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이른다.유주목 유우幽州牧 劉虞는 종실宗室 중에 가장 어진 자이다.” 하여 함께 황제로 옹립하고자 하였다.
그러자 조조曹操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들이 군대를 일으킴에 원근遠近에서 호응하지 않은 이가 없었던 이유는 대의명분으로 군대를 출동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어린 군주가 미약하여 간신奸臣에게 제재를 받는 것이요,
창읍왕 유하昌邑王 劉賀처럼 나라를 망친 잘못이 있지 않은데 하루아침에 바꾸면 천하를 그 누가 안정시키겠는가.注+창읍昌邑은 창읍왕 유하昌邑王 劉賀를 이른다. 그대들은 북면北面하여 유우에게 신하라고 칭하라. 나는 스스로 황제가 계신 서쪽을 향하겠다.”注+〈“제군 북면諸君 北面아자서향我自西向”은〉 유주幽州는 북쪽에 있고 장안長安은 서쪽에 있기 때문에 조조曹操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한복韓馥과 원소袁紹가 편지로 이 사실을 원술袁術에게 알렸는데, 원술은 속으로 신하 노릇 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품어 국가에 나이 많은 군주가 있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고 여겨서 마침내 겉으로 공의公議에 가탁하여 〈유우를 옹립하라는 의논을〉 거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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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한복韓馥과 원소袁紹는 끝내 전 낙랑태수前 樂浪太守장기張岐 등을 보내어 이 의논을 가지고 가서 유우劉虞에게 황제의 존호尊號를 올렸는데, 유우는 노한 기색을 띠고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지금 천하가 무너지고 혼란하여 주상主上이 몽진蒙塵하고 계신데, 내가 큰 은혜를 받고서도 국가의 치욕을 깨끗이 씻지 못하고 있다.注+천자天子가 출분出奔한 것을 몽진蒙塵이라 이르니, 이는 파천播遷하여 초야草野에 머물면서 티끌을 뒤집어씀을 말한 것이다.
그대들은 각각 주군州郡을 점거하여 마땅히 황실을 위해 함께 힘을 합해야 할 것인데 도리어 역모逆謀를 꾸며 서로 더럽히려고 한단 말인가!”注+“육력戮力”은 힘을 합함이다. “구오垢汙”는 혼탁하게 하고 더럽히는 것이다.
한복 등이 또다시 유우에게 영상서사領尙書事가 되어서 승제承制하여 작위를 봉하고 관직을 임명할 것을 청하였는데, 유우가 또다시 듣지 않고 흉노匈奴로 달아나서 스스로 세상과 단절하고자 하니, 원소 등이 마침내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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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2월에 동탁董卓이 스스로 태사太師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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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지위가 제후왕諸侯王의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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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손견孫堅이 진군하여 동탁董卓을 공격하니 동탁이 패하여 서쪽으로 달아나자, 손견이 낙양洛陽에 들어가서 황제들의 능陵을 수선하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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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손견孫堅이 진군하여 양인취陽人聚에 주둔하니注+≪후한서後漢書≫ 이현李賢의 주注에 “양인취陽人聚의 옛 성은 양현梁縣의 서쪽에 있다.” 하였다.동탁董卓이 보병과 기병을 보내어 맞이하여 싸우게 하자, 손견이 이를 격파하고 그 도독都督을 효수하였다.
어떤 사람이 원술袁術에게 이르기를 “손견이 만약 낙양洛陽을 얻으면 다시는 그를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니, 이는 이리를 제거하고 범을 오게 하는 꼴이 된다.” 하였다. 이에 원술이 의심하여 손견에게 군량을 수송해주지 않으니, 손견이 밤중에 말을 타고 가서 원술을 만나보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양인취陽人聚는 노양魯陽과의 거리가 100여 리이다.
“내가 몸을 떨쳐 일어나서 다른 것을 돌아보지 않는 이유는 위로는 국가를 위하여 역적을 토벌하고 아래로는 장군 가문의 사사로운 원수를 갚고자 해서입니다.注+〈“하위장군가문지사수下慰將軍家門之私讐”는〉 지난해 3월에 동탁董卓이 원외袁隗를 죽이고 그 집안을 멸족한 일을 가리킨다.
그런데 장군이 은근히 참소하는 말을 받아들여 도리어 서로 꺼리고 의심하니, 이는 어째서입니까.” 이에 원술袁術이 스스로 편치 못하여 즉시 군량을 조발調發하였다.注+“축적踧踖”은 스스로 편치 못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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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동탁董卓이 사람을 보내 손견孫堅을 설득해서 그와 더불어 화친하고자 하였는데, 손견이 말하기를 “동탁이 하늘의 뜻을 어겨 무도無道하니, 지금 내가 너의 삼족三族을 다 주멸하여 천하에 내걸어 보이지 않으면 나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어찌 너와 화친을 하겠는가.”注+현縣(매달다)은 현懸으로 읽는다. 명瞑은 눈을 감음이다. 내乃(너)는 여汝이다. 하고는
다시 진군하여 태곡大谷(태곡)에 주둔하니 낙양과의 거리가 90리였다. 동탁이 직접 나와 그와 싸우다가 패주해서 면지澠池(면지)로 퇴각하여 주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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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손견孫堅이 진군하여 낙양에 이르러서 종묘宗廟를 소제掃除하고 태뢰太牢로 제사 지냈으며 전국새傳國璽를 낙양성雒陽城의 남쪽 견관甄官(견관)의 우물 속에서 얻었다.注+견관甄官은 돌을 조탁하고 흙을 빚는 일을 관장하였다.
