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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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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永初三年이요 魏泰常七年이라
宋以徐羨之 爲司空錄尙書事하다
羨之 起自布衣하여 無術學하되 直以志力局度 一旦居廊廟하니 朝野推服하여 咸謂有宰臣之望注+局度, 器局․度量也.이러라
沈密寡言하여 不以憂喜見色하고 頗工奕碁호되 觀戲 常若未解注+見, 賢遍切.러라
傅亮蔡廓常言호되 徐公曉萬事하여 安異同注+王彪之勸止會稽王昱曰 “深願靜之, 以安異同之論.” 唐張仲方傳云 “泯同異紛綸之論.”이라하더라
嘗與傅亮謝晦宴聚할새 亮晦才學辯博하되 羨之風度詳整하여 時然後言하니 鄭鮮之歎曰 觀徐傅言論하니 不復以學問爲長이로다
宋以廬陵王義眞으로 都督豫雍等州軍事하다
宋主有疾 長沙王道憐徐羨之傅亮謝晦檀道濟竝入侍醫藥이러니 群臣請祈禱神祇한대 不許하고 唯使侍中謝方明으로 以疾告宗廟而已注+方明, 裕之從祖弟也.러라
道濟出鎭廣陵하고 監淮南諸軍하다
太子多狎群小러니 謝晦言於宋主曰 陛下春秋旣高하니 宜思存萬世 神器至重하니 不可使負荷非才니이다
上曰 廬陵何如 晦曰 臣請觀焉호리이다 出造義眞하니 義眞盛欲與談이어늘 晦不甚答하고 還曰 德輕於才하니 非人主也러이다
出義眞爲都督六州諸軍南豫州刺史하고 鎭歷陽注+六州, 南豫․豫․雍․司․秦․幷也.하다 是後大州率加都督하니 多者或至五十州 不可復詳載矣注+迄宋之季, 境內惟二十二州. 至梁武帝時, 沿邊分置諸州, 始有五十州.러라
秦雍流民 入梁州하니 宋遣使賑之하다
◑夏四月 宋封楊盛하여 爲武都王하다
◑五月 宋主裕注+壽, 六十七.하니 하다
宋高祖疾甚 召太子義符誡之曰 檀道濟雖有幹略하나 而無遠志하니 非難御之氣也 徐羨之傅亮 當無異圖
謝晦數從征伐하여 頗識機變하니 若有同異 必此人也 又爲手詔曰 後世若有幼主어든 朝事一委宰相하고 母后不煩臨朝라하다
羨之亮晦道濟同被顧命하다 遂殂하다
高祖清簡寡欲하고 嚴整有法度하여 被服居處 儉於布素하고 遊宴甚稀하고 嬪御至少러라
嘗得後秦高祖從女하여 有盛寵하여 頗以廢事어늘 謝晦微諫하니 即時遣出注+秦王 廟號高祖.하다
財帛皆在外府하여 內無私藏注+藏, 祖浪切.이러니
嶺南嘗獻入筒細布 一端八丈이어늘 惡其精麗勞人注+揚雄蜀都賦曰 “布則蜘蛛作絲, 不可見風, 筩中黃潤, 一端數金.” 言其細也.하여 即付有司彈太守하며 以布還之하고 竝制嶺南하여 禁作此布하다
公主出適 遣送不過二十萬이요 無錦繡之物하니 內外奉禁하여 莫敢爲侈靡러라
性不信奇恠하여 微時多符瑞러니 及貴 史官審以所聞이라도 拒而不答이러라
義符即位하니 年十七이라 立妃司馬氏爲皇后하니 晉恭帝女海鹽公主也
七月 葬初寧陵注+陵在丹陽建康縣蔣山.하다
魏立子燾爲太子하여 監國하다
魏主服寒食散이어늘 頻年藥發하고 災異屢見하니 遣中使密問崔浩曰
屬者 日食趙代之分하고 朕疾彌年不愈하니 恐一旦不諱하노니 諸子竝少하니 將若之何
浩曰 陛下春秋富盛하니 行就平愈어니와 必不得已인댄 請陳瞽言호리라 聖代龍興 不崇儲貳하니 是以永興之始 社稷幾危注+永興, 魏主嗣初立年號. 時道武帝遇弑, 嗣未爲太子, 故云然.하니
今宜早建東宮하여 選賢公卿以爲師傅하고 左右信臣以爲賓友하여 入摠萬機하고 出撫戎政이니 如此 則陛下可以優遊無爲하여 頤神養壽注+頤, 亦養也.
