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魏主欲討之하여 以問崔浩하니 浩曰 牧犍逆心已露하니 不可不誅라 官軍往年北伐에 戰馬三十萬匹에 死傷不滿八千이나 而遠方乘虛하여 遽謂衰耗不能復振이라하니
今出其不意하여 大軍猝至하면 彼必駭擾하여 不知所爲하리니 擒之必矣니이다 魏主曰 善타
於是에 大集公卿議於西堂할새 弘農王奚斤等이 皆曰 牧犍이 雖心不純臣이나 然職貢不乏하고 罪惡未彰하니 宜加恕宥요
國家新征蠕蠕
하여 士馬疲弊
하니 未可大擧
니이다 且聞其土地鹵瘠
하여 難得水草
注+鹹地曰鹵, 瘠地曰瘠.라하니
大軍旣至에 彼必嬰城固守하리니 攻之不拔하고 野無所掠하면 此危道也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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八月에 牧犍求救於柔然하고 遣其弟董來하여 將兵萬餘人出戰이나 望風犇潰라 魏主至姑臧하여 遣使喻牧犍出降하니
牧犍聞柔然欲入魏邊하고 冀幸魏主東還하여 遂嬰城固守어늘 魏主分軍圍之러니 源賀引兵招慰諸部下三萬餘落하니 故魏主得專攻姑臧하여 無復外慮러라
魏主見姑臧水草豐饒하고 由是恨李順하여 謂崔浩曰 卿言이 驗矣로다
始太子晃이 亦以西伐爲疑러니 至是詔報之曰 姑臧東西門外涌泉이 合於城北하여 其大如河하고 自餘溝渠 流入漠中하니 其間에 乃無燥地也라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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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劉義季가 일찍이 봄철에 사냥을 나갔을 적에 어떤 노인이 거적을 쓰고 밭을 갈고 있자
注+① 劉義季는 宋나라 武帝(劉裕)의 아들이다. 苫(거적)은 詩廉의 切이니, 띠풀을 엮은 것으로, 몸에 거적을 씌워 비를 가리는 것이다. 측근들이 그를 내쫓으려고 하였는데,
노인이 말하기를 “사냥 놀이를 즐기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일입니다. 지금 햇살이 화창한 기운을 펼칠 때 하루 동안 밭을 갈지 않으면 백성은 농사짓는 시기를 잃게 됩니다. 어찌하여 짐승을 쫓아 사냥하는 즐거움으로 늙은 농부를 몰아 내쫓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유의계가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어진 사람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측근에게 명하여 음식을 내려주자 사양하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않으시면 境內의 백성들이 모두 대왕의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것입니다. 이 늙은이가 어찌 감히 홀로 대왕이 내려주시는 것을 받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의계가 그의 이름을 물었는데 고하지 않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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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涼王 沮渠牧犍이 그의 형수 李氏를 간통하니, 이씨가 北魏의 武威公主를 毒殺하려 하였다. 魏主가 의사를 보내 역말을 타고 가서 무위공주를 구하여 낫게 되었다. 魏主가 李氏를 불렀는데 저거목건이 보내지 않고 酒泉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北魏 사신이 西域에서 돌아오다가 武威에 도착했을 때에 저거목건의 측근이 北魏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군이 蠕蠕(柔然)可汗의 妄言을 전해 듣기를 ‘작년에 北魏의 天子가 직접 나를 치러 왔다가 병사들과 말이 병들어 죽어서 대패하고 돌아갔다.’라고 하였는데, 우리 주군이 크게 기뻐하여 온 나라에 널리 알렸습니다.”라고 하였다.
北魏의 사신이 돌아와 이를 아뢰니, 魏主가 尚書 賀多羅를 파견하여 涼州에 사신 보내서 虛實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하다라가 돌아와서 또한 말하기를 “저거목건이 비록 겉으로는 신하의 예를 표하나 속마음은 실로 어긋나고 불순합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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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魏主가 그들을 토벌하려고 崔浩에게 물으니, 최호가 말하기를 “沮渠牧犍의 逆心이 이미 드러났으니 주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官軍이 지난해 北伐을 했을 적에 戰馬 30만 필 중에 죽거나 다친 것이 8천 필도 되지 않았으나, 먼 곳의 적들은 우리의 빈틈을 타서 바로 말하기를 ‘쇠약해지고 소모되어 회복하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지금 저들의 뜻밖의 상황에서 출동하여 대군이 갑자기 도착하면 저들은 필시 놀라 소동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든 公卿들을 西堂에 소집하여 논의할 적에 弘農王 奚斤 등이 모두 말하기를 “저거목건이 비록 마음은 불순한 신하이지만, 공물 바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고 죄악이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용서해줘야 할 것이고,
국가가 방금 蠕蠕을 정벌해서 병사와 말이 지쳐 있으니 아직은 대규모로 출동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곳의 토지는 염분이 많고 척박하여
注+① 소금이 섞인 땅을 鹵라고 하고, 메마른 땅을 瘠이라고 한다. 물과 풀을 얻기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대군이 도착하고 나면 저들은 필시 성곽을 둘러싸고 성을 굳게 지킬 것입니다.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하고 들판에 약탈할 것도 없으면 이것은 위험한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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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崔浩가 李順을 미워하였다.
