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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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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一年이라
燕主慕容寶永康元이요 秦皇初三이요 魏皇始元年이라 ◑ 涼龍飛元年이라
春閏三月 燕主垂 襲魏平城하여 克之하고 夏四月이라가 卒于上谷하니 太子寶立하다
燕主垂 留范陽王德하여 守中山하고 引兵密發하여 踰青嶺經天門하여 鑿山通道하여 出魏不意하여 直指雲中注+① 靑嶺, 蓋卽廣昌嶺, 在代郡廣昌縣南, 所謂五迴道也. 其南, 層崖刺天, 積石之峻, 壁立直上, 蓋卽天門也.하다
魏陳留公虔 鎭平城이어늘 垂襲之하니 出戰敗死注+② 虔, 什翼犍之孫也.한대 燕軍 盡收其部落하다
魏王珪震怖欲走하니 諸部皆有貳心이라 珪不知所適이러라
垂之過參合陂也 見積骸如山하고 爲之設祭하니 軍士慟哭하여 聲震山谷이라
垂慙憤嘔血하여 由是發疾이러니 至是轉篤하여 乃築燕昌城而還이라가 卒于上谷하니 寶卽位注+① 水經 “燕昌城, 在平城北四十里.”하다
五月 燕以慕容德爲冀州牧하여 守鄴하고 慕容農爲幷州牧하여 守晉陽하다
◑ 燕主寶 弑其太后段氏하다
燕主垂先段后 生子令, 寶하고 後段后 生子朗, 鑑하나 愛諸姬子麟, 農, 隆, 柔, 熙注+① 燕王垂初娶段氏, 以可足渾后之讒而死. 後卽位, 追尊爲后, 復納段氏爲后, 故史書後段后以別之.
寶初爲太子 有美稱이러니 已而荒怠하니 中外失望이라
後段后 嘗言於垂曰 今國歩多艱하고 太子非濟世之才也 遼西, 高陽 陛下賢子 宜擇一人하여 付以大業注+② 遼西․高陽, 謂遼西王農․高陽王隆.하소서 趙王 姦詐彊愎하니 必爲國患이니 宜早圖之하소서
寶善事垂左右하여 多譽之者 垂以爲賢하여 謂段氏曰 汝欲使我爲晉獻公乎注+① 晉獻公信姬之讒, 殺太子申生.
段氏泣而退하여 告其妹范陽王妃曰 太子不才 天下所知 吾爲社稷言之注+② 爲, 去聲.러니 主上 乃以吾爲驪姬하니 何其苦哉
太子必喪社稷이요 范陽王 有非常器度하니 若燕祚未盡이면 其在王乎인저
寶, 麟 聞而恨之러라
至是 寶使麟謂段氏曰 宜早自裁하여 以全段宗하라
段氏怒曰 汝兄弟不難逼殺其母어든 況能守先業乎 吾豈愛死리오 但念國亡不久耳로라하고 遂自殺하다
寶議以段后 謀廢適統하니 無母后道 不宜成喪注+① 適, 讀曰嫡.이라한대
中書令眭邃 颺言於朝曰注+② 大言而疾曰颺. 子無廢母之義하니 漢安思閻后 親廢順帝호되 猶得配饗太廟하니 況先后曖昧之言乎잇가 乃成喪하다
六月 燕定士族舊籍하다
燕主寶 定士族舊籍하여 分辨清濁하고 校閲戶口하여 罷軍營封蔭之戶하여 悉屬郡縣하니 由是 士民 嗟怨有離心注+① 軍營封蔭之戶, 蓋諸軍庇占以爲部曲者.이러라
三河王光 自稱涼天王하다
卽天王位하여 國號大涼이라하고 置百官하고 遣使者하여 拜秃髪烏孤하여 爲益州牧하니
烏孤謂使者曰 呂王諸子貪淫하고 三甥暴虐하니 遠近愁怨注+① 光諸子見於史, 君纂․弘․紹․覆. 光甥石聦譖殺杜進, 餘二人當攷.이라 吾安可違百姓之心하여 受不義之爵乎아하고 留其鼓吹羽儀하고 謝遣之하다
秋八月 魏王珪 擊燕하다
魏群臣 勸魏王珪稱尊號한대 珪始建天子旌旗하고 出入警蹕하다 參軍張恂 勸珪進取中原하니 珪善之러라
燕遼西王農 鎭晉陽하니 部曲數萬이라 幷州素乏儲偫하여 民不能供注+① 儲偫, 音除値, 猶蓄積也.이러라 又遣護軍하여 分監諸胡하니 民夷皆怨하여 潛召魏軍하다
八月 珪大擧伐燕할새 歩騎四十餘萬이라 南出馬邑하여 踰句注하니 旌旗二千餘里 鼓行而進하고 遣别將하여 從東道하여 襲幽州하다
燕主寶之子清河公會 母賤而年長하고 雄俊有器藝하니 燕主垂愛之러라
及伐魏 遣鎭龍城하여 委以東北之任하고 皆選一時才望하고
遺言命寶以爲嗣러니 而寶愛少子策하여 立之하니 會聞之하고 慍懟하여 始有異志러라
九月 燕慕容農 及魏師戰하여 敗走하니 魏遂取幷州하다