萬世之後 國有成主하여 民有所歸 姦宄息望하고 禍無自生矣리이다 皇子燾年將周星 明叡溫和하니 立子以長 禮之大經也注+周星, 歲星十二年一周天.니이다
魏主復以問長孫嵩한대 對曰 立長則順하고 置賢則人服이요 燾長且賢하니 天所命也니이다
從之하여 立燾爲太子하여 使居正殿臨朝하여 爲國副主하다 以嵩及奚斤安同爲左輔하고 坐東廂하여 西面하고 崔浩與穆觀丘堆爲右弼하고 坐西廂하여 東面하고 百官總己以聽하다
魏主避居西宮하여 時隱而窺之注+自隱蔽其身而窺之也.하거늘 聽其決斷하고 大悅하여 謂侍臣曰
嵩宿德舊臣이라 歷事四世하여 功存社稷注+嵩, 事昭成帝及道武帝․明元帝及太子燾爲四世.하고 斤辯捷智謀하여 名聞遐邇하고 同曉解俗情하여 明練於事하고
觀達於政要하여 識吾旨趣하고 浩博聞強識하여 精察天人하고 堆雖無大用이나 然在公專謹하니 以此六人輔相太子하고 吾與汝曹 巡行四境하여 伐叛柔服이면 足以得志於天下矣注+柔, 安也.로다
嵩實姓拔拔이요 斤姓達奚 觀姓丘穆陵이요 堆姓丘敦이니 時魏臣出代北者 姓多重複이러니 及高祖遷洛 始皆改之注+高祖, 魏孝文帝也.하니
舊史患其煩雜難知 故皆從後姓하여 以就簡易하니 今從之
魏主又以劉絜古弼盧魯元 忠謹恭勤이라하여 分典機要하여 宣納辭令注+古, 姓也.하다
太子聰明大度어늘 群臣時奏所疑 帝曰 此非我所知 當決之汝曹國主也하라하다
六月 宋以傅亮爲中書監尙書令하고 謝晦爲中書令하고 謝方明爲丹陽尹하다
方明善治郡하여 所至有能名하니 承代前人하여 不易其政하고 必宜改者 則以漸移變하여 使無迹可尋이러라
魏遣司空奚斤하여 督諸將擊宋하여 取青兗諸郡하니 宋遣南兗州刺史檀道濟救之하다
魏主聞宋高祖克長安하고 大懼하여 遣使請和한대 自是歲聘不絶이러니 及高祖殂 沈範等奉使在魏라가 及河러니 魏主遣人追執之하고 議發兵取洛陽虎牢滑臺하다
崔浩諫曰 陛下不以劉裕歘起하여 納其使貢하고 裕亦敬事陛下注+欻, 許勿切. 欻起, 暴起也.러니 今乘喪伐之 雖得之라도 不足爲美
且國家今日 亦未能一擧取江南也 而徒有伐喪之名이니 竊爲陛下不取커늘 臣謂宜遣人吊祭하고 存其孤弱하고 恤其凶災하여 使義聲布於天下하면 則江南不攻自服矣
況裕新死하고 黨與未離하니 不如緩之하여 待其彊臣爭權하여 變難必起然後 命將出師 可以兵不疲勞하고 坐收淮北也니이다
魏主曰 劉裕乘姚興之死而滅之하니 今我乘裕喪而伐之하면 何爲不可리오하니
浩曰 不然하니이다 姚興死 諸子交爭이라 故裕乘釁伐之어니와 今江南無釁하니 不可比也니이다
魏主不從하고 假司空奚斤節하여 使督將軍周幾公孫表伐宋하다
十月 將發 公卿議以攻城略地何先하니 奚斤欲先攻城한대 崔浩曰
南人長於守城하니 昔苻氏攻襄陽 經年不拔하니 今以大兵坐攻小城하니 若不時克이면 挫傷軍勢 敵得徐嚴而來 我怠彼鋭 此危道也니라
不如分軍略地하고 至淮爲限하여 列置守宰하고 收斂租穀이니 則洛陽滑臺虎牢更在軍北이라 絶望南救하여 必沿河東走 不則爲囿中之物이니 何憂其不獲也오하니
公孫表固請攻城한대 魏主從之하다 斤等帥步騎三萬하여 濟河營於滑臺之東하니 宋司州刺史毛德祖遣翟廣等將步騎三千救之하다
先是 司馬楚之聚衆陳留之境이러니 聞魏兵濟河하고 遣使迎降하니 魏以爲荊州刺史하여 使侵擾宋北境하니 德祖遣將戍邵陵雍丘以備之注+邵陵縣, 漢屬汝南郡, 晉以後屬潁川郡.하다
魏尙書滑稽引兵襲倉垣하니 兵吏悉踰城走注+滑, 戶八切, 姓也.하고 陳留太守嚴稜詣斤降하다 斤等攻滑臺로되 不拔하고 求益兵하니 魏主怒責之하고 自將諸國兵五萬餘人하여 南出天關하여 爲斤等聲援하다
十一月 太子燾將兵出屯塞上注+魏主南援攻河南之兵, 故太子屯塞上以備柔然.하다 斤等急攻滑臺하여 拔之하니 東郡太守王景度出走하고 司馬陽瓚爲魏所執하여 不降而死하다
乘勝進逼虎牢어늘 毛德祖戰하여 屢破之하니 魏主別遣將軍于栗磾하여 屯河陽하고 謀取金墉이러니 德祖遣竇晃等拒之하니
十二月 魏主至冀州하여 遣叔孫建하여 將兵徇青兗이어늘 宋豫州刺史劉粹 遣騎據項城하고 徐州刺史王仲德 將兵屯湖陸注+粹, 毅之族弟也.하니 于栗磾濟河하고 與斤幷力하여 攻晃等破之하다
魏主遣領軍娥清閭大肥하여 將兵會周幾注+娥, 姓也. 大肥, 柔然人也. 柔然姓郁久閭氏, 今曰閭, 從省便也.하고 叔孫建 南渡河하여 軍於碻磝하니 宋兗州刺史徐琰南走 於是泰山高平金鄉等郡 皆沒於魏注+金鄕縣, 漢屬山陽, 晉屬高平, 蓋晉末分置郡也.하다
叔孫建等入青州어늘 宋遣南兗州刺史檀道濟監征討諸軍事하여 與王仲德共救之하다


宋나라 高祖 武帝 劉裕 永初 3년이고, 北魏 太宗 明元帝 拓跋嗣 泰常 7년이다.
