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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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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丑年(A.D.29)
기축년己丑年(A.D.29)
五年이라 春正月 帝還宮하다
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 건무建武 5년이다. 봄 정월에 황제가 환궁하였다.
◑遣來歙하여 送馬援歸隴右하다
내흡來歙을 보내 농우隴右로 돌아가는 마원馬援을 전송하였다.
隗囂與援共臥起하여 問以東方事한대 曰 前到朝廷 引見數十하고 每接燕語 自夕至旦하니
외효隗囂마원馬援과 함께 기거起居하면서 동방東方(낙양)의 일을 묻자, 마원이 대답하기를 “지난번 나라 조정에 갔을 적에 이 수십 차례 인견引見하였고 매양 접견하여 편안히 말씀할 적에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어졌는데,
才明勇略 非人敵也 且開心見誠하여 無所隱伏하니 闊達多大節 略與高帝同注+略, 屬下句讀, 一云屬上句.이요
재주와 총명, 용맹과 지략은 평범한 사람이 대적할 바가 아니었습니다. 또 마음을 열어 진실을 보여서 숨기는 바가 없었으니, 활달하여 큰 절개를 중시하는 것은 대략 고제高帝와 같고注+은 아래 로 속하여 읽으니, 일설에는 위 구에 속한다고 한다.,
經學博覽하고 政事文辯 前世無比注+文辯, 謂文華辯別也.러이다 囂曰 卿謂何如高帝
경학經學박람博覽, 정사政事문변文辯은 전대에 비할 자가 없었습니다.”注+문변文辯은 문장과 변별을 이른다. 하였다. 외효가 묻기를 “고제高帝와 비교하여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하자,
援曰 不如也 高帝 無可無不可어니와 今上 好吏事하고 動如節度하며 又不喜飮酒러이다
마원이 말하기를 “고제高帝만은 못합니다. 고제高帝함도 없고 불가不可함도 없지만, 금상今上정사政事를 처리하기 좋아하고 모든 일을 절도대로 하며 또 술 마시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니,
囂意不懌하여 曰 如卿言이면 反復勝耶注+復, 扶又切.아하다
외효가 속으로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의 말과 같다면 도리어 고제高帝보다 더 낫단 말인가.”注+(다시, 더)는 부우扶又이다. 하였다.
二月 蘇茂救垂惠어늘 馬武, 王霸擊破之하니 劉紆犇佼彊하다
】 2월에 소무蘇茂수혜垂惠를 구원하자, 마무馬武왕패王霸가 소무를 격파하니, 유우劉紆교강佼彊(교강)에게 달아났다.
蘇茂將五校兵하여 救周建於垂惠하니 馬武爲茂, 建所敗하고 犇過王霸營하여 大呼求救
소무蘇茂오교五校의 군대를 거느리고 수혜垂惠에서 주건周建을 구원하니, 마무馬武가 소무와 주건에게 패하고 달아나다가 왕패王霸의 진영을 지나면서 큰 소리로 구원을 청하였다.
霸曰 賊兵盛하여 出必兩敗하리니 努力而已라하고 乃閉營堅壁하다
왕패가 말하기를 “적의 군대가 강성하여 우리가 출동하면 반드시 우리 양쪽이 모두 패할 것이니, 각자 노력할 뿐이다.” 하고는 진영의 문을 닫고 성벽을 견고히 지켰다.
軍吏皆爭之注+爭, 去聲.한대 霸曰 茂兵精銳하고 其衆又多하여 吾吏士心恐하고 而捕虜與吾相恃하니
군리軍吏들이 모두 이에 대해 간쟁하자注+(간쟁하다)은 거성去聲이다., 왕패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소무의 군대가 정예롭고 또 그 무리가 많아 우리 관리와 군사들이 마음에 두려워하고 있으며, 포로장군捕虜將軍(마무馬武)은 우리를 믿고 있으니,
兩軍不一이면 此敗道也注+時, 馬武爲捕虜將軍. 今閉營固守하여 示不相援이면 賊必乘勝輕進이요
두 군대가 통일되지 못하면 이것은 패하는 방도이다.注+이때에 마무馬武포로장군捕虜將軍이었다. 이제 우리가 진영의 문을 닫고 굳게 지켜서 구원해주지 않을 것임을 보이면 적은 반드시 승세를 타고 가볍게 전진할 것이요,
捕虜無救 其戰自倍注+人各致死, 則一人倍二人之力. 如此 茂衆疲勞하리니 吾承其敝하면 乃可克也라하다
포로장군捕虜將軍은 구원해주는 이가 없으면 전투할 때에 절로 사력을 배가倍加할 것이다.注+〈“기전자배其戰自倍”는〉 사람이 각각 사력을 다하면 한 사람이 두 사람의 전투력을 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되면 소무의 무리가 피로할 것이니, 그때 우리가 그들이 피폐한 틈을 타면 비로소 이길 수 있다.”
茂, 建 果悉出攻武러니 合戰良久注+悉出攻, 謂悉兵而出攻也. 霸軍中壯士數十人 斷髮請戰注+斷髮, 以示敢死戰也.이어늘
소무와 주건이 과연 병력을 모두 출동하여 마무를 공격하였는데, 교전한 지 한참 만에注+실출공悉出攻”은 군대를 총동원하여 나가 공격함을 이른다. 왕패의 무리 중에 장사壯士 수십 명이 머리털을 자르고 나가 싸울 것을 청하였다.注+머리털을 자른 것은 용감하게 결사적으로 싸우려는 뜻을 보인 것이다.
霸乃開營後하여 出精騎하여 襲其背注+
王霸(≪雲臺三十二將圖≫)王霸(≪雲臺三十二將圖≫)
馬武(≪雲臺三十二將圖≫)馬武(≪雲臺三十二將圖≫)
營後, 營壘後門.
하니 茂, 建 前後受敵하고 敗走어늘 霸, 武各歸營하다
왕패가 마침내 진영의 후문을 열어 정예기병을 출동시켜서 적의 배후를 습격하니注+영후營後”는 영루營壘의 뒷문이다., 소무와 주건은 앞뒤로 왕패와 마무의 공격을 받고는 패주하였다. 이에 왕패와 마무가 각각 진영으로 돌아왔다.
茂, 建 復聚兵挑戰호되 霸堅臥不出하고 方饗士作倡樂注+倡樂, 音昌岳.이러니
소무蘇茂주건周建이 다시 병력을 모아 도전하였으나, 왕패王霸는 꼼짝 않고 누워 나가지 않고 군사들에게 연향을 베풀며 광대들의 연기를 시작하게 하였다.注+창악倡樂”은 음이 창악昌岳이다.
茂雨射營中하여 中霸前酒樽호되 霸安坐不動注+射, 而亦切. 雨射, 謂射矢如雨也. 下中, 去聲.이라 軍吏皆曰 茂前日已破하니 今易擊也리이다
소무가 왕패王霸의 진영으로 화살을 비 오듯이 쏘아서 왕패의 앞에 있는 술동이를 맞혔으나 왕패는 편안히 앉아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注+우석雨射”은 화살을 비 오듯이 많이 쏨을 이른다. 아래의 (맞추다)은 거성去聲이다. 군리軍吏들이 모두 말하기를 “소무가 전일에 이미 격파되었으니, 이제 공격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였으나,
霸曰 不然하다 蘇茂客兵遠來하여 糧食不足이라 數挑戰하여 以徼一時之勝注+徼, 要求也.하니
왕패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소무의 객병客兵(외지에서 와서 공격하는 군대)은 멀리 와서 식량이 부족하므로 자주 도전하여 한때의 승리를 바란다.注+는 요구함이다.
今閉營休士 所謂不戰而屈人兵者也注+孫子語.니라 茂, 建 旣不得戰하여 乃引還營이러니
이제 내가 진영의 문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는 것은 이른바 ‘싸우지 않고서 적의 군대를 굴복시킨다.’라는 것이다.”注+〈“부전이굴인병不戰而屈人兵”은〉 ≪손자孫子≫의 말이다. 하였다. 소무와 주건은 싸울 수 없게 되자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갔다.
其夜 周建兄子誦하여 閉城拒之하니 於道死하고 犇下邳하여 與董憲合하고 劉紆 犇佼彊하다
이날 밤 주건의 형의 아들 주송周誦이 반란을 일으켜서 성문을 닫고 주건 등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니, 주건은 도중에 죽었고, 소무는 하비下邳(하비)로 달아나 동헌董憲과 연합하고, 유우劉紆교강佼彊으로 달아났다.
帝如魏郡하다
】 황제가 위군魏郡에 갔다.
팽총彭寵의 노복이 팽총을 참수하고 와서 항복하자, 팽총의 삼족을 멸하고 그 노복을 봉하여 불의후不義侯로 삼았다.
彭寵妻 數爲惡夢하고 又多見怪變注+東觀記曰 “夢, 袒冠幘踰城, 髡徒推之. 又寵堂上, 聞蝦蟇聲, 在火爐下, 鑿地求之, 不得也.”이라 卜筮, 望氣者皆言兵當從中起라하니
팽총彭寵의 아내가 자주 악몽을 꾸고 또 괴이한 변고가 많이 나타났다.注+동관한기東觀漢記≫에 말하기를 “팽총의 아내가 꿈을 꾸었는데, 팽총이 웃통을 벗고 관책冠幘을 쓰고 을 넘어오자, 복역수服役囚[곤도髡徒]가 밀쳐내었다. 또 팽총이 위에서 화로 아래의 하마蝦蟇(두꺼비)의 소리를 듣고는 땅을 파고 찾았으나 찾지 못했다.” 하였다. 복서卜筮하는 자와 구름을 바라보고 점을 치는 자가 모두 말하기를 “병란이 마땅히 중앙에서 일어날 것이다.” 하니,
寵以子后蘭卿 質漢歸라하여 不信之하여 使將兵居外하여 無親於中注+子后蘭卿, 寵從弟. 質, 音致. 質漢歸, 謂爲質子於漢而回歸.이러라
팽총은 자후란경子后蘭卿이 일찍이 나라에 인질로 갔다가 돌아왔다 하여 그를 믿지 못하고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밖에서 지내게 하여 중앙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였다.注+자후란경子后蘭卿팽총彭寵종제從弟이다. (인질)은 음이 이니, “치한귀質漢歸”는 나라에 인질이 되었다가 돌아옴을 이른다.
하여 在便室이러니 蒼頭子密等三人 因寵臥寐하여 共縛著牀注+便室, 便坐之室, 非正室也. 漢名奴爲蒼頭. 著, 直略切.하고
팽총彭寵이 재계하느라 편실便室에 있었는데, 창두蒼頭(노복)인 자밀子密 등 세 명이 팽총이 누워 잠자는 틈을 타 함께 팽총을 결박해서 침상에 붙잡아 매었다.注+편실便室은 편히 앉아 쉬는 별실이니 정전正殿[정실正室]이 아니다. 나라는 노복을 이름하여 창두蒼頭라 하였다. (놓다)은 직략直略이다.
告外吏云 大王齋禁하시니 皆使吏休注+謂使其外吏, 各歸休沐也.라하고 僞稱寵命하여 收縛奴婢하다
그러고는 밖에 있는 관리에게 고하기를 “대왕大王이 재계하여 외인을 금하시니, 모든 관리를 휴가 보내라.”注+〈“개사리휴皆使吏休”는〉 밖에 있는 관리들로 하여금 각각 돌아가 휴가를 보내게 한 것이다. 하고는 팽총의 명을 사칭하여 노복들을 잡아 포박하였다.
又以寵命呼其妻러니 妻入 驚曰 奴反이라하니 奴乃捽其頭하고 擊其頰이라
또 팽총의 명으로 그 아내를 불렀는데, 아내가 들어와서 놀라며 말하기를 “노복이 배반했다.” 하니, 노복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고 뺨을 때렸다.
