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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4)

자치통감강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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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卯年(B.C. 102)
기묘년(B.C. 102)
三年이라
[綱] 나라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 태초太初 3년이다.
帝東巡海上하다
봄에 황제가 동쪽으로 해상海上을 순행하였다.
◑ 匈奴兒單于死하니 季父呴犁湖單于立注+呴, 鉤‧吁二音, 呴犁湖, 名也.하다
[綱] 흉노匈奴아선우兒單于가 죽으니, 계부季父가 즉위하였다.注+ 두 가지 음이니, 구려호呴犁湖는 그의 이름이다.
[綱] 변방 밖에 성장城障(성벽)을 쌓았는데, 가을에 흉노匈奴가 대거 침입해서 모두 파괴하였다.
遣光祿勳徐自爲하여 出五原塞하여 築城障列亭하여 西北至廬朐注+五原塞, 卽五原郡楡林塞也. 朐, 音劬, 廬朐, 匈奴中山名.러니 匈奴大入定襄, 雲中하여 盡破壞之하다
[目] 광록훈光祿勳 서자위徐自爲를 보내 오원五原를 나가 성벽과 여러 정장亭障을 쌓게 하여, 서북쪽으로 여구산廬朐山에까지 이르렀는데,注+오원새五原塞는 바로 오원군五原郡 유림새楡林塞이다. 는 음이 이니, 여구廬朐흉노匈奴 가운데에 있는 산 이름이다. 가을에 흉노匈奴정양定襄운중雲中으로 대거 침입하여 모두 파괴하였다.
睢陽侯張昌 有罪하여 國除注+班書功臣表及公卿表, 皆作睢陵侯. 睢陵縣, 屬淮郡. 張敖封宣平侯, 傳國曾孫壬, 失侯, 元光三年, 其弟廣爲睢陵侯, 紹國. 昌, 廣之子也.하다
[綱] 수양후睢陽侯 장창張昌이 죄를 지어 나라가 없어졌다.注+수양후睢陽侯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공신표功臣表〉와 〈공경표公卿表〉에 모두 수릉후睢陵侯로 표기되어 있으니, 수릉현睢陵縣임회군臨淮郡에 속하였다. 장오張敖선평후宣平侯에 봉해져서 나라를 전하여 증손 장임張壬에 이르러 의 작위를 잃었다가 원광元光 3년(B.C. 132)에 장임張壬의 아우 장광張廣수릉후睢陵侯가 되어 나라를 이었으니, 장창張昌장광張廣의 아들이다.
高祖封功臣爲列侯 百四十有三人이니 兵革之餘 民人散亡하여 大侯 不過萬家 小者 五六百戶
[目] 처음에 고조高祖가 공신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은 것이 143명이었는데, 이때는 전란을 겪은 뒤라서 백성들이 흩어지고 도망하여 큰 는 1만 에 불과하고 작은 자는 5, 6백 호였다.
其封爵之誓曰 使黃河如帶하고 泰山若厲토록 國以永存하여 爰及苗裔라하고 申以丹書之信하고 重以白馬之盟注+帶, 衣帶也, 厲, 砥石也. 苗, 草根所生, 裔, 衣裾之末. 故遠末之孫, 謂之苗裔. 重, 直用切. 白馬之盟, 謂刑白馬, 歃其血以爲盟也.하다
봉작封爵하는 맹세에 이르기를 “황하黃河가 띠처럼 가늘어지고 태산泰山이 숫돌처럼 닳도록 나라가 길이 보존되어서 마침내 묘예苗裔(후손)에 미친다.” 하였고, 단서丹書인신印信으로 다짐하고 백마白馬의 피로 맹약하여 거듭 다짐하였다.注+는 옷의 띠이고 는 숫돌이다. 는 풀뿌리에서 나온 싹이고 는 옷자락의 끝이다. 그러므로 먼 후손을 묘예苗裔라 이른다. (거듭하다)은 직용直用이다. “백마지맹白馬之盟”은 백마를 잡아서 그 피를 발라 맹약함을 이른다.
及高后時 差第位次하여 藏諸宗廟하고 副在有司注+副, 貳也. 其列侯功籍, 已藏於宗廟, 副貳之本, 又在有司.러니 逮文景間하여 流民旣歸하고 戶口亦息하니 列侯大者 至三四萬戶 小國自倍하여 富厚如之
고후高后 때에 이르러 공신들의 위차位次를 차등하여 이것을 종묘宗廟에 보관하고 부본副本유사有司가 가지고 있었는데,注+이본貳本(부본副本)이다. 열후列侯의 공신 문서가 이미 종묘에 보관되어 있고 부이副貳이 또 유사有司에게 있는 것이다.문제文帝경제景帝의 사이에 이르러는 유리流離하는 백성들이 돌아오고 호구 또한 불어나니, 열후列侯 중에 큰 자는 3, 4만 호에 이르고 작은 나라도 저절로 배로 증가해서 부유함이 호구수와 같이 많아졌다.
