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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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戊申年(A.D.48)
二十四年이라 春正月 匈奴南邊八部 立日逐王比하여 爲南單于하고 款塞內附하다
匈奴單于輿 弟右谷蠡知牙師 以次當爲左賢王이요 左賢王 當爲單于 單于欲傳其子하여 遂殺知牙師하다
烏珠留單于有子하니 曰比 爲右薁鞬日逐王하여 領南邊八部注+薁, 音郁. 鞬, 居言切.러니
比見知牙師死하고 出怨言曰 以兄弟言之하면 右谷蠡王 次當立이요 以子言之하면 前單于長子 我當立이라하고
遂內懷猜懼하여 庭會稀闊注+呼韓邪單于約其諸子, 以兄弟次相傳, 單于輿殺其弟知牙師而立其子, 亂呼韓邪之約, 而比則烏珠留之長子也. 比自謂 “若父子相傳, 則烏珠留死, 比當立爲單于, 何待至輿而始傳其子也.” 庭會, 匈奴諸王, 歲正月, 會單于庭.이라 單于疑之하고 乃遣兩骨都侯하여 監領比所部兵注+骨都侯, 匈奴官號, 亦有左右. 索隱曰 “骨都, 異姓大臣.”이러니
及單于蒲奴立 比益恨望하여 密遣漢人郭衡하여 奉匈奴地圖하고 詣西河太守하여 求內附하다
兩骨都侯頗覺其意하고 勸單于誅比注+通鑑 “會五月龍祠, 勸單于誅比.”한대 比弟漸將王 在單于帳下라가 聞之하고 馳以報比注+匈奴有左․右漸將王, 失其名. 漸, 當作斬.하다
比遂聚八部兵四五萬人하여 待兩骨都侯還하여 欲殺之러니 骨都侯且到 知其謀하고 亡去하다
單于遣萬騎擊之러니 見比衆盛하고 不敢進而還하다
八部大人 共議立比하여 爲呼韓邪單于하고 款五原塞하여 願永爲藩蔽하여 扞禦北虜하다
事下公卿하니 議者皆以爲 天下初定 中國空虛하니 不可許니이다
五官中都將耿國注+中都將, 通鑑作中郞將. 獨以爲 宜如孝宣故事하여 受之하여 令東扞鮮卑하고 北拒匈奴하며 率厲四夷하여 完復邊郡注+時, 邊郡皆創殘, 有南匈奴爲扞蔽, 則可以完復矣.이라한대
帝從之하니 於是 分爲南北匈奴注+比內附, 是爲南匈奴, 蒲奴立, 是爲北匈奴.하다
秋七月 遣馬援하여 征武陵蠻하다
武林蠻 冦臨沅注+臨沅, 縣名, 屬武陵郡, 以南臨水, 故名焉.이어늘 遣謁者李嵩 中山太守馬成하여 討之러니 不克하다
馬援 請行이어늘 帝愍其老하여 未許한대 援曰 臣尙能被甲上馬니이다
帝令試之하니 據鞍顧하여 以示可用이라 帝笑曰 矍鑠哉 是翁注+矍, 厥縛切. 鑠, 書藥切. 矍鑠, 勇貌.이여하고
遂遣하여 率中郞將馬武, 耿舒等하여 將四萬餘人하여 征五溪注+水經註 “武陵有五溪, 謂雄溪․樠溪․酉溪․潕溪․辰溪, 悉是蠻夷所居, 故謂五溪, 皆槃瓠之子孫也. 土俗, 雄作熊, 樠作朗, 潕作武. 槃瓠, 犬名, 南蠻之祖.”하다
謂友人杜愔曰 吾受厚恩하여 年迫日索하니 常恐不得死國事러니 今獲所願하니 甘心瞑目注+迫, 逼也. 索, 昔各切, 盡也. 謂歲月老也. 瞑, 莫定切. 瞑目, 閉目也.이라
但畏長者家兒或在左右與從事하여 殊難得調하니 介介獨惡是耳注+長, 上聲. 長者家兒, 謂權要子弟等. 調, 和也. 介介, 猶耿耿也. 惡, 烏路切. 援固已慮耿舒之難與共事․梁松竇固之邇言矣.라하니라
冬十月 匈奴南單于 遣使入貢하다
南單于奉藩稱臣이어늘 上以問朗陵侯臧宮注+朗陵, 縣名, 屬汝南郡.한대 宮曰 匈奴飢疫分爭하니 臣願得五千騎以立功하노이다
帝笑曰 常勝之家 難與慮敵하니 吾方自思之호리라


무신년戊申年(A.D.48)
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 건무建武 24년이다. 봄 정월에 흉노匈奴의 남쪽 변경에 있는 8개의 일축왕 비日逐王 比를 세워 남선우南單于라 하고, 변경에 와서 내부內附하였다.