急呼曰 趣爲諸將軍辦裝注+趣, 讀曰促. 爲, 去聲. 呼奴爲將軍者, 欲其赦己也. 辦裝, 謂治行李也.하라하니 於是 兩奴將妻하여 入取寶物하고 留一奴守寵하다
팽총이 급히 소리치기를 “여러 장군을 위하여 빨리 행장을 챙기라.”注+(빨리)은 으로 읽는다. (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노복을 장군將軍이라고 부른 것은 그들이 자기를 놓아주기를 바라서 높인 것이다. “판장辦裝”은 짐을 꾸림을 이른다. 하니, 이에 두 노복은 아내를 데리고 들어가 보물寶物을 취하고 한 명의 노복을 남겨두어 팽총을 지키게 하였다.
收金玉衣物하여 至寵所裝之하여 被馬六匹注+被, 皮義切. 加馬以鞍勒曰被馬.하고 使妻縫兩縑囊이라가
노복이 , 의복과 물건을 거두어 팽총이 있는 곳으로 와서 짐을 꾸려 여섯 의 말에 멍에하여 싣고서注+피의皮義이니, 말에 안장과 굴레를 가하는 것을 “피마被馬”라 한다. 팽총의 아내로 하여금 비단주머니 두 개를 만들게 하였다.
昏夜後 解寵手하여 令作記하여 告城門將軍開門하다
어두운 밤이 되자 팽총의 손을 풀어서 그로 하여금 성문장군城門將軍에게 성문을 열라고 통고하는 글을 쓰게 하였다.
書成 斬寵及妻頭하여 置囊中하고 便持記馳出城하여 因以詣闕注+闕, 天子下也.하다
글이 이루어지자, 팽총과 팽총의 아내의 머리를 베어 주머니 속에 넣고 곧바로 팽총이 쓴 글을 가지고 달려 을 나가서 곧장 대궐로 나왔다.注+천자天子의 대궐 아래이다.
明旦 閤門不開어늘 官屬 踰墻而入이라가 見寵尸하고 驚怖하다
다음 날 아침 합문閤門이 열리지 않으므로 관속官屬들이 담을 넘어 들어갔다가 팽총의 시신을 보고는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其尙書韓立等 共立寵子午爲王이러니 國師韓利斬午首하여 詣祭遵降하니 夷其宗族하고 帝封子密爲不義侯注+國師, 以寵所署置也, 蓋遵王莽之制.하다
상서 한립尙書 韓立 등이 함께 팽총의 아들 팽오彭午를 세워 으로 삼았는데, 국사 한리國師 韓利가 팽오의 머리를 베어가지고 채준祭遵(채준)에게 와서 항복하니, 그들의 종족宗族을 멸하였다. 이에 황제가 자밀을 봉하여 불의후不義侯로 삼았다.注+국사國師팽총彭寵이 설치한 부서이니, 아마도 왕망王莽의 제도를 따른 듯하다.
權德輿曰注+德輿, 唐憲宗時宰相, 嘗著論辨漢所以亡. 伯通之叛命 子密之戕君 同歸于亂하여 罪不相蔽注+伯通, 彭寵字. 戕, 在良切, 殺也.하니
권덕여權德輿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권덕여權德輿나라 헌종憲宗 때의 재상宰相이니, 일찍이 나라가 망한 이유를 논변하는 글을 지었다.백통伯通(팽총彭寵)이 황제의 명령을 배반한 것과 자밀子密이 주군을 해친 것은 똑같이 으로 귀결되어 죄가 서로 가릴 수가 없으니注+백통伯通팽총彭寵의 자이다. 재량在良이니 죽임이다.,
宜各致於法하여 昭示王度注+王度, 猶言王法也.어늘 乃爵於五等하고 又以不義爲名이라
마땅히 각각 법에 따라 처형해서 왕의 법도를 밝게 보여야 하는데注+왕도王度”는 왕의 법도라는 말과 같다., 도리어 을 내리고 또 불의不義로써 의 이름을 삼았다.
且擧以不義 莫可侯也 春秋書齊豹盜三叛人名之義 無乃異於是乎注+春秋, 昭二十年 “盜殺衛侯之兄縶.” 襄二十一年 “邾庶其以漆閭丘來奔.” 昭五年 “莒牟夷以牟婁及防玆來.” 三十一年 “黑肱以濫來奔.” 蓋春秋之例, 非命卿, 不書其名. 齊豹, 衛之卿也, 忿衛侯之兄而殺之, 欲求不畏彊禦之名, 而春秋抑之, 但書曰盜, 所謂求名而不得. 邾庶其․莒牟夷․邾黑肱三人, 皆非命卿, 以邑來奔, 求食而已, 不期名之著於春秋, 而春秋故書其名, 所謂欲蓋而名章也, 此皆懲不義也.
불의不義한 일을 행하였으면 로 삼아서는 안 되니, ≪춘추春秋≫에 제표齊豹라 하고 배반한 세 사람의 이름을 쓴 의의는 이와 다르지 않겠는가.”注+춘추春秋소공昭公 20년에 “자객이 위후衛侯의 형 (집)을 죽였다.” 하였고, 양공襄公 21년에 “주서기邾庶其칠려구漆閭丘의 땅을 가지고 나라로 도망 왔다.” 하였고, 소공昭公 5년에 “거모이莒牟夷모루牟婁방자防玆 땅을 가지고 왔다.” 하였고, 31년에 “주흑굉邾黑肱남읍濫邑을 가지고 나라로 도망 왔다.” 하였다. 춘추필법春秋筆法의 준례에 명경命卿이 아니면 그 이름을 써주지 않는다. 제표齊豹나라의 이니, 위후衛侯의 형의 나쁜 행실에 분노하여 그를 죽인 것은 자기가 강포한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명성을 얻고자 해서였는데, ≪춘추春秋≫에서는 그를 억제하여 다만 ‘’라고 썼으니, 이른바 ‘명성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했다.’라는 것이요, 또 주서기와 거모이, 주흑굉 세 사람은 모두 명경命卿이 아니니, 을 가지고 나라로 도망 온 것은 먹을 것을 얻으려고 한 것일 뿐, 자신의 이름이 ≪춘추春秋≫에 기록되기를 바라지 않았는데, ≪춘추春秋≫에서는 일부러 그 이름을 썼으니, 이른바 ‘이름을 감추고자 해도 이름이 드러났다.’라는 것이니, 이는 모두 불의不義를 징계한 것이다.
사자使者를 보내 상곡태수 경황上谷太守 耿況을 맞이하여 경사京師로 돌아오게 해서 모평후牟平侯로 봉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모평현牟平縣동래군東萊郡에 속했다.” 하였다.
오한吳漢경감耿弇평원平原에서 부평富平획색獲索을 공격하여 대파하니, 경감은 마침내 나아가 장보張步를 토벌하였다.注+부평富平적수賊帥서소徐少이고, 획색獲索의 적수는 고사랑古師郞이다.
◑遣將軍龎萌, 蓋延하여 擊董憲이러니이어늘 帝自將討之하다
장군 방맹將軍 龎萌갑연蓋延을 보내 동헌董憲을 공격하였는데, 방맹이 배반하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였다.
龎萌 爲人遜順하니 帝信愛之하여 常稱曰 可以託六尺之孤하고 寄百里之命者 龎萌 是也라하다
방맹龎萌의 인품이 공손하고 양순하니, 황제가 그를 믿고 사랑하여 항상 칭찬하기를 “는 방맹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였다.
使與蓋延으로 共擊董憲이러니 詔書獨下延而不及萌하니
황제는 방맹으로 하여금 갑연蓋延과 함께 동헌董憲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이때에 조서詔書가 갑연에게만 내려지고 방맹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萌以爲延譖己라하여 自疑하고 遂反襲延軍하여 破之하고 與董憲連和하여 自號東平王하고 屯桃鄕之北注+東平國任城縣有桃鄕.하다
방맹은 갑연이 자기를 참소한 것이라 생각하여 의심한 나머지 마침내 배반하여 갑연의 군대를 기습해서 격파하고는, 동헌과 연합하여 스스로 동평왕東平王이라 칭하고 도향桃鄕의 북쪽에 주둔하였다.注+동평국 임성현東平國 任城縣도향桃鄕이 있다.
帝聞之하고 大怒하여 自將討萌할새 與諸將書曰 吾常以龎萌爲社稷之臣하니 將軍 得無笑其言乎
】 황제가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방맹龎萌을 토벌할 적에, 장수들에게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내 항상 방맹을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칭찬하였으니, 장군들이 나의 말을 비웃지 않겠는가.
老賊 當族이니 其各厲兵馬하여 會睢陽注+厲, 磨厲也.하라 龎萌 攻破彭城하여 將殺楚郡太守孫萌이러니
노적老賊을 마땅히 멸족할 것이니, 장수들은 각각 병기와 말을 정돈하여 수양성睢陽城에 모이도록 하라.”注+는 갈고 힘씀이다. 하였다. 방맹이 팽성彭城을 격파하고서 초군태수 손맹楚郡太守 孫萌을 죽이려고 하였는데,
郡吏劉平 伏太守身上하여 號泣請代其死하여 身被七創하니 龎萌 義而捨之
의 관리인 유평劉平태수太守의 몸 위에 엎드려서 울부짖으며 그를 대신하여 죽을 것을 청하여 몸에 일곱 군데의 큰 상처를 입으니, 방맹이 의롭게 여겨 놓아주었다.
太守已絶復蘇하여 渴求飮이어늘 傾創血以飮之注+更息曰蘇, 言氣絶而更息也.하다
태수가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소생하여 목이 말라 마실 물을 요구하자, 유평이 상처에서 나오는 피를 기울여 마시게 하였다.注+소생하여 다시 숨을 쉬는 것을 라 하니,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숨을 쉼을 이른다.
岑彭 攻拔夷陵하니 田戎 奔蜀이어늘 留屯津鄕하다
잠팽岑彭이릉夷陵을 공격하여 함락하니, 전융田戎으로 달아났다. 이에 잠팽이 진향津鄕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岑彭 旣拔夷陵 謀伐蜀호되 以夾川穀少하고 水險難漕注+夾川, 猶言夾江也. 江, 大川也.라하여
잠팽岑彭이릉夷陵을 함락하자, 을 정벌할 것을 도모하였으나 협천夾川에 식량이 적고 물길이 험하여 조운漕運하기가 어렵다 해서注+협천夾川협강夾江이란 말과 같으니, 은 큰 냇물이다.,
留威虜將軍馮駿하여 軍江州注+江州, 縣名, 屬巴郡.하고 都尉田鴻 軍夷陵하고 領軍李玄 軍夷道注+地理志 “夷道縣, 屬南郡.”하고 自引兵還屯津鄕하니 當荊州要會注+郡國志 “南郡江陵縣, 有津鄕.”
위로장군 풍준威虜將軍 馮駿을 남겨두어 강주현江州縣에 주둔시키고注+강주江州의 이름이니 파군巴郡에 속하였다. 도위 전홍都尉 田鴻이릉夷陵에 주둔시키고 영군 이현領軍 李玄이도夷道에 주둔시키고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이도현夷道縣남군南郡에 속했다.” 하였다. 잠팽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 진향津鄕에 주둔하니, 이곳은 형주荊州의 중요한 요해처要害處에 해당하였다.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남군南郡강릉현江陵縣진향津鄕이 있다.” 하였다.
喻告諸蠻夷降者하여 奏封其君長하다
여러 만이蠻夷 중에 항복한 자들을 타일러서 황제에게 아뢰어 군장君長으로 봉하게 하였다.
夏四月 旱, 蝗하다
】 여름 4월에 가물고 황충의 재해가 있었다.
◑竇融 遣使奉書入見이어늘 詔以融爲涼州牧하다
두융竇融이 사신을 보내 글을 받들고 들어와 뵙게 하자, 황제가 명하여 두융을 양주목涼州牧으로 삼았다.