注+① 夏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에 崔浩와 李順이 틈이 있었다. 이순이 北涼에 使臣을 다니면서 魏主의 총애를 받자, 최호가 더욱 그를 미워하였다. 이순이 사신으로 涼州를 다녀온 것이 모두 11번이다.
北涼의 武宣王이
注+② 武宣王은 沮渠蒙遜이다. 자주 이순과 놀며 연회를 열어 그때마다 驕慢한 말을 했고, 이순이 그것을 누설할까 두려워하여 그에 따라 금과 보석을 그의 품속에 넣어주었다.
이순 역시 그를 위해 비밀로 해주었다. 최호가 그것을 알고 비밀리에 魏主에게 아뢰었으나, 魏主가 믿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이순과 古弼이 모두 말하기를 “姑臧 지역은 모두 메마르고 돌투성이며 물과 풀이 전혀 없고, 姑臧城 남쪽 天梯山 위에는 쌓인 눈이 1丈 남짓이나 됩니다. 봄과 여름에 조금씩 녹아서 아래로 흘러 개천을 이루니, 거주민들은 그 물을 끌어다 灌漑를 합니다.
저들이 우리 군대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개천의 입구를 터놓으면 물이 필시 모자라 끊어지게 될 것이니, 병사와 말이 굶주리고 목이 말라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奚斤 등이 논의한 것은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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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8월에 沮渠牧犍이 柔然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그 아우 沮渠董來를 파견하여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하였으나 〈北魏 군대가 온다는〉 풍문만 듣고도 달아나 무너졌다. 魏主가 姑臧에 도착하여 저거목건에게 사신을 보내 나와서 항복하도록 유시하였다.
저거목건은 柔然이 北魏의 변방으로 침입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魏主가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서 마침내 성곽을 둘러싸고 굳게 수비하였는데, 魏主가 군대를 나누어 성을 포위하였다. 源賀가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의 조부의〉 휘하에 있는 3만여 부락을 불러 모아 위로하였다. 그러므로 魏主가 오로지 姑臧城을 공격할 수 있어서 다시 그 이외를 걱정할 것이 없었다.
魏主가 姑臧에 물과 풀이 풍요로운 것을 보고 이로 인해 李順을 원망하여 崔浩에게 말하기를 “卿의 말이 증명되었다.”라고 하였다.
예전에 太子 拓跋晃이 또한 魏主가 서쪽으로 北涼을 정벌하는 것을 의심스럽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太子에게 회답하기를 “姑臧 東西門 밖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성곽 북쪽에서 합하는데 그 크기가 黃河와 같고 그 이외 도랑물이 沙漠 속으로 流入되니 그 사이에 건조지대가 없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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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9월에 姑臧城이 함락되니, 沮渠牧犍이 文武官員 5천 명을 거느리고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을 들고 投降을 요청하였다. 魏主가 결박을 풀어주며 예우하고 성안에 20여만 戶口를 接收하였다.
張掖王 秃髪保周
注+① 秃髪保周는 北魏로 도망쳐서 張掖公에 봉해졌다가 지금은 승진하여 왕이 되었다. 독발보주는 禿髮源賀의 형이다., 將軍 穆罷․源賀를 시켜서 여러 부락에 나누어 경략하게 하니 여러 胡人들의 投降한 자가 또한 수십만 명이었다. 張掖․樂都․酒泉․武威를 공격해 탈취하여 모두 장수를 두어 수비하도록 하였다.
