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8)

자치통감강목(18)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8)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泰始五年이요 魏皇興三年이라
沈文秀守東陽이러니 魏人圍之三年한대 外無救援이라 士卒晝夜拒戰하여 甲冑 生蟣蝨호되 無離叛之志러라
至是하여 魏人拔東陽하니 文秀解戎服正衣冠하고 持節坐齋內어늘 魏人執之하여 縛送慕容白曜하여 使之拜注+通鑑, 執之下有去其衣三字.한대
文秀曰 各兩國大臣이니 何拜之有리오 白曜還其衣爲設饌하고 鎖送平城하니
魏主宥之하고 待爲下客하여 給惡衣疏食이러니 既而重其不屈하여 拜外都下大夫하니 於是 靑冀之地 盡入於魏矣注+外都下大夫, 外都大官之屬僚也, 拓跋氏所置.러라
二月 魏以慕容白曜 爲靑州刺史하다
白曜撫御有方하니 東人安之러라
魏立三等輸租法하고 除其雜調하다
魏自天安以來 比歲旱饑하고 重以靑徐用兵하니 山東之民 疲於賦役注+重, 直用切.이라
魏主命因民貧富하여 分爲三等輸租之法하여 等爲三品하여 上三品 輸平城하고 中輸它州하고 下輸本州하고
舊制常賦之外 有雜調十五러니 至是罷之하니 民稍贍給이러라
宋河東柳欣慰等 謀反하여 欲立太尉廬江王禕하니 帝兄而帝輕之하여 以孝武謂之驢王이라하여 徙封廬江注+孝武, 通鑑作廢帝.하니 禕銜之하여 遂與欣慰通謀러니 事覺하니
詔降禕車騎將軍하여 出鎭宣城하고 遣腹心楊運長하여 領兵防衛하고 欣慰等伏誅하다
夏五月 魏置僧祇彿圖戶하다
魏徙靑齊民於平城桑乾하고 立平齊郡以居之하니 沙門統曇曜 奏平齊戶及諸民有能歲輸穀六十斛入僧曹者 即爲僧祇戶하고 粟爲僧祇粟하여 遇凶歲賑給飢民注+胡三省曰 “沙門統, 猶今之僧錄.” 素軒曰 “祇音神祇之祇, 祇園也. 佛書有阿僧祇.”하고 又請民犯重罪及官奴 以爲佛圖戶하여 以供諸寺掃灑한대 竝許之注+佛圖, 卽浮屠.하니
於是 僧祇寺戶徧於州鎭矣注+魏自北方幷有諸夏, 亦依魏晉制, 置諸州刺史, 其西北被邊夷晉雜居之地, 則置鎭將以鎭之.러라
六月 魏立子宏爲太子하다
◑宋主殺其兄廬江王禕하다
宋主又令有司 奏禕忿懟有怨言이라하여 詔免官爵하고 遣使持節하여 逼令自殺하다
冬十月朔 日食하다
◑十一月 하다
自是 信使歲通이러라
十二月 宋以桂陽王休範으로 爲揚州刺史하다
宋司徒揚州刺史建安王休仁 與宋主 素相友愛러니 景和之世 宋主賴其力以脫禍하고
及泰始初四方兵起 休仁親當矢石하여 克成大功이라 任總百揆하여 親寄甚隆하니 由是 朝野輻湊 宋主不悅이어늘
休仁悟其旨하고 表解揚州한대 宋主以休範代之하다
宋置三巴校尉하다
先是 三峽蠻獠 歲爲抄暴 故分荊益四郡하여 立府於白帝以鎭之注+荊․益四郡, 謂荊州之巴東․建平, 益州之巴西․梓潼郡. 府, 謂三巴校尉府也.하고 又以孫謙爲巴東建平太守하여 勅募千人自隨하니
謙曰 蠻夷不賓 蓋待之失節耳 何煩兵役하여 以爲國費리오하고 遂不受하고 至郡하여 開布恩信하니 蠻獠翕然懷之하여 競餉金寶어늘 謙皆慰諭不受하다
宋臨海賊起하다
臨海田流自稱東海王하고 剽掠海鹽하고 殺鄞令하니 東土大震注+鄞, 音銀. 鄞縣, 自漢以來屬會稽郡.이러라


나라 태종太宗 명제明帝 유욱劉彧 태시泰始 5년이고, 북위北魏 현조顯祖 헌문제献文帝 탁발홍拓跋弘 황흥皇興 3년이다.
