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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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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泰豫元年注+宋主疾久不平, 改元.이요 魏延興二年이라
春正月 宋蠻酋桓誕以沔北降魏하다
大陽蠻酋桓誕 擁沔北八萬餘落하여 降魏하고 自云桓玄之子注+此即五水蠻也. 宋置大陽戍於蘄陽縣西, 此縣即漢江夏郡蘄春縣也.라하니
魏以爲東荊州刺史하고 使起部郞韋珍으로 與誕安集新民하여 區處諸事하니 皆得其所注+東荊州治比陽縣. 晉․宋有起部而不常置. 起部, 工部也, 取虞書百工起哉爲義.하다
二月 柔然侵魏어늘 魏擊走之하다
景文 常以盛滿爲憂하여 屢辭位한대 宋主不許하고 詔報曰
人居貴要 但問心若爲耳注+言但問其存心如何耳. 大明之世 巢徐二戴位不過執戟이나 而權亢人主注+巢․徐․二戴, 謂巢尙之․徐爰․戴法興․戴明寶.하고 今袁粲 爲令僕領選이로되 而人往往不知有粲하니 以此居貴要 當有致憂兢否 夫有心於避禍 不若無心於任運이니 存亡之要 巨細一揆耳
至是하여 慮晏駕後皇后臨朝 景文 或有異圖하여 遣使齎手勅幷藥賜死하니 景文正與客棊러니 叩函看已 復置局下하고 神色不變이라가
局竟斂子納奩畢注+叩, 發也. 函, 匱也. 已, 畢也. 子, 棊子也. 奩, 音廉, 盛子之器. 徐曰 奉勅見賜以死라하고 方以勅示客注+句.하니 中直兵焦度怒曰注+中直兵, 典親兵將官也. 大丈夫 安能坐受死리오 州中文武數百이라 足以一奮이라
景文曰 知卿至心이나 若見念者어든 爲我百口計하라하고 乃作墨啓致謝하고 飲藥而卒하니 諡曰懿侯라하다
宋主又嘗夢有人告曰 豫章太守劉愔反이라하니 既寤 遣人就郡殺之하다
夏四月 宋主彧殂注+壽, 三十四.하니 하다
宋主病篤 桂陽王休範爲司空하고 褚淵爲護軍將軍하고 劉勔爲右僕射하여 與尙書令袁粲 荊州刺史蔡興宗 郢州刺史沈攸之 竝受顧命하니
淵素與蕭道成善이라 薦之한대 詔以爲右衛將軍하여 共掌機事하고 宋主遂殂 太子昱 即位하니 生十年矣러라
粲等秉政 承奢侈之後하여 務弘節儉하여 欲救其弊 而阮佃夫等 用事하여 貨賂公行하니 不能禁也
宋以安成王準爲揚州刺史하다
準實桂陽王休範之子로되 而太宗以爲己子하다
秋七月 宋以沈攸之都督荊襄八州軍事하다
宋右將軍王道隆 以蔡興宗彊直으로 不欲使居上流하여 以爲中書監하여 而以沈攸之代之하니 興宗 辭不拜하다
道隆 每詣興宗 躡履到前하여 不敢就席하고 良久去호되 竟不呼坐注+躡, 蹈也.러라
攸之自以材略過人으로 陰畜異志하여 擇郢州士馬器仗精者以自隨하고 到官 以討蠻爲名하고 大發兵力하여 部勒嚴整하고 重賦斂以繕器甲하고 舊應供臺者 皆割留之하고
羈留商旅하고 蔽匿亡命하며 所部逃亡 窮追必得而後止 擧措專恣하여 不復承用符勅하니 朝廷疑而憚之注+羈留, 言牽制而留之, 如羈馬之義. 臺省所下者爲符, 出命經中書門下者爲勅.러라
爲政刻暴하여 或鞭撻士大夫호되 然吏事精明하여 人不敢欺하니 盜賊屏息하고 外戶不閉러라
諡曰宣穆이라하다
冬十月 柔然侵魏어늘 魏擊走之하다
◑宋以劉秉爲僕射하다
和弱無幹能호되 以宗室淸令이라 故袁褚引之注+秉, 道憐之孫也. 令, 善也.하다
佃夫 權任轉重하여 欲用其所親爲郡이어늘 袁粲等不同이라 佃夫 稱勅施行하니 衆不敢執이러라
魏制小祀 勿用牲하다
魏有司 奏諸祠祀一千七十五所 歲用牲七萬五千五百이라한대 上皇惡其多殺하여 詔自今非天地宗廟社稷이어든 皆勿用牲하고 薦以酒脯하다


나라 태종太宗 명제明帝 유욱劉彧 태예泰豫注+① 宋主(劉彧)가 오래도록 병을 앓아 편치 못하여 연호를 고쳤다. 원년이고, 북위北魏 고조高祖 효문제孝文帝 탁발굉拓跋宏 연흥延興 2년이다.
