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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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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辰年(212)
十七年이라 春正月 하다
操之西征也 河間民田銀하여 扇動幽, 冀어늘 世子丕欲自討之러니
功曹常林曰注+據林傳, 時爲五官將功曹. 今大軍在遠하고 外有彊敵하니 將軍 爲天下之鎭守注+謂留鄴也.하여 輕動遠擧하면 雖克이나 不武라한대
乃遣將軍賈信하여 討滅之하니 餘賊 請降이러라
議者皆曰 公有舊法하니 圍而後降者 不赦라한대 程昱曰 此乃擾攘之際 權時之宜
今天下略定하니 不可誅也니이다 必欲誅之 宜先啓聞이니이다 議者皆曰 軍事 有專無請이니이다
昱曰 凡專命者 謂有臨時之急耳 今此賊 制在賈信之手하니 老臣 不願將軍行之也하노이다
丕曰 善타하고 卽白操하니 操果不誅러니 旣而 聞昱之謀하고 甚悅曰 君 非徒明於軍計 又善處人父子之間注+以勸丕不專殺也.이로다
故事 破賊文書 以一爲十이러니 居府長史國淵 上首級호되 皆以實數어늘
操問其故한대 淵曰 夫征討外寇 多其斬獲之數者 欲以大武功하여 聳民聽也
河間 在封域之內어늘 銀等 叛逆하니 雖克捷有功이나 淵竊恥之하노이다 操大悅하니라
夏五月 誅馬騰하고 夷三族注+ 子超反, 故誅騰也.하다
◑六月晦 日食하다
◑秋七月하다
◑鄜賊梁興 作亂이어늘 左馮翊鄭渾 討平之하다
鄜賊梁興 寇略馮翊注+鄜, 音敷. 鄜縣, 前漢屬左馮翊, 後漢省.하니 諸縣 恐懼하여 皆寄治郡下 議者以爲當移就險阻라한대
馮翊鄭渾曰注+渾, 泰之弟也. 興等 破散하여 藏竄山谷하니 雖有隨者 率脅從耳 今當廣開降路하여 宣諭威信이어늘 而保險自守하면 示弱也라하고
乃聚吏民하여 治城郭하여 爲守備하고 募民逐賊하여 得其財物婦女하면 十以七賞하니 大悅하여 皆願捕賊이러라
賊之失妻子者 皆降이어늘 責其得他婦女하고 然後還之하니 於是 轉相寇盜하여 黨與離散하고
又遣吏民有恩信者하여 告諭之하니 出者相繼 乃使諸縣長吏 各還本治하여 以安集之하다
將餘衆聚鄜城이어늘 討斬之하니 餘黨悉平하다
孫權 徙治建業하다
張紘 以秣陵山川形勝이라하여 勸孫權以爲治所하고 劉備亦勸權居之러니
於是 作石頭城하여 徙治秣陵하고 改號建業注+張舜民曰 “石頭城者, 天生城壁, 有如城然, 在淸涼寺北覆舟山上, 江行自北來者, 循石頭城, 轉入秦淮.”하다
權長史張紘하다
還吳迎家라가 道病하여 授子靖留牋하여注+留牋, 猶遺表也. 自古有國家者 咸欲修德政하여 以比隆盛世호되 至於其治하여는 多不馨香注+書曰 “至治馨香, 感于神明.”하니
非無忠臣賢佐也 由主不勝其情하여 弗能用耳니이다 夫人情 憚難而趨易하고 好同而惡異故 與治道相反이니이다
傳曰 從善如登이요 從惡如崩注+國語(晉)[周]語.이라하니 言善之難也
人君 承基據勢하여 無假於人이어늘 而忠臣 挾難進之術하고 吐逆耳之言하니 其不合也 不亦宜乎잇가
明君寤之하여 求賢如飢渴하고 受諫而不厭하여 抑情損欲而以義斷恩也니이다 省書하고 爲之流涕하니라
呂蒙 聞曹操欲東兵하고 說孫權하여 夾濡須水口立塢注+賢曰 “濡須, 水名, 在今和州歷陽縣西南. 孫權夾水立塢, 狀如偃月.”하니 諸將 皆曰 上岸擊賊하고 洗足入船이니 何用塢爲리오
