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 “석문石門은 번우현番禺縣 북쪽 20리 지점에 있다. 옛날 남월南越의 정승 여가呂嘉가 강가에 돌을 쌓아 한漢나라를 막고 인하여 석문石門이라 이름했다.” 하였다. 노박덕路博德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함께 나아가 번우番禺에 이르니, 남월南越이 성을 지켜 항거하였다.
마침 날이 저물자, 양복은 월越나라 사람을 공격하여 패퇴시키고 불을 놓아 성을 불태웠으며, 노박덕은 진영을 설치하고注+영루營壘를 설치하여 항복하는 자를 기다린 것이다. 사자를 보내 항복한 월越나라 사람들을 불러서 인수印綬를 주고 다시 풀어주어 서로 불러와 항복하게 하니,注+와서 항복한 자에게 즉시 후侯의 인印을 하사하고 풀어주어 돌아가게 해서, 다시 서로 불러 타일러서 항복하게 한 것이다. 다음 날 새벽에 성안이 모두 항복하였다.注+여黎는 어둡다는 뜻이니, 하늘(날)이 밝지 않아 아직도 어두운 것이다.
조건덕趙建德과 여가呂嘉가 이미 밤중에 도망하여 해도海島로 들어갔는데, 노박덕이 사람을 보내 추격하여 사로잡으니, 과선장군戈船將軍과 하뢰장군下瀨將軍과 야랑夜郞의 군대가 내려오기 전에 남월南越이 이미 평정되었다.
마침내 이 땅을 남해군南海郡, 창오군蒼梧郡, 울림군鬱林郡, 합포군合浦郡, 교지군交趾郡, 구진군九眞郡, 일남군日南郡, 주애군珠厓郡, 담이군儋耳郡으로 만들었다.注+교지交趾는, 남방南方의 오랑캐 사람들은 발이 커서 발가락이 벌어지고 넓어, 발을 나란히 하고 서면 그 발가락이 서로 교차하는 듯하므로 교지交趾라 이름하였다. 일남日南은 해의 남쪽에 있음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북쪽에 문을 내어 해를 향한다는 것이다. 주애珠厓는 땅이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니, 해안의 물가에서 진주眞珠가 나오므로 주애珠厓라 이름하였다. 담이儋耳는 땅이 대해大海 가운데에 있으니, 이 지방 사람들은 귀가 크다. 담이의 거수渠帥(추장)로서 스스로 왕王이라 부르는 자는 귀가 더욱 늘어져서 어깨보다 세 치나 내려왔다.
綱
[綱] 황제가 구지緱氏(구지)에 가서 대인大人의 발자국을 구경하였다.
目
[目] 공손경公孫卿이 말하기를 “구지성緱氏城 위에서 신선의 발자국을 보았다.” 하므로,注+구緱는 공후工侯의 절切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하남河南구지현緱氏縣에 구지산緱氏山이 있다.” 하였다.상上은 직접 가서 보고 공손경에게 “문성장군文成將軍(이소옹李少翁)과 오리장군五利將軍(난대欒大)을 본받을 리는 없겠지?”라고 물었다.
공손경은 대답하기를 “신선은 군주를 구하는 일이 없고 군주가 신선을 구하니, 그 방도를 너그럽고 넉넉하게 하지 않으면 신神이 오지 않습니다.
신神의 일을 말하는 것은 오활하고 허탄虛誕한 듯하나 세월을 쌓아야 비로소 불러올 수 있습니다.”注+우迂는 돌고 멂이다. 탄誕은 큰소리치는 것이다. 하니, 상上이 그의 말을 믿었다.
이에 군국郡國에서는 각기 길을 닦고 궁관宮觀과 명산名山의 신사神祠를 보수하고 수리해서 신선이 왕림하기를 바랐다.注+선繕은 다스림이다. 관觀은 음이 관貫이다.
綱
[綱] 서이西夷와 남이南夷를 평정하고 다섯 군郡을 설치하였다.
