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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9)

자치통감강목(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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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丑年(185)
二年이라 春正月 하다
◑二月 南宮雲臺災하다
張讓, 趙忠 說帝하여 斂天下田 畝十錢하여 以修宮室하고 鑄銅人한대 樂安太守陸康 上疏諫曰
魯宣稅畝 而蝝災自生注+春秋 “魯宣公十五年秋, 初稅畝, 冬蝝生饑.” 蝝, 余專切, 螽子也.하고 哀公增賦 而孔門非之注+左傳 “季孫欲以田賦, 使冉有訪諸仲尼, 仲尼私於冉有曰 子季孫若欲行而法, 則周公之典在, 若欲苟而行, 又何訪焉.”하니
豈有聚奪民物하여 以營無用之銅人하고 捐捨聖戒하여 自蹈亡王之法哉注+亡王, 謂秦始皇, 鑄銅人十二, 卒致滅亡也.잇가
內倖 讒康援引亡國하여 以譬聖明하니 大不敬이라한대 檻車徵詣廷尉러니
侍御史劉岱 奏陳解釋하여 得免歸田里하니 續之孫也
又詔發州郡材木文石하니 黃門, 常侍 輒令譴呵不中者하여 因强折賤買하니 僅得本賈十一注+中, 去聲. 賈, 讀曰價. 十一, 謂十分之一.이요 復貨之注+句.하고
中者 亦不卽受하니 材木 腐積하여 宮室 連年不成하고 刺史, 太守 復增私調하니 百姓 呼嗟注+調, 徒弔切.러라
又令西園騶 分道督趣하니 恐動州郡하여 多受賕賂注+騶, 養馬人也. 趣, 讀曰促.하고 牧守, 茂材, 孝廉遷除 皆責助軍, 修宮錢하고
當之官者 皆先至西園諧價然後 得去注+諧, 謂平論定其價也.러라
鉅鹿太守司馬直 以有淸名이라하여 減責三百萬하니 悵然曰 爲民父母而反割剝百姓하여 以稱時求 吾不忍也라하고
辭疾호되 不聽注+稱, 尺證切.이라 行至孟津하여 上書極言하고 呑藥自殺하니 書奏 帝爲暫絶修宮錢注+爲, 去聲.하다
黑山賊褚燕하다
自張角之亂으로 所在 盜賊幷起하니 博陵張牛角, 常山褚飛燕注+褚, 姓. 燕, 名也. 輕勇趫捷, 故軍中號曰飛燕.及黃龍, 左校,注+朱儁傳 “黑山黃龍․白波左校.” 于氐根, 張白騎,注+朱儁傳 “多髭者, 號于氐根. 騎白馬者, 爲張白騎.” 註曰 “左傳 ‘于思于思.’ 杜預云 ‘于思, 多須之貌.’” 劉石,
左髭丈八, 平漢大計, 司隷緣城,注+劉石, 賊名號. 左髭丈八, 亦名號. 袁紹傳 “賊有陶升者, 自號平漢將軍.” 大計, 九州春秋, 作大洪. 緣城, 朱儁傳, 作掾哉. 雷公, 浮雲, 白雀, 楊鳳, 于毒, 五鹿, 李大目,注+浮雲․白雀․楊鳳, 三人名號. 袁紹傳 “黑山賊于毒.” 朱儁傳 “大聲者, 稱雷公. 大眼者, 爲大目.” 白繞, 眭固, 苦蝤之徒 不可勝數注+白繞, 姓名. 眭, 息隨切, 姓也. 蝤, 才由切. 苦蝤, 亦賊名.러라
張牛角死 令其衆으로 奉飛燕爲帥하니 部衆 寖廣하여 殆至百萬하여 號黑山賊注+杜佑曰 “衛州衛縣, 漢朝歌縣也. 紂都朝歌, 在今縣西. 縣西北, 有黑山.”이라하니
河北 竝被其害로되 朝廷 不能討러니 乃遣使乞降이어늘 遂拜燕平難中郞將하여 使領河北諸山谷事하다
