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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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己未年(59)
기미년己未年(59)
二年이라 春正月 宗祀光武皇帝於明堂하고 始服冠冕玉佩하고 登靈臺하여 望雲物注+雲物, 謂氣色災變也.하다
나라 현종 효명황제顯宗 孝明皇帝 영평永平 2년이다. 봄 정월에 광무황제光武皇帝명당明堂에서 높여 제사하고 처음으로 면류관을 쓰고 패옥을 차고 영대靈臺에 올라서 운물雲物을 바라보았다.注+운물雲物”은 구름의 색깔에 따른 재변을 이른다.
◑三月 臨辟雍하여 行大射禮하다
】 3월에 황제가 벽옹辟雍(태학太學)에 왕림하여 대사례大射禮를 행하였다.
◑冬十月 하다
】 겨울 10월에 양로례養老禮를 행하였다.
幸辟雍하여 初行養老禮할새 以李躬爲三老하고 桓榮爲五更注+更, 工衡切. 三老, 老人知天地人之事者. 五更, 老人知五行更代事者. 一說 “三老ㆍ五更, 皆年老更事致仕者也.” 名以三五者, 取象三辰․五星, 天所以照明天下者.하니 三老 服都紵大袍하고 冠進賢하고 扶玉杖注+通鑑, 此下云 “五更亦如之, 不杖.” 服, 衣著也. 都, 謂都布也. 以綿裝衣曰紵. 袍, 褻衣也. 謂以都布爲大袍, 而紵之以綿. 一說 “紵, 檾屬, 績紵以爲美布, 故曰都紵.” 冠, 去聲. 進賢, 古緇布冠, 儒者之服. 前高七寸, 後高三寸, 長八寸, 後漢改名進賢. 民年始七十者, 授之以玉杖. 玉杖, 長尺, 刻玉爲鳩, 置之杖端. 鳩者, 不噎之鳥也, 欲老人不噎.하다
벽옹辟雍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양로례養老禮를 행할 적에 이궁李躬삼로三老로 삼고 환영桓榮오경五更으로 삼았는데注+공형工衡이다. 삼로三老는 노인 중에 , , 어인의 일을 아는 자이고, 오경五更은 노인 중에 오행五行이 번갈아 교대하는 일을 아는 자이다. 일설에 “삼로와 오경은 모두 나이가 많고 일을 경험하고 치사致仕한 자이다.” 하였다. , 라고 이름한 것은 삼신三辰(해, 달, 별)과 오성五星(금성金星, 목성木星, 수성水星, 화성火星, 토성土星)에서 을 취한 것이니, 삼신三辰오성五星은 하늘이 천하를 밝게 비추게 해주는 별이다., 삼로는 도저대포都紵大袍를 입고 진현관進賢冠을 쓰고 옥장玉杖을 짚었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 아래에 “오경五更 또한 이와 같이 하되, 지팡이를 짚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은 옷을 입는 것이다. 도포都布를 이른다. 솜을 옷에 넣는 것을 ‘’라 한다. 는 속옷[설의褻衣]이다. 〈도저대포都紵大袍는〉 도포都布를 가지고 대포大袍를 만들고 여기에 솜을 넣은 것을 이른다. 일설에 “(모시)의 등속이니, 모시를 길쌈하여 아름다운 삼베를 만들었으므로 ‘도저都紵’라 한다.” 하였다. (관을 쓰다)은 거성去聲이다. 진현進賢은 옛 치포관緇布冠이니, 유자儒者의 복식이다. 앞은 높이가 7이고 뒤는 높이가 3에 길이가 8이니, 후한後漢 때에 진현관進賢冠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백성의 나이가 처음 70이 되면 옥장玉杖을 주었다. 옥장은 길이가 7이니, 옥을 조각하여 비둘기 모양을 만들어서 지팡이의 위에 달았다. 비둘기는 음식을 먹을 때에 목이 메지 않는 새이니, 노인들이 음식을 먹을 적에 숨이 막히지 않기를 바라는 뜻이다.
