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이고李固가 책면策免된 뒤로부터 내외內外가 기운을 잃어서 신하들이 감히 똑바로 서지 못하였으나注+“측족이립側足而立”은 두려워하여 비스듬하게 서서 편안하지 못한 것이다., 오직 두교杜喬가 얼굴빛을 바로 하여 굽히고 흔들리는 바가 없으니, 이로 말미암아 조야朝野가 모두 그를 의지하고 공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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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에 정책定策한 공功을 논論하여 양기梁冀에게 13,000호戶를 더 봉封하고, 또 그 자제子弟와 환관인 유광劉廣 등을 봉하여 모두 열후列侯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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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두교杜喬가 다음과 같이 간諫하였다. “폐하陛下께서 즉위하셔서, 충성스럽고 어진 자를 예우하는 것은 급하게 여기지 않고 먼저 좌우左右를 봉封하시어注+선先(앞서다)은 실천悉薦의 절切이다., 양씨梁氏의 일문一門과 환관과 미천한 서얼庶孽(서얼)들이 모두 공功이 없이 인끈을 차고 공로가 있는 신하들의 땅을 나누어 가지니,
도리에 어긋나고 참람한 일을 어찌 이루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방도方道를 이루면, 어찌 정사政事를 해치고 난亂을 일으킬 뿐이겠습니까. 몸을 잃고 나라를 망칠 것이니, 삼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글을 아뢰어도 황제는 살피지 않았다.注+“기이豈伊”는 기단豈但, 기지豈止라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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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8월에 황후 양씨皇后 梁氏를 세웠다.注+양씨梁氏는 바로 순열황후順烈皇后(양태후梁太后)의 여동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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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영창태수 유군세永昌太守 劉君世가 황금黃金을 주조하여 무늬가 있는 뱀을 만들어서 양기梁冀에게 바치자, 익주자사 충고益州刺史 种暠(충고)가 그 간악함을 적발하니, 양기가 충고를 원망하여 다른 일로 모함하였다.
이고李固가 상소上疏하여 곡직曲直을 분변하여 밝히니, 태후太后가 충고를 사면하되 면직시키고, 금으로 만든 뱀을 관청(사농司農)으로 들여보냈다.注+관官은 사농司農을 이른다. 양기가 대사농 두교大司農 杜喬에게 빌려보려 하였으나 두교가 주지 않았고,
또 양기의 작은딸이 죽자 공경公卿들을 상喪에 모이게 하였으나 두교만 홀로 가지 않았다. 이때 황후皇后를 세울 적에 양기는 후한 예禮로 맞이하고자 하였으나 두교가 또 옛 법을 들어 따르지 않았으며注+이때
를 따라 황금黃金 2만 근斤을 빙례聘禮로 하고, 납채納采로 기러기와 벽옥璧玉과 승마乘馬와 속백束帛을 한결같이 옛 법을 따른 것이다.,
양기가 두교에게 범궁氾宮을 상서尙書로 천거해달라고 부탁하였으나注+속屬(부탁하다)은 지욕之欲의 절切이다. 범氾은 부함符咸의 절切이니 성姓이다. 두교는 범궁이 장물죄를 지었다 하여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이고는 이로 말미암아 날로 양기와 어긋나게 되었다.注+한안 원년漢安 元年(142)에 두교杜喬가 연주兗州를 순찰하고서 제음태수 범궁濟陰太守 氾宮의 장물죄가 천만 전錢 이상이라고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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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9월에 지진이 나니, 태위 두교太尉 杜喬를 책면策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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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1월에 청하왕 유산淸河王 劉蒜을 위씨후尉氏侯(울지후)로 강등하여 계양桂陽으로 귀양 보내니, 유산이 자살하였다.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하옥下獄하여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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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환관인 당형唐衡과 좌관左悺(좌관) 등이 함께 두교杜喬를 참소하니, 황제 또한 두교를 원망하였다. 注+관悺은 공환工㬇의 절切이고 또 음音이 관綰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당형唐衡과 좌관左悺이〉 함께 황제에게 두교杜喬를 참소하기를 ‘폐하陛下께서 전에 즉위하실 적에, 두교가 이고李固와 함께 폐하가 한漢나라의 종사宗祀를 받들 만하지 못하다고 항의했습니다.’ 했다.” 하였다.마침 유문劉文 등이 함께 청하왕 유산淸河王 劉蒜을 옹립할 것을 모의하고 그의 국상國相인 사고謝暠를 위협하여 죽였는데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함께 유산劉蒜을 세우고자 하다가 일이 발각되자, 유문劉文 등이 마침내 청하왕淸河王의 상相인 사고謝暠를 위협하기를 ‘마땅히 청하왕을 세워 천자天子로 삼아야 하니, 그렇게 되면 사고를 공公으로 삼겠다.’ 하였다. 사고가 꾸짖자 유문이 사고를 찔러 죽였다.” 하였다.,