三月 以崔烈 爲司徒하다
三公 往往因常侍, 阿保하여 入錢西園而得之注+阿保, 謂阿母․保母也.하니 段熲, 張溫等 雖有功勤名譽 然亦先輸貨財
本冀州名士注+烈, 寔之從兄也.러니 至是하여 因傅母하여 入錢五百萬이라 得爲司徒하니 而聲譽頓衰하다
北宮伯玉等 寇三輔어늘 遣皇甫嵩하여 討之하다
涼州兵亂 不解하니 徵發天下하여 役賦無已 崔烈 以爲宜棄涼州라하니 詔會公卿百官議之한대
議郞傅爕 厲言曰 斬司徒라야 天下乃安하리이다 尙書劾之하니 帝召問狀한대
對曰 涼州 天下要衝이요 國家藩衛 今牧御失和하여 使一州叛逆이어늘
爲宰相하여 不思所以弭之之策하고 乃欲割棄一方萬里之土하니 若使左衽之虜 得居此地하면
士勁甲堅하여 因以爲亂하리니 此天下之至慮 社稷之深憂也니이다 帝從之하다
夏四月 大雨雹하다
以討張角功也
秋七月하다
◑八月 罷皇甫嵩하고 遣車騎將軍張溫하여 代之하다
皇甫嵩之討張角也 過鄴할새 見趙忠舍宅踰制하고 奏沒入之하고 又張讓 私求錢不與하니
二人 奏嵩無功費多라한대 徵還하여 收印綬하고 以司空張溫爲車騎將軍하여 討北宮伯玉하고 拜董卓爲破虜將軍하여 統於溫하다
冬十月 하다
賜旣免이러니 帝閱故事라가 得賜與劉陶所上張角奏하고 乃封賜臨晉侯, 陶中陵鄕侯注+臨晉縣, 屬馮翊.하다
至是하여 復以賜爲司空이러니커늘 諡曰文烈이라하다
陶上疏하여 陳八事하여 大較言天下大亂 皆由宦官注+較, 訖岳切. 大較, 猶言大略也.이라한대 宦官 共讒陶하여 收下黃門北寺獄하여 閉氣而死하다
爲人 忠正이라 宦官 怨之하여 亦誣陷死獄中하다
張溫 擊涼州賊邊章, 韓遂하여 不利러니 十一月 將軍董卓 破走之하다
張溫 將兵十餘萬하고 屯美陽하여 與邊章, 韓遂戰하여 輒不利注+美陽縣, 屬扶風.러니 十一月 董卓等 攻破之하니 章, 遂走榆中注+楡中縣, 屬金城郡.하다
遣周愼追之하니 參軍事孫堅 說愼曰注+參軍事之官, 始見於此. 城中無穀하니 當外轉糧食이라
願得萬人하여 斷其運道하고 將軍 以大兵繼後하면 賊必困乏하여 走入羌中하리니 幷力追之 則涼州 可定也리이다
不從이러니 章, 遂反斷愼運道하니하여 棄車重而退注+重, 輜重也.하다
又使董卓討羌이러니 糧絶이라 乃於所度水中 僞立堰以捕魚하고 而潛從堰下過軍注+堰, 音偃. 壅水, 謂之堰.하니
比賊追之 決水已深이라 不得度하니 遂還屯扶風하다
以詔書召卓한대 良久乃至어늘 責讓之하니 應對不順이라
孫堅 前耳謂溫曰注+耳, 謂附耳而與之語. 不怖罪而䲭張大語注+鴟張, 言語妄大, 如鴟梟惡鳥之張大.하니 宜以召不時至 陳軍法斬之니이다
溫曰 卓 素著威名於河隴之間하니 今日殺之 西行無依니라
堅曰 明公 親率王師하여 威震天下하니 何賴於卓이리오 輕上無禮 一罪也
沮軍疑衆 二罪也注+通鑑 “章․遂跋扈經年, 當以時進討, 而卓云未可, 沮軍疑衆.” 受任無功하고 應召稽留 三罪也 古之名將 仗鉞臨衆 未有不斷斬以成功者니이다
今明公 垂意於卓하여 不卽加誅하니 虧損威刑 於是在矣라호되 不忍發注+垂意, 猶言降意也.이러라
造萬金堂하다
帝造萬金堂於西園하고 引司農金錢繒帛하여 牣積堂中注+牣, 滿也. 積, 聚也.하고
復藏寄小黃門, 常侍家錢 各數千萬이요 又買田起第於河間注+帝故封河間解瀆亭侯.하다


을축년乙丑年(185)
나라 효령황제 중평孝靈皇帝 中平 2년이다. 봄 정월에 역병이 크게 유행하였다.
