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成太子班之舅羅演等이 謀殺成主期하고 立班子라가 事覺하니 期殺演等及班母羅氏하다
期自得志로 輕諸舊臣하고 信任景騫, 姚華, 田褒, 中常侍許涪等하여 刑賞大政 皆决於數人하니
褒無他才요 嘗勸雄立期爲太子라 故有寵하니 由是로 紀綱隳紊하여 雄業이 衰矣러라
目
[목目] 사도司徒 왕도王導가 몸이 쇠약하여 병이 나서 조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그의 부府에 행차하여 여러 신하들과 내실内室에서 잔치하고 왕도와 왕도의 처인 조씨曹氏에게 절하니,
시중侍中 공탄孔坦이 은밀히 간諫하기를 “막 관례冠禮를 행하였으니, 행동할 때마다 마땅히 예법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하였다. 이때 황제는 한창 왕도에게 정사를 맡기고 있었다.
공탄이 다시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춘추春秋가 이미 장성하시어
注+① 長(자라다)은 知兩의 切이다. “日躋”는 날로 나아감과 같다. 예지叡智와
공경恭敬이 날로 진전되시니, 마땅히 조정 신하들의 의견을 널리 받아들여서 좋은 방도를 자문하여 헤아리셔야 합니다.” 하였다.
왕도가 이 말을 듣고 그를 미워하여 정위廷尉로 내보내니, 공탄은 병을 칭탁하고 관직을 떠나갔다.
目
[
목目]
왕도王導가
왕몽王濛과
왕술王述을 불러
연속掾屬으로 삼았다.
注+① 王濛은 掾이 되고, 王述은 中兵屬이 되었다. 왕술은 王昶의 曾孫이다. 왕몽은 작은 청렴은 닦지 않았으나 깨끗하고 검약함으로 칭찬을 받았고,
패국沛國의
유담劉惔(유담)과
注+② 惔은 談과 淡의 두 가지 音이다. 매우 친하였다.
유담은 항상 왕몽을 성품이 지극히 통창通暢하여 자연스럽게 절도가 있다고 칭찬하였고, 왕몽은 말하기를 “유군劉君은 내가 나 스스로를 아는 것보다 더 나를 잘 안다.” 하니, 당시에 풍류를 칭하는 자들은 유담과 왕몽을 으뜸으로 여겼다.
왕술은
注+③ 王昶의 아들이 王湛이고 왕담의 아들이 王承이니, 대대로 높은 명성이 있었다. 王述은 왕승의 아들이다. 성품이 침착하고 고요하여, 좌중의 손님들의
논변論辯이 벌 떼처럼 어지러이 일어날 때에도, 왕술은 매번 태연히 대처하였다. 나이가 30이 되었는데도 이름이 알려지지 않으니,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칭하였다.
왕도는 그가
명문사족名門士族 출신이라 하여 그를
벽소辟召하였는데, 만나서는 오직
강동江東의 쌀값만 물었다.
注+④ 王述은 아마도 東吳에서 建康으로 온 듯하다. 왕술이 눈을 부릅뜨고 대답하지 않으니, 왕도가 말하기를 “
왕연속王掾屬은 어리석지 않다.” 하였다.
왕도가 말할 때마다 온 좌중의 사람들이 모두 칭찬하고 찬미하자, 왕술이 정색하고 말하기를 “사람이 요순堯舜이 아니면 어찌 매사를 다 선善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하니, 왕도가 용모를 고치고 그에게 사과하였다.
目
[목目] 성成나라 태자 이반李班의 외숙인 나연羅演 등이 성주成主 이기李期를 살해하고 이반의 아들을 세울 것을 모의하다가 일이 발각되니, 이기가 나연 등과 이반의 어미인 나씨羅氏를 죽였다.
이기는 뜻을 얻은 뒤로부터 옛 신하들을 경시하고, 경건景騫, 요화姚華, 전포田褒와 중상시中常侍 허부許涪(허부) 등을 신임하여, 형벌하고 상을 주는 큰 정사가 모두 이들 몇 사람에 의해 결정되었다.
전포는 다른 재능은 없고 일찍이 이웅李雄에게 이기李期를 태자로 세울 것을 권하였기 때문에 총애를 받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성成나라의 기강이 무너지고 문란하여 이웅의 기업基業이 쇠망하게 되었다.
目
[목目] 처음에 장궤張軌와 장식張寔, 장무張茂가 하우河右(하서河西) 지역을 점거하였으나 군대를 출동하여 전쟁하지 않는 해가 없었는데, 장준張駿이 뒤를 이어 즉위하자 경내境内가 점점 평안해졌다.
장준은 여러 정사를 부지런히 닦고 문무관文武官을 잘 통제하여 모두 적재적소에 등용하고 백성들이 부유하고 군대가 강하니, 원근遠近에서 어진 군주라고 칭찬하였다.
장준이 장수를 보내어 구자龜兹와 선선鄯善을 정벌하니, 이에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가 모두 고장姑臧에 나와 조공朝貢을 바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