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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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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卯年(115)
을묘년乙卯年(115)
二年이라 號多降하다
나라 효안황제 원초孝安皇帝 元初 2년이다. 봄에 호다號多가 항복하였다.
校尉龐參 以恩信으로 招誘諸羌하니 號多等이어늘 遣詣闕한대 賜侯印遣之하니 始還治令居하여 通河西道注+自張掖徙還令居也. 武帝時, 開河西酒泉之地. 正義 “河, 謂隴右蘭州之西河也.”하다
호강교위 방참護羌校尉 龐參이 은혜와 신의로 여러 강족羌族을 불러 회유하니, 호다號多 등이 항복하였으므로 방참이 이들을 보내어 대궐에 이르게 하였다. 조정에서 호다에게 인장印章을 하사하여 보내니, 방참이 처음으로 영거令居로 돌아와 치소治所로 삼아 의 길이 개통되었다.注+〈“시환치령거始還治令居”는〉 장액張掖에서 옮겨 영거令居로 돌아온 것이다. 무제武帝 때에 하서河西주천酒泉 지역을 개통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농우 난주隴右 蘭州서하西河를 이른다.” 하였다.
零昌 寇益州어늘 遣中郎將尹就하여 討之하다
연창零昌익주益州를 침략하자, 중낭장 윤취中郎將 尹就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다.
◑夏四月 注+閻后之母, 鄧弘之妻之同産也, 故得立父暢, 封北宜春侯.하다
】 여름 4월에 귀인 염씨貴人 閻氏(염씨)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았다.注+염후閻后의 어머니는 등홍鄧弘의 아내의 동복형제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아버지 염창閻暢을 세워 북의춘후北宜春侯에 봉하였다.
后性 妬忌 後宮李氏 生皇子保어늘 后鴆殺李氏하다
염후閻后는 천성이 질투하고 시기하였다. 후궁 이씨後宮 李氏황자 유보皇子 劉保를 낳자, 염후가 이씨李氏를 독살하였다.
五月 旱蝗하다
】 5월에 가뭄이 들고 황충蝗蟲의 재해가 있었다.
◑秋八月 遼東鮮卑圍無慮注+慮, 音閭, 無慮縣, 屬遼東郡.하다
】 가을 8월에 요동遼東선비鮮卑무려無慮를 포위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무려현無慮縣요동군遼東郡에 속하였다.
◑九月晦 日食하다
】 9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校尉班雄等 擊零昌이라가 大敗하다
교위 반웅校尉 班雄 등이 연창零昌을 공격하다가 대패하였다.
詔班雄하여 屯三輔하고 司馬鈞 督關中兵하고 龐參 將羌, 胡兵하고 分道竝擊零昌注+雄, 超之子也.이러니
조령詔令을 내려 반웅班雄삼보三輔 지역에 주둔키시고, 사마균司馬鈞관중關中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였다. 방참龐參강족羌族호족胡族의 군대를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사마균과 함께〉 연창零昌을 공격하였는데注+반웅班雄반초班超의 아들이다.,
參兵 至勇士城東이라가 爲杜季貢所敗하여 引退注+勇士縣, 屬漢陽郡.하고 鈞等 獨進하여 攻拔丁奚城하니 季貢 率衆僞逃注+永初六年, 零昌以季貢爲將軍, 別居丁奚城. 按東觀記 “丁奚城, 在北地郡靈州縣.”
방참의 군대는 용사성勇士城의 동쪽에 이르러 두계공杜季貢에게 패해서 군대를 이끌고 후퇴하였으며注+용사현勇士縣한양군漢陽郡에 속하였다., 사마균 등이 홀로 전진해서 정해성丁奚城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두계공이 군대를 거느리고 거짓으로 도망치는 척하였다.注+〈“공발정해성攻拔丁奚城”은〉 영초永初 6년(112)에 연창零昌두계공杜季貢을 장군으로 삼아 별도로 정해성丁奚城에 거주하게 하였다. 살펴보건대, ≪동관한기東觀漢記≫에 “정해성丁奚城북지군 영주현北地郡 靈州縣에 있다.” 하였다.
