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서창후西昌侯소란蕭鸞이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 세우는 일을 도모할 때에, 소연蕭衍을 끌어들여 그와 함께 도모하였다. 형주자사荆州刺史수왕隨王소자륭蕭子隆은注+① 蕭子隆은 世祖(蕭賾)의 아들이다. 성품이 온화하고 문재文才가 있었다. 소란이 그를 부르려고 하였는데 그가 따르지 않을까 염려하자, 소연이 말하기를
“수왕이 비록 아름다운 명성이 있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용렬합니다. 이미 지모智謀를 갖춘 선비가 없으니, 조아爪牙로 오직 의지할 사람은 사마司馬원역생垣歴生과 무릉태수武陵太守변백룡卞白龍뿐입니다. 두 사람은 오직 이익이 있으면 따르니, 만약 높은 직책을 주어서 포섭하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수왕隨王은 짧은 편지만으로 오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소란이 그의 말을 따라 두 사람을 부르니 모두 오자, 이어서 소자륭을 불러서 무군장군撫軍將軍으로 삼았다.
예주자사豫州刺史최혜경崔慧景은 제齊나라 고제高帝(소도성蕭道成)와 무제武帝(소색蕭賾)의 옛 장군이었다. 소란이 그를 의심하여 소연을 영삭장군寧朔將軍으로 삼아서 수양壽陽을 지키게 하니, 최혜경이 두려워하여 흰옷을 입고注+② “白服”은 죄를 지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직무를 수행하는 것이다. 나아가 맞이하였는데 소연이 그를 위로하여 안심시켰다.
比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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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남쪽을 순행을 하여 비간比干의 묘墓에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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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비간比干의 묘墓를注+① ≪水經註≫에 “河內 朝歌縣 남쪽에 牧野가 있는데, 比干의 墓가 있다.” 하였다. 지날 때에 태뢰太牢로 제사를 지내고 스스로 글을 지어서 말하기를 “아! 바르고 곧은 선비여, 어찌 나의 신하가 아니었는가.”라고 하였다.
綱
[강綱] 제齊나라 소란蕭鸞이 직합장군直閤將軍주봉숙周奉叔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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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제주齊主소소업蕭昭業이 중서사인中書舍人기무진지綦毋珍之․주륭지朱隆之와 직합장군直閤將軍조도강曹道剛․주봉숙周奉叔과 환관 서용구徐龍駒 등을 총애하니, 유사有司가 서로 말하기를 “차라리 지존至尊의 칙령을 거부하더라도 사인舍人의 명령은 어겨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서용구는 항상 사장전舍章殿에 거주하면서 남면南面하여 황제를 대신해 칙령에 서명을 하였으니注+① 畫(서명하다)는 去聲이다., 좌우에서 모시는 시직侍直이 제주齊主와 다르지 않았다. 제주齊主가 산릉山陵의 일을 마친 뒤로 곧바로 측근과 함께 미복 차림으로 저자를 돌아다니며 놀면서 진흙을 던지고 높이뛰기를 하며注+② 塗는 진흙이니, 〈“擲塗”는〉 진흙을 서로 던지는 것으로 즐거움을 삼는다. 跳는 뛰어오른다는 뜻으로, 賭跳는 뛰어서 높이 나가는 것으로 승부를 삼는다. 여러 가지 비천한 놀이를 하였다.
세조世祖(소색蕭賾)가 모아놓은 금전과 비단은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는데, 1년도 채 되기 전에 다 써버렸다. 서창후西昌侯소란蕭鸞이 여러 차례 간쟁을 하였으나 따르지 않고 마음속으로 소란을 꺼려서 그를 제거하려고 하였다.
위위衛尉소심蕭諶과 정남자의征南諮議소탄지蕭坦之가注+③ 蕭諶은 世祖의 族子(同族 형제의 아들)이고, 蕭坦之는 소심의 族人이다. 모두 조부祖父(세조世祖)의 옛 사람이라고 하여 매우 친근하고 신의가 있게 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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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하후何后가 역시 음란하고 방종하여 곁에서 모시던 신하 양민楊珉과 사통을 하였는데, 제주齊主는 하후가 멋대로 하도록 놓아두니, 재합齋閤(천자의 궁실[후궁后宮] 옆문)을 밤에 열어두고 더 이상 어떤 분별도 없었다.
소란蕭鸞이 소탄지蕭坦之를 궁으로 들여보내 양민을 죽이라고 아뢰게 하자, 하후가 눈물을 흘리며 양민을 구원하였는데, 소탄지가 굳게 청하니 제주齊主가 부득이하여 허락하였다. 소란이 또 서용구徐龍駒를 죽이라고 아뢰니, 제주齊主가 역시 어기지 못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더욱 심하게 소란을 꺼리게 되었다.
소심蕭諶과 소탄지蕭坦之는 제주齊主의 방탕과 방종이 날로 심해지는 것을 보고 재앙이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하여 마음을 바꾸어 소란에게 황제를 폐위하고 새로 세우는 일을 권하고 몰래 소란의 눈과 귀가 되었는데, 제주齊主는 그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
주봉숙周奉叔이 용맹을 믿고 권세를 끼고서 공경公卿들을 능멸하니, 소란이 주봉숙을 꺼려서 두 사람을 시켜 제주齊主가 주봉숙을 밖으로 보내어 외원外援이 되도록 유세하여 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게 하였고, 주봉숙이 청주靑州로 가려고 할 때에 제주齊主의 칙령이라고 속여서 불러 들어오게 하여 그를 때려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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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제주齊主(소소업蕭昭業)가 남군왕南郡王이던 시절에 두문겸杜文謙이 시독侍讀을 역임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항상 기무진지綦毋珍之에게 유세하기를 “천하天下의 일을 알 수 있으니, 일찍 계획하지 않으면 우리들의 종족이 없어질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무진지가 말하기를 “앞으로 어떻게 계획을 세우려고 합니까?”라고 하니, 두문겸이 말하기를 “선제先帝의 구인舊人들이 많이 배척을 당하였으니, 그들을 불러서 일을 시킨다면 누가 강개한 마음을 품지 않겠는가. 만약 몰래 주봉숙周奉叔에게 알려서 그에게 소심蕭諶을 죽이게 하면 궁궐 안의 병사들을 모두 우리가 쓸 수 있다. 군대를 지휘하여 상서성尙書省에 들어가서 소령蕭令(소란蕭鸞)의 목을 베는 데는 두 망나니의 힘이면 충분하다.”라고 하였는데注+① 蕭諶은 당시에 衛軍司馬로 衛尉卿을 겸하고 있어서 宿衛兵을 관장하였다. “都伯”은 형을 집행하는 사람이다.,
기무진지가 그 계책을 쓰지 않았다. 소란이 주봉숙을 죽일 때에 기무진지와 두문겸을 함께 잡아 죽였다.注+② 〈“并收殺之”는〉 아울러 綦母珍之와 杜文謙을 잡아 죽인 것을 말한다.
綱
[강綱] 북위北魏가 한현종韓顯宗을 중서시랑中書侍郎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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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한현종韓顯宗이 다음과 같이 상서上書하였다. “삼가 들으니, 여가輿駕(황제)가 금년 여름에 삼제三齊로 순행하지 않으시면 마땅히 중산中山에 행차하신다고 하니 누에치기와 보리농사가 한창 급한데 어찌 명령을 감당하겠습니까.
바라건대 일찍 북경北京(평성平城)에 돌아가셔서 여러 주州에서 행차에 사용할 물품을 장만하는 고통을 줄여주시고注+① 北京은 平城을 말한다. 張(장막)은 竹亮의 切이다., 낙양洛陽의 궁전宮殿에 있는 옛 기초는 모두 위魏명제明帝가 만든 것으로, 이전 시대에 이미 사치스럽다는 비난을 받았으니, 줄여서 만들어야 합니다.
북도北都(평성)의注+② 北都 역시 平城을 말한다. 北魏가 洛陽으로 천도를 하고 나서 平城을 北都로 삼았다. 부자들이 다투어 저택을 서로 자랑하니, 의당 수도를 옮기는 것을 이용하여 제도로 만들고, 도성의 길을 정비하여 넓히고, 도랑의 막힌 곳을 트이게 하여 편리하게 해야 합니다.