蒙曰 兵有利鈍하고 戰無百勝하니 如有邂逅 步騎蹙人이면 不暇及水하니 其得入船乎아하니 遂從之注+不期而會曰邂逅. 蹙, 迫也.하다
董昭言於曹操曰 自古以來 人臣匡世 未有今日之功이요 有今日之功 未有久處人臣之勢者也
今明公 恥有慙德하고 樂保名節이라이나 使人以大事疑己하니 誠不可不重慮也注+重, 直用切.니이다
乃與諸將議하여 以丞相 宜進爵國公하고 九錫備物하여 以彰殊勳이라한대
荀彧 以爲 曹公 本興義兵以匡朝寧國하여 秉忠貞之誠하고 守退讓之實하니 君子愛人以德이니 不宜如此注+記檀弓 “曾子曰 ‘君子之愛人也以德, 細人之愛人也以姑息.’”니라 操由是不悅이러라
及擊孫權 表請彧勞軍于譙하고 因輒留彧하여 以侍中, 光祿大夫 持節, 參丞相軍事注+輒, 言專輒也. 時方用兵, 故丞相府置參軍事.하다
操向濡須 以病留壽春이라가 飮藥而卒注+彧傳 “操饋之食, 發視, 乃空器也. 於是飮藥而卒.”하다 行義修整而有智謀하고 好推賢進士 時人 皆惜之하니라
十二月 有星孛于五諸侯注+晉天文志 “五諸侯五星, 在東井北, 又太微南蕃‧左執法東北一星曰謁者, 謁者東北三星曰三公, 三公北三星曰九卿, 九卿西五星曰內五諸侯, 內侍天子, 不之國也.”하다
備在葭萌 龐統 言於備曰 今陰選精兵하여 晝夜兼道하여 徑襲成都하여 一擧便定 此上計也니이다
楊懷, 高沛 璋之名將이라 各仗彊兵하고 據守關頭注+關頭, 白水關頭也. 白水關, 在廣漢白水縣.러니 聞數諫璋하여 使遣將軍還荊州注+數, 音朔.라하니
將軍 遣與相聞하여 說荊州有急하여 欲還救之注+遣, 遣使也.라하면 二子喜하여 必來見하리니
因此執之하고 進取其兵하여 乃向成都 此中計也니이다 還退白帝하여 連引荊州하고 徐還圖之 此下計也注+白帝, 卽巴東魚復縣城也. 公孫述據成都, 自稱白帝, 改魚復曰白帝城.니이다
若沈吟不去하면 將至大困하리니 不可久矣니이다 備然其中計러라
及曹操攻孫權 呼備自救한대 備貽書璋曰 孫氏與孤 本爲脣齒어늘
而關羽兵弱하니 今不往救 則曹操必取荊州하여 轉侵州界하리니 其憂甚於張魯 自守之賊이니 不足慮也注+州界, 謂益州界.라하고
因求益萬兵及資糧한대 但許兵四千하고 餘皆給半하다 備因激怒其衆하여 曰 吾爲益州征彊敵하여 師徒勤瘁어늘 而積財吝賞하니 何以使士大夫死戰乎
張松 書與備曰 今大事垂立이어늘 如何釋此去乎잇가하니 聞之하고 收斬松하고 勅關戍하여 勿復得與備通하다
備大怒하여 召懷, 沛하여 責以無禮斬之注+責其無客主之禮也.하고 勒兵徑至關頭하여 幷其兵하고 進據涪城하다


壬辰年(212)
나라 孝獻皇帝 建安 17년이다. 봄 정월에 曹操鄴城으로 돌아왔는데, 贊拜(황제 앞에서 呼名하여 절함)할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入朝할 적에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과 가죽신을 그대로 착용하고 殿上에 올랐다.
曹操가 서쪽으로 정벌할 적에 河間의 백성인 田銀이 반란을 일으켜 幽州冀州를 선동하자, 世子 曹丕가 직접 토벌하고자 하였다.
功曹 常林이 말하기를注+三國志≫ 〈魏書 常林傳〉에 의하면, 常林은 이때 五官中郞將功曹로 있었다. “지금 大軍이 먼 곳에 있고 밖에 강한 적이 있으니, 장군이 천하의 가 되어서注+〈“爲天下之鎭守”는〉 鄴城에 머물러 있음을 이른다. 가볍게 출동하여 멀리 달려가면 비록 승리하더라도 武勇이 되지 못합니다.” 하자,
조비가 마침내 장군 賈信을 보내어 토벌하여 멸망시키니, 남은 적들이 항복을 청하였다.
