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경시가 정전正殿에 오르고 낭이郞吏들이 차례로 뜰 안에 진열하였는데, 경시는 부끄러워해서 고개를 숙이고 자리를 만지작거리며 감히 똑바로 보지 못하였다.注+작怍은 음이 작昨이니 안색이 변한 것이다. 괄刮은 고찰古刹의 절切이니 만지작거림이다.
경시가 장수들 중에 뒤늦게 도착한 자들에게 얼마나 노략질하였는가를 물으니, 좌우는 모두 궁성宮省의 오랜 관리들인지라 놀라 서로 바라보기만 하였다.
綱
【강綱】 여러 공신功臣을 봉하고, 대사마 주유大司馬 朱鮪(주유)와 장군 이일將軍 李軼(이일)을 보내서 관동關東 지역을 진무하게 하였다.
目
【목目】 이송李松과 조맹趙萌이 경시更始를 설득하여 여러 공신功臣을 모두 왕王으로 봉해야 한다고 하자, 주유朱鮪가 간쟁하기를 “고조高祖는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으로 봉하지 않는다고 맹약하였습니다.” 하였다.
경시는 이에 먼저 여러 종실宗室을 봉하고 그런 뒤에 여러 공신功臣을 세워서 모두 왕으로 삼고 주유를 교동왕膠東王으로 삼았는데, 주유가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그를 좌대사마左大司馬로 삼아서 이일李軼 등과 함께 관동關東 지역을 진무하게 하였다.
綱
【강綱】 이송李松을 승상丞相으로 삼고, 조맹趙萌을 우대사마右大司馬로 삼았다.
目
【목目】 경시更始는 조맹趙萌의 딸을 받아들여 부인夫人으로 삼았기에 정권을 조맹에게 맡기고 밤낮으로 후정後庭에서 술을 마시며 잔치하였다.注+연讌은 연醼과 통하니, 모여 술 마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정사를 말하고자 할 때마다 경시는 술에 취하여 제대로 만나보지 못하였고, 부득이한 경우에는 시중侍中으로 하여금 장막 안에 앉아서 신하들과 더불어 정사를 말하게 하였다.
조맹이 권력을 독점하여 자기 멋대로 사람을 살리고 죽이자 낭리郎吏가 이에 대해 말하니, 경시가 노하여 검을 뽑아 그를 내리쳤다.
또 여러 소인과 선부膳夫에 이르기까지 모두 지나치게 관작을 제수하니, 장안長安의 사람들이 이를 두고 말하기를 “부엌에서 밥 짓고 요리하는 사람은 중랑장中郞將이고, 양羊의 위胃를 굽는 자는 기도위騎都尉이고, 양羊의 머리를 굽는 자는 관내후關內侯이다.”注+양養은 익량弋亮의 절切이니, 음식을 삶고 밥 짓는 일을 주관함을 이른다. 위胃는 오장육부五臟六腑 중에 곡식을 받아들이는 기관이다. 하였다.
이에 장군 이숙將軍 李淑이 글을 올려 간절히 간하자, 경시는 그를 가두었다. 지방에 있는 장수들이 모두 멋대로 상벌賞罰을 행하고 각각 목牧과 수守를 두니,
주군州郡이 서로 혼잡하게 얽혀 따를 바를 알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관중關中 지역의 인심이 이반하고 해내海內가 원망하고 배반하였다.
綱
【강綱】 외효隗囂(외효)를 불러 우장군右將軍으로 삼았다.
目
【목目】 경시更始가 외효隗囂와 그의 숙부인 외최隗崔, 외의隗義 등을 부르자, 방망方望이 경시의 성패成敗를 아직 알 수 없다 하여 굳이 만류하였으나 외효가 듣지 않으니,
방망은 편지로 하직하고 떠나갔다. 경시는 외효를 우장군右將軍으로 삼았다.
綱
【강綱】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가 경감耿弇(경감)을 장사長史로 삼았다.
目
【목目】 경황耿況이 그의 아들 경감耿弇을 장안長安에 보내니注+감弇은 음이 감甘이다., 경감은 이때 나이가 21세였다. 경감이 송자宋子에 이르렀는데注+송자현宋子縣은 거록군鉅鹿郡에 속하였다. 마침 왕랑王郞이 군대를 일으켰다.
는 성제成帝의 정통正統인데, 이 사람을 버려 정통에 귀의하지 않고 멀리 어디를 가려고 합니까?” 하니, 경감이 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자여는 피폐한 역적이니, 끝내 항복한 포로가 될 것이다.
내 장안長安에 이르러 어양漁陽과 상곡上谷의 군대와 말을 진열하고, 돌아가 돌기병突騎兵을 징발해서 자여의 오합지졸을 마치 마른 나뭇가지를 꺾고 썩은 나무를 꺾는 것처럼 유린할 것이다.注+돌기突騎는 날래고 정예로워서 적과 충돌할 수 있음을 말한다. 인轔은 음이 인吝이니, 수레로 밟는(유린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거취去就의 의리를 알지 못하니, 머지않아 삼족三族이 멸할 것이다.” 하였다.
目
【목目】 경감耿弇이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가 노노盧奴에 있다는 말을 듣고注+노노盧奴는 현縣의 이름이니 중산국中山國에 속하였다. 현縣에 흑수黑水의 옛 못이 있었는데, 물이 검은 것을 노盧라 하고 물이 흐르지 않는 것을 노奴라 하니, 인하여 명칭으로 삼은 것이다. 마침내 북쪽으로 달려와서 배알하니, 유수는 그를 머물게 하여 장사長史로 임용하고 함께 북쪽으로 갔다.