乗輿到辟雍禮殿하여 御坐東廂하고 遣使者하여 安車迎三老, 五更於太學講堂注+講堂, 講授之堂.하다
승여乗輿가 벽옹의 예전禮殿에 도착하여 동상東廂에 앉고는 사자使者를 보내 안거安車로 삼로와 오경을 태학太學의 강당으로 맞이하게 하였다.注+강당講堂”은 수업하는 집이다.
天子迎於門屛하여 交禮하고 道自阼階注+道, 讀曰導.하고 三老升自賓階호되 至階 天子揖如禮하다
천자天子문병門屛에서 맞이하여 서로 예를 행하고 천자는 조계阼階(동쪽 계단)에서 인도하고注+(인도하다)는 로 읽는다. 삼로는 빈계賓階(서쪽 계단)로부터 올라가되, 삼로와 오경이 계단에 이르면 천자가 읍하기를 와 같이 하였다.
三老升하여 東面이어늘 三公設几하고 九卿正履하다 天子親袒割牲하여 執醬而饋하고 執爵而酳注+醬, 醢也. 饋, 進食也. 醬, 食味之主, 故執之而饋. 爵, 禮器也. 酳, 音胤, 漱也, 謂食已而蕩口也.하며
삼로가 올라와서 동면東面을 하자, 삼공三公은 삼로를 위해 안석[]을 진설하고 구경九卿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았다. 천자가 직접 웃통을 벗고 희생을 베어서 을 잡고 음식을 올리고 술잔을 잡고 입가심하게 하였으며注+은 젓갈이고 는 음식을 올림이니, 은 음식의 맛을 내는 주재료이므로 이것을 잡고 음식을 올린 것이다. (술잔)은 예기禮器이다. 은 음이 으로 〈술이나 물로〉 입가심(탕구질)을 하는 것이니, 음식을 다 먹은 다음 입가심함을 이른다.,
祝哽在前하고 祝饐在後注+祝, 之六ㆍ職救二切. 哽, 古切. 饐, 一結切. 哽者, 食留咽中也, 老人每食多哽, 故於未食前祝之, 使毋哽也. 饐者, 食窒氣不通也, 於已食後祝之, 使毋饐也.하다 五更南面이어늘 三公進供호되 禮亦如之하니라
축경祝哽(축경)은 식전에 하였고 축의祝饐(축애)는 식후에 하였다.注+(축원하다)은 지륙之六직구職救이다. 고행古杏이고, 일결一結이다. 은 음식이 목구멍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니, 〈“축경祝哽”은〉 노인은 매번 음식을 먹을 적에 목구멍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으므로 음식을 먹기 전에 축원해서 목구멍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한 것이다. 는 음식이 막혀서 숨이 통하지 못하는 것이니, 〈“축의祝饐”는〉 음식을 먹고 난 뒤에 축원해서 숨이 막히지 않게 한 것이다. 오경이 남면南面하자, 삼공이 음식을 올리되, 예를 또한 삼로와 같이 하였다.
辟雍에 親臨하여 養老禮를 행하다(≪帝鑑圖說≫)辟雍에 親臨하여 養老禮를 행하다(≪帝鑑圖說≫)
禮畢 引桓榮及弟子升堂하여 自爲下說이어든 諸儒執經하여 問難於前注+上, 謂天子也. 下說, 謂下語而講說之也. 問難, 謂擧所疑而難問也. 難, 去聲, 下發難同.하니
를 마친 다음 환영桓榮과 제자들을 인도하여 으로 올라오게 해서 이 직접 말씀을 내려 경서經書를 설명하자, 여러 유생들이 경서를 잡고 황제 앞에서 묻고 논란하니注+천자天子를 이른다. “하설下說”은 말씀을 내려 강설함을 이른다. “문난問難”은 의심스러운 것을 들어 논란하여 물음을 이른다. (논란하다)은 거성去聲이니, 아래의 “발난發難”도 같다.,
冠帶搢紳之人 圜橋門而觀聽者 蓋億萬計注+辟雍, 四門外有水, 圜繞以節觀者. 門外皆有橋, 觀者在水外, 故曰圜橋門. 於是 下詔하여 賜榮爵關内侯注+通鑑考異曰 “帝紀, 載詔文, 上言李躬, 而下獨封榮, 似脫躬字.” 榮傳ㆍ袁宏漢紀, 詔獨言桓榮, 不及李躬, 今闕疑.하고
관을 쓰고 띠를 묶고 홀을 꽂은 사람들이 교문橋門을 에워싸 구경하고 듣는 자가 억만億萬으로 헤아려졌다.注+벽옹辟雍은 사방의 문밖에 에워싸고 있는 물이 있어서 구경하는 자들을 통제하였다. 문밖에 모두 다리가 있는데, 구경하는 자들이 물 밖에 있으므로 “환교문圜橋門”이라 한 것이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서 환영에게 관내후關内侯의 작위를 하사하고注+자치통감고이資治通鑑考異≫에 “〈명제 본기明帝 本紀〉에 조문詔文이 실려 있는데, 위에는 이궁李躬을 말하고 아래에는 유독 환영桓榮만을 봉하였는바, 자가 빠진 듯하다.” 하였다. ≪후한서後漢書≫ 〈환영전桓榮傳〉과 원굉袁宏의 ≪후한기後漢紀≫에는 조문詔文에 환영만 말하고 이궁은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의심스러운 것을 제쳐놓는다.
