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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4)

자치통감강목(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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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午年(B.C. 87)
二年이라
春二月 帝如五柞宮하여 立弗陵爲皇太子하고 以霍光爲大司馬大將軍하고 金日磾爲車騎將軍하고 上官桀爲左將軍하여 하다
帝崩注+壽, 七十一.하다
二月 上幸五柞宮하여 病篤注+五柞宮, 在扶風盩厔縣, 宮中有五柞樹, 因名焉.이어늘 霍光 涕泣問曰 誰當嗣者잇가 上曰 君未諭前畫意邪
立少子하고 君行周公之事하라
頓首讓曰 臣不如金日磾하니이다 日磾亦曰 臣 外國人이라 不如光이요 且使匈奴輕漢하리이다
乃立弗陵爲皇太子하고 明日 命光, 日磾及上官桀하여 受遺詔輔少主하여 與御史大夫桑弘羊으로 皆拜臥內牀下注+於天子所臥牀前, 拜職.하다
出入禁闥二十餘年 出則奉車하고 入侍左右하여 小心謹愼하여 未嘗有過
爲人 沈靜詳審하여 每出入下殿門 止進有常處
郞, 僕射竊識視之하니 不失尺寸注+識, 式志切, 記也. 謂郞與僕射, 皆私竊識, 視光之止進處. 이러라
日磾在上左右하여 目不忤視者 數十年注+忤, 音悞, 逆也.이요 賜出宮女 不敢近하고 欲納其女後宮호되 不肯하여
其篤愼如此하니 尤奇異之하니라
日磾長子 爲帝弄兒注+弄, 戲也, 言其狎褻, 無關大體.러니 其後 壯大하여 自殿下 與宮人戲어늘 日磾適見하고 遂殺之하다
한대 日磾具言所以하니 爲之泣하고 而心敬日磾하니라
始以材力得幸注+桀, 少時, 爲羽林期門郞, 從帝上甘泉, 天大風, 車不得行. 解蓋授桀, 桀奉蓋, 雖風, 常屬車, 雨下, 蓋輒御, 上奇其材力.하여 爲未央廐令이러니
嘗體不安이라가 及愈見馬하니 馬多瘦注+未央廐令, 屬太僕. 見, 胡電切, 謂呈見之.
大怒曰 令以我不復見馬邪아하고 欲下吏한대
頓首曰 臣聞聖體不安하고 日夜憂懼하여 意誠不在馬하니이다하고 言未卒 泣數行下이라
以爲愛己라하여 由是親近하니라
又明日 帝崩이어늘 入殯未央前殿하다
帝聰明能斷하고 善用人하며 行法 無所假貸
隆慮公主子昭平君 尙帝女夷安公主注+隆慮公主, 景帝女. 班志 “夷安縣, 屬膠西國.”러니 隆慮主病困하여 以金千斤, 錢千萬으로 爲昭平君하여 豫贖死罪어늘 許之하다
主卒 昭平君 日驕하여 醉殺主傅하여 繫獄注+傅, 傅姆也.하니 廷尉以公主子라하여 上請注+上, 時掌切.한대
爲之垂涕歎息하고 久之 曰 法令者 先帝所造也
用弟故而誣先帝之法注+弟, 謂女弟.이면 吾何面目으로 入高廟乎
又下負萬民이라하고 乃可其奏하고 哀不能自止하니 左右盡悲하니라
待詔東方朔 前上壽注+時, 有待詔公車者, 有待詔金馬門者. 朔嘗醉, 小遺殿上, 免爲庶人, 待詔宦者署.曰 臣聞聖王爲政 賞不避仇讐하고 誅不擇骨肉이라하니 五帝所重이요 三王所難也어늘
陛下行之하시니 天下幸甚이라
臣朔 奉觴하여 昧死再拜하여 上萬歲壽하노이다
上初怒朔이러니 旣而 善之하니라
班固曰
漢承百王之弊하여 高祖撥亂反正하고 文景務在養民호되 至于稽古禮文之事하여는 猶多闕焉이러니
孝武初立 卓然罷黜百家하고 表章六經注+百家, 謂諸子雜說, 違背六經者. 表章, 表而出之, 章而明之. 六經, 謂易ㆍ詩ㆍ書ㆍ春秋ㆍ禮ㆍ樂也.하여 遂疇咨海內하여 擧其俊茂하여 與之立功注+疇, 誰也. 咨, 謀也, 言謀於衆人, 誰可爲事者也.하며 興太學, 修郊祀하고 改正朔, 定歷數하고 協音律, 紹周後하여 號令文章 煥焉可述하니
如武帝之雄材大略으로 不改文景之恭儉하여 以濟斯民이런들 雖詩書所稱이나 何有加焉이리오
司馬公曰
孝武窮奢極欲하고 繁刑重斂하며 內侈宮室하고 外事四夷하며 信惑神怪하여 巡遊無度하여 使百姓疲敝하여 起爲盜賊하니 其所以異於秦始皇者 無幾矣注+無幾, 言不多也.