[] 봄 정월에 북위北魏나라 청주靑州를 함락하고 자사刺史 심문수沈文秀를 사로잡았다.
[] 심문수沈文秀을 지키고 있었는데, 북위北魏 사람들이 그곳을 포위한 지 3년이 지났는데도 외부에서 구원해줄 병력이 없었다. 사졸들이 밤낮으로 대항하여 전투를 치르느라 갑옷과 투구에 이가 생겨났는데도 떠나거나 배반하려는 마음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북위北魏 사람들이 동양東陽을 함락하자 심문수가 갑옷을 벗고는 의관을 바르게 하고서 부절符節을 지니고 재실齋室에 앉아 있었는데, 북위北魏 사람들이 그를 사로잡아서注+① ≪資治通鑑≫에는 “執之” 아래에 “去其衣(그의 옷을 벗기다.)” 세 글자가 더 있다. 결박하여 모용백요慕容白曜에게 보내어 절을 하게 하였다.
심문수가 말하기를 “각자 두 나라의 대신大臣인데 어찌 절을 할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니, 모용백요가 그의 의복을 돌려주고 음식을 차려주고는 쇠사슬을 채워서 으로 압송하였다.
위주魏主가 그를 풀어주고는 하객下客으로 대우하여 변변치 못한 옷과 거친 음식을 주었는데, 얼마 뒤에 굽히지 않는 그의 행동을 중하게 여겨 외도하대부外都下大夫注+② 外都下大夫는 外都大官의 屬僚로, 拓跋氏가 설치한 것이다. 임명하였다. 이에 청주靑州기주冀州의 땅이 모두 북위北魏 소속이 되었다.
[] 2월에 북위北魏모용백요慕容白曜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았다.
[] 모용백요慕容白曜가 백성들을 위무하고 다스리는 데 방편이 있었기에 동인東人(청주靑州서주徐州회북淮北의 사람들)들이 편안히 여겼다.
[] 북위北魏가 세 등급의 수조법輸租法을 만들고 잡조雜調를 제거하였다.
[] 북위北魏 연간 이후로 해를 연이어 가뭄과 기근이 들고 청주靑州서주徐州에서 거듭注+① 重(거듭하다)은 直用의 切이다. 군사를 동원하여 산동山東의 백성이 세금과 부역에 지쳐 있었다.
위주魏主가 명을 내려 백성의 빈부 격차에 따라 세 등급으로 나누어 수조법輸租法을 시행하고 등급마다 다시 세 단계를 만들어 상등上等의 3은 조세를 평성平城으로 보내고, 중등中等은 조세를 다른 로 보내고 하등下等은 조세를 해당 로 보내게 하였다.
옛 제도에는 상부常賦 이외에 잡조雜調가 15항목이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없애니, 백성들의 생활이 조금 넉넉해졌다.
[] 나라가 태위太尉 여강왕廬江王 유의劉禕남예주자사南豫州刺史로 삼았다.
[] 나라 하동河東 사람 유흔위柳欣慰 등이 모반하여 태위太尉 여강왕廬江王 유의劉禕를 세우려고 하였다. 유의는 황제(유욱劉彧)의 형이었으나 황제가 경시하여 효무제孝武帝(유준劉駿)가注+① 孝武는 ≪資治通鑑≫에 廢帝(劉子業)로 되어 있다. 유의가 원망을 품어 드디어 유흔위柳欣慰와 내통하여 모반을 꾀하려고 하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조서를 내려 유의를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강등하고 경사京師에서 나가서 선성宣城진수鎭守하게 하고 심복인 양운장楊運長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방어하도록 하였으며, 유흔위 등은 죽임을 당하였다.
[] 여름 5월에 북위北魏승기호僧祇戶불도호彿圖戶를 설치하였다.
