎曰 安石 有廟堂之量호되 不閑將略하여 今大敵垂至 方遊談不暇하며 遣諸不經事少年拒之하고 衆又寡弱하니 天下事 已可知 吾其左衽矣로다
以琅邪王道子 錄尙書六條事하다
秦陽平公融等 攻壽陽克之하니 胡彬 退保硤石이어늘 進攻之注+① 水經注 “淮水, 東過壽春縣北, 右合肥水. 又北逕山峽中, 謂之峽石. 對岸山上結二城, 以防津要.”하고 梁成等 屯于洛澗하여 柵淮以遏東兵注+② 水經注 “洛澗, 上承死馬塘水, 北歷秦墟, 下注淮, 謂之洛口.”하니 謝石謝玄等 憚不敢進이라
糧盡이어늘 潛遣使告石等曰 今賊盛糧盡하니 恐不復見大軍이로라
秦人 獲之하여 送於融한대 馳使하여 白秦王堅曰 賊少易擒이라 但恐逃去하오니 宜速赴之하소서
乃留大軍於項城하고 引輕騎八千하고 兼道就融하여 遣朱序하여 來說石等호되 不如速降이니라
序私謂石等曰 若秦衆盡至 誠難與爲敵이니 今乘諸軍未集하여 宜速擊之 若敗其前鋒이면 則彼已奪氣리니 可遂破也라하다
十一月 遣廣陵相劉牢之하여 帥精兵五千하고 趣洛澗한대 阻澗爲陳以待之注+① 陳, 讀曰陣, 下同.어늘 牢之直前渡水하여 擊成하여 大破斬之하고 分兵斷其歸津하니 秦歩騎崩潰하여 赴淮死者 萬五千人이라
於是 石等 水陸繼進하니 與融으로 登壽陽城望之라가 見晉兵部陣嚴整하고 又望見八公山上草木하고 皆以爲晉兵이라하여 顧謂融曰 此亦勍敵이니 何謂弱也오하고 憮然始有懼色注+① 胡三省曰 “八公山, 在今壽春縣北四里. 世傳 ‘漢淮南王安好神仙, 忽有八公, 皆鬚眉皓素, 詣門求見, 門者曰 「吾王好長生, 今先生無駐衰之術, 未敢以聞.」 八公皆變成童, 遂立廟於山上.’” 憮然, 失意貌.이러라
秦兵 逼肥水而陳이어늘 使謂融曰 君懸軍深入하여 而置陳逼水하니 此乃持久之計 非欲速戰者也 若移陳小却하여 使我兵得渡하여 以決勝負 不亦善乎
秦諸將 皆曰 我衆彼寡하니 不如遏之使不得上이니 可以萬全이니이다 堅曰 但使半渡하여 我以鐵騎 蹙而殺之 蔑不勝矣리라
融亦以爲然하여 遂麾兵使却하니 秦兵 遂退하여 不可復止러라
玄等 引兵渡水撃之한대 融騎略陳하여 欲以帥退者注+① 帥, 讀曰率.러니 馬倒하여 爲晉兵所殺하니 秦兵 遂潰
玄等 乗勝追擊하여 至于青岡注+② 胡三省曰 “靑岡, 去今壽春三十里.”하니 秦兵 大敗하여 自相蹈藉而死者 蔽野塞川하고
其走者 聞風聲鶴唳하고 皆以爲晉兵且至注+③ 唳, 鶴鳴也.라하여 晝夜不敢息하여 草行露宿하고 重以飢凍하여 死者什七八注+④ 草行者, 涉草而行, 不敢由路. 露宿者, 宿於野次, 不敢入人家, 皆懼追兵也. 重, 直用切.이러라
秦兵小却 朱序在陳後하여 呼曰 秦兵敗矣라하니 衆遂大奔이러라
序因與張天錫으로 皆來奔하니 獲堅所乗雲母車及儀服器械 不可勝計 復取壽陽注+① 晉制, 雲母車, 以雲母飾犢車, 臣下不得乘, 以賜王公耳. 雲母, 生土石間, 作片成層, 可析, 明滑光白者, 爲上.하다
中流矢하고 單騎走至淮北하여 飢甚이러니
民有進壺飧豚髀者注+① 壺, 漿. 飧, 食也. 豚, 小豕也. 髀, 股也.어늘 賜之帛한대 辭曰 陛下厭苦安樂하여 自取危困하시니 臣爲陛下子 陛下爲臣父 安有子飼其父而求報乎잇가하고 弗顧而去하다
謂張夫人曰 吾今復何面目治天下乎아하고 澘然流涕러라
是時 惟慕容垂 所將三萬人 獨全이라 堅以千餘騎赴之한대 世子寶言於垂曰 此時 不可失이니 願不以意氣微恩으로 忘社稷之重注+① 意氣微恩, 謂堅厚禮垂父子也.이니이다
垂曰 彼以赤心投我하니 若之何害之리오 天苟棄之 何患不亡이리오 不若保護其危以報德하여 徐俟其釁而圖之 旣不負宿心이요 且可以義取天下니라
慕容德曰 此爲報仇 非負宿心也니이다
垂曰 吾昔爲太傅所不容하여 置身無所어늘 秦王 以國士遇我하고 後復爲王猛所賣어늘 秦王 獨能明之하니 此恩 何可忘也리오 若氐運必窮이면 吾當懐集關東하여 以復先業耳라하고
悉以兵授堅하다
謝安 得驛書하여 知秦兵已敗하고 方與客圍棊러니 攝書置牀上하고 了無喜色하고 圍棊如故注+① 攝, 收也.어늘
問之한대 徐答曰 小兒軰 遂已破賊이로라
旣罷 還内할새 過戶限 不覺屐齒之折注+② 言其喜甚也.이러라
石等 歸建康하여 得秦樂工하여 能習舊聲하니 於是 宗廟始備金石之樂注+③ 永嘉之亂, 伶官樂器皆沒於劉․石. 江左初立, 宗廟以無雅樂及伶人, 省太樂幷鼓吹令. 是後, 頗得登歌․食擧之樂, 猶有未備. 太寧末, 明帝又訪阮孚等, 增益之, 咸和中, 成帝乃復置太樂官, 鳩集遺工, 而尙未有金石也. 及慕容儁平冉閔, 兵戈之際, 鄴下樂人頗亦有來者. 謝尙鎭壽陽, 採拾樂人, 以備太樂, 幷制石磬, 雅樂始頗具, 而王猛平鄴, 慕容氏所得樂聲, 又入關右. 今破符堅, 獲其樂工楊蜀等, 閑習舊樂, 於是, 金石始備焉.하다