이나 秦以之亡하고 漢以之興者 孝武能遵先王之道하여 知所統守하고 受忠直之言하여惡人欺蔽하며 好賢不倦하고 誅賞嚴明하며 晩而改過하고 顧托得人하니
此其所以有亡秦之失而免亡秦之禍乎인저
太子弗陵 卽位하니 姊鄂邑長公主 共養省中하고 光, 日磾, 桀 共領尙書事注+鄂, 五各切. 班志 “鄂縣, 屬江夏郡.” 公主所食之邑. , 讀曰供, 居用切. 養, 弋亮切, 下奉上曰共養.하다
輔幼主하여 政自己出하니 天下想聞其風采注+采, 文采也.러라
殿中 嘗有怪하여 一夜 群臣相驚이어늘 召尙符璽郞하여 欲收取璽注+尙, 主也. 郞, 官名. 主掌符璽事, 恐有變難, 故欲收取璽.러니 不肯授어늘
欲奪之한대 按劍曰 臣頭 可得이어니와 不可得也니이다
甚誼之하여 明日 詔增此郞秩二等하니 衆庶莫不多光注+多, 猶重也, 以此事, 爲多足重也.하니라
三月 葬茂陵하다
◑ 夏하다
◑ 秋七月 有星孛于東方하다
注+倢伃, 先葬於雲陽. 是以就雲陽, 爲起雲陵.하다
◑ 冬 匈奴入朔方이어늘 遣左將軍桀하여 行北邊하다


갑오년(B.C. 87)
[綱] 나라 세종世宗 효무황제孝武皇帝 후원後元 2년이다.
봄 2월에 황제가 오작궁五柞宮에 가서 유불릉劉弗陵을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고, 곽광霍光대사마大司馬 대장군大將軍으로, 김일제金日磾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상관걸上官桀좌장군左將軍으로 삼아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군주를 보필하게 하였다.
황제가 하였다.注+향년이 71세였다.
[目] 2월에 오작궁五柞宮에 행차하여 병이 위독하자,注+오작궁五柞宮부풍扶風 주질현盩厔縣(여지현)에 있으니, 궁중宮中에 다섯 그루의 갈참나무가 있으므로 인하여 오작궁五柞宮이라 이름하였다.곽광霍光이 눈물을 흘리며 묻기를 “만일 하지 못할 일이 있으면 누가 마땅히 뒤를 이어야 합니까?” 하니, 이 말하기를 “그대는 지난번에 그림을 그려준 뜻을 깨닫지 못했는가.
어린 아들을 세우고 그대가 주공周公의 일을 행하라.” 하였다.
곽광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양하기를 “김일제金日磾만 못합니다.” 하니, 김일제 또한 아뢰기를 “신은 외국外國 사람이라서 곽광만 못하고, 또 흉노匈奴로 하여금 나라를 깔보게 할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유불릉劉弗陵을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고 다음날에 곽광霍光김일제金日磾상관걸上官桀에게 명하여 유조遺詔를 받아 어린 군주를 보필하게 해서, 어사대부御史大夫 상홍양桑弘羊과 함께 모두 와내臥內의 침상 아래에서 관직을 제수하였다.注+〈“배와내상하拜臥內牀下”는〉 천자天子가 누워 있는 침상 앞에서 관직을 제수한 것이다.
[目] 곽광霍光금문禁門을 출입한 지 20여 년에 나가면 황제의 수레를 받들고 들어오면 좌우에서 모시어, 조심하고 삼가서 한 번도 허물이 있지 않았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고요하고 자세히 살펴서 매번 출입하며 궁문에서 수레를 내릴 적에 멈추고 나아감에 일정한 곳이 있었다.
