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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1)

자치통감강목(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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甲辰年(224)
二年이라
魏黃初五年이요 吳黃武三年이라
夏四月 魏立太學하다
初平以來 學道廢墜注+初平, 獻帝年號.러니 至是하여 初立太學하고 置博士하고 依漢制하여 設五經課試之法하다
吳人 來聘이어늘 復遣鄧芝報之하다
吳使張溫來聘하니 自是 行使不絶하고 時事所宜 吳王權 常令陸遜語諸葛亮하고
又刻印置遜所하여 每與帝及亮書 必以示遜하여 有不安이면 輒改而封之러라
鄧芝至吳한대 謂曰 若天下太平이면 二主分治 不亦樂乎 芝對曰 天無二日이요 土無二王이니 如幷魏之後 大王 未識天命이면
君各茂其德하고 臣各茂其忠이리니 則戰爭方始耳니이다 大笑曰 君之誠款 乃當爾邪아하니라
秋八月 魏主丕以舟師擊吳러니 臨江而還하다
魏主丕欲大興軍伐吳어늘 辛毗諫曰 天下新定하여 土廣民稀而欲用之하시니 未見其利
今日之計 莫若養民屯田하여 十年然後用之하면 則役不再擧矣리이다
丕不從하고 留尙書僕射司馬懿하여 鎭許昌하고 親御龍舟하고 循蔡, 潁浮淮하여 如壽春이라가 至廣陵注+水經 “蔡河自陳留浚儀, 東南流而入於潁, 潁水出潁川陽城縣少室山, 東南流, 至新陽, 與蔡河合, 又東南至愼縣, 東南入于淮.” 郡國志 “廣陵郡, 景帝置爲江都, 武帝更名.”하다
吳將軍徐盛 列舟艦于江하고 而植木衣葦하여 爲疑城假樓하여 自石頭 至于江乘 聯綿數百里로되 一夕而就注+衣, 於旣切. 植木於內, 以蘆蔽遮其外, 爲疑城假樓. 江乘縣, 屬丹陽郡, 吳省爲典農都尉治, 其地在建業東北.러라
江水盛長注+長, 知兩切.이라 丕臨望하고 嘆曰 魏雖有武騎千群이나 無所用之 未可圖也로다
暴風至하여 龍舟幾覆하다 丕問群臣호되 權當自來否
劉曄曰 彼謂陛下欲以萬乘之重牽己 而超越江湖者 在於別將이라하여 必勒兵待事 未有進退也리이다
旣而 吳王權 果不至하니 於是 旋師하다
吳尙書曁豔 郞徐彪有罪自殺하다
吳張溫 少以俊才 有盛名하니 顧雍 以爲當今無輩라하니라
薦同郡曁豔하여 爲選部尙書注+溫, 吳郡人. 曁, 居乙切. 曁豔, 姓名. 選部, 卽選曹, 主銓選事.하니 好爲淸議하야 彈射百僚하고 覈奏三署注+彈, 音壇, 糾也. 射, 食亦切. 三署, 謂五官‧左‧右三署郞也.하여 貶高就下하여 十不存一이요
其居位貪鄙하고 志節汚卑者 皆以爲軍吏하여 置營府處之하고 多揚人暗昧之失하여 以顯其謫注+謫, 罰也.이러라
陸遜弟瑁與書曰 聖人 嘉善矜愚하고 忘過記功하여 以成美化
今王業始建하니 乃漢高棄瑕錄用之時 汝, 潁月旦之評 恐未易行也注+棄瑕錄用, 謂棄其瑕玷而錄其材用. 月旦之評, 事見靈帝中平元年.라하고
朱據謂豔曰 擧淸厲濁 足以沮勸이나 若一時貶黜이면 懼有後咎라호되 皆不聽이러라
於是 怨憤盈路하여 言豔及選曹郞徐彪 用情憎愛라하니 皆坐自殺注+坐自殺, 謂賜死也.하고 斥還本郡以卒하다
方盛用事 虞俊 嘆曰 張惠恕才多智少하고 華而不實注+惠恕, 溫字.하니
怨之所聚 有覆家之禍하리니 吾見其兆矣라하더니 未幾 果敗하다
冬十一月晦 日食하다


甲辰年(224)
나라(蜀漢) 後主 建興 2년이다.