魏王珪 軍至晉陽한대 慕容農 出戰이라가 大敗奔還하니 司馬慕輿嵩 閉門拒之하다
農遂東走한대 魏追獲其妻子하여 燕軍盡没하니 獨與三騎 逃歸中山하다
魏遂取幷州하여 初建臺省하고 置刺史, 太守, 尙書郞以下官하여 悉用儒生爲之하고 士大夫詣軍門者 皆引入存慰하여 使人人盡言하고 少有才用이면 咸加擢敍하다
以張恂等으로 爲諸郡守하여 招撫離散하고 勸課農桑하다
燕主寶聞魏軍將至하고 議于東堂할새
符謨曰 魏軍 乘勝氣銳하니 若縱之入平土 不可敵也 宜杜險以拒之니라
眭邃曰 魏多騎兵하니 馬上齎糧 不過旬日이니 宜令郡縣으로 聚民千家爲一堡하여 清野以待之 彼不過六旬 食盡自退리라
封懿曰注+① 懿, 放之子也. 魏兵數十萬이니 民雖築堡 不能自固 是聚兵及糧以資之也 且動揺民心하여 示之以弱이니 不如阻關拒戰이니라
趙王麟曰 魏鋒不可當이니 宜完守中山하여 待其弊而乘之니라
於是 修城積粟하여 爲持久之備하고 悉以軍事委麟하다
貴人張氏 弑帝於清暑殿注+① 壽, 二十五.하니 太子德宗 卽位하고 會稽王道子 進位太傅하다 冬十月 葬隆平陵
하다
帝嗜酒하여 流連内殿하니 外人 罕得進見이라
張貴人 寵冠後宮이러니 時年近三十이라 帝戲之曰 汝以年亦當廢矣리니 吾意更屬少者로라
已而 醉寢清暑殿注+① 淸暑殿, 帝所作.할새 貴人 使婢以被蒙帝面而弑之하고 重賂左右曰 因魘暴崩注+② 魘, 於琰切. 廣韻曰 “睡中魘.” 毛晃曰 “氣窒心懼而神亂則魘.”이라하다
太子闇弱하고 會稽王道子 昏荒이라 遂不復推問하다
王國寶夜叩禁門하여 欲入爲遺詔하니 侍中王爽 拒之曰 大行晏駕하시고 皇太子未至하니 敢入者하리라 國寶乃止하니 恭之弟也
太子卽位하고 道子進位太傅揚州牧하고 假黄鉞하다 太子幼而不慧하여 口不能言注+① 不慧, 世所謂白癡.하고 至於寒暑飢飽하여도 亦不能辨하여 飲食寢興 皆非己出이라
母弟琅邪王德文 嘗侍左右하여 爲之節適注+② 嘗, 通鑑作常. 爲, 去聲. 節適, 謂事爲之節, 以適其口體.하다
國寶黨附道子하여 驕縱不法하니 武帝惡之하다 國寶懼하여 遂更媚於帝하니 道子大怒하여 以劍擲之러니
及帝崩 國寶復事道子하여 與王緒 共爲邪諂한대 道子又倚爲心腹하여 遂參管朝權하니 威振内外러라
王恭 入赴山陵하여 每正色直言하니 道子憚之하여 深布腹心한대 而恭每及時政 輒厲聲色하니 道子遂欲圖之러라
勸恭誅國寶한대 王珣曰 彼罪逆未彰하니 今先事而發이면 必失朝野之望이니 若其不改하여 惡布天下然後 順衆心以除之 亦無不濟也리라 乃止하다
旣而 謂珣曰 比來視君하니 一似胡廣注+① 謂依違於權姦之間, 以保祿位. 廣仕漢, 周流四公三十餘年, 歷事六帝, 溫柔謹愨, 常遜言恭色, 以取媚於時, 無忠直之風. 或勸王公誅王國寶, 而王珣止之, 故恭以廣比珣.이로다 珣曰 王陵廷爭하고 陳平愼黙하여 但問歲晏何如耳注+② 謂陵以廷爭失位, 平以愼默, 終能安劉.니라
山陵旣畢 將還鎭할새 謂道子曰 主上諒闇하시니 冡宰之任 伊周所難이라 惟大王 親萬機納直言하고 放鄭聲遠佞人하라 國寶等 愈懼러라
魏王珪 拔常山하다
魏王珪 使冠軍將軍于栗磾 潛自晉陽으로 開韓信故道注+① 韓信自井陘伐趙之故路也.하여 自井陘趨中山하여 進攻常山하여 拔之하니 郡縣皆降호되 唯中山, 鄴, 信都三城 爲燕守注+② 中山燕都, 慕容德守鄴, 慕容鳳守信都, 皆重鎭也. 爲, 去聲.러라
珪命東平公儀攻鄴하고 冠軍, 王建攻信都注+③ 儀, 卽九原公儀也.하고 珪進攻中山이러니
旣而 謂諸將曰 中山城固하니 急攻則傷士 久圍則費糧이니 不如先取信都然後 圖之라하고 乃引兵而南하여 軍于魯口하다
高陽太守崔宏 奔海渚注+① 海渚, 海中洲也.어늘 珪素聞其名이라 遣吏追獲하여 以爲黄門侍郞하여 與張袞對掌機要하여 創立法度하고
博陵令屈遵이어늘 以爲中書令하여 出納號令하고 兼總文誥하다
魏别將拓跋儀 攻鄴이어늘 燕慕容德 擊破之하다
魏東平公儀 攻鄴이어늘 燕范陽王德 使南安王青等으로 夜撃破之注+① 靑, 皝之曾孫也.하니 魏軍 退屯新城이라
青等 請追擊之注+② 新城, 卽燕主垂攻鄴所築者也.한대 别駕韓𧨳曰注+③ 𧨳, 音卓.