폐하께서 낙양洛陽으로 돌아오실 때에 거느리고 따르는 기병들을 간소하게 하셨습니다. 왕王은 궁궐 안에서도 경필警蹕을 시행하는데注+③ 從(따르다)과 騎(기병)는 모두 去聲이다. “闈闥”은 宮中의 문이다., 하물며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데 더 신중히 하지 않겠습니까.
해가 지고 나서야 식사를 하고 밤이 깊어서야 잠을 자는 것은 또 정신을 아끼고 성품을 수양하여 끝없는 복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注+④ 景은 햇빛이다. 昃은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것이다. 嗇은 아낌이다. 삼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팔짱을 낀 채 중요한 일만 주관하시면注+⑤ ≪老子道德經≫에 “德이 있는 자가 약속을 주관한다.” 하였다. 司는 주관한다는 뜻이다. 契는 약속이라는 뜻이다. 천하가 다스려질 것입니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그의 말을 제법 받아들였다. 한현종은 한기린韓麒麟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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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한현종韓顯宗이 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주군州郡에서 공거貢擧한 자들이 다만 수재秀才와 효렴孝廉이란 명성만 있고 실제가 없는데도 조정에서는 다만 가문의 명망만 살필 뿐, 다시 〈천거한 사람이나 천거받은 사람을〉 탄핵하거나 죄를 묻지 않습니다.注+① “貢察”은 秀才와 孝廉을 선발하여 조정에 천거하는 것을 말한다. “彈坐”는 그가 위반한 것을 탄핵하여 죄로 연좌시키는 것이다. 이와 같다면 따로 가문의 명망으로 추천하게 하면 될 것인데, 어찌하여 수재秀才와 효렴孝廉이란 명성을 빌려 씌우는 것입니까.
가문의 명망은 그의 부조父祖가 남긴 공렬功烈이니, 지금에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지금에 이익이 되는 것은 현재賢才일 뿐입니다. 만일 인재가 있다면 비록 소를 잡고 낚시질하고 노예가 되었더라도 성주聖主는 그를 신하로 삼는데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注+② 太公은 朝歌에서 소를 잡았고, 渭水 가에서 물고기를 낚았다. 또 紂王 때에는 箕子가 노예가 되었는데, 周나라 文王과 武王은 모두 예우하여 그들을 등용하였다. 만일 인재가 아니라면 비록 삼후三后의 맏아들이라고 해도 노예로 떨어졌습니다.注+③ 三后는 夏나라․商나라․周나라의 王을 말한다. “皁隷”는 비천한 사람이라는 뜻이니, 皁는 말을 맡아 기르는 사람을 뜻하고, 隸는 소속된 사람을 뜻한다.
의논하는 자가 혹 말하기를, ‘세상에 기이한 인재가 없으니, 가문의 명망으로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나, 이 역시 잘못입니다. 어찌 세상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 같은 사람이 없다고 마침내 재상宰相의 자리를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마땅히 비교하여 1촌寸이라도 길고 1수銖라도 무거운 사람을 먼저 등용하면 현재賢才가 버려지지 않게 될 것입니다.”注+④ 그 사람을 여러 사람과 비교하여 다소 1寸이라도 긴 것과, 1銖라도 무거운 것이 있으면 먼저 등용함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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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또 형벌刑罰의 요점은 명백하고 합당함에注+① 當(마땅하다)은 丁浪의 切이다. 있는 것이지, 무겁게 처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지금 안팎의 관리들이 당시의 명성을 구하려고 하여 다투어 아주 혹독하게 하는 것이 사사로움을 없애는 것이라 여겨 번갈아 서로 독려하다注+② 敦은 다그친다는 뜻이다. 厲는 엄하게 면려하는 것이다. 마침내 풍속이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구중궁궐 안에 살고 계시면서 백성을 갓난아이처럼 여기시지만, 모든 관청에서는 온갖 임무를 맡아 아래 사람을 마치 원수처럼 대합니다. 이는 요순堯舜과 같은 사람은 한 사람에 그치지만 걸주桀紂와 같은 사람은 수백에서 수천이니, 화기和氣가 이르지 못하는 것은 여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옛날에 주周나라가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였으나 오히려 〈풍豐을〉 종주宗周로 보존하였고, 후한後漢은 낙양洛陽으로 천도를 하였으나 〈장안長安에〉 경조윤京兆尹을 두었습니다.注+③ 周나라 成王이 洛邑에 살았으나 豐邑을 宗周로 삼았다. 後漢은 雒陽에 도읍을 정하고서 河南尹을 두었고, 長安에는 그대로 京兆尹을 두었으니, 모두 옛 도읍을 보존한 것이다. ≪춘추春秋≫의 뜻에 ‘읍邑에 종묘宗廟가 있으면 도都라고 한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물며 대경代京은 종묘宗廟와 능묘陵墓가 있는 곳이고 왕업王業의 터전인데 군국郡國과 똑같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의당 한결같이 고사故事에 따라 기畿(평성平城)에 경조윤京兆尹을 두어야 합니다.注+④ 北魏는 처음에 平城에 도읍을 정하고, 甸畿를 나누어 司州를 두었으며, 平城에 代尹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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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옛날에 사민四民이 따로 거주하게 한 것은 그들이 생업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고 뜻을 안정시키고자 한 것입니다.注+① 管仲이 齊나라 재상이 되어 士․農․工․商에게 각각 무리를 지어서 모여 거주하게 하였다. 관중이 말하기를 “四民은 섞어 살게 하지 말아야 한다. 섞어 살게 되면 그 말이 어지럽고 그 일이 뒤바뀌게 된다. 옛날 성왕께서 士를 거처하게 할 적에는 한가하며 조용한 곳에 나아가게 하고, 장인들을 거처하게 할 적에는 관청에 나아가게 하고, 상인들을 거처하게 할 적에는 시장에 나아가게 하고, 농민들을 거처하게 할 적에는 농토에 나아가게 하였다. 오래도록 편안하게 여겨 다른 일을 보고 옮겨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태조太祖(탁발규拓跋圭)는 나라를 세우고 나서 하루도 한가할 겨를이 없는데도 오히려 사족士族과 서족庶族을 구별하여 뒤섞여 살지 못하게 하고 공장工匠(장인)․기인伎人(기녀)․도屠(백정)․고沽(장사꾼)가 각각 거주하는 곳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금지하는 조치를 제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뒤섞이게 되었습니다.
지금 들으니 낙읍洛邑(낙양洛陽)에 백성들을 거주하게 하는 제도는 오로지 관위官位를 가지고 서로 배열하고, 족류族類를 나누지 않는다고 합니다. 관위官位는 일정함이 없어서 아침에는 영화로운 지위에 올랐다가도 저녁에 잃어 쇠하게 되니, 관원과 노예의 집이 머지않아 같은 곳에 있게 될 것입니다. 가령 한 마을 안에서 노래와 춤을 익히고,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익힐 경우 아이들 마음대로 가고자 하는 것을 따르게 한다면, 반드시 음악과 춤을 버리고 ≪시경≫과 ≪서경≫을 따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장과 기인의 집안으로 하여금 사인士人의 예의와 습속을 익히도록 하는 것은 백년百年이 되어도 이루기 어려울 것이나, 사인의 자식에게 공장과 기인의 모습을 본받으라고 하면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리니, 이는 풍속의 근원이기 때문에 살피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물며 지금 도읍을 천도한 초기에 모두가 빈 땅이니, 공장과 기인을 분별하는 것은 한 마디 말씀에 달려 있는데, 어찌하여 의심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하여 성대한 아름다움을 빼놓을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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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또 남인南人(남조南朝)이 옛날에 회북淮北을 점유했을 때 군현郡縣을 교치僑置하였는데注+① “僑置郡縣”은 예컨대 豫州의 경계가 汝陽에서 그치지만 譙․梁․陳․潁 等의 郡縣을 僑置하고, 또 靑州의 경계에 冀州의 여러 縣을 僑置한 것이 이러한 예이다., 지금까지 그대로 두고 고치지 않았으니, 명분과 실상을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의당 모두 개혁하여 작은 것은 합병하고 큰 것은 나누어 설치해야 합니다.
