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胡氏曰 紹宗之才는 誠足以制景하니 高歡信知人矣로되 而故不貴之하여 以遺其子하니 則所以待紹宗者有未盡焉하니라
至唐太宗하여 遂亦用此하여 委李世勣於高宗이어늘 後之論者가 以此兩君爲賢하여 曰 寧其身無受知人之名이언정 而使其子孫으로 專享得賢之利라하니 是皆失之也라
平日
에 儲養賢才
하여 以遺子孫
인댄 推誠盡禮
하여 各得其道
어늘 豈用私意小智
하여 軒輊屈之
라가 而使子孫以利祿誘之
注+① 後漢馬援傳 “居前不能令人輊, 居後不能令人軒, 臣所恥也.” 師古曰 “言爲人不能輕重.”리오
使其臣利祿之人也인댄 則可어니와 使其臣不以三公易其介也인댄 又安得而用之리오
彼紹宗與勣은 皆利祿之人耳라 故紹宗逐侯景不盡其力하고 而李勣은 事高宗不竭其忠하니 君臣得失이 豈不明且驗邪아
目
蕭淵明이 至鄴城에 東魏主升閶闔門하여 受俘하고 讓而釋之하여 送於晉陽하니 高澄待之甚厚러라
侯景旣敗에 羊鴉仁亦還義陽하니 東魏遂得懸瓠項城하여 悉復舊境하다
高澄數遣書하여 求好於梁호되 梁未之許러니 澄謂淵明曰 若梁主가 不忘舊好인댄 諸人竝卽遣還이요 侯景家屬도 亦當同遣호리라
淵明遣人하여 奉啓還梁이어늘 梁主與朝臣議之러니 朱异等은 皆以爲便이라호되
司農卿傅岐獨曰 此高澄設間하여 欲令侯景으로 自疑而作亂耳니 若許通好인댄 正墮其計中이라하니
异等固執宜和
라한대 梁主亦厭用兵
이라 乃許之
라 使還過壽陽
이러니 侯景知之
하고 攝問
한대 具服
注+① 攝問, 收錄其人而問之也.이어늘
乃啓梁主曰 高澄忌賈在翟
이요 惡會居秦
하니 求盟請和
는 冀除其患
注+② 翟, 與狄同. 傳 “晉靈公之初, 賈季奔翟, 隨會奔秦, 秦人用其謀, 晉人患之. 六卿相見於諸浮, 趙宣子曰 ‘隨會在秦, 賈季在翟, 難日至矣, 將若之何.’”이니 若臣死有益
인댄 萬殞無辭
어니와 惟恐千載
에 有穢良史
일까하노이다
目
又致書於异하고 餉金三百兩한대 异納金而不通其啓러니
梁主遂遣使弔澄이어늘 景又啓曰 臣與高氏로 釁隙已深이어늘 今陛下復與連和하시니 使臣何地自處이리잇고
梁主報之曰 朕與公으로 大義已定하니 豈有成而相納하고 敗而相棄乎아
景乃詐爲鄴中書하여 求以淵明易景한대 梁主將許之어늘 傳岐曰 侯景以窮歸義하니 棄之不祥이요 且百戰之餘에 寧肯束手受縶이리오
謝擧朱异曰 景奔敗之將이니 一使之力耳니라 梁主從之하여 復書曰 貞陽旦至면 侯景은 夕返하리라 景謂左右曰 我固知吳老公의 薄心腸이라
王偉說景曰 今坐聽
이라도 亦死
요 擧大事
라도 亦死
니 唯王
은 圖之
하라 於是
에 始爲反計
하여 屬城居民
을 悉召募爲軍士
하고 輒停責市估及田租
하고 百姓之女
를 悉以配將士
注+① 市估, 應商旅之物入市者, 估其直而收稅.하더라
目
侯景自至壽陽
으로 徵求無已
로되 梁皆與之
러니 景請娶於王謝
어늘 梁主曰 王謝
는 門高非偶
니 可於朱張以下
에 訪之
注+① 朱․張謂朱异․張綰之族也.라한대
景恚恨하여 表疏를 稍悖慢이러니 又聞徐陵等使魏하고 反謀益甚이어늘
元貞知景有異志하고 累啓還朝러니 景謂曰 河北은 事雖不果나 江南은 何慮失之리오 貞懼하여 逃歸建康하여 具以事聞호되 梁主不問하다
景知臨賀王正德屢以貪暴得罪하여 陰養死士하여 幸國家有變하고 遣徐思玉하여 致牋
曰 天子年尊하고 姦臣亂國하니 大王屬當儲貳어늘 中被廢黜하니 景雖不敏이나 實思自效하노라
正德大喜하여 報之曰 僕爲其内요 公爲其外면 何有不濟리오 機事在速하니 今其時矣니라
目
侯景聞臺軍討己하고 問策於王偉한대 偉曰 邵陵若至면 必爲所困이리니 不如决志東向하여 直掩建康하니
臨賀는 反其内하고 大王은 攻其外하면 天下는 不足定也라 兵貴拙速하니 今宜卽進이니이다
景乃詐稱出獵
하고 十月
에 襲譙州
하여 執刺史蕭泰
注+① 此譙州非渦陽之譙州. 魏收志 “梁置譙州於新昌城, 領高塘․臨徐․南梁․新昌郡.” 其地當在唐廬․和二州之間. 泰, 範之弟也.하고 攻歷陽
하니
太守莊鐵이 以城降하여 因說景曰 國家承平歲久하여 人不習戰이어늘 聞大王擧兵하고 内外震駭하니 宜乗此際하여 速趨建康이면 可兵不血刃而成大功이어니와
若使朝廷으로 徐得爲備하여 遣羸兵千人하여 直據采石하면 雖有精甲百萬이나 不得濟矣리라
景以鐵爲導하여 引兵臨江이어늘 梁主問策於尙書羊侃한대
侃請以二千人으로 急據采石하고 令邵陵王으로 襲取壽陽하여 使景進不得前하고 退失巢穴이면 烏合之衆이 自然瓦解하리라
目