】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曹丕에게 말하기를 “曹公(曹操)은 옛날의 법도가 있었으니, 포위한 뒤에 항복한 자는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程昱이 말하기를 “이것은 바로 천하가 어지러운 때에 時宜에 걸맞는 대책을 세웠던 것입니다.
지금 천하가 대략 평정되었으니, 항복한 자들을 주살해서는 안 됩니다. 반드시 죽이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曹公께 아뢰어야 합니다.” 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군대의 일은 專制할 뿐, 굳이 청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였다.
정욱이 말하기를 “무릇 장군이 되어 군대의 명령을 專制한다는 것은 당장의 시급한 일이 있을 때를 가리켜 말한 것일 뿐입니다. 지금 이 의 목숨은 賈信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老臣은 장군이 직접 벌을 시행하는 것을 원치 않는 것입니다.” 하였다.
曹丕가 “좋다.” 하고는 즉시 조조에게 아뢰니, 조조가 과연 주살하지 않았다. 얼마 후 조조는 이것이 정욱의 계책임을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말하기를 “그대는 다만 군대의 계책에 밝을 뿐만 아니라 또 남의 부자간의 일을 잘 처리해주었다.”注+〈“必欲誅之 宜先啓聞”은〉 曹丕에게 마음대로 죽이지 말 것을 권한 것이다. 하였다.
故事에 적을 격파한 내용을 보고하는 문서에 1명을 죽이면 10명이라고 부풀려 올렸는데, 居府長史 國淵首級을 올리면서 모두 실제의 숫자대로 보고하였다.
曹操가 그 이유를 묻자, 국연이 말하기를 “밖에 있는 적을 토벌할 적에 참수하고 사로잡은 숫자를 부풀려 많게 하는 것은 武功을 키워 백성들의 귀를 고무시키려 한 것입니다.
지금河間은 국경의 안에 있는데 田銀 등이 반역을 하였으니, 비록 승리하여 공이 있으나 저는 속으로 이를 부끄러워합니다.” 하니, 조조가 크게 기뻐하였다.
】 여름 5월에 馬騰을 주살하고 三族을 멸하였다.注+7년에 아들 馬超가 배반하였기 때문에 馬騰을 주살한 것이다.
】 6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 가을 7월에 蟲害가 있었다.
鄜縣(부현)의 梁興이 난을 일으키자, 左馮翊鄭渾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鄜縣梁興馮翊 지역을 침범하여 약탈하자,注+는 음이 이니, 鄜縣前漢 때에는 左馮翊에 속하였는데 後漢 때에는 없어졌다. 여러 이 두려워하여 모두 의 아래에 임시로 治所를 두어 다스렸다. 의논하는 자들이 마땅히 험한 要害處로 치소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馮翊 鄭渾은 말하기를注+鄭渾鄭泰의 아우이다. “양흥 등이 격파당하고 흩어져 산골짜기에 도망해 숨어 있으니, 비록 따르는 자가 있으나 대부분 위협에 못 이겨 따르는 것일 뿐이다. 이제 마땅히 항복하는 길을 널리 열어주어서 위엄과 信義를 펴서 招諭해야 하는데, 험한 곳에 의지하여 스스로 지키면 이는 나약함을 보이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관리와 백성들을 모아서 城郭을 수리하여 수비를 강화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적을 추격해서 적의 재물과 婦女를 얻으면 10분의 7을 으로 주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모두 적을 잡기를 원하였다.
妻子를 잃은 들이 모두 항복하자, 鄭渾은 그들이 다른 들의 婦女를 빼앗아올 것을 책임지웠다. 그들이 그렇게 한 뒤에 그들의 처자를 돌려주었다. 이에 적들이 자기들끼리 서로 도둑질을 하여 梁興黨與離散되었다.
또 관리와 백성 중에 은혜와 신의가 있는 자를 보내서 적을 타이르게 하니, 산골짜기에서 나오는 적들이 서로 이어졌다. 이에 여러 長吏로 하여금 각각 원래의 치소로 돌아가서 백성들을 安集하게 하였다.
양흥이 남은 무리들을 거느리고 鄜城으로 모이자 정혼이 토벌하여 참수하니, 殘黨이 모두 평정되었다.
孫權이 치소를 建業으로 옮겼다.