收集離散하니 比至洛陽 衆十餘萬이라
慕容農 謂垂曰 尊 不迫人於險하시니 其義聲 足以感動天地注+① 尊, 謂其父垂也. 慕容令亦呼垂爲尊, 蓋其父子間相稱也. 夫取果於未熟與自落 不過晩旬日之間이나 然其難易美惡 相去遠矣니이다 埀善其言하다
行至澠池하여 言於堅曰 北鄙聞王師不利하고 輕相煽動하니 臣請奉詔書하여 以鎭慰之하노이다 許之어늘
權翼 諫曰 埀勇略過人하여 世豪東夏하니 譬如養鷹하여 飢則附人이나 每聞風飇之起 常有凌霄之志하니 正宜謹其絛籠이라 豈可解縱하여 任所欲哉注+① 飈, 卑遙切, 扶搖風也. 疾風自下而上曰飇. 絛, 他刀切, 絲繩也, 所以紲鷹. 籠, 所以蓄鳥也.잇가
堅曰 卿言 是也 然朕已許之호니 匹夫 猶不食言이어든 況萬乘乎 若天命有廢興이면 固非智力所能移也니라
翼曰 陛下重小信而輕社稷하시니 臣見其往而不返이니 關東之亂 自此始矣리이다 不聽하다
密遣壯士하여 邀埀於河橋러니 垂疑之하여 自涼馬臺 結草筏以渡注+② 此涼馬臺, 蓋在富平津橋之西也. 涼馬臺, 由昔人於河渚浴馬. 浴竟, 驅馬就高納涼, 因名. 筏, 音伐. 筏者, 箄筏也. 編蘆葦, 可以爲筏.러라
至長安 哭陽平公融而後入하다
◑ 以王國寶爲尙書郞하다
謝安壻王國寶 坦之之子也 惡其爲人하여 每抑而不用하니 由是怨安이러니
國寶從妹 爲會稽王道子妃 帝與道子 皆嗜酒狎昵하니 國寶乃譖安於道子하여 使離間之하다
功名旣盛이로되 而險詖求進之徒 多毁短安하니 帝稍疎忌之注+① 險詖, 不正也.러라
注+① 漢建安中, 曹公嚴酒禁.하다
◑ 秦呂光 攻龜兹하다
呂光 行越流沙하니 焉耆等諸國 皆降하되 惟龜兹王帛純 固守어늘 進攻之注+① 自玉門出, 渡流沙, 西行至鄯善, 北行至車師. 又且末國在鄯善西, 其國之西北, 有流沙數百里.하다
秦將軍乞伏國仁하여 據隴右注+① 乞伏, 鮮卑部落之名, 後以爲姓.하다
國仁 本隴西鮮卑 居勇士川注+① 勇士川, 卽漢天水勇士縣之地.하여 爲秦前將軍하여 從秦王堅入冦러니 叔父歩頽 聞秦師敗하고 率隴西叛之어늘
秦使國仁討之한대 國仁 遂與歩頽合하니 衆至十萬이라 據隴右하다
慕容垂 至安陽注+① 安陽, 在鄴城西南.하여 修牋於長樂公丕한대 丕身自迎之어늘 趙秋勸垂於座取丕하고 因據鄴起兵하니 垂不從이라
丕謀襲擊垂어늘 侍郞姜讓 諫曰注+② 晉制, 王國置侍郞三人. 垂反形未著어늘 而擅殺之하면 非臣子之義
不如待以上賓하고 嚴兵衛之하며 密表情狀하여 聽敕而後圖之니이다 丕從之하여 館垂於鄴西하다
垂潛與燕故臣으로 謀復燕祚러니 丁零翟斌 叛秦하여 謀攻洛陽注+① 丁零種落, 本居中山, 符堅之滅燕也, 徙於新安. 斌仕秦, 爲衛軍從事中郞.이어늘 秦王堅 驛書 使垂討之한대
石越 言於丕曰 垂有興復舊業之心이어늘 今復資之以兵이면 此爲虎傅翼也注+② 傅, 讀曰附.니이다 丕曰 垂在此 常恐爲肘腋之變하노니 今遠之於外 不猶愈乎注+③ 遠, 去聲.아하고 乃以羸兵弊鎧給之하고
又遣符飛龍하여 帥氐騎一千하여 爲之副하고 密戒飛龍曰 垂爲三軍之帥하고 卿爲謀垂之將하니 行矣勉之하라
垂請入鄴城拜廟호되 丕弗許注+① 燕都鄴, 故廟在鄴城.한대 乃潛服而入이어늘 亭吏禁之하니 垂怒하여 斬吏燒亭而去하다
石越 言於丕曰 垂反形已露하니 可因此除之니이다 丕曰 淮南之敗 垂侍衛乘輿하니 此功 不可忘也니라
退告人曰 公父子 好爲小仁하고 不顧大計하니 終當爲人擒耳리라
垂留慕容農及楷․紹於鄴하고 行至安陽하여 聞丕與飛龍謀하고 因激怒其衆曰
吾盡忠於符氏어늘 而彼專欲圖吾父子하니 吾雖欲已 得乎注+① 已, 止也.아하고 乃停河内募兵하니 旬日間 有衆八千이라
夜襲飛龍氐兵하여 盡殺之하고 以書遺秦王堅하여 言其故하고 而慕容鳳等 亦各帥部曲하고 歸翟斌注+② 言其故, 蓋言丕使飛龍圖己, 故殺之也. 通鑑 “慕容鳳及燕故臣之子燕郡王騰․遼西段延等, 聞翟斌起兵, 各帥部曲歸之.”하다
秦豫州牧平原公暉 遣毛當討斌이어늘 擊破斬之하고 垂遂濟河焚橋하니 有衆三萬이러라
遣人告農等하여 使起兵한대 農等 遂以晦日 將數十騎하고 微服出鄴하여 奔列人하여 止於烏桓魯利家注+① 列人縣, 漢屬鉅鹿郡, 魏․晉屬廣平郡, 其地在鄴城東北. 魏收地形志, 魏郡臨漳縣, 有列人城, 又別有列人縣, 亦屬魏郡.하니 利爲之置饌이어늘 笑而不食하다
利謂其妻曰 惡奴 貴人이어늘 家貧하여 無以饌之하니 奈何注+① 惡奴, 蓋詈其妻之語. 郞, 猶稱郞君, 指慕容農也. 胡三省曰 “今世俗多呼其主爲郞主, 又呼其主之子爲郞君.