十一月朔에 正德卽帝位하고 以景爲丞相하다 景攻東府三日에 克之하고 聲言梁主已殂라하니 雖城中이나 亦以爲然이어늘 太子請梁主巡城하니 衆心粗安하다
江子一之敗還也에 梁主責之한대 子一拜謝曰 臣以身許國하여 常恐不得其死러니 今所部皆棄臣去하니 臣以一夫로 安能擊賊이리오 若賊遂能至此인댄 臣誓當碎身하여 以贖前罪라하더라
至是하여는 與弟左丞子四東宮主帥子五로 帥所領百餘人하여 開門出戰할새 子一直抵賊營하여 徑前刺賊이러니 從者不繼하니 賊解其肩而死어늘
子四子五相謂曰 與兄俱出하니 何面獨旋이리오 皆免胄赴賊死하다
目
景初至建康하여 謂朝夕可拔이라하여 號令嚴整하니 士卒不敢侵暴러니 及屢攻不克하여는 人心離沮라
景恐援兵四集하면 一旦潰去하고 又軍中乏食이라 乃縱士卒하여 掠奪民米及金帛子女하니
是後는 米一升에 直七八萬錢이요 人相食하고 餓死者什五六이러라
景驅士民하여 於城東西에 起土山할새 有疲羸者는 殺以塡山하니 號哭動地러라
城中亦築土山
하여 以應之
할새 太子宣城王以下
가 皆親負土畚鍤
注+① 畚, 音本, 所以盛土. 鍤, 鍬也.하여 於山上
에 起樓四丈
하고 募敢死士二千人
하여 分配二山
하여 晝夜交戰
注+② 二山, 東土山․西土山也.이러니
會大雨
하여 城内山崩
이라 賊乗之垂入
이어늘 羊侃令多擲火爲城
하여 以斷其路
하고 徐於内築城
하니 賊不能進
注+③ 擲火爲城, 通鑑作擲火爲火城.이러라
景募人奴降者하여 悉免爲良하니 於是에 群奴出就景者가 以千數어늘 景厚撫之하니 人人感恩하여 爲之致死라
目
景土山稍逼城樓
어늘 將軍柳津
이 命作地道
하여 以取其土
하니 山崩壓賊且盡
注+① 津, 仲禮之父也. 通鑑山上有外字.하고
又於城内
에作飛橋
하여 懸罩二土山上
하니 景衆皆走
注+② 罩, 陟敎切. 世人謂魚罩, 自上籠下爲罩.어늘 擲炬焚其東山樓柵
하여 蕩盡
하니 賊死甚衆
이라
賊復引玄武湖水
하여 以灌臺城
하니 闕前皆爲洪流
注+③ 玄武湖在建康上元縣北十里.러라
陳昕爲景所擒하여 欲用之어늘 昕不可라한대 景使其黨范桃棒으로 囚之어늘
昕因說桃棒하여 使殺王偉宋子仙而降한대 桃棒從之하여 潛遣昕夜縋入城이어늘
梁主大喜
하여 鐫銀券賜桃棒
하고 許以封王
하여 卽有景衆
注+④ 鐫, 子全切, 刻也, 雕也. 券, 約也, 綣也, 相約束繾綣爲限也, 以銀爲之.호되 太子恐其詐
하여 召公卿會議
하니
朱异傅岐曰 桃棒降이 必非謬라 桃棒旣降하니 賊景必驚하리니 乗此擊之면 可大破也라하니
太子曰 吾守堅城하여 以俟外援이 萬全策也니 今開門納桃棒이라가 萬一爲變하면 悔無所及이리라 朱异拊膺曰 失此하니 社稷事去矣로다하다
俄而桃棒事泄하여 景拉殺之러니 陳昕不知하고 如期而出한대
景逼使射書城中하여 言桃棒今入이라하고 因衷甲隨之호되 昕不肯하여 期以必死하니 景乃殺之하다
目
【目】 慕容紹宗이 鐵騎兵 5천으로 侯景을 협공하니, 후경이 자신의 군사들에게 속여 말하기를 “너희들의 가족들은 이미 高澄에게 살해되었다.”라고 하니, 군사들이 그의 말을 믿었다.
모용소종이 멀리서 소리치며 말하기를 “너희 가족들은 모두 안전하니, 만약 돌아온다면 관직과 공훈은 예전처럼 대우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注+① 歸는 다시 東魏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官은 각자 사람들이 이전에 있던 관직이다. 勳은 勳官의 등급이다.
후경의 병사들이 남쪽으로 건너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드디어 크게 무너졌는데, 후경이 몇 명의 騎兵과 淮河를 건너 조금씩 흩어진 병력을 수습하여 步兵과 騎兵 800명을 얻어서 밤낮으로 두 배의 속도로 행군하니, 추격하는 군사가 감히 따라오지 못하였다.
〈후경이〉 使者를 보내어 모용소종에게 말하기를 “저를 만약 사로잡는다면 公이 또한 어디에 쓰이겠는가.”라고 하니, 모용소종이 마침내 후경을 놓아주었다.
目
【目】 胡氏(胡寅)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慕容紹宗의 재주는 진실로 侯景을 제압할 수 있었으니, 高歡이 진실로 사람을 잘 알아본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그를 귀하게 대우하지 않고서 자신의 아들에게 남겨주었으니, 그 때문에 모용소종을 대우하는 데 미진한 점이 있었다.
