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九年이라
秦建元二十年이라 ◑ 燕世祖慕容垂元年이라 ◑ 後秦太祖姚萇白雀元年이라 ◑ 舊大國一이요 新大國二 凡三僭國이라
春正月 慕容垂自稱燕王하고 大破秦兵하여 斬其將石越하다
正月朔 長樂公丕 大會賓客하고 請慕容農不得하여 始覺有變하고 遣人四出求之하여 乃知其在列人하여 已起兵矣러라
慕容鳳 勸翟斌奉垂爲盟主한대 從之어늘 垂至洛陽하니 平原公暉 閉門拒之
勸垂稱尊號한대 垂曰 新興侯 吾主也 當迎歸反正耳注+① 新興侯, 故燕主暐也. 秦封爲新興侯, 時在長安.리라
垂以洛陽四面受敵이라하여 欲取鄴而據之하여 乃引兵東至滎陽하니 群下固請上尊號
垂乃稱燕王하고 立統府하여 行事하고 封德爲范陽王하고 楷爲太原王하고 翟斌爲河南王注+① 燕本封德爲范陽王, 今復其故. 楷, 恪子也. 恪封太原王, 今令楷襲父爵.하고 帥衆二十餘萬하여 自石門濟河하여 長驅向鄴한대
而農 亦驅列人居民爲卒하여 斬桑榆爲兵하고 裂襜裳爲旗注+② 襜, 昌占切, 衣蔽前也.하고 使趙秋 說屠各及東夷, 烏桓하여 各帥部衆數千赴之하여
攻破館陶하고 收其軍資器械하고 取康臺牧馬數千匹注+③ 館陶縣, 漢屬魏郡, 魏․晉屬陽平郡. 魏收地形志, 廣平郡平恩縣有康臺澤.하니 於是 歩騎雲集하여 衆至數萬이라
推農爲驃騎大將軍하여 監統諸將한대 隨才部署하니 上下肅然이러라
農以垂未至라하여 不敢行賞하니 趙秋曰 軍無賞이면 士不往注+① 言無賞以奬激之, 則士不往赴戰也.이라 今之來也 皆欲建功規利注+② 規, 圖也.하니 宜承制封拜하여 以廣中興之基니이다 從之하니
於是 赴者相繼 號令整肅하여 軍無私掠하니 士女喜悅注+③ 軍無私掠, 言其軍不敢掠居民而私其物.이리라
長樂公丕 使石越討之한대 農曰 越 有智勇之名이러니 今不南拒大軍而來此하니 畏王而陵我也 必不設備리니 可以計取之注+① 王, 謂慕容垂.니라
請治列人城한대 農曰 今起義兵 唯敵是求 當以山河爲城池 何列人之足治也리오
至列人西어늘 農參軍趙謙 請急擊之한대 農曰 彼甲在外하고 我甲在心注+① 士心欲闘, 則雖無甲冑, 而勇於赴戰, 故曰甲在心.이라 晝戰則士卒 見其外貌而憚之하리니 不如待暮擊之 可以必克이라하고 令戰士嚴備以待하고 毋得妄動하다
立柵自固어늘 笑曰 越 兵精士衆이어늘 不乗其初至之銳以擊我하고 方更立柵하니 吾知其無能爲也로라
向暮 鼓譟出하여 陳于城西하다 牙門劉木 帥壯士四百하고 騰柵而入한대 督大衆隨之하여 大敗秦兵하고 斬越하다
越與毛當 皆秦驍將이러니 相繼敗没하니 秦人 騷動하여 盜賊群起注+① 騷, 愁也, 擾也.러라
垂至鄴하여 改元하고 服色朝儀 皆如舊章하니 引兵會하다
垂遂立世子寶爲太子하고 封拜王公百餘人하다
丕使姜讓誚讓垂한대 垂曰 孤受主上不世之恩이라 欲安全長樂公하여 使赴京師然後 修復舊業하여 永爲隣好注+① 京師, 謂長安也.하노니 若不以鄴城見歸 當窮極兵勢 恐單馬求生이나 亦不可得也하노라
厲色責之曰
將軍 不容於家國하여 投命聖朝하니 燕之尺土 將軍 豈有分乎注+① 分, 扶問切.리오
主上 與將軍風殊類别이로되 一見傾心하여 親如宗戚하고 寵踰勳舊注+② 風殊類別, 言氐處關西, 鮮卑在東北, 旣不同風, 族類又別也.어늘
一旦 因王師小敗하여 遽有異圖하니 長樂公 受分陝之任이라 寧可束手하여 輸將軍以百城之地乎注+③ 受分陝之任, 以丕比周公․召公也.리오
將軍 欲裂冠毁冕인댄 自可極其兵勢注+④ 左傳 “晉率陰戎伐潁, 景王使詹桓伯辭於晉曰 ‘我在伯父, 猶衣服之有冠冕, 木水之有本原, 民人之有謀主也. 伯父若裂冠毁冕, 拔本塞原, 專棄謀主, 雖戎狄, 其何有余一人.’”어니와