竇融等 聞帝威德하고 心欲東向이나 以河西隔遠하여 未能自通이라하여 乃從隗囂하여 受建武正朔하니
】 처음에 두융竇融 등은 황제의 위엄과 이 높다는 말을 듣고 내심 동쪽(낙양의 광무제光武帝)으로 향하고자 하였으나, 하서河西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직접 통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외효隗囂에게서 건무建武정삭正朔을 받으니,
囂皆假其將軍印綬하다 囂外順人望이나 內懷異心하여 使辯士張玄으로 說融等曰
외효가 두융에게 장군將軍인수印綬를 임시로 주었다. 외효는 겉으로는 인망人望을 따랐으나 속으로는 딴마음을 품고서 변사 장현辯士 張玄을 보내 두융 등을 설득하기를
更始事已成이라가 尋復亡滅하니 一姓不再興之效也 方今豪傑競逐하여 雌雄未決하니
경시更始가 일이 이미 성공하였다가 얼마 후 다시 멸망하였으니, 이는 한 (유씨劉氏)이 다시 흥왕하지 못할 징험이다. 지금 호걸들이 서로 각축하여 자웅을 결단하지 못하고 있으니,
當各據土宇하여 與隴, 蜀合從이면 高可爲六國이요 下不失尉佗注+隴, 謂隗囂. 蜀, 謂公孫述.리라
마땅히 각각 영토를 점거하여 (외효隗囂), (공손술公孫述)과 함께 합종合從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注+외효隗囂를 이르고, 공손술公孫述을 이른다. 하였다.
融等 召豪傑議之하니 其中識者皆曰 今皇帝姓名 見於圖書하고 前世谷子雲, 夏賀良等 皆言漢有再受命之符注+子雲, 字.
두융竇融 등이 호걸들을 불러 의논하니, 그중에 식자識者들이 모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지금 황제의 성명姓名도서圖書에 나와 있고, 注+자운子雲곡영谷永의 자이다.
劉子駿 改易名字하여 冀應其占注+子駿, 歆字, 因讖文云劉秀發兵捕不道, 故改名秀, 字穎叔.이러니 及莽末 西門君惠謀立子駿이라가 事覺被殺할새
그러므로 유자준劉子駿(유흠劉歆)이 이름과 자를 바꾸어서 그 에 응하기를 바랐었습니다.注+자준子駿유흠劉歆의 자이니, 도참의 글에 유수劉秀가 군대를 내어 무도한 자들을 토벌한다고 하였으므로, 이름을 로, 자를 영숙穎叔으로 바꾸었다. 그런데
出謂觀者曰 讖文不誤하니 劉秀眞汝主也라하니 此皆近事暴著者니이다
가 나와서 구경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도참의 글이 잘못되지 않았으니, 유수劉秀가 참으로 너희의 군주이다.’ 하였으니, 이는 모두 근래에 밝게 드러난 일입니다.
況今稱帝者數人 而洛陽 土地最廣하고 甲兵最彊하고 號令最明하니 觀符命而察人事컨대 它姓 殆未能當也니이다
더구나 지금 황제를 칭한 몇 명 중에 낙양洛陽(광무제光武帝)이 영토가 가장 넓고 병력이 가장 강하고 호령이 가장 분명하니, 부명符命을 보고 인사人事를 살펴보건대 타성他姓은 거의 필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遂決策東向하여 遣長史劉鈞等하여 奉書詣洛陽注+時, 衆推融爲大將軍, 故置長史.하다
두융은 마침내 동쪽으로 향할 계책을 정하고서 장사 유균長史 劉鈞 등을 보내 글을 받들어 낙양에 가게 하였다.注+이때에 여러 사람들이 두융竇融대장군大將軍으로 추대하였으므로 장사長史를 둔 것이다.
先是 帝亦發使遺融書하여 以招之러니 遇鈞於道하여 卽與俱還見하다
】 이보다 앞서 황제 또한 사신을 내어 두융竇融에게 편지를 보내서 불렀는데, 사신은 길에서 유균劉鈞을 만나자 즉시 함께 돌아와 황제를 뵈었다.
帝賜融璽書曰 今益州 有公孫子陽하고 天水 有隗將軍하여 方蜀, 漢相攻 權在將軍이라
황제가 두융에게 다음과 같이 친서를 하사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공손자양公孫子陽이 있고, 천수天水에는 외장군隗將軍이 있어, 이 서로 공격함에 저울추가 장군에게 달려 있다.
擧足左右 便有輕重注+言左投則蜀重, 右投則漢重也.하니 以此言之하면 欲相厚豈有量哉注+量, 音良.
발을 왼쪽으로 두느냐 오른쪽으로 두느냐에 곧 저울추의 경중이 있으니注+왼쪽으로 발을 두면 (공손술公孫述)이 무거워지고 오른쪽으로 발을 두면 (광무제光武帝)이 무거워짐을 말한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말하면 이 장군과 서로 친하고자 함이 어찌 한량이 있겠는가.注+(한량)은 음이 이다.
欲遂立桓, 文하여 輔微國인댄 當勉卒功業이요 欲三分鼎足하여 連衡合從인댄
약소한 주왕실周王室을 도와서 패업霸業을 이룬 제 환공齊 桓公진 문공晉 文公처럼 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힘써 공업功業(패업霸業)을 이루어야 할 것이요,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솥발처럼 서서 합종연횡하고자 한다면 또한 마땅히 제때에 정해야 할 것이니注+두 설을 제시하여 두융竇融의 거취를 관망한 것이다.,
亦宜以時定注+開兩說, 以觀融去就.이니 今之議者 必有任囂敎尉佗制七郡之計注+七郡, 南海․鬱林․蒼梧․合浦․交趾․九眞․日南也. 尉佗之時, 未置七郡, 帝據後來置郡言之.리라
지금 의논하는 자들 중에는 반드시 을 내는 자가 있을 것이다.注+7남해南海, 울림鬱林, 창오蒼梧, 합포合浦, 교지交趾, 구진九眞, 일남日南이다. 위타尉佗의 때에는 아직 7을 설치하지 않았으니, 이는 황제가 후래後來을 설치한 것을 근거하여 말한 것이다.
王者 有分土 無分民하니 自適己事而已注+王, 如字. 分, 扶問切. 有分土者, 謂立封(彊)[疆]也, 無分民者, 謂通往來, 不常厥居也. 自適己事, 言唯欲便適自己之事而已.라하고 因授融涼州牧하다
왕자王者는 땅을 나누어주기만 하고, 백성을 나누어주지는 않으니, 스스로 자기 일에 알맞게 할 뿐이다.”注+(임금)은 본음대로 읽는다. (나누어주다)은 부문扶問이다. “유분토有分土”는 국경을 세움을 이르고, “무분민無分民”은 왕래만 할 뿐 항상 그곳에 살지는 않음을 이른다. “자적기사自適己事”는 오직 자기 일에 편리하고 맞게 하고자 할 뿐임을 말한 것이다. 황제는 인하여 두융에게 양주목涼州牧을 제수하였는데,
璽書至河西하니 河西皆驚하여 以爲天子明見萬里之外라하니라
새서璽書하서河西에 이르니 하서河西 사람들은 모두 놀라서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만 리 밖을 밝게 본다.” 하였다.
六月 秦豐이어늘 斬之하다
】 6월에 진풍秦豐이 항복하니, 그를 참수하였다.
◑董憲, 劉紆 使蘇茂, 佼彊으로 救龎萌이어늘 하다
동헌董憲유우劉紆소무蘇茂교강佼彊으로 하여금 방맹龎萌을 구원하게 하자,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이들을 격파하였다.
秋七月 以衆降하니 犇張步하고 憲, 萌 犇朐 梁人 斬紆以降注+胊, 音劬. 胊縣, 屬東海郡.하다
가을 7월에 교강이 무리를 거느리고 와서 항복하니, 소무는 장보張步에게로 달아나고 동헌과 방맹은 구현朐縣으로 달아났다. 사람이 유우를 참수하고서 항복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구현胊縣동해군東海郡에 속하였다.
◑冬十月 帝如魯注+魯國, 本屬徐州, 帝改屬豫州.하다
】 겨울 10월에 황제가 나라에 갔다.注+나라는 본래 서주徐州에 속하였는데, 황제가 고쳐 예주豫州에 소속시켰다.
◑耿弇 拔祝阿, 濟南, 臨菑하고 與張步戰하여 大破之하니 帝勞弇軍하다 步斬蘇茂以降하니 齊地悉平하다
경감耿弇축아祝阿제남濟南, 임치臨菑(임치)를 함락하고 장보張步와 싸워서 대파하니, 황제가 경감의 군대를 위로하였다. 장보가 소무蘇茂를 참수하고서 항복하니,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張步聞耿弇將至하고 使其大將軍費邑으로 軍歷下하고 又令兵屯祝阿注+費邑, 姓名. 賢曰 “歷下城, 在今齊州歷城縣.” 地理志 “祝阿縣, 屬平原郡.”하며 別於泰山, 鍾城 列營數十以待之하다
장보張步경감耿弇이 곧 공격해올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그의 대장군 비읍大將軍 費邑으로 하여금 역하歷下에 군대를 주둔하게 하고 또 군대를 축아祝阿에 주둔하게 하였으며注+비읍費邑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역하성歷下城은 지금의 제주 역성현齊州 歷城縣에 있었다.” 하였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축아현祝阿縣평원군平原郡에 속했다.” 하였다., 별도로 태산泰山종성鍾城에 수십 개의 진영을 나열하여 대기하게 하였다.
弇度河하여 先擊祝阿하여 拔之호되 故開圍一角하여 令其衆得犇歸鍾城하다
경감이 하수河水를 건너가 먼저 축아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는데, 일부러 포위망의 한쪽을 열어주어 그 무리들이 종성으로 달아날 수 있게 하였다.
鍾城人 聞祝阿已潰하고 大恐하여 空壁亡去하다
종성 사람들은 축아가 이미 무너졌다는 말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성벽을 비우고 도망하였다.
費邑 分遣弟敢하여 守巨里注+郡國志 “濟南歷城有巨里聚.”하니 進兵하여 先脅巨里호되
비읍費邑이 아우 비감費敢에게 병력을 나누어 보내서 거리巨里를 지키게 하니注+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 “제남濟南역성歷城거리巨里의 취락이 있다.” 하였다., 경감耿弇이 진군하여 먼저 거리를 위협하였는데,
嚴令軍中하여 趣修攻具하라 後三日 當悉力攻巨里城注+趣, 讀曰促.호리라하고 陰緩生口亡歸하여 以弇期告邑注+生口, 謂生獲之人. 陰緩, 謂隱然寬其防閑, 令其得逃歸也.하다
군중에 엄명을 내리기를 “공격하는 도구를 빨리 수리하라. 3일 후에는 병력을 총동원하여 거리성巨里城을 공격할 것이다.”注+(재촉하다)는 으로 읽는다. 하고는, 은밀히 포로에 대한 방비를 느슨하게 하여 도망가서 경감이 공격할 시기를 비읍에게 알리게 하였다.注+생구生口”는 사로잡은 사람을 이른다. “음완陰緩”은 은밀히 포로들에 대한 방비를 느슨하게 해서 도망하여 돌아가게 함을 이른다.
邑至日 果自將精兵三萬餘人하고 來救之어늘하여 謂諸將曰 吾所以修攻具者 欲誘致之耳
그날이 되자, 비읍이 과연 직접 정예병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구원하러 오니, 경감이 기뻐하여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공격하는 도구를 빨리 수리하게 한 이유는 적을 유인하여 오게 하려는 것이었다.
野兵不擊하고 何以城爲리오하고 卽分三千人하여 守巨里하고 自引精兵하여 上岡阪하여
들에 있는 적군을 공격하지 않고 어찌 성을 공격하겠는가.” 하였다. 그러고는 즉시 3천 명을 나누어 거리성을 지키게 하고 자신은 정예병을 이끌고서 강판岡阪으로 올라가서
乘高合戰하여 大破之하고 臨陳斬邑注+山脊曰岡, 坡者曰阪. 陳, 讀曰陣, 下分陳․陳同.하다 旣而 收首級以示城中하니 城中兇懼어늘 費敢 悉衆하여 亡歸張步注+兇, 呼勇切, 恐懼聲.
