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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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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통감강목(17)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宋元嘉十六年이요 魏太延五年이라
◑是歳 涼亡하니 凡二國이라
春二月 宋以衡陽王義季 都督荆湘等州軍事하다
義季嘗春月出畋할새 有老父被苫而耕이어늘 左右斥之注+義季, 武帝子. 苫, 詩廉切, 編茅也, 蓋被苫於身以蔽雨也.한대
老父曰 今陽和布氣하니 一日不耕이면 民失其時 奈何以從禽之樂으로 而驅斥老農也
義季止馬曰 賢者也 命賜之食한대 辭曰 大王不奪農時 則境内之民 皆飽大王之食하리니 老夫何敢獨受大王之賜乎
義季問其名한대 不告而退하다
楊保宗奔魏하니 魏以爲武都王하여 守上邽하다
◑夏六月 한대
秋九月 姑臧潰하니 涼王牧犍降하다
北涼王牧犍 通於其嫂李氏하니 李氏毒魏公主어늘 魏主遣醫乘傳救之하여 得愈러니 魏主徴李氏한대 牧犍不遣하고 使居酒泉이러니
魏使者自西域還이라가 至武威 牧犍左右有告魏使者曰 我君承蠕蠕可汗妄言云호되 去歳魏天子 自來伐我하여 士馬疫死하여 大敗而還이라하니 我君大喜하여 宣言於國이라한대
使還以聞하니 魏主遣尚書賀多羅使涼州하여 觀虛實하니 亦言호되 牧犍 雖外修臣禮 内實乖悖라하다
魏主欲討之하여 以問崔浩하니 浩曰 牧犍逆心已露하니 不可不誅 官軍往年北伐 戰馬三十萬匹 死傷不滿八千이나 而遠方乘虛하여 遽謂衰耗不能復振이라하니
今出其不意하여 大軍猝至하면 彼必駭擾하여 不知所爲하리니 擒之必矣니이다 魏主曰 善
於是 大集公卿議於西堂할새 弘農王奚斤等 皆曰 牧犍 雖心不純臣이나 然職貢不乏하고 罪惡未彰하니 宜加恕宥
國家新征蠕蠕하여 士馬疲弊하니 未可大擧니이다 且聞其土地鹵瘠하여 難得水草注+鹹地曰鹵, 瘠地曰瘠.라하니
大軍旣至 彼必嬰城固守하리니 攻之不拔하고 野無所掠하면 此危道也니이다
崔浩惡李順注+伐夏之役, 浩․順有隙. 順以使涼爲魏主所寵待, 浩愈惡之.이러니 順使涼州凡十一返이라
涼武宣王 數與遊宴注+武宣王, 沮渠蒙遜也.하여 時爲驕慢之語하고 恐順泄之하여 隨以金寳納於順懐中한대
亦爲之隱하다 浩知之하고 密以白魏主한대 魏主未之信이러니
及是하여 順與古弼 皆曰 姑臧地皆枯石이라 絶無水草하고 城南天梯山上 積雪丈餘 春夏消釋하여 下流成川하니 居民以溉灌하니
彼聞軍至하고 决此渠口하면 水必乏絶하리니 人馬飢渴하여 難以久留 斤等議是라하다
浩曰 史稱涼州之畜 爲天下饒라하니 若無水草 畜何以蕃注+漢書地理志曰 “涼州土廣民稀, 水草宜畜牧, 故涼州之畜爲天下饒.”이리오
又漢人 終不於無水草之地 築城郭建郡縣也 且雪之消釋 僅能斂塵이면 何得通渠溉灌乎리오 此言大爲欺誣矣로다
李順曰 耳聞不如目見이니라 浩曰 汝受人金錢하고 欲爲之遊説하여 謂我目不見 便可欺邪
魏主隱聽聞之注+隱聽者, 隱屛而聽也.하고 乃出見斤等하여 辭色嚴厲하니 群臣不敢復言하고 唯唯而已러라
群臣旣出 將軍伊馛 言曰注+馛, 蒲撥切. 伊馛, 姓名. 涼州若果無水草 彼何以爲國이리오 宜從浩言이니이다
魏主從之하여 六月發平城하여 使穆壽輔太子晃監國하고 又使大將軍嵇敬將二萬人하여 屯漠南하여 以備柔然하고 命公卿爲書讓牧犍하여 數其十二罪하고
且曰 若親帥群臣委贄遠迎하여 謁拜馬首 上策也注+古者執贄以見, 拜贄, 首則委之於地, 起則取而進之, 此之謂委贄. 六軍旣臨 面縛輿櫬 其次也
若守迷窮城하여 不時悛悟하면 身死族滅하여 爲世大戮하리니 宜思厥中하여 自求多福이니라
七月 至上郡屬國城하여 部分諸軍하여 以源賀爲鄉導注+漢置屬國於邊郡, 以處降胡, 此屬國城, 漢舊城也. 班書地理志 “上郡龜玆縣, 屬國都尉治.” 源賀, 禿髮傉檀之子也. 晉安帝義熙十年, 傉檀爲乞伏熾磐所滅, 賀奔魏, 魏明元帝謂賀曰 “卿之先與朕同源, 賜姓源氏.”하다 魏主問以方略한대 對曰