계薊에 이르러 공조 왕패功曹 王霸로 하여금 사람을 모집해서 왕랑王郞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시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크게 비웃고는 손을 들어 야유하니, 왕패가 부끄러워 그대로 돌아왔다.注+“야유邪揄”는 음이 야유耶兪이니, 〈“거수야유지擧手邪揄之”는〉 손을 들어 상대를 희롱하는 것이다. 거懅는 음이 거遽니, 또한 부끄러워함이다.
유수가 장차 남쪽으로 돌아가려 하자注+유수劉秀가 한단邯鄲(왕랑王郞)의 군대가 막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장차 남쪽으로 돌아가고자 한 것이다., 경감이 말하기를 “지금 군대가 남방에서 왔으니, 남쪽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어양태수 팽총漁陽太守 彭寵은 공公과 같은 고을 사람이요,
상곡태수上谷太守는 바로 저의 아버지입니다.注+팽총彭寵은 남양군 완현南陽郡 宛縣 사람이다. 이 두 군郡에서 활을 당겨 쏠 수 있는 만 명의 기병騎兵을 징발하면 한단邯鄲은 굳이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유수의 관속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더라도 머리를 남쪽으로 두어야 하는데, 어찌 북쪽으로 가서 주머니 가운데로 들어간단 말입니까?”注+어양漁陽과 상곡上谷은 북쪽으로 새원塞垣(변경의 만리장성)에 접하였으니, 이곳에 이르면 길이 궁하여 마치 주머니 가운데로 들어가는 것과 같음을 이른다. 하였다. 이에 유수는 경감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이 사람은 나의 북도北道(북쪽 지방 여러 고을) 주인이다.” 하였다.
綱
【강綱】 계성薊城이 반란을 일으켜서 왕랑王郞에게 호응하자,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가 신도信都와 화융和戎으로 달아나 군대를 징발해서 한단邯鄲을 공격하였다.
目
【목目】 계중薊中이 반란을 일으켜서 왕랑王郞에게 호응하니, 성안이 소요하고 혼란하였다.
이에 유수劉秀가 말을 재촉하여 성을 나와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남쪽으로 달려 무루정蕪蔞亭(무루정)에 이르렀는데, 이때에 날씨가 춥고 〈먹을 것이 없어서〉 풍이馮異가 팥죽을 올렸다.注+촉趣(재촉하다)은 촉促으로 읽는다. 루蔞는 력우力于의 절切이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무루蕪蔞는 정자의 이름이니, 지금의 요양현饒陽縣 동북쪽에 있었다.” 하였다.
요양饒陽에 이르러는 관속들이 모두 먹을 것이 없었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속도를 배가하여 서리와 눈을 무릅쓰고 행군하니, 얼굴이 모두 깨지고 찢어졌다.注+요양饒陽은 현縣의 이름으로 안평국安平國에 속하였으니, 요하饒河의 북쪽에 있었다. 몽蒙은 무릅씀이다.
目
【목目】 〈유수劉秀의 일행이〉 하곡양下曲陽에 이르러 왕랑王郞의 군대가 후미에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注+하곡양下曲陽은 현縣의 이름이니 거록군鉅鹿郡에 속하였다. 상산군常山郡에 상곡양上曲陽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하下라 말한 것이다.호타하嘑沱河(호타하)로 가니, 정탐하는 관리가 돌아와 아뢰기를 “하수河水에 얼음이 둥둥 떠다녀서 배가 없이는 건널 수 없습니다.”注+호嘑는 본래 호滹로 쓰는데 혹 호虖로 쓰며, 일본一本에는 호呼로 썼는데, 모두 음이 황호荒胡의 절切이다. 타沱는 혹 타池로 쓰니, 모두 음이 도하徒何의 절切이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산해경山海經≫에 ‘대희大戱의 산에 호타滹沱의 물이 나온다.’ 하였으니, 지금 대주 번치현代州 繁畤縣에 있다. 동쪽으로 흘러 정주 심택현定州 深澤縣 동남쪽을 경유하니, 바로 광무제光武帝가 건넜던 곳으로, 지금 세속에서도 여전히 위도구危渡口라 이른다.” 하였다. 사澌는 음이 사斯이니, 물에 떠다니는 얼음 조각이다. 하였다.
유수劉秀가 왕패王霸를 시켜 가서 보게 하였는데, 왕패는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할까 염려해서 돌아오자마자 “얼음이 단단히 얼어서 건널 수 있습니다.”라고 거짓말을 하였다.注+궤詭는 속임이다. 마침내 앞으로 가서 하수에 이르렀는데 하수의 얼음이 정말로 얼어 있었다. 이에 하수를 건넜는데 몇 기騎가 채 건너기 전에 얼음이 풀렸다.
目
【목目】 남궁南宮에 이르러 큰 바람과 비를 만나서 길가에 있는 빈집에 들어가니注+남궁南宮은 현縣의 이름이니 신도국信都國에 속하였다., 풍이馮異는 섶나무를 안고 오고 등우鄧禹는 불을 지폈다. 유수劉秀가 아궁이를 마주하고서 옷을 말리고 있었는데, 풍이가 다시 보리밥을 올렸다.注+설爇은 이열而悅의 절切이니 불을 지핌이다. 료燎는 불을 쪼임이다.