】 처음에 張紘秣陵山川이 매우 좋다고 하여 孫權에게 말릉을 치소(國都)로 삼을 것을 권하였고, 劉備 또한 손권에게 말릉에 거주할 것을 권하였다.
손권이 이때 石頭城을 만들고서 치소를 말릉으로 옮기고 이름을 建業으로 바꾸었다.注+張舜民이 말하였다. “石頭城은 천연적으로 만들어진 성벽인데 사람이 만든 성벽과 똑같다. 淸涼寺 북쪽 覆舟山 위에 있는데, 북쪽에서 흘러 내려오는 강물은 석두성을 따라 돌아서 秦淮河로 들어간다.”
孫權長史 張紘(장굉)이 하였다.
張紘吳縣으로 돌아가 집안 식구를 맞이해 〈建業으로 오다가〉 중도에 병이 들어 아들 張靖에게 留牋을 주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注+留牋遺表(臨終하기 전에 써서 남기는 )와 같다. “예로부터 국가를 소유한 자가 모두 德政을 닦아서 太平盛世의 융성함을 견주고자 하였으나 그 다스림에 있어서는 대부분 후세에 전할 만한 향기로운 명성을 얻지 못하였으니,注+
이는 忠臣과 어진 補佐가 없어서가 아니고, 군주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여 〈충신과 어진 보좌를〉 등용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운 것을 꺼리고 쉬운 것으로 달려가며, 자기 의견과 같은 것을 좋아하고 자기 의견과 다른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나라를 잘 다스리는 방도와 상반되는 것입니다.
(옛 책)에 ‘을 따르는 것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처럼 어렵고, 을 따르는 것은 땅이 무너지는 것처럼 쉽다.’注+〈“傳曰……從惡如崩”은〉 하였으니, 선을 행하기 어려움을 말한 것입니다.
人君基業을 이어받고 권세를 점거하여 남에게 빌릴 것이 없는데, 충신은 실행하기 어려운 방책을 가지고 군주의 귀에 거슬리는 말을 토해내니, 군신간에 뜻이 부합하지 않는 것이 또한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明君은 이를 깨달아서 賢者를 구하기를 굶주릴 때에 밥을 구하고 목마를 때에 물을 구하듯이 하며, 諫言을 받아들이고 싫어하지 않아서 감정을 억제하고 욕망을 덜어 로써 은혜를 끊는 것입니다.” 孫權은 이 글을 살펴보고는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孫權濡須(보루)를 만들었다.
呂蒙曹操가 동쪽으로 군대를 진출하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는 孫權을 설득하여 濡須水口를 끼고서 를 세우게 하니,注+李賢이 말하기를 “濡須는 물 이름이니, 지금의 和州 歷陽縣 서남쪽에 있다. 孫權水口를 끼고 세운 보루는 모양이 반달과 같다.” 하였다.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리는 강안으로 올라가 적을 공격하고 발을 씻고서 배로 들어오니, 보루를 만들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였다.
이에 여몽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대는 승리할 때가 있고 승리하지 못할 때가 있으며 전투는 百戰百勝하는 법이 없습니다. 만일 적을 갑자기 만났을 적에 적이 步兵騎兵으로 우리를 압박하면 강물에 들어갈 겨를도 없는데, 어찌 배에 들어갈 수가 있겠습니까.” 손권은 마침내 그의 말을 따랐다.注+약속하지 않고 만나는 것을 “邂逅”라 한다. 은 압박함이다.
】 겨울 10월에 曹操孫權을 공격하여 濡須에 이르렀는데, 侍中 光祿大夫 參軍事 荀彧이 자살하였다.
董昭曹操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예로부터 신하가 세상을 바로잡음에 의 금일과 같은 공로가 있지 않았고, 금일과 같은 공로가 있으면서 오랫동안 신하의 지위에 처한 자는 있지 않습니다.
지금 明公이 있음을 부끄러워하고 명예와 절개를 보존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로 하여금 大事(황제의 지위에 오르는 일)를 가지고 자신을 의심하게 하니, 진실로 거듭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注+(거듭)은 直用이다.