손견이 군대를 나누어 또다시 동탁을 요격邀擊하니, 동탁이 장사 유애長史 劉艾에게 이르기를 “관동關東의 군대가 자주 패하여 모두 나를 두려워해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데,
오직 손견만이 다소 우직하나 자못 사람을 잘 쓰니, 마땅히 제장諸將들에게 말해서 그를 기피할 줄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동월董越을 면지澠池에, 단외段煨를 화음華陰에, 우보牛輔를 안읍安邑에 주둔시켜 산동山東 지방의 군대를 방어하게 하고,
자신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돌아가니注+우보牛輔는 동탁董卓의 사위이다., 손견이 황제들의 능을 수선하고 군대를 이끌고 노양魯陽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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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여름 4월에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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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에 이르자 공경公卿들이 그를 영접하며 수레 아래에서 절하였다. 동탁이 이로 인하여 손날로 치는 시늉을 하며 황보숭皇甫嵩에게 이르기를 “의진義眞(황보숭皇甫嵩)은 두려운가?”注+지抵는 음音이 지紙이다. “저수抵手”는 손을 기울여 〈손날로〉 치는 것이다. 의진義眞은 황보숭皇甫嵩의 자字이다. 하니,
황보숭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공明公이 덕德으로 조정을 보필하면 큰 경사가 장차 이를 것이니 무슨 두려울 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형벌을 남용해서 제멋대로 행동한다면 장차 천하 사람들이 모두 두려울 것이니, 어찌 저 황보숭만이 두렵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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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6월에 지진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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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원소袁紹가 기주목 한복冀州牧 韓馥을 쫓아내고 스스로 기주목冀州牧을 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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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하진何進이 장양張楊을 보내어 병주幷州에서 군사를 모집하게 하였는데, 마침 하진이 실패해 〈죽임을 당하였다.〉 장양은 상당군上黨郡에 머물면서 수천 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는데注+상당군上黨郡은 병주幷州에 속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장양이 하내河內에 있는 원소袁紹에게 귀부歸附하여 남선우南單于와 함께 장수漳水에 주둔하니注+탁장수濁漳水는 상당군 장자현上黨郡 長子縣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업현鄴縣을 경유하니, 업현鄴縣은 한복韓馥이 머물던 곳이다., 한복韓馥은 호걸들이 대부분 진심으로 원소에게 귀부歸附한다고 하여 원소를 시기해서 은밀히 그의 군량을 줄여 원소의 군사들을 흩어지게 하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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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원소袁紹의 문객 봉기門客 逢紀가 원소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군이 큰 일을 거행하면서 다른 사람이 물자를 대주기를 바라고 있으니 한 주州도 점거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온전히 할 수 없습니다.
한복韓馥은 자질이 용렬한 사람이니, 은밀히 공손찬公孫瓚과 연락하여 그로 하여금 기주冀州를 점령하게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러면 한복이 반드시 크게 놀라 두려워할 것이니注+요要(청하다)는 요邀로 읽는다., 이를 인하여 변사辯士를 보내어 그에게 화복禍福을 말해주면 한복이 갑작스럽게 발생한 위난危難에 압박을 받아서 반드시 자신의 지위를 사양할 것입니다.”
원소가 편지를 써서 공손찬에게 보내자 공손찬이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기주冀州에 이르니, 한복이 공손찬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目
【목目】 마침 동탁董卓이 함곡관函谷關으로 들어가자, 원소袁紹가 연진延津으로 돌아와 군대를 주둔하고注+
” 하였다.한복韓馥과 친한 신평辛評과 순심荀諶(순심)과 곽도郭圖 등으로 하여금 한복을 다음과 같이 설득하게 하였다.
“공손찬公孫瓚이 연燕과 대代의 병졸들을 거느려 승세勝勢를 타고 남쪽으로 오니 그 예봉銳鋒을 당할 수 없고, 거기장군 원소車騎將軍 袁紹가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향하니 그 뜻을 또한 헤아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삼가 장군을 위하여 이를 위태롭게 여깁니다.”注+하내河內로부터 연진延津에 이르면 동향東向이 된다.
한복이 두려워하며 말하기를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하자, 순심이 말하기를 “장군께서 스스로 생각하시기에 너그럽고 인자하여 여러 사람을 포용함이 원씨袁氏(원소袁紹)에 비해 어떠하며, 지혜와 용맹이 여느 사람보다 뛰어남이 원씨袁氏에 비해 어떠하며, 대대로 은혜와 덕을 베풂이 원씨에 비해 어떠합니까?” 하니,
한복이 말하기를 “내가 모두 그만 못하다.” 하였다. 이에 순심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씨는 한 시대의 호걸인데 장군께서 그만 못한 세 가지 조건을 가지고서 그의 위에 오랫동안 거하였으니, 저 사람은 장군의 아래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기주冀州는 천하의 공업功業을 세우는 데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니 저 원소가 만약 공손찬과 힘을 합하여 기주冀州를 취하려 하면 당장에 위태로움과 멸망이 닥쳐올 것입니다.