令仲光으로 收羌禾稼注+仲光, 姓名也.러니 光等 散兵深入이라가 設伏要撃之하니 光等 兵敗竝没하다
사마균이 우부풍 중광右扶風 仲光으로 하여금 강족羌族의 벼와 곡식을 거두게 하였는데注+중광仲光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중광 등이 군대를 분산하여 적지敵地에 깊이 들어갔다가 매복을 설치한 강족羌族에게 요격을 당하니, 중광 등의 군대가 패하여 모두 전몰하였다.
遣中郎將任尙하여 屯三輔하다
】 겨울에 중낭장 임상中郎將 任尙을 보내어 삼보三輔 지역에 주둔하게 하였다.
懷令虞詡說尙曰注+懷令, 懷縣之令也. 兵法 弱不攻彊하고 走不逐飛 自然之勢也니이다
회령 우후懷令 虞詡임상任尙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注+회령懷令회현懷縣이다.병법兵法에 의하면 약한 자가 강한 자를 공격하지 못하고 달리는 자가 나는 자를 쫓지 못하니, 이는 자연의 형세입니다.
今虜皆馬騎 日行數百里하여 來如風雨하고 去如絶弦하니 以歩追之 勢不相及이니 所以雖屯兵二十餘萬이나 曠日而無功也
지금 오랑캐가 모두 기마병이라서 하루에 수백 리를 행군하여, 쳐들어올 때에는 폭풍우와 같고 떠나갈 때에는 쏜살같으니, 보병으로 추격하면 형편상 미칠 수가 없는바, 비록 20여만 명의 군대를 주둔시켜도 오랫동안 전공戰功이 없는 이유입니다.
爲使君計컨대 莫如罷諸郡兵하고 各令出錢數千하여 二十人 共市一馬하여 以萬騎之衆으로 逐數千之虜하여 追尾掩截이면
사군使君(임상任尙)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보건대, 여러 의 군대를 해산하고 각각 이들로 하여금 수천 을 내게 해서 20명이 말 한 필을 함께 사서 1만의 기병대로 수천의 오랑캐를 쫓아서 후미를 추격하고 습격하여 차단하는 것만 못하니,
其道自窮하리니 便民利事하여 大功立矣注+尾者, 隨其後而擊之也. 掩, 襲也. 截, 邀也. 其道自窮, 言虜之路自窮, 不能捷出而寇掠也.리이다 卽上言한대 用其計하여 遣輕騎하여 擊杜季貢于丁奚城하여 破之하다
이와 같이 하면 오랑캐가 나오는 길이 저절로 막히게 되어 백성들에게 편리하고 일이 순조로워서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注+는 그 뒤를 따라 공격하는 것이다. 은 기습함이고, 은 요격함이다. “기도자궁其道自窮”은 오랑캐가 나오는 길이 저절로 막혀서 신속히 나와 노략질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임상이 즉시 상언上言하고 이 계책을 따라 경무장한 기병을 보내어서 두계공杜季貢정해성丁奚城에서 격파하였다.
以虞詡爲武都太守하여 擊羌破之하다
우후虞詡무도태수武都太守로 삼아서 강족羌族을 격파하였다.
太后聞虞詡有將帥之略하고 以爲武都太守하니 羌衆數千 遮詡於陳倉崤谷注+胡三省曰 “此崤谷, 當在陳倉縣界, 卽今之大散關, 非弘農澠池縣之崤山也.”이어늘
태후太后가 ‘우후虞詡에게 장수의 지략이 있다.’는 말을 듣고 우후를 무도태수武都太守로 삼으니, 강족羌族의 무리 수천 명이 진창陳倉효곡崤谷(효곡)에서 우후를 가로막았다.注+호삼성胡三省이 말하였다. “이 효곡崤谷은 마땅히 진창현陳倉縣 경계에 있어야 하니 바로 지금의 대산관大散關이고, 홍농군 민지현弘農郡 澠池縣(민지현)의 효산崤山이 아니다.”