但惜將軍 以七十之年으로 懸首白旗하고 高世之忠으로 更爲逆鬼耳注+⑤ 武王斬紂首, 懸於大白之旗.로라 垂黙然이러라
左右請殺之한대 垂曰 彼各爲其主耳 何罪리오하고 禮而歸之하고 上秦王堅表하여 請送丕歸長安한대 堅怒하여 復書切責之하니라
遣將軍劉牢之하여 伐秦하여 拔譙城하고 桓沖 伐秦하여 拔魏興, 上庸, 新城하다
◑ 二月 荆江都督豐城公桓沖하다
聞謝玄等有功하고 自以失言이라하여 慙恨成疾而卒이어늘 諡曰宣穆注+① 失言, 謂去年吾其左衽之言也.이라하다
朝議欲以玄爲荆江刺史하니 謝安 自以父子名位太盛하고 又懼桓氏失職怨望하여 乃以桓石民爲荆州하고 桓石虔爲豫州하고 桓伊爲江州注+② 石虔, 溫之弟子也.하다
燕王垂 圍鄴하다
燕王垂 攻鄴하여 拔其外郭한대 長樂公丕 退守中城이어늘 垂築長圍守之하니 關東六州郡縣 多降於燕이라
秦征東府官屬 疑參軍高泰有貳心注+① 符丕爲征東大將軍. 泰先仕燕, 慕容垂以爲從事中郞.하니 泰懼하여 與同郡吳韶 逃歸勃海注+② 泰與韶, 皆勃海人也.러니
韶曰 燕軍 近在肥鄉하니 宜從之注+③ 晉志 “肥鄕縣屬廣平郡.”니라 泰曰 吾以避禍耳 去一君事一君 吾所不爲也로라
擊秦枋頭館陶하여 取之하다
燕范陽王德 擊秦枋頭하여 取之하고 東胡王晏 據館陶하여 爲鄴中聲援하니 夷夏不從燕者 亦尙衆이라
燕王垂 遣太原王楷하여 與陳留王紹 擊之한대 楷謂紹曰 今大業始爾 人心未洽하니 唯宜綏之以德이요 不可震之以威라하고 乃屯于辟陽注+① 魏收地形志, 長樂郡信都縣, 有辟陽城.하다
紹帥騎數百하고 往說王晏한대하니 於是 民夷降者數十萬口
楷留其老弱하여 置守宰以撫之하고 發其丁壯十餘萬하여 與晏詣鄴하니 垂大悅曰 汝兄弟才兼文武하니 足以繼先王矣注+① 言足以繼慕容恪也.로다
三月 以謝安爲太保하다
爲秦北地長史注+① 泓, 暐之弟也.러니 聞燕王垂攻鄴하고 亡奔關東하여 收集鮮卑하여 還屯華陰하니 其衆 遂盛이어늘 自稱雍州牧하다
秦王堅 謂權翼曰 不用卿言하여 使鮮卑至此하니 關東之地 吾不復爭이라 將若泓何
乃使廣平公熙 鎭蒲坂하고 徴鉅鹿公叡하여 都督中外諸軍事하여 配兵五萬하고 以竇衝爲長史하고 姚萇爲司馬하여 以討泓注+② 煕․叡, 皆堅之子也.하다
平陽太守 慕容沖 亦起兵於平陽하여 進攻蒲坂이어늘 使竇衝討之하다 聞秦兵且至하고하여 帥衆將奔關東이러니 叡麤猛輕敵이라
欲馳兵邀之어늘 姚萇 諫曰 鮮卑皆有思歸之志 起而爲亂하니 宜驅令出關이요 不可遏也
夫執鼷鼠之尾에도 猶能反噬於人이니 但可鳴鼓隨之 彼將奔敗不暇矣리이다 叡弗從하고 與戰이라가 果敗見殺하다
遣其長史하여 詣堅謝罪한대 怒殺之하니하여 奔渭北馬牧注+① 馬牧, 牧馬之地, 猶漢之牧苑也.하다
於是 天水尹緯, 尹詳, 南安龎演等 糾扇羌豪五萬餘家하여 推萇爲盟主하니 自稱秦王하고 進屯北地한대 羌胡降者 十餘萬이러라
秦符定符紹 以信都高城降燕注+① 定, 堅之從叔, 以信都降. 紹, 堅之從弟, 以高城降.하다
◑ 秦 遣兵擊慕容沖하여 破之하니 奔華陰이어늘 遂逼長安하다
秦竇衝 擊沖破之하니 奔華陰이러라
泓衆 至十餘萬이러니 遣使謂秦王堅曰 吳王 已定關東하니 可速備大駕하여 送家兄皇帝하여 還鄴都하라 與秦以虎牢爲界注+① 暐, 泓之兄也.호리라
大怒하야 召慕容暐하여 責之曰 卿之宗族 可謂人面獸心이라 不可以國士期也라하고 命暐以書招諭泓․沖及垂한대
暐密遣使하여 謂泓曰 吾 籠中之人이니 必無還理 且燕室之罪人也 不足復顧注+② 暐不能保燕之社稷, 故自謂爲罪人. 汝勉建大業하여 聽吾死問이어든 便卽尊位하라
於是 進向長安이러라
竟陵太守趙統 伐襄陽克之하고 梁州刺史楊亮 帥兵伐蜀하여 屯巴郡하다