나라 文帝 曹丕 黃初 5년이고, 나라 大帝 孫權 黃武 3년이다.
】 여름 4월에 나라에서 太學을 세웠다.
初平 연간(190~193) 이래로 학문하는 가 폐지되고 실추되었는데,注+初平 獻帝年號이다. 이때에 처음으로 太學을 세우고 博士를 두었으며, 나라의 제도를 따라 五經으로 시험하는 법을 만들었다.
나라 사람이 와서 聘問하자, 다시 鄧芝를 보내어 답하게 하였다.
나라가 張溫을 보내와서 聘問하게 하니, 이로부터 사신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時事에 마땅한 것은 吳王 孫權이 항상 陸遜으로 하여금 諸葛亮에게 말하게 하였고,
또 손권의 印章을 새겨 육손의 처소에 두고서 매번 황제와 제갈량에게 편지를 보낼 적에 반드시 육손에게 보여서 온당치 못한 것이 있으면 그때마다 고쳐 다시 봉함하였다.
鄧芝나라에 이르자, 孫權이 이르기를 “만약 천하가 태평해지면, 두 군주가 천하를 나누어 다스림이 즐겁지 않겠는가.” 하니, 등지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고 땅에는 두 왕이 없습니다. 만일 나라를 겸병한 뒤에 大王天命을 알지 못하시면,
〈우리 두 나라는〉 군주가 각각 그 을 힘쓰고 신하가 각각 그 충성을 힘쓸 것이니, 이렇게 되면 전쟁이 막 시작될 것입니다.” 손권이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충성이 이와 같구나.” 하였다.
】 가을 8월에 魏主 曹丕水軍을 거느리고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長江에 임하여 돌아왔다.
魏主 曹丕가 크게 군대를 일으켜 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辛毗가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천하가 막 안정되어서 영토는 넓으나 백성들은 많지 않은데 백성들을 전쟁에 사용하고자 하시니, 그 이로움을 볼 수가 없습니다.
금일의 계책은 백성을 길러 屯田을 해서 10년이 지난 뒤에 전쟁에 사용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한 번의 전쟁으로 승리하여〉 다시 군대를 일으키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조비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尙書僕射(상서복야) 司馬懿를 남겨두어 許昌을 진무하게 하고, 직접 龍舟를 몰고 蔡河潁水를 따라 淮水에 배를 띄워서 壽春에 가다가 廣陵에 이르렀다.注+水經≫에 “蔡河陳留 浚儀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潁水에 들어가며, 潁水潁川 陽城縣 少室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新陽에 이르러 蔡河와 합류하고, 또 동남쪽으로 愼縣에 이르러 동남쪽으로 淮水에 들어간다.” 하였다. ≪後漢書≫ 〈郡國志〉에 “廣陵郡은, 景帝江都郡을 설치하였는데, 武帝가 이름을 바꾸었다.” 하였다.
나라 장군 徐盛이 전함을 강에 진열하고는 나무를 꽂아놓고 갈대를 입혀서 疑城(적을 미혹시키기 위해 임시로 만든 성)과 假樓(가짜 望樓)를 만들어 石頭로부터 江乘에 이르기까지 수백 리에 이어졌는데, 하루저녁에 이룬 것이었다.注+(입히다)는 於旣이다. 나무를 안에 꽂아놓고서 갈대로 그 밖을 가려서 疑城假樓를 만든 것이다. 江乘縣丹陽郡에 속하였는데, 나라는 강승현을 없애고 典農都尉의 치소로 삼았는바, 그 땅이 建業의 동북쪽에 있다.