유산은 이 죄에 걸려 작위가 위씨후尉氏侯로 강등되어 계양桂陽으로 귀양 가자 자살하였다.注+위씨현尉氏縣은 진류군陳留郡에 속하였다.양기梁冀는 이로 인하여 이고李固와 두교杜喬를 무함하여 이르기를 “유문과 서로 내통內通했다.” 하면서, 이고를 체포하여 하옥下獄하니,
문생 왕조門生 王調는 형틀을 차고 가서 글을 올렸으며, 조승趙承 등 수십 명은 부질鈇鑕(허리를 자르는 형구)을 허리에 차고서 대궐에 나와 함께 호소하였다. 이에 태후太后가 조령詔令을 내려 이고를 사면하였다.注+관貫은 뀀이요, 계械는 질곡桎梏(형틀)이니, 왕조王調가 먼저 스스로
을 가지고 자신의 목과 손과 발을 꿰어 죄罪가 내려지기를 기다린 것이다. 요要(허리)는 요腰로 읽으니, 허리에 부질鈇鑕을 진 것은 반드시 죽을죄가 있음을 보인 것이다. 통通은 함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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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고李固가 출옥하자, 경사京師의 시장과 마을에서 모두 만세를 불렀다. 양기梁冀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서 이고가 끝내 자기의 해로움이 될까 두려워한 나머지 마침내 다시 앞의 일을 아뢰었는데, 장사 오우長史 吳祐가 간쟁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注+앞의 일은 바로 유문劉文 등의 일이다.
종사중랑 마융從事中郞 馬融이 양기를 위하여 이고를 탄핵하는 장표章表를 짓자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오우가 이르기를 “이공李公의 죄罪가 경卿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 이공李公이 만약 주살을 당하면 경卿이 무슨 면목面目으로 천하 사람들을 보겠는가.”注+〈“경하면목 시천하인卿何面目 視天下人”은〉 양기梁冀를 위하여 충성하고 현량한 사람을 모함하였으니, 장차 다른 사람을 볼 면목이 없게 될 것임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양기는 노하여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고 오우 또한 곧바로 가니, 이고는 마침내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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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고李固는 임종臨終에 앞서서 호광胡廣과 조계趙戒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注+“임명臨命”은 막 명命이 끝나려 할 때를 맞은 것이다. “양씨梁氏가 미혹되어 잘못하는데 공公 등이 뜻을 굽혀 따르니, 한漢나라의 쇠미衰微함이 이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공公 등이 군주의 후한 녹봉을 받고서, 나라가 전복되려 하는데도 붙들지 않으니, 뒤의 훌륭한 사관이 어찌 사사로이 비호해줄 수 있겠는가. 내 몸은 이미 끝났으나 의리에는 맞으니, 다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호광과 조계는 슬프고 부끄러워서 길게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양기가 사람을 시켜 두교杜喬를 위협해서 스스로 인결引決(자결)하게 하였는데, 두교가 듣지 않자 체포하여 구속하니, 그 또한 옥중獄中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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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양기梁冀는 이고李固와 두교杜喬의 시신을 드러내놓고 명령하기를 “감히 임곡臨哭하는 자가 있으면 이에 합당한 죄罪를 가加하겠다.”注+영令(명령하다)과 임臨(죽은 자를 곡하고 조문하다)은 모두 거성去聲이다. 하였다. 이고의 제자인 곽량郭亮이 아직 관례하지 않았었는데,
왼손에는 나라에 올릴 글과 도끼를 잡고 오른손에는 부질鈇鑕을 잡고서注+경章은 나라에 올릴 글을 이른다. 월鉞은 도끼이다. 대궐에 나아가 글을 올려서 이고의 시신을 거둘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답이 내려오지 않자, 동반董班과 함께 가서 임곡臨哭하고 떠나가지 않았다.