】 2월에 남궁南宮운대雲臺에 화재가 났다.
장양張讓조충趙忠이 황제를 설득하여 천하의 토지에 마다 10을 거두어서 궁실宮室을 수리하고 동인銅人(구리로 주조한 인형人形)을 주조하게 하자, 낙안태수 육강樂安太守 陸康상소上疏하여 다음과 같이 하였다.
“옛날에 노 선공魯 宣公과세課稅를 하자 메뚜기로 인한 재해가 일어났고注+춘추春秋≫에 “노 선공魯 宣公 15년 가을에 처음 에 세를 거두었는데, 겨울에 메뚜기의 재해가 발생하여 기근이 들었다.” 하였다. 여전余專이니, 메뚜기의 새끼이다., 애공哀公이 세금을 더 올리려 하자 공자孔子의 문하에서 비난하였으니注+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애공哀公 11년에 “계손씨季孫氏전부田賦를 더 거두고자 하여 염유冉有로 하여금 중니仲尼(공자孔子)에게 묻게 하였는데, 중니가 염유에게 사사로이 말씀하기를 ‘그대의 계손씨季孫氏가 만약 옛법을 행하고자 한다면 주공周公의 법전이 남아 있고, 만약 구차히 과세課稅를 하고자 한다면 또 어찌 나에게 물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하였다.,
어찌 백성들의 물건을 거두어 빼앗아서 쓸데없는 동인銅人을 만들고 성인聖人의 경계를 버려서 멸망한 왕의 법을 스스로 따를 수 있겠습니까.”注+멸망한 왕은 진 시황秦 始皇을 이르니, 진 시황秦 始皇은 12개의 동인銅人을 주조하여 끝내 멸망을 불러왔다.
이에 궁중에서 총애 받는 자들이, 육강이 망한 나라를 끌어다가 인용하여 성명聖明한 군주에 비유하였으니 대불경大不敬의 죄를 범하였다고 참소하자, 함거檻車로 불러서 정위廷尉에게 보냈다.
시어사 유대侍御史 劉岱가 아뢰어 석방되었는데 면직되어 전리田里로 돌아가니, 육강은 육속陸續의 손자이다.
】 또다시 조령詔令을 내려서 주군州郡재목材木문석文石(무늬 있는 돌)을 징발하였는데, 〈환관宦官인〉 황문黃門상시常侍가 번번이 규격에 맞지 않는 것을 꾸짖고서 인하여 강제로 값을 깎아 헐값으로 자신들이 사들이니, 주군州郡에서는 겨우 본래 가격의 10분의 1을 얻고注+(맞다)은 거성去聲이다. 로 읽는다. “십일十一”은 10분의 1을 이른다. 또다시 구입하여 바쳤다.注+여기에서 를 뗀다.
규격에 맞는 것도 즉시 받아주지 않으니, 재목材木이 쌓여 썩어서 궁실宮室이 해가 지나도록 완성되지 못하였다. 자사刺史태수太守가 또 이를 틈타 사사로이 세금을 더 거두니, 백성들이 슬피 탄식하였다.注+調(조발하다)는 도조徒弔이다.
서원西園를 길을 나누어 주군州郡에 보내 독촉하게 하니 주군州郡들을 두렵게 하고 동요시켜 뇌물을 많이 받았고注+는 말을 기르는 사람이다. (독촉하다)은 으로 읽는다., 주목州牧군수郡守 그리고 무재茂材효렴孝廉을 승진시키거나 선발할 적에도 모두 조군전助軍錢(군대를 돕는 돈)과 수궁전修宮錢(궁전을 수리하는 돈)을 요구하였으며,
마땅히 관직에 부임해야 하는 자들도 먼저 서원西園에 가서 값을 흥정한 뒤에야 부임할 수 있었다.注+는 평가하고 논하여 그 값을 정함을 이른다.
거록태수 사마직鉅鹿太守 司馬直이 청렴하다는 명성이 있다 하여 값을 줄여 300만 을 내게 하니, 사마직이 서글퍼하며 말하기를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도리어 백성들에게 가렴주구苛斂誅求하여 세상의 요구에 영합하는 것은 내 차마 못하겠다.” 하고는
병을 칭탁하고 사직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注+(부합, 영합하다)은 척증尺證이다. 그는 부임하러 가다가 맹진孟津에 이르러 상서上書하여 〈매관賣官하는 잘못을〉 지극히 말하고는, 독약을 마시고 자살하였다. 사마직의 글을 아뢰자, 황제가 이 때문에 잠시 수궁전修宮錢의 징수를 중지하였다.注+(때문)는 거성去聲이다.