目
[目] 치의후馳義侯(유遺)가 남이南夷의 군대를 징발하니, 차란국且蘭國(저란국)의 군주가 배반하여 사자使者를 죽였다.注+저且는 자여子余의 절切이다. 차란且蘭은 남이南夷의 종족 이름이다.
이에 한漢나라에서는 파촉巴蜀의 죄인 중에 일찍이 남월南越을 공격한 자들을 징발하여 차란且蘭을 공격해서 저란과 공도邛都의 군주, 작도筰都의 군주를 처형하고 마침내 남이南夷의 군대를 평정하여 장가군牂柯郡으로 삼았다.注+“공군邛君”은 공도邛都의 군주이고, “작후筰侯”는 작도筰都의 군주이다.
야랑夜郞의 군주가 들어와 조회하자 상上은 야랑의 왕王으로 삼으니, 서이西夷인 염방冉駹 등이 모두 진동하고 두려워하여 ‘신하가 되겠으니 관리를 설치해줄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공도邛都를 월수군越嶲郡,注+수수嶲水는 공도국邛都國에서 발원하니, 이 물(수수嶲水)을 건너가야[월越] 하므로 이름을 월수越嶲라 하였다.작도筰都를 침려군沈黎郡,注+침沈은 지림持林의 절切이다.염방冉駹을 문산군文山郡(민산군),注+민文은 일본一本에는 문汶으로 되어 있으니, 음이 민岷이다.광한廣漢의 서쪽 백마白馬를 무도군武都郡으로 삼았다.注+백마白馬는 지명이니, 광한廣漢에 있다.
綱
[綱] 동월왕東越王낙여선駱餘善이 배반하므로 장군將軍양복楊僕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하였다.
目
[目] 처음에 동월왕東越王낙여선駱餘善이 병력 8,000명을 거느리고 누선장군樓船將軍(양복楊僕)을 따라 여가呂嘉를 공격할 것을 자청하였는데, 군대가 게양揭陽(갈양)에 이르자 바다에 풍파가 있다고 핑계 대고는 은밀히 남월南越에 사신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注+갈揭은 음이 갈竭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게양현揭陽縣은 남해군南海郡에 속하였다.” 하였고, 당唐나라에서는 조주潮州라 하였다. “음사남월陰使南越(은밀히 남월南越에 사신을 보냈다.)”은 사신을 보내어 화친함을 이른다.
양복楊僕이 글을 올려 즉시 군대를 이끌고 동월東越을 공격할 것을 원하였으나, 상上은 허락하지 않고 예장豫章의 매령梅嶺에 군대를 주둔하여 명령을 기다리게[대명待命] 하였다.注+《사기색은史記索隱》에 “지금의 예장豫章 남쪽 30리 지점에 매령梅嶺이 있다.” 하였다. “대명待命”은 조명詔命을 듣는 것이다.
낙여선은 한漢나라 군대가 국경에 다가왔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배반하여 스스로 무제武帝라 칭하였다.
目
[目] 상上은 다시 양복楊僕을 장수를 삼고자 하였으나, 그가 예전의 공로를 자랑한다 하여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벌伐은 자랑하고 믿는 것이다.칙서勅書를 내려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장군將軍의 공은 오직 전에 석문石門과 심협尋陿을 격파함이 있을 뿐이요, 적장을 목 베고 적의 깃발을 뽑아온 실제가 있는 것이 아니니, 어찌 이것을 가지고 남에게 교만을 떤단 말인가.
전에 번우番禺를 격파했을 적에 항복한 자를 잡아 포로라 하고 죽은 사람의 시신을 파내어 노획했다 하였으며, 시기를 잃고서 안으로 처첩을 돌아보고[내고內顧] 속임수를 가지고 군주에게 요구하였으며, 조령詔令을 받고도 난지蘭池에 이르지 않고 다음날 또 〈촉蜀 지방의 칼에 대해 값을 물었으나 제대로〉 대답하지 않았으니,注+“내고內顧”는 처첩妻妾을 돌아보고 생각함을 말한다. 간干은 범한다는 뜻이다. 《한서漢書》 〈양복전楊僕傳〉에 “〈양복楊僕이〉 촉蜀 지방의 칼을 청하고자 하였을 때 황제가 ‘그대의 검劍 값이 얼마인가?’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대략 수백 전錢입니다.’ 하여, 무기고武器庫에 있는 병기를 날마다 꺼내가면서도 겉으로 값을 알지 못한 체하였으니, 속임수를 가지고 군주에게 요구한 것이다.” 하였다. 난지궁蘭池宮은 위성渭城에 있으니, 본래 군대를 출동할 적에 양복으로 하여금 난지궁으로 가게 하려 하였으나, 양복은 군대를 주둔하고 가지 않았다.
