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관趙綰이 동궁東宮(태후)에 일을 아뢰지 말 것을 주청하자,注+〈“동궁東宮에 일을 아뢰지 말 것을 주청하다.[청무주사동궁請毋奏事東宮]”는〉 태황태후의 정권을 빼앗고자 한 것이다. 한漢나라 장락궁長樂宮은 동쪽에 있었는데, 태후가 거처하였기 때문에 ‘동궁東宮’ 또는 ‘동조東朝’라 칭하였다. 태후가 크게 노하여 은밀히 조관趙綰과 왕장王臧이 부정하게 이익을 취한 일을 조사하게 하여 이것을 가지고 상上을 꾸짖었다.
상上이 이 일로 인해 명당明堂을 세우려는 일을 폐지하고,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양상讓上’의〉 상자上字 아래에 또 상자上字가 있다. 조관과 왕장을 옥리獄吏에게 회부하니, 이들이 모두 자살하였다.
승상 두영竇嬰과 태위 전분田蚡이 면직되고 신공申公도 질병을 이유로 면직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만석군은 자손 중에 하급 관리가 되어 돌아와 뵙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조복朝服을 입고 만나 보고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며, 잘못을 저지른 자가 있으면 책망하지 않고 별실에 거처하면서 밥상을 마주 대하고 먹지 않았다.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편便은 본음대로 읽고, 좌坐(앉다)는 조와徂臥의 절切이다. 〈“편좌便坐”는〉 옆방에 편히 앉아 있는 것이니, 정실正室이 아니다.
그런 뒤에 여러 아들들이 서로 꾸짖고 장로長老를 통하여 웃통을 벗고 사죄하여 고쳐야만 비로소 용서하였다.注+“인장로因長老”는 나이가 많고 노성老成한 사람에게 의탁하여 죄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함을 이른다.
자손 중에 관을 쓴 자가 곁에 있으면 비록 한가롭게 거처할 때라도 반드시 관을 썼다.注+승勝은 음이 승升이다. 연燕은 편안하다는 뜻이니, 한가로운 때를 이른다.
만석군이 부모의 상喪을 만나 집상執喪할 적에는 매우 슬퍼하였는데, 자손들이 그 가르침을 따라서 효행孝行과 근신謹愼함으로 알려졌다.注+“집상執喪”은 상복을 입는다는 말과 같다. 문聞(알려지다)은 음이 문問이다.
目
[目] 조관趙綰과 왕장王臧이 죄를 얻자, 태후는 유자儒者들이 문식文飾은 많고 질박함은 적은데, 지금 만석군萬石君의 집안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몸소 실천한다고 하여, 이에 만석군의 아들 석건石建을 낭중령郞中令으로 삼고 석경石慶을 내사內史로 삼았다.
석건은 상上의 곁에 있을 적에 간언할 일이 있으면 사람들을 물리치고 소신껏 매우 간절하게 말을 하였으나 조정에서 뵐 적에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자처럼 하니, 상이 이 때문에 그를 가까이하였다.注+“사유가언事有可言”은 응당 간언해서 바로잡을 일이 있음을 이른다. 현見은 호전胡甸의 절切이다. “정견廷見”은 조회하여 뵐 때를 이른다.
綱
[綱] 봄 2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綱] 3월에 허창許昌을 승상으로 삼았다.
綱
[綱] 위청衛靑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았다.
目
[目] 진황후陳皇后는 교만하고 질투가 많고 총애를 독점하였으나 자식이 없자, 총애가 점차 쇠하였다.注+진황후陳皇后는 바로
상上이 일찍이 누이인 평양공주平陽公主의 집에 들렀다가注+조참曹參의 증손인 평양이후平陽夷侯조수曹壽에게 시집갔기 때문에 평양공주平陽公主라고 칭한 것이다.가희歌姬인 위자부衛子夫를 보고 좋아하자,注+《한서漢書》 〈외척전外戚傳〉을 살펴보건대, 위황후衛皇后는 자字가 자부子夫이다. 평양공주가 인하여 그녀를 바쳐서 궁에 들여보내니, 은총이 날로 높아졌다.
그러자 진황후가 성을 내어 위자부가 여러 차례 죽을 뻔하였다.
위자부의 동모제同母弟청靑은 위씨衛氏를 빌려 성姓으로 삼고 평양후平陽侯 집안의 기마騎馬를 따라 다니는 노비가 되었는데,注+모冒는 거짓으로 칭함을 이르니, 사람의 머리에 모자를 써서 가리는 것과 같다. 위청衛靑의 아버지 정계鄭季는 본래 평양현平陽縣의 관리인데, 평양후平陽侯의 집안에 파견되어 일을 하다가 가동家僮인 위온衛媼과 사통하여 청靑을 낳았기 때문에 위씨衛氏를 빌려서 성으로 삼은 것이다. 위온이 위씨를 칭한 것은 남편 집안의 성을 들어 쓴 것이다. “후가侯家”는 평양후平陽侯의 집안이다. 기騎(기마騎馬)는 거성去聲이다.무제武帝가 그를 불러 건장감建章監과
으로 삼았다.注+건장建章은 궁宮의 이름이니, 상림원上林苑 가운데 있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태초太初 원년(B.C. 104)에 건장궁을 세웠다고 하였는데, 이는 이전의 건장궁을 크게 증축한 것이다. 위청이 당시에 건장감建章監이 되고 시중을 겸하였다.
〈무제武帝는〉 얼마 후에 위자부를 부인夫人으로 삼고 위청을 태중대부太中大夫로 삼았다.
綱
[綱] 여름 4월에 해처럼 밝은 별이 밤중에 나타났다.