그러나 원씨는 장군과 오랜 교분이 있고 또한 동맹관계이니注+〈‘차위동맹且爲同盟’은 원소袁紹와〉 동맹하여 동탁董卓을 토벌함을 이른다., 지금의 계책은 만약 기주冀州를 들어서 원씨에게 사양하면 그는 틀림없이 장군에게 후한 덕을 입었다고 여길 것이고 공손찬 역시 그와 더불어 다투지 못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장군은 현자에게 사양하였다는 훌륭한 명성이 있고 일신一身은 태산泰山보다 더 편안할 것입니다.” 한복은 타고난 성품이 겁이 많고 두려워하였기 때문에 그의 계책을 옳게 여겼다.注+광恇은 겁냄이고, 겁怯은 두려워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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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한복韓馥의 장사 경무長史 耿武와 별가 민순別駕 閔純과 치중 이력治中 李歷은 이 말을 듣고 한복에게 다음과 같이 간하였다. “원소袁紹는 외로운 나그네의 신세에 곤궁한 군대로 우리의 콧숨에 의지하니注+앙仰은 믿음(의지함)이다. “비식鼻息”은 콧속의 기식氣息(숨)을 이르니, 〈콧숨을〉 내쉬면 따뜻해지고 들이마시면 차가워진다. “앙아비식仰我鼻息”은 나의 호흡하는 힘에 의지함을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어린아이를 넓적다리와 손바닥 위에 놓고 장난하는 것과 같아서 젖을 먹이는 것을 끊으면 당장에 굶겨 죽일 수 있는데, 어찌하여 기주冀州를 그에게 넘겨주고자 하십니까.”注+포哺는 분모奔謨의 절切이니, 마심이다.
이에 한복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본래 원씨袁氏 집안의 옛 부하였고 또한 재주가 본초本初만 못하니, 덕德을 헤아려서 사양함은 옛사람이 귀하게 여긴 바이다. 그대들만 유독 어찌하여 이것을 나쁘게 여기는가.”
한복이 마침내 기주목冀州牧의 자리를 피하여 원소에게 사양하였다. 한복의 종사從事들이 모두 한복을 버리고 떠나갔으나 오직 경무와 민순만은 칼을 잡고서 원소에게 항거하니,
원소가 이들을 모두 죽이고는 승제承制하여 한복을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삼았으나 통솔하는 군대가 없었고注+“장어將御”는 통어統御(통솔統率)라고 말한 것과 같다., 저수沮授를 분무장군奮武將軍으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여 통솔하게 하였다.注+저沮는 측여側余의 절切이다. 저수沮授는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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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심배審配와 전풍田豐이 모두 정직함으로써 한복韓馥에게 뜻을 얻지 못하였는데, 원소袁紹는 전풍을 별가別駕로 삼고 심배를 치중治中으로 삼고 허유許攸와 봉기逢紀와 순심荀諶을 모두 모주謀主(주요主要한 모사謀士)로 삼았다.
말하기를 “대신大臣 중에 죽여야 할 자가 있다.” 하니, 동탁董卓이 사람을 시켜 장온張溫의 죄를 무고誣告해서 태형笞刑을 가하여 죽여서 이에 들어맞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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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황건적黃巾賊이 발해勃海를 침략하니, 교위 공손찬校尉 公孫瓚이 이들을 격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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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공손찬公孫瓚이 원소袁紹를 공격하고 유비劉備를 평원상平原相으로 삼았다.
目
【목目】 유우劉虞의 아들 유화劉和가 시중侍中이 되었는데, 황제가 그로 하여금 도망해 돌아가서 유우로 하여금 병력을 데리고 와서 황제를 맞이하게 하였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황제가 동쪽 낙양洛陽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여 유화劉和로 하여금 거짓으로 동탁董卓을 피하여 몰래 무관武關을 나가 유우劉虞에게 가서 그로 하여금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자신을 맞이하게 했다.” 하였다.원술袁術이 유화를 억류하고 사람을 시켜 유우에게 편지를 보내니, 유우가 기병騎兵을 보내 유화에게 가게 하였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수천 명의 기병騎兵을 보내어 유화劉和에게 가게 하였다.” 하였다.
공손찬公孫瓚 또한 자기 아우 공손월公孫越을 보내어 기병을 데리고 원술에게 가게 해서 원술로 하여금 유화를 붙잡고 그 병력을 빼앗게 하니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공손찬公孫瓚은 원술袁術이 딴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고 〈유우劉虞를〉 만류하였으나, 유우가 이를 따르지 않았다. 공손찬은 원술이 이 소식을 듣고 자기를 원망할까 두려워하여 또한 자신의 종제從弟인 공손월公孫越을 보내어 천 명의 기병騎兵을 거느려 원술에게 가게 하고는 은밀히 원술을 시켜서 유화를 붙잡고 그 병력을 빼앗게 했다.” 하였다., 유우와 공손찬이 이로 말미암아 틈이 생기게 되었다.
目
【목目】 이때에 관동關東 지방의 주군州郡들이 서로 겸병兼幷하여 스스로 강대强大해지기를 힘썼고 원소袁紹와 원술袁術 또한 각자 서로 의심하고 배반하였다.
원술이 손견孫堅을 보내어 동탁董卓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돌아오기 전에 원소가 주앙周昂을 보내어 손견의 양성陽城을 습격하여 빼앗게 하였다.注+손견孫堅이 예주자사豫州刺史를 겸하여 양성陽城에 주둔하였다.
손견이 탄식하기를 “함께 의병을 일으켜서 장차 사직社稷을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역적逆賊이 이제 곧 격파되려고 하자 각각 이와 같이 행동하니, 내가 누구와 함께 힘을 쓰겠는가.” 하고는 병력을 인솔하고 주앙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원술이 공손월公孫越을 보내어 손견을 도와 주앙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공손월이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다.
이에 공손찬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 아우가 죽은 것은 화禍가 원소에게서 시작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출동시켜 반하磐河에 주둔하여注+〈“반하磐河”는〉 바로
원소의 죄악을 나열하고 병력을 전진시켜 원소를 공격하니, 기주冀州의 여러 성城이 대부분 원소를 배반하고 공손찬을 따랐다.