흑산적 저연黑山賊 褚燕이 항복하였다.
장각張角의 난리가 있은 뒤로부터 도처에서 도적이 함께 일어나니, 박릉博陵장우각張牛角, 상산常山저비연褚飛燕注+이고, 은 이름이니, 몸이 가볍고 용맹하며 빠르기 때문에 군중軍中에서 비연飛燕이라 하였다. 황룡黃龍, 좌교左校,注+〈“황룡좌교黃龍左校”는〉 ≪후한서後漢書≫ 〈주준전朱儁傳〉에 “흑산黑山황룡黃龍백파白波좌교左校이다.” 하였다. 우저근于氐根, 장백기張白騎,注+후한서後漢書≫ 〈주준전朱儁傳〉에 “수염이 많은 자를 우저근于氐根이라 하고, 백마白馬를 타는 자를 장백기張白騎라 한다.” 하였는데, 에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선공宣公 2년에 ‘우사우사于思于思’라 하였는데, 두예杜預가 이르기를 ‘우사于思는 수염이 많은 모양이다.’ 하였다.” 하였다. 유석劉石,
좌자장팔左髭丈八(좌자장팔), 평한대계平漢大計, 사예연성司隷緣城注+유석劉石은 도적의 호칭이고, 좌자장팔左髭丈八도 도적의 호칭이다. ≪후한서後漢書≫ 〈원소전袁紹傳〉에 “도적 중에 도승陶升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평한장군平漢將軍이라고 칭하였다.” 하였다. 대계大計에는 대홍大洪으로 되어 있다. 연성緣城은 ≪후한서後漢書≫ 〈주준전朱儁傳〉에는 연재掾哉로 되어 있다., 뇌공雷公, 부운浮雲, 백작白雀, 양봉楊鳳, 우독于毒, 오록五鹿, 이대목李大目注+부운浮雲, 백작白雀, 양봉楊鳳은 세 사람의 칭호이다. ≪후한서後漢書≫ 〈원소전袁紹傳〉에는 “흑산적 우독黑山賊 于毒”이라고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주준전朱儁傳〉에 “목소리가 큰 자를 뇌공雷公이라 칭하고, 눈이 큰 자를 대목大目이라 한다.” 하였다., 백요白繞, 수고眭固(수고), 고추苦蝤(고추) 등의 무리를 이루 다 셀 수가 없었다.注+백요白繞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식수息隨이니, 이다. 재유才由이니, 고추苦蝤 또한 도적의 이름이다.
장우각이 죽을 적에 그 무리로 하여금 저비연을 받들어 우두머리로 삼게 하니, 무리가 점점 많아져서 거의 백만 명이 되었는데, 이들을 흑산적黑山賊이라 이름하였다.注+두우杜佑가 말하기를. “위주衛州위현衛縣나라의 조가현朝歌縣이니, 주왕紂王이 도읍한 조가朝歌가 지금의 위현衛縣 서쪽에 있으며, 의 서북쪽에 흑산黑山이 있다.” 하였다.
하북河北 지방이 모두 그 폐해를 입었으나 조정朝廷이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저비연이 사자를 보내 항복을 청하자, 마침내 저비연을 평난중랑장平難中郞將으로 제수하여 하북河北의 여러 산골짜기의 일을 관장하게 하였다.
】 3월에 최열崔烈사도司徒로 삼았다.
】 이때 삼공三公이 왕왕 상시常侍와 황제의 아보阿保를 통하여 서원西園에 돈을 바치고 관직을 얻으니注+아보阿保아모阿母보모保母를 이른다., 단경段熲장온張溫 등이 공로와 명예가 있었는데도 먼저 환관들에게 뇌물을 바쳤다.
최열崔烈은 본래 기주冀州명사名士였는데注+최열崔烈최식崔寔종형從兄이다., 이때 부모傅母(보모保母)를 통하여 500만 을 바쳐 사도司徒가 되니, 명성이 크게 줄어들었다.
북궁백옥北宮伯玉 등이 삼보三輔 지방을 침략하자, 황보숭皇甫嵩을 보내 토벌하였다.