[綱] 봄에 宋나라가 徐羨之를 司空 錄尙書事로 삼았다.
[目] 徐羨之는 布衣의 신분이어서 술수와 학문이 없었으나 다만 뜻과 능력, 재간과 도량으로注+① “局度”는 器局과 度量이다. 하루아침에 조정 중신의 자리에 오르니, 朝野의 사람들이 추대하며 감복하여 모두 재상의 명망이 있다고 말하였다.
침착하고 꼼꼼하며 말이 적어서 근심과 기쁨을 기색에 드러내지注+② 見(드러남)은 賢遍의 切이다. 않았고, 바둑을 꽤 잘 두었으나 바둑판을 구경할 적엔 항상 바둑을 둘 줄 모르는 것처럼 하였다.
傳亮과 蔡廓이 평소 말하기를 “徐公은 만사에 밝아서 의견이 다른 사람을 잘 어루만졌다.”注+③ 王彪之가 會稽王 司馬昱에게 〈武陵王의 반란을 告變하려는 것을〉 그만두도록 권하기를 매우 바라건대 침착하게 대응하여 의견이 다른 논의를 안정시키소서.”라고 하였다. ≪舊唐書≫ 〈張仲方傳〉에 분분히 다른 의론을 없애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檀道濟檀道濟
라고 하였다.
일찍이 부량과 謝晦와 함께 연회에서 모였는데, 부량과 사회는 말재주가 좋고 박학하였으나 서선지는 풍채와 태도가 자상하고 장중하여 때가 된 뒤에야 말을 하였다. 鄭鮮之가 감탄하여 말하기를 “서선지와 부량의 언론을 보니, 다시는 학문을 가지고 훌륭한 점으로 삼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綱] 宋나라가 廬陵王 劉義眞을 都督豫州雍州等州軍事로 삼았다.
[目] 宋主가 병이 들자 長沙王 劉道憐과 徐羨之․傅亮․謝晦․檀道濟가 나란히 들어와서 약시중을 들었다. 여러 신하들이 天神과 地祇에 기도하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오직 侍中 謝方明을注+① 謝方明은 劉裕의 從祖弟(6촌 아우)이다. 시켜서 병을 종묘에 고하도록 했을 뿐이다.
檀道濟가 廣陵으로 나아가 군사들을 진무하고 淮南의 여러 군대를 감독하였다.
[目] 태자가 여러 소인배들을 가까이하는 일이 많았는데, 謝晦가 宋主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춘추가 이미 높으시니 의당 만세를 보존할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보위는 지극히 중요하니 재주가 없는 사람에게 담당하도록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上이 말하기를 “廬陵王(劉義眞)은 어떤가?”라고 하니, 사회가 말하기를 “신이 살펴보겠습니다.”라고 하고, 나가서 유의진에게 가자 유의진이 한껏 그와 함께 대화하려고 하였으나 사회는 그다지 응답하지 않았다. 사회가 돌아와서는 말하기를 “덕이 재능보다 가벼우니 군주의 재질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유의진을 내보내어 都督六州諸軍注+① “六州”는 南豫州․豫州․雍州․司州․秦州․幷州이다. 南豫州刺史로 삼고 歷陽에 鎭守하도록 하였다. 이 이후로 큰 州의 직함에는 대부분 都督을 더하였다. 〈都督하는 州가〉 많을 때는 혹은 50州에 이르렀으므로注+② 宋나라 말에 이르러 국경 안에는 오직 22州만 있었다. 梁 武帝 때에 이르러 沿邊을 나누어 여러 주를 설치하여 비로소 50주가 있었다., 다시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았다.