두교의 옛 아전인 진류陳留 사람 양광楊匡이 〈두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는〉 울부짖고 눈물을 흘리며 샛별을 보고 길을 떠나 낙양洛陽에 도착하여 옛날 착용하던 붉은 책幘(관)을 쓰고 하문夏門 밖 만수정萬壽亭의 관리라고 칭탁하고서 시신屍身을 지켰다.
12일이 되자注+“성행星行”은 별을 보고 가고 별을 보고 머무는 것이다. 혹자或者는 “성행星行은 별을 머리에 이고 가서 밤에도 쉴 겨를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저著(입다)은 척략陟略의 절切이다. “고적책故赤幘”이란 옛날에 입었던 복식이니, 관리는 붉은 책幘을 착용하였다., 대궐에 나와 글을 올려서 두 공公의 해골骸骨을 함께 청하였는데, 태후太后가 이를 허락하였다.注+방竝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병幷으로 되어 있다.
양광은 두교의 상喪(시신)을 본가本家로 보내고서注+두교杜喬의 집이 하내河內에 있었다. 장례를 마친 다음 상복을 입었으며, 마침내 곽량, 동반과 함께 모두 숨어서 종신토록 벼슬하지 않았다. 오우吳祐 또한 스스로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가서 집에서 죽었다.
역주
역주1日食 :
“≪春秋≫의 法에, 뒤를 이은 군주가 옛 군주를 弑害한 자에 의해 옹립되었는데 이것을 받고 역적을 토벌하지 않으면, 이를 일러 시해에 관여했다고 한다. 이때에 桓帝가 역적인 梁冀의 손에서 나라를 받고서 토벌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하늘의 변고가 나타나서 帝位를 이어 개원한 초기의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으니, 이는 人君이 즉위함에 그 시초가 바르지 못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쓸 적에 비록 그 이치를 말하지 않았으나 이치가 진실로 이 가운데에 들어 있으니, 天命이 어긋나지 않음이 어찌 깊고 간절하고 밝게 드러나지 않겠는가.[春秋之法 嗣君爲弑君者所立 受之而不討賊 則謂之與聞乎弑 是時桓帝受國賊冀之手 不能致討 故天變見焉 日食正旦於嗣服紀元之初 是人君卽位 其始已不正矣 綱目書此 雖不言其理 而理固在其中 天命不僭 豈不深切著明也哉]” ≪發明≫
역주2論定策功……皆爲列侯 :
“군주를 迎立했다고 쓴 것은 많으나 定策한 功을 논했다고 쓴 것은 없었는데, 定策한 功을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난한 것이다. 桓帝가 역적을 토벌하지 않고 역적인 梁冀를 功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자신도 함께 황제의 시해에 관여한 것이니, 이를 쓴 것은 〈환제와 양기를〉 모두 비난한 것이다. 양기의 자제를 환관과 함께 쓴 것은 매우 천하게 여긴 것이다. 이 때문에 만일 천하게 여길 만하면 宋楊의 네 아들을 江京과 함께 썼고 양기의 子弟를 劉廣과 함께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封戶를 더했다고 쓴 것이 5번인데, 양기보다 많은 자는 있지 않다.[書迎立君多矣 未有書論定策功者 書定策功 何 譏也 桓不討賊而以爲之功 是與聞乎弑矣 書 交譏之 梁冀子弟與宦者幷書 賤之甚矣 是故苟可賤也 宋楊四子與江京幷書 梁冀子弟與劉廣幷書 綱目書益封戶五 未有多於梁冀者也]” ≪書法≫