[] 봄 정월에 나라 만족蠻族의 추장 환탄桓誕면수沔水 북쪽 지역을 가지고 북위北魏에 항복하였다.
[] 대양만大陽蠻 족의注+① 이는 바로 五水蠻이다. 宋나라는 大陽戍를 蘄陽縣 서쪽에 설치하였으니, 이 縣은 漢나라 江夏郡 蘄春縣이다. 추장 환탄桓誕면수沔水 북쪽 8만여 부락을 거느리고 북위北魏에 항복하여 스스로 ‘환현桓玄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북위北魏에서 동형주자사東荊州刺史로 삼고, 기부랑起部郞 위진韋珍에게 환탄과 함께 새로 귀부한 백성들을 편안하고 화목하게 하여 여러 일을 처리하게 하니 모두 합당하게 되었다.注+② 東荊州는 比陽縣을 治所로 삼았다. 晉나라와 송나라 때 起部를 두었으나 항상 두지는 않았다. 起部는 工部이니, ≪書經≫ 〈虞書 益稷〉의 에서 뜻을 취하였다.
[] 2월에 유연柔然북위北魏를 침략하자, 북위北魏가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 나라가 양주자사揚州刺史 강안후江安侯 왕경문王景文을 죽였다.
[] 왕경문王景文이 늘 지위와 재산이 분수에 넘치는 것을 걱정하여 여러 차례 지위를 사양하자, 송주宋主(유욱劉彧)가 허락하지 않고 조서를 내려 말하기를
“사람이 귀하고 중요한 지위에 있을 때는 다만 그 마음이 어떤지 물을 뿐이다.注+① 〈“但問心若爲耳”는〉 다만 마음가짐이 어떠한지를 물을 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대명大明(457~464)의 시대에 소상지巢尙之서원徐爰대법흥戴法興대명보戴明寶注+② “巢․徐․二戴”는 巢尙之, 徐爰, 戴法興, 戴明寶를 말한다. 지위가 창을 잡는 직급에 불과했지만, 권세는 군주를 능가했고, 지금 원찬袁粲상서령尙書令복야僕射을 맡고 있지만, 사람들이 때때로 원찬이 있다는 것을 모르니, 이런 태도로 귀하고 중요한 지위에 있으면 당연히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지경에 이르겠는가. 화를 피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은 운명에 맡기고 무심한 것만 못하니, 존망存亡의 요체는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의 이치이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황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난 뒤에 황후가 조정을 다스릴 때에 왕경문이 혹여 다른 마음을 품을까 염려하여 사자를 시켜 손수 쓴 칙서와 독약을 보내어 죽음을 내렸다. 왕경문은 한창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칙서가 든 함을 열어보고는 다시 바둑판 아래 두고 정신과 안색이 변하지 않았다.
바둑을 끝내고 바둑알을 상자에 넣고 나서는注+③ 叩는 열다는 뜻이고, 函은 상자이다. 已는 마친다는 뜻이고, 子는 바둑알이다. 奩는 음이 廉으로, 바둑알을 담는 상자이다. 천천히 말하기를 “칙서를 받들어 보니, 죽음을 내렸습니다.”라고 하며 칙서를 손님에게 보이니注+④ 여기에서 句를 뗀다., 중직병中直兵注+⑤ 中直兵은 親兵을 맡은 장수이다. 초도焦度가 성을 내며 말하기를 “대장부가 어찌 가만히 앉아서 죽을 수 있겠습니까. 안에 있는 문무文武 관료 수백 명이면 한번 싸워볼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왕경문이 말하기를 “경들의 지극한 마음은 알지만, 만약 나를 생각한다면 우리 식구를 위하여 계책을 세우시오.”라고 하고 마침내 글을 올려 답례의 말을 하고는 약을 마시고 하니 시호가 의후懿侯이다.