姑臧城旁 有四部鮮卑하니 皆臣祖父舊民이라 臣願處軍前하여 宣國威信하여 示以禍福하면 必相帥歸命하리니
外援旣服이면 取其孤城 如反掌耳리이다 魏主曰 善
八月 牧犍求救於柔然하고 遣其弟董來하여 將兵萬餘人出戰이나 望風犇潰 魏主至姑臧하여 遣使喻牧犍出降하니
牧犍聞柔然欲入魏邊하고 冀幸魏主東還하여 遂嬰城固守어늘 魏主分軍圍之러니 源賀引兵招慰諸部下三萬餘落하니 故魏主得專攻姑臧하여 無復外慮러라
魏主見姑臧水草豐饒하고 由是恨李順하여 謂崔浩曰 卿言 驗矣로다
始太子晃 亦以西伐爲疑러니 至是詔報之曰 姑臧東西門外涌泉 合於城北하여 其大如河하고 自餘溝渠 流入漠中하니 其間 乃無燥地也라하더라
九月 姑臧城潰하니 牧犍帥其文武五千人하여 面縛請降이어늘 魏主釋而禮之하고 收其城内戸口二十餘萬하고
使張掖王秃髪保周將軍穆罷源賀하여 分徇諸部하니 雜胡降者 又數十萬注+保周奔魏, 封張掖公, 今進爲王. 保周, 源賀之兄也.이라 擊取張掖樂都酒泉武威하여 皆置將守之하고
魏主置酒姑臧하고 謂群臣曰 崔公 智略有餘하니 吾不復以爲奇어니와 伊馛弓馬之士로되 而所見乃與崔公同하니 此深可奇也로다
馛善射하고 能曳牛却行하며 走及奔馬하고 而性忠謹하니 故魏主特愛之하더라
柔然 冦魏不克하다
魏主之西伐也 穆壽送至河上이어늘 魏主勅之曰 吳提與牧犍相結素深注+吳提, 勅連可汗名.하니 聞朕西伐하면 必來犯塞하리니
朕故留壯兵肥馬하여 使卿輔太子하노니 收田畢하면 即發兵詣漠南하여 分伏要害하여 以待虜至하여 引使深入然後 擊之 無不克矣리라
壽信卜筮 以爲柔然必不來하여 不爲之備러니 而柔然勅連可汗 果乘虛入寇할새 留其兄乞列歸하여 與嵇敬으로 相拒於北鎭하고 自帥精騎深入注+北鎭, 卽魏主破降高車所置六鎭也. 以在平城之北, 故曰北鎭. 或曰 “北鎭, 直代都北, 卽懷朔鎭.”하니 平城大駭
穆壽不知所爲하여 欲塞西郭門하고 請太子避保南山이어늘 竇太后不聽而止하고 乃遣軍拒之於吐頹山이러니
會嵇敬擊破乞列歸於陰山北擒之하고 하고 斬首萬餘級하니 勅連聞之遁去하다
冬十月 魏以樂平王丕 鎭涼州하다
魏主東還 留樂平王丕及將軍賀多羅하여 鎭涼州하고 徙沮渠牧犍宗族及吏民三萬户于平城하다
魏張掖王秃髪保周 據郡叛하다
◑十二月 하다
劭美鬚眉하고 好讀書하며 便弓馬하고 喜延賓客하니 意之所欲 宋主必從之 東宮置兵 與羽林等이러라
魏主還平城하다
魏主猶以妹壻待沮渠牧犍하여 拜征西大將軍河西王如故하다 涼州自張氏以來 號爲多士注+永嘉之亂, 中州之人士避地河西, 張氏禮而用之, 子孫相承, 衣冠不墜, 故涼州號爲多士. 牧犍尤喜文學이라
其臣闞駰張湛劉昞索敞陰與宗欽趙柔程駿程弘 魏主皆禮而用之注+闞, 姓也. 弘駿從弟也.하다
安定胡叟 往從牧犍한대 牧犍不甚重之러니 叟謂程弘曰
貴主 居僻陋之國而淫名僭禮하고 以小事大而心不純壹하고 外慕仁義而實無道德하다 其亡 可翹足而待也라하고 遂適魏러니
至是하여 魏主以爲先識이라하여 拜虎威將軍하고
河内常爽 世寓涼州하여 不受禮命이러니 魏主以爲宣威將軍하고 以索敞爲中書博士注+中書, 自曹魏置監令以來, 未嘗置博士, 蓋拓拔氏初置是官也.하다
魏方尚武功하니 貴遊子弟 不以講學爲意注+貴遊子弟, 王公之子弟. 遊, 無官司者.러니 敞爲博士十餘年 勤於誘導하여 肅而有禮하니 貴遊嚴憚하여 多所成立이러라
常爽亦置館於温水之右注+水經註 “桑乾城西十里有溫湯.”하여 教授七百餘人이어늘 立賞罰之科하니 弟子事之如嚴君이라 由是 魏之儒風始振하니라
魏命崔浩髙允하여 修國史하다
魏主命崔浩監秘書事하여 綜理史職하고 以侍郎高允張偉 參典著作하다
浩集諸曆家하여 考校漢元以來日月薄蝕五星行度하고 并譏前史之失하여 别爲魏曆하여 以示高允注+漢元, 漢初也. 氣往迫之爲薄, 虧缺爲蝕. 五星, 木․火․土․金․水緯星也.하니
允曰 漢元年十月 五星聚東井注+東井經星在秦分.이라하니 案星傳컨대 太白辰星 常附日而行注+傳, 知戀切. 辰星, 北方水, 太陰之精. 一名, 毚星, 或曰鉤星.이라
十月 日在尾箕하여 昏没於申南하고 而東井方出於寅北하니 二星何得背日而行注+孟冬之月, 日在尾. 言在尾․箕者, 竟一月言之也. 背, 音佩, 棄也.이리오 此乃曆術之淺事로되 而史官欲神其事하여 不復推之於理하니