】 이때에 양주涼州병란兵亂이 계속되니, 천하에서 군대를 징발徵發하여 부역이 끝이 없었다. 최열崔烈양주涼州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니, 조령詔令을 내려 공경公卿백관百官들을 모아 의논하게 하였다.
의랑 부섭議郞 傅爕이 큰 소리로 말하기를 “사도司徒(최열)를 참형에 처해야 천하天下가 비로소 편안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서尙書가 부섭을 탄핵하자, 황제가 부섭을 불러 내용을 물었다.
이에 부섭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양주涼州천하天下의 요충지이고 국가國家의 울타리입니다. 이제 주목州牧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하여 한 로 하여금 반역하게 하였는데,
최열이 재상宰相이 되어서 반역을 중지시킬 계책을 생각하지 않고 마침내 한 지방 만 리의 땅을 떼어버리고자 하니, 만약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가 이 지역에 거주하게 되면,
병사들이 굳세고 갑옷이 견고하여 이를 믿고 을 일으킬 것이니, 이는 천하天下의 지극한 염려가 되고 사직社稷의 깊은 우려가 될 것입니다.”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 여름 4월에 우박이 크게 내렸다.
】 6월에 환관 장양張讓 등 12명을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장각張角을 토벌한 때문이었다.
】 가을 7월에 충해蟲害가 있었다.
】 8월에 황보숭皇甫嵩을 파면하고 거기장군 장온車騎將軍 張溫을 보내 대신하게 하였다.
황보숭皇甫嵩장각張角을 토벌할 적에 업성鄴城(업현鄴縣)을 지나면서 환관인 조충趙忠의 저택이 제도를 크게 넘은 것을 보고는 황제에게 아뢰어 몰수해 들이고, 또 장양張讓이 사사로이 돈을 요구하였으나 주지 않았다.
조충과 장양 두 사람이 황보숭이 전공戰功은 없고 군비軍費만 낭비한다고 아뢰자, 황보숭을 불러 돌아오게 하여 인수印綬를 거두었다. 사공 장온司空 張溫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아서 북궁백옥北宮伯玉을 토벌하게 하고, 동탁董卓파로장군破虜將軍으로 제수하여 장온에게 통솔되게 하였다.
】 겨울 10월에 사공 림진후司空 臨晉侯 양사楊賜하였다.
】 처음에, 양사楊賜가 면직되고 나서 황제가 고사故事를 보다가 양사楊賜유도劉陶가 올린 장각張角에 대한 주장奏章을 발견하고는, 마침내 양사를 림진후臨晉侯로 봉하고 유도를 중릉향후中陵鄕侯로 봉하였다.注+임진현臨晉縣풍익馮翊에 속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다시 양사를 사공司空으로 삼았는데 하니, 시호를 문열文烈이라 하였다.
간의대부 유도諫議大夫 劉陶전사도 진탐前司徒 陳耽을 죽였다.
유도劉陶상소上疏하여 여덟 가지 일을 아뢰어 대략 천하天下의 큰 혼란이 모두 환관 때문이라고 말하자注+(법)은 글악訖岳이다. 대교大較대략大略이란 말과 같다., 환관들이 함께 유도를 참소하여 체포해서 황문黃門북시옥北寺獄에 하옥하여 숨이 막혀 죽게 하였다. .
진탐陳耽은 사람됨이 충성스럽고 정직하였는데, 환관들이 원망하여 그 또한 무함해서 옥중獄中에서 죽게 하였다.
장온張溫양주涼州변장邊章한수韓遂를 공격하여 승리하지 못하였는데, 11월에 장군 동탁將軍 董卓이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장온張溫이 10여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미양美陽에 주둔하여 변장邊章한수韓遂와 싸워 번번이 승리하지 못하였는데注+미양현美陽縣부풍扶風에 속하였다., 11월에 동탁董卓 등이 공격하여 격파하니, 변장과 한수가 유중榆中으로 도망하였다.注+유중현楡中縣금성군金城郡에 속하였다.
장온이 주신周愼을 보내 추격하게 하니, 참군사 손견參軍事 孫堅이 주신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注+참군사參軍事관직官職이 이때 처음 보인다. “적은 성안에 곡식이 없으니, 반드시 밖에서 식량을 수송해올 것입니다.