目
【목目】 처음에 탁군涿郡의 유비劉備는 중산정왕中山靖王의 후손으로注+정왕靖王은 이름이 승勝이니, 경제景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가난하여 어머니와 함께 신을 파는 것을 생업으로 삼았으나 큰 뜻이 있어서 말수가 적고 희로喜怒를 얼굴빛에 드러내지 않았다.
유비는 일찍이 공손찬公孫瓚과 함께 노식盧植을 사사師事하였으므로 이로 인하여 공손찬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공손찬이 자신의 장수 전해田楷와 함께 청주靑州를 순행하게 하였는데 유비가 공을 세우니, 이를 계기로 유비를 평원상平原相으로 삼았다.
目
【목目】 유비는 젊어서부터 하동河東 사람 관우關羽와 탁군涿郡 사람 장비張飛와 매우 친하였는데, 이때 관우와 장비를 별부사마別部司馬로 삼아서 부곡部曲(부하)을 나누어 통솔하게 하였다.注+대장군의 영營은 다섯 부部이니, 부部마다 각각 교위校尉 한 사람과 군사마軍司馬 한 사람이 있고, 별도의 군영에 병사를 거느린 것을 별부사마別部司馬라고 하였으니, 그 병력의 많고 적음은 각각 시의時宜에 따랐다.
유비는 이들 두 사람과 잠을 잘 때에도 침상을 함께하여 은혜가 형제와 같았고 여러 사람이 둘러앉아 있을 때에도 두 사람이 종일토록 모시고 서서 유비를 따라 주선하고 어려움과 험난함을 피하지 않았다.注+주稠는 많음이다.
目
【목目】 상산常山 사람 조운趙雲이 상산군常山郡을 위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공손찬公孫瓚을 찾아오자注+위爲는 거성去聲이니, 아래의 ‘위비爲備’도 같다., 공손찬이 말하기를 “그대가 사는 주州의 사람들이 모두 원씨袁氏를 원한다고 들었는데, 그대는 어찌하여 홀로 혼미하여 반대로 하는가?”注+원願은 하고자 함이다. 하니,
조운이 대답하기를 “천하가 흉흉訩訩함에 누가 옳은지를 알지 못하여 백성들이 거꾸로 매달려 있는 듯한 곤궁함이 있습니다. 저희 주州의 논의는 인정仁政이 있는 곳을 따르기로 하였으니, 원공袁公을 소홀히 하고 현명한 장군將軍을 사사로이
常山 趙子龍
대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유비가 조운을 보고 기이하게 여겨서 깊이 교분을 맺어 자기 문하로 데려오니, 조운이 마침내 유비를 따라 평원平原에 가서 유비를 위하여 기병騎兵을 주관하였다.
綱
【강綱】 원술袁術이 손견孫堅으로 하여금 유표劉表를 공격하게 하니, 유표의 군사가 그를 활로 쏘아 맞혀 죽였다.
目
【목目】 처음에 원술袁術이 남양南陽의 호구戶口 수백만을 얻고는 사치하고 방탕하며 욕심을 부려서 세금을 징수함에 한도가 없으니, 백성들이 이를 괴로워하여 점점 이산離散하였다.
孫堅이 劉表를 공격하다
원술은 원소袁紹와 틈이 생겨 각각 원조援助를 받을 당여黨與를 세워 서로 도모하니, 원술은 공손찬公孫瓚과 결탁하고 원소는 유표劉表와 연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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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원술袁術이 손견孫堅으로 하여금 유표劉表를 공격하게 하자, 유표가 자신의 장수 황조黃祖를 보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병兵 아래에 “조장병祖將兵(황조가 병력을 이끌다.)” 세 글자가 있다., 손견이 황조를 격파하고 마침내 양양襄陽을 포위하였다.
유표가 밤에 황조를 보내어 몰래 나가 군사를 징발하게 하여 〈황조가 병력을 이끌고〉 돌아오려고 하였는데, 손견이 그를 맞이하여 싸우니 황조가 패주敗走하였다. 손견이 승세를 타고 밤중에 황조를 추격하니, 황조의 보병步兵이 손견을 쏘아 맞혀서 죽였다.注+보병步兵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부병部兵’으로 되어 있다.
손견이 천거한 효렴 환계孝廉 桓階가 유표에게 가서 손견의 상喪을 치를 것을 청하자 유표가 의롭게 여겨 허락하니, 원술이 이로 말미암아 유표를 이기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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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하남윤 주준河南尹 朱儁이 주군州郡에 글을 돌려 군대를 징발하여 동탁董卓을 토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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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동탁董卓이 관중關中(함곡관函谷關)에 들어갈 적에 주준朱儁을 남겨두어 낙양雒陽을 지키게 하였는데, 주준이 은밀히 산동山東의 장수들과 함께 모의하여 동쪽으로 가서 군대를 중모中牟에 주둔하고 주군州郡에 글을 돌려 군대를 징발하여 동탁을 토벌하니注+중모현中牟縣은 하남윤河南尹에 속하였다.,
서주자사 도겸徐州刺史 陶謙이 정예병 3천 명을 보내어 돕고 나머지 주군 또한 모두 지원한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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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유언劉焉이 한중태수漢中太守를 죽이고 사곡각斜谷閣(사곡로斜谷路)을 차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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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언劉焉이 익주益州에 있으면서 은밀히 딴 계책을 도모하였다. 패현沛縣 사람 장로張魯가 조부 장릉張陵 때부터 대대로 오두미도五斗米道를 믿으면서 촉蜀 지역에 우거하였는데,
유언이 그를 독의사마督義司馬로 삼아서 함께 병력을 연합하여 한중태수漢中太守를 습격해 죽이고 사곡각斜谷閣을 차단하여 한漢나라 사자使者를 죽이고는 승여거乘輿車(황제가 타는 수레)를 만들어 타고 다녔다.注+유언劉焉이 촉蜀 지방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독의사마督義司馬와 조의교위助義校尉, 포의교위褒義校尉를 두었고 유표劉表가 형주荊州에 있으면서 또한 수민교위綏民校尉를 두었으니, 한漢나라가 쇠하자 제후들이 명령命令을 제멋대로 내려서 임의로 각각 관속官屬을 둔 것이다.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지금 흥원부興元府에서 서북쪽으로 사곡로斜谷路로 들어가 봉주鳳州의 경계에 이르면 150리 되는 지점에 잔각棧閣 2,989칸과 판각板閣 2,892칸이 있다.” 하였다.