[綱] 秦州․雍州의 流民이 梁州로 들어가니 宋나라가 사신을 보내어 그들을 진휼하였다.
[綱] 여름 4월에 宋나라가 을 봉하여 武都王으로 삼았다.
[綱] 5월에 宋主 劉裕가 殂하니注+① 향년이 67세였다. 太子 劉義符가 즉위하였다.
[目] 宋나라 高祖가 병이 심해지자 太子 劉義符를 불러 훈계하기를 “檀道濟는 비록 재간과 책략이 있으나 심원한 뜻이 없으니 부리기 어려운 기질이 아니다. 徐羨之와 傅亮은 당연히 반역을 도모함이 없을 것이다.
謝晦가 자주 정벌에 따라다녀 임기응변의 책략을 제법 알고 있으니, 만약 이변이 있게 된다면 반드시 이 사람이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고, 또 손수 조서를 써서 말하기를 “후세에 만약 어린 군주가 있게 된다면 조정의 일은 한결같이 재상에게 맡기고, 황태후(母后)가 번거롭게 臨朝(攝政)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서선지․부량․사회․단도제가 함께 顧命을 받았다. 송 고조가 마침내 殂하였다.
송 고조는 청렴하고 검약하며 욕심이 적었고, 엄정하여 법도가 있어서 옷을 입고 거처하는 것이 평민보다 검소하였고, 유람하거나 잔치를 여는 일이 아주 드물었으며, 妃嬪과 궁녀가 매우 적었다.
일찍이 後秦 高祖의注+① 後秦의 왕 姚興은 廟號가 高祖이다. 조카딸을 얻어 매우 총애하여 그로 인해 정무가 폐기되었는데, 謝晦가 은밀히 간언하자 그녀를 즉시 내보냈다.
재화와 비단은 모두 外府(國庫)에 있고 안에는 사사로이 저장해둔 것이注+② 藏(저장물)은 祖浪의 切이다. 없었다.
嶺南에서 일찍이 대나무 통에 넣은 가는 베를 바치니, 注+③ 揚雄의 〈蜀都賦〉에 “베는 거미가 실을 짠 것과 같아 바람에 일렁임을 볼 수 없네. 통 속의 黃潤(고운 베 이름)은 1端에 몇 金이로다.”라고 하였으니, 베의 가는 정도를 말한 것이다., 베가 정밀하고 화려하여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을 싫어하여 즉시 有司에게 회부하여 太守를 탄핵하게 하였으며, 베를 돌려보내고 아울러 영남에 명을 내려 이런 베를 만드는 것을 금지하도록 하였다.
공주가 시집을 가는 데 보내는 혼수가 20만을 넘지 않았고, 비단에 수놓은 물품이 없었다. 안팎에서는 금령을 받들어 감히 사치하고 낭비하는 자가 없었다.
성격이 기괴한 것을 믿지 않아서, 미천했을 때에 상서로운 징조가 많았는데 귀하게 되자 史官이 들은 것을 살피려 하여도 거절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유의부가 즉위하니 나이가 17세였다. 太子妃 司馬氏를 세워서 황후로 하였다. 황후는 晉 恭帝의 딸 海鹽公主이다.
7월에 고조를 初寧陵에注+④ 初寧陵은 丹陽 建康縣 蔣山에 있다. 장사 지냈다.
[綱] 北魏가 아들 拓跋燾를 세워 太子로 삼아 監國(國事를 대신 다스림)하게 하였다.
[目] 魏主가 을 복용하였는데, 몇 년을 이어서 독성이 발작하였고 災異가 여러 차례 나타나니, 환관을 파견하여 崔浩에게 몰래 묻기를
“근래 일식이 에 있었고, 짐의 병이 일 년이 넘도록 낫지 않으니 갑자기 죽게 될까 걱정이 된다. 여러 아들이 모두 어리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최호가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춘추가 한창이시니, 장차 회복하실 것입니다. 부득이 말을 해야 한다면 어리석은 말을 아뢰도록 하겠습니다. 聖代의 聖君(道武帝)께서 황제를 칭하셨을 때에 황태자를 높이지 않았으니, 이 때문에 永興의 초기에 사직이 위태로울 뻔하였습니다.注+① 永興은 魏主가 처음 즉위했을 때의 연호이다. 당시 道武帝(拓跋珪)가 시해를 당하고, 拓跋嗣가 아직 태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지금 마땅히 東宮을 속히 세우셔서 현명한 公卿을 뽑아서 師傅로 삼고, 측근의 신뢰할 신하를 빈객과 벗으로 삼으셔서, 안으로는 萬機를 총괄하고 밖으로는 군사업무를 다스리게 하여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한다면 폐하께서는 느긋하게 지내면서 정사를 다스리지 않고 정신을 수양하며注+② 頤는 또한 기른다는 뜻이다. 수명을 보양할 수 있습니다.