동소는 이에 장수들과 함께 의논하여 丞相(조조)을 마땅히 國公으로 작위를 올리고, 을 구비하여 특별한 공로를 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荀彧이 말하기를 “曹公이 본래 義兵을 일으켜서 조정을 바로잡고 나라를 편안히 하여 忠貞의 정성을 지키고 겸양하는 실제를 지켰다. 군자는 사람을 사랑하기를 으로써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해서는 안 된다.”注+禮記≫ 〈檀弓 〉에 “曾子가 말씀하기를 ‘군자가 사람을 사랑함은 으로써 하고, 소인이 사람을 사랑함은 姑息으로써 한다.’ 했다.” 하였다. 하였다. 조조가 이 때문에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曹操孫權을 공격하게 되자 표문을 올려 荀彧譙縣에 보내서 군대를 위로하게 할 것을 청하고, 인하여 자기 마음대로 순욱을 남겨두어 侍中 光祿大夫로 삼았다.注+은 전횡함을 말한 것이다. 이때 조조가 한창 전쟁을 지휘하였기 때문에 丞相府參軍事를 둔 것이다.
조조가 濡須로 향할 적에 순욱이 병으로 壽春에 남아 있다가 독약을 마시고 하였다.注+後漢書≫ 〈荀彧傳〉에 “曹操荀彧에게 음식을 선물하였는데, 풀어보니 바로 빈 그릇이었다. 이에 순욱은 독약을 마시고 했다.” 하였다. 순욱은 行義가 정돈되고 智謀가 있었으며 어진 이를 추천하고 선비를 등용하기를 좋아하였다. 그러므로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의 죽음을 애석히 여겼다.
】 12월에 孛星五諸侯의 별자리에 나타났다.注+晉書≫ 〈天文志〉에 “五諸侯의 다섯 별은 東井의 북쪽에 있고, 또 太微星 남쪽 울타리와 左執法의 동북쪽 한 별을 謁者星이라 하며, 알자성의 동북쪽 세 별을 三公星이라 하고, 삼공성의 북쪽 세 별을 九卿星이라 하며, 구경성의 서쪽 다섯 별을 內五諸侯라 하니, 內諸侯는 안으로 천자를 모시고 封國으로 가지 않는다.” 하였다.
劉備涪城(부성)을 점거하였다.
劉備葭萌에 있을 적에 龐統이 유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은밀히 정예병을 선발하여 밤낮으로 행군속도를 倍加해서 지름길로 成都를 습격하여 일거에 즉시 평정하는 것이 이것이 上策입니다.
楊懷高沛劉璋名將으로, 각각 강력한 군대를 보유하고 關頭(關門)를 점거하여 지키고 있는데,注+關頭白水關關頭이니, 白水關廣漢郡 白水縣에 있다. 듣자 하니 이들은 자주 유장에게 간하여 장군(劉備)을 荊州로 돌려보내라고 한다 합니다.注+(자주)은 음이 이다.
장군이 사람을 보내어 이들과 서로 소식을 통해서 형주에 위급한 일이 있어 돌아가 구원하고자 한다고 말하면,注+은 사자를 보내는 것이다. 두 사람이 기뻐해서 반드시 찾아와 뵐 것입니다.
이때를 틈타 이들을 사로잡고 나아가 그들의 병력을 탈취하여 곧바로 성도로 향하는 것이 이것이 中策입니다. 그리고 白帝城으로 물러나서 형주와 연합하여 서서히 다시 도모하는 것이 이것이 下策입니다.注+白帝는 바로 巴東郡 魚復縣이다. 公孫述成都를 점거하고 스스로 백제라고 칭하고는 어복현을 고쳐 白帝城이라 하였다.
만약 머뭇거리며 떠나가지 않으면 장차 크게 곤궁한 지경에 이를 것이니, 오래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유비는 그의 中策을 옳게 여겼다.
曹操孫權을 공격하자, 손권이 劉備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유비가 劉璋에게 편지를 보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孫氏와 나는 본래 입술과 이빨의 관계입니다.
그런데 關羽의 군대가 약하니, 이제 내가 가서 구원하지 않으면 조조가 반드시 荊州를 점령하여 점차 益州의 경계를 침범할 것이니, 그 근심이 張魯보다도 심합니다. 장로는 다만 스스로를 지키는 이니,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注+州界”는 益州의 경계를 이른다.