妻曰 郞有雄才大志어늘 今無故而至하니 必將有異 非爲飲食來也 君亟出遠望하여 以備非常하라하니 利從之하다
謂利曰 吾欲集兵列人하여 以圖興復하노니 卿能從我乎 利曰 死生 唯郞是從호리이다
乃詣烏桓張驤하여 說之한대 再拜曰 得舊主而奉之하니 敢不盡死리잇고


【綱】 晉나라(東晉) 烈宗 孝武皇帝 太元 8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19년이다.
【綱】 여름 5월에 〈晉나라(東晉)의〉 桓沖이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前秦)를 공격하여 筑陽을 함락하였다.
【目】 桓沖이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秦나라를 공격하여 襄陽을 공격할 적에 别將이 筑陽城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注+① 筑은 음이 逐이다. 筑陽縣은 漢나라 때에는 南陽郡에 소속하였고, 晉나라 때에는 順陽郡에 소속하였다. 秦나라가 慕容垂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자, 모용수는 전진하여 沔水에 임해서 밤중에 군사들에게 명하여 각자 10개의 횃불을 잡게 해서 나뭇가지에 매다니, 횃불의 빛이 수십 리를 비추었다.
환충이 두려워하고 후퇴하여 上明으로 돌아가서 표문을 올려 형의 아들 桓石民에게 襄陽太守를 겸하게 하여 夏口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江州刺史를 겸하게 할 것을 청하니, 조정에서 조령을 내려 허락하였다.
【綱】 가을 8월에 秦王 符堅이 크게 군대를 일으켜 晉나라(東晉)를 침략하자, 晉나라에서는 征討都督 謝石과 冠軍將軍 謝玄 등을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나가서 막게 하였다.
【目】 秦王 符堅이 조령을 내려 군대를 크게 동원하여 晉나라를 공격할 적에 백성들은 10丁마다 한 병사를 내게 하고 良家의 자제 중에 나이 20세 이하로 재주와 용맹이 있는 자를 모두 羽林郞에 제수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晉나라의 司馬昌明(晉 孝武帝)을 尙書左僕射로, 謝安을 吏部尙書로, 桓沖을 侍中으로 삼고 〈長安에〉 미리 이들을 위하여 집을 지으라.” 하였다.注+① ‘先爲’의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良家의 자제 중에 징집에 응한 자가 3만여 기병이었는데, 趙盛之를 임명하여 少年都統으로 삼았다.注+② 都統은 官名이니, 이때 처음 만들었다.
【目】 이때 秦나라 조정의 신하들은 모두 符堅이 출정하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오직 慕容垂와 姚萇 및 良家의 자제들만이 권하였다.
陽平公 符融이 간하기를 “모용수와 요장은 우리의 원수이고, 양가의 소년들은 모두 부유한 집안의 자제여서 군대의 일에 익숙하지 않으니, 어찌 그들의 말을 따를 수 있습니까.” 하였으나, 부견은 듣지 않았다.
【目】 8월에 符堅은 符融을 보내어 張蚝(장자), 慕容垂 등 보병과 기병 25만을 감독하여 선봉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姚萇을 龍驤將軍으로 삼아 益州와 梁州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게 하고,
요장에게 이르기를 “옛날 짐이 용양장군으로 있으면서 왕업을 이루었으니, 내 일찍이 함부로 남에게 용양장군을 제수하지 않았다. 卿은 노력하라.” 하였다.注+① 符堅이 龍驤將軍으로 符生을 죽이고서 秦나라를 차지하였다.
竇衝이 말하기를 “王者는 농담을 하지 않는 법이니, 이것은 상서롭지 못한 조짐입니다.” 하자, 부견이 침묵하였다.
慕容紹가 모용수에게 말하기를 “主上이 교만하고 자랑함이 너무 심하니, 叔父가 中興의 업적을 세우는 것이 이번 걸음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目】 符堅이 마침내 長安을 출발하니, 병졸이 60여 만이요, 기병이 27만이었다. 9월에 項城에 이르니 涼州의 병사가 처음으로 咸陽에 도달하였고, 蜀 지방과 漢中의 군대가 막 長江의 강물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幽州와 冀州의 병사가 彭城에 이르러 동쪽과 서쪽 만 리의 수로와 육로로 일제히 진군하였는데, 漕運하는 배가 만 척이었다.
符融 등의 병사 30만이 먼저 潁水 어귀에 이르렀다.注+① 潁口는 潁水가 淮水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地理志≫에 “潁水는 陽城縣 陽乾山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下蔡에 이르러 淮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目】 〈晉나라의〉 조정에서는 조령을 내려 謝石을 征討大都督으로 삼고 謝玄을 前鋒都督으로 삼아 將軍 謝琰, 桓伊, 胡彬 등과 함께 8만의 군대를 감독하여 秦나라 군대를 막게 하니,注+① 謝石은 謝安의 아우이고, 謝琰은 사안의 아들이다. 이때 도성 아래의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謝玄이 조정에 들어와 謝安에게 계책을 묻자, 사안은 태연히 대답하기를 “〈황제께서〉 이미 별도로 명령이 있을 것이다.” 하고서는 이윽고 아무 말이 없었다.注+② 夷는 평탄함이요 평소이니, 〈‘夷然’은〉 평탄하여 평일과 다름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사안은 마침내 말에 멍에를 하도록 명하여 조정에서 나와 산의 별장에서 노니,注+③ 墅는 承與의 切이니, 전원의 별장이다. 친구들이 다 모였다.
사안은 사현과 별장을 걸고 내기 바둑을 두니, 평소 사안의 바둑 실력이 사현만 못하였는데, 이날은 사현이 두려운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집중을 하지 못하여〉 對局을 개시했을 때에는 막상막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기지도 못하였다.注+④ ‘敵手’는 바둑알을 놓아 行馬를 잡으려고 다투는데, 지략과 수를 계산함이 서로 대등함을 말한 것이다. 사현은 뜻이 바둑에 있지 않았으므로 사안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사안은 마침내 산으로 놀러 갔다가 밤이 되어서야 돌아왔다.注+⑤ ‘遊陟’은 산에 놀러 가서 높은 곳에 오름을 이른다.
【目】 桓沖은 京師가 공격 받을까 크게 우려하여 정예 기병 3천을 보내어 경사로 들어가 구원하려 하였으나, 謝安은 굳이 퇴각시키고 말하기를 “朝廷의 처분이 이미 정해져서 병기와 갑옷에 부족함이 없으니, 이들을 남겨두어 서쪽 변방을 막게 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환충은 탄식하기를 “謝安石이 조정 大臣의 국량은 있으나 장수의 智略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지금 큰 적이 쳐들어오는데도 노닐며 淸談을 즐기기에 겨를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큰일을 경험해보지 못한 소년들을 보내어 적을 막게 하고 병력도 적고 약하니, 천하의 일을 이미 알 만하다. 〈결국 오랑캐의 통치를 받아〉 나는 아마도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게 될 것이다.” 하였다.