唐 太宗에 이르러 역시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李世勣을 高宗에게 맡겨주었는데, 후대에 평론하는 자들이 이로 인해 두 명의 君主를 현명하게 여겨 말하기를 ‘차라리 자신이 사람을 잘 알아보았다는 명성을 가지지 않을지언정, 자신의 자손들이 전적으로 현명한 신하를 얻는 이익을 누리게 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평소에 현명한 인재를 양성하여 자손들에게 남겨주려면 성의를 미루고 예의를 다하여 각각 그에 맞는 도리를 얻어야 하는데, 어찌 사적인 뜻과 작은 지혜를 써서 저울질하여 낮게 대우하다가 자손에게 이익과 봉록으로 그를 유혹하도록 한단 말인가.
注+① ≪後漢書≫ 〈馬援傳〉을 살펴보면 라고 하였는데, 顔師古가 말하기를 “남을 위해 〈자신의 태도의〉 경중을 바꾸지 않는 것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만일 그 신하가 이익과 봉록에 마음이 이끌리는 사람이라면 괜찮지만, 만일 그 신하가 三公의 자리로도 자신의 절개를 바꾸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찌 등용할 수 있겠는가.
저 모용소종과 이세적은 모두 이익과 봉록에 마음을 둔 사람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용소종은 후경을 추격하면서 자신의 힘을 다하지 않았고, 이세적은 고종을 섬기며 자신의 충성을 다하지 않았으니, 임금과 신하의 득실이 어찌 분명하고 징험이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目
【目】 侯景이 패배하고 난 뒤에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는데, 梁馬頭의
인 劉神茂가 평소 監州事 韋黯에게 용납을 받지 못하다가 후경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일부러 가서 그를 문안하였다.
注+① 韋黯은 韋叡의 아들이다. 의도가 있는 것이 ‘故’이다.
후경이 묻기를, “壽陽이 여기에서 멀지 않으니, 가서 의탁하고자 하는데 위암이 나를 받아들이겠소.”라고 하니,
유신무가 말하기를 “위암은 監州일 뿐입니다. 왕께서 만약 그곳에 가신다면 반드시 나와서 맞이할 것이니, 그로 인해 그를 사로잡으면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을 얻은 후에 천천히 啓文을 올려 보고하면 조정에서는 왕께서 남쪽으로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여 반드시 책망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경이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하늘의 가르침이오.”라고 하였다.
目
【目】 드디어 밤에 성 아래에 도착하였는데, 韋黯은 도적이라 여겨 갑옷을 입고 성벽 위로 올라갔다.
注+① 陴는 성 위의 성가퀴이다.
侯景이 자기의 무리를 보내어 알리기를 “河南王(侯景)이 전쟁에 패배하여 와서 의탁하려 하니, 속히 성문을 열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위암이 말하기를 “이미 칙령을 받들지 않았으니, 감히 명령에 따르지 못하겠다.”라고 하였다.
후경이 劉神茂에게 말하기를 “일이 성공하지 못하겠소.”라고 하니, 유신무가 말하기를 “위암은 겁이 많고 지혜가 적으니, 설득하여 항복시킬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徐思玉을 보내어 들어가서 위암을 만나게 하여 말하기를 “하남왕이 조정에서 중시를 받는 것은 그대가 아는 사실이요. 지금 전투에 패배하여 와서 의탁하려고 하는데, 어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소.”라고 하니,
위암이 말하기를 “나는 명령을 받아 성을 지키고, 하남왕은 스스로 패배하였으니, 우리의 일과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서사옥이 말하기를 “나라에서 그대에게 국경을 지키는 임무를 주었는데, 만약 東魏의 병력이 와서 하남왕이 〈그들에게〉 죽임을 당한다면 그대가 어찌 홀로 살아남을 수 있겠소. 비록 살아남더라도 무슨 낯으로 조정을 보겠소.”라고 하니,
위암이 성문을 열고 후경을 받아들였는데, 후경이 자신의 將帥를 보내어서 사방의 문을 나누어 지키도록 하였다.
目
【目】 梁나라 조정에서는 侯景이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근심하였다. 詹事 何敬容이 太子에게 말하기를 “후경이 마침내 죽게 되었다면, 조정의 큰 복이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자가 놀라 얼굴빛이 바뀌어 그 까닭을 묻자, 하경용이 대답하기를, “후경은 번복하며 반란을 일으키는 신하이니, 끝내 나라를 어지럽힐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경이 패배한 일로 자신을 폄직시켜달라고 요구하였는데 梁主(蕭衍)가 허락하지 않고, 후경을 南豫州牧으로 삼았다.
目
【目】 蕭淵明이 鄴城에 도착하자, 東魏主(元善見)가 閶闔門에 올라 포로를 받아들이고 〈소연명을〉 꾸짖고는 풀어주어 晉陽으로 보내니, 高澄이 그를 몹시 우대하였다.
侯景이 패배하고 난 뒤에 羊鴉仁 역시 義陽으로 돌아가니, 東魏에서 드디어 懸瓠와 項城을 얻어서 예전의 경계 지역을 모두 회복하였다.
고징이 梁나라에 자주 편지를 보내어 우호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지만, 양나라에서는 아직 허락하지 않았다. 고징이 소연명에게 말하기를 “만약 梁主(蕭衍)가 예전의 우호관계를 잊지 않는다면 사람들을 모두 즉각 돌려보내고, 후경의 가솔들도 역시 똑같이 보내주겠소.”라고 하였다.
소연명이 사람을 보내어 啓文을 받들고 양나라로 돌아가자, 梁主가 조정 신하들과 의논하였는데, 朱异 등은 모두 좋다고 하였으나
司農卿 傅岐가 홀로 말하기를 “고징이 이간질하여 후경을 시켜서 스스로 의심하여 난을 일으키도록 하려는 것일 뿐이니, 만약 우호관계를 맺는 것을 허락하면 바로 그의 계략 속으로 떨어지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주이 등이 화친을 맺어야 한다고 고집하였는데, 梁主도 전쟁에 싫증이 나서 마침내 허락하였다. 〈소연명의〉 使者가 돌아오다가 壽陽에 들렀는데, 후경이 그 사실을 알고는 체포하여 물으니 모두 자복하였다.