하박성下博城 서쪽에 이르러서 두렵고 의심스러워 갈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注+하박현下博縣은 신도국信都國에 속하니, 박수博水의 아래에 있으므로 하박下博이라 하였다., 어떤 흰옷을 입은 노부老父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하기를 “부디 노력하라. 신도信都는 장안성長安城을 지키기 위한 길목이니, 여기와의 거리가 80리이다.” 하였다. 유수가 즉시 그곳으로 달려갔다.注+노부老父는 신인神人인 듯하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신도국信都國은 지금의 기주冀州이다.” 하였다.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目
【목目】 이때에 군국郡國이 모두 이미 왕랑王郞에게 항복하고 오직 신도태수 임광信都太守 任光과 화융태수 비융和戎太守 邳肜(비융)만이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注+≪후한서後漢書≫ 〈비융전邳肜傳〉에 화융和戎은 화성和成으로 되어 있으니, 왕망王莽이 거록鉅鹿을 나누어 화성군和成郡을 만들었다. 비邳는 성姓이다. 임광은 스스로 온전하지 못할까 염려하고 있었는데, 유수劉秀가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였다.
目
【목目】 비융邳肜도 와서 함께 모이니, 의논하는 자들이 대부분 서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이에 비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랑王郞은 이름을 빌린 오합지졸이어서 근본의 견고함이 없으니, 명공明公이 두 군郡의 군대를 떨쳐 일으켜서 토벌하신다면 어찌 이기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注+“이군二郡”은 신도信都와 화성和成이다.
이제 이들을 내버려두고 돌아간다면, 어찌 한갓 하북河北만 잃겠습니까. 반드시 다시 삼보三輔 지역을 놀라게 하여 위세를 잃게 될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만약 명공이 다시 정벌할 뜻이 없다면 신도信都의 병력조차도 모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왜냐하면 명공이 서쪽으로 가고 나면 한단邯鄲의 기세가 완전히 이루어져서,
백성들이 부모를 버리고 이루어진 군주(왕랑王郞)를 등지고서 천 리 멀리 공公을 전송하려 하지 않을 것이니, 아마도 틀림없이 무리가 이산되어 도망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수가 이에 중지하였다.注+
任光(≪雲臺三十二將圖≫)
② 배背는 음이 패佩이니 버림이다. 성주成主는 왕랑王郞의 지위와 칭호가 정해져서 이미 이루어진 군주가 됨을 이른다.
目
【목目】 유수劉秀는 두 군郡(신도信都와 화성和成)의 군대가 약하다 하여 성두자로城頭子路와 조자도刁子都(조자도)의 군중에 들어가고자 하였는데注+원증爰曾이 노성두盧城頭에서 군대를 일으켰는데 원증의 자가 자로子路였으므로 성두자로城頭子路라 하였으니 무리가 20여만 명이었고, 조자도刁子都는 무리가 6, 7만 명이었다. 그러므로 유수劉秀가 이들에게 의지하고자 한 것이다., 임광任光이 불가하다 하고는 마침내 인근 현縣의 군대를 징발하여 정병精兵 4천 명을 얻었다.
이에 유수는 임광任光과 비융邳肜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임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자신을 따르게 하였다. 임광이 격문檄文을 대량으로 만들어 말하기를 “대사마 유공大司馬 劉公이 성두자로와 조자도의 병사 백만 무리를 거느리고
동방東方에서 와서 여러 배반한 역적들을 공격할 것이다.” 하니, 관리와 백성들은 격문을 보고 돌려가며 서로 말해주었다.
유식劉植은 병사 수천 명을 모아 창성昌城을 점거하였고注+전傳(전하다)은 음이 전轉이다. 창성현昌城縣은 신도국信都國에 속하였다., 경순耿純은 종족宗族과 빈객賓客 2천여 명을 인솔하되 늙고 병든 자는 관목棺木을 싣고 스스로 따르게 하여注+목木은 관棺을 이른다. 늙고 병든 자는 사망할까 염려되므로 관棺을 싣고 종군하게 한 것이다. 모두 와서 유수를 맞이하였다.
유수가 이들을 모두 장군으로 삼으니, 무리가 점차 모여 만 명에 이르렀다. 북쪽으로 중산中山을 공격하여 나아가 노노盧奴를 함락하고, 지나는 곳마다
변군邊郡에 격문을 돌려서 함께 한단邯鄲을 공격하게 하니, 군현郡縣이 다시 호응하였다. 이때 진정왕 유양眞定王 劉楊이 군대를 일으켜 왕랑王郞에게 붙으니, 무리가 십여만이었다.注+유양劉楊은 상산헌왕常山憲王의 6세손世孫이다.
유수가 유식을 보내 유양을 설득하여 항복하게 하고 인하여 유양의 생질인 곽씨郭氏를 부인으로 받아들였다. 또 원씨元氏와 방자防子로 진격하여 모두 함락하고注+방防은 방房과 통한다. 원씨元氏와 방자防子는 상산군常山郡에 속하였다. 왕랑의 장수 이운李惲(이운)을 공격하여 참수하였다.
綱
【강綱】 연잠延岑(연잠)이 한중漢中을 점거하자, 한중왕 유가漢中王 劉嘉가 공격하여 항복을 받았다.注+연잠延岑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유가劉嘉는 유창劉敞의 조카인데, 이해에 봉작封爵을 받았다.