성상께서 돌아가신 뒤에 나라에 성숙한 군주가 있어 백성들이 돌아갈 곳이 있게 되면 간악한 사람은 야망을 멈추고, 재앙이 저절로 생겨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皇子 拓跋燾는 나이가 장차 周星(12세)이注+③ 周星은 木星이 12년에 한 번 하늘을 도는 것이다. 되려 하는데 사리에 밝고 온화하니, 장자를 세우는 것은 예의 큰 법도입니다.”라고 하였다.
長孫嵩長孫嵩
魏主가 다시 장손숭에게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장자를 세우는 것은 순리이고 현명한 사람을 두면 사람이 복종하는데 탁발도는 장자이고 또 현명하니, 하늘이 명한 사람입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을 따라 탁발도를 세워 태자로 삼아서 그에게 正殿에 머물면서 조정을 다스리게 하여, 나라의 副主(太子)로 삼았다. 장손숭과 奚斤․安同을 左輔로 삼고 東廂(廟堂의 동쪽 행당)에 앉아서 서쪽을 향하게 하고, 최호와 穆觀․丘堆를 右弼로 삼고 西廂에 앉아서 동쪽을 향하게 하고, 백관이 모두 자신들의 직책을 총괄하여 보고하도록 하였다.
魏主가 자리를 피하여 西宮에 머물면서 때때로 숨어서 엿보았는데注+④ 〈“隱而窺之”는〉 스스로 몸을 은폐하고 엿보는 것이다., 그가 결단하는 것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侍臣에게 말하기를
“장손숭은 덕망을 쌓은 원로대신이니 4代에 걸쳐 섬겨서 공로가 사직을 보존하고注+⑤ 長孫嵩은 昭成帝와 道武帝, 明元帝와 太子 拓跋燾를 섬겼으니, 4대가 된다., 해근은 말을 잘하고 지모가 있어서 명성이 원근에 났고, 안동은 세속의 사정을 잘 알아 일에 밝고 익숙하며,
목관은 정무의 요점에 통달하여 나의 뜻을 알고, 최호는 견문이 넓고 잘 기억하여 하늘과 사람을 정밀하게 살피고, 구퇴는 비록 큰 쓰임새는 없으나 공적인 일에서 專心으로 신중하게 한다. 이 여섯 명으로 태자를 보좌하게 하고, 내가 너희들과 함께 사방의 지역을 순행하여 반역자를 정벌하고 복종하는 자를 편안하게 대하면注+⑥ 柔는 편안하다는 뜻이다. 천하에서 뜻을 얻기에 충분하다.”라고 하였다.
[目] 長孫嵩은 본성이 拔拔이고, 奚斤은 성이 達奚이며, 穆觀은 성이 丘穆陵이고, 丘堆는 성이 丘敦이다. 당시에 北魏의 신하들 중 代의 북쪽 출신자들은 複姓이 많았는데, 高祖가注+① 高祖는 北魏 孝文帝이다. 洛陽으로 천도해오자 비로소 모두 〈單姓으로〉 고쳤다.
舊史에도 번잡하여 알기 어렵다고 근심하였으므로, 모두 뒤에 고친 單姓을 따라서 簡易하게 하였으니, 지금에 그것을 따른다.
魏主는 또 劉絜․古弼注+② 〈古弼의〉 古는 姓이다.․盧魯元이 충성스럽고 근신하며 공손하고 근면하다고 여겨 기밀과 관련된 업무를 나누어 맡게 하여 辭令을 출납하게 하였다.
태자는 총명하고 큰 도량을 가졌는데도, 여러 신하들이 때때로 의심스러운 것을 황제에게 아뢰면 황제가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너희 國主인 太子가 이것을 결정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綱] 6월에 宋나라가 傅亮을 中書監 尙書令으로 삼고, 謝晦를 中書令으로 삼고, 謝方明을 丹陽尹으로 삼았다.
[目] 謝方明이 郡을 잘 다스려서 부임하는 곳마다 잘 다스린다는 평판이 있었다. 그는 전임자의 일을 이어서 교대하여 그 정사를 바꾸지 않고, 반드시 고쳐야 할 일은 점차 바꾸어서 〈정사를 바꾼〉 자취를 찾을 수가 없게 하였다.
[綱] 겨울에 北魏가 司空 奚斤을 보내 여러 장군들을 감독하여 宋나라를 공격하여 青州․兗州의 여러 郡을 점령하였다. 宋나라가 南兗州刺史 檀道濟를 보내서 구원하였다.