注+① ‘攝問’은 그 사람을 체포하여 심문하는 것이다.
이에 梁主에게 계문을 올려 말하기를 “고징은 賈季가 翟에 있는 것을 꺼리고 隨會가 秦나라에 있는 것을 싫어하니, 그가 盟約을 요구하고 화친을 청한 것은 자신의 우환을 없애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注+② 翟은 狄과 같다. ≪春秋左氏傳≫ 文公 13년에 “晉 靈公 초기에 賈季는 翟으로 달아났고, 隨會는 秦나라로 달아났는데, 秦나라 사람들이 수회의 계략을 이용하자, 晉나라 사람들이 걱정하였다. 〈晉나라〉 六卿이 諸浮에서 서로 만났는데, 趙宣子가 말하기를 ‘수회는 秦나라에 있고 가계는 翟에 있어 禍難이 날로 다가오고 있으니 어쩌면 좋겠는가?’하였다.”라고 하였다. 만약 臣이 죽어서 도움이 된다면 만 번 죽어도 사양하지 않겠지만, 오직 먼 후대에 훌륭한 역사를 더럽히게 될까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目
【目】 〈侯景이〉 또 朱异에게 편지를 보내고 금 300냥을 주었는데, 주이는 금을 받고 그의 啓文은 전하지 않았다.
梁主(蕭衍)가 드디어 使臣을 보내어 高澄을 弔問하자, 후경이 또 계문을 올려 말하기를 “臣은 高氏와 골이 이미 깊은데 지금 폐하께서 다시 그들과 화친을 맺고자 하시니, 臣에게 어떠한 처지에 놓이게 하시렵니까.”라고 하였다.
梁主가 그에게 답하기를, “짐은 이미 公과 함께 大義를 이미 정하였으니, 어찌 성공했다고 그대를 받아들이고 패배했다고 그대를 버리겠는가.”라고 하였다.
후경이 이에 거짓으로 鄴城에서 보내는 편지를 만들어서 蕭淵明과 侯景을 바꾸기를 요구하였는데, 梁主가 허락하려고 하자, 傳岐가 말하기를 “후경이 궁지에 몰려서 귀의하였는데 그를 버리는 것은 상서롭지 않고, 또 많은 전투를 겪은 끝에 어찌 손을 묶고 굴레를 받고자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謝擧와 朱异가 말하기를 “후경은 패배하여 달아난 장수이니, 使者 한 명의 힘으로 처리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梁主가 그 말대로 따라 다시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貞陽侯(蕭淵明)가 아침에 〈梁나라에〉 도착하면 후경은 저녁에 〈東魏에〉 돌아오게 하겠소.”라고 하니, 후경이 좌우에 있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나는 진실로
의 情義가 야박함을 알았다.”라고 하였다.
王偉가 후경에 유세하기를, “지금 앉은 채로 그 말을 들어도 죽고, 大事를 일으켜도 죽으니, 오직 왕께서는 도모하십시오.”라고 하니, 이에 비로소 반란을 일으킬 계책을 세워 성에 사는 백성들을 모두 불러 모아 軍士로 삼게 하고, 바로 市估(商稅)와 田租를 중지하였으며, 백성의 자녀를 모두 將士들에게 주었다.
注+① ‘市估’는 시장으로 들여오는 상인의 물건에 따라 그 값을 매겨 세금을 거두는 것이다.
目
【目】 東魏에서 高岳, 慕容紹宗, 劉豐生 등을 파견하여 보병과 기병 10만을 거느리고서 潁川에서 西魏의 王思政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王思政이 명을 내려서 북을 눕히고 깃발을 뉘여서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하였다.
고악은 병력을 믿고 사방으로 성을 넘어 공격하게 하였는데, 왕사정이 날래고 용맹한 병사를 뽑아서 성문을 열고 나가 싸우게 하니, 고악의 군대가 패배하여 달아났다.
〈고악이〉 다시 土山을 쌓아 밤낮으로 공격하였는데, 왕사정이 방편에 따라 방어하여 그들의 土山을 빼앗고 그곳에 망루와 성가퀴를 설치하여 방어를 도왔다.
目
【目】 侯景이 壽陽에 온 뒤로 요구하는 것이 끝이 없었으나 梁나라에서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 후경이 王氏와 謝氏 가문의 여인과 혼인하기를 청하자 梁主(蕭衍)가 말하기를 “왕씨와 사씨 가문은 고귀하여 배필로 맞지 않으니, 朱异와 張綰 가문 이하에서 배필을 찾으시오.”라고 하였다.
注+① 朱․張은 朱异와 張綰의 族屬이다.
후경이 성을 내고 원망하여 表文과 上疏의 내용을 점점 도리에 어긋나고 오만하게 하였는데, 또 徐陵 등이 西魏에 使臣으로 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반역의 모의가 더욱 심해졌다.
元貞은 후경이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알고서 조정으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啓文을 올리자, 후경이 말하기를 “黃河 북쪽의 일은 비록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으나, 長江 남쪽은 어찌 잃을까를 걱정하겠소.”라고 하였다. 원정이 두려워 建康으로 도망쳐 돌아와서 사실대로 갖추어 보고하였는데, 梁主가 不問에 부쳤다.
후경은 臨賀王 蕭正德이 여러 차례 탐욕과 포학함으로 인해 죄를 지어서 몰래 決死隊를 양성하여 나라에 변고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을 알고는 徐思玉을 보내어 〈소정덕에게〉 편지를 전하기를,
“天子의 연세가 많고 간악한 신하가 나라를 어지럽히니,
저는 비록 민첩하지 못하지만 스스로 힘을 보태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소정덕이 크게 기뻐하며 답장을 보내기를 “내가 조정의 안을 맡고 公이 조정의 밖을 맡으면 어찌 이루지 못할 일이 있겠소. 일의 기회는 신속함에 달려 있으니, 지금이 바로 그때요.”라고 하였다.