【綱】 〈晉나라(東晉)가〉 琅邪王 司馬道子를 錄尙書六條事로 삼았다.
【綱】 겨울 11월에 〈晉나라(東晉)의〉 謝石과 謝玄 등이 秦나라(前秦) 군대를 肥水에서 대파하여 그 대장 符融을 죽이니, 秦王 符堅이 패주하여 長安으로 돌아갔다.
【目】 秦나라 陽平公 符融 등이 壽陽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晉나라의 胡彬이 후퇴하여 硤石을 지켰다. 그러자 부융은 협석으로 진격하고注+① ≪水經註≫에 “淮水는 동쪽으로 壽春縣 북쪽을 지나 오른쪽으로 肥水와 합류한다. 또 북쪽으로 山峽 가운데를 지나가니, 이곳을 ‘峽石’이라 이른다. 對岸의 산 위에 두 城을 쌓아 중요한 나루터를 막았다.” 하였다. 梁成 등이 洛澗에 군대를 주둔하여 淮水에 木柵을 설치하여 강동의 군대를 막으니,注+② ≪水經註≫에 “洛澗은 위로 死馬塘의 물을 받아 북쪽으로 秦墟를 지나 아래로 淮水에 주입하니, 이곳을 洛口라 한다.” 하였다. 謝石과 謝玄 등이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호빈은 군량이 다하자 은밀히 사자를 보내어 사석 등에게 고하기를 “지금 적이 강성하고 우리의 군량이 다하였으니, 다시는 우리의 大軍을 보지 못할까 염려됩니다.” 하였다.
秦나라 사람이 이 사자를 사로잡아 부융에게 보내자, 부융이 사자를 급히 보내어 秦王 符堅에게 아뢰기를 “賊은 병력이 적어 쉽게 사로잡을 수 있으나 다만 도망할까 염려되니, 속히 晉軍을 향해 달려오셔야 합니다.” 하였다.
부견은 이에 大軍을 項城에 남겨두고 輕武裝한 기병 8천 명을 인솔하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부융에게 왔다. 그리고 朱序를 보내어 사석 등을 설득하기를 “속히 항복하는 것만 못하다.” 하였다.
주서가 은밀히 사석 등에게 이르기를 “만약 秦나라의 병력이 다 도착하면 진실로 이들과 대적하여 싸우기가 어려우니, 지금 군대가 아직 집결하지 않았을 때에 미쳐 속히 공격하여야 한다. 만약 그들의 선봉 부대를 패퇴시키면 저들은 사기가 크게 떨어질 것이니, 마침내 격파할 수 있다.” 하였다.
【目】 11월에 謝玄이 廣陵相 劉牢之를 보내어 정병 5천 명을 거느리고 洛澗으로 달려가게 하자, 梁成이 낙간을 막고 陣을 쳐 대비하였다.注+① 陳은 陣으로 읽으니, 아래도 같다. 유뇌지가 곧장 앞으로 물을 건너가서 양성을 공격하여 대파해서 참수하고 군대를 나누어 秦軍이 되돌아갈 나루터를 차단하니, 秦나라 보병과 기병이 붕괴하여 淮水에 뛰어들어 죽은 자가 1만 5천 명이었다.
【目】 이에 謝石 등이 수로와 육로로 계속 전진하니, 符堅은 符融과 함께 壽陽城에 올라 이것을 바라보다가 晉나라 군대의 진영이 매우 엄격하고 정돈된 것을 보고서 다시 八公山 위의 초목들을 바라보고는 이것을 모두 晉나라 병사라고 여겨 부융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들 또한 강한 적이니, 어찌 약하다고 하겠는가.” 하고는 망연자실하여 처음으로 두려워하는 기색이 있었다.注+① 胡三省이 말하였다. “八公山은 지금의 壽春縣 북쪽 4리 지점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漢나라 淮南王 劉安이 신선을 좋아하였는데, 갑자기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센 여덟 公이 문으로 찾아와 만나볼 것을 청하였다. 문지기가 말하기를 「우리 왕은 長生하고자 하시는데, 지금 선생은 노쇠함을 멈추는 방법이 없으니, 감히 아뢸 수가 없습니다.」 하자, 여덟 公이 모두 변하여 동자가 되었으므로 마침내 사당을 산 위에 세웠다.’고 한다.” ‘憮然’은 失意한 모양이다.
【目】 秦나라 군대가 肥水 가까이에 진을 치자, 謝玄이 사자를 보내어 符融에게 이르기를 “그대가 군대를 이끌고 적진 속에 깊이 쳐들어가 강물 가까이 陣을 설치하니, 이것은 바로 持久戰을 하려는 계책이요, 속히 싸우고자 하려는 것이 아니다. 만약 진영을 뒤로 조금만 물려 우리 군대로 하여금 비수를 건너 승부를 결단하게 한다면 좋지 않겠는가.” 하였다.
秦나라의 여러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들은 병력이 많고 저들은 적으니, 저들을 막아서 올라오지 못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이렇게 하면 萬全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하였으나, 符堅은 말하기를 “다만 적을 반쯤만 건너오게 하여 우리가 鐵騎로써 압박하여 죽이면 이기지 못할 리가 없다.” 하였다.
부융 또한 그 말을 옳게 여겨 마침내 군대를 지휘하여 퇴각하게 하니, 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후퇴하여 다시는 멈출 수가 없었다.
【目】 謝玄 등이 肥水를 건너가 공격하자, 符融이 말을 타고 陣을 〈정비하고자〉 순행하여 퇴각하는 군사들을 통솔하고자 하였는데,注+① 帥은 率로 읽는다. 타고 있던 말이 쓰러져 부융이 晉나라 병사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니, 秦나라 군대가 마침내 궤멸하였다.
謝玄破秦百萬兵圖謝玄破秦百萬兵圖
사현 등이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青岡에 이르니,注+② 胡三省이 말하였다. “靑岡은 지금의 壽春과 30리 거리에 있다.” 秦나라 군대가 대패하여 자기들끼리 밟혀 죽은 자가 들을 뒤덮고 냇물을 막았다.