子孫 驕逸하여 多抵法禁하여 隕身失國注+自倍, 謂舊五百戶, 今者至千戶也. 富厚如之, 言其貲財亦稍富厚, 各如戶口之多也.이라
자손들이 이로 말미암아 교만하고 방일放逸하여 법금法禁을 많이 저촉해서 몸이 죽고 나라를 잃었다.注+자배自倍”는 옛날에 5백 호였는데 지금 갑절로 증가하여 1천 호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부후여지富厚如之”는 그 재물 또한 점점 부유해져서 각각 호구수와 같이 많아짐을 말한 것이다.
至是 坐爲太常乏祠하여 國除注+乏祠, 祠事有闕也.하니見侯纔四人이요 網亦少密焉注+見, 胡甸切. 四人, 酇侯蕭壽成‧繆侯酈世宗‧汾陽侯靳石封, 幷睢陵侯張昌. 網亦少密, 言法網差益密也.이러라
이때에 이르러 장창張昌태상太常에 제사를 지내지 않은 죄에 걸려서 나라가 없어지니,注+핍사乏祠”는 제사 지내는 일에 빠뜨림이 있는 것이다. 남아 있는 가 겨우 네 사람이었고 법망 또한 다소 치밀해졌다.注+(현재)은 호전胡甸이다. “사인四人(네 사람)”은 찬후酇侯 소수성蕭壽成, 목후繆侯 역세종酈世宗, 분양후汾陽侯 근석봉靳石封과 여기에 수릉후睢陵侯 장창張昌을 합한 것이다. “망역소밀網亦少密”은 법망法網이 다소 더욱 치밀해짐을 말한 것이다.
[綱] 군대를 크게 동원하여 이광리李廣利를 따라 대완大宛을 포위하자, 대완大宛에서 그 관과毌寡를 죽이고 항복하니, 좋은 말 수십 을 얻었다.注+관과毌寡대완大宛 이름이다.
旣亡浞野之兵하니 公卿議者 皆願罷宛軍호되
[目] 나라가 이미 착야후浞野侯(조파노趙破奴)의 군대를 잃으니, 공경公卿 중에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대완大宛을 공격하는 군대를 파할 것을 청하였다.
上以爲宛小國而不能下하면 則大夏之屬 漸輕漢이요 而宛善馬絶不來라하여
그러나 은 말하기를 “대완은 작은 나라인데도 함락하지 못한다면 대하大夏 등이 점점 나라를 깔볼 것이요, 대완의 좋은 말이 절대로 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乃案言伐宛尤不便者注+案, 謂案其罪而行罰.하고
그리하여 대완을 정벌하는 것이 매우 온당치 못하다고 말하는 자를 조사하여 처벌하게 하였다.注+은 죄를 조사하여 벌을 시행함을 이른다.
赦囚徒하고 發惡少年及邊騎出燉煌者六萬人호되 負私從者 不與注+與, 讀曰豫. 謂負私糧食及私從者, 不在六萬人數中也.하고
그러고는 죄수의 무리를 사면하고 행실이 나쁜 소년과 및 변방의 기병을 징발하여 돈황燉煌에서 출전注+(참여하다)는 로 읽는다. 〈“부사종자負私從者 불여不與”는〉 사사로이 양식을 짊어지고 간 자와 사사로이 따라간 자는 6만 명의 숫자에 들어있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하였던 자가 6만 명이었는데, 사사로이 양식을 지고 간 자와 사사로이 수행한 자는 이 숫자에 넣지 않았다.
牛十萬이요 馬三萬匹이요驢, 槖駝以萬數 齎糧注+槖, 音託. 駝, 徒何切. 槖駝, 匈奴中奇獸名, 能負囊槖而駄物, 故名. 背有二封, 大月氏出一封者. 封, 謂其背肉隆高, 如封土也. 一說 “以其背肉似槖故名.”이라
소는 10만 마리이고 말은 3만 필이며, 1만 필에 이르는 나귀와 낙타가 양식을 싣고 갔다.注+(전대)은 음이 이고 도하徒何이다. “탁타槖駝(낙타)”는 흉노匈奴 지역에 있는 기이한 짐승의 이름이니, 능히 자루와 전대를 짊어지고 물건을 실을 수 있으므로 이름한 것이다. 등에 두 이 있으며, 대월지국大月氏國에서는 한 이 있는 것이 생산된다. 은 등의 살이 높이 솟아서 흙을 북돋운 것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일설에 “그 등의 살이 전대와 같으므로 탁타槖駝라고 이름했다.” 하였다.
