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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상서尚書 제갈회諸葛恢는 유상劉翔의 자형이었는데, 홀로 이의를 주장하여 이르기를 “오랑캐들이 서로 공격함은 중국의 이로움이지만, 오직 예기禮器와 명호名號는 가벼이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는
마침내 유상에게 청하기를 “가령 모용진군慕容鎮軍(모용황慕容皝)이 석호를 능히 제거하더라도 이것은 바로 다시 한 석호가 되는 것이니, 조정에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였다.
유상이 말하기를 “
과부寡婦도 오히려
종주宗周의 망함을 근심할 줄 알았는데,
注+① ≪춘추좌씨전≫에 鄭나라 子太叔이 范獻子를 보고 말하기를 “寡婦가 길쌈할 때 씨줄이 모자라는 것은 근심하지 않고 宗周가 멸망하는 것을 근심하였으니, 王室이 편안하지 못함은 晉나라의 수치입니다.” 하였다. 嫠는 과부이다. 지금 그대는
진晉나라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지위가
팔원八元․
팔개八凱와
注+② 元․凱는 바로 이다. 비등하면서도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이 전혀 없고,
모용진군은 창을 베고 잠을 자면서 아침이 되기를 기다려 흉악한 역적을 섬멸하려는 뜻을 두었는데, 그대가 다시 간사하고 미혹하는 주장을 하니, 사해四海가 통일되지 못하는 이유는 진실로 그대 같은 무리 때문입니다.” 하였다.
유상이 건강建康에 머무른 지 1년이 넘도록 중론衆論이 끝내 결판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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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가서 모용황慕容皝을 책명冊命하여 유상劉翔과 함께 북쪽으로 가게 하였다. 공경公卿들이 전별餞別할 적에 유상이 말하기를
“옛날
소강少康은 1
여旅(500명)를 밑천으로 삼아
유궁有窮을 멸하였고
注+① ≪春秋左氏傳≫에 “少康이 綸 땅에서 邑을 소유하니, 토지가 1成(사방 10리)이 있고 병력이 1旅(500명)가 있었는데, 능히 덕을 펴고 智謀를 잘 써서 夏나라 무리를 거두어 마침내 有窮을 멸망시켰다.” 하였다. 구천句踐은
회계會稽에 의지하여 강한
오吳나라에
보복報復하였으니,
注+② 越王 句踐이 會稽에 머물러 있으면서 臥薪嘗膽하여 끝내 吳나라를 멸망시켰다. 뻗어가는 풀도 오히려 일찍 제거해야 하는데,
注+③ ≪春秋左氏傳≫에 “鄭나라 祭仲(채중)이 말하였다. ‘더욱더 뻗어나가게 해서는 안 되니, 뻗어나가면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뻗어나가면 풀도 오히려 제거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하물며 원수인
적敵에 있어서입니까.
지금 석호石虎와 이수李壽가 서로 상대방을 병탄하려는 뜻이 있으니, 황제의 군대가 비록 북방을 깨끗이 소탕하지는 못하더라도 우선 마땅히 파巴․촉蜀 지방을 경영經營해야 합니다. 하루아침에 석호가 남보다 먼저 거사해서 이수를 병탄하여 그 지역을 소유하고 편리한 지형을 점거하여 동남 지방(동진東晉)에 가까이 임한다면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이후에 발생하는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니,
중호군中護軍 사광謝廣이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