군주君主는 천하를 집으로 삼아야 하니, 사사로움이 있어서는 안 되는데 근래에 하사하시는 것이 걸핏하면 천의 단위로 헤아립니다. 만약 환鰥(홀아비)․과寡(과부)․고孤(고아)․독獨(자손이 없는 사람)에게 나누어준다면 구제할 곳이 진실로 많은데, 지금은 곧바로 친근한 신하들에게만 주시니, 아마도 ‘급한 사람을 구해주고 여유가 있는 사람을 더 도와주지는 않는다.’라고 한 경우가 아닌 듯합니다.”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훌륭하다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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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3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평성平城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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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평성平城에 이르러 신하들에게 천도의 이해利害에 대해서 다시 논의하게 하자, 연주자사燕州刺史목비穆羆가 말하기를注+① 北魏가 洛陽을 경영하여 洛陽을 司州를 삼고, 平城의 司州를 고쳐서 恒州로 삼았으며, 恒州의 東部를 나누어 燕州를 두어 昌平에 治所를 두었다. 穆羆은 穆壽의 손자이다. “지금 사방四方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으니, 천도하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또 정벌할 적에 말이 없으면 어떻게 이길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卜都澗瀍圖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마구간과 목장이 대代(평성平城)에 있으니, 어찌 말이 없는 것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상서尙書우과于果가注+② 于果는 于烈의 동생이다. 말하기를 “선제先帝 이후로 오랫동안 여기에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남쪽으로 옮기게 되니 많은 백성들이 마음으로 즐거워하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평양공平陽公탁발비拓跋丕가 말하기를 “천도는 큰일이기 때문에 복서卜筮로 점을 쳐서 물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옛날에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은 성현聖賢이기 때문에 살 곳을 점쳤다. 지금은 그런 사람이 없으니, 점을 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또 점은 의심스러운 일을 결정하기 위해 치는 것이니, 의심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점을 치겠는가. 황제黄帝가 점을 쳐서 거북 껍질을 태워 조兆(갈라진 틈새)가 없었는데도注+③ 거북 껍질을 태워 兆가 없는 것이 ‘焦’이다.천로天老가 말하기를, ‘길吉하다.’라고 하니, 황제가 그 말을 따랐다. 그렇다면 지인至人이 미연에 아는 것이 거북 껍질보다 자세한 것이다.
왕이 된 사람은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아 남쪽에 살기도 하고 혹은 북쪽에 살기도 하니, 어찌 일정함이 있겠는가. 짐朕의 먼 조상은 대대로 북쪽의 황량한 곳에 살다가 평문제平文帝(탁발울률拓跋鬱律) 때 처음으로 동목근산東木根山에 도읍을 정하셨고, 소성제昭成帝(탁발십익건拓跋什翼犍)이 다시 성락신성盛樂新城을 만드셨으며, 도무제道武帝(탁발규拓跋圭)는 평성平城으로 옮기셨다. 짐朕은 다행히 잔악한 이를 이겨내는 운수를 만났으니注+④ 屬은 만난다는 뜻이다., 무엇 때문에 홀로 옮기지 못하겠는가.”라고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마침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소자량蕭子良은 현명한 왕으로 평소에 충성과 신중함을 지켰으나 근심하다가 죽음을 맞는 일을 면하지 못했다. 그렇게 된 원인은 왕융이 급하게 부귀富貴를 구하였기 때문이니, 경박하고 조급한 선비를 어찌 가까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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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5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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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가 사신을 제齊나라에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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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북위北魏가 산기상시散騎常侍왕청석王清石을 보내어 제齊나라를 빙문할 적에 왕청석은 대대로 강남江南에서 벼슬하였기 때문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그에게 말하기를
“경卿은 남인南人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혐의하지 말고, 저들 중에 지식이 있는 사람이 그대를 만나려 하면 만나고 말하려 하면 말을 하시오. 모든 사신은 조화를 중시하니 번갈아가며 서로 과시하여 말과 얼굴에 드러내어 사명使命을 받드는 체통을 잃지 마시오.”注+① 使(사신 가다)는 䟽吏의 切이다. 將은 받든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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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가을 7월에 북위北魏가 송왕宋王유창劉昶을 도독오월초제군사都督吳越楚諸軍事로注+① 江南은 모두 春秋時代에 吳나라․越나라․楚나라 3국의 땅이었다. 삼아서 팽성彭城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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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북위北魏가 송왕宋王유창劉昶을 대장군大將軍으로 삼아서 팽성彭城을 진수하게 하고 왕숙王肅을 부장사府長史로 삼았다. 유창은 의리에 달려온 사람이나 옛 친구들을 돌봐주거나 받아들이지 못하여 끝내 성공하지 못하였다.注+① 義는 의리에 나아가는 무리이고 故는 舊人(옛 친구)이라고 한다. 宋나라 蒼梧王(劉昱)의 초기에 劉昶이 彭城을 진수하다가 팽성을 버리고 北魏로 달아났기 때문에 義에 달려온 자나 옛 친구들이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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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의 안정왕安定王탁발휴拓跋休가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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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졸卒하고 나서 빈殯을 할 때까지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세 차례 그의 집을 방문하였고注+① 臨은 임금이 신하의 喪에 갔다는 뜻이다. 臨(가다)은 본음대로 읽는다., 장사 지내는 날에는 교외까지 나가서 영구를 전송하고 마침내 통곡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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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 소란蕭鸞이 그 임금 소소업蕭昭業을 시해하고注+① 蕭昭業은 향년이 22세였다., 신안왕新安王소소문蕭昭文을 세우고는 스스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녹상서사錄尙書事가 되고 선성공宣城公에 봉하였다.
目
[목目] 소란蕭鸞이 서용구徐龍駒와 주봉숙周奉叔을 죽이고 나서 외부에서 궁으로 들어온 비구니가 꽤 이상한 말을 전하였는데注+① “異語”는 외부에서 사람들의 말이 많았음을 말한 것이니, 〈“頗傳異語”는〉 蕭鸞 등이 서로 함께 逆謀를 도모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중서령中書令하윤何胤은 하황후何皇后의 종숙從叔으로 제주齊主소소업蕭召業에게 총애를 받았기에 하윤에게 전성殿省(대궐)에서 숙직을 하게 하여 소란을 죽일 것을 도모하였다.
하윤이 감당하지 못하여 망설이다가 간언하여 설득하니, 제주齊主가 뜻을 다시 거두고는 마침내 소란을 서주西州로 내보내고서 궁중에서 칙령으로 자기가 정사를 처리하여 다시 소란에게 자문하여 지시를 받지 않을 것을 꾀하였다.
目
[목目] 이때에 소심蕭諶과 소탄지蕭坦之가 병권兵權을 장악하고 복야僕射왕안王晏이 상서尙書의 일을 총괄하였다. 소란蕭鸞이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로 세울 계획을 왕안王晏과 단양윤丹楊尹서효사徐孝嗣에게 알리자, 모두 소란을 따랐다.
표기녹사驃騎錄事악예樂豫가 서효사에게 말하기를 “밖에서 전하는 말이 자자하니 마치 이윤伊尹과 주공周公의 일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그대는 무제武帝의 특별한 은혜를 받았고 부탁을 받은 것이 무거우니 이 거사를 남들과 같이 할 수 없을 듯합니다. 사람들이 저공褚公(저연褚淵)을 비웃었던 일에 아직까지 이가 시립니다.”注+① 褚公은 褚淵을 말한다. 웃으면 이가 드러났기 때문에 이가 시리다고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서효사는 따를 수 없었다.
직합장군直閤將軍조도강曹道剛이 외부에 변고가 있으리라 의심하여 은밀하게 조사하였지만 역모의 정황을 찾아내지 못했다.注+② 曹道剛이 蕭鸞 등의 역모를 은밀히 조사하고 있었으나 아직 찾아내지 못하였음을 말한 것이다.소란蕭鸞이 사태의 변화를 염려하여 소탄지蕭坦之에게 알리자 소탄지가 달려가서 소심蕭諶에게 말하기를
“천자를 폐위시키는 일은 옛날부터 큰일입니다. 듣자 하니 조도강 등이 점점 더 시기하고 의심하고 있다고 하는데, 위위衛尉(소심)가 내일 만약 거사를 일으키지 않으면 다시 도모할 수가 없습니다. 아우에게는 백 세의 어머니가 계시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재앙과 실패를 앉아서 기다리겠습니까. 바로 응당 다른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라고 하니, 소심이 두렵고 황급하여 그의 말을 따랐다.