今譏漢史而不覺此謬하면 恐後人之譏今 猶今之譏古也라한대
浩曰 天文欲爲變者인대 何所不可邪 允曰 此不可以空言爭이라 宜更審之라하더니
後歲餘 浩謂允曰 先所論者 果如君言이로다 五星乃以前三月聚東井이요 非十月也라하니 衆乃歎服이러라
允雖明曆이로되 初不推歩論説注+推歩, 謂究日月五星之度․昏旦節氣之差.하니 惟東宮少傅游雅知之하고 數以災異問允한대
允曰 陰陽災異知之甚難이요 旣已知之 復懼漏泄이니 不如不知也 天下妙理至多하니 何遽問此
魏除田禁하다
魏主問高允호되 爲政何先 允曰 臣少賤하여 惟知農事하니 若國家廣田積榖하여 公私有備 則饑饉不足憂矣리이다
時魏多封禁良田이라 故允及之하니 魏主乃命悉除其禁하여 以賦百姓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16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太延 5년이다.
이해에 北涼이 망하니, 모두 두 나라이다.
[綱] 봄 2월에 宋나라가 衡陽王 劉義季를 都督荆湘等州諸軍事로 삼았다.
[目] 劉義季가 일찍이 봄철에 사냥을 나갔을 적에 어떤 노인이 거적을 쓰고 밭을 갈고 있자注+① 劉義季는 宋나라 武帝(劉裕)의 아들이다. 苫(거적)은 詩廉의 切이니, 띠풀을 엮은 것으로, 몸에 거적을 씌워 비를 가리는 것이다. 측근들이 그를 내쫓으려고 하였는데,
노인이 말하기를 “사냥 놀이를 즐기는 것은 옛사람이 경계한 일입니다. 지금 햇살이 화창한 기운을 펼칠 때 하루 동안 밭을 갈지 않으면 백성은 농사짓는 시기를 잃게 됩니다. 어찌하여 짐승을 쫓아 사냥하는 즐거움으로 늙은 농부를 몰아 내쫓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유의계가 말을 멈추고 말하기를 “어진 사람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측근에게 명하여 음식을 내려주자 사양하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농사지을 시기를 빼앗지 않으시면 境內의 백성들이 모두 대왕의 음식을 배부르게 먹을 것입니다. 이 늙은이가 어찌 감히 홀로 대왕이 내려주시는 것을 받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의계가 그의 이름을 물었는데 고하지 않고 물러갔다.
[綱] 楊保宗이 北魏로 달아나니, 北魏에서 武都王으로 삼아 上邽를 지키게 하였다.
[綱] 여름 6월에 魏主가 北涼을 정벌하였다.
가을 9월에 〈北涼의〉 姑臧이 함락되니, 涼王 沮渠牧犍이 투항하였다.
[目] 北涼王 沮渠牧犍이 그의 형수 李氏를 간통하니, 이씨가 北魏의 武威公主를 毒殺하려 하였다. 魏主가 의사를 보내 역말을 타고 가서 무위공주를 구하여 낫게 되었다. 魏主가 李氏를 불렀는데 저거목건이 보내지 않고 酒泉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北魏 사신이 西域에서 돌아오다가 武威에 도착했을 때에 저거목건의 측근이 北魏의 사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주군이 蠕蠕(柔然)可汗의 妄言을 전해 듣기를 ‘작년에 北魏의 天子가 직접 나를 치러 왔다가 병사들과 말이 병들어 죽어서 대패하고 돌아갔다.’라고 하였는데, 우리 주군이 크게 기뻐하여 온 나라에 널리 알렸습니다.”라고 하였다.
北魏의 사신이 돌아와 이를 아뢰니, 魏主가 尚書 賀多羅를 파견하여 涼州에 사신 보내서 虛實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하다라가 돌아와서 또한 말하기를 “저거목건이 비록 겉으로는 신하의 예를 표하나 속마음은 실로 어긋나고 불순합니다.”라고 하였다.