三老, 五更 皆以二千石祿으로 養終厥身注+養, 上聲. 謂以其俸祿養之, 盡其天年也.하고 賜天下三老호되 酒人一石 肉四十斤注+天下三老, 謂鄕縣之三老.하다
삼로三老오경五更을 모두 이천석二千石의 녹봉으로 그 몸이 죽을 때까지 봉양하게 하였으며注+(봉양하다)은 상성上聲이니, 〈“양종궐신養終厥身”은〉 녹봉으로 봉양하여 그 천수天壽를 다하게 함을 이른다., 천하의 삼로에게 1인당 술 1(섬)과 고기 40씩을 하사하였다.注+천하삼로天下三老”는 의 삼로를 이른다.
自爲太子 受尙書於桓榮이러니 及卽帝位 猶尊榮以師禮
태자太子였을 때부터 환영桓榮에게 ≪상서尙書≫를 배웠는데,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나서도 여전히 환영을 스승의 예로 높였다.
嘗幸太常府注+榮時爲太常.하여 令榮坐東面하여 設几杖注+几, 老者所馮. 杖, 老者所依.하고 會百官及榮門生數百人注+門生, 受業於門者也.하여 親自執業한대
황제는 일찍이 태상부太常府에 행차하여注+환영桓榮이 이때 태상太常으로 있었다. 환영으로 하여금 스승의 자리인 동면東面에 앉게 하고 을 진설하고注+(안석)는 노인이 기대는 것이고, (지팡이)은 노인이 짚고 의지하는 것이다. 백관百官과 환영의 문생 수백 명을 모아놓고서注+문생門生”은 문하에서 수업한 자이다. 이 직접 경서經書를 받들고 수학受學하였는데,
諸生 或避位發難하니 謙曰 太師在是注+執業, 猶執經也. 避位, 猶言出席也. 發難, 發疑難也.라하다 旣罷 悉以太官供具 賜太常家하다
생도들이 혹 자리에서 나와 의심스러운 것을 논란하자, 이 겸손하게 말하기를 “태사太師가 이 자리에 계시다.”注+집업執業”은 집경執經(경서經書를 받들다)과 같다. “피위避位”는 출석出席(자리에서 나오다)이란 말과 같다. “발난發難”은 의아해하며 논란하는 것이다. 하였다. 자리가 파한 다음 태관太官에서 공급한 음식을 모두 태상太常(환영)의 집에 하사하였다.
毎疾病 帝輙遣使者存問하여 太官, 太醫 相望於道러라
환영이 병을 앓을 때마다 황제는 번번이 사자使者를 보내 문안하여 태관太官태의太醫가 도로에 서로 이어졌다.