詡卽停軍不進하고 而宣言上書請兵하여 須到當發이라하니 羌聞之하고 乃分鈔傍縣이라
우후는 즉시 군대를 멈추어 전진하지 않고 선언宣言하기를 “조정에 상서上書하여 군대를 증원해줄 것을 청하였으니, 이들이 이르기를 기다렸다가 출발할 것이다.” 하니, 강족羌族들이 이 말을 듣고 마침내 나누어 인근의 을 노략질하였다.
詡因其兵散하여 日夜進道하여 兼行百餘里하고 令吏士 各作兩竈하여 日增倍之하니 羌不敢逼이러라
우후는 강족羌族의 병사들이 흩어진 틈을 타서 밤낮으로 길을 전진하여 하루에 이틀 길을 가서 백여 리를 행군하고, 관리와 병사들로 하여금 각각 두 개의 아궁이를 만들게 해서 날마다 배로 증가시키니, 강족羌族이 이것을 보고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였다.
或問曰 孫臏 減竈어늘 而君增之하고 兵法 日行不過三十里어늘 而今日且二百里 何也
혹자가 묻기를 “, 병법兵法에 의하면 하루에 행군이 30리에 불과한데 지금 하루에 장차 200리를 행군함은 어째서인가?” 하니,
詡曰 虜衆하고 吾兵하니 徐行則易爲所及이요 速進則彼所不測이니
우후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오랑캐의 병사들은 많고 우리의 병사는 적으니, 천천히 행군하면 적에게 쉽게 따라잡힐 것이요, 속히 진군하면 저들이 헤아리지 못할 것이다.
虜見吾竈日增이면 必謂郡兵來迎이요 衆多行速이면 必憚追我하리니 孫臏 見弱하고 吾今示彊 勢有不同故也注+見, 賢遍切.니라
오랑캐들은 우리 군의 아궁이 수가 날로 증가함을 보면 반드시 의 군대가 와서 맞이한다고 생각할 것이요, 병력이 많고 행군이 신속하면 반드시 우리를 추격함을 꺼릴 것이니, 손빈은 약함을 보였고 나는 지금 강함을 보임은 형세가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注+(보이다)은 현편賢遍이다.
旣到 郡兵 不滿三千이요 而羌衆萬餘 攻圍赤亭數十日注+按郡國志, 武都下辨縣, 有赤亭, 卽此.이어늘
우후虞詡가 부임하자, 의 병력이 3천 명이 못되었고, 강족羌族의 무리 만여 명이 적정赤亭을 수십 일 동안 공격하여 포위하였다.注+살펴보건대,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무도군 하변현武都郡 下辨縣적정赤亭이 있다.”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詡乃令軍中하여 彊弩勿發하고 而潛發小弩하니 羌以爲矢力弱하여 不能至라하고 幷兵急攻이라
우후는 마침내 군중軍中에 명해서 강한 쇠뇌는 발사하지 말고 은밀히 작은 쇠뇌를 발사하게 하니, 강족羌族들은 나라 군대의 화살의 힘이 약해서 자신들의 진영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병력을 합쳐서 급히 공격하였다.