[目] 예전에 魏主가 宋나라 高祖가 長安에서 승리하였다는 소식을 듣고서 크게 두려워하여 사신을 파견하여 화해를 청하였는데, 이로부터 해마다 交聘이 끊이지 않았다. 고조가 殂하자, 沈範 등이 使命을 받들고 北魏에 있다가 돌아올 적에 황하에 이르렀는데, 魏主가 사람을 보내어 쫓아가서 그들을 체포하고, 군사를 일으켜 洛陽․虎牢․滑臺를 점령할 것을 논의하였다.
崔浩가 간언하기를 “폐하께서는 劉裕가 갑자기 흥기하였다고注+① 欻(갑자기)은 許勿의 切이다. “欻起”는 갑자기 일어난다는 뜻이다. 생각하지 않으셔서 그의 사신과 공물을 받아들였으며, 유유 역시 폐하를 공경히 섬겼습니다. 지금 喪事를 틈타서 정벌하면 비록 성공한다 해도 아름다운 일이 되기에는 부족합니다.
또 우리나라도 지금 일거에 江南을 탈취할 수 없고, 다만 상중에 공격하였다는 惡名만 갖게 될 것이니 삼가 폐하를 위하여 옳게 여기지 않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마땅히 사람을 파견하여 조문하며 제사 지내고 어린 상주를 위로하고 흉악한 재해를 구휼하여 의롭다는 명성을 천하에 퍼지게 하면 江南은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복종할 것입니다.
게다가 유유가 막 죽었고 그 당여들이 아직 흩어지지 않았으니, 〈군사를 내는 것을〉 천천히 하여 그 강한 신하들이 권력을 다투어 반드시 변란이 일어나기를 기다린 뒤에 장수에게 명하여 군대를 출동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병사들이 피로하지 않고도 앉아서 淮水 이북을 차지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말하기를 지금 우리가 유유가 죽은 틈을 타서 정벌하면 어찌 안 될 것이 있겠는가?”라고 하자,
최호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요흥이 죽자 아들들이 서로 다투었기 때문에 유유가 그 틈을 타서 정벌하였습니다. 지금 강남은 틈이 없으니 비교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따르지 않고, 司空 奚斤에게 장군 周幾와 公孫表를 감독하게 하여 宋나라를 정벌하게 하였다.
[目] 10월에 출발하려 할 때에 공경들이 성을 공격하는 것과 땅을 빼앗는 것 중에서 무엇을 먼저 할지를 의논하였다. 奚斤이 먼저 성을 공격하려고 하자 崔浩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남방 사람은 성을 지키는 것에 長技가 있습니다. 지금 많은 군사를 가지고 눌러앉아 작은 성을 공격하는데 만약 제때에 이기지 못하면 군대의 기세가 꺾이고 손상될 것입니다. 적이 서서히 전열을 정비하고 쳐들어오면 우리는 해이하고 저들은 날랠 것이니, 이것은 위태로운 방법입니다.
군대를 나누어 땅을 경략하고 淮水까지 한계를 삼아 수령을 차례로 배치하여 조세를 거둬들이는 것만 못합니다. 그렇게 하면 洛陽․滑臺․虎牢가 또한 우리 군대의 북쪽에 있게 되어 남쪽의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끊겨 반드시 황하를 따라 동쪽으로 달아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갇힌 물건이 될 것이니, 어찌 그것을 잡지 못할까 두려워하겠습니까.”
공손표가 굳이 성을 공격하겠다고 요청하자, 魏主가 이를 따랐다. 해근 등이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인솔하여 황하를 건너가서 활대의 동쪽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宋나라는 司州刺史 毛德祖가 翟廣 등을 보내어 보병과 기병 3천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目] 이보다 앞서 〈東晉의 황족〉 司馬楚之가 陳留의 경내에서 무리를 모으고 있다가 北魏의 군대가 황하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서 사신을 보내어 영접하고 항복하였다. 北魏는 그를 荊州刺史로 삼아 宋나라 북쪽 경계를 침범하여 어지럽히게 하였다. 毛德祖는 장수를 파견하여 邵陵과注+① 邵陵縣은 漢나라 때 汝南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이후에는 潁川郡에 속하였다. 雍丘를 지키면서 그들을 대비하게 하였다.
北魏의 尙書 滑稽가注+② 滑은 戶八의 切이니, 姓이다. 병사를 인솔하고서 倉垣을 습격하니, 병사와 관리는 모두 성을 넘어 달아났고 陳留太守 嚴稜이 奚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해근 등이 滑臺를 공격하였으나 빼앗지 못하고 군사를 보태주기를 요청하자, 魏主가 노하여 그를 질책하고는 諸國의 군사 5만여 명을 직접 거느리고 남쪽으로 天關을 나가 해근 등을 聲援하였다.