】 이때 長江의 물이 크게 불어났다.注+(불어나다)은 知兩이다. 曹丕長江을 멀리 굽어보며 탄식하기를 “나라에 비록 용맹스러운 騎兵 천 개의 무리가 있다 하더라도 쓸 곳이 없으니, 도모할 수가 없다.” 하였다.
마침 폭풍이 갑자기 몰려와서 龍舟가 거의 전복될 뻔하였다. 조비가 여러 신하들에게 묻기를 “孫權이 마땅히 직접 싸우러 오겠는가?” 하니,
劉曄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저 손권은 폐하께서 萬乘 天子의 중함으로써 자신을 견제하고, 江湖를 건너올 자는 別將 가운데에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반드시 군대를 무장하고서 사태를 관망할 것이요, 전진하거나 후퇴하는 일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 후, 吳王 손권이 끝내 오지 않으니, 조비가 이에 回軍하였다.
나라 尙書 曁豔(기염)과 選曹郞 徐彪(서표)가 죄가 있어 自殺하였다.
나라 張溫이 젊어서부터 준걸스러운 재주로 훌륭한 명성이 있으니, 顧雍當今에 그를 짝할 만한 자가 없다고 칭찬하였다.
장온이 같은 曁豔을 천거하여 選部尙書로 삼았는데,注+張溫吳郡 사람이다. 居乙이니, 曁豔은 사람의 성명이다. 選部는 바로 選曹이니, 銓衡하여 選用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기염은 깨끗한 의논을 하기 좋아해서 백관들을 탄핵하여 지적하고 三署郞官의 잘못을 아뢰어서注+이니, 규찰함이다. (쏘다)은 食亦이다. 三署五官署, 左署, 右署郞官을 이른다. 높은 사람을 좌천시켜 낮은 자리로 내려보내 10명 중에 1명도 남아 있지 못하였다.
또 지위에 있으면서 탐욕스럽고 비루하며 뜻과 절개가 치사하고 낮은 자를 모두 軍吏로 삼아서 營府를 설치하여 그곳에서 지내게 하였으며, 남의 비밀스러운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 죄를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注+(죄)은 이다.
陸遜의 아우 陸瑁曁豔에게 편지를 보내 말하기를 “聖人한 사람을 가상히 여기고 어리석은 사람을 가엾게 여기며, 잘못을 잊고 공로를 기억하여 아름다운 교화를 이룬다.
지금 王業이 처음 세워졌으니, 바로 高祖가 결점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던 때이다. 汝南潁川月旦評을 쉽게 시행할 수 없을 듯하다.”注+棄瑕錄用”은 결점이나 잘못을 따지지 않고 인재를 등용함을 이른다. 하였고,
朱據는 기염에게 이르기를 “청백한 사람을 천거하여 혼탁한 사람을 격려하는 것은 충분히 을 저지하고 을 권장할 수 있으나, 만약 한때에 모두 좌천시켜 내치면 후일의 가 있을까 두렵다.” 하였으나, 기염은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때에 원망과 분노가 길에 가득하여, 기염과 選曹郞 徐彪가 사사로운 을 써서 남을 미워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니, 두 사람 모두 죄에 연좌되어 자살하였고注+坐自殺”은 死藥을 하사함을 이른다. 張溫은 배척을 받아 本郡으로 돌아가 하였다.
】 처음 張溫이 막 기세가 성하여 권력을 행사할 적에, 虞俊이 탄식하기를 “張惠恕가 재주는 많으나 지혜가 부족하며 화려하기만 하고 실제가 없으니,注+惠恕張溫의 자이다.
원망이 모이면 집안이 전복될 가 있을 것이다. 내 그 조짐을 보았다.”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과연 실패하였다.
】 겨울 11월 그믐에 일식이 있었다.


역주
역주1 月旦評은……보인다 : 본서 76쪽 역주 69) 참조.

자치통감강목(11) 책은 2020.12.04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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