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臣聞聖王之功
이 在於得人
이라 故
로 繼世立諸侯
하고 擇立命卿以輔之
注+記王制 “大國三卿, 皆命於天子. 次國三卿, 二卿命於天子, 一卿命於其君. 小國二卿, 皆命於其君.” 漢之王國, 傅‧相‧中尉, 命於天子, 猶古之命卿也.라하니이다
居是國也하여 累世尊重然後에 士民附焉이라 是以로 敎化行而治功立이니이다
孝文時에 吏居官者 或長子孫하여 以官爲氏하니 倉氏, 庫氏는 則倉庫吏之後也라
其二千石長吏도 亦安官樂職하니 然後에 上下相望하여 莫有苟且之意니이다
又數改更政事하며 擧劾苛細하여 發揚陰私하니 送故迎新이 交錯道路라
中材
는 苟容求全
하고 下材
는 懷危內顧
하여 壹切營私者 多
注+苟容求全, 言不敢操持群下也. 懷危內顧, 言常恐獲罪, 每爲私計也.하니이다
目
[목目] 상上이 평당平當을 불러 후侯를 봉하려 하였는데, 평당이 병이 위독하여 소명召命에 응하지 못하였다.
혹 자가 평당에게 이르기를 “억지로라도
출사出仕하여
봉후封侯의
인印을 받아서 자손을 위해야 하지 않겠는가? ” 하니
注+① 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니, 아래도 같다. 〈“불가강기수인위자손사不可彊起受印爲子孫邪”는〉 후侯의 인印을 받고 죽으면 봉토封土와 작위爵位를 자손子孫에게 남겨줄 수 있음을 이른다.,
평당이 대답하기를 “내가 대신大臣의 지위에 있으면서 이미 공밥만 먹는 죄를 졌으니, 봉후封侯의 인印을 받고 곧바로 죽으면 죽어도 남은 죄가 있다. 내가 출사하지 않는 것은 자손을 위한 것이다.” 하였다.
치사致仕를 청하였으나, 상上이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훙薨하였다.
目
“
신臣이 듣건대,
성왕聖王의
공功은 인재를 얻음에 달려 있으므로
대代를 이어 제후를 세우고
명경命卿을 선택하여 세워서 보필하게 한다고
注+①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대국大國은 삼경三卿인데 모두 천자天子에게 임명받고, 차국次國은 삼경三卿인데 두 경卿은 천자天子에게 임명받고 한 경卿은 자기 군주에게 임명받으며, 소국小國은 이경二卿인데 모두 자기 군주에게 임명받는다.” 하였다. 한漢나라의 제후국[왕국王國]은 부傅와 상相과 중위中尉를 천자에게서 임명받으니, 옛날의 천자에게 임명받는 경[명경命卿]과 같았다. 하였습니다.
이 나라에 거주하면서 누대累代 동안 존중을 받은 뒤에야 선비와 백성들이 따르니, 이 때문에 교화가 행해지고 다스리는 공이 확립되는 것입니다.
효문제孝文帝 때에 관리로서 관직을 맡았던 자 중에 혹자는 〈관직을〉 자손에게까지 연장하여 관직을 씨氏로 삼았으니, 창씨倉氏와 고씨庫氏는 바로 창고를 맡은 관리의 후손입니다.
이천석二千石의 장리長吏(지방관인 수守와 상相) 또한 관청을 편안히 여기고 직책을 즐거워하였으니, 이렇게 한 뒤에야 상하上下가 서로 바라보아서 구차한 뜻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는 차츰 바뀌어서 공경公卿 이하가 번갈아 교체되어 재임하는 기간이 촉박하였고,
또 자주 정사를 바꾸며 하찮은 일을 들어 탄핵해서 남의 은밀한 비밀을 들춰내니, 전임자를 전송하고 새로 부임하는 관원을 맞이하는 것이 도로道路에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중등의 재능은 구차히 용납되어 온전하기를 바라고, 하등의 재능은 위태로운 마음을 품고 안을 돌아보아 일체 자신을 위한 계책을 세우는 자가 많았습니다.
注+② “구용구전苟容求全”은 감히 아랫사람들을 잡아 단속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회위내고懷危內顧”는 항상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여 매번 자신을 위한 계책을 세움을 말한 것이다.
目
[
목目]
무염현無鹽縣의
위산危山에 흙이 스스로 일어나 풀을 덮어서
의 모양과 같았고, 또
호산瓠山의 돌이 굴러서 우뚝 섰다.
注+① 무염현無鹽縣은 동평국東平國에 속하였다. 위산危山은 산 이름이다. 〈“토자기복초土自起覆草 여치도상如馳道狀”은〉 흙이 스스로 일어나 풀을 덮어 길을 이루어서 마치 인력으로 길을 내고 파서 치도馳道를 닦은 형상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호산瓠山은 산 이름이니, 그 모양이 박과 같다. 산 중턱에 있는 돌 한 덩어리가 굴러 와서 우뚝 서니, 높이가 9척尺 6촌寸이고, 둘레가 1장丈이고, 너비가 4척尺이었다.
동평왕東平王 유운劉雲과 왕후인
알謁이 직접 돌이 있는 곳에 가서 제사를 지냈는데
注+② 유운劉雲은 선제宣帝의 아들 동평왕東平王 유우劉宇의 아들이다. 알謁(알)은 왕후의 이름이다.,
식부궁息夫躬과
손총孫寵이 서로 모의하기를 “이것은
봉후封侯를 취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라 하고
注+③ 식부息夫(식부)는 복성複姓이고 궁躬(궁)은 이름이다. 《한서漢書》 〈식부궁전息夫躬傳〉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식부궁息夫躬이 손총孫寵과 모의하기를 ‘상上은 계사繼嗣가 없고 옥체가 오랫동안 평안하지 못하며 관동關東의 제후들이 마음속으로 다투어 음모를 꾸미고 있다. 지금 무염현無鹽縣에 큰 돌이 스스로 굴러 와서 서 있는데, 듣자 하니 간사한 신하가 지난 일에 가탁해서, 태산에 돌이 일어서자 선제先帝(선제宣帝)가 등극[용흥龍興]했다고 말을 하고 있다. 동평왕東平王 유운劉雲이 이 때문에 자기 왕후와 함께 밤낮으로 산山에 제사하여 상上을 저주해서 바라서는 안 되는 일을 바라고, 왕후의 외숙인 오굉伍宏이 군주의 총애를 얻어 금문禁門에 출입한다. 사세事勢가 이와 같으니, 이것을 고발하면 반드시 국가의 간악함을 살피고 군주의 원수를 처벌하게 될 것이니, 봉후封侯를 취할 수 있는 좋은 계책이다.’ 하였다.”,
마침내 중상시中常侍 송홍宋弘을 통하여 조정에 변고를 올려서 고하였다.
이때에 상上이 병환을 앓아 싫어하는 일이 많았다.
그리하여 알謁을 체포하여 조사하고 다스리니, 유운劉雲은 자살하고 알謁은 기시형棄市刑을 당하였으며, 손총孫寵을 발탁하여 남양태수南陽太守로 삼고, 송홍宋弘과 식부궁息夫躬은 모두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