높은 곳을 이용하여 적과 교전해서 대파하고 적진에서 비읍을 참수하였다.注+산등성이를 이라 하고 산비탈을 이라 한다. (진을 치다)은 으로 읽으니, 아래의 “분진分陳”과 “보진步陳”도 같다. 이윽고 비읍의 수급을 거두어 성안에 보이자 성안이 두려워하니, 이에 비감은 병력을 모두 거두어 도망하여 장보張步에게 돌아갔다.注+호용呼勇이니 두려워하는 소리이다.
復縱兵하여 擊諸未下者하여 平四十餘營하고 遂定濟南하다
경감은 다시 군대를 풀어서 아직 항복하지 않은 자들을 공격하여 40여 개의 진영을 평정하고 마침내 제남濟南을 평정하였다.
張步都劇이라 使其弟藍으로 將精兵二萬하여 守西安하고 諸郡太守合萬餘人 守臨菑하니 相去四十里注+西安, 縣名, 屬齊郡.
】 이때에 장보張步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우인 장람張藍으로 하여금 정예병 2만 명을 거느리고 서안西安을 지키게 하고, 여러 태수太守가 거느린 도합 만여 명으로 하여금 임치臨菑를 지키게 하니, 서로의 거리가 40리였다.注+서안西安의 이름이니 제군齊郡에 속하였다.
進軍하여 居二城之間이러니 弇視西安 城小而堅하고 且藍兵又精하며 臨菑 名雖大而實易攻이라
경감耿弇은 진군하여 서안西安임치臨菑의 사이에 있었는데, 경감이 보니 서안은 이 작으나 견고하고 또 장람의 군대가 정예병이며, 임치는 이름은 비록 큰 이라 하나 실제로는 공격하기 쉬웠다.
乃勅諸校호되 後五日 會攻西安注+會, 猶集也.호리라하니 聞之하고 晨夜警守하다
이에 제교諸校(군대의 각 )에게 5일 후에 모여서 서안西安을 공격한다고 통고하니注+(모이다)는 과 같다., 장람이 이 말을 듣고는 밤낮으로 경계하여 수비하였다.
至期하여 夜半 勅諸將皆蓐食하고 會明 至臨菑城注+蓐食, 未起而牀蓐中食也. 蓐, 宜作褥, 藉也. 一說 “蓐, 臥止之草也.”하라하니
】 군대가 모이기로 한 날짜가 되자, 한밤중에 경감耿弇이 장수들에게 모두 침상에서 일찍 밥을 먹고 날이 밝을 때에 임치臨菑에 이르라고 명하였다.注+욕식蓐食”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침상과 요에서 밥을 먹는 것이다. 은 마땅히 이 되어야 하니, 요이다. 일설에 “은 잘 때 까는 풀이다.” 하였다.
護軍荀梁等 爭之하여 以爲 攻臨菑 西安必救之 攻西安이면 臨菑不能救하리니 不如攻西安이니이다
호군 순량護軍 荀梁 등이 간쟁하여 말하기를 “임치를 공격하면 서안西安이 반드시 구원할 것이요, 서안을 공격하면 임치가 구원하지 못할 것이니, 서안을 공격하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弇曰 不然하다 西安 聞吾欲攻之하고 日夜爲備하여 方自憂하니 何暇救人이리오
경감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서안에서는 내가 공격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대비하면서 지금 한창 근심하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남을 구원하겠는가.
臨菑 出不意而至하면 必驚擾하리니 吾攻之 一日必拔이라
임치에서는 우리가 뜻밖에 출동하여 이르면 반드시 놀라 소요할 것이니, 내 공격하면 하루 만에 반드시 함락할 것이다.
拔臨菑하면 卽西安孤하여 與劇隔絶하여 必復亡去하리니 所謂擊一而得二者也라하고 遂攻臨菑하여 半日拔之하고 入據其城하다
임치를 함락하면 바로 서안이 고립되어 과 멀리 떨어져 있어서 반드시 다시 도망할 것이니, 이른바 ‘하나를 공격하여 둘을 얻는다.’라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임치를 공격하여 한나절 만에 함락하고 들어가 을 점거하였다.
張藍 聞之하고 將其衆하여 亡歸劇하다
장람張藍은 이 말을 듣고는 병력을 거느리고서 도망하여 으로 돌아갔다.
乃令軍中하여 無得虜掠하고 須張步至하여 乃取之라하여 以激怒步하니
경감耿弇군중軍中에게 명하여 노략질을 하지 못하게 하고, 장보張步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잡아야 한다고 호언장담하여 장보를 격노하게 하였다.
步聞하고 大笑曰 以尤來, 大彤十餘萬衆으로도 吾皆卽其營而破之어늘 今大耿 兵少於彼하고 又皆疲勞하니 何足懼乎注+弇, 況之長子, 故呼爲大耿.리오하고
장보는 이 말을 듣고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우래尤來대동大彤(대동)의 10여만 군대도 내 모두 그 진영에 나아가 격파하였는데, 지금 대경大耿의 병력은 저들보다 적고 또 모두 피로하니, 어찌 두려워할 것이 있겠는가.”注+〈“금대경今大耿”은〉 경감耿弇경황耿況의 장자이므로 대경大耿이라고 부른 것이다. 하고는,
乃與三弟藍, 弘, 壽 及故大彤渠帥重異等으로 兵號二十萬이라하고 至臨菑大城東하여 攻弇注+重, 直龍切, 姓也. 異, 名也.하다
마침내 세 아우인 장람張藍, 장홍張弘, 장수張壽와 옛 대동大彤의 수괴인 중이重異 등과 함께 20만 군대라고 이름하고, 임치臨菑의 큰 동쪽으로 와서 경감을 공격하였다.注+직룡直龍이니 이고, 는 이름이다.
於是 先出菑水上하여 與重異遇러니 故示弱以盛其氣하고 乃引歸小城하여 陳兵於內하고
이때 경감이 먼저 치수菑水 가로 나아가 중이와 교전하였는데, 경감은 일부러 약한 모습을 보여 적병의 기운을 왕성하게 하고는 마침내 병력을 이끌고 작은 성으로 돌아와 성안에 군대를 진열하고,
使都尉劉歆, 泰山太守陳俊으로 分陳於城下 步氣盛 直攻弇營하여 與劉歆等合戰하다
도위 유흠都尉 劉歆태산태수 진준泰山太守 陳俊으로 하여금 성 아래에 나누어 진을 치게 하였다. 장보는 사기가 충천하자 곧바로 경감의 진영을 공격하여 유흠 등과 교전을 하였다.
視歆等鋒交하고 乃自引精兵하여 以橫突步陳於東城下하여 大破之하고 至暮하다 明旦 復勒兵出하다
경감은 유흠 등이 적과 칼날을 맞대고 싸우는 것을 보고는, 직접 정예병을 인솔하고 동쪽 성 아래에 있는 장보의 진영으로 돌진해서 대파하였다. 날이 저물자 싸움을 중지하였는데, 경감은 다음 날 다시 군대를 무장하여 출전하였다.
是時 帝在魯라가 聞弇爲步所攻하고 自往救之러니
】 이때에 황제가 나라에 있다가 경감耿弇장보張步에게 공격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는 직접 가서 구원하려 하였다.
未至 陳俊 謂弇曰 劇虜兵盛하니 可且閉營休士하여 以須上來注+時, 張步都劇, 故呼爲劇虜.니이다
황제가 도착하기 전에 진준陳俊이 경감에게 이르기를 “극로劇虜의 군대가 강성하니, 우선 영문營門을 닫고 군사들을 휴식시키고서 이 오시기를 기다려야 합니다.”注+이때에 장보張步에 도읍하였으므로 극로劇虜라 부른 것이다. 하였다.
弇曰 乘輿且到하리니 臣子當擊牛, 釃酒하여 以待百官이어늘 反欲以賊虜遺君父耶注+釃, 音師, 又所寄切. 釃酒者, 或以筐, 或以草泲之, 而去其糟也.아하고
경감이 말하기를 “황제의 승여乘輿가 장차 이를 것이니, 신자臣子된 도리에 마땅히 소를 잡고 술을 걸러 백관百官을 기다려야 하는데, 도리어 오랑캐를 군부君父에게 넘겨드린단 말인가.”注+(거르다)는 음이 이고 또 소기所寄이니, “시주釃酒”는 광주리를 사용하거나 혹은 풀을 사용하여 술을 걸러 술지게미를 제거하는 것이다. 하고는
乃出兵大戰하여 自旦及昏 復大破之하다 知步困將退하고 豫置左右翼하여 爲伏以待之러니
마침내 군대를 출동하여 크게 싸워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싸워 다시 적을 대파하였다. 경감은 장보가 곤궁하여 장차 후퇴할 줄을 알고는 미리 좌익左翼우익右翼을 설치하여 매복하고 기다리게 하였는데,
人定時 步果引去注+日入而群動息, 故甲夜謂之人定.어늘 伏兵起縱擊하고 追至鉅昩水上하니 僵尸相屬注+昩, 莫曷切. 賢曰 “拒昩, 水名, 一名巨洋水, 在今靑州壽光縣西.”이라 步還劇하니 兄弟各分兵散去하다
초저녁[인정人定]에 장보가 과연 병력을 이끌고 떠나갔다.注+날이 저물면 여러 동물들이 쉰다. 그러므로 인정人定이라 한다. 이에 복병들이 일어나 맹렬히 공격하고 추격하여 거말수鉅昩水(거말수) 가에 이르니, 쓰러진 시체가 서로 이어져 있었다.注+막갈莫曷이다. 이현李賢이 말하기를 “거말拒昩은 물 이름이니, 일명 거양수巨洋水로 지금의 청주 수광현靑州 壽光縣 서쪽에 있다.” 하였다. 장보가 으로 돌아오니, 형제들이 각각 군대를 나누어 흩어져 갔다.
後數日 車駕至臨菑하여 自勞軍하니 群臣大會
】 수일 뒤에 황제의 거가車駕임치臨菑에 이르러 직접 군사들을 위로하니, 신하들이 크게 모였다.
帝謂弇曰 昔 韓信 破歷下以開基러니 將軍 攻祝阿以發迹하니 此皆齊之西界 功足相方이라
황제가 경감耿弇에게 이르기를 “옛날 지금 장군將軍축아祝阿를 공격하여 훌륭한 자취를 열었다. 이는 모두 의 서쪽 경계에 있는 지역이니, 이 충분히 서로 견줄 만하다.
將軍 前在南陽 建此大策注+上三年冬, 弇從帝, 幸舂陵, 自請平齊.하고 常以爲落落難合이라하더니 有志者事竟成也注+落落, 猶疏闊也.로다하고 帝進幸劇하다
장군이 예전 남양南陽에 있을 적에 이 큰 계책을 세우고서注+위(지난) 건무建武 3년(A.D.27) 겨울에 경감耿弇이 황제를 따라 용릉舂陵에 갈 적에 를 평정하겠다고 자청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사람들의 생각과 너무 거리가 멀어 뜻이 부합하기 어렵다.’ 하더니, 뜻이 있는 자는 끝내 일을 성취한다.”注+낙락落落”은 거리가 멀다는 말과 같다. 하고는, 나아가 으로 행차하였다.
耿弇 復追張步하니 步犇平壽注+平壽, 縣名, 屬北海郡.어늘 蘇茂將萬餘人來救之하다
경감이 다시 장보張步를 추격하니 장보가 평수平壽로 달아났는데注+평수平壽의 이름이니 북해군北海郡에 속하였다., 소무蘇茂가 만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다.
茂讓步曰 以南陽兵精하고 延岑善戰으로도 而耿弇走之어늘 大王 奈何就攻其營하고 旣呼茂어늘 不能待邪注+旣呼茂, 謂張步旣已求救於我.아하니
소무가 장보를 책망하기를 “남양南陽의 정예병과 전쟁을 잘하는 연잠延岑도 경감이 패주시켰습니다. 그런데 대왕大王은 어찌하여 나가 경감의 진영을 공격하고, 나에게 구원을 요청하고서도 기다리지 못하였습니까.”注+기호무旣呼茂”는 장보張步가 이미 자신에게 구원을 청한 것을 이른다. 하니,
步曰 負負하여 無可言者注+負, 愧也, 再言之者, 愧之甚也. 一說 “負負, 猶言負罪負罪.”로라
장보가 말하기를 “부끄럽고 부끄러워서 드릴 말씀이 없소이다.”注+는 부끄러워함이니, 두 번 말한 것은 몹시 부끄러워한 것이다. 일설에 “부부負負는 몹시 죄를 지었다는 말과 같다.” 하였다. 하였다.