◑ 五月 秦洛州刺史張五虎 據豐陽하여 來降注+① 符秦初以洛州刺史鎭陝城, 荊州刺史鎭豐陽, 旣得襄陽, 以爲荊州, 徙洛州於豐陽. 豐陽, 漢上洛縣地也.하다
◑ 六月 崇德太后褚氏崩하다
◑ 秦王堅 擊後秦敗之하다
後秦王萇 進屯北地注+① 姚萇書後秦, 以別於符秦也.하니 秦華陰, 北地, 新平, 安定羌胡降之者 十餘萬이라
秦王堅 自帥歩騎二萬以擊之하니 後秦兵 屢敗하고 軍中無井이라
秦人 塞安公谷하여 堰水以困之하니 有渴死者注+② 胡三省曰 “安公谷, 在今耀州界.”러니 天大雨하여 後秦營中 水三尺이요 營外 寸餘而已
後秦軍 復振하니 嘆曰 天亦祐賊乎아하니라
燕諸將 殺慕容泓하고 立沖爲皇太弟하다
慕容泓謀臣高蓋等 以泓德望不如沖하고 且持法苛峻이라하여 乃殺泓하고 立沖爲皇太弟하여 承制行事하고 置百官하니
後秦王萇 遣其子嵩하여 爲質於沖하여 以請和注+① 欲連兵以斃秦, 且畏沖兵之彊也하다
燕將軍慕容麟 拔常山, 中山하고 慕容沖 大破秦兵하고 遂據阿房城하다
秦平原公暉 帥洛陽․陝城之衆七萬하여 歸于長安하니 秦王堅 聞沖去長安浸近하고 乃引兵歸하여 遣暉拒沖하여 戰於鄭西러니 大破之하여 遂據阿房城注+① 卽秦之阿房宮城.하다
秋七月 秦梓潼太守壘襲 以涪城來降注+① 壘襲, 姓名.하다
◑ 葬康獻皇后하다
◑ 燕 殺丁零翟斌하다
翟斌 恃功驕縱하여 邀求無厭注+① 厭, 於鹽切.하고 又以鄴城久不下라하여 潛有貳心이어늘 太子寶請除之한대 燕王垂曰
河南之盟 不可負也注+② 斌引兵會垂於洛陽, 垂與之盟, 蓋在河南縣. 若其爲難 罪由於斌注+③ 難, 去聲.이라 今事未有形而殺之 人必謂我忌其功能하리니
吾方收攬豪傑以隆大業하노니 不可示人以狹하여 失天下之望이라 藉彼有謀라도 吾以智防之리니 無能爲也注+④ 藉, 借也.리라
果密與秦長樂公丕 通謀라가 事覺하니 垂殺之하다
秦呂光 大敗龜兹하고 入據其城하다
龜兹王帛純 窘急하여 重賂獪胡以求救注+① 呂光自去年進軍, 攻龜玆. 獪, 音卦. 獪胡, 蓋又在龜玆之西.어늘 獪胡王 引諸國兵七十餘萬以救之러니 呂光 與戰大破之하니 帛純 出走
入其城하니 城如長安하여 市邑宮室 甚盛이라 撫寧西域하니 威恩甚著하여 遠方諸國前世所不能服者 皆來歸附러라
立帛純弟震하여 爲龜兹王하다
八月 燕王垂 解鄴圍하고 趨新城하다
燕王垂 以鄴城猶固라하여 會僚佐議之한대 右司馬封衡 請引漳水灌之어늘 從之注+① 衡, 裕之子也.하다
垂行圍라가 因飲於華林園注+② 行, 按行也. 洛都․鄴都皆有華林園, 鄴之華林, 則魏武所築也.이러니 秦人 密出兵掩之하여 矢下如雨하니
垂幾不得出이라가 冠軍隆 將騎衝之하여 垂僅而得免注+③ 冠軍隆, 冠軍將軍慕容隆.하다
至是 鄴中芻糧俱盡하여 削松木以飼馬러니
垂曰 符丕必無降理하니 不如開丕西歸之路하여 以謝秦王疇昔之恩이라하고 乃解圍하여 趨新城注+① 新城, 卽肥鄕之新興城也.하다
遣慕容農하여 徇淸河平原하여 徴督租賦한대 明立約束하여 均適有無하고 軍令 嚴整하여 無所侵暴하니
由是 榖帛屬路하여 軍資豐給注+② 屬, 音燭.이러라
太保安 奏請乗符氏傾敗하여 開拓中原한대 以玄爲前鋒都督하여 帥桓石虔等하여 伐秦하다
至下邳하니 秦徐州刺史趙遷 棄彭城走어늘 進據之하다
使彭城内史劉牢之 攻秦兗州刺史張崇하니 棄鄄城奔燕이어늘
牢之據鄄城하니 河南城堡 皆來歸附러라
加太保安都督十五州諸軍事하고 假黄鉞注+① 十五州, 蓋楊․徐․南徐․兗․南兗․豫․南豫․江․靑․冀․幽․幷․司․荊․雍也.하다
◑ 慕容沖 進逼長安하다
◑ 冬十月朔 日食하다
◑ 謝玄 遣兵攻秦青州하여 降之하다
◑ 燕慕輿文 殺劉庫仁하다