綱
【강綱】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가 가복賈復과 채준祭遵(채준)을 장군將軍으로 삼았다.
目
【목目】 한중왕 유가漢中王 劉嘉가 연잠延岑을 이기니, 보유한 무리가 수십만이었다. 교위 가복校尉 賈復이 경시更始의 정사가 혼란한 것을 보고 유가를 설득하기를 “지금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못하였으니, 대왕大王이 보존한 바를 편안히 지키고는 있으나, 보존한 바가 보존될 수 없지 않겠습니까.”注+“소보所保”는 경시更始를 이른다. 일설에 “한중漢中이다.” 하였다. 하니,
유가가 말하기를 “경卿의 말은 너무 커서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대사마大司馬(유수劉秀)가 하북河北에 있으니, 반드시 서로 쓸(의지할) 수 있을 것이오.” 하고는 마침내 가복賈復과 진준陳俊을 천거하자, 유수劉秀는 가복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진준을 연掾으로 삼았다.
目
【목目】 유수劉秀의 집안 아이가 법령을 어기자 군시령 채준軍市令 祭遵(채준)이 쳐서 죽이니注+〈“군시령軍市令”은〉 종군從軍한 자가 한 지방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군중軍中에 시장을 세워서 서로 무역하게 하고 영令을 두어 다스리게 한 것이다. 채祭는 측개側介의 절切이니 성姓이다., 유수가 노하여 채준을 체포하도록 명하였다.
주부 진부主簿 陳副가 간諫하기를 “명공明公은 항상 여러 군대가 질서정연하기를 바랐습니다. 지금 채준이 법을 받들어 시행하고 피하지 않았으니, 이는 교령敎令이 행해진 것입니다.” 하였다.
유수는 이에 채준을 척간刺姦(척간)장군將軍으로 삼고注+왕망王莽이 좌우左右의 척간刺姦을 두어서 간사하고 교활한 관리들을 감독하게 하였는데, 광무제光武帝가 이어받아서 장군의 칭호로 삼은 것이다.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채준의 벌을 대비하라. 내 집안의 아이도 법을 범하자 죽였으니, 반드시 여러 경卿들을 사사로이 봐주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綱
【강綱】 유현劉玄이 상서복야 포영尙書僕射 鮑永을 보내 하동河東 지역을 안집安集하게 하였다.
目
【목目】 처음에 왕망王莽이 포선鮑宣을 죽이자, 관리가 그의 아들 포영鮑永도 죽이려 하였는데, 상당태수 구간上黨太守 苟諫이 포영을 보호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경시更始가 그를 불러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삼아서 군대를 거느리고 하동河東 지역을 안집安集하게 하였는데, 포영은 풍연馮衍을 장군將軍으로 삼아서 태원太原에 주둔하고
상당태수 전읍上黨太守 田邑과 함께 갑옷을 수선하고 병사들을 길러서 병주幷州의 땅을 지키게 하였다.注+“병토幷土”는 병주幷州의 땅이다.
綱
【강綱】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가 광아廣阿를 함락하였다.
目
【목目】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가 군대를 이끌고 동북쪽으로 가서 광아廣阿를 함락하고는注+광아廣阿는 현縣의 이름이니 거록군鉅鹿郡에 속하였다.여지도輿地圖를 펴서 등우鄧禹에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注+피披는 펼쳐 보는 것이다. 땅은 수레가 물건을 싣는 것과 비슷하므로 지도地圖를 여지도輿地圖라 칭한다. “천하天下의 군국郡國이 이와 같이 많은데, 이제야 비로소 그 하나를 얻었다.
하니, 등우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해내海內가 혼란하여注+효殽는 뒤섞임이다. 사람들이 현명한 군주를 생각하기를 어린아이가 자애로운 어머니를 사모하듯이 합니다.
옛날에 흥했던 자들은 덕德의 후박厚薄에 따라 흥하였지, 나라의 대소大小에 따라 흥하지 않았습니다.”
綱
【강綱】 경감耿弇이 상곡上谷과 어양漁陽의 군대를 거느리고 군현郡縣을 다니며 평정하고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와 광아廣阿에서 합류하니,
유수가 그의 장수인 구순寇恂과 오한吳漢 등을 장군將軍으로 삼았다. 여름 4월에 한단邯鄲을 진격하여 함락하고 왕랑王郞을 참수하였다.
目
【목目】 계중薊中의 반란에 경감耿弇이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와 서로 헤어져 북쪽 창평昌平으로 도망하여 그의 아버지 경황耿況을 설득해서 한단邯鄲을 공격하게 하였다.注+창평현昌平縣은 상곡군上谷郡에 속하였다.
이때에 왕랑王郞이 장수를 파견하여 어양漁陽과 상곡上谷을 순행하면서 급히 이 지역의 군대를 징발하니, 북쪽 고을에서는 대부분 그를 따르고자 하였다.
구순寇恂이 말하기를 “한단(왕랑)은 갑자기 일어났으니 믿기가 어렵고, 대사마大司馬(유수)는 백승伯升(유연劉縯)의 동모제同母弟로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들에게 몸을 낮추니, 귀의할 만하다.注+한단邯鄲은 왕랑王郞을 이른다. 발拔은 갑자기이니, “발기拔起”는 굴기屈起라는 말과 같다.