目
[목目] 소란蕭鸞이 먼저 소심蕭諶을 궁에 들여보내 조도강曹道剛과 주륭지朱隆之를 만나 모두 죽이게 하고는 소란이 병사를 이끌고 운룡문雲龍門으로 들어갔는데, 제주齊主(소소업蕭昭業)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도 여전히 손수 칙령을 써서 소심을 불렀다.
조금 있다가 소심이 병사를 이끌고 수창합壽昌閤으로 들어오자, 제주齊主가 검을 뽑아서 자신을 찔렀으나 깊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서 수레를 타고 나가니, 서롱西弄에注+① 이는 延德殿의 西弄이다. 弄은 큰 집이며 담이니, 또한 㢅으로 쓴다. 이르러 황제를 시해하였다.
시신을 수레에 싣고 나와서 서용구徐龍駒의 집에 빈소를 마련하고 왕의 예禮로 장사 지냈으며, 여러 폐행嬖幸들은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태후太后의 명령으로 폐제廢帝소소업蕭昭業을 추봉追封하여 울림왕欝林王으로 삼고 신안왕新安王소소문蕭昭文을注+② 蕭昭文은 蕭昭業의 동생이다. 맞이하여 황제로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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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부상서吏部尙書사륜謝淪이 손님과 바둑을 두고 있다가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대국을 마치고 돌아와서 누워서 끝내 밖에 일을 묻지 않았다. 대장경大匠卿우종虞悰이注+① 大匠卿은 바로 漢나라 將作大匠의 관직이다. 虞悰은 虞潭의 曾孫이다. 몰래 탄식하기를 “왕안王晏과 서효사徐孝嗣가 마침내 융복戎服을 입고注+② 王徐는 王晏과 徐孝嗣이다. “縛袴”는 戎服(군복)이다.천자天子를 폐위하였으니, 천하에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궁궐로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았을 때에 국자좨주國子祭酒강효江斆는 운룡문雲龍門에 이르러 약기운이 퍼졌다는 핑계를 대고 수레 안에서 토하고 돌아갔다. 소란蕭鸞이 중산대부中散大夫손겸孫謙을 끌어들여 심복으로 삼아서 위위衛尉를 겸하도록 하고 그에게 갑옷을 입히고 갑사甲士 1백 명을 주니, 손겸은 소란과 함께 하지 않고자 하여 곧바로 갑사甲士를 해산하였는데, 소란 역시 손겸에게 죄를 주지 않았다.
신안왕新安王이 즉위하니 나이가 15세였다. 서창후西昌侯 소란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녹상서사錄尙書事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고 선성군공宣城郡公에 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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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가 시안왕始安王소요광蕭遥光을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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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요광蕭遥光은 소란蕭鸞의 형의 아들이다. 소란이 다른 뜻을 품었을 때에 소요광이 성공하도록 그를 도와주었다. 소란이 소요광을 친당親黨으로 키우려 하였기 때문에 그를 남군태수南郡太守로 삼았지만 〈건강建康에 남겨두고〉 남군南郡에 부임시키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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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9월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백관百官의 고과를 매겨 승진시키거나 좌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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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예전에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조서를 내려 “3년 동안의 고과를 매겨 즉시 승진과 좌천을 시행하되, 각각 해당注+① 當(해당하다)은 去聲이다.조曹에 명을 내려 관원들의 우열優劣을 매겨 3등급(상上․중中․하下)으로 나누고注+② 〈“其上下二等仍分爲三”은〉 上等․下等을 각각 또 나누어 3등급을 만든다는 뜻이다. 그중 상등上等과 하등下等 2등급은 각기 따라서 다시 3등급으로 나누어 6품 이하의 관원은 상서尙書가 다시注+③ 重(거듭)은 直用의 切이다. 심사하고 5품 이상의 관원은 짐朕이 공경公卿들과 논의하겠다. 상상上上에 해당하는 사람은 승진시키고 하하下下에 해당하는 사람은 좌천시키며 중中에 해당하는 사람은 본래의 임무를 지키도록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위주魏主가 직접 조당朝堂에 임석하여 백관百官을 승진시키고 좌천시킬 때에 이르기를 “상서尙書들 중에 임금에게 옳은 것을 권장하고 나쁜 것을 바로잡은 적이 없고 무능한 자를 좌천시킨 적이 없는 자가 있고, 녹상서사錄尙書事광릉왕廣陵王탁발우拓跋羽는 정사에 부지런히 힘쓴다는 명성은 없고 아부하는 자들과 어울린다는 행적만 있고, 상서령尙書令․복야僕射․좌승左丞․우승右丞이 서로 〈의義로써〉 인도하지 못하여 차등을 두어 파출罷黜하거나 녹봉을 줄였고, 임성왕任城王탁발징拓跋澄은 마음이 교만한 것으로 소보少保에서 해직하였고, 상서尙書우과于果는 일을 부지런히 하지 않은 것으로 녹봉을 깎는다.”고 하였으며, 나머지는 모두 직접 대면하여 그들의 과실을 낱낱이 지적하여 처벌을 시행하였다.
또 위주魏主가 육예陸叡에게 말하기를 “사람들이 ‘북방 풍속이 질박하고 노둔하니, 어찌 책을 알겠는가.’라고 하지만, 지금 책을 아는 자가 매우 많으니, 다만 배움과 배우지 않음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짐朕이 백관百官을 정돈하고 예악禮樂을 일으키는 것은 그 뜻이 진실로 풍속을 옮기고 변화시켜 경卿등의 자손들이 아름다운 풍속에 점점 물들어 견문이 넓어지도록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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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 선성공宣城公소란蕭鸞이 파양왕鄱陽王소장蕭鏘 등 7명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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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선성공宣城公소란蕭鸞의 권세權勢가 더욱 무거워지자 조정 안팎에서 모두 그가 불충한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파양왕鄱陽王소장蕭鏘이 소란에게 갈 때마다 소란이 말을 하다가 국가(황제)에 미치면 눈물을 흘리며 말하니, 소장은 이로 인해 그를 믿었다.
궁궐注+① 宮臺는 宮省(궁궐)이란 말과 같다. 사람들이 모두 소장에게 뜻을 두었는데, 제국감制局監注+② 李延壽의 ≪南史≫ 〈恩倖傳〉에 “武官인 制局監․外監은 모두 무기와 兵役을 관장한다.”라고 하였다.사찬謝粲이 소장과 수왕隨王소자륭蕭子隆에게 유세하기를 “두 왕께서 다만 천자天子를 모시고 조당朝堂에 나오셔서 좌우에서 천자를 보필하고 호령한다면 저희들이 성문을 닫고 무기를 들고 장강 상류로 올라갈 것이니 그렇게 하면 누가 감히 함께하지 않겠습니까. 동성東城 사람들이 바로 소령蕭令(소란)을 붙잡아 보내올 것입니다.”注+③ 上(올라가다)은 時掌의 切이니, 아래의 ‘西上’의 上도 동일한 뜻이다. 仗은 兵器이다. 東城은 東府城을 말한다. 살펴보건대 蕭子顯의 ≪南齊書≫에 “世祖가 遺詔를 내려 蕭鸞을 侍中 尙書令으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이때에 이미 錄尙書事에 올랐다. 謝粲이 蕭令이라고 말한 것은 舊官을 일컬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자륭이 계획을 결정하려고 하자 소장이 마음으로 오히려 기뻐하여 수레를 준비하라고 하여 궁으로 들어가려다가 다시 돌아와 어머니와 이별하면서 날이 저물어 출발하지 못하였다. 소장의 전첨典籖이 이 사실을 알고 소란에게 고발하였는데 소란이 병사를 보내어 소장과 소자륭 및 사찬 등을 죽였다.