이때 유언의 아들 유장劉璋이 봉거도위奉車都尉가 되어 장안長安에 있었는데, 황제가 유장을 보내어 유언을 타이르게 하니, 유언이 유장을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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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綱】 관녕管寧과 병원邴原과 왕렬王烈이 요동遼東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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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공손탁公孫度의 위엄이 해외海外에 행해지니 중국中國(중원中原)의 인사人士 중에 난리를 피하는 자들이 그에게 많이 귀의하였는데, 북해北海 사람 관녕管寧과 병원邴原과 왕렬王烈이 모두 그에게 가서 의지하였다.
관녕은 소싯적에 화흠華歆과 친구가 되었는데, 일찍이 함께 채전菜田을 김매다가 땅에 황금이 있는 것을 보고는 관녕은 하던 호미질을 계속할 뿐 돌아보지 않았으나 화흠은 황금을 주워서 던져버리니, 사람들이 이를 가지고 그 인품의 우열을 알았다.
병원은 태학太學에서 8, 9년 동안 유학하고 돌아갈 적에 스승과 벗들이 그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고 하여 쌀과 고기를 모아 전송하였는데,
병원이 말하기를 “내가 본래 술을 잘 마시나 다만 〈술을 마시면〉 사람의 생각을 황폐하게 하고 학업을 폐하게 하기 때문에 끊었을 뿐이었다.注+황荒은 혼미昏迷하여 어지러움을 이른다. 사思(생각)는 상리相吏의 절切이다. 지금 멀리 떠나 작별하게 되었으니, 한번 술을 마실 만하다.” 하고 이에 함께 술을 마셨으나 종일토록 취하지 않았다.
관녕과 병원이 모두 지조를 숭상한다고 알려지니, 공손도가 관館을 비워놓고 그들이 오기를 기다렸다.注+조操(지조)는 칠도七到의 절切이다. 후候는 그가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관녕은 공손도를 만나 본 뒤에 마침내 산골짜기에 초가집을 지으니, 피난하는 자들이 점점 찾아와 그를 따라서 열흘에서 달포 사이에 마을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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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관녕管寧은 공손탁公孫度를 만날 때마다 오직 경전經典을 말하고 세상일은 언급하지 않았으며, 산으로 돌아오면 오로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강講하고 조두俎豆의 예禮를 익혔으며 배우는 자가 아니면 만나보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공손도는 그의 어짊을 편안히 여기고 백성들은 그의 덕에 교화되었다. 병원邴原은 성질이 강직하여 청의淸議로써 사람들을 바로잡으니, 공손도 이하의 사람들이 마음에 불안해하였다.注+격格은 본음대로 읽으니, 바로잡음이다. 〈격물格物은〉 청의淸議로써 사람들을 바로잡음을 이른다. 일설에 격格은 품평함을 이른다고 한다.
이는 때에 맞지 않으면 모두 화禍를 부르는 길이 됨을 말한 것이다.”注+현見(나타내다)은 현편賢遍의 절切이다. 하고는 은밀히 병원을 보내어 도망하여 돌아가게 하니, 공손도 또한 다시 쫓지 않았다.
目
【목目】 왕렬王烈은 기국과 사업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기를 잘하였다. 소를 훔친 자가 있어 주인이 그 도둑을 잡았는데,
도둑이 죄를 받을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형벌은 달게 받겠으나, 제발 왕언방王彦方(왕렬)이 알게 못하게 해주십시오.”注+언방彦方은 왕렬王烈의 자字이다. 하였다. 왕렬은 이 말을 듣고는 사람을 시켜 그 도둑에게 사례하고 삼베 한 끗[단端]을 보내었다.注+포백布帛 6장丈을 단端이라고 한다. 일설에는 8장丈을 단端이라고 한다. 살펴보건대, 옛날에는 2장丈을 단端이라고 하였다.
혹자가 그 이유를 묻자, 왕렬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둑이 내가 그의 잘못을 듣게 될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악惡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이미 악惡을 부끄러워할 줄 알면 선善한 마음이 장차 생겨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삼베를 보내어 선善을 행하도록 권장한 것이다.”
뒤에 어떤 노인이 길에서 검劍을 잃어버렸는데 길을 가던 한 사람이 이것을 발견하고는 지키고 있었다. 저물녘에 이르러 노인이 다시 찾으러 와서 검劍을 얻고는 괴이하게 여겨 이 일을 왕렬에게 고하였다.
왕렬이 사람을 시켜서 찾아보니, 바로 전에 소를 도둑질한 자였다.注+추推는 찾음이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곡직曲直을 다투고 송사할 일이 있을 적마다 왕렬에게 질정하러 가려고 하다가注+지質은 질정함이다.