詡於是 使二十彊弩 共射一人하니 發無不中이라 大震하여 退어늘
우후가 이에 20개의 강한 쇠뇌로 적 한 사람을 쏘게 하니, 발사하면 맞추지 못함이 없었다. 강족羌族들이 크게 두려워하여 후퇴하자,
詡因出城奮擊하여 多所傷殺하고 明日 悉陳其兵衆하여 令從東郭門出하여 北郭門入호되 貿易衣服하여 回轉數周하니
우후는 인하여 을 나가 크게 공격해서 적을 부상시키고 죽인 것이 많았고, 다음 날에는 군대를 모두 진열하고서 병사들로 하여금 동쪽 성문을 따라 나갔다가 북쪽 성문으로 들어오게 하되 의복衣服을 바꿔 입어서 몇 차례를 돌리니,
不知其數하여 更相恐動이라 詡計賊當退하고 乃潛遣五百餘人하여 於淺水 設伏하고 候其走路注+詡知賊退遇水, 必踏淺而度, 因於其處, 設伏以待之.러니
강족羌族들은 나라 군대의 병력을 짐작하지 못하여 번갈아 서로 두려워하고 동요하였다. 우후는 적들이 마땅히 물러갈 것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은밀히 500여 명을 보내어서 얕은 물가에 매복을 설치하여 이 도망갈 길에서 기다리게 하였다.注+〈“어천수설복 후기주로於淺水設伏 候其走路”는〉 우후虞詡이 물러갈 적에 물을 만나면 반드시 얕은 곳을 따라 건너갈 것을 알고는 인하여 이곳에다가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린 것이다.
虜果大犇이어늘 因掩擊大破之하여 斬獲甚衆하니 賊由是敗散하다
오랑캐들이 과연 크게 달려오자, 인하여 습격해서 대패시켜 목을 베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으니, 이 이로 말미암아 패하여 흩어졌다.
詡乃占相地勢하여 築營壁百八十所하고 招還流亡하고 假賑貧民하고 開通水運注+詡案行川谷, 自沮至下辨數十里, 燒石翦木, 開漕船道. 沮及下辨, 竝縣名.하니
우후虞詡는 마침내 지형을 잘 살펴서 진영과 보루 180개 소를 구축하고는 흩어지고 도망한 자들을 불러 돌아오게 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구휼하였으며, 수운水運의 길을 개통하니注+우후虞詡가 내와 골짜기를 순행하여 저현沮縣으로부터 하변현下辨縣에 이르기까지의 수십 리에 나무를 베어서 조운漕運할 뱃길을 연 것이다. 하변下辨은 모두 의 이름이다.,
始到郡 穀石千이요 鹽石八千이요 見戶萬三千注+見, 賢遍切. 見戶, 見存之戶也.이러니
처음 부임했을 때에는 의 곡식이 한 섬에 1,000이고 소금이 한 섬에 8,000이었으며 당시의 가호가 1만 3천이었는데注+(현재)은 현편賢遍이니, “현호見戶”은 현재 있는 호구이다.,
視事三年 米石八十이요 鹽石四百이요 民增하여 至四萬餘戶하여 人足家給하니 一郡 遂安하다
정사를 본 지 3년 만에 쌀은 한 섬에 80, 소금은 한 섬에 400이고 백성들이 증가하여 4만여 에 이르러서 백성들이 풍족하고 집집마다 여유가 있으니, 한 이 마침내 편안하였다.
十一月 地震하다
】 11월에 지진이 있었다.
注+弘自遭母喪, 去官奉朝請, 故曰前.하다
전 호분중랑장前 虎賁中郎將 등홍鄧弘하였다.注+등홍鄧弘은 어머니의 을 만난 뒤로부터 관직을 버리고 조청朝請을 받들었다. 그러므로 ‘’이라 한 것이다.
性儉素하고 治歐陽尙書하여 授帝禁中注+漢千乘歐陽生, 傳伏生尙書. 由是尙書有歐陽氏學.이러니 有司奏贈弘驃騎將軍한대
등홍鄧弘은 성품이 검소하고 구양씨歐陽氏의 ≪상서尙書≫를 전공하여 금중禁中[궁중宮中]에서 황제를 가르쳤었다.注+ 유사有司가 아뢰어 등홍에게 표기장군驃騎將軍을 추증하게 하였으나,
太后追弘雅意하여 不許하고 但賜錢布하니 辭不受하다
태후太后는 등홍의 고상한 뜻을 추념하여 허락하지 않고 다만 돈과 삼베를 하사하니, 아들 등즐鄧騭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將葬 有司復奏發五營輕車騎士한대 太后不聽하고 但白蓋雙騎 門生輓送注+白蓋, 車也.하다
장차 장례하려 할 적에 유사有司가 다시 의 가벼운 수레와 기병들을 동원할 것을 주청하였으나, 태후太后는 듣지 않고 다만 흰 덮개가 있는 수레와 두 명의 기병을 보내서 문생門生들이 상여를 끌어 장송하게 하였다.注+백개白蓋”는 〈흰 덮개가 있는〉 수레이다.