이때에 세조世祖(소색蕭賾)의注+④ 太祖는 마땅히 世祖가 되어야 한다. 여러 아들 중에 소자륭이 가장 장대하고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소란이 더욱 그를 꺼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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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강주자사江州刺史진안왕晉安王소자무蕭子懋가 두 왕이 죽었다는 것을 듣고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여 방합防閤육초지陸超之에게 말하기를注+① 蕭子懋는 世祖의 아들이다. 여러 왕들에게 防閤을 두었는데, 용감하고 지략이 뛰어난 선비를 방합으로 삼아서 齋閤(제후의 궁실[后宮] 옆문)을 수비하게 하였다. “일이 이루어지면 종묘宗廟가 편안하게 될 것이고, 이루지 못하더라도 오히려 의귀義鬼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동승혜董僧慧가 말하기를 “이 강주江州가 비록 작지만, 송宋효무제孝武帝가 과거에 이곳에서 거병하였습니다.注+② 宋 孝武帝가 江州에서 병사를 일으켜 元凶 劉劭를 죽인 것을 말한다. 만약 병사를 일으켜 궁궐을 향하여 울림왕欝林王(소소업蕭昭業)을 시해한 죄罪를 청하면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자무의 모친 완씨阮氏가 건강建康에 있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사람을 보내서 맞이하였는데, 완씨가 동모형同母兄우요지于謠之에게注+③ “謠之”가 ≪資治通鑑≫에는 瑤之로 되어 있다. 보고하여 계획을 세웠는데, 우요지가 달려가서 소란蕭鸞에게 고하자 소란이 군주軍主배숙업裴叔業과 우요지를 보내서 먼저 심양尋陽을 습격하게 하였다.
소자무의 부곡部曲이 대부분 옹주雍州 사람이어서 모두 용감히 떨쳐 일어나 싸우기를 바라니注+④ 蕭子懋는 雍州에서 옮겨와 江州를 다스렸기 때문에 部曲이 대부분 雍州 사람이었다. 勇은 踴(뛰다)이 되어야 한다., 배숙업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우요지를 보내어 소자무에게 말하기를 “도읍으로 돌아가면 산관散官은 될 것이고 부귀富貴를 잃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자무가 이미 출병을 하지 않자, 군사의 사기가 점차 저상되었다.
참군參軍우림지于琳之가注+⑤ 于琳之는 于謠之의 형이다. 배숙업에게 소자무를 붙잡으라고 하니, 배숙업이 우림지를 따라 장사將士들을 보내어 성에 들어가게 하여 칼을 뽑아들고 재실로 들어가자, 소자무가 꾸짖기를 “소인배들아, 어찌 차마 이런 행동을 하는가.”라고 하니, 우림지가 소매로 얼굴을 가리고 사람을 시켜 그를 죽이게 하였다.
왕현막王玄邈이 동승혜를 잡아 죽이려고 하자, 동승혜가 말하기를 “진안왕晉安王이 의병을 일으켰을 때에 내가 실제로 모의에 참여하였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지만, 〈진안왕의〉 대렴大斂이 끝나고 나면 물러가서 끓는 솥에 들어가기를 원한다.”라고 하니, 왕현막이 그를 의롭게 여겨서 소란에게 아뢰어 죽음을 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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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자무蕭子懋의 아들 소소기蕭昭基가 아홉 살이었기 때문에 2촌의 네모난 명주에 편지를 써서 자기의 소식을 나열하여 〈소자무에게 보냈는데〉 동승혜董僧慧가 그 편지를 보고 말하기를 “낭군郎君(소소기)의 편지로구나.”라고 하고, 애통해하며 졸卒하였다.
우림지于琳之가 육초지陸超之에게 도망치라고 권하자 육초지가 말하기를 “사람은 모두 죽기 마련이니, 이는 두려워할 만한 것이 못 된다. 내가 만약 도망을 치면 진안왕晉安王의 식솔들을 고독하게 할 뿐만 아니라, 또한 전횡田横의 문객門客들에게 웃음거리가 될까 두렵다.”라고 하였다.注+① 田橫 門客의 일은 漢 高帝 5년(B.C.202)에 보인다. 陸超之가 죽음으로 지켰기 때문에 이 말을 가지고 于琳之를 부끄럽게 만든 것이다.
왕현막王玄邈 등이 옥에 가두고 도성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육초지가 단정히 앉아서 명령을 기다렸다. 육초지의 문생門生이 육초지를 죽이면 상을 받을 것이라 생각하여 몰래 뒤에서 그의 목을 베니, 목은 떨어졌으나 몸은 엎어지지 않았다.
왕현막이 후하게 빈렴殯斂을 더해주자 문생 역시 관棺을 들어서 도와주었는데, 관棺이 떨어져서 그의 머리를 눌러 목이 부러져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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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란蕭鸞이 장군將軍왕광지王廣之를 보내서 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안륙왕安陸王소자경蕭子敬을注+① 蕭子敬은 世祖(蕭賾)의 아들이다. 습격하여 목을 베었다. 또 서현경徐玄慶에게 서쪽으로 장강 상류로 올라가서 형주자사荆州刺史임해왕臨海王소소수蕭昭秀를注+② 蕭昭秀는 蕭昭業의 동생이다. 해치게 하였는데, 행사行事하창우何昌㝢가注+③ 何昌㝢는 何尙之의 동생의 아들이다. 말하기를
“나는 조정(황제)에 부탁을注+④ “意寄”는 마음을 기울여 그를 부탁한 것을 말한다. 받았기에 외번外藩(소소수蕭昭秀)를 보좌한 것이다. 전하께서 아직까지 잘못한 일이 없으니, 어찌 곧바로 전하는 내용을 받아들이겠는가. 만약 조정에서 반드시 전하를 필요로 한다면 마땅히 직접 보고하여 아뢰어서 다시 교지를 받은 뒤에 시행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소수가 이로 인해 건강建康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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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란蕭鸞이 공수지孔琇之에게 행영주사行郢州事를 삼아서 영주자사郢州刺史진희왕晉熙王소구蕭銶를 죽이게 하였는데注+① 孔琇之는 孔靖의 손자이다. 蕭銶는 太祖(蕭道成)의 아들이다., 공수지가 사양하여 허락하지 않고, 마침내 먹지 않다가 죽었다.
배숙업裴叔業이 상주湘州로 나아가 남평왕南平王소예蕭銳를注+② 蕭銳는 太祖의 아들이다. 죽이고자 하였다. 방합防閤주백옥周伯玉이 무리들에게 크게 말하기를 “이는 천자天子의 뜻이 아니다. 지금 배숙업의 목을 베고 병사를 일으켜 사직社稷을 바로잡으면 누가 감히 따르지 않겠는가.”라고 하니, 전첨典籖이 좌우에 있는 사람을 꾸짖어 그의 목을 베었다. 마침내 소예를 죽이고 또 소구와 남예주자사南豫州刺史의도왕宜都王소갱蕭鏗을注+③ 蕭鏗은 太祖의 아들이다.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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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겨울 10월에 제齊나라 선성공宣城公소란蕭鸞이 스스로 태부太傅가 되어서 양주목揚州牧이 되고, 작위爵位를 높여 왕王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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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선성공宣城公소란蕭鸞이 대통大統을 계승하려고 도모할 적에 명사들을 많이 끌어들여서 계책을 세우는데 참여시켰다. 시중侍中사비謝朏가 마음으로 원하지 않아 마침내 오흥태수吳興太守로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을 하였고,
오흥군吳興郡에 부임해서는 술을 몇 말을 마련하여 자신의 동생 이부상서吏部尙書사약謝瀹에게 보내면서 말하기를 “양껏 이것을 마시도록 하고 인사人事에는 관여하지 말거라.”라고 하였다.
라고 하니, 두 사씨謝氏 형제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고관으로 어깨를 나란히 하여 영화로운 녹봉을 편안하게 누리면서 위태로운 상황을 미리 알지 못했으니, 신하가 되어서 이와 같으면 충忠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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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란蕭鸞이 비록 정사를 독단하였으나 사람들이 마음으로 복종하지 않았는데 자신의 어깨뼈에注+① 胛(어깨뼈)은 음이 甲이다. 어깨와 등의 사이를 胛이라고 한다.적赤자가 새겨져 있다고 하여 왕홍범王洪範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는 임금의 상이라고 하니, 경卿은 누설하지 말기를 바란다.”라고 하였다.