지금 동월東越이 깊이 쳐들어왔으니, 장군將軍이 능히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예전의 잘못을 엄폐할 수 있겠는가?” 注+부不는 부否로 읽는다.
양복은 황공해하며 대답하기를 “사력을 다하여 속죄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상上은 마침내 횡해장군橫海將軍한열韓說을 구장句章에서 출동하여 바다를 항해하게 하고,注+구句는 음이 구鉤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구장현句章縣은 회계군會稽郡에 속하였다.” 하였다.누선장군樓船將軍양복楊僕은 무림武林에서 출동하고,注+《사기색은史記索隱》에 “지금 예장군豫章郡 북쪽 200리 지점은 파양鄱陽의 경계와 접하니 지명이 백사白沙인데, 작은 물이 호수로 들어가므로 이름을 백사白沙라 하였다. 백사 동남쪽으로 80리 지점에 무양정武陽亭이 있고, 무양정 동남쪽으로 30리 지점의 지명이 무림武林이다.” 하였다.왕온서王溫舒는 매령梅嶺에서 출동하고, 월越나라 군주(엄嚴과 갑甲)는 약사若邪의 백사白沙에서 출동시켜注+“월후越侯(월越나라 군주)”는 바로 엄嚴과 갑甲이다. 월越나라에서 항복해 와서 귀의歸義(의리義理에 따라 귀순함)하였는데 한漢나라가 약사若邪를 봉封하니, 이때에 이 지역은 회계會稽산음현山陰縣의 경계에 속하였다.동월東越을 공격하게 하였다.
綱
[綱] 장액군張掖郡과 돈황군敦煌郡을 설치하였다.
目
[目] 박망후博望侯장건張騫이 서역西域과 통하게 했다 하여 벼슬이 높아지고 귀해지니, 관리와 병사들이 다투어 글을 올려서 외국의 이해를 말하여 사신으로 갈 것을 청하였다.
상上이 이들을 위해 관리와 백성들을 모집하여 보내니,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함부로 거짓말하고 행실이 좋지 못한 무리들이 다투어 이를 본받아서, 모두 현관縣官(국가)에서 받아 간 물건을 싸게 팔아서 사사로이 이익을 차지하였다.注+“재물齎物”은 받아 간 국가의 물건이니, 판매한 물건으로 얻은 이익을 국가에 다 바치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외국에서도 한漢나라 사신을 싫어하여 음식물을 주지 못하도록 금지해서 괴롭게 하였고, 흉노匈奴의 기병奇兵(유격대)도 때때로 막고 공격하였다.注+“고지苦之”는 곤궁하고 괴롭게 함을 이른다.
이에 천자天子는 공손하公孫賀와 조파노趙破奴를 보내어 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흉노를 축출하여 한漢나라의 사신을 가로막지 못하게 하였는데, 모두 한 명의 흉노도 보지 못하였다.
이에 무위武威와 주천酒泉의 땅을 나누어 장액군張掖郡과 돈황군敦煌郡을 설치하고 백성을 이주시켜 채웠다.注+장액張掖은 곤사왕昆邪王이 거주했던 땅이다.
綱
[綱] 복식卜式을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삼았다.
