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대장군大將軍위청衛靑이 정양定襄으로 출동할 적에 공손오公孫敖와 공손하公孫賀, 조신趙信과 소건蘇建, 이광李廣과 이저李沮(이조)가 모두 소속되어서 〈흉노匈奴를 공격하여〉 수천 명의 수급을 베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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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사면赦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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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여름 4월에 위청衛靑이 다시 여섯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흉노匈奴를 공격하였는데, 전장군前將軍조신趙信이 패하여 흉노匈奴에게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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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위청衛靑이 다시 여섯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정양定襄으로 출동하여 흉노匈奴를 공격해서 수급을 베고 포로로 잡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우장군右將軍소건蘇建과 전장군前將軍조신趙信이 군대를 연합하여 출전하였다가 선우單于의 군대를 만나 싸운 지 하루 남짓에 한漢나라 군대가 장차 전멸하게 되었다.
조신은 남은 기병을 거느리고 흉노에게 항복하였고, 소건은 군대를 모두 잃고 몸만 빠져나와 도망쳐 자신만 돌아왔다.
의랑議郞주패周霸가 위청에게 건의하기를注+의랑議郞은 낭중령郞中令에 속하였다. “대장군大將軍께서 출전한 뒤로 비장裨將을 목 벤 적이 없었는데, 지금 소건이 군대를 버리고 도망쳐왔으니, 목을 베어 위엄을 밝혀야 합니다.” 하였으나, 위청은 말하기를 “내 다행히 황제의 폐부肺腑(친척)로서 항오行伍의 사이에서 직임을 맡고 있으니, 위엄이 없음을 걱정하지 않는다.注+“폐부肺腑”는 복심腹心이란 뜻이니, 임금의 친속을 이른다.
내 직책상 비록 마땅히 비장을 목 벨 수 있으나, 황제의 존중과 총애를 받는 신하로서 감히 국경 밖에서 멋대로 사람을 죽이지 아니하여, ‘신하된 자는 감히 권력을 마음대로 행사하지 못함’을 보이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소건을 가두어 행재소行在所로 나오니, 조령詔令을 내려 소건을 속죄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注+천자天子가 혹은 경사京師에 있고 혹은 순수巡狩에 나가 있어 미리 정할 수 없으므로 “행재소行在所”라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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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위청衛靑의 누이 아들인 곽거병霍去病은 나이 18세에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표요교위票姚校尉가 되었는데,注+처음에 평양현平陽縣의 아전인 곽중유霍仲孺가 평양후平陽侯의 집에서 집사 노릇을 하다가 위청衛靑의 누이인 위소아衛少兒와 사통私通하여 곽거병霍去病을 낳았다. 표票는 빈묘頻妙의 절切이고 요姚는 양소羊召의 절切이니, “표요票姚”는 빠른 모양이다. 날쌔고 용맹한 기병 8백 명을 인솔하고는 곧바로 대군大軍을 두고서 수백 리나 멀리 유리한 곳으로 달려가서 적의 수급을 베고 포로를 잡은 것이 많으니,注+부赴는 달려감이고, 이利는 편리함이다. “과당過當”은 그가 거느린 병력의 인원수를 계산해보면 포로로 잡고 수급을 벤 자가 많아서 해당하는 숫자를 넘은 것이다. 일설에 “한漢나라 군대는 잃은 자가 적고 흉노를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많으므로 과당過當이라 한다.” 하였다. 이에 관군후冠軍侯로 봉하였고,注+황제는 곽거병霍去病의 공功이 여러 군대 가운데 으뜸이라 하여 남양군南陽郡의 양현穰縣노양향盧陽鄕과 완현宛縣임조취臨駣聚(임도취)를 관군후冠軍侯의 봉국으로 삼았다. 조駣는 음이 도桃이다. 교위校尉장건張騫은 수초水草가 있는 곳을 알아 군대가 궁핍하지 않게 했다 하여 박망후博望侯로 봉하였다.注+〈“박망博望”은〉 넓게 바라볼 수 있는 뜻을 취한 것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박망후博望侯의 봉국은 남양군南陽郡에 속했다.” 하였다.