내가 청하건대 동쪽으로 어양漁陽의 팽총彭寵과 약속하여 마음을 함께하고 병력을 규합하면, 한단은 굳이 도모할 것이 못 된다.” 하니, 경황이 구순을 보내 팽총과 약속하게 하였다.
팽총은 마침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동원해서 오한과 갑연, 왕량을 장군으로 삼아 계성薊城을 공격해서 왕랑王郞의 장수 조굉趙閎(조굉)을 죽였다.
目
【목目】 구순寇恂이 돌아와서 장사長史인 경단景丹, 경감耿弇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서 어양漁陽의 군대와 연합하고는,
지나가는 길에 공격하여 왕랑王郞의 대장大將 이하 3만 명의 수급을 베고, 탁군涿郡, 중산中山, 거록鉅鹿, 청하淸河, 하간河間 등 모두 22개 현縣을 평정하였다.
전진하여 광아廣阿에 이르러서 성안에 전차와 기병이 매우 많다는 말을 듣고 경단이 누구의 군대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대사마 유공大司馬 劉公이다.” 하니, 장수들이 기뻐하여 즉시 나아가 성 아래에 이르렀다.
성안에서는 처음에 두 군郡의 군대가 한단邯鄲(왕랑)을 위해서 온다고 전해졌었는데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니, 아래의 “양위良爲”도 같다., 유수가 직접 성에 올라가 물으니, 경감이 성 아래에서 절하고 군대를 동원한 내용을 자세히 말하였다.
目
【목目】 유수劉秀가 이에 장수들을 모두 불러들이고 웃으며 말하기를 “한단邯鄲의 장수將帥가 자주 자신들이 어양漁陽과 상곡上谷의 군대를 징발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므로 나 역시 그저 그 군대를 징발할 것이라고 대답하였으나注+요聊는 우선 대략이란 말이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왕랑王郞의 장수가 여러 번 말하기를 ‘두 군郡의 군대를 징발하여 광무제光武帝를 막고자 한다.’ 하였으므로 광무제光武帝 또한 대략 이와 같이 응답하였으니, 지금 두 군대가 서로 희롱하는 것과 같다.”, 두 군郡이 진실로 나를 위해서 올 줄을 어찌 생각하였겠는가.
내 이제 사대부士大夫들과 이 공명功名을 함께하겠다.”注+양良은 첫 번째, 진실로라는 뜻이다. 하고는, 이에 경단景丹 등을 모두 편장군偏將軍으로 삼고, 경황耿況과 팽총彭寵에게 대장군大將軍을 가하여 열후列侯로 봉하였다.
오한吳漢은 인품이 질박하고 후중하고 꾸밈이 적어서 잠깐 사이에는 말로 자신의 뜻을 전달하지 못하였으나 침착하고 용맹하고 지략이 있으니, 등우鄧禹가 여러 번 그를 천거하였다.
目
【목目】 경시更始가 상서령 사궁尙書令 謝躬을 보내 여섯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왕랑王郞을 토벌하게 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유수劉秀가 이들과 연합하여 거록鉅鹿을 포위하였는데, 왕랑이 장수 예굉倪宏(예굉)을 보내어 거록鉅鹿을 구원하니, 유수가 싸워 승리하지 못하였다.
경단景丹 등이 돌기突騎를 풀어 공격하니, 왕랑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유수가 말하기를 “내 듣건대 돌기突騎가 천하의 정병精兵이라 하였는데, 지금 그 싸우는 모습을 보니, 즐거움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注+〈“낙가언야樂可言耶”는〉 사람의 뜻에 흡족함을 이른다. 하였다.
경순耿純이 말하기를 “오랫동안 거록鉅鹿을 지키면 군사들이 피폐해지니, 대군大軍이 정예로울 때에 한단邯鄲을 진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目
【목目】 4월에 한단邯鄲으로 진군하여 연달아 싸워 격파하니, 왕랑王郞이 두위杜威를 보내 항복을 청하였다.
두위가 와서 왕랑이 실제로 성제成帝가 낳은 아들[유체遺體]이라고 칭하자, 유수劉秀가 말하기를 “설사 성제가 다시 세상에 태어난다 하더라도 천하를 얻을 수 없는데, 하물며 자여子輿를 사칭한 자를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두위가 만호후萬戶侯를 봉해줄 것을 요구하자, 유수가 말하기를 “목숨이나 보전하기를 바라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니, 두위가 노하여 떠나갔다. 유수가 급히 이들을 공격하여 5월에 한단邯鄲을 함락하였는데, 왕랑이 도망하니 추격하여 참수하였다.
유수가 왕랑의 문서文書를 거두어 관리와 백성들이 왕랑과 서로 주고받으며 유수를 비방한 문서 수천 장을 얻었다.注+교交는 맺음이고, 관關은 통함이다. 유수는 이것을 살펴보지 않고 장수들을 모아놓고서 문서들을 불태우며 말하기를 “불안해하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주려는 것이다.”注+성省은 살펴봄이다. “반측反側”은 불안해함이다. 하였다.