왕홍범이 말하기를 “공公의 몸에 임금의 상이 있으니, 어떻게 숨길 수 있겠습니까. 마땅히 전해서 말을 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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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 선성왕宣城王소란蕭鸞이 형양왕衡陽王소균蕭鈞 등 4명을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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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계양왕桂陽王소삭蕭鑠이 파양왕鄱陽王소장蕭鏘과 명예를 나란히 하여 소장은 문장文章을 좋아하고, 소삭은
소장이 죽고 나자 소삭이 스스로 편안하지 못해서 동부東府에 이르러 소란蕭鸞을 만나보고, 돌아와서는 좌우左右에게 말하기를 “지난번에 녹공錄公이注+① 蕭鸞이 太傅 錄尙書事이고 太傅는 上公이기 때문에 錄公이라 일컬은 것이다. 나를 접견할 적에 은근함이 그치지 않았는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있으니 나를 죽이려 할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날 저녁에 소삭이 해를 당하였다.
강하왕江夏王소봉蕭鋒이注+② 蕭鋒은 太祖 아들이다. 재주와 행실이 있었는데, 소란이 일찍이 그와 함께 말하기를 “소요광蕭遙光은 일을 맡길 만한 재주와 능력이 있다.”라고 하자, 소봉이 말하기를 “소요광이 전하殿下를 대하는 행동은 마치 전하殿下가 고황高皇(고제高帝)를 대하던 행동과 같습니다. 종묘宗廟를 지키고 사직社稷을 편안히 하는 일에 실로 맡길 일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소란이 실색失色을 하였다.
소란이 여러 왕을 죽일 때에 소봉이 소란에게 편지를 보내어 꾸짖으니, 소란이 깊이 꺼려하여 소봉에게 태묘太廟의 사궁祠宮을注+③ 祠官은 祭事를 행하게 함이다. 겸하게 하고서 밤에 병사를 보내서 소봉을 체포하게 하였다. 소봉이 몇 사람을 맨손으로 쳐서 모두 땅에 거꾸러뜨리고 난 뒤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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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란蕭鸞이 여법량茹法亮을 보내어 파릉왕巴陵王소자륜蕭子倫을注+① 蕭子倫은 世祖(蕭賾)의 아들이다. 죽이게 하였는데, 소자륜은 성품이 영명英明하고 과감하고 당시에 낭야琅邪에 진무하여 수비 병사가 있었다.注+② 晉나라가 南琅邪郡을 江乘 蒲洲 위에 두었는데, 齊나라가 治所를 白下에 옮겨서 북쪽으로 長江 가에 접하였기에 수비병을 두었다.
소란은 소자륜이 죽으려 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전첨典籖화백무華伯茂에게 묻자, 화백무이 말하기를 “지금 만약 병사로 그를 잡으면 즉시 해결하지 못할까 우려되지만, 만약 저에게 그 일을 맡기면 장부 한 명의 힘을 들이면 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자신이 짐독酖毒을 가지고 소자륜을 핍박하자 소자륜이 의관衣冠을 바르게 하고 나와 조서를 받고, 여법량에게注+③ 茹法亮이 世祖를 섬겼는데, 맡은 실권이 매우 중하였다. 말하기를 “선제先帝(소도성蕭道成)께서 옛날에 유씨劉氏를 멸망시켰으니, 오늘날 이치도 진실로 그러한 것이다. 그대는 우리 집안의 구인舊人이었는데, 지금 이러한 사명使命을注+④ 使(사신)는 疏吏의 切이다. 띠고 왔으니, 마땅히 부득이 한 상황에서 나온 일이리라. 이 술잔은 주거니 받거니 하는 잔이 아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머리를 들어 짐독鴆毒을 마시고注+⑤ “仰之”는 머리를 들고 鴆毒을 마신 것이다. 죽었는데, 당시 나이가 16세였다. 여법량과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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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예전에 제왕諸王들이 진鎭에 나갈 때에는 모두 전첨典籖을 두어서 주수主帥(제왕諸王)의 한 방면의 일을 모두 전첨에게 위임하였다. 당시에 조정에 들어와 일을 아뢸 때 자사刺史의 선행과 악행은 오로지 그의 입에 달려있었으므로 몸을 굽혀 그를 받들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에 전첨의 위엄이 주부州部에注+① 州部는 한 州의 部內를 말한다. 퍼져 크게 간사한 이익을 꾀하게 되었다.
무릉왕武陵王소엽蕭曄이 강주자사江州刺史가 되어 성품이 강하고 정직하여 청탁을 할 수 없었다. 전첨 조악지趙渥之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지금 경성京城에 가서 자사刺史를 바꿀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조악지가 세조世祖(소색蕭賾)를 뵐 적에 몹시 소엽을 헐뜯자, 소엽이 마침내 면직되어 경성京城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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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남해왕南海王소자한蕭子罕이注+① 蕭子罕은 世祖의 아들이다.낭야琅邪를 지키면서 잠시 동당東堂에서 놀려고 하였는데, 전첨典籖강수姜秀가 허락하지 않았다. 소자한이 눈물을 흘리면서 모친에게 말하기를 “제가 다섯 걸음을 옮기려고 해도 할 수가 없으니, 죄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영명永明(490) 파동巴東의 난리 때에 세조世祖(소색蕭賾)가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소자향蕭子響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켰구나.”라고 하였다. 대승정戴僧靜이 말하기를 “여러 왕들은 본래 모두 모반을 일으키고자 하니, 어찌 파동왕巴東王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세조가 그 까닭을 묻자, 대답하기를 “황실의 왕王들은注+② “天王”은 황실의 여러 王을 말한다. 죄가 없으니, 한때 감금을 당하여 한 잔의 미음을 먹는 것도 첨수籖帥(전첨典籤)에게 물어서 해야 하고, 첨수籖帥가 없으면 하루 종일 갈증을 참아야 했습니다. 여러 주州에서는 첨수籖帥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자사刺史가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어찌 모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란蕭鸞이 여러 왕을 죽일 때에 모두 전첨典籖에게 명령하여 죽이게 하니, 거부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공규孔珪가 그 소식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만약 첨수籖帥를 세우지 않았다면 이런 지경에는 이르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란도 전첨의 폐단을 잘 알아서 조서를 내리기를 “지금부터 여러 주州에 일이 있으면 은밀하게 조정에 아뢰어 보고하고 다시는 전첨을 보내 도성에 들어오게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이로부터 전첨의 임무가 점점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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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자현蕭子顯이注+① 蕭子顯은 梁나라 吏部尙書이며, 바로 齊나라 豫章王 蕭嶷의 아들이니, ≪南齊書≫ 60권을 찬술하였다.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제왕帝王의 아들들은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이른 나이에 안방을 나와서는 늦게는 방악方岳(제후諸侯)을 맡는다. 교만함을 막으며 방탕함을 없애는 일이 여러 대를 내려온 일정한 법이었으므로, 황제의 측근을 등용하여
처한 지위가 비록 중요하였지만 자기의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였고, 위엄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은혜는 아랫사람에게 미치지 않다가 갑자기 조정에 간난艱難이 한꺼번에 닥쳐올 경우에 제후왕이 자신의 지위를 벗어놓고 조정의 위태로움을 돕기를 바란들 어찌 가능하겠는가.注+② “釋位”는 그 지위를 버려두고 가는 것이다. ≪春秋左氏傳≫ 昭公 26년에 “諸侯 자리를 버려두고 와서 王의 정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하였다. 註에 “間은 참여함과 같다. 그 지위를 버리고서 왕의 정사에 참여하여 다스리는 것이다.” 하였다. 이는 송씨宋氏가 남긴 풍조가 제齊나라에 이르러 더욱 폐단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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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평성平城에서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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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북위北魏(탁발굉拓跋宏)가 태위太尉동양왕東陽王탁발비拓跋丕를 태부太傅녹상서사錄尙書事로 삼아 평성平城에 유수留守하게 하고, 위주魏主가 친히 태묘太廟에 고유하고 고양왕高陽王탁발옹拓跋雍과 우렬于烈에게 시켜서 신주神主를 받들어 낙양洛陽에 옮기도록 하고는 마침내 평성平城을 출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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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 선성왕宣城王소란蕭鸞이 그 임금 소소문蕭昭文을 폐하여 해릉왕海陵王으로 삼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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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제주齊主소소문蕭昭文이 황제의 지위에 있을 적에 행동과 음식을 모두 선성왕宣城王소란蕭鸞에게 물은 뒤에 거행하였다. 이때에 이르러서 소란이 황태후皇太后의注+① 皇太后는 바로 文惠太子妃 王氏이다. 명으로 소소문을 폐위하여 해릉왕海陵王을 삼고 스스로 황제에 즉위하였다. 그리고 왕경칙王敬則을 대사마大司馬로 삼고 진현달陳顯達로 태위太尉를 삼았다.