庫仁 欲救符丕하여 發雁門, 上谷, 代郡兵하여 屯繁畤러니
燕慕輿句之子文 在庫仁所하여 知三郡兵不樂遠征하고 因作亂하여 夜攻庫仁殺之하고 竊其駿馬하여 奔燕하니 庫仁弟頭眷 代領部衆하다
加謝玄都督七州軍事하다
秦長樂公丕 進退路窮하여 謀於僚佐하니 司馬楊膺 請自歸於晉이어늘 丕未許하다
謝玄 遣劉牢之等하여 據碻磝하고 郭滿 據滑臺하고 顔肱劉襲 軍于河北하여 克黎陽注+① 碻, 丘交切. 磝, 牛交切. 碻磝城, 北郡治所, 沿河要地也. 滑臺, 漢之白馬․唐之滑州也. 河北, 滑州之北岸也.하니
丕懼하여 乃遣參軍焦逵하여 致書於玄하여 稱欲假途求糧하여 西赴國難한대
逵與參軍姜讓으로 密告楊膺하여 改書爲表하여 許以王師之至 當致身南歸라하고
且議丕若不從이면 則逼縛與之하다
於是 遣晉陵太守滕恬之하여 渡河守黎陽하니 朝廷 以兗青司豫旣平이라하여 加玄都督徐兗青司冀幽幷州諸軍事하다
後秦王萇 攻新平하다
後秦王萇 聞慕容沖攻長安하고 會群僚하여 議進止하니 皆曰 宜先取長安하여 建立根本然後 經營四方이니이다
萇曰 燕人 因其衆思歸以起兵하니 若得志 必不久留關中이라 吾當移屯嶺北하여 廣收資實하여 以待秦亡燕去然後 拱手取之耳注+① 嶺北, 謂九嵕之北. 凡新平․北地․安定之地, 皆是也.라하고
乃留長子興하여 守北地하고 自將其衆하여 攻新平하다
新平人 殺其郡將이어늘 秦王堅 缺其城角以恥之注+① 石虎之末, 淸河崔悅爲新平相, 爲郡人所殺. 悅子液仕堅, 爲尙書郞, 自表“父仇不同天地, 請還冀州.” 堅愍之, 禁錮新平人, 缺其城角以恥之.하니 新平民望 深以爲病하여 欲立忠義以雪之注+② 民望, 郡之賢豪, 爲一郡所宗嚮者. 病, 猶言恥也.하다
及萇至 太守苟輔欲降注+① 輔, 氐也, 秦之外戚.하니 郡人馮傑等 諫曰 昔 田單 以一城存齊러니 今秦 猶連城過百하니 奈何遽爲叛臣乎잇가
輔喜曰 此吾志也로되 但恐久而無救하여 郡人横被無辜러니 諸君能爾하니 吾豈顧生哉리오 於是 憑城固守한대
後秦 爲土山地道어늘 輔亦於内爲之하여 或戰地下하고 或戰山上하니 後秦之衆 死者萬餘人이라
輔詐降以誘萇하니 將入城이라가 覺之而返이어늘 輔伏兵邀擊하여 幾獲之하고 又殺萬餘人하다
十二月 殺其新興侯慕容暐하다
鮮卑在長安城中者 猶千餘人이라 慕容肅 與慕容暐 謀伏兵殺堅이라가 事覺注+① 肅, 紹之兄也.하니 召暐․肅曰 吾相待何如완대 而起此意 肅曰 家國事重하니 何論意氣注+② 意氣, 謂堅相待之厚.리오
乃幷鮮卑하여 無少長男女 皆殺之하다 燕王垂幼子柔 與太子寶之子盛으로 乗間得出하여 奔慕容沖하다
燕王垂 復圍鄴하니 謝玄 遣劉牢之救之하고 且饋之粟하다
注+① 梁州之地, 自此復歸于晉.하다


【綱】 晉나라(東晉) 烈宗 孝武皇帝 太元 9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20년이다. 燕나라(後燕) 世祖 慕容垂의 燕元 원년이다. 後秦 太祖 姚萇의 白雀 원년이다. 예전의 큰 나라(前秦)가 하나이고, 새로 생긴 큰 나라(後燕․後秦)가 둘이니, 합하여 僭國이 셋이다.
【綱】 봄 정월에 慕容垂가 스스로 燕王을 칭하고 秦나라(前秦) 군대를 대파하여 그 장수 石越을 참수하였다.(後燕의 건국)
【目】 정월 초하루에 長樂公 符丕가 賓客들을 크게 모으고 慕容農을 초청하였으나 사람을 보지 못하였다. 비로소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사람을 사방으로 내보내어 찾게 하고서 마침내 그가 列人縣에 있으면서 이미 군대를 일으켰음을 알았다.