目
【목目】 유수劉秀가 관리와 병사들을 나누어 부서를 정할 적에 모두 대수장군大樹將軍에게 소속되기를 원한다고 말하였으니, 대수장군大樹將軍은 풍이馮異이다. 풍이는 사람이 겸손하고 공功을 자랑하지 않아서 관리와 병사들에게 명하여 교전하거나 적의 침공을 받는 경우가 아니면 항상 여러 장군의 진영 뒤로 피해 다니게 하였으며,
매양 머물러 쉴 적에 장수들이 함께 앉아 공을 논하면, 항상 홀로 나무 아래에 숨어 있었다. 그러므로 군중軍中이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 불렀다.注+병屛은 필영必郢의 절切로 덮어 감춤이니, 〈“병수하屛樹下”는〉 나무 아래에 앉아 〈자신의 공功을〉 스스로 감춤을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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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현劉玄이 대사마 유수大司馬 劉秀를 세워 소왕蕭王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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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경시更始(유현劉玄)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유수劉秀를 세워 소왕蕭王으로 삼고는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패군沛郡에 소현蕭縣이 있다.” 하였다. 군대를 해산하여 공功을 세운 장수들과 함께 행재소行在所로 나오게 하였다.
또 묘증苗曾을 보내 유주목幽州牧으로 삼고 위순韋順과 채충蔡充을 상곡上谷과 어양漁陽의 태수太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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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왕蕭王(유수劉秀)이 한단邯鄲의 궁宮에 거처할 적에 낮에 온명전溫明殿에 누워 있었는데注+〈“온명전溫明殿”은〉 조왕 유여의趙王 劉如意의 궁전이다. ≪수경주水經注≫에 “온명전溫明殿은 총대叢臺 서쪽에 있다.” 하였다., 경감耿弇이 들어와 잠시 시간을 내주기를 청하여 말하기를 “관리와 병사 중에 죽고 다친 자가 많으니, 상곡上谷에 들어가서 병력을 더 증원할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소왕이 말하기를 “왕랑王郞이 이미 격파되어 하북河北이 대략 평정되었는데,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어디에 쓰겠는가?” 하니, 경감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왕랑이 비록 격파되었으나, 천하의 전쟁은 이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 서쪽(경시更始)에서 사자使者가 와서 군대를 해산하라고 하는데, 이것을 들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동마銅馬와 적미赤眉의 등속이 수십 개의 무리이고, 무리마다 병력이 수십만에서 백만 명에 이릅니다.
이들은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으니, 성공聖公(경시)은 능히 공功을 이루지 못하여 오래지 않아 반드시 패할 것입니다.”注+동마銅馬는 적의 칭호이다. 성공聖公은 유현劉玄의 자이다. 판辦은 성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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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왕蕭王이 일어나 앉으며 말하기를 “경卿이 실언하였으니, 내 그대를 참수하리라.” 하였다. 경감耿弇이 말하기를 “대왕大王이 저를 부자 사이와 같이 아끼시므로 감히 진심을 피력하였습니다.” 하였다.
소왕이 말하기를 “내 경卿을 놀렸을 뿐이다. 어찌하여 이렇게 말하는가?” 하니, 경감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백성들이 왕망王莽을 싫어하고 괴롭게 여겨서 다시 유씨劉氏를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한漢나라 군대가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마치 호랑이 아가리를 벗어나 자애스러운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그런데 지금 경시更始가 천자天子가 되자 장수들은 산동山東 지역에서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고 귀척貴戚들은 도성 안에서 마구 횡포를 부리니, 백성들이 가슴을 치면서 다시 왕망의 조정을 생각합니다. 이 때문에 경시가 반드시 패망할 것을 아는 것입니다.注+횡橫(방종하다)은 호맹戶孟의 절切이다. “도내都內”는 장안長安을 이른다. 고叩는 침이다.
공公은 공명功名이 이미 드러났고 대의大義로써 정벌하였으니, 격문檄文만 돌리고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천하는 지극히 중하니, 공公이 직접 취하고 타성他姓으로 하여금 얻게 하지 마소서.”
소왕이 이에 하북河北 지역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음을 구실 삼아 경시가 부르는 명령에 나아가지 않으니, 이에 비로소 경시와 갈라지게 되었다.注+이貳는 다른 마음을 품고 떠나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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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에 소왕蕭王이 동마銅馬의 여러 적賊을 공격하여 그 무리를 모두 거두고, 남쪽으로 하내河內 지역을 순행하여 항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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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에 여러 적賊이 합하여 수백만 명이었는데, 있는 곳마다 도둑질하고 노략질하였다. 소왕蕭王이 이들을 공격하고자 해서 마침내 오한吳漢과 경감耿弇을 임명하여 모두 대장군大將軍으로 삼고는, 부절符節을 잡고 북쪽으로 가서 유주幽州의 돌기突騎를 징발하게 하였다.
그런데 묘증苗曾이 여러 군郡에 명하여 징발에 응하지 못하게 하므로 오한이 그를 잡아 참수하였다.注+조調는 도소徒笑의 절切이니 징발함이다. 경감 또한 상곡上谷에 이르러 위순韋順과 채충蔡充을 참수하고 그들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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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왕蕭王이 교鄡(교)에서 동마銅馬를 공격할 적에注+교鄡는 견요堅堯의 절切로 현縣의 이름이니, 거록군鉅鹿郡에 속하였다., 오한吳漢이 돌기突騎를 거느리고 와서 회합하여 군대의 장부를 막부幕府에 모두 올려 맡길 곳을 청하고 감히 자신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으니, 소왕이 더욱 오한을 소중히 여겼다.注+“병부兵簿”는 군사들의 이름을 적은 장부이다.