古人 先計而後戰하니 魏軍不可擊者四 懸軍遠客하여 利在野戰 一也 深入近畿하여 頓兵死地 二也 前鋒旣敗 後陳方固 三也 彼衆我寡하여 不敵 四也
我軍 自戰其地하고 動而不勝이면 衆心難固하고 城隍未修 敵來無備注+④ 自戰其地者, 衆易敗散. 通鑑 “官軍不宜動者三, 自戰其地一也, 動而不勝, 衆心難固二也, 城隍未修, 敵來無備三也.”하니 不如深壘固軍以老之니이다
從之하여 召青還하다
封楊盛爲仇池公하다
◑ 秦 陷蒲阪하다
初永嘉之亂 汾陰薛氏 聚族하여 阻河自保하고 不仕劉, 石, 符氏注+① 謂劉聦․石勒及符堅也.러니 至是 後秦主興 以禮聘薛彊하여 以爲鎭東將軍하니 引秦兵取蒲阪하다


【綱】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21년이다.
【目】 燕主(後燕) 慕容寶 永康 원년이고, 秦主(後秦) 姚興 皇初 3년이고, 魏나라(北魏) 太祖 道武帝 拓跋珪 皇始 원년이다. 涼王(後涼) 呂光 龍飛 원년이다.
【綱】 봄 윤3월에 燕主(後燕) 慕容垂가 魏나라(北魏)의 平城을 기습하여 점령하고, 여름 4월에 돌아오다가 上谷에서 卒하니, 太子 慕容寶가 즉위하였다.
【目】 燕主 慕容垂가 范陽王 慕容德을 남겨두어 中山을 지키게 하고, 군대를 이끌고 은밀히 출발하여 青嶺을 넘고 天門을 경유하면서 산을 뚫어 길을 통해서 魏나라가 생각하지 못했을 때에 출동하여 곧바로 雲中을 향해 전진하였다.注+① 靑嶺은 아마도 이곳이 바로 廣昌嶺일 것이다. 代郡 廣昌縣 남쪽에 있으니, 이른바 五迴道라는 것이다. 그 남쪽은 층층의 벼랑이 하늘을 찌르고 험준하게 바위가 쌓여 직선으로 바위가 서 있으니, 아마도 이곳이 바로 天門일 것이다.
위나라 陳留公 拓跋虔이 平城에 진주하였는데 모용수가 습격하니, 탁발건이 나와 싸우다가 패하여 죽자注+② 拓跋虔은 拓跋什翼犍의 손자이다. 연나라 군대가 그의 부락을 모두 거두었다.
魏王 拓跋珪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여러 부락이 다 배반할 마음을 품었으므로 탁발규는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目】 慕容垂가 參合陂를 지나갈 적에 산처럼 쌓인 해골을 보고는 그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니, 군사들의 통곡 소리가 산골짜기를 진동하였다.
모용수는 부끄럽고 분하여 피를 토하니 이로 인해 병이 났었는데, 이때 이르러 더욱 심해져서 마침내 燕昌城을 쌓고 돌아가다가 上谷에서 卒하니, 慕容寶가 즉위하였다.注+① ≪水經≫에 “燕昌城은 平城 북쪽 40리 지점에 있다.”라고 하였다.
【綱】 5월에 燕나라(後燕)가 慕容德을 冀州牧으로 삼아서 鄴城을 지키게 하고 慕容農을 幷州牧으로 삼아 晉陽을 지키게 하였다.
【綱】 燕主(後燕) 慕容寶가 太后 段氏를 시해하였다.
【目】 처음에 燕主 慕容垂의 先段后는 아들 慕容令과 慕容寶를 낳았고, 後段后는 아들 慕容朗, 慕容鑑, 慕容愛를 낳았으나, 모용수는 여러 후궁의 아들인 慕容麟, 慕容農, 慕容隆, 慕容柔, 慕容熙를 사랑하였다.注+① 燕王 慕容垂가 처음 段氏에게 장가들었는데, 可足渾后의 참소로 죽었다. 뒤에 즉위하여 그녀를 추존하여 后라 하고 다시 段氏를 들여 后로 삼았다. 그러므로 史官이 後段后라고 써서 구별한 것이다.
모용보가 처음 태자가 되었을 때에 훌륭하다는 칭찬이 있었는데, 얼마 안 되어 주색에 빠지고 태만하니, 온 나라가 실망하였다.