慕容鳳이 翟斌에게 권하여 慕容垂를 받들어 盟主로 삼게 하였는데, 적빈이 그의 말을 따랐다. 모용수가 洛陽에 이르니, 平原公 符暉가 문을 닫고 막았다.
적빈이 모용수에게 尊號를 칭할 것을 권하였는데, 모용수가 말하기를 “新興侯는 나의 군주이니, 마땅히 그를 영접하여 돌아와 다시 帝位에 올려야 한다.” 하였다.注+① 新興侯는 옛 燕나라(前燕) 군주인 慕容暐이다. 秦나라가 그를 封하여 신흥후를 삼았는데, 이때 長安에 있었다.
【目】 慕容垂는 洛陽이 四面으로 적의 침공을 받을 수 있다 하여 鄴城을 취하여 의거하고자 하였다.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滎陽에 이르니, 여러 부하들이 모용수에게 尊號를 올려 이를 칭할 것을 굳게 청하였다.
모용수는 마침내 燕王을 칭하고 統府를 세워 制命을 받들어 일을 행하였다. 그리고 慕容德을 봉하여 范陽王으로 삼고 慕容楷를 太原王, 翟斌을 河南王으로 삼고는注+① 燕나라는 본래 慕容德을 봉하여 范陽王으로 삼았는데, 이제 옛 칭호를 회복한 것이다. 慕容楷는 慕容恪의 아들이다. 모용각을 太原王에 봉했는데, 이제 모용해로 하여금 아버지의 작위를 세습하게 한 것이다. 20여 만의 병력을 인솔하고서 石門으로부터 河水를 건너 말을 몰아 鄴城을 향하여 곧장 나아갔다.
그런데 이때 慕容農도 列人縣에 거주하는 백성을 몰아 병졸을 삼고, 뽕나무와 느릅나무를 베어 병기로 삼고, 옷의 앞자락과 치마를 잘라 깃발을 삼고는注+② 襜은 昌占의 切이니, 앞을 덮어 가리는 옷이다. 趙秋를 보내서 屠各族과 東夷族, 烏桓族을 설득하여 각각 部落의 무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달려오게 하였다.
그리하여 館陶를 격파하고 군수물자와 兵器를 거두었으며, 康臺에서 사육하는 말 수천 필을 빼앗으니,注+③ 館陶縣은 漢나라 때에는 魏郡에 속하였고, 魏나라와 晉나라 때에는 陽平郡에 속하였다.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의하면 廣平郡의 平恩縣에 康臺澤이 있다. 이에 보병과 기병이 구름 떼처럼 모여 무리가 수만 명에 이르렀다.
모용농을 추대하여 驃騎大將軍으로 삼아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여 다스리게 하자, 모용농이 재주에 따라 部署를 정하니,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位階가 엄숙해졌다.
【目】 慕容農은 慕容垂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 하여 감히 賞을 행하지 못하니, 趙秋가 말하기를 “군대에 賞이 없으면 군사들이 달려가 싸우지 않습니다.注+① 〈‘軍無賞士不往’은〉 賞으로써 장려하고 격려함이 없으면 병사들이 가서 싸움에 달려가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이번에 올 적에 모두 공을 세워 이익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니,注+② 規는 도모함이다. 마땅히 制命을 받들어 封地를 하사하고 직위를 제수해서 中興의 기반을 넓혀야 합니다.” 하니, 모용농이 이 말을 따랐다.
이에 달려오는 자가 앞뒤로 이어졌다. 모용농은 號令이 엄숙하고 분명해서 군사들이 사사로이 노략질함이 없으니, 士女들이 기뻐하였다.注+③ ‘軍無私掠’은 군사들이 감히 거주하는 백성들을 노략질하여 그 물건을 사사로이 취하지 않음을 이른다.
【目】 長樂公 符丕가 石越로 하여금 慕容垂를 토벌하게 하자, 慕容農이 말하기를 “석월은 지혜롭고 용맹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지금 남쪽으로 大軍을 막지 않고 이곳에 왔으니, 이는 燕王을 두려워하고 나를 얕잡아본 것이다. 반드시 대비하지 않았을 것이니, 계책을 써서 패배시킬 수 있다.” 하였다.注+① 王은 慕容垂를 이른다.
【目】 여러 사람들이 列人城을 治所로 삼을 것을 청하자, 慕容農은 말하기를 “지금 義兵을 일으킴에 오직 敵을 찾아 싸워야 한다. 마땅히 山과 河水를 城과 해자로 삼아야 하니, 어찌 열인성을 치소로 삼을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石越이 列人의 서쪽에 이르자, 모용농의 參軍인 趙謙이 급히 공격할 것을 청하니, 모용농이 말하기를 “저들은 갑옷이 밖에 있고, 우리 병사들은 갑옷이 마음속에 있다.注+① 군사들의 마음이 싸우고자 하면 비록 갑옷과 투구가 없더라도 용감하게 싸움에 달려가므로 “갑옷이 마음속에 있다.” 한 것이다. 낮에 싸우면 士卒들이 그들의 겉모습을 보고 두려워할 것이므로 날이 저물기를 기다려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저녁에 공격하면 필승을 거둘 수 있다.” 하고는 戰士들로 하여금 엄하게 대비하여 기다리고 輕擧妄動하지 못하게 하였다.