낭관郞官복야僕射가 몰래 표시해놓고서 살펴보니, 한 자와 한 치도 틀리지 않았다.注+식지式志이니, 표시함이다. 〈“ 복야절지시지僕射竊識視之”는〉 낭관郞官복야僕射가 모두 남몰래 표시하여 곽광霍光의 멈추고 나아가는 곳을 살펴봄을 이른다.
[目] 김일제金日磾의 좌우에 있으면서 눈으로 거슬러 보지 않은 것이 수십 년이었고,注+는 음이 이니, 거슬림이다. 내려준 궁녀宮女를 감히 가까이하지 않았으며, 이 그의 딸을 후궁後宮으로 들이고자 하였으나 좋아하지 않았다.
그 돈독하고 삼감이 이와 같으니, 은 더욱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김일제의 큰아들이 황제의 농아弄兒(희롱하는 아이)였는데,注+은 희롱함이니, 군주와 친압親狎하여 대체大體(의리義理)에 관계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뒤에 장성하여 궁전 아래에서 궁녀宮女들과 희롱하자, 김일제가 때마침 이것을 보고는 그를 죽였다.
이 노하자 김일제가 그를 죽인 이유를 자세히 말하니, 은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고 마음속으로 김일제를 존경하였다.
[目] 상관걸上官桀은 처음에 재주와 힘으로 총애를 얻어注+상관걸上官桀은 젊었을 적에 우림기문랑羽林期門郞이 되어서 황제를 따라 감천궁甘泉宮에 올라갔었는데, 큰 바람이 불어 수레가 앞으로 갈 수 없었다. 수레의 일산日傘을 풀어 상관걸에게 주자, 상관걸은 일산을 받들고서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항상 수레를 뒤따랐고 비가 오면 번번이 일산으로 모시니, 은 그의 재주와 힘을 기특하게 여겼다.미앙구령未央廐令이 되었다.
이 일찍이 병을 앓아 몸이 편치 않다가 낫자, 상관걸이 말을 보여드렸는데, 말들이 대부분 수척하였다.注+미앙구령未央廐令태복太僕에 속하였다. (뵙다)은 호전胡電이니, 말을 바쳐 보여드림을 이른다.
이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은 내가 〈죽어〉 다시는 말을 보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는가.” 하고는 옥리獄吏에게 회부하여 치죄하고자 하였는데,
상관걸이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기를 “성상聖上체후體候가 편안하지 못하시다는 말을 듣고는,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해서 마음이 실로 말에 있지 않았습니다.” 하고는 말을 끝마치기 전에 눈물을 줄줄 흘렸다.
은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하여 이 때문에 그를 가깝게 대하였다.
[目] 또 다음날 황제가 하자, 〈재궁梓宮을〉 미앙궁未央宮 앞 전각으로 들여 빈소殯所를 마련하였다.
황제는 총명하여 결단을 잘하였고 사람을 잘 등용하였으며, 법을 시행함에 용서하는 바가 없었다.
융여공주隆慮公主의 아들 소평군昭平君이 황제의 딸인 이안공주夷安公主에게 장가들었는데,注+융여공주隆慮公主경제景帝의 딸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이안현夷安縣교서국膠西國에 속하였다.” 하였다. 융려공주가 병이 위독해지자, 황금黃金과 돈 천만 으로 소평군을 위하여 미리 죽을죄를 속죄할 것을 청하니, 이 이를 허락하였다.
공주가 죽자, 소평군이 날로 교만하여 술에 취해 공주의 스승을 죽이고서 에 갇히니,注+부모傅姆(여자 스승)이다.정위廷尉는 공주의 아들이라 하여 〈특별히 처형할 것을〉 주청하였다.注+(올리다)은 시장時掌이다.
은 그를 위해 눈물을 떨구며 탄식하고는 오래 있다가 말하기를 “법령法令선제先帝가 만드신 것이다.
내가 여동생 때문에 선제의 을 함부로 버린다면注+는 누이동생을 이른다. 내 무슨 면목으로 고황제高皇帝의 사당에 들어가겠는가.
또 아래로는 만민萬民을 저버리게 된다.” 하고는 마침내 그 아룀을 허락하고는 슬픔을 스스로 가누지 못하니,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이에 대조待詔 동방삭東方朔이 앞으로 나아가서 축수하며 아뢰기를注+이때 공거公車에서 대조待詔하는 자가 있었고 금마문金馬門에서 대조待詔하는 자가 있었는데, 동방삭東方朔이 일찍이 하여 대궐 앞에서 작은 실수를 저질렀다가 면직되고 서인庶人이 되어서 환자서宦者署에서 대조待詔하였다.이 들으니, ‘성왕聖王은 정사를 할 적에, 은 원수를 피하지 않고 주벌誅罰골육骨肉을 가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이는 오제五帝가 소중히 여긴 것이요, 삼왕三王이 신중히 한 것입니다.