그리고 도망간 자들은 바람 소리와 학 울음소리를 듣고는 모두 晉나라 군대가 장차 이를 것이라고 여겨注+③ 唳는 鶴이 우는 것이다. 밤이나 낮이나 감히 휴식하지 못하며 〈인적이 드문〉 草野의 길을 가고 露宿을 하였다. 게다가 굶주림과 추위가 겹쳐 죽은 자가 10에 7, 8명이었다.注+④ ‘草行’은 감히 큰길을 따라가지 못하고 풀이 난 거친 땅을 밟고 가는 것이요, ‘露宿’은 감히 인가에 들어가 자지 못하고 들에서 留宿하는 것이니, 모두 추격하는 晉軍을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다. 重(거듭)은 直用의 切이다.
【目】 처음에 秦나라 군대가 조금 퇴각할 적에 朱序가 진영 뒤에 있으면서 큰 소리로 “秦나라 군대가 패했다.” 하니, 秦나라 무리가 마침내 크게 도망하였다.
과 함께 모두 晉나라로 도망하여 오니, 晉나라가 부견이 타던 雲母車와 儀服과 器械를 이루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노획하였고, 또다시 壽陽을 점령하였다.注+① 晉나라 제도에 雲母車는 雲母를 가지고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꾸민 것이니, 신하는 이 수레를 탈 수가 없어 王公에게 하사할 뿐이었다. 雲母는 흙과 돌 사이에서 생산되는데, 작은 조각들이 층을 이루고 있어 조각을 나눌 수 있는바, 밝고 매끄럽고 빛나고 백색인 것이 上品이다.
【目】 符堅이 流矢를 맞고 單騎로 달아나 淮水 북쪽에 이르러 몹시 굶주렸다.
백성 중에 음료와 밥과 돼지 다리를 올리는 자가 있으므로注+① 壺는 병의 음료이고 飧은 밥이다. 豚은 작은 돼지요, 髀는 다리이다. 부견이 그에게 비단을 하사하자, 사양하기를 “폐하께서 안락함을 싫어하고 괴로워하여 스스로 위태로움과 곤궁함을 초래하셨습니다. 臣은 폐하의 자식이고 폐하는 신의 아버지이시니, 어찌 자식이 아버지에게 음식을 먹이면서 보답을 바라겠습니까.” 하고는 돌아보지 않고 떠나갔다.
부견은 張夫人에게 이르기를 “나는 이제 다시 무슨 면목으로 천하를 다스리겠는가.” 하고는 눈물을 줄줄 흘렸다.
【目】 이때 慕容垂가 거느리고 있는 3만의 병력만 온전하였다. 符堅은 천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모용수에게 달려가자, 世子 慕容寶가 모용수에게 말하기를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되니, 원컨대 意氣와 작은 은혜 때문에 중대한 社稷의 계책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注+① 意氣와 작은 은혜는 부견이 모용수 父子를 후대하고 예우한 것을 이른다.
모용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그가 진심으로 나에게 오니, 어떻게 그를 해치겠는가. 하늘이 만약 그를 버린다면 어찌 그가 망하지 않음을 근심하겠는가. 그의 위태로움을 보호하여 옛날 은덕에 보답하고서 천천히 기회를 기다려 도모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이미 평소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으면서도 의리로써 천하를 취할 수 있다.”
【目】 慕容德이 慕容垂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원수를 갚는 것이니, 옛 마음을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니,
모용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옛날에 太傅(慕容評)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몸을 의탁할 곳이 없었는데, 秦王이 나를 國士로 대우하였다. 뒤에 다시 王猛에게 모함받았는데, 진왕이 홀로 이것을 능히 살펴주었으니, 이 은혜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만약 氐族의 運이 반드시 궁하게 된다면 내 마땅히 關東 지방을 회유하여 先代의 공업을 회복할 것이다.”
모용수는 병력을 모두 符堅에게 주었다.
【目】 謝安이 파발로 전달한 勝戰報[驛書]를 받고 秦나라 군대가 이미 패퇴했음을 알고서는 막 손님과 바둑을 두었는데, 승전보를 접어 상 위에 놓고는 조금도 기뻐하는 기색이 없고 예전처럼 그대로 바둑을 두었다.注+① 攝은 거둠이다.
圍棋報捷圖圍棋報捷圖
손님이 문서의 내용을 묻자, 천천히 대답하기를 “작은 아이들이 마침내 적을 격파했다.” 하였다.
사안은 바둑이 끝나고 나서 내실로 돌아갔는데, 문턱을 지날 적에 나막신의 굽이 부러지는 것도 알지 못하였다.注+② 〈‘過戶限不覺屐齒之折’은〉 謝安이 몹시 기뻐함을 말한 것이다.
謝石 등이 建康으로 돌아와 秦나라 樂工을 얻었다. 악공들이 능히 옛 음악을 익숙히 아니, 晉나라 宗廟에 비로소 金石의 음악(雅樂)이 갖추어졌다.注+③ 永嘉의 亂에 伶官과 樂器를 모두 劉聰과 石勒에게 빼앗겼다. 江東에 처음 나라를 세울 적에 宗廟에 雅樂의 악기와 이를 연주할 伶人이 없다 하여 太樂과 鼓吹令을 없앴는데, 이후에 자못 의 음악을 얻었으나, 아직도 미비하였다. 太寧 말년에 明帝가 또다시 阮孚 등에게 물어 음악을 더 보탰고, 咸和 연간에 成帝가 다시 太樂官을 설치하고 남은 工人들을 모았으나, 아직도 金石의 음악이 갖추어지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慕容儁이 冉閔을 평정하게 되자, 전쟁하는 즈음에 鄴下의 악공들 중에 진나라에 온 자가 자못 있었다. 그리고 謝尙이 壽陽에 진주했을 적에 악공들을 선발하여 太樂을 구비하였고, 아울러 石磬을 만들어 雅樂이 처음으로 크게 구비되었다. 王猛이 鄴城을 평정하자, 慕容氏가 얻은 음악이 또 關西 지방으로 들어왔다. 지금 符堅을 격파하고 그 악공인 楊蜀 등을 얻었는데 옛날 음악에 익숙하니, 이에 비로소 金石의 음악이 갖추어졌다.
【目】 符堅이 離散한 자들을 거두어 모으니, 洛陽에 이르렀을 때 무리가 10여만에 이르렀다.