[目] 魏主가 그들을 토벌하려고 崔浩에게 물으니, 최호가 말하기를 “沮渠牧犍의 逆心이 이미 드러났으니 주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官軍이 지난해 北伐을 했을 적에 戰馬 30만 필 중에 죽거나 다친 것이 8천 필도 되지 않았으나, 먼 곳의 적들은 우리의 빈틈을 타서 바로 말하기를 ‘쇠약해지고 소모되어 회복하지 못한다.’라고 합니다.
지금 저들의 뜻밖의 상황에서 출동하여 대군이 갑자기 도착하면 저들은 필시 놀라 소동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니 그들을 사로잡는 것은 분명합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말하기를 “좋다.”라고 하였다.
이에 모든 公卿들을 西堂에 소집하여 논의할 적에 弘農王 奚斤 등이 모두 말하기를 “저거목건이 비록 마음은 불순한 신하이지만, 공물 바치는 것을 빠뜨리지 않았고 죄악이 아직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으니 마땅히 용서해줘야 할 것이고,
국가가 방금 蠕蠕을 정벌해서 병사와 말이 지쳐 있으니 아직은 대규모로 출동할 수가 없습니다. 또 그곳의 토지는 염분이 많고 척박하여注+① 소금이 섞인 땅을 鹵라고 하고, 메마른 땅을 瘠이라고 한다. 물과 풀을 얻기가 어렵다고 들었습니다.
대군이 도착하고 나면 저들은 필시 성곽을 둘러싸고 성을 굳게 지킬 것입니다. 공격해도 함락하지 못하고 들판에 약탈할 것도 없으면 이것은 위험한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目] 예전에 崔浩가 李順을 미워하였다.注+① 夏나라를 정벌하는 전쟁에 崔浩와 李順이 틈이 있었다. 이순이 北涼에 使臣을 다니면서 魏主의 총애를 받자, 최호가 더욱 그를 미워하였다. 이순이 사신으로 涼州를 다녀온 것이 모두 11번이다.
北涼의 武宣王이注+② 武宣王은 沮渠蒙遜이다. 자주 이순과 놀며 연회를 열어 그때마다 驕慢한 말을 했고, 이순이 그것을 누설할까 두려워하여 그에 따라 금과 보석을 그의 품속에 넣어주었다.
이순 역시 그를 위해 비밀로 해주었다. 최호가 그것을 알고 비밀리에 魏主에게 아뢰었으나, 魏主가 믿지 않았다.
이때에 와서 이순과 古弼이 모두 말하기를 “姑臧 지역은 모두 메마르고 돌투성이며 물과 풀이 전혀 없고, 姑臧城 남쪽 天梯山 위에는 쌓인 눈이 1丈 남짓이나 됩니다. 봄과 여름에 조금씩 녹아서 아래로 흘러 개천을 이루니, 거주민들은 그 물을 끌어다 灌漑를 합니다.
저들이 우리 군대가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 개천의 입구를 터놓으면 물이 필시 모자라 끊어지게 될 것이니, 병사와 말이 굶주리고 목이 말라 오래 머무르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奚斤 등이 논의한 것은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目] “史籍에는 涼州의 畜産이 천하에서 가장 풍요롭다고 한다. 만약 물과 풀이 없다면 가축이 어떻게 번성하겠는가.注+① ≪漢書≫ 〈地理志〉에 “涼州는 땅이 넓고 백성이 드물며 물과 풀이 목축을 하는 데 마땅하기 때문에 涼州의 축산은 천하에서 가장 풍요롭다.”라고 하였다
또 漢人들은 결코 水草가 없는 지역에 城郭을 쌓거나 郡縣을 세우지 않는다. 또 눈이 녹아 흐르는 것이 겨우 塵土를 적실 뿐이라면 어떻게 도랑을 통하여 관개를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은 크게 속이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李順이 말하기를 “귀로 듣는 것이 눈으로 보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자, 최호가 말하기를 “그대는 남의 金錢을 받고 그를 위해 유세하여 내가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다고 바로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시오.”라고 하였다.
魏主가 은밀히 그들의 말을 엿듣다가注+② “隱聽”은 가려진 병풍 뒤에서 듣는 것이다. 바로 나와서 奚斤 등을 보면서 말과 얼굴빛을 매우 근엄하게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감히 다시 말을 하지 못하고 “예예.”라고 할 뿐이었다.
[目] 여러 신하들이 나가고 나서 將軍 伊馛(이발)이注+① 馛은 蒲撥의 切이다. 伊馛은 姓名이다. 말하기를 “涼州에 만약 물과 풀이 없다면 저들은 어떻게 국가를 세웠겠습니까. 마땅히 崔浩의 말을 따라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그것을 따라서 6월에 平城을 출발하여 宜都王 穆壽를 시켜서 太子 拓跋晃을 보좌하며 監國하게 하였다. 또 大將軍 嵇敬을 시켜서 2만 명을 거느리고서 漠南에 駐屯하여 柔然의 침입에 대비하고 公卿들에게 명하여 沮渠牧犍을 꾸짖는 글을 작성하여 12가지 죄상을 조목조목 열거하게 하였다.