【目】 石越이 木柵을 세워 스스로 견고히 하자, 慕容農이 웃으며 말하기를 “석월은 군대가 정예롭고 병사가 많은데, 처음 도착했을 때의 銳氣를 타고 우리를 공격하지 않고 다시 목책을 세우니, 나는 그가 무슨 일을 해낼 수 없음을 알겠다.” 하였다.
저물녘에 모용농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고 나가서 列人城의 서쪽에 陣을 쳤다. 牙門 劉木이 壯士 400명을 거느리고 목책을 뛰어넘어 들어오자, 모용농이 큰 병력을 감독하여 뒤따라가서 秦兵을 대파하고 석월을 참수하였다.
석월과 毛當은 모두 秦나라(前秦)의 용맹한 장수였는데, 서로 이어 패전하여 죽으니, 진나라 사람들이 騷動하여 盜賊들이 떼로 일어났다.注+① 騷는 근심함이요 소요함이다.
모용수는 鄴城에 이르러 改元을 하고 의복의 색깔과 조정의 儀式을 옛날 법도와 똑같이 만드니, 모용농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회합하였다.
모용수는 마침내 世子 慕容寶를 세워 太子로 삼고 王公 100여 명에게 작위를 내려주거나 관직을 제수하였다.
【目】 符丕가 姜讓으로 하여금 慕容垂를 꾸짖게 하자, 모용수가 말하기를 “내 主上(符堅)에게 세상에 드문 은혜를 받았다. 이 때문에 長樂公(符丕)을 편안히 보전하여 京師로 달려가게 한 뒤에 옛 기업을 회복하여 길이 이웃 나라로 우호를 맺게 하려고 하였는데,注+① 京師는 長安을 이른다. 만약 鄴城을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면 응당 병력을 총동원하여 싸울 것이니, 그때에는 한 필의 말로 살기를 구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까 염려스럽다.” 하였다.
【目】 姜讓이 얼굴빛을 엄하게 하여 다음과 같이 慕容垂를 책망하였다.
“將軍은 당초에 자기 집안과 나라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聖朝(前秦)에 몸을 맡겼으니, 燕나라의 한 자 되는 땅을 장군이 어찌 나눠 가질 수 있겠는가.注+① 分(나누다)는 扶問의 切이다.
主上(符堅)은 장군과 풍속이 다르고 종족이 달랐으나, 한 번 만나보시고는 마음을 기울여 종족과 친척처럼 친애하고 勳舊의 신하보다 더 총애하셨다.注+② ‘風殊類別’은 氐族은 關西에 거주하고 鮮卑는 동북 지방에 거주하고 있어서 이미 풍속이 똑같지 않고 族類가 또 다름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王師가 약간 패전한 것을 인하여 갑자기 딴마음을 품었다. 長樂公은 한 지역을 나누어 다스리는 重任을 받았으니, 어찌 손을 묶고서 장군에게 여러 城의 땅을 바치겠는가.注+③ ‘受分陝之任’은
장군이 冠을 찢고 면류관을 부수어 〈군주를 배반하고자 한다면,〉 자연히 군대의 세력을 끝까지 동원할 수 있을 것이다.注+④ ≪春秋左氏傳≫ 昭公 9년에 “晉나라 率陰의 戎族이 周나라의 潁 지방을 공격하자, 周나라 景王이 詹桓伯을 사신으로 보내어 晉나라에 말하였다. ‘내가 伯父에 있어서는 衣服에 冠과 면류관이 있고 나무와 물에 뿌리와 근원이 있는 것과 같고, 人民에 謀主가 있는 것과 같다. 伯父가 만약 관을 찢고 면류관을 부숴버리고 나무뿌리를 뽑고 물의 근원을 막고 謀主를 멋대로 버린다면 비록 戎狄이라 하더라도 어찌 나 한 사람을 眼中에 두겠는가.’” 하였다.
다만 장군이 70세의 늙은 나이로 잘린 머리가 白旗에 매달리고, 세상의 뛰어난 충신이었다가 다시 역적의 귀신이 되는 것이 애석할 뿐이다.”注+⑤ 武王이 紂王의 머리를 베어 大白(태백)의 깃발에 달았다. 이에 모용수는 침묵하였다.
【目】 左右 신하들이 姜讓을 죽일 것을 청하자, 慕容垂가 말하기를 “저들은 각기 그 군주를 위할 뿐이니, 무슨 죄가 있겠는가.” 하고 예우하여 보내고는 表文을 올려 秦王 符堅에게 符丕를 보내어 長安으로 돌아가게 할 것을 청하자, 부견이 노하여 答書를 써서 모용수를 크게 책망하였다.
【綱】 〈晉나라(東晉)가〉 將軍 劉牢之를 보내어 秦나라(前秦)를 공격하게 하여 譙城을 함락하고 桓沖이 秦나라를 공격하여 魏興과 上庸, 新城을 함락하였다.