송주宋主가 또 한번은 꿈을 꾸었는데 어떤 사람이 고하기를 “예장태수豫章太守 유음劉愔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라고 하니, 잠에서 깨고 나서는 그 으로 사람을 보내 죽였다.
[] 여름 4월에 송주宋主 유욱劉彧하니注+① 향년이 34세였다., 태자太子 유욱劉昱제위帝位에 올랐다.
[] 송주宋主(유욱劉彧)의 병세가 악화되자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사공司空으로 삼고 저연褚淵호군장군護軍將軍으로 삼았으며, 유면劉勔우복야右僕射로 삼아 상서령尙書令 원찬袁粲형주자사荊州刺史 채흥종蔡興宗영주자사郢州刺史 심유지沈攸之와 함께 고명顧命을 받게 하였다.
저연이 평소에 소도성蕭道成과 친밀하게 지냈기에 그를 천거하니 조서를 내려 우위장군右衛將軍으로 삼아 함께 중요한 일을 담당하게 하고는 송주宋主가 드디어 하였다. 태자太子 유욱劉昱이 즉위하니 나이가 열 살이었다.
원찬袁粲 등이 정권을 잡고서 사치스러웠던 이전 조정의 뒤를 이어 널리 절약과 검소에 힘써서 그 폐단에서 구원하려고 하였으나 완전부阮佃夫 등이 일을 주관하여 뇌물이 공공연히 행해지니 금지시킬 수가 없었다.
[] 나라가 안성왕安成王 유준劉準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 유준劉準은 실제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의 아들이지만, 태종太宗(유욱劉彧)이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 가을 7월에 나라가 심유지沈攸之도독형양팔주제군사都督荊襄八州軍事로 삼았다.
[] 나라 우장군右將軍 왕도륭王道隆채흥종蔡興宗이 강직하므로 상류上流에 있지 않게 하고자 하여 그를 중서감中書監으로 삼아서 심유지沈攸之로 그를 대신하게 하니, 채흥종이 사양하고 관직을 받지 않았다.
왕도륭이 채흥종에게 갈 때마다 신을 신고注+① 躡은 신는다는 뜻이다. 앞으로 나아가 감히 자리에 앉지 않고 한참 있다가 물러났는데, 채흥종도 끝내 불러서 앉으라고 하지 않았다.
심유지는 스스로 재주와 지략이 남들보다 뛰어나다고 여겨 몰래 다른 뜻을 품어 영주郢州의 군사와 군마 및 무기 중에 예리한 것을 뽑아서 이로써 자신을 수행하게 하였다. 형주荊州에 부임한 뒤에 만족蠻族을 토벌한다는 명목으로 크게 병력을 징발하여 군기를 엄정하게 하고 세금을 많이 거두어 무기와 갑옷을 수리하였으며, 이전에 대성臺省에 보내던 물자를 모두 떼어서 남겨두었으며,
상인들을 억류하였고, 망명한 사람들을 숨겨주었으며, 부하 중에 도망가는 사람이 있으면 끝까지 추격하여 반드시 잡아온 뒤에야 그쳤다. 시행하는 조치는 멋대로 하여 이상 부절과 칙명을 받들지 않으니 조정에서는 그를 의심하고 꺼렸다.注+② “羈留”는 끌어와서 제어하여 머물게 하는 것을 말하니 말에 굴레를 씌운다는 뜻과 같다. 臺省에서 내려주는 것이 符이고, 命을 내릴 적에 中書門下를 거쳐 내려주는 것이 勅이다.
정치는 각박하고 포악하여 사대부에게 채찍질을 하기도 하였으나 업무를 잘 파악하고 분명히 하여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니 도적이 자취를 감추었고 사람들이 바깥문도 닫지 않고 살았다.
[] 8월에 나라 중서감中書監 낙안공樂安公 채흥종蔡興宗하였다.
[] 시호는 선목宣穆이라 하였다.
[] 겨울 10월에 유연柔然북위北魏를 침략하자, 북위北魏가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 나라가 유병劉秉복야僕射로 삼았다.