폐하陛下께서 이것을 행하시니, 천하天下에 매우 다행입니다.
동방삭은 술잔을 받들어 올려 죽을죄를 무릅쓰고 재배再拜하며 만세萬歲의 축수를 올립니다.” 하였다.
은 처음에는 그의 말을 노여워하였으나, 이윽고 좋게 여겼다.
[目] 반고班固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나라는 여러 왕의 폐해를 이어받아서, 고조高祖가 혼란함을 다스려 바름으로 돌아오게 하였고 문제文帝경제景帝가 백성을 기르는 데 힘썼으나, 옛날 문학文學의 일을 상고함에 있어서는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았다.
효무제孝武帝가 처음 즉위하자 우뚝하게 백가百家를 내치고 육경六經표장表章하여,注+백가百家”는 제자諸子잡설雜說로서, 육경六經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이른다. “표장表章”은 겉으로 내보이고 드러내어 밝히는 것이다. 육경六經은 《역경易經》, 《시경詩經》, 《서경書經》, 《춘추경春秋經》, 《예경禮經》, 《악경樂經》을 이른다. 마침내 해내海內에 널리 물어 준걸스럽고 뛰어난 재주가 있는 자들을 등용해서 그들과 함께 을 세웠으며,注+는 누구이고 는 상의하는 것이니, 〈“주자해내疇咨海內”는〉 중인衆人에게 상의하여 그 누가 이 일을 할 만한가를 묻는 것이다.태학太學을 일으키고 교사郊祀를 닦으며, 정삭正朔을 바꾸고 역수歷數(책력)를 정하며, 음률音律을 맞추고 나라 후손의 대를 이어주어서 호령號令문장文章이 찬란하여 기술할 만하였다.
만일 무제武帝와 같은 웅장한 재주와 큰 지략으로 문제文帝경제景帝의 공손하고 검소함을 바꾸지 아니하여 이 백성들을 구제했더라면, 비록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에서 칭찬한 성군聖君이라도 어찌 이보다 더할 수 있겠는가.”
[目] 사마온공司馬溫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효무제孝武帝가 사치를 끝까지 하고 욕망을 지극히 하였으며, 형벌을 가혹하게 하고 세금을 무겁게 거두었으며, 안으로 궁실宮室을 사치스럽게 만들고 밖으로 사이四夷를 정벌하였으며, 신선과 괴이한 말을 믿고 미혹하여 순행하고 유람하기를 절도가 없이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피폐하여 도적이 되게 하였으니, 나라 시황始皇과 다른 것이 별로 없었다.注+무기無幾”는 많지 않음을 말한다.
그러나 나라는 이 때문에 망하였고 나라는 이 때문에 흥하였으니, 이는 효무제孝武帝가 능히 선왕先王를 준수하여 전통을 지킬 줄을 알았고 충직한 사람의 말을 받아들여 사람들이 속이고 엄폐하는 것을 미워하였으며, 현자를 좋아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상벌이 엄하고 분명하였으며, 말년에 허물을 고치고 고명顧命하여 부탁한 자가 올바른 사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망한 나라의 잘못이 있으면서도 망한 나라의 를 면한 것일 것이다.
[綱] 태자太子 유불릉劉弗陵이 즉위하니, 큰누이인 악읍鄂邑장공주長公主가 함께 궁중에서 공양을 받고 곽광霍光김일제金日磾상관걸上官桀이 함께 상서尙書의 일을 겸하였다.注+오각五各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악현鄂縣강하군江夏郡에 속하였다.” 하였으니, 공주公主식읍食邑이다. (바치다)은 으로 읽으니 거용居用이고, (봉양하다)은 익량弋亮이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바치는 것을 공양共養이라 한다.
[目] 곽광霍光이 어린 군주를 보필하여 정사가 자신에게서 나오니, 천하天下 사람들이 그의 풍채(문채)를 우러러 사모하였다.注+는 문채이다.