後段后가 일찍이 모용수에게 말하기를 “지금 국운에 어려움이 많은데, 태자는 세상을 구제할 재주가 아닙니다. 遼西王과 高陽王은 폐하의 훌륭한 아드님이니, 마땅히 그중 한 사람을 가려서 大業을 맡기소서.注+② 遼西와 高陽은 遼西王 慕容農과 高陽王 慕容隆을 이른다. 趙王(慕容麟)은 간사하고 속이고 강하고 괴팍하여 반드시 나라의 근심이 될 것이니, 일찍 도모하여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目】 慕容寶는 慕容垂의 측근을 잘 섬겨서 그를 칭찬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므로 모용수는 모용보를 훌륭하게 여겨서 段氏에게 이르기를 “너는 나로 하여금 晉나라 獻公을 만들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注+① 晉나라 獻公이 驪姬의 참소를 믿고서 태자 申生을 죽였다.
단씨는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서, 그녀의 여동생인 范陽王(慕容德)의 妃에게 고하기를 “태자가 재주가 없음은 천하가 아는 바이다. 내가 사직을 위하여 말씀드렸는데,注+②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주상은 마침내 나를 驪姬로 여기니, 어쩌면 이리도 고통스러운가.
태자는 반드시 사직을 망칠 것이요, 범양왕은 비상한 기국과 도량이 있으니, 만약 연나라의 국운이 다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범양왕에게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慕容寶와 慕容麟은 이 말을 듣고 원한을 품었다.
【目】 이때에 慕容寶가 慕容麟으로 하여금 段氏에게 말하게 하기를 “마땅히 일찍 자결하여 단씨 집안을 온전히 하라.”라고 하였다.
단씨가 노하여 말하기를 “너희 형제들이 어미를 핍박하여 죽이는 것을 어려워하지 않으니, 하물며 선대의 기업을 지키겠는가. 내 어찌 죽음을 아까워하겠는가. 다만 나라가 망할 날이 오래지 않음을 염려할 뿐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자살하였다.
모용보는 의논하기를 “段后가 적통을 폐할 것을 도모했으니, 母后의 도리가 없다. 國喪을 이루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注+① 適은 嫡으로 읽는다.
中書令 眭邃(수수)가 조정에서 큰 소리로 말하기를注+② 크고 빠르게 말하는 것을 颺이라 한다. “자식이 어미를 폐하는 의리는 없으니, 漢나라의 는 친히 順帝를 폐하였으나 오히려 太廟에 배향이 되었다. 하물며 先后가 애매한 말을 한 것에 있어서이겠는가.”라고 하여 마침내 국상을 이루었다.
【綱】 6월에 燕나라(後燕)가 士族의 옛 호적을 정하였다.
【目】 燕主 慕容寶가 士族의 옛 호적을 정하여 清濁을 분별하고 戶口를 교열하여 군영에서 보호하는[封蔭] 가호를 없애어서 모두 郡縣에 소속시키니, 이로 말미암아 선비와 백성들이 한탄하고 원망하여 이반할 마음을 가졌다.注+① 군영에 封蔭하는 가호는 여러 군대가 비호하고 점유하여 部曲으로 삼은 자를 이른다.
【綱】 三河王 呂光이 스스로 涼나라(後涼) 天王이라 칭하였다.
【目】 呂光이 天王에 즉위하여 국호를 大涼이라 하고, 백관을 설치하고 사자를 보내어 秃髪烏孤를 益州牧으로 임명하니,
독발오고가 사자에게 이르기를 “呂王의 아들들은 탐욕스럽고 음탕하며 세 생질은 포악하니, 원근의 사람들이 근심하고 원망한다.注+① 呂光의 여러 아들로서 史書에 보이는 자는 군주인 呂纂, 呂弘, 呂紹, 呂覆이다. 여광의 생질인 石聦은 杜進을 모함해 죽였으며, 나머지 생질 두 사람은 마땅히 상고해야 한다. 내 어찌 백성의 마음을 어기고서 의롭지 못한 관작을 받겠는가.” 하고는 그가 보낸 鼓吹와 羽儀(의장대)를 남겨두게 하고 사신에게 사례하고 보내었다.
【綱】 가을 8월에 魏王(北魏) 拓跋珪가 燕나라(後燕)를 공격하였다.
【目】 魏나라(北魏)의 신하들이 魏王 拓跋珪에게 존호를 칭할 것을 권하자, 탁발규는 처음으로 천자의 旌旗를 세우고, 궁을 출입할 때에 을 하였다. 參軍 張恂이 탁발규에게 진군하여 中原을 점령할 것을 권하니, 탁발규가 그 말을 좋게 여겼다.
燕나라(後燕) 遼西王 慕容農이 晉陽에 진주하니 部曲이 수만이었다. 幷州는 평소 저축한 물자가 부족하여 백성들이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였는데,注+① ‘儲偫’는 음이 除値이니, 蓄積과 같다. 모용농이 또다시 護軍을 보내어 나누어 胡族들을 감시하게 하니, 병주의 백성과 오랑캐들이 모두 원망하여 위나라 군대를 몰래 불러들였다.
8월에 탁발규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연나라를 공격할 적에 보병과 기병이 40여만 명이었다. 남쪽으로 馬邑으로 출동하여 句注를 거쳐가니, 旌旗가 2천여 리를 이었다. 북을 치며 행군하여 전진하고 别將을 보내어 동쪽 길을 따라 幽州를 기습하였다.
【綱】 燕나라(後燕)가 皇子 慕容策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目】 燕主 慕容寶의 아들 清河公 慕容會는 모친의 신분이 천하였으나 나이가 가장 많았고 웅대하고 준걸하며 기국과 재주가 있으니, 燕主 慕容垂가 그를 아꼈다.