혹은 도중에 돌아오고 혹은 그의 집을 멀리서 바라보고 돌아와서 모두 서로 정직함으로써 양보하여 감히 왕렬이 이 사실을 듣지 못하게 하였다.注+
공손탁公孫度가 왕렬을 장사長史로 삼고자 하였는데, 왕렬은 이를 사양하고 장사꾼이 되어 스스로를 폄하하여 마침내 면하였다.
역주
역주1奉大司馬劉虞爲帝 虞不受 :
“秦나라가 齊나라 군주를 세워 東帝로 삼을 적에 ‘세우다.[立]’라고 썼는데, 여기에서 ‘받들다.[奉]’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여러 사람이 원한 바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서 일을 끝마치지 않으면 쓰지 않는데 ‘받지 않았다.[不受]’라고 쓴 것은, 劉虞가 충절을 지킴을 가상히 여긴 것이고, 유우의 ‘虞’를 거듭하여 쓴 것은 그를 거듭하여 인정한 것이니, ‘얼마 후 황제의 칭호를 제거하였다.[已而去之]’라고 쓴 것과는 크게 다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받들어 황제로 삼았다.’라고 쓴 것은 1번뿐이다.[秦立齊君爲東帝 書立 此其書奉 何 衆所欲也 故未卒事不書 書不受 嘉守節也 再書虞 重予之 與書已而去之者大異矣 終綱目 書奉爲帝 一而已]” ≪書法≫ “이미 받지 않았는데도 오히려 이를 쓴 것은 劉虞가 의리를 알고 충절을 지킨 아름다움을 드러낸 것이다.[旣不受矣 而猶書之者 所以著虞知義守節之美也]” ≪發明≫
역주2(召)[告] :
저본에는 ‘召’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告’로 바로잡았다.
역주4孫堅進兵擊卓……修塞諸陵而還 :
“이때에 ‘董卓을 토벌하였다.’라고 쓴 것이 3번(關東, 孫堅, 朱儁)인데 오직 孫堅에 대해서만 ‘진군하다.[進兵]’라고 쓴 것은, 그의 의로움을 인정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실을 특별히 자세하게 쓴 것이다. 〈황제들의〉 陵을 수선함을 반드시 쓴 것은 山陵을 중시한 것이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능을 수선하였다.’라고 쓴 것이 5번이고 ‘山陵을 鎭衛하였다.’라고 쓴 것이 1번이고 ‘여러 능을 살펴보았다.’라고 쓴 것이 1번이다.[於是書討卓者三(關東 孫堅 朱儁) 惟堅書進兵 予義也 故特詳之 修陵必書 重山陵也 終綱目 書修陵五 書鎮衞山陵一 書按視諸陵一]” ≪書法≫ “諸君이 唱義함으로부터 지금까지 역적을 격파한 功이 있음을 듣지 못하였는데, 오직 孫堅의 이러한 擧措가 그런대로 사람들의 마음에 들었으니,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써서 인정함이 마땅하다.[自諸君唱義 未聞有破賊之功 惟堅此擧差强人意 宜乎綱目書以予之也]” ≪發明≫
역주5袁紹逐冀州牧韓馥 自領州事 :
“이때에 辛評 등이 韓馥을 설득하여 袁紹에게 冀州牧의 지위를 사양하게 하였는데, 원소가 곧바로 ‘쫓아냈다.[逐]’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이는 원소의 속내를 주벌한 것이니, 원소는 이때에 義擧가 될 수 없었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원소가 몸을 마칠 때까지 그를 인정한 말이 한 번도 없다. 그렇다면 원소를 추대하여 맹주로 삼았다는 것은 어찌하여 썼는가. 이는 ‘그를 맹주로 삼았으나 끝내 이와 같았다.’라고 말한 것과 같으니, 원소를 깊이 책망한 것이다.[於是辛評等 說馥讓紹 則其直書逐 何 誅意也 紹於是不得爲義擧矣 綱目終紹之身 無予辭 然則推紹爲盟主 何以書 若曰以爲盟主而卒若是焉 所以深責紹也]” ≪書法≫ “袁紹의 집안은 4대에 걸쳐 5명의 三公을 배출하여 천하 사람들의 重望을 받았는데, 제일 먼저 何進과 함께 환관들을 주살할 계책을 唱導하여 禍의 기틀을 挑發하였고, 마침내 역적인 董卓을 불러들여 포학함을 자행하고 난리를 일으키게 하였다. 그리하여 漢나라의 國統을 傾覆시키고 백성들에게 해독을 퍼뜨려서 천하가 나뉘고 무너지는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禍가 또한 지극하였다. 원소가 이미 맹주가 된 뒤에 진실로 마땅히 떨쳐 일어나서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황실을 위해 힘을 다하였다면 거의 지난날의 잘못을 조금이나마 속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袁隗가 죽임을 당했을 적에 온 집안이 도륙을 당했으니, 더욱 마땅히 애통하여 원수이자 역적인 동탁을 섬멸하는 데에 힘써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義兵을 일으킨 이후로 여태껏 한 명의 군사를 보내고 한 명의 기병을 보내어서 나아가 역적의 무리를 공격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도리어 돌아가며 서로 병탄하여 자신의 세력을 북돋워 증식하는 데에만 힘썼단 말인가. 이는 과연 무엇을 한 자란 말인가. ≪資治通鑑綱目≫에서 ‘원소가 冀州牧을 쫓아내고 자기가 冀州牧을 겸하였다.’라고 써서 글에서는 그를 폄하하는 말이 없지만, 勤王하는 데에는 태만하고 참람하게 지위를 도적질하는 데에는 급한 뜻이 은연중 書法의 사이에 저절로 나타난다. 훗날 曹操에게 패하여 달아난 뒤에 피를 토하고 죽은 것은 하늘이 그를 주벌한 것이니, 어찌 말할 것이 있겠는가.[袁紹四世五公 負海內重望 首與何進唱誅宦官之謀 挑發禍機 遂至逆賊暴亂 傾覆漢祚 流毒生民 四海分崩 禍亦烈矣 紹旣身爲盟主 固當奮不顧死 戮力王室 庶可少贖前日之失 況袁隗之死 擧家屠戮 尤當痛心疾首 務殄讐賊 夫何自擧義以來 未聞遣一兵馳一騎進攻賊黨 顧乃更相吞噬 務自封殖 果何爲者 綱目書紹逐冀州牧 自領州事 文無貶詞 而其緩於勤王 急於僭竊之意 隱然自見於書法之間 他時奔敗之餘 嘔血而死 蓋天誅之也 何足道哉]” ≪發明≫
역주6(逄)[逢] :
저본에는 ‘逄’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과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逢’으로 바로잡았다. 아래 ‘逄紀’의 逄도 이에 따라 고쳤다.