目
【目】 合州刺史 鄱陽王 蕭範이 몰래 侯景이 모반할 것이라고 啓文을 올렸는데,
注+① 梁나라는 合肥에 合州를 설치하였다. 朱异가 필시 그럴 리가 없다고 하니, 梁主(蕭衍)가 이에 소범에게 답장하기를 “후경이 외롭고 위태로워 목숨을 의지하고 있는데, 어찌 반란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소범은 다시 合肥의 군사로 후경을 토벌하게 해달라고 청하였으나 梁主가 허락하지 않았다.
주이가 소범의 使者에게 말하기를 “鄱陽王이 마침내 조정에 한 명의 빈객(侯景)을 받아들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하고, 이로부터 소범의 啓文을 다시 〈梁主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후경이 羊鴉仁을 맞이하여 함께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양아인이 그의 使者를 잡아서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주이가 말하기를 “후경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使者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얼마 뒤에 풀어서 보내주었다.
후경이 더욱 두려워하는 바가 없어 梁主에게 啓文을 올리기를 “바라건대 江西 지역을 모두 제가 총괄하도록 해주십시오. 만약 허락하지 않으시면, 곧장 갑옷으로 무장한 騎兵을 인솔하여 閩과 越로 향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梁主가 使臣을 보내어 그를 회유하였는데, 후경이 마침내 壽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中領軍 朱异, 少府卿 徐驎, 太子右衛率 陸驗, 制局監 周石珍을 주살하는 것으로 명분을 삼았으니,
注+② 驎은 離珍의 切이다.
주이 등은 모두 간사하고 아첨하며 교만하고 탐욕스러우며 君主의 눈을 가리고 권력을 농단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기 때문에 후경이 이를 핑계로 삼아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目
【目】 侯景은 臺軍(官軍)이 자신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 王偉에게 책략을 물으니, 왕위가 말하기를 “邵陵王(蕭綸)이 만일 도착하면 반드시 곤란하게 될 것이니, 동쪽으로 향하기로 결정하여 곧장 建康을 갑자기 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羊侃
臨賀王(蕭正德)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大王께서 외부에서 공격하시면 천하는 평정할 거리도 못 됩니다. 전쟁에서는 어설프더라도 신속하게 싸우는 것을 귀하게 여기니, 지금 즉시 진격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후경이 이에 사냥하러 나간다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10월에 譙州를 습격하여 刺史 蕭泰를 사로잡고
注+① 이곳의 譙州는 渦陽의 譙州가 아니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梁나라가 新昌城에 譙州를 설치하여 高塘郡, 臨徐郡, 南梁郡, 新昌郡을 관할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그 지역은 唐나라 때의 廬州와 和州 사이에 있을 것이다. 蕭泰는 蕭範의 아우이다. 歷陽을 공격하였다.
太守 莊鐵이 성을 가지고 항복하고 이어서 후경을 설득하기를, “국가가 태평한 시절이 오래되어 사람들이 전투하는 법을 익히지 않았는데, 대왕이 擧兵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안팎이 놀라 떨고 있으니, 이 기회를 틈타 속히 건강으로 진격하면 병사들은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서 큰 공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조정에서 서서히 대비하여 연약한 군사 천 명을 보내어 곧바로 采石을 점거하도록 한다면 대왕께서는 비록 정예병 100만이 있더라도 성공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경이 장철을 嚮導로 삼아서 군사를 이끌고 長江에 이르렀다. 梁主(蕭衍)가 尙書 羊侃에게 책략을 물으니,
양간이 청하기를, “2천 명의 군사로 급히 채석을 점거하고, 소릉왕에게 壽陽을 기습하여 빼앗도록 하여 후경이 나아가려 하여도 앞으로 갈 수 없도록 하고, 물러나려 하여도 소굴을 잃게 한다면 오합지졸 무리들이 저절로 무너질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目
【目】 朱异가 말하기를 “侯景은 필시 강을 건널 뜻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그 논의를 중지하니, 羊侃이 말하기를 “이제 패배하겠구나.”라고 하였다.
梁主(蕭衍)가 蕭正德을 督諸軍(都督京師諸軍事)으로 삼아서 丹陽郡에 주둔하도록 하였는데, 소정덕이 큰 배 수십 척을 보내어 갈대를 싣는다고 거짓으로 핑계를 대고 몰래 후경이 강을 건너게 해주었다.
당시에 梁主가 將軍 王質을 보내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강을 살피도록 하였는데, 臨川太守 陳昕이 啓文을 올려 “采石은 위급할 때에 반드시 중요한 鎭이 되는데, 왕질의 군대는 유약하니 잘 처리하지 못할까 염려됩니다.”라고 하니,
注+① 陳昕은 陳慶之의 아들이다. ‘恐其不能濟’는 나랏일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된다는 말이다. 梁主가 왕질을 불러들이고 진흔에게 그를 대신하도록 하였다.
왕질이 채석을 떠났는데 진흔이 아직 도착하지 않자, 후경이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하여 말하기를 “나의 일이 성공하겠구나.”라고 하고, 이에 강을 건너니, 말 수백 필과 군사 8천 명이 있었다.
目
【目】 侯景이 朱雀桁의 남쪽에 이르렀는데, 太子는 여전히 蕭正德의 마음을 모르고서 宣陽門을 지키게 하였다. 庾信이 朱雀門을 지키고 있다가 大桁(배다리)을 열어서 적의 예봉을 꺾고자 하였는데, 소정덕이 저지하였다.
얼마 뒤에 후경이 도착하자, 유신이 무리를 이끌고 大桁을 열고서 후경의 군대를 보니, 모두 철가면을 착용하고 있었다.