[] 북위北魏청주靑州제주齊州의 백성들을 평성平城상건桑乾으로 옮기고, 평제군平齊郡을 세워 그들을 거주하도록 하였는데, 사문통沙門統 담요曇曜가 평제군의 호구와 백성 중에서 해마다 60곡을 승조僧曹에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바로 승기호僧祇戶로 삼고, 곡식은 송기속僧祇粟으로 삼아서 흉년을 만나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라고 아뢰고注+① 胡三省이 말하기를 “沙門統은 지금의 僧錄과 같다.”라고 하였다. 素軒이 말하기를 “祇는 음이 神祇의 祇(기)와 같으니, 祇園이다. 佛書에 阿僧祇라는 말이 있다.”라고 하였다., 또 백성들 중에서 중한 죄를 지은 사람과 관노官奴불도호佛圖戶注+② 佛圖는 바로 浮屠이다. 모두 허락하였다.
그래서 승기호僧祇戶에 두루 생기게 되었다.注+③ 北魏는 북방에서부터 중원까지 소유하였으나, 역시 魏晉時代의 제도에 따라 여러 州에 刺史를 두었으며, 서북쪽 변방에 오랑캐와 晉人(漢人)이 뒤섞여 거처하는 곳에는 鎭將을 두어서 鎭守하게 하였다.
[] 6월에 북위北魏황자皇子탁발굉拓跋宏태자太子로 삼았다.
[] 송주宋主(유욱劉彧)가 자신의 형인 여강왕廬江王 유의劉禕를 죽였다.
[] 송주宋主가 또 유사有司를 시켜 유의劉禕가 분노하여 원망하는 말을 하였다고 아뢰게 하여 조서를 내려 관작官爵을 면직시키고, 부절符節을 주어 사신을 보내 그를 핍박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였다.
[]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 11월에 북위北魏나라로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를 맺었다.
[] 이때부터 사신이 해마다 왕래하였다.
[] 12월에 나라가 계양왕桂陽王 유휴범劉休範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 나라 사도司徒 양주자사揚州刺史 건안왕建安王 유휴인劉休仁송주宋主(유욱劉彧)와 평소에 우애가 있었는데,
정사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아 송주宋主가 친근히 대하여 몹시 의지하니, 이로 말미암아 조야朝野의 마음이 그에게로 향하자 송주宋主가 기뻐하지 않았다.
유휴인이 그 뜻을 알아차리고 표문을 올려 양주자사揚州刺史를 그만두자, 송주宋主유휴범劉休範으로 그 자리를 대신하게 하였다.
[] 나라가 삼파교위三巴校尉를 두었다.
[] 이보다 앞서 에 살고 있는 만족蠻族요족獠族이 노략질을 하고 포학한 짓을 하였기에 형주荊州익주益州의 4을 분할하여 백제白帝를 세워 지켰다.注+① 荊州와 益州의 4郡은 荊州의 巴東과 建平, 益州의 巴西와 梓潼郡을 말한다. 府는 三巴校尉府를 말한다.손겸孫謙파동巴東건평建平태수太守로 임명하여 조서를 내려 천 명을 모집하여 데려가게 하니,
손겸이 말하기를 “오랑캐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어찌 번거롭게 군대를 파견하여 국가의 경비를 낭비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드디어 받지 않고는 에 이르러 은혜와 신의를 보이자, 만족蠻族요족獠族이 모두 마음을 열고 다투어 금은보화를 바쳤는데, 손겸이 그들을 모두 위로하여 깨우치고 받지 않았다.
[] 나라 임해臨海에서 도적이 일어났다.
[] 임해臨海전류田流가 지신을 동해왕東海王이라 칭하고 해염海鹽을 노략질하고 은현鄞縣注+① 鄞(지명)은 음이 銀이다. 鄞縣은 漢나라 이후로 會稽郡에 소속되었다. 현령을 죽이니, 동쪽 지역에 크게 소요가 일어났다.