魏나라(北魏)를 공격하게 되자 모용회를 보내어 龍城에 진주해서 동북 지역을 다스릴 임무를 맡기고 그의 봉국의 관리와 府中의 보좌관들을 모두 한때의 재주 있고 명망 있는 사람들을 선발하였다.
慕容垂는 모용회를 후사로 삼을 것을 모용보에게 遺命하였는데, 모용보가 작은아들 慕容策을 사랑하여 그를 세우니, 모용회가 이 말을 듣고 노여워하고 원망하여 비로소 다른 마음을 품었다.
【綱】 9월에 燕나라(後燕) 慕容農이 魏나라(北魏) 군대와 싸우다가 패주하니, 위나라가 마침내 幷州를 점령하였다.
【目】 魏王 拓跋珪의 군대가 晉陽에 이르자, 慕容農이 나와 싸우다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 돌아가니, 司馬 慕輿嵩이 문을 닫고 항거하였다.
모용농이 마침내 동쪽으로 달아나니, 위나라가 추격하여 처자를 사로잡아 연나라 군대가 모두 전몰하였다. 모용농은 홀로 세 기병과 함께 도망하여 中山으로 돌아갔다.
魏나라가 마침내 幷州를 점령하여 처음으로 臺省을 세우고 刺史와 太守, 尙書郞 이하의 관직을 설치하고 모두 儒生을 등용하여 이들을 관직에 임명하고, 사대부로서 軍門에 찾아온 자를 모두 데리고 군문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위로하여 사람마다 각자 하고 싶은 말을 모두 하게 하고, 조금이라도 쓸 만한 재주가 있으면 모두 발탁하여 敍用하였다.
張恂 등을 여러 郡의 太守로 삼아 離散한 자들을 불러 어루만지고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였다.
【目】 燕主 慕容寶는 魏나라(北魏) 군대가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東堂에서 신하들과 의논하였는데,
이때 符謨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나라 군대가 승세를 타고 사기가 드높으니, 만약 그들을 풀어놓아 평지로 들어오게 하면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험한 곳을 점거하고 막아야 합니다.”
眭邃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나라는 기병이 많은데, 말 위에 실리는 군량은 열흘 치에 불과합니다. 마땅히 郡縣으로 하여금 民家 1000가호를 모아 하나의 보루를 만든 다음, 들의 곡식을 깨끗이 치우고서 기다리면 저들은 60일을 넘기지 못하고 식량이 바닥나 스스로 물러갈 것입니다.”
封懿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① 封懿는 封放의 아들이다. “위나라 병력은 수십만 명이니 백성들이 비록 보루를 구축하더라도 스스로 견고히 지킬 수 없을 것이니, 이는 군대와 양식을 모아서 적에게 도와주는 것입니다. 또 이렇게 되면 또 민심을 동요하여 약함을 보이는 것이니, 관문을 막고 항거하여 싸우는 것만 못합니다.”
趙王 慕容麟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위나라의 예봉을 당할 수가 없으니, 마땅히 中山을 견고하게 지키면서 위나라의 군대가 피폐해지기를 기다려 틈을 타야 합니다.”
이에 성을 수리하고 곡식을 쌓아 지구전에 대비하고 모든 군대의 일을 모용린에게 위임하였다.
【綱】 〈晉나라(東晉)〉 貴人 張氏가 清暑殿에서 황제(孝武帝)를 시해하니,注+① 향년이 25세였다. 태자 司馬德宗이 즉위하고 會稽王 司馬道子가 太傅로 지위를 올렸다. 겨울 10월에 황제를 隆平陵에 장례하였다.
【目】 황제(孝武帝)는 술을 좋아하여 内殿에서 향락에 빠지니, 외부 사람들이 나아가 뵙는 것이 드물었다.
張貴人의 총애가 으뜸이었는데, 이때 나이가 30세에 가까웠다. 황제가 그녀를 놀리기를 “너는 나이가 많아 또한 마땅히 폐출될 것이니, 나는 다시 젊은 여자에게 마음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황제가 술에 취하여 清暑殿에서 잠이 들었을注+① 淸暑殿은 황제(孝武帝)가 지은 궁전이다. 적에 貴人이 계집종을 시켜 황제의 얼굴에 이불을 덮어 시해하고 측근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서 말하기를 “황제가 가위에 눌려 갑자기 崩했다.”라고 하였다.注+② 魘(가위눌리다)은 於琰의 切이니, ≪廣韻≫에 “잠자는 가운데 가위에 눌린다.”라고 하였다. 毛晃이 말하기를 “숨이 막히고 마음이 두려워 정신이 혼란하면 가위에 눌린다.”라고 하였다.
【目】 이때 太子는 어리석고 유약하였으며 會稽王 司馬道子는 혼우하고 주색에 빠져 마침내 다시는 황제를 시해한 죄인을 추궁하지 않았다.
王國寶가 밤에 궁궐문을 두드리면서 입궐하여 遺詔를 만들려 하자, 侍中 王爽이 거절하기를 “황제가 승하하시고 황태자가 아직 오지 않으셨으니, 감히 들어오는 자는 참수하겠다.”라고 하니, 왕국보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왕상은 王恭의 아우이다.