역주7續漢志 :
晉나라 때의 司馬彪가 지은 ≪續漢書≫의 八志 중에 하나이다. 南朝 宋나라 때에 范曄이 지은 ≪後漢書≫가 세상에 유통되자 사람들은 이미 나와 있던 ≪속한서≫를 점차 읽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후한서≫는 범엽이 彭城王의 반란에 참여하였다가 처형되면서 志 부분이 완성되지 못한 상태였다. 그 후 北宋 때에 이르러 ≪속한서≫의 八志, 즉 〈律曆志〉, 〈禮儀志〉, 〈祭祀志〉, 〈天文志〉, 〈五行志〉, 〈郡國志〉, 〈百官志〉, 〈輿服志〉를 ≪후한서≫에 합하여 간행함으로써 ≪후한서≫에 없었던 志를 보충하였는바, 이것이 바로 현전하는 ≪후한서≫가 되었다.
역주8縣의……있다 :
이는 ≪後漢書≫ 권31 〈郡國志 兗州 陳留郡〉 酸棗縣 조에 대한 劉昭의 注이다.
역주9(及)[吸] :
저본에는 ‘及’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吸’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0都官從事 :
司隷校尉의 屬吏 중 하나이다. 사예교위의 직책은 京師와 그 부근의 불법을 규찰하지만 동시에 중앙의 관리들을 감찰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 아래 從事가 12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인 도관종사는 백관의 위법을 규찰하였다.(≪後漢書≫ 〈百官志〉)
역주11卓以張楊爲河內太守 :
“다시 ‘卓以’라고 쓴 것은 董卓이 長安에 이르렀기 때문이다.[復書卓以 卓至長安也]다” ≪書法≫
역주12(子)[于] :
저본에는 ‘子’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于’로 바로잡았다.
역주13雲氣를 관찰하고 :
원문의 ‘望氣’는 古代에 점치는 한 방법으로 구름을 관찰하여 吉凶을 예측하던 방술이다. 雲氣는 구름을 가리킨다.
역주15爾雅에……鉤磐河이다 :
원문의 ‘鉤磐’은 ≪爾雅≫ 〈釋水〉에 ‘鉤盤’으로 되어 있는데, 이에 대한 郭璞의 注에 “물굽이가 쇠갈고리와 같아서 물의 흐름이 盤桓하는 것이다.[水曲如鉤 流盤桓也]”라고 설명하였다. ‘九河’는 禹임금 때의 黃河의 아홉 支流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아≫ 〈석수〉에 의하면 徒駭, 太史, 馬頰, 覆鬴, 胡蘇, 簡, 絜, 鉤盤, 鬲津을 이른다. ≪書經≫ 〈夏書 禹貢〉에 “구하가 이미 물길을 따랐다.[九河旣道]”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한 蔡沈의 ≪集傳≫에 “구하는 ≪이아≫에 ‘첫째는 徒駭, 둘째는 太史, 셋째는 馬頰, 넷째는 覆鬴, 다섯째는 胡蘇, 여섯째는 簡潔, 일곱째는 鉤盤, 여덟째는 鬲津이다.’ 하였으며, 그 하나는 황하의 經流이다. 그런데 先儒는 황하의 경류를 알지 못하고는 마침내 簡과 潔을 나누어 둘이라 하였다.[九河 爾雅 一曰徒駭 二曰太史 三曰馬頰 四曰覆鬴 五曰胡蘇 六曰簡潔 七曰鉤盤 八曰鬲津 其一則河之經流也 先儒不知河之經流 遂分簡潔爲二]”라고 설명하여 簡과 絜을 나누어 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磐과 盤, 絜과 潔은 서로 통용된다.