慕容農이 慕容垂에게 이르기를 “尊前께서 험한 처지에 남을 몰아넣지 않으셨으니, 의로운 명성이 충분히 하늘과 땅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注+① 尊은 慕容農의 아버지 慕容垂를 이른다. 慕容令 또한 모용수를 불러 尊이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 부자간이 서로 칭한 호칭이다. 과일이 익기 전에 취함과 과일이 익어 저절로 떨어졌을 때 취함은 그 간격은 열흘을 늦추는 데에 불과하나, 어렵고 쉬움과 아름답고 아름답지 못한 차이는 큽니다.” 하니, 모용수가 그의 말을 좋게 여겼다.
【目】 〈秦軍이〉 행군하여 澠池에 이르러 慕容垂가 符堅에게 말하기를 “북쪽 변방에서 왕의 군대가 승리하지 못했다는 말을 듣고는 서로 가벼이 煽動하니, 臣은 詔書를 받들어 그들을 진무하기를 청합니다.” 하자, 부견이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權翼이 諫하기를 “모용수는 용맹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대대로 東夏 지방(중국 동부 지역)의 호걸이 되었습니다. 비유하건대 기르는 매와 같아 굶주리면 사람의 명령을 따르나 회오리바람이 일어나는 소리를 들으면 항상 하늘 높이 날려는 뜻이 있으니, 바로 그의 목줄과 새장을 신중히 살펴야 합니다. 어찌 풀어놓고 그가 하고자 하는 대로 내버려두십니까.” 하자,注+① 飈는 卑遙의 切이니, 회오리바람이다. 빠른 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을 飇라 한다. 絛는 他刀의 切로, 실끈이니, 매를 묶어놓는 것이다. 籠은 새를 가두어 기르는 새장이다.
부견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卿의 말이 옳다. 그러나 朕이 이미 이를 허락하였으니, 匹夫도 오히려 食言을 하지 않는데, 하물며 萬乘의 천자임에랴. 만약 天命이 흥하게 하고 망하게 함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지혜와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권익이 말하기를 “폐하께서 작은 신의를 중하게 여기시고 社稷을 경시하시므로 신은 그가 갔다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보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關東 지방의 亂은 이로부터 시작될 것입니다.” 하였으나, 부견은 듣지 않았다.
권익이 은밀히 壯士를 보내어 모용수를 河橋에서 요격하게 하였는데, 모용수가 이를 의심하고서 涼馬臺에서 갈대를 엮어 뗏목을 만들어 河水를 건너갔다.注+② 이 涼馬臺는 아마도 富平津 다리의 서쪽에 있었을 것이다. 양마대는 옛사람이 황하 물가에서 말을 목욕시키고서 목욕이 끝나면 말을 몰아 높은 곳에 올라가 시원하게 해주었으므로 인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筏은 음이 伐이다. 筏은 큰 뗏목[箄筏]인데, 갈대를 엮으면 뗏목을 만들 수 있다.
부견은 長安에 이르러 陽平公 符融의 상에 곡한 뒤에 궁중으로 들어갔다.
【綱】 〈晉나라(東晉)가〉 謝石을 尙書令으로 삼고 謝玄의 칭호를 前將軍으로 올려주었는데,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綱】 〈晉나라(東晉)가〉 王國寶를 尙書郞으로 삼았다.
【目】 謝安의 사위 王國寶는 王坦之의 아들이다. 사안은 그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매번 억누르고 등용하지 않으니, 왕국보가 이 때문에 사안을 원망하였다.
왕국보의 從妹가 會稽王 司馬道子의 妃가 되었다. 황제(孝武帝)와 사마도자는 모두 술을 좋아하고 서로 친압하니, 왕국보가 마침내 사안을 사마도자에게 참소하여 이간질하게 하였다.
사안은 功名이 이미 높았으나, 음험하고 사특한 마음으로 등용되기를 구하는 무리 대다수가 사안을 훼방하니, 황제가 차츰 그를 멀리하고 미워하였다.注+① ‘險詖’는 바르지 못한 것이다.
【綱】 〈晉나라(東晉)가〉 처음으로 술의 금령을 解制하고, 백성들의 稅米를 늘려서 인구마다 다섯 石을 거두었다.注+① 漢나라 建安 연간에 曹公(曹操)이 술의 금령을 엄하게 하였다.
【綱】 秦나라(前秦) 呂光이 龜兹를 공격하였다.
【目】 呂光이 流沙를 넘어 〈西域으로〉 進軍하니 焉耆 등 여러 나라가 모두 항복하였으나, 오직 龜兹王 帛純이 굳게 지키므로 여광이 龜兹로 진격하였다.注+① 玉門關에서 나가 流沙를 넘어 서쪽으로 가서 鄯善에 이르고, 북쪽으로 가서 車師에 이른다. 또 且末國(저말국)이 鄯善의 서쪽에 있는데, 이 나라의 서북쪽에 수백 리의 流沙가 있다.
【綱】 秦나라(前秦) 장군 乞伏國仁이 배반하여 隴右(隴西)를 점거하였다.注+① 乞伏은 鮮卑部落의 이름이니, 뒤에 이것을 姓으로 삼았다.
【目】 乞伏國仁은 본래 隴西의 鮮卑族이었다. 勇士川에 거주하여注+① 勇士川은 바로 漢나라 天水郡 勇士縣의 땅이다. 秦나라의 前將軍이 되어 秦王 符堅을 따라 晉나라(東晉)에 쳐들어갔는데, 叔父 乞伏歩頽가 秦나라 군대가 패했다는 말을 듣고 隴西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배반하였다.
秦나라에서 걸복국인으로 하여금 그를 토벌하게 하자, 걸복국인은 마침내 걸복보퇴와 연합하니, 무리가 10만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隴右를 점거하였다.
【綱】 丁零의 翟斌이 군대를 일으켜 洛陽을 공격하자, 秦나라(前秦)가 慕容垂로 하여금 그를 토벌하게 하였는데, 모용수가 진나라를 배반하고 적빈과 연합하였다.
【目】 慕容垂가 安陽에 이르러注+① 安陽은 鄴城의 서남쪽에 있다. 長樂公 符丕에게 편지를 써서 우호를 청하자, 부비가 직접 맞이하였다. 趙秋가 모용수에게 이 자리에서 부비를 사로잡고 인하여 鄴城을 점거하여 군대를 일으킬 것을 권하였는데, 모용수가 따르지 않았다.
부비가 모용수를 습격할 것을 도모하자, 侍郞 姜讓이 諫하기를注+② 晉나라 제도에 제후왕의 나라에 侍郞 세 명을 두었다. “모용수가 배반하려는 形迹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는데, 마음대로 죽이면 臣子의 도리가 아닙니다.
그를 上賓의 예로 대우하고 군대를 엄밀히 갖추어 방위하며 情況을 은밀히 표문으로 보고하고서 조령을 들은 뒤에 일을 도모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부비가 이 말을 따라서 모용수를 업성 서쪽에 머물게 하였다.