帝遣使告步, 茂호되 能相斬降者 封爲列侯하리라하니 步遂斬茂하고 詣耿弇軍門하여 肉袒降하다
】 황제가 사신을 보내 장보張步소무蘇茂에게 고하기를 “상대방의 목을 베고 항복하는 자는 열후列侯로 봉하겠다.” 하니, 장보가 마침내 소무를 참수하고 경감耿弇군문軍門으로 와서 웃통을 벗고 항복하였다.
傳詣行在所하고 而勒兵入據其城注+傳, 直戀切. 城, 卽平壽城也.하고 罷遣步兵하여 各歸鄕里하다
경감이 소무의 머리를 행재소行在所에 파발마로 전하고 군대를 무장하여 평수성平壽城에 들어가 점거하고는注+(파발마)은 직련直戀이다. 은 바로 평수성平壽城이다., 장보의 군대를 해산하여 각기 향리로 돌려보냈다.
張步三弟自繫所在獄이어늘 詔皆赦之하고 封步爲安丘侯注+地理志 “安丘侯國, 屬琅邪郡.” 又 “北海郡, 有安丘縣.”하다
장보의 세 아우가 소재所在한 감옥에 스스로 갇혀 있었는데, 조령詔令을 내려 모두 용서하고 장보를 안구후安丘侯로 봉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안구후安丘侯의 나라는 낭야군琅邪郡에 속했다.” 하였고, 또 “북해군北海郡안구현安丘縣이 있다.” 하였다.
於是 琅邪未平이라 徙陳俊爲琅邪太守러니 始入境 盜賊皆散하다
】 이때에 낭야琅邪가 아직 평정되지 못하였다. 진준陳俊을 옮겨 낭사태수琅邪太守로 삼았는데, 진준이 처음 경내에 들어가자 도적들이 모두 흩어졌다.
耿弇 復引兵至城陽하여 降五校餘黨하니 齊地悉平이라 振旅還京師注+地理志 “城陽國, 都莒.”하다
경감耿弇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성양城陽에 이르러서 오교五校의 잔당들에게 항복을 받으니, 지역이 모두 평정되었다. 이에 군대를 정돈하여 경사京師(낙양雒陽)로 개선하였다.注+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성양국城陽國에 도읍했다.” 하였다.
弇爲將 凡平郡四十六이요 屠城三百이라 未嘗挫折焉이러라
경감은 장수가 되어 평정한 이 모두 46개이고, 무찌른 이 300개로 일찍이 꺾인 적이 없었다.
注+陸機洛陽記曰 “太學, 在雒陽城故開陽門外, 去宮八里. 講堂, 長十丈, 廣三丈.” 還, 讀曰旋, 如魯而返也. 漢史曰幸太學, 今綱目不曰幸而曰視, 所以尊師道也.하다
】 처음으로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황제가 돌아오는 길에 태학太學을 시찰하였다.注+육기陸機의 ≪낙양기洛陽記≫에 “태학太學낙양성雒陽城개양문開陽門 밖에 있었으니, 과의 거리가 8리이다. 강당講堂은 길이가 10이고 너비가 3이다.” 하였다. (돌아오다)은 으로 읽으니, 나라에 갔다가 돌아온 것이다. 나라 역사책에는 “태학太學에 행차했다.[행태학幸太學]”라고 되어 있는데, 지금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서 이라고 말하지 않고 라고 말한 것은 스승의 를 높인 것이다.
帝幸太學하여 稽式古典하고 修明禮樂하니 煥然文物可觀矣러라
】 황제가 태학太學에 행차해서 옛 법을 상고하여 본받고 예악禮樂을 닦고 밝히니, 찬란한 문물文物이 볼만하였다.
十一月 大司徒伏湛하니 以侯霸爲大司徒하다
】 11월에 대사도 복담大司徒 伏湛이 면직하니 후패侯霸대사도大司徒로 삼았다.
霸聞太原閔仲叔之名而辟之러니 旣至 霸不及政事하고 徒勞苦而已注+勞, 力到切, 謂勞其勤苦也.
후패侯霸태원太原민중숙閔仲叔의 명성을 듣고 그를 불러왔는데, 민중숙이 오자 후패는 정사는 언급하지 않고 다만 노고를 위로할 뿐이었다.注+역도力到이니 그의 노고를 위로함을 이른다.
仲叔 恨曰 始蒙嘉命하고 且喜且懼러니 今見明公하니 喜懼皆去
민중숙이 한탄하기를 “처음에는 아름다운 명을 받고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하였는데, 이제 명공明公을 보니 기쁨과 두려움이 모두 사라졌다.
以仲叔爲不足問邪인댄 不當辟也 辟而不問 是失人也라하고 遂辭出하여 投劾而去注+投, 猶下也. 按罪曰劾. 投劾, 謂自投其劾狀而去也. 其劾狀中, 有上文恨曰已下數語.하다
나를 물을 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여겼다면 마땅히 부르지 않았어야 할 것이요, 부르고서 묻지 않으니 이는 사람을 버리는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하직하고 나가서 자신을 탄핵하는 글을 남기고 떠나갔다.注+(남기다)는 와 같고, 죄를 상고하는 것을 이라 하니, “투핵投劾”는 자신을 탄핵하는 글을 남기고 떠나감을 이른다. 탄핵하는 글 가운데에 윗글의 ‘한왈恨曰’ 이하의 몇 마디 말이 있었다.
】 12월에 노방盧芳이 변경을 침입하여 5개의 을 점거하고 노략질하였다.
五原人李興, 隨昱 朔方人田颯 代郡人石鮪, 閔堪 各起兵하여 自稱將軍注+隨昱, 姓名. 颯, 音立, 又思合切.하니
】 처음에 오원五原 사람 이흥李興수욱隨昱(수욱), 삭방朔方 사람 전립田颯(전립), 대군代郡 사람 석유石鮪(석유)와 민감閔堪(민감)이 각각 군대를 일으켜서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였다.注+수욱隨昱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은 음이 이고 또 사합思合이다.
匈奴單于遣使하여 與興等和親하고 欲令盧芳으로 還漢地爲帝한대 興等 引兵하고 至單于庭迎芳하다
흉노匈奴선우單于가 사신을 보내 이흥 등과 화친하고는 노방盧芳나라 땅으로 돌려보내 황제를 삼고자 하니, 이흥 등이 군대를 이끌고 선우의 왕정王庭에 가서 노방을 맞이하였다.
十二月 與俱入塞하여 都九原縣하고 掠有五原, 朔方, 雲中, 定襄, 雁門五郡하여 竝置守令하고 與胡通兵하여 侵苦北邊하다
12월에 함께 변경을 침입하여 구원현九原縣에 도읍하고 오원五原삭방朔方, 운중雲中정양定襄, 안문雁門의 다섯 을 노략질하여 소유하고는, 모두 수령守令을 배치하고 (흉노)와 병력을 연합해서 북쪽 변경을 침입하여 괴롭혔다.
隗囂遣子入侍하다
외효隗囂가 아들을 들여보내 황제를 모시게 하였다.
隗囂自比西伯하여 議欲稱王注+西伯, 文王也.한대 鄭興曰 昔 文王 三分天下 有其二로되 尙服事殷하시고
외효隗囂가 자신을 서백西伯(문왕文王)에 견주어서 의논하여 왕을 칭하고자 하자注+서백西伯문왕文王이다., 정흥鄭興이 말하기를 “옛날
武王 八百諸侯不謀同會로되 猶還兵待時注+武王觀兵孟津, 諸侯不期而會者八百, 皆曰 “紂可伐矣.” 王曰 “汝未知天命.” 乃還師.하며 高祖 征伐累年 猶以沛公行師하니이다
무왕武王은 800명의 제후諸侯가 모의하지 않고 모였는데도 회군하여 때를 기다렸으며注+무왕武王맹진孟津에서 열병할 적에 기약하지 않고 모인 제후諸侯가 800명이었는데, 모두들 “를 정벌할 만하다.” 하였으나 무왕은 “너희들이 천명天命을 알지 못한다.” 하고 마침내 회군하였다.,
今世 無宗周之祚하고 未有高祖之功이어늘 而欲擧未可之事하여 昭速禍患 無乃不可乎잇가하니 囂乃止注+昭, 明也. 速, 召也.하다
지금은 종주宗周(문왕文王)의 이 없고 고조高祖이 있지 않은데, 해서는 안 될 일을 거행하여 화환禍患을 분명하게 불러들이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외효가 마침내 중지하였다.注+는 밝음이고, 은 부름이다.
後又廣置職位한대 鄭興曰 夫中郞將, 太中大夫, 使持節官 皆王者之器 非人臣所當制也라하니 囂病之而止注+病, 猶難也.하다
뒤에 외효가 또다시 관직과 지위를 많이 배치하자, 정흥이 말하기를 “중랑장中郞將태중대부太中大夫, 사지절관使持節官은 모두 왕자王者의 기물이니, 인신人臣이 제정할 바가 아닙니다.” 하니, 외효가 언짢아하면서 중지하였다.注+과 같다.
關中將帥 數上書하여 言蜀可擊之狀이어늘 帝以書示囂하고 因使擊蜀하여 以效其信注+效, 驗也.이러니
】 이때에 관중關中장수將帥가 자주 상서上書하여 을 공격해야 하는 상황을 말하자, 황제가 이 글을 외효隗囂에게 보여주고는 외효로 하여금 을 공격하여 그의 신의를 징험하게 하였다.注+는 징험함이다.
囂上書하여 盛言三輔單弱하고 劉文伯在邊하니 未宜謀蜀注+劉文伯, 卽盧芳也.이라하다
그러나 외효는 상서上書하여 삼보三輔가 고립되어 약하고 유문백劉文伯(노방盧芳)이 변경에 있으니, 을 도모해서는 안 된다고 극구 말하였다.注+
帝知囂欲持兩端하여 不願天下統一하고 於是 稍絀其禮하여 正君臣之儀注+帝與囂書, 初用敵國禮, 今絀其禮.하다
황제는 외효가 양쪽을 관망하여 천하가 통일되기를 원치 않음을 알고, 이에 차츰 그에 대한 예우를 낮추어 군신君臣 간의 예의를 바로잡았다.注+황제가 외효隗囂에게 준 편지에 처음에는 대등한 나라의 를 사용하였는데, 지금 그 를 낮춘 것이다.
帝以囂與馬援, 來歙相善이라하여 數使歙, 援으로 奉使往來하여 勸令入朝하고 許以重爵한대
황제는 외효가 마원馬援내흡來歙(내흡)과 서로 친하다 하여 여러 번 내흡과 마원으로 하여금 사명을 받들고 왕래하게 해서 외효에게 들어와 조회할 것을 권하고 중한 관작을 내리겠다고 허락하였다.
囂言無功德하니 須四方平定하여 退伏閭里라하다
그러나 외효는, 자신이 공덕이 없으니 사방이 평정되기를 기다려서 여리閭里로 물러나 은둔하겠다고 말하였다.