】 처음에 흉노匈奴선우 여單于 輿(20대 선우)의 아우 우녹리왕右谷蠡王(우록리왕) 지아사知牙師가 차례에 따라 마땅히 이 되고, 좌현왕이 선우가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선우 여單于 輿는 선우의 지위를 아들에게 전하고자 하여 마침내 지아사를 죽였다.
오주류선우烏珠留單于(18대 선우)에게 라는 아들이 있어, 우욱건일축왕右薁鞬日逐王(우욱건일축왕)이 되어 남쪽 변경의 8를 거느리고 있었는데注+은 음이 이다. 거언居言이다.,
는 지아사가 죽게 된 것을 보고 원망하기를 “형제의 차례로 말하면 우록리왕이 순서상 마땅히 즉위해야 할 것이요, 아들로 말하면 나는 전 선우前 單于(오주류선우)의 맏아들이니 내가 마땅히 즉위해야 한다.” 하고,
마침내 안으로 시기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품고서 왕정의 모임에 참여하는 것이 드물었다.注+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가 여러 아들들에게 형제의 차례에 따라 지위를 물려주기로 약속하였는데, 선우 여單于 輿가 그의 아우 지아사知牙師를 죽이고 자신의 아들을 세워서 호한야呼韓邪의 약속을 어지럽히니, 오주류烏珠留의 맏아들이다. 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약 부자父子가 서로 전한다면 오주류가 죽었을 적에 내가 마땅히 즉위하여 선우가 되어야 했는데, 하필이면 輿에 이르러 처음으로 그 아들에게 전할 수 있겠는가.” 한 것이다. “정회庭會”는 흉노의 여러 이 매년 정월에 선우의 왕정에 모이는 것이다. 선우가 그를 의심해서 마침내 두 골도후骨都侯를 보내 가 거느리고 있는 병력을 감독하게 하였다.注+골도후骨都侯흉노匈奴관호官號이니 또한 좌골도후左骨都侯우골도후右骨都侯가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골도骨都이성異姓대신大臣이다.” 하였다.
(22대 선우)가 즉위하자, 가 더욱 한하고 원망해서 은밀히 나라 사람인 곽형郭衡을 보내 흉노의 지도地圖를 받들고 서하태수西河太守에게 나아가 내부內附를 청하였다.
두 골도후가 그 뜻을 분명히 깨닫고 선우에게 를 죽일 것을 권하였는데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 “5월에 모여 를 지낼 적에 선우單于에게 를 죽일 것을 권했다.” 하였다., 의 아우 점장왕漸將王이 선우의 장막 아래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말을 치달려 에게 보고하였다.注+흉노匈奴에는 좌점장왕左漸將王, 우점장왕右漸將王이 있으니, 그 이름은 알지 못한다. 은 응당 이 되어야 한다.
는 마침내 8의 병력 4, 5만 명을 모아놓고 두 골도후骨都侯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죽이려 하였는데, 골도후는 거의 도착할 즈음에 그의 계책을 알고 달아났다.
선우單于가 만 명의 기병을 보내 를 공격하였는데, 의 무리가 많은 것을 보고는 감히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8대인大人이 함께 의논하여 를 세워 (남흉노南匈奴 제1대 선우)라 하고 오원五原의 변경에 와서 영원히 나라의 울타리[번폐藩蔽]가 되어서 북쪽 오랑캐를 막을 것을 원하였다.
이 일을 공경公卿에게 회부하니,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말하기를 “천하가 이제 처음 안정됨에 중국中國이 텅 비었으니,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오관중도장 경국五官中都將 耿國注+중도장中都將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중랑장中郞將으로 되어 있다. 홀로 말하기를 “마땅히 를 따라 그들의 청원을 받아들여 그들로 하여금 동쪽으로 선비鮮卑를 막고 북쪽으로 흉노匈奴를 막으며 사방 오랑캐들을 격려하게 해서 변군邊郡을 완전히 회복해야 합니다.”注+이때에 변군邊郡들이 모두 흉노匈奴에게 폐해를 입으니, 남흉노南匈奴가 울타리가 되어준다면 완전하게 회복할 수 있는 것이다. 하니,
황제가 이 말을 따랐다. 이에 흉노가 남흉노南匈奴북흉노北匈奴로 나뉘었다.注+〈“분위남북흉노分爲南北匈奴”는〉 내부內附하니 이것이 남흉노南匈奴이고, 포노蒲奴가 즉위하니 이것이 북흉노北匈奴이다.
】 가을 7월에 마원馬援을 보내 무릉武陵만족蠻族을 정벌하였다.
무림武林만족蠻族임원臨沅을 침략하자注+임원臨沅의 이름이니 무릉군武陵郡에 속하였는데, 남쪽으로 원수沅水에 임하였기 때문에 이것으로 이름한 것이다., 알자 이숭謁者 李嵩(이숭)과 중산태수 마성中山太守 馬成을 보내 토벌하게 하였는데, 이기지 못하였다.