【目】 慕容垂가 은밀히 燕나라(前燕)의 옛 신하들과 함께 연나라의 기업을 회복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마침 丁零의 翟斌이 秦나라를 배반하여 洛陽을 공격할 것을 도모하자,注+① 丁零의 종족 부락은 본래 中山에 거주하였는데, 符堅이 燕나라를 멸망했을 적에 그들을 新安으로 옮겼다. 翟斌이 秦나라에서 벼슬하여 衛軍從事中郞이 되었다. 秦王 符堅이 파발마로 글을 보내어 모용수로 하여금 토벌하게 하였다.
石越이 符丕에게 말하기를 “모용수가 옛 기업을 회복할 마음이 있었는데, 이제 다시 그에게 병력을 빌려주면 이는 호랑이에게 날개를 붙여주는 것입니다.” 하니,注+② 傅(붙이다)는 附로 읽는다. 부비가 말하기를 “모용수가 이곳에 있으면 항상 가까이 있는 재난이 될까 두려우니, 이제 그를 밖으로 멀리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고는注+③ 遠(멀리하다)은 去聲이다. 마침내 파리한 병사와 낡은 병기를 주었다.
또 符飛龍을 보내어 氐族의 기병 1천 명을 거느리고서 副將이 되게 하고 은밀히 부비룡에게 경계하기를 “모용수는 三軍의 統師가 되고 卿은 모용수를 도모하는 장수가 되었으니, 부디 가서 노력하라.” 하였다.
【目】 慕容垂가 鄴城에 들어가 선조의 사당에 배알할 것을 청하였으나 符丕가 허락하지 않자,注+① 燕나라(前燕)는 鄴城에 도읍하였는데, 옛 사당이 업성에 있었다. 마침내 편한 복장 속에 갑옷을 입고 들어갔는데, 亭을 관리하는 亭長이 진입을 허락하지 않으니, 모용수가 노하여 그 관리를 참수하고서 亭을 불태우고 떠나갔다.
石越이 부비에게 말하기를 “모용수의 배반한 형적이 이미 드러났으니, 이 기회를 통해 제거하여야 합니다.” 하니, 부비가 말하기를 “淮南에서 敗戰하였을 적에 모용수가 乘輿(符堅)를 侍衛하였으니, 이 공을 잊을 수 없다.” 하였다.
석월이 물러가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長樂公의 父子가 작은 仁을 행하기 좋아하고 국가의 큰 계책을 돌보지 않으니, 끝내 마땅히 남에게 사로잡힐 것이다.” 하였다.
【目】 慕容垂가 慕容農과 慕容楷, 慕容紹를 鄴城에 남겨두고 행군하여 安陽에 이르렀는데, 符丕가 符飛龍과 모의했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수하의 군사들을 激怒시키기를
“내가 符氏에게 충성을 다하였는데, 저들은 오로지 우리 父子를 도모하고자 하니, 내 비록 그만두고자 하나 될 수 있겠는가.” 하고는注+① 已는 그만둠이다. 마침내 河内에 머물며 군대를 모집하니, 열흘 사이에 8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밤에 부비룡의 氐族의 군대를 기습하여 모두 죽이고 편지를 秦王 符堅에게 보내어 그 緣故를 말하였다. 그리고 慕容鳳 등도 각기 部曲을 거느리고 翟斌에게 歸附하였다.注+② ‘言其故’는 符丕가 符飛龍으로 하여금 자기를 도모하게 하였으므로 그를 죽인 일을 이른다. ≪資治通鑑≫에 “慕容鳳과 燕나라 옛 신하의 아들인 燕郡 王騰과 遼西 段延 등은 翟斌이 군대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각기 部曲을 거느리고 적빈에게 귀부했다.” 하였다.
【目】 마침 秦나라(前秦) 豫州牧 平原公 符暉가 毛當을 보내어 翟斌을 토벌하자, 慕容鳳이 그를 격파하여 참수하였고, 慕容垂가 마침내 河水를 건너 다리를 불태웠는데, 이때 모용수가 3만 명의 병력을 보유하였다.
모용수는 사람을 보내어 慕容農 등에게 고하여 군대를 일으키게 하자, 모용농 등은 마침내 그믐날에 수십 기병을 거느리고 微服 차림으로 鄴城을 나와 列人으로 달아나서 烏桓族 魯利의 집에 머물렀다.注+① 列人縣은 漢나라 때에는 鉅鹿郡에 속하였고, 魏나라와 晉나라 때에는 廣平郡에 속하였으니, 이 지역은 鄴城 동북쪽에 있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의하면 魏郡의 臨漳縣에 列人城이 있고, 또 별도로 列人縣이 있으니, 또한 魏郡에 소속하였다. 노리가 그를 위하여 음식을 대접하였으나, 모용농은 웃기만 하고 먹지는 않았다.
【目】 魯利가 그의 아내에게 이르기를 “못된 계집종아, 저 郞君은 貴人인데, 우리집이 가난하여 음식을 대접할 것이 없으니, 어찌하겠는가.” 하니,注+① ‘惡奴’는 그의 아내를 꾸짖은 말이다. 郞은 郞君이라 칭함과 같으니, 慕容農을 가리킨 것이다. 胡三省이 말하였다. “지금 세속에도 주인을 郞主라 부르는 경우가 많고, 또 주인의 아들을 郞君이라 부른다.”
아내가 말하기를 “郞君은 웅대한 재주와 큰 뜻이 있는데 지금 이유 없이 왔으니, 틀림없이 평상적이지 않은 일이 있을 것입니다. 음식을 먹으러 온 것이 아니니, 그대는 빨리 나가 멀리 망을 보고 비상사태에 대비하십시오.” 하니, 노리가 그 말을 따랐다.