소왕은 주부朱浮를 유주목幽州牧으로 삼고서 계薊에 치소를 두었다. 동마가 밤에 달아나자 소왕이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는데,
채 항복을 다 받기 전에 고호高湖와 중련重連이 와서 동마의 남은 무리와 연합하였다.注+고호高湖와 중련重連은 두 적수賊師(도적의 우두머리)의 성명이다. 이에 소왕은 다시 이들과 싸워서 모두 격파하고 항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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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장수들이 항복한 적들을 믿지 못하고 항복한 자들도 또한 스스로 편안하지 못했는데, 소왕蕭王이 그들의 이러한 마음을 알아차리고는 칙령을 내려 항복한 자들로 하여금 각각 진영에 돌아가 군대를 무장하게 하고, 자신은 경무장한 말을 타고서 부部와 진陣을 순행하니,
항복한 자들이 번갈아 서로 말하기를 “소왕이 진심을 다하여 남(우리)을 대하니, 어찌 목숨을 바쳐 의탁하지 않겠는가.”注+진陳(진을 치다)은 진陣으로 읽는다. 투投는 의탁함이니, 〈“투사投死”는〉 죽음으로써 의탁함을 이른다. 하였다. 이에 이들을 모두 여러 장수에게 배속시키니, 병력이 마침내 수십만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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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적미赤眉의 별수別帥가 청독靑犢, 상강上江, 대동大彤, 철경鐵脛, 오번五幡 등 십여만 명과 함께 사견射犬에 집결해 있었는데注+여러 적賊이 함께 일어날 적에, 혹은 산천과 토지를 가지고 명칭을 삼고, 혹은 군용軍容의 강성함을 가지고 칭호를 삼았다. 상강上江과 대동大彤, 철경鐵脛과 오번五幡은 모두 적이 스스로 칭호한 것이다. ≪속한지續漢志≫에 “야왕野王에 사견취射犬聚가 있다.” 하였다., 소왕蕭王이 이들을 격파하고 남쪽으로 하내河內 지역을 순행하니, 태수 한흠太守 韓歆이 항복하였다.
사궁謝躬이 여러 번 소왕을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미처 출동하지 못하고 있었다.注+처음에 사궁謝躬이 소왕蕭王과 함께 왕랑王郞을 멸하였으나, 자주 소왕蕭王과 의견이 어긋나서 항상 소왕蕭王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전쟁을 싫어하여 중지하였다. 이때에 수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업鄴으로 돌아가서 주둔하고 있었는데, 융려산隆慮山에서 우래尤來를 맞아 공격하였다가 대패하였다.注+우래尤來의 우두머리는 번숭樊崇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융려현隆慮縣은 하내군河內郡에 속했다.” 하였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융려산隆慮山은 융려현隆慮縣의 북쪽에 있다.” 하였다.
소왕이 오한吳漢과 잠팽岑彭을 보내서 업성鄴城을 기습하여 점거하자 사궁이 돌아왔는데, 오한 등이 그를 참수하니 그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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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공손술公孫述이 스스로 촉왕蜀王이라 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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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경시更始가 이보李寶를 보내 촉한蜀漢 지역을 순행하게 하니, 공손술公孫述이 그의 아우를 보내 면죽綿竹에서 맞아 공격해서 대파하여 패주시켰다.注+공손술公孫述의 아우는 이름이 회恢이다. 면죽綿竹은 읍邑의 이름이니 광한군廣漢郡에 속하였다. 공손술이 마침내 스스로 즉위하여 촉왕蜀王이 되어 성도成都에 도읍하니, 백성과 오랑캐들이 모두 따랐다.注+〈“도성도都成都”는〉 공손술公孫述이 먼저는 임공臨邛에 거하였다가 지금 성도成都로 옮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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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에 적미赤眉가 서쪽으로 장안長安을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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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적미赤眉가 비록 여러 번 싸워 승리하였으나, 피폐하여 시름겨워하면서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그러나 번숭樊崇 등은 동쪽으로 향하면 반드시 무리가 흩어질 것이니, 서쪽으로 장안長安을 공격하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영천潁川으로 들어간 다음 마침내 부대를 둘로 나누어 번숭樊崇은 무관武關에서 출동하고 서선徐宣은 육혼관陸渾關에서 출동하여 두 길로 함께 장안長安으로 쳐들어갔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무관武關은 지금의 상주 상락현商州 上洛縣 동쪽에 있다.” 하였다. 문영文穎이 말하기를 “홍농弘農의 석현析縣 서쪽 170리 지점에 무관武關이 있다.” 하였다. ≪전한서前漢書≫에 “육혼현陸渾縣에 관문이 있으니, 지금 낙주 이궐현洛州 伊闕縣 서남쪽에 있다.” 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육혼현陸渾縣은 홍농군弘農郡에 속했다.” 하였다. 혼渾은 호곤胡昆의 절切이다.
경시更始는 왕광王匡 등으로 하여금 하동河東과 홍농弘農을 나누어 점거해서 적미를 막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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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소왕蕭王이 장군 등우將軍 鄧禹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서 관중關中(장안長安)에 들어가게 하고, 구순寇恂은 하내河內를 지키고 풍이馮異는 낙양洛陽을 막게 하고는,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연燕, 조趙 지역을 순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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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왕蕭王이 장차 북쪽으로 연燕, 조趙 지역을 순행하려 할 적에, 적미赤眉가 틀림없이 장안長安을 격파할 것이라고 짐작하고는, 등우鄧禹를 전장군前將軍으로 임명하고서 휘하麾下의 정병精兵 2만 명을 반으로 나누어 서쪽으로 보내 관중에 들어가게 하였다.