發天下吏有罪者 亡命者 及贅壻, 賈人, 故有市籍하고 父母, 大父母有市籍者 凡七科하여 適爲兵하고 及載糒하여 給貳師注+七科, 吏有罪一, 亡命二, 贅壻三, 賈人四, 故有市籍五, 父母有市籍六, 大父母有市籍七. 適, 讀曰謫, 責罰也. 糒. 音備, 乾飯也.하고 拜習馬者二人하여 爲執驅馬校尉注+習, 猶便也. 一人爲執馬校尉, 一人爲驅馬校尉, 備破宛, 擇取其善馬云.하다
천하의 관리 중에 죄를 지은 자와 망명한 자와 데릴사위와 장사꾼과 옛날 이 있던 자와 부모와 조부모 중에 시적이 있었던 자를 징발해서 모두 7로 나누어 책벌責罰하여 병사로 삼고, 말린 밥을 싣고 가서 이사장군貳師將軍에게 공급하게 하고,注+칠과七科”는 관리 중에 죄가 있는 자가 첫 번째이고, 망명한 자가 두 번째이고, 남의 데릴사위가 된 자가 세 번째이고, 장사꾼이 네 번째이고, 옛날 시적市籍이 있었던 자가 다섯 번째이고, 부모父母에게 시적市籍이 있었던 자가 여섯 번째이고, 대부모大父母(조부모)에게 시적市籍이 있었던 자가 일곱 번째이다. 으로 읽으니, 책망責望하고 벌줌이다. 는 음이 이니, 말린 밥이다. 말타기를 익숙하게 익힌 자 두 사람을 제수하여 집마교위執馬校尉구마교위驅馬校尉를 삼았다.注+(익히다)은 便과 같다. 한 사람은 집마교위執馬校尉로 삼고 한 사람은 구마교위驅馬校尉로 삼은 것이니, 대완大宛을 격파하고서 좋은 말을 가려 취할 것에 대비한 것이다.
於是 貳師行하니 所至 迎給하고 不下者 攻屠之하니라
[目] 이에 이사장군貳師將軍(이광리李廣利)이 출동하니, 이르는 곳마다 〈부근의 나라에서〉 맞이하여 양식을 공급하였고, 항복하지 않는 자를 공격하여 도륙하였다.
至宛城하니 兵到者三萬이어늘 圍其城하여 攻之四十餘日이라
대완大宛의 도성에 이르니, 도착한 병사가 3만 명이므로 도성을 포위하여 40여 일이 넘도록 공격하였다.
宛貴人 共殺王持頭하고 使貳師曰 無攻我하면 我盡出善馬하여 恣所取而給軍食이어니와
대완의 귀인貴人이 함께 을 죽이고 그의 머리(수급首級)를 가지고 와서 이사장군貳師將軍에게 아뢰기를 “우리를 공격하지 않으면 우리가 좋은 말을 모두 내주어 마음껏 가져가게 하고 군대의 양식을 공급할 것이다.
卽不聽我하면 我盡殺善馬 康居之救 又且至하리라
만일 우리의 청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좋은 말을 모두 죽일 것이고 강거康居의 구원병이 또 장차 이를 것이다.” 하였다.
貳師許之하니 宛乃出其馬하여 令漢自擇之하고 而多出食하여
이사장군이 이를 허락하니, 대완에서는 마침내 말을 내주어 나라로 하여금 좋은 말을 스스로 선발하여 가져가게 하고, 양식을 많이 내어 나라 군대를 먹였다.
食漢軍이라 漢取其善馬數十匹 中馬三千餘匹하고 立宛貴人昩蔡하여 爲宛王하고 與盟而罷兵注+昩, 音末. 蔡, 千曷切. 昩蔡, 大宛將名.하다
나라에서는 좋은 말 수십 필과 중간 말 3천여 필을 얻고, 대완의 귀인貴人말찰昩蔡대완大宛으로 세우고서 함께 맹약하고 군대를 해산하였다.注+은 음이 이고 천갈千曷이니, 말찰昩蔡대완大宛의 장수 이름이다.