역주
역주1 河西 : 현재 甘肅省과 青海省의 黃河 서쪽 지역으로, 河西回廊과 湟水 유역 일대를 가리킨다.
역주2 立貴人閻氏 爲皇后 : “이때에 황제가 즉위한 지 9년이 되었고 나이가 22세였다. 이처럼 황후를 늦게 세우는 경우가 있지 않았는데, 마침내 질투하는 황후를 얻어서 끝내 조정을 혼란하게 하였으니, ≪詩經≫ 〈周南 關雎〉에서 어진 후비를 올림을 근심한 것이 당연하다.[於是 帝卽位九年 年二十二矣 立后之遲 未有如此者 而竟得妬后 卒以亂朝 關雎憂在進賢 宜矣哉]다” ≪書法≫
역주3 孫臏은……증가하고 : 孫臏은 戰國時代 齊나라의 병법가이다. 周 顯王 28년(B.C.341) 魏나라가 韓나라를 정벌할 때 韓나라가 齊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齊나라에서 田忌와 孫臏을 보내 魏나라 장수 龐涓을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당시 손빈은 魏나라에게 약함을 보이기 위해 매일 아궁이 수를 줄여나갔다. 방연은 齊나라 군영이 있던 자리의 아궁이 수가 날마다 줄어드는 것을 보고 齊나라 군사들이 점차 달아난 것이라 생각하여 정예병을 선발한 뒤 손빈을 맹추격하였으나, 馬陵에서 매복하고 기다리던 손빈에게 습격을 당해 자살하였다.
역주4 돌을 태우고 : 水路나 道路에 튀어나온 돌을 제거하기 위해 돌을 태워 깸을 말한 것이다.
역주5 前虎賁中郎將 鄧弘卒 : “≪資治通鑑綱目≫에 지위에 있을 때에는 ‘卒’이라고 썼으나 前官을 ‘卒’이라고 쓴 것은 있지 않았는데, 鄧弘을 ‘卒’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그의 어짊을 기록한 것이다. 등홍은 검소하고 經學을 통달하였으니, 后妃의 一族으로서 등홍과 같은 자가 드물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前官으로서 ‘卒’이라고 쓴 자가 〈鄧弘, 荀淑, 陳寔, 衛玠, 孔坦, 杜弘文〉 6명뿐이니, 이는 모두 특별히 쓴 것이다.[綱目在位書卒 未有卒前官者 卒弘 何 錄賢也 儉素通經 后族如弘者鮮矣 終綱目 以前官書卒者 六人而已 皆特書也]다” ≪書法≫
역주6 五營 : 屯騎, 越騎, 步兵, 長水, 射聲의 다섯 校尉가 통솔하는 부대를 가리킨다.
역주7 漢나라……되었다 : 千乘은 현재 山東省 廣饒縣이다. 歐陽生은 字가 和伯으로, 伏生에게 ≪今文尙書≫를 배워 倪寬에게 전수하였다. 그 뒤 예관이 구양생의 아들에게 전수하여 구양씨가 대대로 ≪尙書≫를 전공하였는데, 결국 曾孫 歐陽高에 이르러 歐陽氏의 尙書學이 官學으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 구양생이 복생에게 ≪상서≫를 배운 이후로 그 후손인 歐陽歙에 이르기까지 8代가 모두 博士를 지냈는바, 이 계열에서 전수한 ≪尙書≫를 ‘歐陽尙書’라고 칭한다.(≪後漢書≫ 권109 〈孫期傳〉, 〈歐陽歙傳〉)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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