모용농이 노리에게 이르기를 “내 列人에서 군대를 모집하여 옛 燕나라를 회복하기를 도모하고자 하니, 卿은 나를 따르겠는가.” 하자, 노리가 말하기를 “죽는 일이든 사는 일이든 오직 郞君을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모용농은 마침내 烏桓族의 張驤에게 가서 그를 설득하자, 장양이 再拜하고 말하기를 “옛 주인을 얻어 받들게 되었으니, 감히 죽을힘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역주
역주1 秦王堅……帥師拒之 : “‘秦나라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들어와 침략했다.’고 말하지 않고 ‘秦王 符堅’이라고 말한 것은 秦나라의 온 나라 사람들이 모두 출정을 원하지 않았으나 유독 부견이 여러 사람의 의견을 어기고서 남쪽으로 향할 것을 결심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특별히 써서 부견의 죄를 드러낸 것이다.[不曰秦大擧入寇 而必曰秦王堅者 此行 秦人擧國皆不欲 獨堅違衆 決意南向 是以綱目特書之 以著堅之罪也]” ≪發明≫
역주2 謝石謝玄等……走還長安 : “위에서 ‘大擧(크게 군대를 일으켰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秦나라가 많은 병력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래에 秦나라 군대를 대파했다고 쓰고 그 대장을 죽였다고 썼으니, 이는 통쾌하게 여긴 말이다. 앞서 ‘大熟(大豊이 들었다.)’이라 쓰고 뒤이어 ‘大擧’라고 쓰고 여기서는 ‘大破’라 썼으니, 그렇다면 하늘의 요행을 믿는 자가 거울로 삼을 만하다.[書大擧 何 秦恃衆也 故下書大破秦兵 書殺其大將 快辭也 前書大熟 繼書大擧 此書大破 然則恃天幸者 可以鑑矣]” ≪書法≫“晉나라 淝水의 승리는 또한 하늘의 요행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 謝石 등에게 공을 돌린 것은 이때 謝安이 정승이 되어 政事가 화평하였으며 謝石 등의 재능이 관직에 걸맞고 上下가 화목하여 진실로 본래 秦나라를 이길 이치가 있어서였다. 저 符堅이 강대함을 믿고 여러 번 승리하여 교만해져서 晉나라가 비록 미약하나 기회를 탈 수 있는 틈이 없음을 알지 못하였다. 이에 경거망동하여 온 나라의 병력을 동원해서 남쪽으로 내려왔으니, 진실로 본래 敗亡할 이치가 있었다. 그러므로 비록 초목도 사람의 모습으로 보이고 바람과 鶴도 황제의 군대로 보였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사석 등이 秦나라 군대를 대파했다고 쓰고, 秦나라 군대가 스스로 패했다고 쓰지 않은 것은 장차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사람의 일을 중하게 여겨 하늘의 요행을 마음에 두지 않게 한 것이니, 이는 서법의 깊은 뜻이다.[晉淝水之捷 亦有天幸 然綱目歸功謝石等者 是時謝安爲相 政事和平 石等才能稱職 上下輯睦 固自有勝秦之理 彼符堅恃其强大 屢勝而驕 不知晉雖微弱 無釁可乘 輕擧妄動 傾國南下 固自有敗亡之理 故雖草木人形 風鶴王師 而綱目 則書石等大破秦兵 不書秦兵自敗者 將使後世以人事爲重 而不以天幸爲心 此書法之深意也]” ≪發明≫
역주3 주서는……張天錫 : 본서 太元 4년(379)에 보면 前秦이 晉나라의 襄陽을 함락시켰을 때 朱序를 사로잡았는데, 符堅이 그를 度支尙書로 삼았다. 張天錫은 前涼의 군주로 太元 원년(376)에 前秦의 침공을 받아 항복하였다.
역주4 登歌 食擧 : 등가는 고대 제왕의 조회 등 각종 의식에서 악사가 堂上에 올라가 연주하던 노래 또는 樂懸(악기를 배열해놓는 법식)을 이르고, 식거는 고대에 제왕이 연회를 베풀 때 사용한 樂典을 이른다.
역주5 以謝石爲尙書令……固讓不受 : “‘不受(받지 않았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능히 사양함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들어와서 除拜에 ‘不受’라고 쓴 것이 많으나, ‘固讓(굳이 사양했다)’이라고 쓴 경우는 있지 않으니, ‘固讓’이라고 쓴 것은 깊이 가상히 여긴 것이다. ‘不受’라고 쓴 것이 19번이고, ‘不拜(숙배하지 않았다)’라고 쓴 것이 1번이고, ‘讓還(사양하여 돌려주었다)’이라고 쓴 것이 1번인데, ‘固讓’이라고 쓴 것은 한 번 뿐이다.[書不受 何 嘉能讓也 入綱目 除拜 書不受多矣 未有書固讓者 書固讓 深嘉之也 書不受十九 不拜一 讓還一 書固讓者 一而已]” ≪書法≫“앞에서는 謝石 등이 秦나라 군대를 대파했다고 썼으니, 그 功이 거룩하다. 이제 그의 관직을 승진시킴은 진실로 당연하다. 그러나 사석 등이 굳이 사양하고 그 지위에 거하지 않음은 誠心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특별히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고 써서 찬미하였다. 후세에는 능히 적을 제압하지 못하고서 외람되이 賞을 받고 功을 바란 자가 있었으니, 이것을 본다면 부끄럽지 않겠는가.[前書石等大破秦兵 厥功懋矣 今而進職 固其宜也 然石等推而弗居 出於由衷故特書固讓不受以美之 後世有未能制敵而冒賞邀功者 視此 得無愧乎]” ≪發明≫
역주6 初開酒禁 增民稅米口五石 : “‘初’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처음을 삼간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백성에게 稅를 취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삼가 썼으니, ‘增稅’라고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戶稅에 ‘增’이라고 쓴 것이 2번이고(이해(383)와 唐나라 德宗 建中 3년(782)이다.) 稅錢과 雜稅에 增이라고 쓴 것이 두 번이다.(唐나라 德宗 建中 2년(781)과 文宗 太和 9년(乙卯)이다.)[書初 何 謹始也 綱目重取民 故謹書之 書增稅 始此 終綱目 戶稅書增二(是年唐德宗建中三年) 增稅錢雜稅 書增二(唐德宗建中二年 文宗太和九年)]” ≪書法≫ ‘增稅錢雜稅’의 ‘增’은 문맥상 衍文이므로 번역하지 않았다.
역주7 丁零翟斌……與斌合 : “翟斌에게 ‘起兵’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羌族이기 때문이다. ‘討’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강족이기 때문이다. 慕容垂는 어찌하여 ‘叛’이라고 썼는가. 秦나라의 命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군대를 일으킨 자를 모두 擊이라고 썼으나 오직 강족은 ‘討’라고 썼고, 慕容泓과 慕容沖은 ‘叛’이라고 쓰지 않았으나 오직 모용수는 ‘叛’이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을 편수한 목적은 内外와 君臣의 구분을 밝혔을 뿐이다.[翟斌書起兵 何 羌也 書討 何 羌也 垂則曷爲書叛 受秦命也 是故起兵者 皆書擊 惟羌則書討 泓沖不書叛 惟垂則書叛 綱目之修 内外君臣之分而已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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