目
[目] 복식卜式이 높은 지위에 오르자, 이에 아뢰기를 “군국郡國에서는 현관縣官(국가)에서 만든 소금과 철물이 맛이 쓰고 품질이 조잡하며 값이 비싼 것을 많이 불편해하는데,注+소금이 맛이 쓰고 쇠로 만든 기물이 취약하고 조잡하였다. 그러므로 모두 고악苦惡이라고 말한 것이다. 값이 비쌈은 소금과 철물이 모두 비싼 것이다. 혹은 백성들로 하여금 강제로 이것을 사게 하고, 배에는 산算(세금)이 있어서 장사꾼이 적어 물건이 비쌉니다.” 하였다.
상上은 이로 말미암아 복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目
[目]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무제武帝가 무공武功을 좋아하여 재정이 부족하였는데, 복식卜式은 이 두 가지로써 상上의 뜻을 맞추다가注+복식卜式은 여러 번 현관縣官(국가)에 재물을 바쳐서 변경邊境의 정벌을 도왔고, 배를 익숙히 다루는 자와 함께 남월南越을 공격할 것을 자원하였다. 벼슬이 높아지자 비로소 바른말을 하여 명예를 구하였다.
그러나 그의 말은 천하의 공론이다.
온 조정에서 말하지 않았는데 복식卜式이 홀로 말했으니, 그의 말을 들은 자는 우선 이 한 부분만을 취함이 옳을 것이다.
綱
[綱] 황제가 스스로 봉선封禪하는 의식을 만들었다.
目
[目] 처음에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병들어 죽으려 할 적에 유서遺書를 남겨서 상上에게 태산泰山을 봉할 것을 권하였는데 마침 보정寶鼎을 얻으니, 상上은 이에 학자들로 하여금 《상서尙書》와 《주관周官(주례周禮)》, 《예기禮記》 〈왕제王制〉의 글을 채택하여 봉선封禪의 의식儀式을 초草하게 하였으나, 몇 년이 되어도 이루지 못하였다.
상上이 이것을 아관兒寬에게 묻자, 예관이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태산泰山을 봉하고 양보梁父에 선禪하여 성姓을 밝히고 서옥瑞玉을 상고함은 제왕帝王의 성대한 일입니다.注+“소성昭姓”은 그 성씨를 밝혀 드러냄을 이른다. 옛날에 반드시 동성同姓을 제후諸侯로 세워서 친족을 친애함을 밝히고, 반드시 이성異姓을 제후로 세워서 어진 이를 존경함을 밝혔다. 서瑞는 서옥瑞玉이니, 그 부합함을 가지고 말하여 서瑞라 한 것이다. “고서考瑞(서옥瑞玉을 상고한다.)”는 그 서신瑞信을 상고함을 말하니,
그러나 제향하고 올리는 의의意義가 경전經傳에 나와 있지 않으니, 여러 신하들이 능히 진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注+열列은 진열한다는 뜻이다.
오직 천자天子만이 중화中和의 극極을 세워서 조관條貫을 겸하여 총괄해서 금金으로 소리를 퍼뜨리고 옥玉으로 거두어 하늘의 복을 순히 이루어 만세萬世의 기업基業을 남길 수 있습니다.”注+극極은 바르다는 뜻이다. “금성이옥진지金聲而玉振之(금金으로 소리를 퍼뜨리고 옥玉으로 거둔다.)”는 덕德스러운 소리를 떨치고 드날리기를 금옥金玉의 소리와 같이 함을 말한 것이다. 경慶은 복福이다.
상上은 마침내 직접 의식을 만들 적에 자못 유학儒學을 채택하여 문식하고, 여러 학자들을 모두 파하고 쓰지 않았다.
역주
역주1獲建德 :
“趙建德은 누구인가? 南越王이다. ‘其王 建德’이라고 쓰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呂嘉가 세운 것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建德 何 南越王 不書其王建德 何 不予呂嘉之立之也]” 《書法》
역주2廣州記 :
廣州 지방의 地理를 기록한 책으로 보이나 확실하지 않다. 廣州는 지금의 廣東‧廣西 지역을 가리킨다.