이때에 주유朱鮪와 이일李軼은 낙양洛陽을 지키고 포영鮑永과 전읍田邑은 병주幷州에 있었다. 소왕은 하내河內 지역이 지형이 험한 요새이고 백성들이 부유하다 하여
寇恂(≪雲臺三十二將圖≫)
이곳을 지킬 자를 가리고자 하였으나, 적임자를 가리기 어려워서 등우에게 물으니注+하내河內는 북쪽으로 험한 태항산太行山이 있고, 남쪽으로 요충지인 하진河津에 접해 있었다., 등우가 대답하기를 “구순寇恂은 문무文武를 구비하고 백성을 다스리고 무리를 통솔하는 재주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시킬 만한 자가 없습니다.” 하였다.
소왕은 마침내 구순을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임명하고, 그에게 이르기를 “옛날 고조高祖가 소하蕭何를 관중關中에 남겨두었는데, 내가 지금 공公에게 하내河內를 맡기니,
마땅히 군량을 충분하게 공급하고 군사와 말을 독려하여 다른 군대를 막아서 북쪽으로 건너오지 못하도록 하라.” 하였다. 풍이馮異를 맹진장군孟津將軍으로 제수하여 하수河水 가에서 군대를 통솔하여 낙양洛陽을 막게 하고注+맹孟은 하북河北의 지명인데, 이 지역에 나루를 설치하였기 때문에 맹진孟津이라 이름하였다.,
소왕이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북쪽으로 가니, 구순이 식량을 조달하고 기계器械를 정비하여 군대에 공급해서 일찍이 떨어지게 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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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현劉玄이 외효隗囂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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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외효隗囂의 숙부인〉 외최隗崔와 외의隗義가 반역을 도모하여 천수天水로 돌아가려고 하자, 외효가 이 사실을 경시更始에게 고하였다.注+〈“효고지囂告之”는〉 외효隗囂가 자신에게도 화가 미칠까 두려워해서였다. 경시는 외최와 외의를 주벌하고 외효를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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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양왕 유영梁王 劉永이 나라를 점거하고 군대를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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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양왕 유영梁王 劉永이 군대를 일으켜서 제음濟陰과 산양山陽, 패沛와 초楚, 회양淮陽과 여남汝南을 공격하여 점령해서 모두 28개의 성城을 얻고는, 패沛 사람 주건周建 등을 장수로 삼았다.
또 적賊의 우두머리인 서방西防의 교강佼彊과 동해東海의 동헌董憲, 낭야琅邪의 장보張步를 장군으로 삼고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서방西防은 현縣의 이름이니, 옛 성城이 지금의 송주 선보현宋州 單父縣(선보현) 북쪽에 있었다.” 하였다. 교佼는 음이 교絞로 성姓이니, 글자를 혹 교姣로도 쓴다. 교강佼彊은 서방西防의 적수賊帥(도적의 우두머리)요, 동헌董憲은 동해東海의 적수요, 장보張步는 낭야琅邪의 적수이다.청靑과 서徐 두 주州를 감독하여 이들과 군대를 연합해서 마침내 동방東方을 완전히 점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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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진풍秦豐이 여구黎丘를 점거하고 스스로 초여왕楚黎王이라 이름하였다.注+여구黎丘는 초楚 지역이다. 그러므로 초 여왕楚 黎王이라 칭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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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전융田戎이 이릉夷陵을 함락하고 여러 군현郡縣을 전전하면서 노략질하였다.注+이릉夷陵은 현縣의 이름이니 남군南郡에 속하였다. 여기에 이산夷山이 있으므로 이릉夷陵이라고 하였다.
역주6蓋延(갑연) :
‘蓋’자가 地名이나 姓氏로 쓰일 때에는 음이 ‘갑’이다. ≪資治通鑑≫에 대한 胡三省의 音註에 古盍의 切로 표기되어 있으며, 또한 ≪廣韻≫ 등 여러 韻書에도 지명이나 성씨의 의미일 때에는 음이 ‘갑’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대부분 ‘합’으로 잘못 읽었다.
역주7謝躬이……항복하였다 :
謝躬은 更始가 보낸 인물로 劉秀와 함께 王郞을 격멸하였다. 그러나 자주 유수와 뜻이 맞지 않아 죽이고자 하였다. 그는 이때 鄴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가 尤來에게 패하자 유수가 이를 틈타 업을 차지하고 그를 죽인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資治通鑑≫에 보인다.
역주9梁王永據國起兵 :
“劉永은 어떤 사람인가. 梁王 劉立의 아들이니, 나라를 소유한 지가 오래되었다. 이때 王莽이 이미 주살되었는데, 어찌하여 ‘起兵’이라고 썼는가. 劉玄이 황제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현이 황제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았을 적에는 起兵으로 쓰고 梁王이라고 칭하였고, 光武帝(蕭王)가 황제가 된 것을 인정하였을 적에는 그의 작위를 삭제하고 劉永이라고 칭한 것이다.[永者 何 梁王立子也 有國舊矣 於是莽已誅滅 何以書起兵 不成玄之爲帝也 故不成玄之爲帝 則書起兵而稱梁王 成蕭王之爲帝 則削爵而稱劉永]다”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