【綱】 2월에 〈晉나라(東晉)〉 荆․江都督 豐城公 桓沖이 卒하였다.
【目】 桓沖은 謝玄 등이 功을 세웠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失言했다 하여 부끄럽고 한스러운 마음으로 병이 나서 졸하였는데, 시호를 宣穆이라 하였다.注+① ‘失言’은 지난해에 “내가 옷깃을 왼쪽으로 하는 오랑캐가 될 것이다.”라고 했던 말을 이른다.
조정에서는 의논하여 사현을 荆州․江州刺史로 삼고자 하니, 謝安은 스스로 자기 父子의 명성과 지위가 너무 盛하고 또 桓氏가 관직을 잃고 원망할까 염려하여 마침내 桓石民을 형주자사로, 桓石虔을 豫州刺史로, 桓伊를 江州刺史로 삼았다.注+② 桓石虔은 桓溫의 아우의 아들이다.
【綱】 燕王(後燕) 慕容垂가 鄴城을 포위하였다.
【目】 燕王 慕容垂가 鄴城을 공격하여 그 外郭을 함락하자, 長樂公 符丕가 후퇴하여 中城을 지켰는데, 모용수가 긴 포위망을 구축하여 지키니, 關東 여섯 州의 郡縣이 대부분 燕나라에 항복하였다.
秦나라(前秦) 征東府의 官屬들은 參軍 高泰가 두 마음을 품는다고 의심하니,注+① 符丕가 征東大將軍이 되었다. 高泰가 먼저 燕나라(前燕)에서 벼슬하니, 慕容垂가 그를 從事中郞으로 삼았다. 고태가 두려워하여 같은 郡 사람 吳韶와 함께 도망하여 勃海로 돌아갔다.注+② 高泰와 吳韶는 모두 勃海 사람이다.
오소가 말하기를 “연나라 군대가 가까이 肥鄉에 있으니, 마땅히 그를 따라야 한다.”라고 하자,注+③ ≪晉書≫ 〈地理志〉에 “肥鄕縣은 廣平郡에 속한다.” 하였다. 고태는 말하기를 “나는 禍를 피했을 뿐이니, 한 군주를 버리고서 다른 한 군주를 섬기는 짓은 하지 않는다.” 하였다.
【綱】 燕나라(後燕)가 秦나라(前秦)의 枋頭와 館陶를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目】 燕나라 范陽王 慕容德이 秦나라의 枋頭를 공격하여 점령하고, 東胡王 慕容晏이 館陶를 점거하여 鄴中의 聲援이 되었는데, 오랑캐와 中夏의 백성으로서 연나라를 따르지 않는 자가 아직도 많았다.
燕王 慕容垂가 太原王 慕容楷를 보내어 陳留王 慕容紹와 함께 이들을 공격하게 하자, 모용해가 모용소에게 이르기를 “지금 大業이 시작되었는데 사람들 마음이 흡족해하지 못하니, 오직 마땅히 德으로써 백성들을 편안히 살도록 해야 할 것이요, 위엄으로써 진동해서는 안 됩니다.” 하고는 마침내 辟陽에 군대를 주둔하였다.注+① 魏收의 ≪魏書≫ 〈地形志〉에 의하면 長樂郡 信都縣에 辟陽城이 있다.
【目】 慕容紹가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王晏을 설득하자, 왕안이 항복하였다. 이에 거주하던 백성과 오랑캐 중에 항복하는 자가 수십만 명이었다.
慕容楷는 노약자를 남겨두고서 수령을 어루만지게 하고, 壯丁 10여만 명을 징발하여 왕안과 함께 鄴城에 이르니, 慕容垂가 크게 기뻐하기를 “너희 형제(모용소․모용해)의 재주가 文武를 겸하였으니, 충분히 先王을 이을 수 있다.” 하였다.注+① 〈‘足以繼先王矣’는〉 충분히 慕容恪을 이을 수 있다는 말이다.
【綱】 3월에 〈晉나라(東晉)가〉 謝安을 太保로 삼았다.
【綱】 燕나라(西燕) 慕容泓이 군대를 華陰에서 일으키고 慕容沖이 군대를 平陽에서 일으키자, 秦나라(前秦)에서는 符叡를 보내어 모용홍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패전하여 죽었다. 여름 4월에 부예의 司馬인 姚萇이 北地에서 군대를 일으켜 스스로 秦王(後秦)이라 칭하였다.
【目】 慕容泓이 秦나라의 北地長史로 있었는데,注+① 慕容泓은 慕容暐의 아우이다. 燕王 慕容垂가 鄴城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는 도망하여 關東 지방으로 달아나서 鮮卑族을 수집하여 華陰으로 돌아와 주둔하니, 무리가 마침내 盛하였으므로 스스로 雍州牧이라 칭하였다.