또 말하기를 “네(沮渠牧犍)가 친히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와서 예물을 바치고注+② 옛날에는 예물을 가지고 가서 뵙고 절하며 예물을 바치는데 머리는 땅에 닿도록 하며 일어나서는 예물을 가지고 올리니, 이것을 “委贄”라고 말한다. 멀리까지 나와서 영접하여 나의 말머리 앞에서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 최상의 계책이다. 六軍이 도착하고 나서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을 들고 관을 수레에 싣고 오는 것이 그 다음 계책이 될 것이다.
만약 昏懜한 생각을 고집하여 곤궁한 성을 지키면서 제때에 뉘우치고 깨닫지 못하면 자신도 죽고 종족도 멸하여 세상의 가장 큰 죄인이 될 것이다. 마땅히 그 가운데 하나를 잘 생각해서 스스로 많은 복을 구하라.”라고 하였다.
[目] 7월에 에 도착하여 여러 군대를 나누어 禿髮源賀를 鄉導로 삼았다.注+① 漢나라는 屬國을 에 두어 항복한 오랑캐들을 거주하게 하였는데 여기에서 보이는 屬國城이 漢나라 옛 城이다. ≪漢書≫ 〈地理志〉에 “上郡 龜玆縣은 屬國都尉의 治所이다.”라고 하였다. 禿髮源賀는 禿髮傉檀의 아들이다. 晉 安帝 義熙 10년(414)에 독발녹단이 乞伏熾磐에게 멸망당하자 독발원하는 北魏로 달아났다. 北魏의 明元帝가 독발원하에게 말하기를 “卿의 선조는 朕과 근원이 같으므로 源氏 姓을 下賜한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方略을 물었는데 원하가 대답하기를
“姑臧城 옆에는 4部의 鮮卑族이 있으니 모두 臣의 祖父가 다스리던 옛 백성들입니다. 신은 바라건대 先鋒에 서서 그들에게 우리 국가의 위엄과 신망을 宣揚하여 禍福의 이해를 보여주면 반드시 서로 무리를 이끌고 와서 귀순할 것입니다.
밖에서 지원하는 세력이 복종하고 나면 고립된 성을 취하는 것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과 같습니다.”라고 하니, 魏主가 좋다고 하였다.
[目] 8월에 沮渠牧犍이 柔然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그 아우 沮渠董來를 파견하여 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나가 싸우게 하였으나 〈北魏 군대가 온다는〉 풍문만 듣고도 달아나 무너졌다. 魏主가 姑臧에 도착하여 저거목건에게 사신을 보내 나와서 항복하도록 유시하였다.
저거목건은 柔然이 北魏의 변방으로 침입하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魏主가 동쪽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서 마침내 성곽을 둘러싸고 굳게 수비하였는데, 魏主가 군대를 나누어 성을 포위하였다. 源賀가 병사를 이끌고 가서 〈그의 조부의〉 휘하에 있는 3만여 부락을 불러 모아 위로하였다. 그러므로 魏主가 오로지 姑臧城을 공격할 수 있어서 다시 그 이외를 걱정할 것이 없었다.
魏主가 姑臧에 물과 풀이 풍요로운 것을 보고 이로 인해 李順을 원망하여 崔浩에게 말하기를 “卿의 말이 증명되었다.”라고 하였다.
예전에 太子 拓跋晃이 또한 魏主가 서쪽으로 北涼을 정벌하는 것을 의심스럽게 여겼는데, 이때에 이르러 조서를 내려 太子에게 회답하기를 “姑臧 東西門 밖에 솟아오르는 샘물이 성곽 북쪽에서 합하는데 그 크기가 黃河와 같고 그 이외 도랑물이 沙漠 속으로 流入되니 그 사이에 건조지대가 없다.”라고 하였다.
[目] 9월에 姑臧城이 함락되니, 沮渠牧犍이 文武官員 5천 명을 거느리고 손을 뒤로 묶고 얼굴을 들고 投降을 요청하였다. 魏主가 결박을 풀어주며 예우하고 성안에 20여만 戶口를 接收하였다.
張掖王 秃髪保周注+① 秃髪保周는 北魏로 도망쳐서 張掖公에 봉해졌다가 지금은 승진하여 왕이 되었다. 독발보주는 禿髮源賀의 형이다., 將軍 穆罷․源賀를 시켜서 여러 부락에 나누어 경략하게 하니 여러 胡人들의 投降한 자가 또한 수십만 명이었다. 張掖․樂都․酒泉․武威를 공격해 탈취하여 모두 장수를 두어 수비하도록 하였다.
魏主가 姑臧에서 酒宴을 베풀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崔公은 智謀와 策略에 여유가 있으니, 나는 다시 기이하게 여길 것이 없다. 그러나 伊馛(이발)은 활을 쏘고 말을 타는 戰士인데 소견이 최공과 같으니 이는 매우 기이할 만하다고 하겠다.”라고 하였다.
