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盧昶之在朐山也에 中尉游肇가 言於魏主曰 朐山蕞爾僻在海濵하여 卑濕難居하니 於我非急이요 於賊爲利라
爲利故로 必致死而爭之요 非急故로 不得已而戰이니 以不得已之衆으로 撃必死之師가 恐稽延歳月하여 所費甚大요
假得朐山
이라도 終難全守
니 所謂無用之田也
注+① 左傳 “吳將伐齊, 子胥諫曰 ‘得志於齊, 猶獲石田也, 無所用之.’”라 聞賊屢以宿豫
로 求易朐山
하니 持無用之地
하여 復舊有之疆
하고 兵役時解
면 其利爲大
니이다
魏主將從之러니 會昶敗에 遷肇侍中하니 肇는 明根之子也라
馬仙琕爲將에 能與士卒同勞逸하여 衣不過布帛하고 居無幃幕衾屏하고 飲食與廝養最下者同하고
常潜入敵境하여 伺知壁壘村落險要處라 故攻戰多捷하고 士卒亦樂爲之用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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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僕射 張稷이 자신이 세운 공은 큰데 그에 대한 포상이 적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梁主(蕭衍)를 모시고 연회를 여는 자리에서 술에 취하자 원망하는 기색이 말과 표정에 드러났다.
注+① 張稷이 齊나라의 東昏侯(蕭寶卷)를 죽인 일을 공으로 여긴 것이다.
上이 말하기를 “卿의 형은 郡守를 죽였고 아우(장직)는 主君(東昏侯 蕭寶卷)을 죽였으니, 무슨 좋은 명성이 있겠는가?”라고 하니, 장직이 말하기를
注+② 살펴보건대 宋 順帝 昇明 원년(477)에 蕭道成이 찬탈을 도모할 때에 張瓌를 시켜 吳郡太守 劉遐를 습격해 죽이게 하였는데, 그의 아우가 바로 張稷이다. “臣에게는 좋은 명성이 없지만, 폐하에 대해서는 〈제가〉 공훈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동혼후가 포학하였는데, 의로운 군대가 그를 죽인 것이니, 어찌하여 〈동혼후를 죽였다는 말이〉 신에게만 있을 뿐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梁主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말하기를 “장공은 두려운 사람이오.”라고 하고, 장직을 靑州ㆍ冀州의 刺史로 삼았다.
注+③ 須(수염)는 鬚의 古字와 통용한다.
王珍國 역시 원망을 하였는데,
注+④ 王珍國이 張稷과 함께 東昏侯를 시해하였다. 梁州ㆍ秦州刺史에서 파직되어 돌아와서 술자리가 끝난 뒤에 아뢰기를 “臣이 근래 梁山에 들어가서 통곡하였습니다.”라고 하니,
梁主가 크게 놀라 말하기를 “卿이 만약 동혼후를 위하여 통곡한 것이라면 이미 늦었고, 나를 위하여 통곡한 것이라면 나는 도리어 아직 죽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梁主와〉 소원해져 물러났는데, 오랜 뒤에 그를 都官尙書에 제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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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琅邪의 백성 王萬壽가 太守 劉哳을 죽이고 朐山을 점거하여 北魏의 군대를 불렀다.
注+① 晣은 之舌의 切이다. 북위의 徐州刺史 盧昶이 戍主 傅文驥를 보내니, 張稷이 군대를 보내어 그들을 막았지만 승리하지 못하였다.
4월에 부문기가 구산을 점거하자, 梁나라에서 馬仙琕을 보내어 그들을 포위하였다. 노창은 본래 儒生이므로 군사에 관한 일에 익숙하지 않았고, 구산의 군량과 땔감이 모두 고갈되자 부문기가 성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12월에 노창이 군대를 이끌고 먼저 달아나니, 군사들이 모두 무너졌다. 마침 큰 눈이 내려 군사들이 얼어 죽고 손발이 떨어져나간 자가 절반이 넘었는데, 마선변이 추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200리 사이에 쓰러진 시체가 이어졌고, 죽음을 면한 자는 열에 한두 명뿐이었다.
식량과 가축과 기계를 수습하니 다 헤아릴 수가 없었고, 蕭寳寅만이 군대를 보전하여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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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盧昶이 胊山에 있을 때 中尉 游肇가 魏主(元恪)에게 말하기를 “구산은 지역이 협소하고 바닷가에 치우쳐 있어 지대가 낮고 습해서 살기가 어려우니,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곳이지만 적에게는 이익이 되는 곳입니다.
이익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목숨을 바치면서까지 다투고,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것이니, 어쩔 수 없이 싸우는 군대를 데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는 군대를 공격하였다가 시일만 끌다 크게 낭비만 하게 될까 염려됩니다.
가령 구산을 얻는다고 해도 결국에는 온전하게 지키기 어려우니, 이른바 쓸데없는 땅입니다.
注+① ≪春秋左氏傳≫에 “吳나라가 齊나라를 정벌하려고 할 때에, 子胥가 간언하기를 ‘우리가 齊나라를 토벌하여 승리한다 하더라도 이는 돌밭을 얻는 것과 같아서 쓸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하였다. 듣건대 적들이 여러 차례 宿豫를 가지고 구산과 바꾸기를 요구했다고 하니, 쓸모없는 땅을 가지고 옛날부터 가지고 있던 강토를 회복하고 전쟁도 때에 맞추어 그치게 되면 그로 인한 이익은 큽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그 말대로 따르려고 하였는데 마침 노창이 패배하자, 유조를 侍中으로 승진시켰다. 유조는 游明根의 아들이다.
마선변은 장수가 되어 병사들과 함께 수고로움과 편안함을 함께하여 의복은 布帛으로 만든 옷에 불과하였고, 거처하는 곳에는 휘장과 군막으로 가리는 것이 없었으며, 먹고 마시는 것은 매우 지위가 낮은 廝養(군대에서 천한 일을 하는 사람)과 똑같이 하였다.
항상 몰래 적진에 들어가 壁壘와 村落에 있는 험요한 지역을 정탐하여 알아두었기에 공격하여 전투를 치르면 대부분 승리하였고, 병사들도 그를 위하여 쓰이기를 바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