유비는 인하여 1만 명의 군대와 물자와 양식을 더 지원해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유장은 다만 4,000명의 병력을 지원할 것을 허락하고 나머지도 모두 절반만을 지급하였다. 유비는 이로 인하여 자신의 병사들을 격노시키기를 “내가 益州를 위하여 강한 적을 정벌하느라 병사들이 수고롭고 지쳐 있는데, 유장은 재물을 쌓아놓고서 을 주는 것을 아끼니, 어떻게 大夫들로 하여금 목숨을 걸고 싸우게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張松劉備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지금 大事가 거의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어찌하여 이곳을 버리고 떠나가십니까?” 하니, 劉璋은 이 말을 듣고 장송을 체포하여 참수하고,注+〈“責以無禮”는〉 주인이 손님을 대접하는 가 없음을 책망한 것이다. 關戍에 명하여 다시는 유비와 통하지 못하게 하였다.
유비는 크게 노하여 楊懷高沛를 불러서 그들의 무례함을 책망하여 참수하고, 군대를 무장하여 곧바로 關頭에 이르러 그들의 병력을 합병하고는 나아가 涪城을 점거하였다.
劉備가 楊懷와 高沛를 참하다劉備가 楊懷와 高沛를 참하다


역주
역주1 曹操還鄴……劍履上殿 : “≪資治通鑑綱目≫에 들어와 〈특별한 준례를〉 모두 3번 썼으니, 梁冀에게 ‘殊禮’라고 간략히 칭한 것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 蕭何에게는 ‘丞相 소하에게 검과 신을 그대로 착용하고 殿上에 오르고, 입조할 때에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지 않을 것을 하사하였다.’라고 썼고, 董卓에게는 ‘동탁이 스스로 승상이 되어서 贊拜할 때에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입조할 때에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검과 신을 착용하고 그대로 전상에 올랐다.’라고 썼고, 曹操에게는 곧바로 ‘조조가 鄴城으로 돌아왔는데, 찬배할 때에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입조할 때에 종종걸음으로 달려가지 않고, 검과 신을 그대로 착용하고 전상에 올랐다.’라고 썼으니, 조조의 흉악하고 도리에 어긋나 君上을 무시하는 기상을 알 수 있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이것을 자세히 갖추어 쓴 것이 4번이니, 太尉 劉裕는 조조와 같다. 간략한 말로 ‘殊禮’라고 쓴 것은 4번인데, 梁冀와 會稽王 司馬昱은 ‘加’라고 썼고, 蕭道成과 唐主 李淵은 ‘自’라고 썼다.[入綱目 凡三書矣 梁冀略稱殊禮 不與 於蕭何 書賜丞相何劍履上殿 入朝不趨 於董卓 書卓自爲丞相 贊拜不名 入朝不趨 劍履上殿 於操則直書曹操還鄴 贊拜不名 入朝不趨 劍履上殿 其兇悖無上氣象 可知矣 終綱目 備書者四 太尉裕與曹操同 略辭稱殊禮者四 梁冀會稽王昱書加 蕭道成唐主淵書自]” ≪書法≫
역주2 鎭守 : 저본에는 ‘鎭’ 아래에 訓義가 달려 있어 ‘守’를 아래 句로 연결한 것으로 보이나, 문리에 맞지 않으므로 ‘鎭守’를 한 구로 만들고 훈의 역시 진수 아래로 이동하였음을 밝혀둔다. 鎭守는 進駐하여 守備하는 것이다.
역주3 七年 : ≪資治通鑑綱目≫에서 馬超가 배반한 것은 建安 16년(211)이다. 建安 7년은 조조의 장수 鍾繇가 馬騰과 연합하여 袁尙이 河東으로 파견한 郭援과 高幹을 격파한 해이다. 여기의 ‘七’字는 오자인 듯하다.
역주4 書經……하였다 : ≪書經≫ 〈周書 君陳〉에 “지극한 다스림은 아름다운 향기가 널리 퍼지는 것과 같아서 신명을 감동시키게 마련이다. 그러니 기장과 같은 제물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요, 밝은 덕이 바로 향기로운 것이다.[至治馨香 感于神明 黍稷非馨 明德惟馨]”라고 보인다.
역주5 國語……보인다 : 저본에는 ‘晉’으로 되어 있으나, ≪國語≫에 의거하여 ‘周’로 바로잡았다.