이발은 활쏘기를 잘하고 힘은 소를 끌고 뒷걸음치게 할 수 있으며 달리기는 달리는 말을 따라 잡았고 품성이 충성스럽고 신중하니, 魏主가 특별히 그를 총애하였다.
[綱] 柔然이 北魏를 침범하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였다.
[目] 魏主가 서쪽으로 征伐할 때에 穆壽가 黃河 강변까지 와서 전송하였다. 魏主가 그에게 칙령을 내리기를 “柔然의 郁久閭吳提는注+① 吳提는 勅連可汗의 이름이다. 沮渠牧犍과 서로 결탁한 것이 본래부터 깊으니, 朕이 서쪽으로 정벌에 나섰다는 소식을 들으면 필시 변방을 침범해올 것이다.
짐이 그 때문에 건장한 병사와 살찐 말을 남겨 卿을 시켜서 太子를 보좌토록 한 것이다. 밭의 수확을 마치면 곧바로 군대를 출동하여 漠南으로 가서 요충지에 복병을 나누어 배치하고 오랑캐가 도착하기를 기다려서 그들을 깊숙한 곳으로 유인한 후에 공격하면 이기지 못하는 경우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目] 穆壽는 점을 믿었으므로, 柔然이 반드시 침범해오지 않을 것이라 하여 대비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柔然의 勅連可汗이 과연 허점을 노려 침입해 노략질 할 적에 그의 형 郁久閭乞列歸를 남겨두어 北魏의 嵇敬과 北鎭에서注+① 北鎭은 곧 魏主가 高車를 격파하여 항복을 받고 설치한 6鎭이다. 平城 북쪽에 있기 때문에 北鎭이라고 한다. 혹은 말하기를 “北鎭은 代都 북쪽에 설치한 것이니 곧 懷朔鎭이다.”라고 하였다. 대치하도록 하고, 자신이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北魏로 깊이 들어가자 平城 사람들이 크게 놀랐다.
목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쪽 성곽 문을 막고 남산으로 대피하여 수비할 것을 태자에게 청하였다. 그러나 竇太后가 허락하지 않아 중지하고 바로 군대를 보내 吐頹山에서 그들을 막도록 하였다.
마침 혜경이 陰山 북쪽에서 욱구려걸렬귀를 격파하여 사로잡고, 아울러 장수를 사로잡은 것이 5백 명이고, 斬首한 것이 1만여 급이었다. 칙련가한은 소식을 듣고 달아났다.
[綱] 겨울 10월에 北魏가 樂平王 拓跋丕로 涼州를 鎭守하도록 하였다.
[目] 魏主가 동쪽으로 돌아올 적에 樂平王 拓跋丕와 將軍 賀多羅를 머물게 하여 涼州를 鎭守하도록 하였다. 沮渠牧犍의 종족과 관리․백성 3만 戶를 平城으로 이주시켰다.
[綱] 北魏 張掖王 秃髪保周가 張掖郡을 점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綱] 12월에 宋나라 太子 劉劭가 冠禮를 거행하였다.
[目] 劉劭는 수염과 눈썹이 아름답고 독서를 좋아하며 활쏘기와 騎馬에 숙달되고 빈객들을 기뻐하여 끌어들이니, 마음속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宋主가 반드시 들어주었다. 東宮에 병사를 배치한 〈그 규모와 격식이〉 과 서로 동등하였다.
[綱] 魏主가 平城으로 돌아왔다.
[目] 魏主가 沮渠牧犍을 여전히 매부로 대우하여 예전과 같이 征西大將軍 河西王에 임명하였다. 涼州는 前涼의 이래로 많은 인재가 있다고 불렸고注+① 〈晉 懷帝 시기〉 에 中國의 인사들이 河西로 피신하여 왔는데 張氏가 예우하여 그들을 등용했고, 자손이 서로 계승하면서 衣冠(관직)을 실추시키지 않았으므로 涼州에 人才가 많다고 일컬어졌다., 저거목건은 특히 文學을 좋아하였다.
그의 신하 闞駰(감인)注+② 闞은 姓氏이며, 〈闞駰은〉 闞弘駿의 사촌 아우이다.․張湛․劉昞․索敞(삭창)․陰與․宗欽․趙柔․程駿․程弘을 魏主가 모두 예우해서 등용하였다.
예전에 安定 사람 胡叟가 저거목건에게 가서 따랐는데, 저거목건이 그를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다. 호수가 程弘에게 말하기를
“貴國의 君主는 편벽한 나라에 거주하면서 분수에 넘는 호칭을 사용하고 예를 僭用하고, 小國으로서 大國을 섬기면서 마음이 순일하지 않고, 겉으로는 仁義를 사모하면서 실제로는 道德이 없으니, 그의 멸망을 발뒤꿈치를 들고서 기다릴 만합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北魏로 갔다.
이때에 이르러 魏主가 호수를 先見之明이 있다고 여겨 虎威將軍을 임명하였다.