及篤 上疏謝恩하고 讓還爵土어늘 帝幸其家하여 問起居할새 入街下車하여 擁經而前하여 撫榮垂涕하고
황제가 수레에서 내려와 桓榮을 문병하다(≪養正圖解≫)황제가 수레에서 내려와 桓榮을 문병하다(≪養正圖解≫)
환영桓榮은 병이 위독해지자, 상소하여 은혜에 사례하고 작위와 식읍을 사양하고 되돌려주었다. 황제가 안부를 물으려고 그의 집에 행차했을 적에, 길거리에 들어서자마자 수레에서 내려 경전을 끼고 앞으로 나아가서는 환영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흘리고,
賜以牀茵帷帳 刀劍衣被하고 良久 乃去注+擁經而前, 謂擁持經書而前進也. 茵, 褥也.하다 自是 諸侯, 將軍, 大夫問疾者 不敢復乗車到門하고 皆拜牀下러라
침상과 요, 장막과 도검刀劍, 옷과 이불을 하사하고 한동안 있다가 떠나왔다.注+옹경이전擁經而前”은 경서經書를 옆에 끼고 앞으로 나아감을 이른다. 은 요이다. 이로부터 문병하러 온 제후諸侯장군將軍, 대부大夫들이 감히 다시는 수레를 타고 그의 집 앞에까지 이르지 못하였고, 모두 침상 아래에서 환영에게 절하였다.
榮卒 帝親自變服하여 臨喪送葬하고 賜冢塋于首山之陽注+賢曰 “首陽山, 在今偃師縣西北.”하다 子郁 當嗣러니 讓其兄子汎注+榮長子雍, 早卒.한대
환영이 하자, 황제는 직접 옷을 갈아입고서 임곡臨哭하여 장송葬送하고 수양산首陽山의 남쪽에 장지葬地를 하사하였다.注+이현李賢이 말하기를 “수양산首陽山은 지금의 언사현偃師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다. 아들 환욱桓郁이 뒤를 이어야 하는데, 그의 조카인 환범桓汎에게 사양하였다.注+〈“자욱당사 양기형자범子郁當嗣 讓其兄子汎”는〉 환영桓榮의 맏아들 환옹桓雍이 일찍 하였기 때문이다.
帝不許하니 乃受封하고 而悉以租入與之어늘 帝以郁爲侍中하다
황제가 허락하지 않으니, 환욱이 마침내 봉작封爵만 받고 조세 수입을 모두 환범에게 주자, 황제는 환욱을 시중侍中으로 삼았다.
胡氏曰 觀顯宗事師之意하면 多儀及物 數千百年 鮮有其儷하니 可謂人主之高致盛節也
호씨胡氏(호인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현종顯宗(명제明帝)이 스승을 섬긴 뜻을 보면, 예의와 물건이 성대하여 수천 수백 년에 그 상대가 될 만한 자가 드무니, 군주의 높은 운치와 성대한 예절이라고 이를 만하다.
惜乎 桓榮授經 専門章句하여 不知仲尼修身治天下之微旨大義
애석하다. 환영桓榮경서經書를 전수함에 장구章句에만 치중하여, 중니仲尼(공자孔子)의 몸을 닦고 천하를 다스리는 깊은 뜻과 큰 의리를 알지 못하였다.
其君之德業 如是而止注+專門, 謂說經者各自是其一家也. 意斷處曰章, 言斷處曰句. 言其專於分章析句之學也.하니 若使子思, 孟子之徒 遭遇此時하여 得行所學이런들 則二帝可三而三王可四也 必矣리라
그러므로 그 군주의 덕업德業이 이와 같음에 그쳤으니注+전문專門”은 을 설명하는 자들이 각각 자신의 일가一家를 스스로 옳다고 여김을 말한다. 뜻이 끊긴 곳을 이라 하고 말이 끊긴 곳을 라 하니, 〈“전문장구専門章句”는〉 그 을 나누고 를 분석하는 학문에만 오로지 힘씀을 말한 것이다., 만약 자사子思맹자孟子와 같은 무리가 이러한 때를 만나서 배운 바를 행할 수 있었더라면, 반드시 이제二帝삼제三帝가 되고 삼왕三王사왕四王이 되었을 것이다.”
就國하다
중산왕 유언中山王 劉焉봉국封國으로 나아갔다.