드디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자, 소정덕의 무리가 다시 大桁을 닫고 후경을 건너게 하여 소정덕이 무리를 이끌고 후경을 맞이하였다. 후경의 군대가 승세를 타고 대궐 아래에 도착하니, 성안에서는 두려워하였다.
羊侃이 거짓으로 화살에 날려온 편지를 받았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邵陵王과 西昌侯의 구원병이 이미 가까운 길에 도착하였다.”라고 하니, 무리들이 이에 조금 안정을 찾았다.
注+① 邵陵王 蕭綸의 군대는 당시에 이미 강을 건너 鍾離로 향하였고, 西昌侯 蕭淵藻는 당시에 京口를 수비하고 있었다.
目
【目】 羊侃이 말하기를 “내보내는 군사가 만약 적으면 적을 쳐부수기에 충분하지 않아 다만 銳氣가 꺾일 것이고, 〈내보내는 군사가〉 만약 많은데도 하루아침에 유리함을 잃게 되면 문은 좁고 다리는 작아서 반드시 크게 군사를 망실한 데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하니,
朱异 등이 따르지 않고서 1천여 명의 군사를 시켜서 나가 싸우도록 하였는데, 선봉이 아직 交戰을 하지 않았는데도 물러나서 달아나 다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다가 물에 빠져서 죽은 군사가 태반이었다.
양간의 아들 羊鷟이 侯景에게 사로잡혀서, 그를 데리고 양간에게 보이자,
注+① 鷟은 士角의 切이다. 양간이 말하기를 “나는 宗族을 모두 동원하여 主君에게 보답해도 오히려 부족할까 한스러운데, 어찌 아들 하나를 따지겠소. 일찍 그를 죽이기를 바라오.”라고 하였다.
며칠 있다가 다시 데리고 오자, 양간이 활을 당겨서 그를 쏘니, 후경은 그가 충성스럽고 의롭다고 여기고 역시 양작을 죽이지 않았다.
目
【目】 11월 초하루에 蕭正德이 皇帝의 자리에 오르고, 侯景을 丞相으로 삼았다. 후경이 東府를 공격한 지 3일 만에 승리하고서 소리 높여 말하기를 “梁主(蕭衍)는 이미 죽었다.”라고 하니, 비록 성안에 있는 사람이라도 역시 그렇게 믿었다. 太子가 梁主에게 성을 순시할 것을 청하니, 〈梁主가 순시하자〉 군중의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江子一이 패배하고 돌아오자 梁主가 그를 질책하였는데, 강자일이 절을 하고 사죄하며 말하기를 “臣은 몸을 나라에 바치고 항상 죽을 자리를 얻지 못할까 두려워하였는데, 지금 거느리던 부하가 모두 신을 버리고 떠났으니, 신이 혼자 몸으로 어찌 적을 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 적이 마침내 이곳에 이른다면 신은 맹세코 몸을 부수어 이전의 죄를 속죄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자신의 아우인 左丞 江子四, 東宮主帥 江子五와 함께 휘하의 군사 100여 명을 이끌고 문을 열고 나가 싸웠는데, 강자일이 곧바로 적의 진영에 이르러 지름길로 앞으로 나가 적들을 공격하였으나 따르던 군사들이 감히 뒤를 잇지 못하자, 적들이 강자일의 어깨를 베어서 죽였다.
강자사와 강자오가 서로 말하기를 “형님과 함께 나왔는데, 무슨 면목으로 혼자 돌아가겠는가.”라고 하고, 모두 투구를 벗고 적진으로 달려가서 죽었다.
目
【目】 侯景이 예전에 建康에 도착해서는 조만간에 함락할 수 있다고 여겨 號令이 엄정하였으니, 병졸들이 감히 함부로 행동하지 못하였는데, 누차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자 인심이 흩어지고 기가 꺾였다.
후경은 구원병이 사방에서 모여들면 하루아침에 궤멸될까 두려웠고, 또 군대 안에서는 군량이 모자라 마침내 군사를 풀어서 백성들의 쌀과 금, 비단 및 자녀들을 약탈하였다.
이후로는 쌀 한 되가 7, 8만 錢에 이르렀으며, 사람들이 서로 잡아먹고 굶어 죽는 사람이 열에 대여섯이었다.
후경이 군사와 백성을 내몰아 성 동쪽과 서쪽에 土山을 쌓았는데, 지치고 여윈 사람들을 죽여서 산을 메우니, 통곡 소리가 땅을 울렸다.
성안에서도 역시 土山을 쌓아서 이에 대응하였는데, 太子와 宣城王(蕭大器) 이하는 모두 직접 흙을 지고 삼태기와 가래를 잡고서
注+① 畚의 음은 本이니, 흙을 담는 것이다. 鍤은 가래이다. 土山 위에 4丈 높이의 망루를 세웠고, 결사대 2천 명을 모아서 두 土山에 분배하여 밤낮으로 교전을 하였다.
注+② 두 山은 동쪽의 土山과 서쪽의 土山이다.
마침 큰 비가 내려서 성안에 있는 土山이 무너지자, 적들이 그 틈을 타고 곧바로 들어왔는데, 羊侃이 횃불을 많이 던지게 해서 거대한 불길을 만들어서 적들의 진로를 차단하고 서서히 안에서 성을 쌓으니, 적들이 전진할 수가 없었다.
注+③ ‘擲火爲城’이 ≪資治通鑑≫에는 ‘擲火爲火城’으로 되어 있다.
후경이 노예로 항복한 사람들을 모아서 모두 면천하여 良民으로 만들어주니, 이에 여러 노예들 중에서 나가서 후경에게 간 사람이 천 명을 헤아릴 정도였으며, 사람마다 은혜에 감동하여 후경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目
【目】 侯景이 쌓는 土山이 조금씩 성의 망루에 가까워오자, 將軍 柳津이 명을 내려 땅속에 길을 만들어서 토산의 흙을 가져오도록 하니, 토산이 무너져서 적들을 압사시켜 모조리 죽였다.