河内 사람 常爽은 대대로 涼州에 寓居하면서 北涼의 초빙하는 禮와 부르는 命을 받지 않았는데 魏主가 宣威將軍으로 임명하고, 索敞을 中書博士로注+③ 中書省에는 曹魏가 中書監․中書令을 설치한 이래로 아직 博士를 둔 적이 없었는데, 拓拔氏가 처음으로 이 관직을 두었다. 삼았다.
[目] 당시에 北魏가 한창 武功을 존중하니 귀족 자제들이注+① 貴遊子弟는 王公의 子弟이다. 遊는 관직이 없는 자이다. 講學에 뜻을 두지 않았다. 索敞(삭창)이 博士가 된 지 10여 년 동안 가르치는 데 힘쓰면서 엄숙하고 예의가 있으니 귀족 자제들이 그를 엄히 두려워하여 성취하는 바가 많았다.
常爽이 또한 温水注+② ≪水經註≫에 “桑乾城 서쪽 10里에 溫湯이 있다.”라고 하였다. 서쪽에 學館을 두어 7백여 명을 가르쳤는데, 賞罰의 조항을 확립하니 제자들이 엄한 임금처럼 그를 섬겼다. 이로 말미암아 北魏 儒學의 氣風이 비로소 발전하였다.
[綱] 北魏가 崔浩와 髙允에게 명하여 國史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目] 魏主가 崔浩를 로 임명하여 史官의 직책을 통합 관리하게 하고, 侍郎 高允과 張偉에게는 著作의 사무에 참여하고 맡아보도록 하였다.
최호는 여러 曆法家들의 서적을 모아 漢나라 초기 이래 일식․월식과 五星의 운행 도수를 살펴 교정하고注+① “漢元”은 漢나라 初期이다. 기운이 가서 접근하면 薄이 되고, 이지러지면 蝕이 된다. 五星은 木․火․土․金․水의 緯星이다., 또한 이전 史書의 잘못을 비판하여 별도로 ≪魏曆≫을 만들어서 高允에게 보여주었다.
고윤이 말하기를 “注+② 東井은 經星으로 秦나라 分野에 있다. 모였다고 하였는데, 星傳(〈五行志〉)을 살펴보면 太白星(金星)과 辰星(水星)이 항상 태양에 붙어서 운행합니다.注+③ 傳(기록)은 知戀의 切이다. 辰星은 北方의 水에 해당하니 太陰의 精髓이다. 일명 毚星이라고 하고, 혹은 鉤星이라고도 한다.
10월에 태양은 尾宿와 箕宿 사이에 있으면서 해가 저물 때에 〈太白星과 辰星은〉 12방위의 申方 남쪽에서 사라지고 東井宿는 바로 12방위의 寅方 북쪽에서 출현하니, 두 개의 별이 어떻게 태양과 어긋나게 운행할 수 있습니까.注+④ 孟冬(10월)에는 태양이 尾宿에 있는데 尾宿와 箕宿의 사이에 있다고 말한 것은, 한 달을 마칠 때에 이를 말한 것이다. 背는 음이 佩이니 버린다는 뜻이다. 이는 바로 曆術의 사소한 착오인데 史官이 그 일을 신비롭게 하려 하여 다시 그것을 이치로 추리하지 않은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漢나라 사관 기록을 비판하면서 이런 誤謬를 깨닫지 못하면 아마도 후인들이 지금 시기를 비판하는 것이 지금 시기에 우리가 옛날을 비판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최호가 말하기를 “天文現象이 변화하려 한다면 어찌 불가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고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공허하게 언쟁으로 밝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다시 그것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1년이 넘어서 최호가 고윤에게 말하기를 “먼저 토론한 것은 과연 그대의 말이 맞다. 五星이 바로 이전의 3월에 東井宿에 모이는 것이지 10월이 아니다.”라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탄복하였다.
[目] 高允이 비록 천문역법에 명석하였지만 처음에 天文을 推步하여注+① “推歩”는 日․月․五星의 度數와 朝夕과 24절기의 차이를 연구하는 것을 말한다. 논설하지 않았다. 오직 東宮少傅 游雅가 그것을 알고 자주 고윤에게 災異를 물었다.
고윤이 말하기를 “陰陽․災異를 아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면 그것이 다시 누설될까 두려워해야 하니 모르는 것만 못하다. 천하에 묘한 이치가 지극히 많은데 어찌하여 급하게 이를 묻는가.”라고 하였다.
[綱] 北魏가 을 해제하였다.