역주3帝如緱氏觀大人跡 :
“‘方士 文成將軍 少翁이 伏誅되었다.’고 썼는데, 몇 해가 못 되어 ‘方士 欒大를 五利將軍으로 삼고 공주에게 장가들게 했다.’고 썼고, 뒤이어 ‘난대가 伏誅되었다.’고 썼고, 다음해에 ‘황제가 緱氏에 가서 大人의 발자국을 구경하였다.’고 썼으니, 글을 나란히 이어보고 일을 나란히 맞춰보면 황제가 깨닫기 어려움이 심하였다. ‘구경함[觀]’을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으니, 무릇 ‘觀’을 쓴 것은 다 비난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觀’을 쓴 것이 10번이다.[書方士文成將軍少翁伏誅矣 未幾年而書以方士欒大爲五利將軍 尙公主 繼書欒大伏誅矣 次年而書帝如緱氏 觀大人跡 屬辭比事 帝之難悟甚矣 書觀始此 凡書觀 皆譏也 終綱目書觀十]” 《書法》
역주4(當)[嘗] :
저본에는 ‘當’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嘗’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이런……있겠는가 :
이처럼 군주를 기만하는 마음을 가지고 멀리 강과 바다의 사이에 있으면 군주의 신임을 얻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한 것이다.
역주6(奪)[搴] :
저본에는 ‘奪’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搴’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以卜式爲御史大夫 :
“앞에서 ‘卜式을 中郞으로 삼고 左庶長의 관작을 하사했다.’고 쓴 것은 천하 사람들에게 재물을 바치도록 은근히 보여준 것이요, 뒤이어 ‘복식에게 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했다.’고 쓴 것은 천하 사람들에게 출전해서 변경에서 사력을 다하도록 유도한 것이었는데, 이때 다시 ‘복식을 御史大夫로 삼았다.’고 썼으니, 武帝가 복식을 빌어 천하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유도한 것이 지극하였으나, 천하에는 호응하는 자가 없었다. 복식은 마침내 일을 말하다가 소원함을 당하였고, 한 해가 지나서는 그의 秩祿을 낮추어 ‘太子太傅로 삼았다.’고 쓰게 되었다.[前書卜式爲中郞 賜爵左庶長 諷天下以輸財也 繼書賜卜式爵關內侯 諷天下以死邊也 至是復書以卜式爲御史大夫 帝之借式以感諷天下者極矣 而天下莫應 式遂以言事見疏 踰年而有貶爲太子太傅之書矣]” 《書法》
역주8帝自制封禪儀 :
“‘스스로 의식을 만들었다.[自制儀]’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비난 중에 큰 비난이다. 그렇다면 唐나라에서 ‘封禪의 禮를 의논했다.’고 쓴 것은 비난하지 않은 것인가? 봉선은 옛 법이 아니니, 봉선의 禮를 의논했다고 쓴 것은 비난이나, 황제가 직접 만들었다고 쓴 것처럼 심한 비난이 되지는 않는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봉선하는 禮와 儀式를 쓴 것이 3번인데, 봉선의 禮를 의논한 것과, 봉선의 儀式을 논한 것과, 巡狩와 봉선을 의논한 것은 쓰지 않았으니, 여기에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다.[書自制儀 何 譏之譏也 然則唐書議封禪禮 無譏乎 封禪非古也 書議封禪禮 譏也 未若書自制之爲甚譏也 終綱目 書封禪禮儀三 議封禪禮 議封禪儀 議巡狩封禪 不書 不與焉]” 《書法》
역주9書經에……것이다 :
다섯 가지 瑞玉은 公ㆍ侯ㆍ伯ㆍ子ㆍ男 다섯 등급의 제후가 잡는 瑞玉으로, 公은 桓圭, 侯는 信圭, 伯은 躬圭, 子는 穀璧, 男은 蒲璧을 이른다. 《書經》 〈虞書 舜典〉에 “다섯 가지 瑞玉을 거두시니 한 달이 다 되었는데, 날마다 四岳과 群牧을 만나보시고 서옥을 여러 제후들에게 나누어 돌려주었다.[輯五瑞 旣月 乃日覲四岳群牧 班瑞于群后]”라고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