[目] 11월에 太子 拓跋燾가 군대를 거느리고 나아가 邊塞에 주둔하였다.注+① 魏主가 남쪽으로 河南을 공격하는 병사들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太子가 邊塞에 주둔하여 에 대비하였다. 奚斤 등이 급하게 滑臺를 공격하여 빼앗으니, 東郡太守 王景度가 빠져나와 달아났고, 司馬 陽瓚은 北魏에게 사로잡히자 항복하지 않고 죽었다.
해근이 승리를 틈타 나가 虎牢를 압박하였는데, 毛德祖가 싸워서 여러 차례 격파하였다. 魏主가 장군 于栗磾(우율제)를 따로 보내 河陽에 주둔하게 하고 金墉을 점령할 것을 도모하니, 모덕조가 竇晃 등을 보내서 막았다.
12월에 魏主가 冀州에 이르러서 叔孫建을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青州․兗州를 경략하게 하였는데, 宋나라 豫州刺史 劉粹가注+② 劉粹는 劉毅의 族弟이다. 기병을 보내서 項城을 지키고 徐州刺史 王仲德이 병사를 거느리고 湖陸에 주둔하였다. 우율제가 황하를 건너서 해근과 함께 병력을 연합하여 두황 등을 공격하여 격파하였다.
[目] 魏主는 領軍 娥淸과 閭大肥를注+① 娥는 姓이다. 大肥는 柔然 사람이다. 柔然은 姓이 郁久閭氏인데, 지금은 閭라고 하니, 생략하여 간편하게 한 것을 따른 것이다. 파견하여 병사를 거느리고서 周幾와 회동하게 하고 叔孫建은 남쪽으로 황하를 건너가서 碻磝에 주둔하게 하니, 宋나라 兗州刺史 徐琰이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에 泰山郡․高平郡․金鄕郡注+② 金鄕縣은 漢나라 때에 山陽郡에 속하였고, 晉나라 때는 高平郡에 속하였다. 晉나라 말기에 郡을 나누어 두었다. 등이 모두 北魏로 합병되었다.
숙손건 등이 靑州로 들어갔는데, 宋나라는 南兗州刺史 檀道濟를 보내 로 삼아 王仲德과 함께 구원하게 하였다.


역주
역주1 무릉왕의……뿐입니다 : ≪資治通鑑≫에는 “深願靜之” 앞에 “武陵王之志 盡於馳騁畋獵而已耳”라 하였다.
역주2 褒貶과……정하여 : ≪舊唐書≫ 〈張仲方傳〉에는 “泯同異紛綸之論” 앞에 “定褒貶是非之宜”라 하였다.
역주3 楊盛 : 仇池의 군주이다. 仇池는 氐族의 酋長 楊茂搜가 수립한 地方政権이다. 西晉時代에 자립하였다. 지금의 甘肅省 成県에 위치한다. 前趙 때 武都王에 봉해졌다. 이후 楊盛 때 後秦에게 복속하여 무도왕에 봉해졌으나 이후 후진을 배반하고 東晉에게 복속하였다가, 다시 宋나라에게 복속하여 무도왕에 봉해졌다.
역주4 : 〈資治通鑑綱目凡例〉에 천하를 통일한 황제의 죽음을 ‘崩’이라 하고, 황제를 칭하였으나 천하를 통일하지 못해 정통으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에는 ‘殂’라고 하였다. 이 경우 ‘殂’라고 쓴 것은 宋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역주5 宋主裕殂 太子義符立 : “宋나라 高祖가 아직 晉나라를 대신하지 않았을 적에 ≪資治通鑑綱目≫에는 누차 그 공로를 기록하였으니, 孫恩을 공격한 것이 모두 네 번 기록되고, 盧循을 공격한 것이 모두 일곱 번 기록되고, 桓玄을 토벌한 것이 두 번 기록되고, 南燕을 정벌한 것이 두 번 기록되고, 後秦을 정벌한 것이 네 번 기록되었다. 晉나라를 대신한 이후에는 두 번 그 선행을 기록하였는데, 부정한 祠廟를 부순 것을 기록하고, 유랑민을 구휼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모두 허여한 것이다. 그러나 그 임금과 신하의 즈음에는 끝내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일곱 번 스스로 관직에 오른 것을 기록하고, 두 번 殊禮를 참람하게 행한 것을 기록하고, 세 번 죄 없는 사람을 죽임을 기록하고, 두 번 임금을 시해함을 기록하고, 한 번 名分과 義理를 폐기함을 기록하였으니 〈그 의리가〉 엄숙하다. 滅國의 군주를 ‘弑’라고 기록한 것은 宋나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君子가 더욱 크게 죄를 준 것이다.[宋祖之未代晉也 綱目屢書其功 擊孫恩凡四書 擊盧循凡七書 討玄再書 伐燕再書 伐秦四書 代晉以後 再書其善 書毁淫祠 書賑流民 皆予之也 然於其君臣之際 終不少貸 是故七書自官 再書僭殊禮 三書殺無罪 再書弑 一書廢名義 蓋凛凛矣 至滅國之主書弑 自宋始 君子尤深罪之]” ≪書法≫ ‘自官’은 劉裕가 스스로 太尉 등이 된 것이고, ‘殊禮’는 검을 차고 殿에 오르고 贊拜에 이름을 부르지 않은 것 등이다.