태자가 즉위하고 사마도자가 太傅 揚州牧으로 지위를 올리고 黄鉞을 받았다. 태자는 나이가 어리고 지혜롭지 못하여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注+① ‘不慧’는 세상에서 이른바 白癡라는 것이다. 추운지 더운지, 배가 고픈지 부른지조차 또한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여 먹고 마시고 잠자고 일어나는 것을 모두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였다.
同母弟 琅邪王 司馬德文이 항상 좌우에서 모시면서 그를 위하여 조절해서 맞게 하였다.注+② 嘗은 ≪資治通鑑≫에 常으로 되어 있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節適’은 일마다 그를 위하여 조절해서 그 입과 몸에 맞게 함을 이른다.
【目】 처음에 王國寶가 司馬道子의 黨이 되어 교만하고 방종하여 불법을 저지르니, 孝武帝가 그를 미워하였다. 왕국보가 두려워해서 마침내 다시 황제에게 아첨하니, 사마도자가 크게 노하여 劍을 그에게 던진 일이 있었다.
그러다가 황제가 붕어하자 왕국보가 다시 사마도자를 섬겨서 王緒와 함께 간사한 짓을 하고 아첨하자, 사마도자는 또 이들에게 의지하여 심복으로 삼아서 마침내 조정의 권세에 참여하여 관장하게 하니, 이들의 위세가 내외에 진동하였다.
【目】 王恭이 〈京師에〉 들어와서 山陵(孝武帝의 장례)에 달려와 매번 얼굴빛을 바르게 하고 직언을 하니, 司馬道子가 그를 꺼려서 자신의 심복을 깊이 심어놓았는데, 왕공이 매번 時政을 언급할 때마다 번번이 목소리와 얼굴빛을 엄하게 하니, 사마도자가 마침내 왕공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혹자가 왕공에게 王國寶를 주살할 것을 권하자, 王珣이 말하기를 “그의 죄악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으니, 이제 그들의 죄악에 앞서 손을 쓴다면 반드시 朝野의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고치지 아니하여 죄악이 천하에 퍼진 뒤에 여러 사람의 마음을 순히 따라 제거하면 또한 성공하지 못함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공이 마침내 중지하였다.
【目】 이윽고 王恭이 王珣에게 이르기를 “근래 그대를 보면 한결같이 胡廣과 같다.”라고 하였다.注+① 〈‘一似胡廣’은〉 權姦의 사이를 기웃거리며 자신의 녹과 지위를 보존함을 이른다. 이 漢나라에서 벼슬하면서 30여 년간 네 번 公의 지위에 올라 여섯 황제를 차례로 섬겼는데, 성품이 온화하고 유순하며 삼가고 조심해서 항상 말소리와 얼굴빛을 공손히 하여 시속에 잘 보여서 충직한 기풍이 없었다. 혹자가 王公(王恭)에게 王國寶를 주살할 것을 권하였으나 王珣이 이를 저지하였다. 그러므로 王恭이 호광을 가지고 왕순에 비유한 것이다. 왕순이 말하기를 “王陵은 조정에서 간쟁하였고, 陳平은 신중하여 침묵하여 다만 세월이 태평함을 물을 뿐입니다.”라고 하였다.注+② 〈‘王陵廷爭……但問歲晏何如耳’는〉 王陵은 조정에서 간쟁하다가 정승의 지위를 잃었고, 陳平은 신중하고 침묵하여 끝내 劉氏의 漢나라에서 편안히 지낼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山陵의 일이 장차 마무리 되어 왕공이 장차 진영으로 돌아가려 할 적에 司馬道子에게 이르기를 “주상께서 상중에 계시는데, 冢宰의 임무는 옛날 伊尹과 周公도 어렵게 여긴 것입니다. 부디 대왕은 萬機를 직접 다스리고 직언을 받아들이며, 鄭나라의 음탕한 음악을 추방하고 아첨하는 사람을 멀리하십시오.”라고 하니, 王國寶 등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綱】 魏王(北魏) 拓跋珪가 常山을 함락하였다.
【目】 魏王 拓跋珪가 冠軍將軍 于栗磾(우율제)로 하여금 은밀히 晉陽에서 韓信의 옛길을 개통하여注+① 〈‘韓信故道’는〉 옛날 韓信이 井陘에서 趙나라를 공격했던 옛길이다. 井陘(정형)에서 中山으로 달려가 常山을 진격해서 함락하게 하니, 군현이 모두 항복하였으나 오직 中山과 鄴城, 信都 세 성만이 燕나라(後燕)를 위하여 〈魏나라(北魏)를〉 수비하였다.注+② 中山은 燕나라의 수도이고 慕容德은 鄴城을 지키고 慕容鳳은 信都를 지켰으니, 모두 중요한 城鎭이다.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탁발규가 東平公 拓跋儀에게 명하여 업성을 공격하게 하고 관군장군과 王建은 信都를 공격하게 하고注+③ 儀는 바로 九原公 拓跋儀이다. 자신은 중산으로 진격하였는데,
이윽고 탁발규가 장수들에게 이르기를 “중산은 성이 견고하니 급히 공격하면 병사들이 부상할 것이요 오랫동안 포위하면 군량을 허비할 것이니, 먼저 신도를 점령한 뒤에 도모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 마침내 군대를 데리고 남쪽으로 가서 魯口에 군대를 주둔하였다.