상서尙書우종虞悰이 병을 핑계 대고 모시는 자리에 참여하지 않으니, 제주齊主(소란)가 그를 좌명佐命 공신에 참여시키기 위해 왕안王晏을 시켜 그를 깨우치게 하자, 우종이 말하기를 “주상主上은 성스러우며 밝고 공경公卿들이 힘을 다하는데, 어찌 늙은이를 데려다 나라를 새롭게 하는 일을 돕게 하려고 하십니까.注+② ≪詩經≫ 〈大雅 文王〉에 “그 명이 오직 새롭다.” 하였다. 감히 명령을 듣지 못하겠습니다.”라고 하고, 이어서 통곡慟哭을 하였는데,
조정에서 의논하여 그를 규탄하려고 하였다. 서효사徐孝嗣가 말하기를 “이것 역시 옛날부터 내려온 곧은 기풍입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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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가 주목州牧․수령守令이 공물을 올리는 것을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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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조서를 내리기를 “외번外藩의 주목州牧․수령守令이 조정에 올리는 공물이 그 토산품이 아니면 모두 금지하라.”라고 하였다.注+① ≪書經≫ 〈夏書 禹貢〉 小序에 “토양에 맡게 공물을 내게 했다.” 하였다. 孔安國의 注에 “그 토양의 마땅함에 맞게 그 貢稅(賦稅)의 법을 정하였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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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가 만인蠻人이 제齊나라 국경을 침략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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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조서를 내리기를 “변경의 만인蠻人이 남쪽(제齊나라) 땅을 침략하는 일이 많아져 부자父子가 서로 떨어지고 부부가 헤어졌다. 짐朕이 바야흐로 적을 소탕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백성들을 자식처럼 기르려 하는데, 만약 이와 같다면 남인南人(제齊나라 사람들)이 조정(황제)의 은덕을 어찌 알겠느냐.注+① 江南 사람이 장차 北魏 朝廷의 德을 알지 못할 것을 말한 것이다.만민蠻民이 침범하여 포악하게 굴지 않도록 금지하라.”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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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1월에 제齊나라가 시안왕始安王소요광蕭遙光을 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고, 문희공聞喜公소요흔蕭遙欣을注+① 蕭遙欣은 蕭遙光의 동생이다.형주자사荆州刺史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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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齊나라가 황자皇子소보권蕭寳卷을 세워 태자太子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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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낙양洛陽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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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가 하양河陽에 목장牧場을 설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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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명령하여 장군將軍우문복宇文福으로 목장牧場을 순시하게 하였다. 우문복이 표문表文을 올려 목지牧地가 석제石濟의 서쪽에서 하내河內의 동쪽까지이고 황하와의 거리가 10리라고 하였다.注+① 行(순시하다)은 去聲이다. 牧地는 세로는 石濟의 서쪽에서 河內의 동쪽이고, 가로는 황하와 거리가 10리이다.위주魏主가 자신이 대代(평성)에서 잡축雜畜을 옮겨와 그 땅에 두고 우문복을 시켜서 관장하도록 하니, 가축이 손실되지 않아서 그를 사위감司衛監으로 삼았다.
예전에 세조世祖(태무제太武帝)가 통만統萬과 진秦․양涼을 평정하고 하서河西에 물과 풀이 풍성하고 좋다고 여겨 목지牧地를 만들었는데注+② 河陽의 牧場은 바로 宇文福이 감독한 牧地이다., 가축이 매우 번식蕃息하여 말이 200여만 필匹이고 낙타가 그 절반이고, 우양牛羊은 셀 수가 없었다.
고조高祖(탁발굉拓跋宏) 때에 와서 하양河陽에 목장牧場을 만들어서 항상 융마戎馬 10만 필을 기르게 하였다. 해마다 하서河西에서 병주并州로 옮겨 방목하고 조금씩 다시 남쪽으로 옮겨서 점차 수질水質과 토질土質에 익숙하게 하여 죽거나 상하지 않도록 하니 하서의 목장이 더욱 번성하였다.
명제明帝정광正光(520~524)注+③ 正光은 北魏 孝文帝의 손자 明帝의 年號이다. 이후에는 모두 구도冦盜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남은 것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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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제주齊主소란蕭鸞이 해릉왕海陵王소소문蕭昭文을 시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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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소란蕭鸞은 해릉왕海陵王이 질병이 있다고 거짓으로 말하고 자주 어사御師(황실 의원)를注+① 御師는 醫師이다. 황제를 공양하는 것이기 때문에 御師라고 말한다. 보내 자세히 살피도록 하였는데, 이를 통하여 그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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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북위北魏가 영주자사郢州刺史위진韋珍에게 곡식과 비단을 내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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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진韋珍이 영주郢州에 있을 때에 명성과 공적이 있었는데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준마駿馬․곡식․비단을 내려주자 위진이 경내境内에 고아와 가난한 자를 모아서 그들에게 나누어주고 말하기를 “천자天子께서 나에게 경卿들을 편안하게 안무하라고 하여 이 때문에 곡식과 비단을 내려주시니, 내가 어찌 감히 홀로 이것을 소유하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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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12월에 북위北魏가 호복胡服을 금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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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옛날 풍속을 바꾸고자 하여 조서를 내려서 백성들에게 호복胡服을 금지시키니 국인國人들이注+① 國人은 北魏와 함께 北荒에서 같이 일어난 子孫이다. 기뻐하지 않았다. 산기상시散騎常侍유방劉芳注+② 劉芳은 劉纘의 族弟이다., 황문시랑黄門侍郎곽조郭祚가 모두 문학文學으로 친근한 예우를 받으니, 대신大臣귀척貴戚들이 모두 불평하였다.
황제가 육개陸凱를注+③ 陸凱는 陸馛의 아들이다. 시켜서 사사로이 그들을 깨우치며 말하기를 “지존至尊은 다만 전세前世의 법식法式을 찾아 묻고자 할 뿐이니, 끝내 저들을 친하게 대하고 그대들을 멀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니, 여라 사람의 마음이 그제야 조금 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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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제齊나라를 정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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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는 제주齊主(소란蕭鸞)가 스스로 황제에 즉위한 일로 인해 크게 군사를 일으켜 제齊나라를 정벌하려고 하니, 마침 변장邊將이 제齊나라 옹주자사雍州刺史조호曹虎가 사자를 보내 항복을 요청하였다고 말하였다.