令搜粟都尉上官桀 攻破郁成한대 郁成王走어늘 追斬之注+帝置搜粟都尉, 屬大司農. 上官, 複姓, 桀, 名也.하다
수속도위搜粟都尉 상관걸上官桀로 하여금 욱성郁成을 공격하게 하여 격파하자, 욱성왕郁成王이 도망하므로 쫓아가서 목을 베었다.注+황제가 수속도위搜粟都尉를 설치하여 대사농大司農에 속하게 하였다. 상관上官복성複姓이고 은 이름이다.
역주
역주1 呴犁湖單于(구려호선우, 흉노 제8대 선우) : 《史記》에는 ‘呴犁湖’로 되어 있으나 《漢書》에는 ‘呴㴝湖’로 되어 있다. 학계에는 보통 ‘구려호’로 읽는다. 犁에도 ‘려’의 음이 있으므로 이를 따랐다.
역주2 築塞外城障……盡破壞之 : “곧바로 이 일을 썼으니, 城을 믿을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봄에 ‘城障을 쌓았다.’고 쓰고, 가을에 ‘匈奴가 파괴했다.’고 썼으며, 〈隋 文帝 때에는 辛丑年에〉 ‘長城을 쌓았다.’고 쓰고, 〈다음해인 壬寅年에〉 ‘突厥이 침입했다.’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의 뜻이 분명하다.[直書其事 城之不足恃明矣 故春書築城障 秋書匈奴破壞之 書築長城 書突厥入之 綱目之意昭昭矣]” 《書法》
역주3 (陵)[臨] : 저본에는 ‘陵’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臨’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大發兵……得善馬數十匹 : “군대를 크게 동원한 것을 쓴 적이 없었는데, ‘군대를 크게 동원하였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판한 것이다. 군대를 크게 동원하고도 겨우 말 수십 필을 얻었으니, 얻은 것이 잃은 것을 보상하지 못함을 알 수 있다. 아래에 ‘李廣利를 봉하여 海西侯로 삼았다.’고 썼으니, 그러고도 오히려 功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未有書大發兵者 書大發兵 何 譏也 大發兵而得馬僅數十 得不償失 可見矣 下書封李廣利爲海西侯 尙可謂之有功乎]” 《書法》
“앞에서는 ‘군대를 크게 동원하여 大宛을 포위했다.’고 썼고, 뒤에서는 ‘좋은 말 수십 필을 얻었다.’고 썼으니, 그 경중이 또한 똑같지 못한 것이다. 天子의 군대는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征討하는 것인데, 지난해에 ‘李廣利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大宛을 정벌했다.’고 쓸 적에 大宛에서 변경을 침범한 죄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데,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정벌한 것이〉 말을 얻기 위함임을 알게 되었다. 바야흐로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북을 치고 출전하였는데, 燉煌에 이르러서는 생존한 병력이 겨우 10명 중에 1, 2명에 그쳤다. 그리고 3년의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병력을 증원한 것이 6만 명에 이르렀고, 개인들이 물건을 가지고 사사로이 따라간 자는 여기에 들어 있지 않았는데, 또 대완에 이르러서는 겨우 3만 명이 남았을 뿐이다. 禽獸를 내몰아 사람의 고기를 먹게 하였으니, 그 화가 어찌 참으로 한탄할 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孟子》에 ‘전투를 잘하는 자는 上刑(극형)을 받아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광리와 같은 자는 士卒들을 많이 죽여 전투를 잘했다고도 할 수 없으니, 그 죄가 죽음을 받아도 가벼운데 오히려 封侯의 상을 받았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광리를 봉했다.’는 것을 아래에 특별히 써서, 武帝가 〈사랑에 빠져 私慾을 부린〉 잘못을 드러내어서 후세의 경계로 삼은 것이다.[上書大發兵圍宛 下書得善馬數十匹 則其輕重亦不類矣 天子之兵 所以征討不服 前年書遣李廣利 將兵伐宛 未聞宛有犯邊之罪也 至是乃知爲馬故爾 方其以數萬之衆 鼓行而進 比至燉煌 所存僅止什一二 經歷三年之久 益兵至於六萬 而負私從者不與焉 又到宛 則三萬而已 率禽獸而食人肉 其禍可勝歎哉 孟子曰 善戰者服上刑 若廣利者 多殺士卒 不足爲善戰 其罪又浮於死 而猶受封侯之賞 故綱目特書封李廣利于下 以著武帝之失 爲後戒也]” 《發明》
역주5 市籍 : 시장의 호적으로, 여기에 기록된 자들은 관리가 될 수 없었다. 옛날 농업을 本業이라 하여 권장하고 商賈를 末業이라 억제하였으며, 또 장사꾼들은 물건을 매매함에 속임수를 많이 사용한다 하여 관리를 시키지 않았다.

자치통감강목(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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