역주3立皇后梁氏 :
“東漢의 策書에 ‘貴人 某氏를 세워 황후를 삼았다.’고 쓴 것은 늘 쓰는 말인데, 여기서 ‘皇后 梁氏를 세웠다.’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황후는 太后의 여동생이니, 친족 간의 순서가 다소 어긋났다. 그러므로 그 글을 달리한 것은 그 일을 괴이하게 여긴 것이다. 前漢과 後漢에서 황후를 세웠을 적에 그 글을 달리한 것이 다섯 번이니, 모두 연고가 있는 경우이다.[東漢之策 書立貴人某氏爲皇后 恒辭也 此書立皇后梁氏 何 后 太后女弟也 倫序亦少乖矣 故異其文 異其文者 所以異其事也 兩漢立后 異其文者五 皆有故者也]다” ≪書法≫
역주4孝惠帝……故事 :
惠帝 4년(B.C.191) 겨울 10월 혜제가 張后를 맞이할 때의 일을 이른다. 장후는 개국공신인 張耳의 아들 張敖의 딸이다. ≪通典≫ 권58 天子納妃后 조에 “漢 惠帝가 魯元公主의 딸에게 장가들 적에 黃金 2만 근과 말 12필을 聘禮로 하였다.” 하였는데, 그 註에 “呂太后가 혜제를 위해 노원공주의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으므로 특별히 그 禮를 우대한 것이다.” 하였다. 노원공주는 혜제의 친누이로 呂后의 所生이다. 前漢 平帝 元始 3년(3) “王莽이 자기 딸을 평제에게 시집보낼 때에도 “有司가 아뢰어 皇后를 맞이하되 이 故事를 따라 황금 2만 근을 빙례로 하게 하였다.”라고 보인다.(≪資治通鑑≫ 권28)
역주5貶淸河王蒜……殺之 :
“이때에 劉文이 劉蒜을 세울 것을 모의하였는데, 어찌하여 쓰지 않았는가. 유산은 마땅히 즉위해야 할 자이니, 이를 쓰면 燕王 劉旦에 비견될 것이고, 또 이 일이 없었다 하더라도 유산이 죽음을 면할 수 있었겠는가. ‘尉氏侯로 강등하여 桂陽으로 귀양 보내니, 劉蒜이 自殺하였다.’라고 썼으니, 이는 太后를 죄책한 것이다.[於是劉文謀立蒜 則曷爲不書 蒜宜立者也 書之則疑於燕王旦 且微此擧 蒜其得免乎 書曰貶爲尉氏侯 徙桂陽 蒜自殺 罪太后也]” ≪書法≫ “李固와 杜喬가 죽었을 적에 사람들이 모두 원통해하였으니, 두 분은 진실로 漢나라에 충성한 자들이다. 그러나 양기가 弑逆의 죄를 지고 있었는데도 두 분이 양기의 죄를 천하에 성토하지 못하고 속으로 참고 죽었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이들 두 분에 대하여 모두 그 옛 관직을 쓰지 않았으니, 이들이 大臣의 의리를 통달하지 못해서 그 직책을 잃었음을 애처롭게 여긴 것이다.[李固杜喬之死 人皆寃之 二君誠忠於漢者 然冀負弑逆之誅 二君不能聲其罪於天下 隱忍而死 故綱目於此皆不書其故官者 哀其不達大臣之義 失其職也]” ≪發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