마원馬援이 출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황제가 그의 연로함을 걱정하여 허락하지 않자, 마원이 말하기를 “은 아직도 갑옷을 입고 말에 오를 수 있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그로 하여금 시험해보게 하니, 마원이 안장에 걸터앉아 좌우를 돌아보면서 자신이 아직도 쓸 만하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황제가 웃으며 말하기를 “용맹하도다. 이 노인네여.”注+궐박厥縛이고 서약書藥이니, “곽삭矍鑠”은 용맹한 모습이다. 하고는,
마침내 파견하여 중랑장 마무中郞將 馬武경서耿舒 등을 인솔하고서 4만여 명을 거느리고 오계五溪를 정벌하게 하였다.注+수경주水經註≫에 “무릉武陵오계五溪가 있으니, 웅계雄溪, 만계樠溪, 유계酉溪, 무계潕溪, 신계辰溪를 이르는바, 모두 만이蠻夷가 거주하던 곳이다. 그러므로 오계五溪라 칭하였으니 모두 반호槃瓠의 자손이다. 이 지방 풍속에 으로 쓰고, 으로 쓰고, 로 쓴다. 반호槃瓠는 개의 이름이니 남만南蠻의 시조이다.” 하였다.
마원이 친구인 두음杜愔(두음)에게 이르기를 “내 국가의 두터운 은혜를 받고서 죽을 나이가 임박하여 살아 있을 날이 얼마 없으니, 항상 국사國事에 죽지 못할까 염려했다. 그런데 이제 나의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게 되었으니, 안심하고 눈을 감을 수 있겠다.注+은 가까움이다. 석각昔各로 다함이니, 〈“연박일삭年迫日索”은〉 세월이 다하여 늙어감을 이른다. (눈 감다)은 막정莫定이니, “명목瞑目”은 죽어서 눈을 감는 것이다.
다만 장자長者(권세가權勢家)의 자제가 혹 좌우에서 함께 종사하게 되어 자못 조화롭지 못할까 염려되니, 께름칙하여 이것만이 싫을 뿐이다.”注+(어른)은 상성上聲이다. “장자가아長者家兒”는 권문세가의 자제 등을 이른다. 調는 조화이다. “개개介介”는 경경耿耿(염려하여 잊지 못함)과 같다. (싫어하다)는 오로烏路이다. 마원馬援은 진실로 이미 경서耿舒와 함께 일하기 어려운 것과 양송梁松두고竇固의 참소하는 말을 염려한 것이다. 하였다.
】 겨울 10월에 흉노匈奴남선우南單于가 사신을 들여보내 공물을 바쳤다.
남선우南單于번국藩國를 받들어 이라고 칭하자, 낭릉후 장궁朗陵侯 臧宮에게 물으니注+낭릉朗陵의 이름이니 여남군汝南郡에 속하였다., 장궁이 대답하기를 “흉노匈奴가 기근과 역병에 시달리고 남북南北으로 나뉘어 다투고 있으니, 이 5천 명의 기병을 얻어 을 세우고자 합니다.” 하였다.
황제는 웃으며 말하기를 “항상 승리한 사람과는 적을 도모하기 어려우니, 내 바야흐로 스스로 생각해보겠다.” 하였다.


역주
역주1 左賢王 : ≪後漢書≫ 〈南匈奴傳〉에 “大臣 중에 귀한 자는 左賢王이고 다음은 左谷蠡王, 다음은 右賢王, 다음은 右谷蠡王이니, 이들을 四角이라 칭하였다. 다음은 左日逐王, 右日逐王, 다음은 左溫禺鞮王, 右溫禺鞮王, 다음은 左漸將王, 右漸將王으로 이들을 六角이라 칭했다.” 하였다.
역주2 單于 蒲奴 : 선우 輿가 죽자 그의 아들인 左賢王 鳥達鞮侯가 선우에 즉위하였는데, 그가 죽자 그의 아우 蒲奴가 선우가 되었다.
역주3 龍祠 : 고대에 匈奴의 單于가 龍城에서 사람들을 크게 모아 선조와 천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가리킨다. 흉노는 매년 正月, 5월, 9월의 戊日에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풍습이 있었는데 戊를 龍이라고 여겨서 이를 ‘三龍祠’라고 칭하였다. 龍城은 흉노의 地名으로 하늘에 제사 지내는 장소이다.
역주4 呼韓邪單于 : 日逐王 比가 조부의 칭호를 그대로 채용한 것이다. ≪後漢書≫ 〈南匈奴傳〉에는 ‘落尸逐鞮單于’라 되어 있다.
역주5 孝宣帝의 故事 : 漢 宣帝 甘露 2년(B.C.52)에 呼韓邪單于가 조회하러 오자, 황제가 그를 특별히 예우하여 제후왕의 위에 있게 하고, 알현할 때에 臣이라고만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않게 한 일을 가리킨다.
역주6 (元)[沅] : 저본에는 ‘元’으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 註에 의거하여 ‘沅’으로 바로잡았다.
역주7 (盻)[眄(면)] : 저본에는 ‘盻’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眄’으로 바로잡았다.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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