注+① 柳津은 柳仲禮의 아버지이다. ≪資治通鑑≫에는 ‘山’자 위에 ‘外’자가 있다.
또 성안에 飛橋(高空 橋梁)를 만들어서 두 개의 土山 위에 묶어서 걸자, 후경의 군사가 모두 달아났는데,
注+② 罩(그물)는 陟敎의 切이다. 세상 사람들이 ‘魚罩’라고 하는데, 위로부터 아래로 대바구니를 짜서 ‘罩’를 만든다. 횃불을 던져 동쪽 土山의 망루와 목책을 불태워 모두 없애니, 적들의 시신이 매우 많았다.
적들이 다시 玄武湖에 있는 물을 끌어다 臺城에 물을 대니, 궐문 앞은 모두 물바다가 되었다.
注+③ 玄武湖는 建康 上元縣 북쪽 10리쯤에 있다.
陳昕이 후경에게 사로잡혔는데, 〈후경이〉 진흔을 이용하려고 하자, 진흔이 안 된다고 하니, 후경이 그의 무리인 范桃棒을 시켜서 〈진흔을〉 가두게 하였다.
진흔이 그로 인해 범도봉을 설득하여 그에게 王偉와 宋子仙을 죽이고 항복하도록 하니, 범도봉이 그 말을 따라 몰래 진흔을 보내어 밤에 줄을 타고 성안으로 들어가도록 하였다.
梁主(蕭衍)가 크게 기뻐하여 銀에다 새긴 증표를 범도봉에게 하사하여 王에 책봉하고 후경의 군사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注+④ 鐫은 子全의 切이니, 조각하며 아로새긴다는 뜻이다. 券은 묶으며 맨다는 뜻이니, 서로 약속하고 결합한 것을 확고히 한 것이니, 은으로 만든 것이다. 太子가 범도봉이 거짓으로 항복을 한 것인지 두려워 公卿을 불러서 마침 회의를 하였는데,
朱异와 傅岐가 말하기를 “범도봉의 항복은 필시 거짓이 아닐 것입니다. 범도봉이 이미 항복하였으니, 역적 후경은 필시 놀랄 것입니다. 이를 틈타서 공격하면 크게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태자가 말하기를, “우리가 굳게 성을 지켜 외부의 구원병을 기다리는 것이 완전히 온전한 계책이니, 지금 성문을 열고 범도봉을 받아들였다가 만일 변고가 생기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소.”라고 하였다. 주이가 가슴을 치며 말하기를 “기회를 잃었으니, 社稷은 끝이 났구나.”라고 하였다.
얼마 후에 범도봉의 일이 발각되어 후경이 그를 체포하여 죽였는데, 진흔은 이 일을 알지 못하고 기일에 맞춰 나왔다.
후경이 그를 핍박하여 편지를 성안으로 쏘게 하여 이르기를 “범도봉이 지금 먼저 들어간다.”라고 하고, 그로 인해 후경이 옷 속에 갑옷을 입고 〈진흔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진흔이 거부하여 기필코 죽으려고 하자, 후경이 마침내 그를 죽였다.
目
【目】 蕭綸이 군대를 玄武湖로 전진시키고 〈侯景과〉 대치하고 싸우지 않다가, 저녁에 이르러 후경이 다음 날 만나서 싸우기로 다시 약속하니, 소륜이 허락하였다.
安南侯 蕭駿이 후경의 군대가 퇴각하는 것을 보고는 달아나는 것으로 여기고 즉시 壯士들과 추격하였는데,
注+① 晉 武帝(司馬炎)때에 江安을 나누어 安南縣을 설치하였다. 蕭駿은 蕭懿의 손자이다. 후경이 군대를 돌려 그들을 공격하자 소준이 패배하여 달아나 소륜의 군대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후경이 승세를 타고 그들을 추격하니, 여러 군대가 모두 무너졌다.
소륜이 朱方으로 달아나니,
注+② 丹徒는 春秋時代에 朱方 지역인데, 당시에 蘭陵 武進縣이 되었다. 후경이 西豐公 蕭大春과 主帥 霍俊 등을 사로잡아 돌아와서 성 아래에 이르러 사람을 보내 “邵陵王(蕭綸)이 이미 亂軍에게 죽임을 당하였다.”라고 말하도록 시켰는데,
注+③ 沈約의 ≪宋書≫ 〈州郡志〉에 “西豐縣은 臨川郡에 속하니, 吳나라가 세웠다.”라고 하였다. 蕭大春은 蕭大器의 아우이다.
곽준이 홀로 말하기를 “소릉왕이 조금 불리해졌지만, 이미 모든 군사가 京口로 돌아왔으니, 성안에서 다만 굳게 지키기만 하면 구원병이 곧 도착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적이 칼로 곽준의 등을 가격하자, 곽준의 말과 얼굴빛이 더욱 사나워졌는데, 蕭正德이 그를 죽였다.
目
【目】 梁主(蕭衍)가 衡州刺史 韋粲을 불러 散騎常侍로 삼고, 歐陽頠(구양외)를 監州事로 삼았다.
注+① ≪五代志≫를 살펴보면 “梁나라에서 南海郡 含滙縣에 衡州를 두었다.”라고 하였다. 韋粲은 韋放의 아들이다. 頠는 魚毁의 切이다.
위찬은 廬陵에 도착하여 〈侯景이〉 난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부하를 선발하여 날랜 정예병 5천을 얻어서 두 배의 속도로 〈행군하여〉 구원하러 갔다.
豫章에 도착하여 후경이 이미 강을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는 内史 劉孝儀에게 가서 문의하였는데, 유효의가 말하기를 “필시 이와 같다면 당연히 勅令이 있어야 하는데, 아마도 그렇지 않은 듯하오.”라고 하였다.