魏主가 姑臧에서 酒宴을 베풀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崔公은 智謀와 策略에 여유가 있으니, 나는 다시 기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伊馛(이발)은 활을 쏘고 말을 타는 戰士인데 소견이 최공과 같으니 이는 매우 기이할 만하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발은 활쏘기를 잘하고 힘은 소를 끌고 뒷걸음치게 할 수 있으며 달리기는 달리는 말을 따라 잡았고 품성이 충성스럽고 신중하니, 魏主가 특별히 그를 총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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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魏主가 沮渠牧犍을 여전히 매부로 대우하여 예전과 같이 征西大將軍 河西王에 임명하였다. 涼州는 前涼의
이래로 많은 인재가 있다고 불렸고
注+① 〈晉 懷帝 시기〉 에 中國의 인사들이 河西로 피신하여 왔는데 張氏가 예우하여 그들을 등용했고, 자손이 서로 계승하면서 衣冠(관직)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므로 涼州에 人才가 많다고 일컬어졌다., 저거목건은 특히 文學을 좋아하였다.
그의 신하 闞駰(감인)
注+② 闞은 姓氏이며, 〈闞駰은〉 闞弘駿의 사촌 아우이다.․張湛․劉昞․索敞(삭창)․陰與․宗欽․趙柔․程駿․程弘을 魏主가 모두 예우해서 등용하였다.
예전에 安定 사람 胡叟가 저거목건에게 가서 따랐는데, 저거목건이 그를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다. 호수가 程弘에게 말하기를
“貴國의 君主는 편벽한 나라에 거주하면서 분수에 넘는 호칭을 사용하고 예를 僭用하고, 小國으로서 大國을 섬기면서 마음이 순일하지 않고, 겉으로는 仁義를 사모하면서 실제로는 道德이 없으니, 그의 멸망을 발뒤꿈치를 들고서 기다릴 만합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北魏로 갔다.
이때에 이르러 魏主가 호수를 先見之明이 있다고 여겨 虎威將軍을 임명하였다.
河内 사람 常爽은 대대로 涼州에 寓居하면서 北涼의 초빙하는 禮와 부르는 命을 받지 않았는데 魏主가 宣威將軍으로 임명하고, 索敞을 中書博士로
注+③ 中書省에는 曹魏가 中書監․中書令을 설치한 이래로 아직 博士를 둔 적이 없었는데, 拓拔氏가 처음으로 이 관직을 두었다.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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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魏主가 崔浩를
로 임명하여 史官의 직책을 통합 관리하게 하고, 侍郎 高允과 張偉에게는 著作의 사무에 참여하고 맡아보도록 하였다.
최호는 여러 曆法家들의 서적을 모아 漢나라 초기 이래 일식․월식과 五星의 운행 도수를 살펴 교정하고
注+① “漢元”은 漢나라 初期이다. 기운이 가서 접근하면 薄이 되고, 이지러지면 蝕이 된다. 五星은 木․火․土․金․水의 緯星이다., 또한 이전 史書의 잘못을 비판하여 별도로 ≪魏曆≫을 만들어서 高允에게 보여주었다.
고윤이 말하기를 “
注+② 東井은 經星으로 秦나라 分野에 있다. 모였다고 하였는데, 星傳(〈五行志〉)을 살펴보면 太白星(金星)과 辰星(水星)이 항상 태양에 붙어서 운행합니다.
注+③ 傳(기록)은 知戀의 切이다. 辰星은 北方의 水에 해당하니 太陰의 精髓이다. 일명 毚星이라고 하고, 혹은 鉤星이라고도 한다.
10월에 태양은 尾宿와 箕宿 사이에 있으면서 해가 저물 때에 〈太白星과 辰星은〉 12방위의 申方 남쪽에서 사라지고 東井宿는 바로 12방위의 寅方 북쪽에서 출현하니, 두 개의 별이 어떻게 태양과 어긋나게 운행할 수 있습니까.
注+④ 孟冬(10월)에는 태양이 尾宿에 있는데 尾宿와 箕宿의 사이에 있다고 말한 것은, 한 달을 마칠 때에 이를 말한 것이다. 背는 음이 佩이니 버린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曆術의 사소한 착오인데 史官이 그 일을 신비롭게 하려 하여 다시 그것을 이치로 추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漢나라 사관 기록을 비판하면서 이런 誤謬를 깨닫지 못하면 아마도 후인들이 지금 시기를 비판하는 것이 지금 시기에 우리가 옛날을 비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최호가 말하기를 “天文現象이 변화하려 한다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고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허하게 언쟁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다시 그것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1년이 넘어서 최호가 고윤에게 말하기를 “먼저 토론한 것은 과연 그대의 말이 맞다. 五星이 바로 이전의 3월에 東井宿에 모이는 것이지 10월이 아니다.”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탄복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