역주6 반필에 8丈이었는데 : ‘一端’은 半匹로 ‘二端’이 한 匹이다. 보통 반필의 길이는 4丈인데 이는 매우 가늘어 길이가 8丈인 것이다.(≪資治通鑑新註≫, 陝西人民出版社, 1998)
역주7 (從)[後] : 저본에는 ‘從’으로 되어 있으나, ≪晉書≫ 권117 〈載記 姚興 上〉에 의거하여 ‘後’로 바로잡았다.
역주8 (與)[興] : 저본에는 ‘與’로 되어 있으나, ≪晉書≫ 권117 〈載記 姚興 上〉에 의거하여 ‘興’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 寒食散 : 古代의 약명으로 복용한 뒤에 응당 찬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해서 ‘寒食散’이라 하였다. 紫石英․白石英․赤石脂․鍾乳石․硫磺 등 다섯 광석이 주요 성분으로 배합되어 있기 때문에 ‘五石散’이라고도 불렸다. 漢代에 시작되어 魏晉南北朝 시기 名士들이 이 약을 애용하였는데, 종종 불구가 되거나 죽기도 하였다.
역주10 趙와……분야 : 28宿(수)가 하늘에 펼쳐 있을 때 각각 운행하는 度數가 있다. 이에 周天을 12방위로 나누어 그 지역에 해당하는 곳을 分野라 한다. ≪晉書≫ 〈天文志〉에 “胃宿 7度부터 畢宿 11도까지가 大梁이 되니 12방위의 西方에 있고 趙나라 分野이다.” 하였다.
역주11 유유는……멸망시켰으니 : 姚興(366~416)은 5胡16國 시대 後秦의 임금으로, 儒學을 중시하고 佛敎를 提創했다. 요흥이 죽자 그의 맏아들 姚泓은 비밀에 부쳐 發喪하지 않고 南陽公 姚愔, 呂隆, 大將軍 尹元 등을 살해한 다음에 스스로 皇帝에 즉위하였다. 東晉에서는 太尉 劉裕를 中外大都督으로 삼고, 後秦을 정벌하게 하여 멸망시켰다.
역주12 符節을 주고 : 皇帝 使命의 권력을 행사하는 부절을 주는 것을 말한다. 魏晉 시기에는 地方 軍政 관원에게 3가지 칭호를 부여하였는데, ‘使持節’은 中級 이하 관리를 주살할 수 있었고, ‘持節’은 관직이 없는 사람을 주살할 수 있었고, ‘假節’은 軍令을 어긴 자를 주살할 수 있었다.
역주13 옛날에……못하였습니다 : 晉 孝武帝 太元 3, 4년(378~379)의 일이다. ≪資治通鑑≫ 권144에 보인다. 太元 3년 2월에 秦王 苻堅은 장군들에게 7만 명을 지휘하여 襄陽을 침략하게 하였으나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12월에 경비만 소비하고 戰果를 못 올린 苻丕를 탄핵하는 상주문이 올라오자, 부견은 부비에게 사신을 보내 꾸짖게 하고 칼을 주면서 내년 봄까지 승리하지 못하면 목숨을 끊으라고 하였다. 太元 4년 2월에 부비가 마침내 양양에서 승리하고, 포로를 잡아 부견이 있는 長安으로 호송하였다.
역주14 柔然 : 5, 6세기 경 몽골 초원에 건설된 유목 제국을 일컫는다. 鮮卑系 유목 민족으로 처음에는 拓跋鮮卑에게 복속되었으나 차츰 몽골 고원에서 다른 유목민을 정복하여 국가를 세웠다. 匈奴의 單于를 대신하는 可汗의 명칭을 사용하였다. 北魏와 대립하였다.(≪魏書 外國傳 譯註≫, 동북아역사재단, 2009)
역주15 監征討諸軍事 : ≪晉書≫에는 都督某州征討諸軍事, 또는 監某州征討諸軍事로 나온다. 都督某州諸軍事는 三國時代 都督의 직책이 등장하면서 나왔으며, 晉나라 때에는 정벌하는 지역에 都督某州征討諸軍事가 나온 것으로 보이는데, 都督征討諸軍事로 쓰이는 경우도 다수 보인다. 이것이 監征討諸軍事와 혼용해서 쓰인 것으로 보인다.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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