궁중에 일찍이 괴이한 일이 있어서 한밤중에 여러 신하들이 놀라자, 곽광은 상부새랑尙符璽郞을 불러 옥새玉璽를 거두어 취하고자 하였는데,注+은 주관함이다. 은 관직의 이름이니, 〈상부새랑尙符璽郞은〉 부새符璽의 일을 주관하였다. 변란이 있을까 두려웠으므로 옥새玉璽를 거두어 취하고자 한 것이다.낭관郞官이 주려고 하지 않았다.
곽광이 빼앗으려 하자, 낭관은 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의 머리는 얻을 수 있지만 옥새는 얻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곽광이 매우 의롭게 여기고는 다음 날 명하여 낭관에게 두 등급의 질록秩祿을 더하게 하니, 사람들이 곽광을 훌륭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注+(훌륭하다)는 과 같으니, 이 일을 훌륭하게 여겨 존중할 만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綱] 3월에 무제武帝무릉茂陵에 장례하였다.
[綱] 여름에 사면赦免하였다.
[綱] 가을 7월에 패성孛星이 동쪽에 나타났다.
[綱] 구익부인鉤弋夫人을 추존하여 황태후皇太后라 하고 운릉雲陵을 만들기 시작하였다.注+조첩여趙倢伃(구익부인鉤弋夫人)를 먼저 운양雲陽에 장례하였다. 이 때문에 운양에다가 운릉雲陵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綱] 겨울에 흉노匈奴삭방朔方에 침입하자, 좌장군左將軍 상관걸上官桀을 보내 북쪽 변방을 순행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受遺詔輔少主 : “武帝가 加官을 더 설치한 뒤로부터 丞相은 자리만 갖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遺詔를 받을 적에 승상에게 미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훌륭한 사람(霍光)을 얻어 부탁하였으니, 武帝의 총명함은 높일 만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찬미한 것이다. ‘遺詔를 받았다.[受遺詔]’고 쓴 것이 이때 시작되었다.[自武帝增重加官 而丞相爲具位 故受遺之詔 不及丞相焉 然其付託得人 則帝之明 有可尙者矣 故書美之 書受遺詔始此]” 《書法》
“武帝가 평생 잘못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오직 말년에 어린 아들을 부탁한 한 가지 일은 매우 현명하였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霍光과 金日磾, 上官桀 세 사람은 모두 장군으로서 遺詔를 받고 相臣은 여기에 참여하지 못했으니, 또 세상의 변함을 볼 수 있다.[武帝平生繆戾甚多 獨晩年託孤一節 甚明 觀之綱目所書 則可見矣 然光日磾桀三人 皆以將軍受遺詔 而相臣無預 又可以觀世變也]” 《發明》
역주2 如有不諱 : 不諱는 忌諱하여 직접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죽음을 이르는바, 如有不諱는 “만일 죽음이 있게 되면”의 뜻이다. 일설에는 황제의 죽음을 미리 말할 수 없으나 황제가 죽은 뒤에는 끝내 忌諱할 수 없으므로 不諱라 칭한다고 한다.
역주3 (省)[者] : 저본에는 ‘省’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者’로 바로잡았다.
역주4 (其)[共] : 저본에는 ‘其’로 되어 있으나, 문맥을 살펴 ‘共’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追尊鉤弋夫人……起雲陵 : “禮를 어김을 비판한 것이니, 처음으로 嫡妻와 妾을 혼란시켰다. 그러므로 《資治通鑑》에는 쓰지 않았는데,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백성을 雲陵에 이주시킨 것과 아울러 모두 특별히 쓴 것이다. 昭帝가 자기 生母를 추존함으로부터 ‘뒤에 추존했다.[追尊]’고 쓴 군주가 12명이고, 哀帝가 자기 祖母와 生母를 높인 뒤로부터 ‘높여 제수했다.[尊拜]’고 쓴 군주가 13명이고, 이에 또 멀리 높인 경우가 있었다. 妾인 어미를 높인 것은 잘못이요, 〈魏主 拓跋燾와 魏主 拓跋濬이〉 保母를 높인 것은 더 큰 잘못이다.[譏違禮也 始亂嫡妾矣 故通鑑不書 綱目幷徙民雲陵 皆特書之 自昭帝追尊其所生 而後書追尊者十二君 自哀帝尊其祖母及其所生 而後書尊拜者十三 於是又有遥尊者矣 尊妾母非也 尊保母甚哉]” 《書法》

자치통감강목(4) 책은 2019.04.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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