역주6 權 作濡須塢 : “塢를 쓴 적이 있지 않았는데 여기에서 쓴 것은 어째서인가. 중요한 關防이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塢를 만들었다.’고 쓴 것은 이 1번뿐이다.[塢未有書者 此其書 何 關要也 終綱目 書作塢一而已]” ≪書法≫
역주7 曹操擊孫權……自殺 : “예전에 ‘曹操가 荀彧을 侍中 尙書令으로 삼았다.’고 쓴 것은 순욱을 비난한 것인데, 여기에 ‘侍中 光祿大夫 參軍事 순욱이 자살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순욱을 안타깝게 여긴 것이다. 어찌하여 그를 안타깝게 여겼는가. 자신이 漢나라의 신하가 되어서 조조를 위해 계책을 도모하여 그 功業을 도왔는데 공업이 이뤄지고 나서야 비로소 올바른 의논을 하여 스스로 속였으니, 그 무익함을 알 수 있다. 이때에 자살하니, 군자가 이르기를 ‘이는 순욱이 자초했을 뿐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자살이라고 쓰면서 그 이유를 쓰지 않은 것이다.(甄豐과 劉秀(劉歆)의 자살과 뜻이 같다.)[前書曹操以荀彧爲侍中尙書令 譏彧也 此其書侍中光祿大夫參軍事荀彧自殺 何 閔彧也 曷爲閔之 身爲漢臣 爲操謀畫 以贊其業 業已成矣 甫以正論自詭 其無益可知也 於是自殺 君子以爲自取而已矣 故書自殺而不書其故(與甄豐劉秀自殺義同)]” ≪書法≫
“荀彧의 죽음은 또한 그를 인정한 것인가. 아니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관작을 썼는가. 이때 국가의 명령이 曹操의 손에서 나왔으니, 이른바 ‘侍中 光祿大夫 參軍事’라는 것은 조조가 加했을 뿐이다. ≪資治通鑑綱目≫에 이 관직을 쓴 것은 바로 순욱이 조조의 관작과 지위를 받아서 올바르지 않은 사람을 섬긴 잘못을 드러낸 것이니, 어찌 그를 인정한 것이겠는가. 조조는 간사하고 속임수가 많으며 남을 시기하고 이기려 하여, 재주가 있고 지혜로운 선비들 중에 그에게 용납된 자가 별로 없다. 그런데 순욱이 몸을 맡겨 조조를 섬겨서 승리하게 만들고 기이한 계책을 내어 계책에 잘못한 것이 없었으니, 이는 진실로 조조가 내심 시기한 것이다. 더구나 조조가 이미 찬탈하고 시해한 뒤에야 비로소 순욱이 올바른 의논으로 저지하고자 한 것은 어째서인가. 또 순욱이 조조와 周旋한 지가 20년이 넘어서 평상시에 心腹으로 서로 대하였으니, 어찌 조조의 사람됨을 몰라서 忠正을 지키고 겸양을 지킬 것을 조조에게 바랐단 말인가. 순욱이 자살한 것은 애당초 취할 만한 것이 없다. 漢나라를 보존하지 못하였고 또 殺身成仁을 하지 못하였으니, 그 잘못을 미루어 근원해보면, 다만 조조를 따르던 초기에 선택을 정밀하게 하지 못함에 있었고, 그 晩年과 末路에 이르러는 또한 어쩔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만일 순욱이 과연 漢나라를 위해서 죽었다면 ≪자치통감강목≫에서 마땅히 ‘조조에게 九錫을 가할 것을 의논하자 순욱이 자살했다.’라고 썼을 터인데, 이제 이것을 삭제하여 쓰지 않았고 또 司馬光이 순욱을 칭찬한 말까지 아울러 삭제하고 기록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순욱에 대해 불만스럽게 여긴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 뒤에야 吳나라에서 벼슬하지 않고 魏나라에서 벼슬하지 않은 자(諸葛亮)가 행한 그 出處의 대의에 있어 더욱 미칠 수 없으며, 조조에게 지조를 잃은 자는 죽으나 사나 모두 치욕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후세에 재능을 가지고 스스로 나타내려 하는 자는 아마도 또한 선택하는 바를 잘 살펴야 할 것이다.[荀彧之死 亦予之乎 曰 非也 然則何以書爵 曰 是時國命出於操手 所謂侍中光祿大夫參軍事者 操加之耳 綱目書之 正以著彧受操爵位 事非其人之失 豈予之哉 夫曹操姦詐忌克 凡才智之士 鮮有爲其所容 彧旣委身事之 制勝設奇 算無遺策 此固操之所忌者 況其簒弑已成 彧乃欲以正論尼之 何哉 且彧與操周旋 踰二十年 平時心腹相與 豈不知操之爲人 而欲以秉忠正守退遜責之乎 彧之殺身 初無可取 旣不足以存漢 又不足以成仁 推原其失 特在於從操之初 擇之不精 至其晩節末路 則亦末如之何矣 使彧果能爲漢而死 則綱目當以曹操議加九錫 荀彧自殺爲文 今旣削而不書 又併司馬公光褒稱之語 棄之不錄 則其不滿於彧 昭然可知 然後知不仕吳 不仕魏者 其於出處大節 尤不可及 而失身於操者 生死皆辱也 後之以才能自見者 其亦審所擇哉]” ≪發明≫