帝復遣來歙하여 說囂遣子入侍한대 囂聞劉永, 彭寵 皆已破滅하고 乃遣長子恂하여 隨歙詣闕이어늘
】 황제가 다시 내흡來歙외효隗囂에게 보내 아들을 들여보내 황제를 모시게 하라고 설득하자, 외효는 유영劉永팽총彭寵이 모두 이미 격파되어 멸망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그의 장자 외순隗恂을 보내 내흡을 따라 대궐에 나아가게 하였는데,
帝以爲胡騎校尉하여 封鐫羌侯注+胡騎校尉, 武帝置, 秩二千石. 鐫, 子全切, 鑿也. 以恂能琢鑿羌戎, 故以爲封號.하다 鄭興 因恂하여 求歸葬父母하고 與妻子俱東하며
황제는 그를 호기교위胡騎校尉로 삼아 전강후鐫羌侯에 봉하였다.注+호기교위胡騎校尉무제武帝가 설치하였으니, 이천석二千石이다. 자전子全로 뚫음이니, 〈“전강후鐫羌侯”는〉 외순이 능히 강족羌族융족戎族을 쪼고 뚫을 수 있음으로 봉호封號로 삼은 것이다. 정흥鄭興은 외순을 따라 돌아가 부모를 장례하기를 청하고 처자와 함께 동쪽으로 갔으며,
馬援亦將家屬하고 隨恂歸洛陽하다 囂將王元 以爲天下成敗 未可知라하여 不願專心內事하여 說囂曰
마원馬援 또한 가솔들을 거느리고 외순을 따라 낙양洛陽으로 돌아갔다. 외효의 장수 왕원王元은 천하의 성패를 아직 알 수 없다 해서 한마음으로 나라를 섬기기를 원치 아니하여 외효를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今天水完富하고 士馬最彊하니 請以一丸泥 爲大王하여 東封函谷關하리니 此萬世一時也注+爲, 去聲.니이다
“지금 천수天水가 매우 부유하며 군사와 말이 가장 강하니, 저는 을 가지고 대왕大王을 위해 동쪽으로 함곡관函谷關을 봉쇄할 것을 청하니, 이는 만세에 얻기 어려운 기회입니다.注+(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若計不及此 且畜養士馬하고 據隘自守하여 以待四方之變이니 圖王不成이면 其敝猶足以霸하리이다
만약 계획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면 우선 군사와 말을 기르고 험한 지역을 점거하여 스스로 지키면 사방의 변고를 기다려야 합니다. 왕자를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그 계책이 실패하더라도 패자霸者는 될 수 있습니다.”
囂心然元計하여 雖遣子入質이나 猶負其險阨하여 欲專制方面이러라
외효는 내심 왕원의 계책을 옳게 여겨서, 비록 아들을 인질로 들여보냈으나, 여전히 나라의 지형이 험고함을 믿고서 한 방면을 오로지 제압하고자 하였다.
申屠剛 諫曰 愚聞人所歸者 天所與 人所畔者 天所去也라하니
신도강申屠剛이 간하기를 “어리석은 제가 듣건대, 사람이 귀의하는 곳은 하늘이 주는 것이요, 사람이 배반하는 곳은 하늘이 버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本朝 誠天之所福이니 非人力也注+本朝, 謂光武也.니이다 今璽書數到하여 委國歸信하여 欲與將軍共同吉凶하니
본조本朝(나라 조정)는 참으로 하늘이 복을 내린 곳이니, 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注+본조本朝”는 광무제光武帝를 이른다. 지금 황제의 새서璽書가 여러 번 이르러서 나라를 맡기고 특별히 신뢰하여 장군과 길흉을 함께하고자 하니,
布衣相與에도 尙有沒身不負然諾之信이어든 況於萬乘者哉잇가
포의布衣가 서로 대함에도 종신토록 허락한 것을 저버리지 않는 신의가 있는데, 하물며 만승萬乘(천자)의 경우에 있어서이겠습니까.
今久疑若是라가 卒有非常之變이면 上負忠孝하고 下愧當世注+卒, 讀曰猝.하리니 願反覆愚老之言하노이다
지금 이와 같이 오래도록 의심하다가 갑자기 비상한 변고가 있으면, 위로는 충효忠孝를 저버리고 아래로는 당세에 부끄러움을 끼칠 것이니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어리석은 이 늙은이의 말을 재삼 고려해주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나,
囂不納하니 於是 遊士, 長者稍稍去之러라
외효隗囂가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에 유사遊士장자長者들이 점차 떠나갔다.
交阯牧鄧讓等 遣使貢獻하다
교지목 등양交阯牧 鄧讓 등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王莽末 交阯諸郡 閉境自守注+阯, 與趾同.하다 岑彭 素與交阯牧鄧讓厚善이러니 與讓書하여 陳國家威德注+讓夫人, 光烈皇后姊也.하고
왕망王莽의 말년에 교지交阯의 여러 이 국경을 폐쇄하고 스스로 지켰다.注+ 잠팽岑彭이 평소 교지목 등양交阯牧 鄧讓과 매우 친하였는데, 등양에게 편지를 보내 국가國家(나라)의 위엄과 덕을 말하고注+등양鄧讓부인夫人광렬황후光烈皇后의 언니이다.,
又遣偏將軍屈充하여 移檄江南하여 班行詔命하다 於是 與江夏太守侯登 武陵太守王堂 長沙相韓福
편장군 굴충偏將軍 屈充을 보내 강남江南 지역에 격문을 돌려 조명詔命을 반포하였다. 이에 등양이 강하태수 후등江夏太守 侯登무릉태수 왕당武陵太守 王堂, 장사상 한복長沙相 韓福,
持陽太守張隆 零陵太守田翕 蒼梧太守杜穆 交阯太守錫光等으로 相率遣使貢獻이어늘 悉封爲列侯注+錫光, 姓名.하다
지양태수 장륭持陽太守 張隆, 영릉태수 전흡零陵太守 田翕, 창오태수 두목蒼梧太守 杜穆, 교지태수 석광交阯太守 錫光 등과 함께 연이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자, 이들 모두를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注+석광錫光성명姓名이다..
錫光者 漢中人이니 在交阯 敎民夷以禮義하고 帝復以宛人任延으로 爲九眞太守하니 敎民耕種嫁娶
석광이란 자는 한중漢中 사람인데, 교지交阯에 있을 적에 그 지역 백성들에게 예의禮義를 가르쳤다. 또 황제가 다시 사람 임연任延구진태수九眞太守로 삼았는데, 임연이 백성들에게 밭 갈고 곡식을 심는 것과 시집가고 장가가는 예법을 가르쳤다.
嶺南華風 始於二守焉注+華風, 謂中華之風化也.하니라
그러므로 영남嶺南에서 중화中華풍화風化가 두 태수太守에게서 시작되었다注+화풍華風”은 중화中華풍화風化를 이른다..
徵處士周黨, 嚴光, 王良하여 至京師러니 하다
처사 주당處士 周黨, 엄광嚴光, 왕량王良경사京師로 불러들였는데, 주당과 엄광은 뜻을 굽히지 않았고, 왕량은 간의대부諫議大夫로 삼았다.
入見할새 伏而不謁하고 自陳願守所志注+凡朝謁者, 必拜稽首, 以姓名自言.
주당周黨은 들어와 황제를 뵈올 적에 엎드리기만 하고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않고는, 자신이 뜻한 바를 지키기를 원한다고 아뢰었다.注+무릇 조정에서 알현하는 자는 반드시 절하여 머리를 조아리고서 스스로 자신의 성명을 말하였다.
博士范升 奏曰 伏見太原周黨 東海王良 山陽王成等 蒙受厚恩하여 使者三聘 乃肯就車하고
박사 범승博士 范升이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태원 주당太原 周黨동해 왕량東海 王良, 산양 왕성山陽 王成 등이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사자使者가 세 번 초빙한 뒤에야 수레에 오르려 하였고,
及陛見帝庭 不以禮屈하여 伏而不謁하여 偃蹇驕悍하여 同時俱逝하니이다
섬돌에 이르러 황제를 뵈올 적에 주당은 예로써 굽히지 아니하여 엎드리기만 하고 자신의 성명을 말하지 아니하여 교만하고 사나운 태도로 두 사람과 함께 동시에 가버렸습니다.
黨等 文不能演義하고 武不能死君하고 釣采華名하여 庶幾三公之位注+演, 廣也. 武不能死君, 言其武勇不能爲君盡死節.하니 願與坐雲臺之下하여 考試圖國之道注+與, 上聲. 雲臺, 在南宮, 周家之所造, 圖書․術籍․珍玩․寶怪皆藏焉.하노이다
주당 등이 문장文章은 의리를 크게 넓히지 못하고 무용武勇은 군주를 위하여 죽지 못하고서 화려한 명성을 낚아 취하여 삼공三公의 지위에 이르기를 바라니注+은 넓힘이다. “무불능사군武不能死君”은 무용武勇이 군주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절개를 다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은 원컨대 그와 함께 운대雲臺의 아래에 앉아서 국가를 도모하는 방도를 시험해보겠습니다.”注+(함께)는 상성上聲이다. 운대雲臺남궁南宮에 있으니 나라에서 만든 것으로 도서圖書와 학술 서적과 진귀한 보물, 괴이한 것들이 모두 보관되어 있다. 하였다.
書奏 詔曰 自古 明王聖主 必有不賓之士 伯夷, 叔齊 不食周粟하고 太原周黨 不受朕祿하니
글을 아뢰자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예로부터 명왕明王성주聖主에게는 반드시 빈객이 되지 않는 선비가 있었다. 백이伯夷숙제叔齊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았고 태원太原주당周黨祿을 받지 않았으니,
亦各有志焉이라 其賜帛四十匹하여 罷之하라
嚴光(≪歷代古人像讚≫)嚴光(≪歷代古人像讚≫)
또한 각각 자신의 뜻이 있는 것이다. 그에게 명주 비단 40을 하사하여 돌려보내라.” 하였다.
帝少與嚴光同遊學이러니 及卽位 以物色訪之하여 得於齊國하여 累徵乃至
】 황제가 젊어서 엄광嚴光과 함께 유학遊學하였는데, 즉위하게 되자 엄광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탐문해서 나라에서 찾아내어 여러 번 부르니, 엄광이 비로소 나왔다.
拜諫議大夫호되 不肯受하고하여 耕釣於富春山中하여 以壽終於家注+以物色訪之, 謂以其形貌求之. 地理志 “富春縣, 屬會稽郡.”하니라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받으려 하지 않고 떠나가서 부춘산富春山에서 밭을 갈고 낚시질하면서 천수를 누리고 집에서 생을 마쳤다.注+이물색방지以物色訪之”는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서 찾음을 이른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부춘현富春縣회계군會稽郡에 속했다.” 하였다.
王良 後歷沛郡太守, 大司徒, 司直이러니 在位恭儉하여 布被瓦器하고 妻子不入官舍하다
왕량王良은 뒤에 패군태수沛郡太守대사도大司徒, 사직司直을 지냈는데, 지위에 있을 적에 공손하고 검소하여 삼베 이불에 질그릇을 사용하고, 처자를 관청에 들이지 않았다.
後以病歸러니 一歲復徵하여 至滎陽하여 疾篤하여 不任進道일새 過其友人注+任, 音壬, 堪也. 言以疾篤, 稽留道上, 不進于行也.하니
뒤에 병으로 관직을 내놓고 돌아갔는데, 같은 해에 다시 부름을 받았다. 형양滎陽에 이르러 병이 위독해서 길을 갈 수 없으므로 친구를 방문하였는데注+은 음이 이니 감당함이다. 〈“불임진도不任進道”는〉 병이 위독하여 길에서 지체하여 출발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友人 拒不肯見하고 曰 不有忠言奇謀而取大位하여 何其往來屑屑不憚煩也注+屑屑, 往來之貌.오하니
친구가 거절하여 만나보려 하지 않으며 말하기를 “충성스러운 말과 기이한 계책도 없이 큰 지위를 취하고서, 어찌 그리도 급급히 왔다 갔다 하면서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는가.”注+설설屑屑”은 왕래하는 모양이다. 하니,
하여 後徵不應하고 卒於家하니라
왕량이 부끄러워하여 이후로는 불러도 응하지 않고 집에서 하였다.
高平范氏曰注+范氏, 名仲淹, 宋蘇州人. 非光武 不能遂子陵之高 非子陵이면 不能成光武之大也니라
고평 범씨高平 范氏(범중엄范仲淹)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注+범씨范氏는 이름이 중엄仲淹이니 나라 소주蘇州 출신이다.