역주
역주1 魏拔宋靑州 執其刺史沈文秀 : “宋나라가 元嘉 末年(452)에 北魏를 침략한 뒤로부터 두 나라가 각각 스스로 지키기에 힘써서 다시 전쟁이 없었다. 薛安都 등이 반란을 일으켜 北魏에 항복하자 北魏 사람들이 이를 틈타 宋나라를 침략하여 淮北․淮西와 下邳郡 등의 지역을 차지하였다. 지금 또 靑州를 함락시키고 그 刺史를 잡아가니 宋나라는 内難에 압박을 받아 외방을 경략할 겨를이 없었고 또 아랫사람들도 다시 함께 힘써 싸우지 않았다. 그러나 北魏는 宋나라에서 반란을 일으킨 신하를 받아들여서 宋나라의 토지를 빼앗고 宋나라의 성읍을 도륙하였다. 비록 한때에 뜻을 얻은 것 같지만 어찌 仁義의 일이겠는가. ≪資治通鑑綱目≫에는 일에 따라 기록을 하여 是非와 曲直이 명료하게 눈앞에 있으니 진실로 숨길 수가 없다.[宋自元嘉末年侵魏之後 兩國各務自保 無復兵爭 至薛安都等叛降于魏 於是魏人乗釁侵宋 取淮北淮西及下邳諸郡之地 今又拔靑州而執其刺史 宋惟迫於内難 未遑外略 亦不復與之力爭 然魏氏納其叛臣 奪其土地 屠其城邑 雖若得志一時 夫豈仁義之擧 綱目随事書之 是非曲直 瞭然在目 固自不可得而掩也]” ≪發明≫
역주2 東陽 : 靑州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역주3 平城 : 北魏의 도읍이 있던 곳이다.
역주4 天安 : 献文帝 拓跋弘의 연호로 宋나라 明帝 泰始 2년(466) 한 해 동안만 사용하였다.
역주5 宋以太尉廬江王禕 爲南豫州刺史 : “이때에 柳欣慰가 謀反을 하고 劉禕가 그와 내통하여 일이 발각되자 그들을 내쳤는데 ‘謀反’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宋主(劉彧)에게 죄를 돌린 것이다. 유의는 宋主의 형인데 경멸하며 추하게 헐뜯어 그 마음을 그르쳤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그 마음을 깊이 추적하였으므로 유의의 謀反을 기록하지 않고, 유의가 죽었을 때 ‘宋主’라고 배척하여 기록했던 것이다.[於是柳欣慰謀反 禕與之通 事覺出之 其不書謀反 何 罪宋主也 禕其兄也 而輕侮醜詆 以失其心 綱目深探其本 故禕之謀反不書 而其殺也斥書宋主]” ≪書法≫
역주6 劉禕는……봉하니 : 景和 원년(465) 廢帝 劉子業이 東海王 劉禕가 성품이 용렬하다고 하여 驢王(노새 왕)이라고 하고 말구유에서 음식을 먹게 하였다. 뒤에 劉彧이 황제가 되고서 그를 中書監․太尉로 삼았다. 그런데 이때에 유욱이 그를 廬江王으로 삼아 놀린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본서 87쪽과 93쪽에 보인다. 여기서 孝武帝라고 한 것은 아래 訓義처럼 유자업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역주7 僧曹에……청하니 : 僧曹는 北魏 내의 寺院을 관리하던 국가 기구를 말하다. 僧祇戶는 사원에 속한 戶로 보이나 개별 寺院이 관할한 것이 아니라 僧曹에서 관할한 것으로 보인다. 佛圖戶는 사원에 소속된 戶로 승기호보다는 지위가 낮았다.(≪資治通鑑新注≫, 陝西人民出版社, 1998)
역주8 寺戶 : 彿圖戶를 말한다.
역주9 魏遣使如宋脩好 : “北魏가 이미 宋나라에 품은 뜻을 달성하고 지금 사신을 파견하여 우호를 맺자, 宋나라 역시 자신을 지키기에 겨를이 없어 옛 惡緣을 생각하지 않았다. ≪資治通鑑綱目≫에서는 일에 의거하여 기록하여 또한 전쟁이 그치게 된 것을 다행스럽게 여긴 것이다.[魏既得志於宋 今乃遣使修好 宋亦自守不暇 不念舊惡 綱目據事書之 亦幸其兵禍之息也]” ≪發明≫
역주10 景和……벗어났다 : 景和(465)는 前廢帝 劉子業이 사용한 연호로, 이때 유자업이 劉彧을 죽이려 하였는데 劉休仁의 재치로 살아남았다.
역주11 泰始 ……세웠다 : 泰始는 明帝 劉彧이 사용한 연호로, 그 기간은 7년(465~471)이다. 이때의 일은 泰始 원년과 2년에 해당한다.
역주12 三峽 : 揚子江 상류의 험난하기로 유명한 세 협곡으로, 瞿塘峽, 巫峽, 西陵峽의 합칭이다.

자치통감강목(18)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