역주16袁術……射(석)殺之 :
“孫堅이 처음 擧義했을 적에 ≪資治通鑑綱目≫에서 ‘討’라고 썼고, 이윽고 董卓을 패퇴시킴에 특별히 ‘進兵’이라고 쓴 것은 모두 인정한 말이다. 그러나 손견이 이때에 袁術에게 부림을 받아 안에서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였으니, 나라를 위해 죽은 것이 아니다. ‘術使’라고 쓰고 ‘射殺之’라고 쓴 것은 애석히 여긴 것이다.[堅初擧義 綱目書討 旣而敗卓 特書進兵 皆予辭也 於是而爲術所使 內自相攻 則非死於國矣 書術使 書射殺之 惜之也]” ≪書法≫ “孫堅이 예전에 역적을 격파한 공이 있자 ≪資治通鑑綱目≫에서 이것을 써서 인정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袁術에게 부림을 받았으니, 그렇다면 義가 아니다. 勤王에 죽지 않고 포학한 桀을 돕다가 죽어서 곧바로 이것을 책에 썼으니, 애석함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孫堅前有破賊之功 綱目方書而予之 今乃爲袁術所使 則非義矣 不死於勤王而死於助桀 直書于冊 可勝惜哉]” ≪發明≫
역주17河南尹朱儁……徵兵討卓 :
“‘글을 돌려 董卓을 토벌했다.[移書討卓]’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朱儁을 인정한 것이니 ‘移書’라고 쓴 것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移書’라고 쓴 것이 한 번이고 ‘檄文을 돌렸다.[移檄]’라고 쓴 것이 7번이니, 오직 승상 司馬睿와 湘東王 高駢의 경우에는 비난하는 말이 된다.[移書討卓 何 予儁也 書移書始此 終綱目 書移書一 移檄七 惟丞相睿湘東王高駢 爲譏辭]” ≪書法≫ “≪春秋≫를 살펴보건대 魯나라 莊公 9년에 ‘齊나라 군대와 乾時에서 싸워서 우리(魯나라) 군대가 크게 패했다.’고 썼는데, ≪春秋公羊傳≫의 注解하는 자가 이르기를, ‘국내(魯나라)의 경우에서는 그 패함을 말하지 않는데 여기에서 패했다.’고 말한 것은 원수와 싸워서 비록 패했더라도 또한 영광스럽기 때문이다. 莊公이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것이 아니고 다만 다른 일로 인하여 군대를 일으켰는데도 ≪春秋≫에서 오히려 이것을 써서 인정하였으니, 하물며 참으로 복수하는 자는 어떠하겠는가. 朱儁이 董卓을 토벌할 적에 얼마 안 되어 도리어 그에게 패하여 조그만 功도 없었다. 그런데도 ≪資治通鑑綱目≫에서 ‘주준이 州郡에 글을 돌려 군대를 불러 董卓을 토벌했다.’고 써서 마치 깊이 가상히 여기고 기꺼이 인정하는 뜻이 있는 것처럼 한 것은 역적을 토벌함을 급하게 여겨서 成敗와 利害는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가 과연 능히 이로 인하여 역적을 섬멸했다면 이에 대한 書法을 또 알 수 있는 것이다.[按春秋魯莊公九年 書及齊師戰于乾時 我師敗績 傳者謂內不言其敗 此其言敗者 爲與讐戰 雖敗亦榮也 夫莊公非能復父之讐 特因他事擧兵 春秋猶書而予之 況眞能復讐者乎 朱儁討卓 未幾反爲所敗 略無尺寸之功 然綱目書移書州郡 召兵討卓 若有深嘉樂予之意者 急於討賊 故成敗利鈍有不暇顧耳 使其果能因此殄賊 書法又可知矣]” ≪發明≫
역주18劉焉殺漢中太守 斷斜谷閣 :
“劉焉이 처음에 益州의 分野에 천자의 기운이 있다는 말로 인하여 마침내 益州牧이 되기를 요구하였는데 지금 또다시 행하는 바가 이와 같았으니, 바라서는 안 되는 것을 탐하여 도모함이 어떠한가. 이때에 역적이 횡포를 부리고 난을 일으켰는데 유언이 宗姓이 되어서 대의를 제창하여 토벌하지 못하고 도리어 흉악함을 부렸기 때문에 ‘漢中太守를 죽이고 斜谷閣을 차단했다.’고 썼으니, 그 죄가 거의 董卓과 똑같은 것이다.[劉焉始因益州分野有天子氣 遂求爲牧 今又所爲若此 則其貪圖非望 爲何如哉 是時逆賊暴亂 焉爲宗姓 不能唱義誅討 反肆桀逆 書殺漢中太守 斷斜谷閣 其罪殆與卓等矣]” ≪發明≫
역주19(五)[二] :
저본에는 ‘五’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21못……이루니 :
≪周易≫ 乾卦 初九爻辭에 “初九는 못 속에 잠겨 있는 용이니, 쓰지 말라.[初九潛龍勿用]” 하였는바, 제때를 만나지 못하여 은둔해 있는 사람은 자신의 德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아야 함을 비유한 것이다.
역주22(摽)[標] :
저본에는 ‘摽’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綱目集覽正誤≫에 의거하여 ‘標’로 바로잡았다.
역주23推는 옮김(양보함)이다 :
이에 대한 胡三省의 注에 “推는 옮김이다. ≪漢書≫ 〈韓延壽傳〉에 ‘전지를 상대방에게 옮겨주었다.’라고 한 것이 바로 이 뜻이다.[推 移也 前書 韓延壽傳 以田相移 卽此義也]”라고 하였다. ‘以田相移’는 ≪漢書≫ 권76 〈韓延壽列傳〉에 “漢나라 宣帝 神爵 3년(B.C.59)에 韓延壽가 左馮翊이 되었는데, 백성 중에 형제끼리 서로 田地를 다투는 자가 있었다. 이에 한연수가 모두 자기 탓으로 돌리고 문을 닫고서 자신의 과오를 생각하자, 爭訟하던 자들이 스스로 잘못을 뉘우쳐서 전지를 상대방에게 옮겨주고 죽을 때까지 감히 다시는 쟁송하지 않기를 원하였다.[願以田相移 終死不敢復爭]”라고 보이는데, 이에 대한 顔師古의 注에 “移는 전함과 같다. 一說에 ‘형은 아우에게 양보하고 아우는 또 형에게 양보하므로 서로 전해주었다고 한 것이다.’ 하였다.[移 猶傳也 一說 兄以讓弟 弟又讓兄 故云相移]”라고 설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