[] 유병劉秉이 온화하고 약하여 재능이 없었으나 종실 중에 고결하고 선량한 사람이므로注+① 劉秉은 劉道憐의 손자이다. 令은 선하다는 뜻이다. 원찬袁粲저연褚淵이 그를 등용하였다.
[] 나라가 완전부阮佃夫급사중給事中으로 삼았다.
[] 완전부阮佃夫의 권력과 책임이 점점 무거워지자 그가 친하게 지내던 사람을 등용하여 을 다스리게 하려고 하니 원찬袁粲 등이 동의하지 않았다. 완전부가 조칙이라 일컬어 시행하니, 여러 사람들이 감히 고집하지 못했다.
[] 북위北魏소사小祀에는 희생을 사용하지 않도록 하는 를 제정하였다.
[] 북위北魏 유사有司가 여러 사당 가운데 제사를 지내는 곳이 1,075곳이고, 해마다 75,500마리를 희생으로 쓴다고 아뢰자, 상황上皇(탁발홍拓跋弘)이 많이 살생을 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칙을 내려 “지금부터 천지天地종묘宗廟사직社稷의 제사가 아니면 모두 희생을 사용하지 말고 술과 포만 올리라.”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百工起哉 : ≪書經≫ 〈虞書 益稷〉에 “대신들이 즐거우면 임금이 흥성하고 백관도 화락하리라.[股肱喜哉 元首起哉 百工煕哉]”라고 하였다.
역주2 宋殺其楊州刺史江安侯王景文 : “分注(目)를 살펴보면 王景文이 죽음에 처하여 어지럽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어린 태자를 맡는 임무를 준 것은 어찌 蕭道成보다 낫지 않겠는가마는 도리어 의심하여 죽인 것은 어째서인가. 관직을 기록하고 작위를 기록한 것은 슬퍼한 것일 뿐이다.[考之分注 景文處死不亂如此 若畀以託孤之任 豈不愈於道成 乃反疑而殺之何耶 書官書爵 可哀也已]” ≪發明≫
역주3 領選 : 吏部尙書를 말한다.
역주4 夏四月……太子昱立 : “明帝 초기에 ≪資治通鑑綱目≫에서 ‘宋立(宋나라가 즉위시켰다.)’이라고 기록한 것은 그 즉위를 인정해준 것이다. 即位 이래로 ‘殺(죽였다)’이라고 기록한 것이 8번인데, 劉子勛 이외에 형을 죽이고 아우를 죽이고 그 형의 아들을 죽여서 宋主라고 지척해 기록한 것이 吳喜와 아울러 6번이니, 두 번 전하고 망한 것이 마땅하다.[明帝之初 綱目書宋立 予其立也 即位以來 書殺者八 而子勛之外 殺兄 殺弟 殺其兄之子 斥書宋主者 竝吳喜而六 再傳而亡 宜矣]” ≪書法≫
역주5 宋中書監樂安公蔡興宗卒 : “中書監에 아직 임명되지 않았는데 어찌하여 기록하였는가. 어짊을 인정해준 것이다. 그러므로 관직이 그 재주에 걸맞으면 채흥종이 아직 임명되지 않고 卒하였으나 ‘中書監’이라고 기록한 것이요, 罰이 罪에 맞지 않으면 楊惲이 폐해진 뒤에 살해되었어도 ‘故平通侯’라고 기록하였으니(漢 宣帝 五鳳 4년(B.C.54)) 모두 ≪資治通鑑綱目≫에서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宋․北魏에서 陳에 이르기까지 여러 신하들의 卒에 官爵을 갖추어 기록한 이는 19명이다(宋 辛酉年(421)에 자세하다.).[中書監未拜 則何以書 予賢也 故官稱其才 則興宗以未拜而卒 書中書監 罰不當罪 則楊惲以已廢而殺 書故平通侯(漢宣帝五鳳四年) 皆綱目之特筆也 宋魏至陳 諸臣卒具官爵者十九人(詳宋辛酉年)]” ≪書法≫
역주6 宋以阮佃夫爲給事中 : “두 번이나 ‘宋’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阮佃夫를 劉秉과 동일시하지 못하게 한 것이니, ≪資治通鑑綱目≫에서 正邪를 구분한 것이 엄격하다.[再書宋 何 不使佃夫同於劉秉也 綱目正邪之分嚴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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