유효의가 술자리를 마련하자 위찬은 화를 내어 술잔을 땅에 던지면서 말하기를 “적이 이미 강을 건넜다면 곧장 궁궐을 압박하여 수로와 육로를 모두 차단했을 것인데, 어찌 알릴 겨를이 있었겠소. 설령 칙령이 없다고 한들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 있겠소. 나 위찬이 오늘 무슨 마음으로 술을 마시겠소.”라고 하고,
즉시 말을 달려서 군사를 배치하여 출발하려 하였는데, 마침 江州刺史 當陽公 蕭大心이 使者를 보내어 위찬을 맞이하였다.
위찬이 이에 말을 달려가서 소대심을 보고 말하기를 “江州는 京師와의 거리가 가장 가까우니,
注+② 沈約의 ≪宋書≫ 〈州郡志〉에 “江州와 京師와의 거리는 물길로 1400리이다.”라고 하였다. 殿下께서는 정리로 따져볼 때 맨 앞에 있어야 합니다.
다만 中流의 임무(江州를 맡은 임무)가 중요하여 당연히 위아래로 호응해야 하니, 지금 군대를 옮겨 湓城을 수비하게 하고 偏將을 보내어 저를 따라 가게 해주시면 충분합니다.”라고 하였다.
注+③ 湓城은 湓水의 성으로 尋陽에 있다.
소대심이 그렇다고 여겨 中兵 柳昕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고 위찬을 따르도록 하였다.
目
【目】 韋粲이 南洲에 도착하니, 外弟인 司州刺史 柳仲禮 역시 보병과 기병을 이끌고 横江에 이르렀는데, 위찬이 즉시 군량과 무기를 보내고 아울러 私財를 털어 전투 병사들에게 포상을 내렸다.
裴之高가 張公洲에서 배를 보내어 유중례를 건너게 하니,
注+① 張公洲는 蔡洲인 듯하다. 위찬과 유중례는 마침내 李孝欽, 羊鴉仁, 陳文徹과 병력을 합쳐 新林에 주둔하였다.
위찬이 논의를 하여 유중례를 추대하여 大都督으로 삼았는데, 배지고가 자신의 나이와 지위로 유중례보다 아랫자리에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였다.
위찬이 무리들에게 소리 높여 말하기를 “지금 함께 국가가 처한 어려움에 달려와 그 大義가 적을 섬멸하는 데 있으니, 柳司州를 추대하는 이유는 바로 오랫동안 변방을 지켜서 앞서 侯景에게 껄끄러운 대상이 되었고, 또 병사와 말이 精銳라 그보다 앞서는 자가 없기 때문이오.
만일 나이와 지위를 논하자면 모두 나 위찬의 아래에 있으나 다만 社稷을 위한 계책이니, 다시 논의해서는 안 되오. 지금의 상황에서는 將帥 사이의 화합이 중요하니, 만약 마음이 같지 않으면 大事는 실패할 것이기에 나 위찬이 여러 군대를 위하여 배지고에게 해명하기를 청하는 것이오.”라고 하였다.
目
【目】 이에 배 한 척으로 裴之高의 진영으로 가서 매우 질책하며 말하기를 “지금 二宮(황제와 태자)이 위태롭고 핍박을 받아 교활한 도적들의 죄악이 매우 크니, 신하들이 당연히 마음을 합쳐야 하는데, 어찌 스스로 모순되는 행동을 서로 해서야 되겠소.
豫州(裴之高)가 반드시 다른 마음을 먹으려 한다면 창끝과 화살촉이 곧장 예주에 향할 것이오.”라고 하였다.
注+① ≪韓非子≫에 “창과 방패를 파는 사람이 말하기를 ‘내 창은 예리하여 뚫지 못하는 물건이 없소.’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내 방패는 견고하여 어떤 물건도 뚫을 수가 없소.’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그대의 창으로 그대의 방패를 뚫는 것이 가능하오?’라고 하니, 팔던 사람이 대답하지 못했다.”라고 하였는데, 후세에 矛楯의 설은 여기에 근원을 둔다. ‘鋒鏑便有所歸’는 裴之高를 공격할 것을 말한다. 배지고가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고 마침내 柳仲禮를 추대하여 大都督으로 삼았다.
宣城内史 楊白華가 그의 아들을 보내어 군대를 이끌고 뒤따라 이르게 하니, 지원군이 크게 모여 무리가 10여만 명이었다.
侯景은 배지고의 동생과 조카와 아들과 손자를 인질로 잡아 군영 앞에 늘어세우고 가마솥과 칼과 톱을 그 뒤에 놓고 말하기를 “裴公(배지고)이 항복하지 않으면 지금 바로 이들을 삶아버리겠소.”라고 하였다. 배지고는 활을 잘 쏘는 병사를 불러서 그의 아들을 쏘게 하였는데 맞추지 못했다.
유중례가 밤중에 위찬의 군영에 들어가서 여러 군대를 배치하고서
注+② 〈‘柳仲禮以晦夜入韋粲營’이〉 ≪資治通鑑≫에는 ‘丙辰晦柳仲禮夜入韋粲營’으로 되어 있다. 다음 날 전투를 치를 적에 장수들이 각각 점거하여 지키는 곳이 있었다.
위찬을 시켜서 靑塘에 주둔하도록 하였는데,
注+③ 青塘은 바로 青溪塘이다. 위찬이 청당은 石頭로 들어가는 길에 해당하니, 적들이 반드시 그 길을 다툴 것이라고 생각하여 매우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유중례가 말하기를 “청당은 요충지라 형이 아니면 지킬 수가 없으니, 만약 군사가 적다고 의심된다면 다시 군대를 보내어 돕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하고, 마침내 直閣將軍 劉叔胤을 시켜서 위찬을 돕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