[目] 魏主가 高允에게 묻기를 “政治를 함에는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가?”라고 하니, 고윤이 대답하기를 “臣은 어려서부터 비천하여 오직 농사만 알았습니다. 만약 국가가 田地를 넓혀 곡식을 쌓아두어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대비함이 있으면 飢饉은 근심할 것이 못 됩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北魏는 良田을 封禁한 것이 많았으므로, 고윤이 이렇게 말한 것이다. 魏主가 명하여 마침내 양전의 封禁을 모두 해제하여 백성들에게 토지를 분급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盤于遊畋 古人所戒 : ≪書經≫ 〈周書 無逸〉의 “文王이 감히 유람과 사냥의 즐거움에 빠지지 않았다.[文王不敢盤於遊田]”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역주2 魏主伐涼 : “西秦이 北涼을 압박할 적에 ‘攻’이라고 기록했는데, 여기서 ‘伐’이라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北涼이 北魏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의 기록하고 삭제함이 준엄하다.[秦加涼書攻 此其書伐 何 涼受魏爵也 綱目之筆削 嚴矣]” ≪書法≫
역주3 (仰)[引] : 저본에는 ‘仰’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引’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崔浩가 말하기를 : ≪資治通鑑≫에는 이 구절 앞에 魏主가 崔浩에게 명을 내려 奚斤 등과 함께 서로 변론하게 하였는데, 해근 등은 다른 말을 하지 않고 그곳에는 물과 풀이 없다고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
역주5 上郡 屬國城 : 지금의 陝西省 楡林市 북쪽 萬里長城 밖에 위치하고 있다. 屬國은 漢나라 때 귀부한 이민족을 안치하기 위한 행정구역이다. 이는 漢나라 북․서․동쪽의 변경에 설치되었으며, 특히 天水․上郡․西河․五原․金城․北地․犍爲․張掖․居延․遼東 등에 설치되었다. 속국에는 屬國都尉, 屬國長史 등을 두었다. 속국은 일반 郡과 대등한 지위를 부여받았다.
역주6 邊郡 : 中國에 설치되었던 郡縣을 內郡이라 부르고, 중국 밖 夷狄의 영역에 설치된 이 새로운 군현을 外郡 혹은 邊郡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역주7 及將帥五百人 : ≪資治通鑑≫에는 이 앞에 “幷其伯父他吾無鹿胡”가 있어 “그 백부 욱구려타오무녹호 및 장수 500인을 사로잡았다.”라고 하였다.
역주8 宋太子劭冠 : “太子의 관례는 기록한 적이 없는데 여기서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劉劭가 元兇이기 때문이다. 그가 태어나고 그가 太子에 서고 그가 관례하는 것을 ≪資治通鑑綱目≫에서는 모두 신중하게 기록하였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太子의 관례를 기록한 것은 2번이다(이해(439), 唐 太宗 貞觀 5년(631)).[太子冠 未有書者 此其書 何 劭元惡也 其生其立其冠 綱目皆謹書之 終綱目 書太子冠二(是年 唐太宗貞觀五年)]” ≪書法≫ “宋立子劭爲太子(宋나라가 皇子 劉劭를 세워 태자로 삼았다.)”는 본서 118쪽에 보인다.“劉劭가 태어나고 유소가 태자에 서고 劉劭가 관례하는 것을 모두 冊에 기록한 것은 다른 나라의 경우와 다르니 신중히 한 것이다. 하물며 東宮에 병사를 배치함이 羽林軍과 서로 동등하게 하였으니 또한 모두 나라가 어지럽게 되는 근본이다. 어찌 기록하지 않을 수 있으랴.[劭生劭立劭冠 皆書于冊 異於他國 葢謹之也 況東宮置兵 與羽林等 亦皆亂之本 豈得不志之乎]” ≪發明≫
역주9 羽林軍 : 황제의 禁衛軍으로 漢 武帝 太初 원년(B.C.102)에 설치되었다. 이는 魏晉南北朝時代에도 이어졌으나 운용에 있어 시대별로 변경되었으며, 北朝와 南朝에서도 차이가 있다.
역주10 張氏 : 前涼王의 성씨로 漢族의 명가 집안이다. 五胡의 침입으로 중원이 혼란스럽게 되자 많은 지식인들이 난을 피하여 前涼으로 이주하였다. 前涼은 9代를 이어가다가 前秦에게 망하였다.
역주11 永嘉의 난리 : 晉 懷帝가 永嘉 7년(313)에 흉노의 추장 劉聰에게 죽임을 당한 난리를 말한다. 永嘉는 西晉 懷帝 때의 연호이다. 南匈奴의 劉淵이 漢(前趙)이라 칭하고 洛陽을 함락시켜 결국 西晉이 멸망하고, 이후 華北 지역은 유목 민족의 지배를 받게 되는 5胡16國 시대가 시작되었다.(≪晉書≫ 〈懷帝紀․愍帝紀〉)
역주12 監秘書事 : 秘書監으로 秘書省의 최고 관직이다. 圖書와 秘書를 관리하고 著作郞 등을 거느리며 역사 찬술을 관장하였다.
역주13 漢나라……하였는데 : ≪漢書≫ 〈高祖紀〉에 “漢 高祖 원년(B.C.206) 겨울 10월에 五星이 東井에 모였다. 沛公이 霸上에 이르렀다.[元年冬十月 五星聚于東井 沛公至霸上]”라는 기사가 있다. 이때 秦王 子嬰이 한 고조에게 항복하였다.
역주14 田禁 : 아래 目의 ‘封禁良田’을 가리킨 것이다. ≪資治通鑑新註≫(陝西人文出版社, 1998)에 “良田을 가지고 牧場으로 바꾸고 사람들이 경작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라고 하였다. 北魏 拓跋氏는 유목민이었기에 이런 정책을 펼친 것이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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