以中山王焉 郭太后少子 太后尤愛之라하여 故獨留京師러니 至是 始與諸王俱就國하되
중산왕 유언中山王 劉焉곽태후郭太后의 작은 아들로 태후太后가 매우 사랑했다 하여 그만 홀로 경사京師에 남겨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여러 왕들과 함께 봉국封國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賜以虎賁, 官騎하여 恩寵尤厚하여 獨得往來京師注+漢官儀 “騶騎, 王家名官騎.”러라 帝禮待陰, 郭하여 每事必均하고 數受賞賜하여 恩寵俱渥이러라
그러나 호분虎賁관기官騎를 하사하는 등 은총이 더욱 두터워서 홀로 경사京師에 왕래할 수 있었다.注+한관의漢官儀≫에 “추기騶騎왕가王家에서는 관기官騎라고 이름한다.” 하였다. 황제는 음씨陰氏곽씨郭氏를 예우하여 매사를 반드시 균등하게 하였고 을 자주 내려서 은총이 모두 지극하였다.
帝如長安하다
】 황제가 장안長安에 갔다.
◑十一月 하고 帝過 式其墓러니 是月 還宮注+蕭何墓, 在長陵東司馬門道北. 霍光墓, 在茂陵東司馬門道南.하다
】 11월에 사자使者를 보내 소하蕭何곽광霍光에게 제사하고, 황제가 지나갈 적에 그들의 묘에 경의를 표하였다. 이달에 환궁하였다.注+소하蕭何장릉長陵의 동쪽 사마문司馬門 길 북쪽에 있고, 곽광霍光무릉茂陵의 동쪽 사마문司馬門 길 남쪽에 있다.
역주
역주1 行養老禮 : “光武帝가 中興했을 적에 무기를 내려놓고 六藝를 강하며 軍馬를 쉬게 하고 道를 논하여, 文治에 유념한 것이 오래되었다. 말년에 처음으로 三雍(靈臺, 辟雍, 明堂)을 세웠으나 親臨하지 못했는데, 明帝가 광무제의 뒤를 이어서 明堂에서 높여 제사함을 거행하고 雲臺에서 구름의 색깔을 관망하며 大射禮와 養老禮를 행하여, 東都(東漢)의 문물이 이에 찬란하여 볼만하였으니, 책에 이것을 쓴 것은 훌륭한 명성으로 삼을 만하기 때문이었다. ≪詩經≫ 〈大雅 文王有聲〉에 ‘후손들에게 좋은 계책을 남겨주어서 공경하는 아들을 편안히 한다.’ 하였으니, 光武帝가 이대로 하였고, 또 〈下武〉에 ‘밝게 뒤를 이어 그 선조의 발자취를 이었다.’ 하였으니, 顯宗에게 이러한 일이 있었다.[光武中興 投戈講藝 息馬論道 其留意文治久矣 末年肇建三雍 未及臨嚮 明帝繼之 擧宗祀 望雲物 行大射養老之禮 東都文物 於是 彬彬可觀 書之于冊 足爲美稱 詩曰 貽厥孫謀 以燕翼子 光武以之 又曰 昭哉嗣服 繩其祖武 顯宗有焉]” ≪發明≫
역주2 (九)[七] : 저본에는 ‘九’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七’로 바로잡았다.
역주3 (杳)[杏] : 저본에는 ‘杳’로 되어 있으나, ≪中文大辭典≫에 의거하여 ‘杏’으로 바로잡았다.
역주4 中山王焉 : “焉은 어떤 사람인가. 郭后가 사랑하던 아들이다. 建武 말년에 일찍이 여러 왕을 보내 封國으로 나아가게 했는데, 明帝가 〈太子로 있으면서〉 특별히 그만 머물러 있기를 청하였다가 이때 비로소 내보냈으니, 황제가 廢后(郭后)를 대우한 것이 조금의 혐의도 없다고 이를 만하다. 특별히 써서 찬미한 것이다.[焉者 何 郭后所愛子也 建武末年 嘗遣諸王就國矣 明帝請特留之 至是始遣 帝之待廢后 可謂無纎介之嫌矣 特書美之]다” ≪書法≫
역주5 中牢 : 양과 돼지 한 마리씩을 제물로 바쳐 지내는 제사로, 小牢라고도 한다.
역주6 遣使者……霍光 : “신하에게 제사한 것을 쓰지 않았는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썼는가. 功臣을 기억한 것이니, 신하에게 제사한 일을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祭臣不書 此何以書 錄功臣也 書祭臣 始此]” ≪書法≫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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