여기서 ‘사마광이 순욱을 칭찬한 말’이란 ≪資治通鑑≫에 사마광이 순욱의 죽음을 논평하면서, “建安 초기에는 온 천하가 전복되어 한 자의 영토와 한 명의 백성도 모두 漢나라의 소유가 아니었는데, 순욱이 魏 武帝(曹操)를 보좌하여 덕이 있는 賢者를 천거하고 유능한 자를 등용하며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병기를 갈고 닦아서 기회를 결정하고 계책을 내어 정벌하여 사방을 평정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약함을 강함으로 만들고 어지러움을 변화시켜 다스림으로 만들어 천하를 열로 나눔에 그 여덟을 소유하였으니, 그 功이 어찌 管仲의 뒤에 있겠는가.”라고 하여 순욱을 春秋時代에 齊 桓公을 도와 천하를 제패한 管仲에 견주었다.(≪資治通鑑≫ 권66 〈漢紀〉 58)
역주8 慙德 : 덕이 옛사람에게 미치지 못하여 부끄러워하는 것을 이른다. ≪書經≫ 〈商書 仲虺之誥〉에 “成湯이 夏나라의 桀王을 南巢로 유폐시키고 慙德을 느끼면서 말하기를 ‘나는 후세에 나를 구실로 삼아서 〈신하가 제멋대로 임금을 정벌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成湯放桀于南巢 惟有慙德 曰 予恐來世以台爲口實]”라고 보인다.
역주9 九錫의 물건 : 九錫은 고대에 天子가 제후와 대신에게 하사하는 아홉 가지의 물건으로, 첫째는 車馬, 둘째는 衣服, 셋째는 樂器, 넷째는 朱戶, 다섯째는 納陛(궁전의 기단부를 파서 처마 안으로 만든 계단), 여섯째는 虎賁(호위병), 일곱째는 鈇鉞, 여덟째는 弓, 아홉째는 秬鬯(검은 기장으로 빚은 鬱鬯酒)이다.
역주10 節을 잡고[持節] : 漢나라 말엽과 魏晉南北朝 시기에 지방의 軍政을 관장한 관리에게 종종 使持節, 持節, 假節이라는 칭호를 붙이기도 하였는바, 임시로 부절을 빌려주어 황제를 대리하여 군대를 통솔하고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使持節은 二千石 이하의 관리를 주살할 수 있고, 持節은 관직이 없는 사람을 죽일 수 있고, 假節은 軍令을 어긴 자를 죽일 수 있었다.(大庭脩, ≪秦漢法制史の硏究≫, 創文社, 1982)
역주11 丞相의 參軍事 : 參軍事는 後漢 때 설치된 임시직으로 예전에 孫堅도 張溫의 參軍事의 직위에 있었다. ‘參丞相軍事’라는 명칭이 보이는데 이는 曹操가 丞相이 되어 軍政을 다스리면서 軍事에 참여하는 參謀에게 부여하였는데, 南朝 시대에 정식 관직이 되었다.
역주12 劉備據涪城 : “袁術에 대해 ‘南陽을 점거했다.’고 쓰고, ‘曹操의 군대가 兗州를 점거했다.’고 쓴 것은 모두 그들을 죄책한 것이다. 그런데 劉備에 대해서도 ‘涪城을 점거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傳(≪孟子≫ 〈公孫丑 上〉)에 이르기를 ‘한 가지라도 의롭지 못한 일을 행하고서 천하를 얻는 것을 하지 않는다.’ 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이때 유비를 위하여 이 사실을 숨겨주지 않았다.[袁術書據南陽 曹操兵據兗州 皆罪之也 備也則其書據 何 傳曰 行一不義而得天下 不爲也 綱目於是 不得爲備隱矣]” ≪書法≫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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