저는 원컨대 1만 명의 병력을 얻어서 적의 식량 수송로를 차단하고 장군이 큰 병력으로 뒤를 이어주소서. 그렇게 하신다면, 적이 반드시 곤핍困乏해서 달아나 강중羌中으로 들어갈 것이니, 힘을 합쳐 추격하면 양주涼州를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신이 그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변장과 한수가 도리어 주신의 식량 수송로를 차단하니, 주신이 두려워해서 수레와 치중輜重을 버리고 후퇴하였다.注+치중輜重이다.
장온張溫이 또 동탁董卓을 보내 강족羌族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동탁의 군대에 식량이 떨어졌다. 이에 건너려는 물 가운데 둑을 세워 거짓으로 물고기를 잡는 체하고는 은밀히 둑 아래로 군대를 통과시켰다.注+이니, 〈둑을 쌓아〉 물을 막는 것을 이라 한다.
적이 추격해올 무렵 미리 둑을 터놓았기 때문에 물이 너무 깊어서 적이 건너오지 못하였다. 이에 동탁의 군대가 마침내 돌아와 부풍扶風에 주둔하였다.
장온張溫조서詔書동탁董卓을 불렀으나, 오랜 뒤에야 도착하였다. 이에 장온이 꾸짖었는데, 동탁이 불손하게 응대하였다.
손견孫堅이 앞으로 나와서 장온의 귀에 대고 이르기를注+는 귀에 대고 말함을 이른다. “동탁이 죄를 두려워하지 않고 마구 큰소리를 떠벌리니注+치장鴟張”은 망녕되게 큰소리치며 말하는 것이 마치 솔개와 올빼미 등 사나운 새가 나래를 크게 펼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땅히 소환령에 제때 오지 않은 죄로 군법에 따라 참수해야 합니다.” 하였다.
장온이 말하기를 “동탁이 평소 하서河西농우隴右의 사이에서 위엄과 명성을 드러내고 있으니, 지금 그를 죽이면 내가 서쪽으로 정벌하러 갈 적에 의지할 곳이 없어진다.” 하였다.
이에 손견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공明公이 직접 왕사王師를 거느려서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니, 어찌 동탁에게 의뢰할 것이 있겠습니까. 동탁이 윗사람을 무시하여 무례한 것이 첫 번째 죄요,
군대의 사기를 저상시켜 병사들을 의심하게 한 것이 두 번째 죄요注+〈“저군의중沮軍疑衆”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변장邊章한수韓遂가 여러 해 동안 발호跋扈하니, 마땅히 제때에 진군하여 토벌해야 하는데, 동탁董卓이 불가하다고 말해서 군대의 사기를 저상시켜 병사들을 의심하게 했다.” 하였다., 임무를 받았으나 이 없고 소명召命에 응하기를 지체한 것이 세 번째 죄입니다. 옛날 명장名將들이 부술斧銊을 가지고 군대를 통솔할 적에 참수하여 성공하지 않은 자가 있지 않습니다.
지금 명공明公께서는 동탁에게 마음을 낮추어서 즉시 주벌을 가하지 않으시니, 위엄과 형벌을 훼손함이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장온은 차마 동탁을 체포하지 못하였다.注+수의垂意”는 강의降意(마음을 낮추다)라는 말과 같다.
만금당萬金堂을 만들었다.
】 황제가 서원西園만금당萬金堂을 만들고, 사농司農금전金錢과 비단을 가져다가 만금당 가운데에 가득 쌓아두었다.注+은 가득함이요, 은 모음이다.
게다가 소황문小黃門상시常侍의 집에 맡겨 보관한 돈이 각각 수천만 이었고, 또 하간河間전지田地를 사고 집을 지었다.注+황제가 예전에 하간河間해독정후解瀆亭侯에 봉해졌었다.


역주
역주1 大疫 : “≪資治通鑑綱目≫에 역병을 쓴 것이 15번이고 역병이 크게 유행했다고 쓴 것이 11번인데 靈帝 때 다섯 번을 썼으니, 백성들의 고통을 알 수 있다. 그러나 災異를 구제한다는 정사를 듣지 못했으니, 靈帝가 靈帝가 됨이 당연하다.[綱目 書疫十有五 其書大者十一 靈帝凡五書焉 民可知矣 而未聞救災之政 靈之爲靈 宜哉]다” ≪書法≫
역주2 九州春秋 : 晉나라의 司馬彪(?~306)가 지은 史書로 後漢 말엽에 할거한 軍閥들의 역사를 기록한 내용인데 完本은 현재 전하지 않고 각종 문헌에 인용된 내용이 散見된다.