마침내 제장諸將들을 나누어 보내 병사를 출동시켜 맞이하게 하고, 상서尙書노연盧淵으로 양양襄陽의 선봉 부대를 감독하게 하였는데, 노연이 사양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노연이 말하기를 “조호曹虎가 주방周魴처럼 속일까 두려울 뿐입니다.”注+① 周魴은 三國時代 吳나라 鄱陽太守이다. 거짓으로 郡을 가지고 魏나라에 항복하였는데, 魏나라 揚州牧 曹休가 기병을 거느리고 그에게 호응하니, 마침내 吳나라에게 패배를 당하였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제齊나라를 정벌하려고 공경公卿을 불러들여 의논하였는데, 진남장군鎭南將軍이충李沖이 말하기를 “신臣 등은 천도遷都한 초창기이기에 사람들이 조금 편안해지는 것을 생각하고, 〈조호曹虎가〉 내응하려는 일도 아직 살피지 못하였으니, 가볍게 움직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주魏主가 말하기를 “항복하려는注+② 降(항복하다)은 胡江의 切이다.조호曹虎의 허실虛實은 진실로 알 수 없지만, 만약 거짓이라면 짐朕이 회전淮甸(회수淮水 유역)을 순행하여 위로하고, 백성들의 질고疾苦를 물어서 저들에게 군덕君德이 있는 곳을 알게 하여
이 있도록 하고, 만약 그것이 실제라면 지금 맞이하지 못하면 틈을 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귀의하려는 마음을 저버려서 짐朕의 큰 계책이 실패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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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임성왕任城王탁발징拓跋澄이 말하기를 “조호曹虎가 인질을 보내지 않고, 사신도 다시 오지 않았으니, 속임수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새로 옮겨온 백성들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애의 손을 잡고서 거처에는 서까래 하나 걸친 방이 없고, 식량은 한 섬이나注+① 甔(섬)은 儋으로 통용하여 쓴다. 한 석의 저축도 없습니다.
겨울이 다 끝나가고 봄 농사가 시작되려 하는데 그들을 내몰아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게 해서 울면서 시퍼런 칼날에 맞서게 한다면 아마도 앞에서 노래하고 뒤에서 춤추는 인의仁義의 군사가 아닐 것입니다.注+② 武王이 紂王을 정벌하자 앞에서 노래하고 뒤에서 춤을 추었다.
또 여러 군대가 이미 진군하였으니, 번樊과 면沔을 평정하기를 기다린 뒤에 형세에 따라 출동해도 어찌 늦은 일이겠습니까.
지금 갑자기 가볍게 출동하여 상하上下가 피폐해지면 천위天威(황제 위엄)가 꺾여 다시 적의 기세를 올려줄까 염려되니, 온당한 책략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목량穆亮과 여러 공경公卿들이 모두 마땅히 남벌南伐을 행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탁발징이 목량에게 말하기를 “공公들의 평소 논의는 남정南征을 바라지 않았는데 어찌 황상을 대면해서는 곧바로 이런 말을 하시오. 앞뒤가 같지 않으니, 어찌 대신大臣의 도리이겠소.”라고 하니, 이충李沖이 말하기를 “임성왕은 사직社稷에 충성한다고 말할 만하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위주魏主(탁발굉拓跋宏)가 끝내 따르지 않고 마침내 낙양洛陽을 출발하여 조서를 내려 제장諸將들이 포획한 남녀男女들을 모두 놓아주어 남쪽 제齊나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조호는 과연 항복하지 않았다.
역주
역주1魏主南巡 祭比干墓 :
“기록한 것은 北魏를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祭臣(신하를 제사 지냈다.)’이라고 기록한 것은 6번인데, 과거 시대의 賢人을 제사한 것은 아직까지 없었다. 比干 묘에 제사를 기록한 것이 하나이고, 봉함을 기록한 것이 하나이니, 모두 인정해준 것이다(貞觀 19년(645)).[書 嘉魏也 綱目書祭臣六 未有祭往世之賢者 比干墓 書祭一 書封一 皆予之也(貞觀十九年)]” ≪書法≫
역주2(上)[士] :
저본에는 ‘上’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士’로 바로잡았다.
역주3(公)[空] :
저본에는 ‘公’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空’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魏罷西郊祭天 :
“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낸 것은 古禮이다. 北魏 시대에는 西郊에서 제사를 지내어 심지어 蹋壇(戎服을 입고 기병으로 제단을 에워싸는 것)과 遶天(제사를 마치고 제단을 에워싸는 것)이라는 말까지 있게 되었으니, 매우 도리에 맞지 않는다. 辛未年(491)에 祀典을 바르게 시행하였으나 西郊의 제사는 그대로 두었다가 지금에 와서 폐지하였으므로 기록한 것이다.[祭天南郊 古也 魏世用西 至有蹋壇遶天之稱 不經甚矣 辛未雖正祀典 西郊自若也 及是罷之 故書]” ≪書法≫
역주6王融이……모의하였다 :
永明 11년(493)에 齊 武帝가 병들었을 때 王融이 조서를 고쳐 太孫인 蕭昭業을 바꾸어 蕭子良을 후사로 삼으려 하였다.
역주7齊蕭鸞弑其君昭業……封宣城公 :
“蕭昭業이 大統을 계승했으나 大政이 모두 蕭鸞에게서 나왔다. 소소업이 비록 狂暴하다고 해도 조정의 신하를 살해한 적이 없어 宋나라 劉子業에 견줄 것이 못 된다. 소란이 逆心을 품었는데, 소소업의 어리석고 용렬함을 다행으로 여겨서 죽였으니, 이때 소란이 진실로 스스로 차지하려고 했다면 또한 〈다른 임금을 세우는 것을〉 또한 그만두어야 하였다. 그런데 또다시 蕭昭文을 세우고 정사를 보좌한 뒤에 高祖ㆍ武帝의 자손을 모두 죽이고서 스스로 황제가 되었으니, 마침내 두 번이나 弑逆을 행하는 지경에 이르러 그 악행은 더욱 방자해졌고 그 국운은 더욱 단축되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니, 또한 세상의 도리가 더욱 낮아졌음을 볼 수 있다.[昭業繼統 大政悉出於鸞 雖云狂暴 然未嘗殺害朝臣 如宋子業之比 鸞有異志 幸其昏庸而斃之 是時鸞苟自取 則亦已矣 又立昭文而輔之 然後盡殺高武子孫而自立 遂至再行弑逆 其惡愈肆 其祚愈促 綱目詳而書之 亦足見世道之愈降矣]” ≪發明≫
역주8남의……바친다 :
유세가인 蒯通이 韓信에게 漢王인 劉邦을 배신하도록 설득하니, 한신이 “한왕이 나를 매우 후대하여 자신의 옷을 내게 입히고 자신의 음식을 내게 먹였다. 내가 듣기로 ‘남의 옷을 얻어 입은 자는 그 사람의 근심을 생각하고 남의 음식을 얻어먹은 자는 그 사람의 일에 목숨을 바친다.[衣人之衣者 懷人之憂 食人之食者 死人之事]’고 하였으니, 내가 어찌 이익 때문에 의리를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史記≫ 권92 〈淮陰侯列傳〉)
역주12魏禁蠻毋得侵掠齊境 :
“특별히 기록한 것이다. 魏主(拓跋宏)는 겸하여 양육했다고 말할 만하다.[特筆也 魏主可謂能兼育矣]” ≪書法≫
역주13魏賜郢州刺史韋珍榖帛 :
“일상적인 下賜는 기록하지 않는데 ‘賜珍(韋珍에게 하사했다.)’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위진을 인정해준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을 마칠 때까지 곡식을 하사한 것은 2번이고(毛義 등과 韋珍) 비단을 하사한 것은 4번이니(韓福, 韋珍, 令狐熙, 于志寧) 모두 인정해준 것이고, 오직 한복에게 하사한 일은 나무란 것이다.[常賜不書 書賜珍 何 予珍也 終綱目書賜榖二(毛義等 韋珍) 書賜帛四(韓福 韋珍 令狐熙 于志寧) 皆予之也 惟賜韓福爲譏辭]” ≪書法≫
역주14魏主自將伐齊 :
“일찍이 ‘侵齊(齊나라를 침략했다.)’라고 기록하고는 여기서 다시 ‘伐(정벌했다)’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蕭鸞을 미워한 것이다. 소란은 이때에 두 임금을 시해하고 또 자신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北魏를 정벌하는 것을 인정해준 것이니, 齊나라를 매우 미워했기 때문이다.[嘗書侵齊矣 此其復書伐 何 惡鸞也 鸞於是弑二君 且自立矣 予魏以伐 所以深惡齊也]” ≪書法≫
역주15북쪽을……마음 :
魏主가 백성들에게 덕을 베풀어 그들이 임금인 자신에게 복종하는 마음을 갖도록 함을 말한다. 임금은 南面하고 신하들은 北面한다.
역주16(河)[沔] :
저본에는 ‘河’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沔’으로 바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