조신趙信이 선우單于로 하여금 더욱 북쪽으로 사막을 건너가 한漢나라 군대를 유인하여 피로하게 해서, 극도로 피로하기를 기다려 사로잡고 변방을 가까이하여 살지 말도록 권하자, 선우가 그의 말을 따랐다.注+“익북益北”은 더욱 북쪽으로 향하는 것이다. 곧바로 건너가는 것을 절絶이라 한다. 막幕은 막漠과 같으니, 모래흙을 막漠이라 한다. 음산陰山 이북 지역은 모두 큰 사막으로 풀과 나무가 자라지 않으니, 흉노匈奴의 남쪽 경계이다. 피罷(피로하다)는 피疲로 읽는다. 요徼는 기다림이니, 유인하여 피로하게 만들어서 그 피폐함이 지극하기를 기다린 뒤에 취하는 것이다. 근近(가까이하다)과 새塞(변방)는 모두 거성去聲이니, 변방에 가까이 살지 않음은 한漢나라 군대를 피로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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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綱] 6월에 조령詔令을 내려 백성들이 관작을 사고 속죄할 수 있게 하고, 무공작武功爵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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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이때에 한漢나라가 매년 흉노匈奴를 공격하니, 흉노의 수급을 베고 포로를 잡은 병사들이 하사받은 황금이 20여만 근이었고, 한漢나라의 죽은 병사와 말이 10여 만이었으며, 무기를 수송하고 조운漕運하는 비용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에 대사농大司農의 경용經用(재정)이 고갈되어 전투하는 장병들의 비용을 충당할 수가 없었다.注+“경용갈經用竭”은 경상經常으로 쓰는 돈이 고갈되어 다함을 말한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 백성들로 하여금 관작을 사고 속죄할 수 있게 하고, 상관賞官을 설치하고 ‘무공작武功爵’이라 이름하니, 1계급에 17만 전錢이었다.注+무공작武功爵은 모두 11등급이니, 1급은 조사造士, 2급은 한여위閑輿衛, 3급은 양사良士, 4급은 원융사元戎士, 5급은 관수官首, 6급은 병탁秉鐸, 7급은 천부千夫, 8급은 악경樂卿, 9급은 집융執戎, 10급은 정려서장政戾庶長, 11급은 군위軍衛이다. “급십칠만級十七萬”은 관작을 팔아서 처음 1급이 되면 17만 전錢을 받고 2급에 이르면 34만 전錢을 받은 것이니, 이로부터 위로 매 급마다 값을 더하였다.
관작을 사서 천부千夫에 이른 자는 맨 먼저 벼슬을 제수하여 관리로 삼으니,注+천부千夫 이상이라야 비로소 요역徭役을 면제받았다. 그러므로 맨 먼저 선발하여 관리로 삼게 한 것이다. 관리에 오르는 길이 혼잡하고 여러 갈래여서 관직이 혼란하고 황폐해졌다.注+모耗는 혼란하다는 뜻이다.
역주2詔民……置武功爵 :
“秦나라 때에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을 바치게 하고 관작을 제수하였다.’고 쓴 뒤로 文帝에 이르러 ‘백성들을 불러 곡식을 바치게 하고는 관작을 제수하고 죄를 사면했다.’고 썼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보인다. 이 뒤에는 ‘株送徒로 하여금 재물을 바치게 하고 郞官에 補任하였다.’고 썼고, ‘죽을죄를 지은 사람들로 하여금 돈을 바치고 贖罪하게 했다.’고 썼고, 明帝 때에 ‘조령을 내려 죄가 있어 망명한 자들에게 속죄를 허락하였다.’고 썼다. 兩漢의 세대에 속죄를 기록한 것이 다섯 번인데, 武帝 때에 세 번 기록하였으니, 이는 나라의 재정이 매우 급박했던 것이다.[自秦書令民納粟拜爵 及文帝 書召民入粟拜爵免罪 至是復見 後此書令株送徒入財補郞 書令死罪入贖 明帝書詔聽有罪亡命者贖 兩漢之世 書贖罪者五 帝三書焉 國亦急甚矣]” 《書法》 “관작은 나라의 공정한 기물이니 팔아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닌데 팔아먹었고, 형벌은 나라의 공정한 법이니 속죄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속죄하였다. 이로써 당시 用兵하여 비용이 많이 드는 폐해가 어떠한가를 볼 수 있다. ‘武功爵을 두었다.’고 말했으면, 經費가 軍功을 보상하기에 부족한 뜻을 또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 수 있는 것이다.[爵者 國之公器 非可(買)[賣]也而(買)[賣]之 罪者 國之公法 非可贖也而贖之 於以見用兵煩費之患 爲如何哉 其曰置武功爵 則經費不足賞功之意 又自不言可見矣]” 《發明》 《御批資治通鑑綱目》에는 ‘買’로 되어 있으나, 文理를 살펴 ‘賣’로 바로잡았다.
역주3(比)[此] :
저본에는 ‘比’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此’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