역주3 封宦者張讓等十二人……爲列侯 : “史臣이 말하기를 ‘張角을 토벌한 공 때문이다.’ 하였다. 黃巾賊을 격파하고 張角을 죽인 자는 盧植과 王允과 皇甫嵩인데, 이들은 혹 檻車로 소환되고 혹은 下獄되고 혹은 印綬를 거두었다. 그러나 張讓 등은 功으로 봉해졌으니, 漢나라의 멸망이 이때 결정되었다.[史曰 以討張角功也 破黃巾殺張角者 盧植王允皇甫嵩也 或檻車 或下獄 或收印綬 而讓等乃以功封 漢之亡 決矣]” ≪書法≫ “盧植은 張角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는데 檻車로 소환되고, 王允은 황건적을 토벌하여 격파하였는데 下獄하여 사형에서 한 등급을 감한 것으로 논죄하였다. 그런데 張讓은 國門을 나가지도 않았으며 또 그의 賓客이 적과 서로 내통하였는데도 도리어 장각을 토벌한 공으로 封爵을 받았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 이에 대하여 다만 ‘환관을 봉하였다.’라고만 썼으니, 이는 그 사실을 없애지 않으려는 것이고, 또 쓸 만한 功이 없었기 때문이다. 功이 있는 자가 죄를 얻고 功이 없는 자가 爵位를 하사받았다. 漢나라의 형벌과 상이 이와 같으니, 비록 망하지 않기를 바란들 되겠는가.[盧植討破張角 檻車召還 王允討破黃巾 下獄減死 張讓不出國門 其賓客又與賊交通 乃反以討張角受封 然綱目於此止以封宦者書之者 所以不沒其實 且無功之可書也 夫有功者獲罪 而無功者錫爵 漢之刑賞如此 雖欲不亡 得乎]” ≪發明≫
역주4 司空臨晉侯楊賜卒 : “官을 쓰고 爵(侯)을 쓰고 姓을 쓴 것이 鄧禹로부터 이래로 있지 않았다. 이때 환관이 더욱 횡포를 부려서 諸賢 중에 楊賜처럼 화를 면한 자가 드무니, 특별히 쓴 것은 다행으로 여긴 것이다.[書官書爵書姓 自鄧禹以來未有也 於是宦官益橫 諸賢得免如賜者鮮矣 特書 幸之也]다” ≪書法≫
역주5 殺諫議大夫劉陶 前司徒陳耽 : “成帝의 세대에는 ‘諫議大夫 劉輔를 하옥시켜서 鬼薪(秦漢시대에 3년 동안 宗廟의 땔나무를 하게 하던 형벌)으로 논죄하였다.’고 썼으나 죽이지는 않았는데, ‘諫議大夫 劉陶를 죽였다.’고 썼으니, 이때 漢나라의 멸망이 결정되었다. 예로부터 諫臣을 죽인 자는 망하지 않은 경우가 있지 않았다. ≪資治通鑑綱目≫에 東漢에서 諫議大夫를 쓴 것이 세 번이니(王良, 周擧, 劉陶), 이로부터 쓴 자가 없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諫官을 죽였다고 쓴 것이 네 번이다.(劉陶, 侯昌業, 孟昭圖, 常濬)[成帝之世 書下諫大夫劉輔獄 爲鬼薪論 然未殺也 書殺諫議大夫劉陶 而漢之亡 決矣 自古以來殺諫臣者 未有不亡者也 綱目東漢書諫議大夫三(王良周擧劉陶) 自是無書者矣 終綱目 諫官書殺四(劉陶侯昌業孟昭圖常濬)]” ≪書法≫ “漢나라가 멸망할 징조가 이에 이르러서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劉陶가 죽음에 또 諫議大夫라고 게시하여 쓴 것은 漢 靈帝가 임금 노릇 하지 못한 죄악을 심하게 여긴 것이요, 後世에 諫臣을 죽인 자들의 경계로 삼으려고 해서이다.[漢室滅亡之徵 至是 無可言者矣 然劉陶之死 且揭諫議大夫書之者 所以甚漢靈不君之惡 而爲後世殺諫臣者之鑑也]” ≪發明≫

자치통감강목(9)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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