綱
[綱] 무릉읍茂陵邑을 설치하였다.注+무제武帝가 스스로 자신의 능을 만들었는데, 이곳이 본래 괴리현槐里縣무향茂鄕이기 때문에 ‘무릉茂陵’이라 한 것이다.
역주
역주1諸父 :
아버지의 형제 곧 伯父와 叔父를 이르는데, 劉安은 武帝의 堂叔이므로 높인 것이다.
역주2趙綰王臧……免歸 :
“武帝가 겉으로는 儒者를 좋아한다고 하였으나, 등용한 자는 오직 趙綰과 王臧 등 뿐이고, 董仲舒는 순수한 학자였으나 마침내 제후국에 버려졌으니, 이는 ‘葉公이 龍을 좋아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조관과 왕장은 등용된 지 겨우 반년이었는데, 이들이 죽을 적에 죄가 있다고 쓰지 않고 모두 竇嬰과 田蚡이 면직된 것과 같이 썼다. 이는 武帝가 가정(太皇太后)에서 들은 黃老의 말에 미혹되어 가슴속에 애초에 定見이 없음이 이와 같았던 것이다. 학자를 좋아한다는 실재가 과연 어디에 있는가.[武帝名爲好儒 所用特綰臧輩爾 仲舒醇儒 廼棄之侯國 殆與葉公好龍何異 然綰臧見用纔半載 其死也 不書有罪 與嬰蚡之免皆然 蓋其惑於家庭黃老之說 胸中初無定見如此 好儒之實 果安在哉]” 《發明》 “葉公이 용을 좋아한다.[葉公好龍]”는 것은 劉向의 《新序》에 나오는 말이다. 楚나라 葉公 子高가 용을 좋아해서 손이 닿는 곳마다 용 그림을 새겼는데, 진짜 용이 소문을 듣고 그 집에 내려오자 섭공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는 설화로서 似而非를 경계하는 뜻을 담고 있다.
역주3下吏 :
“‘獄吏에게 내렸다.[下吏]’는 말이 세 가지이니, ‘아무개를 옥리에게 내렸다.[下某吏]’는 것은 죄가 없다는 말이고, ‘아무개가 죄로 옥리에게 내려졌다.[某以罪下吏]’는 것은 죄가 있다는 말이고, ‘아무개가 옥리에게 내려졌다.[某下吏]’는 것은 죄가 적다는 말이다.[下吏之辭三 下某吏 無罪之辭也 某以罪下吏 有罪之辭也 某下吏 薄乎云耳之辭也]” 《書法》 書法은 ‘筆法’이란 말과 같다. 朱子는 《資治通鑑綱目》을 편찬할 적에 孔子의 《春秋》 筆法을 따라 綱과 目으로 나누었는바, 綱은 《春秋》의 經文을, 目은 《春秋左氏傳》 傳文을 따랐다. 《資治通鑑綱目》의 筆法을 밝힌 것으로는 劉友益의 《綱目書法》, 尹起莘의 《綱目發明》이 그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데, 이 두 책은 현재 淸나라 聖祖(康熙帝)가 엮은 《御批資治通鑑綱目》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 이 筆法은 綱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는데, 우리나라 學者들이 특별히 이 《자치통감강목》을 愛讀한 이유는 바로 이 筆法에 있었다. 《어비자치통감강목》에는 이외에도 汪克寬(元)의 《綱目凡例考異》 등 많은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 다 소개하지 못하고 《강목서법》과 《강목발명》만을 소개하되, 《강목서법》은 내용이 많으므로 중요한 것만을 발췌하였고, 《강목발명》은 전체를 수록하였는바 본고에서는 각각 《書法》과 《發明》으로 요약 표기하였다.
역주4二千石의 관리 :
秩이 二千石으로 중앙의 九卿과 지방의 郡守에 해당한다. 石은 연봉으로 지급되는 곡물의 양이나, 실제로 그 양을 받지는 않았다. 품계의 서열은 2,000石, 600石, 200石, 100石을 기준으로 나뉘며, 2,000石 이상은 최고관원이며 600石 이상은 大夫로 황제가 임명하는 칙임관이며, 200石 이상은 長史라 불리는 秦任官이다.
역주6切 :
反切音을 표시한 것이다. ‘反(번)’은 뒤집는다(되치다)는 뜻으로 번역을 의미하고, ‘切’은 자른다는 의미이다. 앞 글자의 初聲을 따고 뒷글자의 中聲과 終聲을 따서 읽는다.
역주7侍中 :
秦나라에 처음 설치된 관직으로 定員이 없다. 丞相의 史가 되어 조정과 궁중을 왕래하며 황제에게 일을 아뢰는 일을 맡았다. 漢代에 황제의 권력이 커지고 內朝가 강화되면서 핵심 관직이 되었다.
역주8長公主 劉嫖(표) :
長公主는 황제의 자매에 대한 봉호이다. 장공주 劉嫖는 태황태후인 竇太后의 딸이자 武帝의 고모인 館陶公主이다. 그녀는 무제가 태자가 되는데 큰 역할을 하였으며, 태황태후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그녀의 딸인 陳皇后의 권세 또한 막강하였다.
역주9夏四月……夜出 :
“이것은 災異를 기록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星變을 기록한 것 중에 별이 ‘해와 같았다.’는 것이 있고, ‘달과 같았다.’는 것이 있고, ‘술잔만 하였다.’는 것이 있는데, 해와 같았다는 것보다 더 심한 것은 없다.[記異也 綱目記星變 有如日者焉 有如月者焉 有如杯椀者焉 莫甚於如日者矣]” 《書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