【目】 高陽太守 崔宏이 海島로 달아나자,注+① ‘海渚’는 바다 가운데의 섬이다. 拓跋珪는 평소 그의 명성을 들었으므로 관리를 보내어 쫓아가 사로잡아서 그를 黄門侍郞으로 삼아 張袞과 함께 중요한 기무를 관장하여 법도를 창건하게 하였다.
博陵令 屈遵이 항복하자 탁발규는 그를 中書令으로 삼아서 號令을 출납하고 겸하여 임금의 誥令을 총괄하게 하였다.
【綱】 魏나라(北魏) 别將 拓跋儀가 鄴城을 공격하자, 燕나라(後燕) 慕容德이 그를 격파하였다.
【目】 魏나라 東平公 拓跋儀가 鄴城을 공격하자, 燕나라 范陽王 慕容德이 南安王 慕容青 등으로 하여금 밤중에 탁발의를 격파하게 하니,注+① 慕容青은 慕容皝의 증손이다. 위나라 군대가 후퇴하여 新城에 주둔하였다.
모용청 등이 추격할 것을 청하자注+② 新城은 바로 燕主 慕容垂가 鄴城을 공격할 때에 쌓은 것이다. 别駕 韓𧨳(한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③ 𧨳은 음이 卓이다.
“옛사람은 계책을 먼저 세운 뒤에 싸웠으니, 위나라 군대를 공격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네 가지입니다. 저들은 먼 곳의 적지에 깊이 쳐들어온 客軍으로 야전에 이로움이 있는 것이 첫 번째요, 近畿 지역에 깊이 쳐들어와서 死地에 군대를 주둔한 것이 두 번째요, 선봉이 이미 패하였으나 후진이 막 견고한 것이 세 번째요, 저들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적어서 대적할 수 없음이 네 번째입니다.
우리 군대는 전투를 했다가 이기지 못하면 군사들의 마음이 견고하기 어렵고, 성벽과 해자를 수리하기 전에 적이 쳐들어와서 대비하지 못하였으니,注+④ 자신의 지역에서 싸우는 자는 병사들이 쉽게 패하여 흩어진다. ≪資治通鑑≫에는 “官軍(燕軍)이 출동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세 가지이니, 자신의 지역에서 싸우는 것이 첫 번째요, 전투를 했다가 이기지 못하면 병사들의 마음이 견고하기 어려운 것이 두 번째요, 성벽과 해자를 수리하기도 전에 적이 쳐들어와서 대비하지 못한 것이 세 번째이다.”라고 하였다. 보루를 높게 쌓고 군영을 견고히 하여 적을 지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
모용덕이 그의 말을 따라 모용청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綱】 〈晉나라(東晉)가〉 楊盛을 봉하여 仇池公으로 삼았다.
【綱】 秦나라(後秦)가 蒲阪을 함락하였다.
【目】 처음 에 汾陰 薛氏가 종족을 모아 河水를 막고 스스로 지키고는 劉氏, 石氏, 符氏에게 벼슬하지 않았는데,注+① 〈劉氏, 石氏, 符氏는〉 劉聦, 石勒, 符堅을 이른다. 이때에 이르러 後秦主 姚興이 禮로써 薛彊을 초빙하여 鎭東將軍을 삼으니, 설강이 秦나라 군대를 이끌고 蒲阪을 점령하였다.


역주
역주1 (纚)[驪] : 저본에는 ‘纚’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驪’로 바로잡았다.
역주2 安思閻后 : 安思는 後漢 安帝의 皇后 閻氏의 시호이다. 閻后는 질투와 시기가 심해 後宮 李氏가 皇子 劉保를 낳자 李氏를 독살하였고, 뒤에는 太子 劉保를 폐위하여 濟陰王으로 삼았다.(≪資治通鑑綱目≫ 권10)
역주3 警蹕 : 황제가 거둥할 때 행인의 통행을 금하는 제도이다. 황제가 궁을 나갈 때 警이라 외치고, 들어올 때 蹕이라고 외쳤다.
역주4 燕 立子策爲太子 : “僭國의 태자는 연고가 있지 않으면 ‘立(즉위)’을 쓰지 않는데 ‘立策’이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慕容會의 난리를 기록한 것이다.[僭國太子 非有故不書立 書立策 何 志會之亂也]” ≪書法≫
역주5 國官府佐 : 慕容會는 ≪資治通鑑≫ 당시 기사를 보면 征北大將軍 幽平二州牧 淸河公이다. ≪新譯資治通鑑≫(張大可 等 注釋, 三民書局, 2017)에 보면 國官은 封國의 관리, 府는 將軍府와 刺史府라 하였다.