胡氏曰 自古 人君待遇臣下 其禮雖一이나 然嚴威儼恪 常施於爪牙甲冑之士하여 以折其驕悍難使之氣하고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예로부터 인군人君신하臣下를 대우함에 그 가 비록 한결같았으나, 조아爪牙와 같은 갑주甲冑를 두른 장사에게는 항상 엄숙함과 위엄, 장엄함과 공경을 베풀어서 교만하고 사나워 부리기 어려운 기운을 꺾었고,
柔巽謙屈 常施於林壑退藏之人하여 以厲其廉靖無求之節이라
산림에 은둔한 사람에게는 항상 유순함과 공손함, 겸손함과 굽힘을 베풀어서 겸손하고 공경하며 바람이 없는 절개를 장려하였다.
能駕馭人才하고 表正風俗하나니 反是道者 難乎免於亂亡之禍矣니라
그러므로 능히 인재를 통제하고 풍속을 바로잡았으니, 이 를 반대로 하는 자는 혼란하고 멸망하는 화를 면하기 어려웠다.”
竇融 承制하여 以莎車王康으로 爲西域大都尉하다
두융竇融제명制命을 받들어서 사차왕 강莎車王 康서역대도위西域大都尉로 삼았다.
元帝之世 莎車王延 嘗爲侍子京師하여 慕樂中國注+樂, 音洛.이러니
원제元帝의 세대에 사차왕 연莎車王 延이 일찍이 경사京師에서 로 있었기 때문에 중국을 사모하고 좋아하였다.注+(즐거워하다)은 음이 이다.
及王莽之亂 匈奴略有西域호되 唯延 不肯附屬하고 常勅諸子하여 當世奉漢家 不可負也라하다
왕망王莽의 난리에 흉노匈奴서역西域을 침략하여 소유하였으나, 오직 은 흉노에 붙어 속국이 되려 하지 않고 항상 여러 아들에게 대대로 나라를 받들 것이요 저버려서는 안 된다고 명하였다.
子康하니 率傍國拒匈奴하고 擁衛故都護吏士妻子千餘口하며 檄書河西하여 問中國動靜注+傍國, 猶隣國也. 王莽之亂, 西域攻沒都護, 其吏士妻子皆不得還.하다
이 죽자 아들 이 즉위하였는데, 은 이웃 나라를 거느려 흉노를 막고 옛 도호都護의 관리와 군사, 처자 천여 명을 호위하였으며, 하서河西에 격문을 보내 중국의 동정을 물었다.注+방국傍國”은 인국隣國과 같다. 왕망王莽서역西域도호都護를 공격하여 전몰시켜서 그 관리와 군사와 처자들이 모두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竇融 乃承制하여 立康爲漢莎車建功懷德王 西域大都尉하니 五十五國 皆屬焉하다
두융竇融이 이에 제명制命을 받들어 을 세워 한사차건공회덕왕漢莎車建功懷德王서역대도위西域大都尉로 삼으니, 55개국이 모두 그에게 소속되었다.
역주
역주1 射은……切이니 : 이는 본래 ≪資治通鑑≫에 대한 胡三省의 音註로 착오가 있는 듯하다. 이 음주를 따르면 ‘射’자의 발음은 ‘역’이 되어 ‘싫어하다’는 뜻이 된다. ‘화살을 쏘아 맞춘다’는 뜻일 때에는 발음이 ‘석’인바, 食亦의 切이 되어야 한다.
역주2 彭寵奴斬寵來降……封奴爲不義侯 : “某斬, 某降이라고 쓴 것이 많으나 봉한 칭호를 쓰지 않았는데, 不義侯를 쓴 것은 어째서인가. 賞을 잘못 내리고 또 올바른 명칭이 아님을 비난한 것이다.[書某斬某降多矣 不書所封 書不義侯 何 譏失賞 且非名也]다” ≪書法≫
역주3 (嬴)[臝] : 저본에는 ‘嬴’으로 되어 있으나, ≪東觀漢記≫에 의거하여 ‘臝’로 바로잡았다.
역주4 (關)[闕] : 저본에는 ‘關’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闕’로 바로잡았다.
역주5 다섯 등급의 관작 : 公․侯․伯․子․男을 이른다.
역주6 遣使……封牟平侯 : “특별히 쓴 것이다. 특별히 쓴 것은 어째서인가. 功에 보답함을 가상히 여긴 것이니, 황제의 功業은 실로 耿況 부자가 이루었다.[特書也 其特書 何 嘉報功也 帝之業 耿況父子實濟之]다” ≪書法≫
역주7 吳漢……討張步 : “世祖의 篇에 배반을 쓴 경우가 아니면 ‘討’라고 쓰지 않았는데, 張步에게 ‘討’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장보가 이미 항복하였다가 다시 使者를 죽였으니, 배반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배반한 예를 따라 ‘討’라고 쓴 것이다.[世祖之篇 非書反 不書討 步也其書討 何 步旣降矣 復殺使者 非反乎 故從反例書討]다” ≪書法≫
역주8 6尺의……자 : ‘6尺의 군주’는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군주를 가리키며, ‘100里 지방의 命’은 제후국을 다스리는 임무를 가리킨다. 이 내용은 ≪論語≫ 〈泰伯〉의 “6척의 군주를 부탁할 만하고, 100리 지방의 命을 맡길 만하며, 중대한 일에 임하였을 때 절개를 빼앗을 수 없다면, 君子다운 사람인가? 군자다운 사람이다.[可以託六尺之孤 可以寄百里之命 臨大節而不可奪也 君子人與 君子人也]”라고 한 曾子의 말에 보인다.
역주9 위로는……것이다 : 六國은 戰國時代 秦나라에 대항한 函谷關 동쪽의 여섯 나라인 齊․楚․燕․韓․趙․魏를 이르며, 尉佗는 漢나라 때에 皇帝를 자칭한 南越王 趙佗를 말하는데, 眞定 사람인 그가 任囂의 뒤를 이어 南海 郡尉로 있었기 때문에 尉佗라 칭한 것이다. 秦나라 말기 사방에서 義兵이 봉기하자, 임효는 죽으면서 조타에게 군대를 무장시켜 외부의 출입을 차단하고 中國 南部의 7개 고을을 專制하라고 가르쳐주었다. 楚나라와 漢나라가 오랫동안 전쟁을 벌이자 조타는 스스로 南越皇帝라고 칭하고 황제의 文物을 사용하였으나 文帝의 회유에 심복하여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거두었다.
역주10 전대의……말하였습니다 : 谷永(谷子雲)의 말은 ≪資治通鑑≫ 권31 成帝 永始 2년 조에 谷永이 涼州刺史가 되어 成帝에게 올린 말 가운데에, “바로 지금 사직과 종묘의 禍福과 安危의 기틀이 폐하께 달려 있습니다. 폐하께서 진실로 분명하게 크게 깨달으시어 마음을 전일하게 하고 道로 돌아오소서. 그리하여 예전의 잘못이 모두 개선되고 새로운 德이 이미 밝아질 수 있게 된다면, 기세가 큰 이변을 거의 사라지게 하고, 천명의 거취를 거의 회복할 수 있으며, 사직과 종묘를 거의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니, 폐하께서는 부디 유념하시어 반복하여 신의 말을 깊이 살펴주소서.[方今社稷宗廟禍福安危之機在於陛下 陛下誠能昭然遠寤 專心反道 舊愆畢改 新德旣章 則赫赫大異庶幾可銷 天命去就庶幾可復 社稷宗廟庶幾可保 唯陛下留神反覆 孰省臣言]”라고 보인다. 夏賀良의 말은 ≪資治通鑑≫ 권33 哀帝 建平 2년 조에 보이는 내용으로, 成帝의 때에 齊 지역 사람 甘忠可가 거짓으로 ≪天官曆≫과 ≪包元太平經≫ 12권을 지어서 “漢나라가 천지의 大終을 만났으니, 마땅히 다시 하늘에 命을 받아야 한다.[漢家逢天地之大終, 當更受命於天]”라고 주장하며 渤海의 夏賀良 등을 가르쳤는데, 惑世誣民한 죄로 붙잡혀서 처형되었다. 이후 哀帝가 즉위하여 감충가의 제자인 하하량을 待詔黃門으로 삼고 자주 召見하였는데, 하하량이 “漢나라의 曆數(國運)가 중도에 쇠하였으니, 마땅히 다시 命을 받아야 합니다. 成帝께서 천명에 응하지 않았기 때문에 後嗣가 끊어졌습니다. 지금 폐하께서 오랫동안 병을 앓으시고 異變이 자주 발생하니, 이는 하늘이 사람을 譴責하는 것입니다. 급히 연호를 바꾸고 尊號를 고치소서. 그러면 수명을 더욱더 연장시키고 皇子가 태어나며 災異가 종식될 것입니다.[漢曆中衰 當更受命 成帝不應天命 故絶嗣 今陛下久疾 變異屢數 天所以譴告人也 宜急改元易號 乃得延年益壽 皇子生 災異息矣]”라고 말하자, 애제는 하하량의 건의대로 전국에 大赦令을 내리고 建平 2년(B.C.5)을 太初 元年으로 삼고, 존호를 陳聖劉太平皇帝로 바꾸었으며, 기존의 漏刻(물시계의 시각)을 100度에서 120度로 고쳤다.
역주11 王莽의……적에 : 이 내용은 ≪資治通鑑≫ 권39 更始 元年 조에 보인다.
역주12 (求)[永] : 저본에는 ‘求’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永’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3 옛날……계책 : 尉佗는 바로 趙佗이다. 秦나라 二世皇帝 때에 南海尉 任囂(임효)가 병이 심해지자 龍川令 조타를 불러 “秦나라가 무도하여 천하가 이를 고달파하고 있소. 듣건대 陳勝 등이 난을 일으켰다고 하니, 천하가 안정될 바를 알지 못하겠소. 이곳 남해군이 외지고 먼 곳이지만 나는 도적의 군대가 땅을 침범하여 여기까지 이를까 두려워서 군사를 일으켜 새로 낸 길을 끊어 스스로 방비를 갖추고 제후들의 상황이 변화하기를 기다리고자 하였는데, 마침 이러한 때에 나의 병세가 매우 악화되었구려. 또한 番禺는 험한 산을 등지고 앞으로 南海에 막혀 있으며, 동서로 수천 리나 되는데 이주해온 많은 中原의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고 있으니, 이 또한 한 州의 중심지로 나라를 세울 수 있는 곳이오. 郡內의 長吏들 중에 더불어 말할 만한 자가 없기 때문에 그대를 불러서 이렇게 고하는 것이오.[秦為無道 天下苦之 聞陳勝等作亂 天下未知所安 南海僻遠 吾恐盜兵侵地至此 欲興兵絶新道自備 待諸侯變 會病甚 且番禺負山險 阻南海 東西數千里 頗有中國人相輔 此亦一州之主也 可以立國 郡中長吏 無足與言者 故召公告之]”라고 말하고 곧바로 조타에게 南海尉의 임무를 대신 맡도록 하였다. 이윽고 임효가 죽자 조타는 즉시 橫浦, 陽山, 湟谿關에 격문을 돌려 “도적의 군대가 장차 쳐들어올 것이니 급히 길을 끊고 군사를 모아 스스로 지켜라.[盜兵且至 急絶道 聚兵自守]”라고 명하고, 차츰 법을 이용해 秦나라에서 보낸 관원들을 주살하여 자신의 黨與가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秦나라가 멸망하자, 조타는 즉시 진격하여 桂林, 象郡을 차지하고 스스로 南越武王이 되었고, 이후 漢 高祖 11년(B.C.196) 5월에 南越王에 봉해졌다. ≪史記 권113 南越尉佗列傳≫, ≪資治通鑑 권12 漢紀 太祖高皇帝 11年≫
역주14 帝自將擊破之 : “高帝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출동한 것이 5번이었는데, 유독 韓王 信에게만 ‘討’라고 쓰고 나머지는 ‘擊’이라고 썼으니, 이는 일찍이 高帝와 어깨를 나란히 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世祖(光武帝)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출동한 것이 7번으로, ‘征’이라고 쓰지 않았으면 ‘討’라고 썼는데, 여기만 유독 ‘擊’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劉紆는 劉永의 아들이다. 유우는 유영이 세운 아들로 당연히 봉작을 이어야 하니, 타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는 ‘〈유영이〉 나라를 점거하여 군대를 일으켰다.’고 썼고, 여기서는 특별히 ‘擊’이라고 썼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일의 輕重을 헤아린 것이 자세하다.[高帝自將五 唯韓王信書討 餘書擊 嘗比肩也 世祖自將七 非書征則書討 此其獨書擊 何 紆 永子也 永立子也 紹封宜矣 非他人比也 故前書據國起兵 此特書擊 綱目之權衡審矣]” ≪書法≫
역주15 甲夜 : 고대에는 하룻밤(오후 7시~오전 5시)을 五夜로 나누었는데, 그중의 첫 번째인 오후 7시부터 9시까지를 이른다. 五夜는 五更과 같은 말로 甲夜, 乙夜(오후 9시~11시), 丙夜(오후 11시~오전 1시), 丁夜(오전 1시~3시), 戊夜(오전 3시~5시)로 나뉜다. 그러나 人定은 대략 오후 10시 전후를 가리킨다.
역주16 韓信이……열었는데 : 歷下는 春秋時代 齊나라의 고을로, 현재 山東省 歷城縣이다. 漢 高祖 劉邦의 謀士 酈食其(역이기)가 齊王 田廣을 설득하여 마침내 양국이 화친을 맺고 齊나라는 역하의 守備를 파하였다. 한신은 이 소식을 듣고 진격을 중지하려고 하였으나 휘하의 辯士 蒯徹이 齊나라를 공격하도록 설득하여 이에 역하를 기습 점령하고 齊나라의 수도인 臨淄에 이르렀다. 제왕 전광은 역이기가 자신을 속였다고 생각하여 그를 삶아 죽이고 군대를 이끌고 동쪽 高密로 도망하였다. ≪資治通鑑 권10 漢紀 太祖高皇帝 3․4년≫
역주17 初起太學帝還視之 : “初라 한 것은 어째서인가. 처음을 기록한 것이다. 이때 황제가 즉위한 지 5년이 되어 날마다 여가가 없었는데도 學校에 유념하고 친히 太學에 가서 시찰하였으니, 황제는 먼저하고 뒤에 할 바를 알았다고 이를 만하다. ‘起太學’이라고 쓴 것이 이때에 처음 시작되었고, ‘視學’이라고 쓴 것도 이때에 시작되었다.[初者 何 志始也 帝卽位於是五年 日不暇給 而能留意學校 親臨視之 帝可謂知所先後矣 書起太學始此 書視學始此]” ≪書法≫ “≪禮記≫ 〈王制〉에 ‘왕이 친히 학교를 시찰한다.’ 하였으니, 학교를 시찰한다고 말한 것은 옛 禮이다. 漢나라 이래로 幸이라고 말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이 여기에서 특별히 ‘視(시찰하다)’라고 쓴 것은 옛 제도를 미루어 근원한 것이다. 그렇다면 스승을 높이고 道를 중시하는 뜻이 특별히 한 글자 사이에 엄밀하니, 어찌 근본한 바가 없겠는가.[禮王制 王親視學 則學謂之視者 古也 自漢以來 則謂之幸矣 綱目於此 特書曰視者 蓋亦推原古制也 然則崇師重道之意 特嚴於一字之間 亦豈無所本歟]” ≪發明≫
역주18 盧芳……掠據五郡 : “王莽의 세대에 〈匈奴가 쳐들어 왔을 적에〉 ‘匈奴가 길을 나누어 변방으로 쳐들어 왔다.[入塞]’라고 쓰고 ‘入寇’라고 쓰지 않은 것은 왕망을 역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入塞’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차마 오랑캐로 盧芳을 대할 수가 없어서였는데, 노방이 匈奴와 烏桓과 병력을 연합하여 변방을 침범하였으면 ‘寇’라고 썼다.[王莽之世 書匈奴分道入塞 不書入寇 賊莽也 此其書入塞 何 未忍以狄狄芳也 至與匈奴烏桓連兵犯塞 則書寇矣]다” ≪書法≫
역주19 文王은……섬기셨고 : 이 내용은 ≪論語≫ 〈泰伯〉의 “〈文王은〉 천하를 셋으로 나누어 그 둘을 소유하시고도 殷나라를 복종하여 섬기셨으니, 周나라의 德은 지극한 덕이라고 이를 만하다.[三分天下 有其二 以服事殷 周之德 其可謂至德也已矣]”라고 한 孔子의 말씀에 보인다.
역주20 高祖는……출동하였습니다 : 漢 高祖 劉邦은 秦나라 二世皇帝 元年(B.C.209)에 沛公으로 起兵하여 B.C.206년부터 B.C.202년까지 5년 동안 漢王으로 칭해졌다가 B.C.202년 2월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유방이 비록 한왕에 봉해졌지만 ‘한왕’이란 칭호를 쓰지 않고 沛公으로 행세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21 劉文伯은……盧芳이다 : 盧芳의 字는 君期로 安定郡 三水縣 사람이다. 王莽의 때에 자신이 漢 武帝의 曾孫 劉文伯이라고 사칭하여 漢나라를 그리워하는 백성을 미혹했었는데, 왕망의 말년에 羌人, 胡人과 함께 起兵하였다. 更始 2년(A.D.24)에 更始帝 劉玄이 노방을 騎都尉로 삼았는데, 이듬해에 유현이 살해되자 삼수의 호걸들이 노방을 옹립하여 上將軍, 西平王으로 삼았다. 後漢 光武帝 建武 12년(A.D.36)에 노방은 부하들의 배반과 군중의 동요로 말미암아 匈奴 땅으로 달아났는데, 16년(A.D.40)에 後漢에 투항하여 代王에 봉해졌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後漢을 배반하고 閔堪, 閔林과 수개월 동안 싸우다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흉노 땅으로 들어갔다. 이후 노방은 10여 년 동안 흉노 땅에 살다가 그곳에서 病死하였다.
역주22 한 덩이의 진흙 : 地勢가 험준하여 적은 힘으로 지킬 수 있는 군사적 요충지로, 곧 難攻不落의 요새를 가리킨다.
역주23 阯는……같다 : 본서는 交趾와 交阯가 혼용되어 쓰이는바, 交趾는 五嶺 이남인데 漢 武帝 때 설치한 13刺史部 중의 하나로 지금의 廣東, 廣西 지역과 월남의 북부, 중부 지역을 이른다. 後漢 말기에 交州로 바뀌었다.
역주24 黨光不屈 以良爲諫議大夫 : “不屈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절개를 지킴을 가상히 여긴 것이다. 諫議大夫를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書不屈 何 嘉節守也 書諫議大夫始此]” ≪書法≫ “嚴光의 절개가 百世의 上下에 떨쳐져서 듣는 자가 흥기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 쓴 것을 보면 周黨, 王良과 함께 불렀다. 范升이 주당을 훼방한 것과 친구가 왕량을 꾸짖은 것을 보면, 두 사람은 엄광과 비교될 인물이 아님이 분명하니, 엄광이 더욱 굽히지 않을 것이 당연하다. 또 엄광은 바로 황제가 손을 잡고 친하게 지내던 친구인데, 황제가 손수 편지를 써서 초치하지 않고 詔書를 보내 임명한 것은 어째서인가. 일찍이 〈嚴光傳〉을 살펴보건대, 그가 侯霸를 비판한 말을 보면, 엄광은 진실로 碌碌한 隱者가 아니다. 더구나 엄광은 젊어서부터 높은 명성이 있었고 황제가 그와 함께 同門受學을 하였으니, 반드시 그의 재주와 지혜가 과연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처음에 황제가 그의 어짊을 생각하고, 종말에는 황제가 그의 떠나감을 서글퍼하고 애석히 여겼던 것이다. 만일 황제가 엄광을 관작으로써 굴복시키지 않고 오직 친구로 대하여 자연스럽게 정치하는 일을 물었다면, 반드시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고 교화를 이루는 좋은 방법이 있어서 中興에 큰 보탬이 되었을 터인데, 애석하게도 황제가 이에 미치지 못하였다. 살펴보건대, 中元 2년 丁巳年(A.D.57)에 황제의 聖壽가 62세였으니, 그렇다면 금년 己丑年은 황제의 성수가 34세인 것이다. 엄광은 建武 17년(A.D.41)에 다시 불렀으나 굽히지 않다가 나이 80이 되어 죽었는데, 황제가 郡縣에 詔令을 내려서 돈과 곡식을 하사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미루어 보면 엄광이 光武帝와 함께 동문수학하던 때에 진실로 나이가 이미 황제보다 많았던 것이다. 또 황제가 大寶에 군림하여 대궐 아래로 불러왔을 적에 엄광은 이때 耳順(60세)이 넘었을 것이다. 나이가 많고 德이 높은 사람을 황제가 賓師의 禮로써 대우하지 못하고 신하로 삼아서 등용하고자 하였으니, 엄광이 이에 응하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후세에 논하는 자들은 다만 엄광의 굽히지 않은 것이 높은 줄만 알고, 엄광이 굽히지 않은 이유가 그 뜻이 실제로 따로 있었음을 알지 못한다. 다만 그의 지식과 도량이 평소 높아서 이 뜻이 渾然하여 圭角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 때문에 天下 後世에서 측량하여 알지 못했을 뿐이니, 그러므로 내가 자세히 논하여 후세의 군자가 절충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嚴光之節 奮乎百世之上下 聞者莫不興起 而見之綱目所書者 乃與周黨王良竝召 觀范升之毁黨 與友人之誚良 則二人非光之比 明矣 宜光之愈不屈也 且光乃帝握手故人 帝不以手書招致 乃以詔書從事 何哉 嘗卽光傳考之 見其譏切侯霸之語 則光固非碌碌隱者 況光少有高名 帝旣與之同學 必知其才智果有大過人者 是以始焉帝思其賢 而終焉帝傷惜之 向使帝不屈光以官爵 而惟以故人待之 從容訪問 必有興治致化之方 補益中興 惜乎 帝不及此爾 按中元二年丁巳歲 帝聖壽六十二 則是今年己丑 蓋三十有四矣 光以建武十七年 再召不屈 至年八十終 帝猶詔郡縣 賜錢穀 由是推之 當光同學之時 固已年尊於帝 至帝君臨大寶 召至闕下 光是時蓋亦年踰耳順矣 以年尊德卲之人 帝不能待以賓師之禮 乃欲臣而用之 宜乎光之不應也 後之論者 但知光之不屈爲高 而不知光之所以不屈者 其意固自有在 特其識量素高 此意渾然 不露圭角 是以天下後世莫得而測識爾 臣故備而論之 以俟後之君子折衷焉]” ≪發明≫
역주25 光武帝가……것이다 : 이 내용은 ≪范文正集≫ 권7 〈桐廬郡嚴先生祠堂記〉의 “先生의 마음은 日月의 위로 솟아 나오고, 光武帝의 度量은 천지의 밖을 포용하니, 선생이 아니었으면 광무제의 큰 도량을 이루지 못하였을 것이요, 광무제가 아니었다면 어찌 선생의 높은 절개를 이룰 수 있었겠는가. 그리하여 탐욕스런 자로 하여금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로 하여금 뜻이 서게 하였으니, 이는 名敎(儒敎)에 크게 功이 있는 것이다.[蓋先生之心 出乎日月之上 光武之器 包乎天地之外 微先生 不能成光武之大 微光武 豈能遂先生之高哉 而使貪夫廉 懦夫立 是大有功於名敎也]”라고 한 데에 보인다.
역주26 侍子 : 고대 속국의 왕이나 제후가 아들을 보내 천자를 모시면서 중국의 문화를 학습하게 하였는데, 이때 보내진 아들을 일컫는 말이다.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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