역주6 貴人張氏……葬隆平陵 : “시해한 것에 대해 주동자의 이름을 쓴 뒤에 ‘卽位’를 쓰고 ‘進位’를 써서 평상시처럼 하였으니, 그렇다면 그 군주와 신하가 역적을 풀어준 죄를 폄하하지 않아도 저절로 드러난다. 司馬道子가 스스로 지위를 올린 것으로 글을 엮은 것은 사마도자가 독단했기 때문이다.◯군주를 시해한 역적을 토죄하지 않고 급히 장례한 것은 漢나라 桓帝 때에 일찍이 보였고,(漢나라 建和 원년(147)이다.) 이때 다시 보이니, 곧바로 그 일을 써서 당시 군주와 신하의 죄를 드러낸 것이다.[弑書主名矣 下書卽位進位 如常時 則其君臣縱賊之罪 不貶自見矣 道子以自進爲文 專也◯君弑賊不討 而急於葬 桓帝嘗見之(漢建和元年) 於是再見 直書其事 當時君臣之罪著矣]” ≪書法≫“이때 군주와 신하가 주색에 빠져 온 나라가 향락을 즐겼다. 이 때문에 변란이 궁중에서 일어났는데도 다시는 추궁하여 묻지 않았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곧바로 ‘貴人張氏’라고 썼으니, 그렇다면 그녀는 품계가 낮고 미천해서 中宮殿에 正室(황후)의 존엄함과 흉악하고 포학하여 두려워할 만한 형세가 있지 못한데도 당시에 스스로 토죄하지 못한 것이다. 아래에 ‘道子進位太傅’라고 썼으니, 이는 대신이 직책을 수행하지 못하고 다만 작위의 높음만을 받고 大行 황제가 승하한 이유를 推究하지 못하여 역적을 토죄하지 못한 것이다. 晉나라 군주가 한마디의 농담 때문에 자신은 큰 화에 걸리고, 장씨 또한 임금의 한마디 말 때문에 몸소 대역죄를 저질렀다. 여자의 마음이 만족할 줄 모르고 부인의 난이 끝이 없으니, 성인이 마음을 바루고 몸을 닦고 집안을 다스린 것은 단지 장차 이로써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고르게 하려고 할 뿐만이 아니요, 또한 자기 몸을 보위하여 혼미하고 어지러운 화에서 면하기를 바란 것이다. 군주가 이것을 보면 부부간의 寢席을 마치 원수의 보루와 같이 여기고 여자의 마음을 마치 해충과 같이 여길 것이니, 이렇게 하면 또한 거의 옳을 것이다. ◯天子는 7월에 장례하는 것이 禮인데, 지금 晉 孝武帝는 9월 庚申日에 崩하여 곧바로 10월 甲申日에 장례하였으니, 이는 채 1개월이 되지 못한 것이다. 사실에 근거하여 곧바로 씀에 그 잘못이 저절로 드러난 것이다.[是時君臣沈湎 内外留連 由是變起宮掖 不復推問 故綱目直書貴人張氏 則見其秩品卑微 非有正位中宮之尊 凶暴可畏之勢 而當時自不克討也 下書道子進位太傅 則見大臣失職 徒能受爵位之尊 而不能推究大行晏駕之由 失於討賊也 夫晉君以一言之戲 身嬰大禍 張氏亦以一言之故 躬行大逆 女德無厭 婦亂無極 聖人所以正心修身齊家者 非但曰將以治國平天下而已 亦所以保衛其身 而蘄免於迷亂之禍爾 人主觀此 則視衽席如冦壘 視女德如蟊賊 其亦庶乎可也 ◯天子七月而葬 禮也 今晉孝武以九月庚申崩 卽以十月甲申葬 則是未及一月爾 據事直書 其失自見]” ≪發明≫
역주7 胡廣 : 後漢 때의 사람으로 자는 伯始이다. 安帝 때 尙書郞이 된 후 관직이 太傅에 이르고, 안제․順帝․沖帝․質帝․桓帝․靈帝에 이르기까지 여섯 황제를 섬겼다. 성품이 溫柔하고 말소리와 태도가 공순하며 일 처리에 숙달하고 조정의 법도에도 밝아, 비록 강직한 기풍은 없었으나 임금의 부족한 점을 도운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 당시 京師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해결되지 않는 것은 호광에게 물어라. 천하의 중용은 호광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王莽이 세력을 전횡하여 나라를 빼앗았는데도 그는 나라를 생각하지 않고 몸만 보전하니, 후세에서는 이를, “호광의 중용”이라고 비난하였다.(≪後漢書≫ 권44 〈胡廣列傳〉)
역주8 자신의……싸우고 : 원문의 “自戰其地”는 ≪孫子≫ 〈九地〉에 보인다. 거기에 “제후가 스스로 그 영토 안에서 싸우는 것을 散地라 한다.[諸侯自戰其地 爲散地]”라 하였다. 이는 군사들이 자기 영토를 믿고 처자식과 함께 지내다가 위급한 일이 생기면 서로 흩어지는 것을 말한다.
역주9 永嘉의 난리 : 永嘉는 西晉 懷帝의 연호인데, 永嘉 5년(311)에 匈奴族인 劉聰이 前軍大將軍 呼延晏과 劉曜, 王彌, 石勒 등으로 하여금 서진의 수도인 洛陽을 침략하여 황제를 사로잡아간 일을 가리킨다. 그후 회제가 상해를 당하고 愍帝가 즉위하였으나 3년 뒤에 민제 또한 살해를 당하고 司馬睿가 建康에서 즉위하니, 이것이 東晉의 中宗이다.(≪晉書≫ 권5 〈孝懷帝紀〉, 권6 〈元帝紀〉)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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