秦王 符堅이 權翼에게 이르기를 “내 卿의 말을 따르지 아니하여 鮮卑族으로 하여금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으니, 관동 지방의 땅은 내 다시는 다투지 못할 것이다. 장차 慕容泓을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부견은 마침내 廣平公 符熙로 하여금 蒲坂에 진주하게 하고, 鉅鹿公 符叡를 불러 都督中外諸軍事로 삼아서 군대 5만 명을 나누어주고, 竇衝을 長史로 삼고 姚萇을 司馬로 삼아 모용홍을 토벌하게 하였다.注+② 符煕와 符叡는 모두 符堅의 아우이다.
【目】 平陽太守 慕容沖 또한 平陽에서 군대를 일으켜 蒲坂으로 진격하자, 符堅은 竇衝으로 하여금 그를 토벌하게 하였다. 慕容泓은 秦나라 군대가 장차 쳐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關東 지방으로 달아났는데, 符叡는 성품이 거칠고 사납고 敵을 경시하였다.
군대를 몰고 가서 요격하려고 하자, 姚萇이 諫하기를 “鮮卑族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어나 반란을 일으킨 것이니, 마땅히 그들을 몰아 관문을 나가게 할 것이요, 막아서는 안 됩니다.
생쥐도 꼬리를 잡으면 오히려 뒤돌아 사람을 무는 법이니, 다만 북을 울려 따라가면 됩니다. 이렇게 하면 저들은 장차 무너져 패하기에도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부예는 그 말을 따르지 않고 모용홍과 싸우다가 과연 패하여 피살되었다.
【目】 姚萇이 長史를 보내어 符堅에게 가서 謝罪하게 하자, 부견이 노하여 장사를 죽이니, 요장이 두려워하여 渭水의 북쪽 馬牧으로 달아났다.注+① 馬牧은 말을 기르는 곳이니, 漢나라의 牧苑과 같다.
이에 天水의 尹緯와 尹詳, 南安의 龎演 등이 羌族의 土豪 5만여 가호를 규합하고 선동해서 요장을 추대하여 盟主로 삼으니, 요장이 스스로 秦王이라 칭하고 전진하여 北地에 주둔하자, 항복한 羌族과 胡族이 10여만 명이었다.
【綱】 秦나라(前秦)의 符定과 符紹가 信都와 高城을 가지고 燕나라(後燕)에 항복하였다.注+① 符定은 符堅의 從叔인데 信都를 가지고 항복하였고, 符紹는 符堅의 從弟인데 高城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綱】 秦나라(前秦)가 군대를 보내어 慕容沖을 공격해서 깨트리니, 모용충이 華陰으로 달아나자, 慕容泓이 마침내 長安을 핍박하였다.
【目】 秦나라 竇衝이 慕容沖을 공격하여 깨트리니, 모용충이 華陰으로 달아났다.
慕容泓의 무리가 10여만에 이르렀는데, 使者를 보내어 진왕 符堅에게 이르기를 “吳王(慕容垂)이 이미 關東 지방을 평정하였으니, 속히 大駕를 준비하여 家兄인 皇帝(慕容暐)를 보내어 鄴都로 돌려보내라. 우리는 秦나라와 虎牢를 경계로 삼겠다.” 하였다.注+① 慕容暐는 慕容泓의 형이다.
그러자 부견은 크게 노하여 慕容暐를 불러 꾸짖기를 “卿의 宗族은 사람의 얼굴에 짐승의 마음을 가졌다고 할 만하다. 國士가 될 것을 기대할 수 없다.” 하고는 모용위에게 편지를 써서 모용홍과 모용충 및 모용수를 招諭하게 하자,
모용위가 은밀히 사자를 보내어 모용홍에게 이르기를 “나는 새장에 갇힌 사람이니, 반드시 살아서 돌아갈 리가 없다. 또 燕나라 황실의 죄인이니, 나를 다시 돌아볼 것이 없다.注+② 慕容暐가 燕나라(前燕)의 社稷을 보전하지 못하였으므로 스스로 죄인이라 한 것이다. 너는 부지런히 大業을 세워 내가 죽었다는 소문을 듣거든 즉시 尊位에 오르라.” 하였다.
모용홍이 이에 전진하여 長安으로 향하였다.
【綱】 〈晉나라(東晉)〉 竟陵太守 趙統이 襄陽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梁州刺史 楊亮이 군대를 거느리고 蜀을 정벌하여 巴郡에 주둔하였다.
【綱】 5월에 秦나라(前秦) 洛州刺史 張五虎가 豐陽을 점거하고 와서 항복하였다.注+① 符氏의 秦나라가 당초에 洛州刺史로 陝城에 진주시키고 荊州刺史로 豐陽에 진주시켰는데, 이미 襄陽을 얻어 荊州로 삼고 洛州를 풍양으로 옮겼다. 풍양은 漢나라 上洛縣의 땅이다.
【綱】 6월에 〈晉나라(東晉)〉 崇德太后 褚氏가 崩하였다.
【綱】 秦王(前秦) 符堅이 後秦을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目】 後秦王 姚萇이 나아가 北地에 주둔하니,注+① 姚萇을 後秦이라고 써서 符氏의 秦(前秦)과 구별한 것이다. 秦나라 華陰, 北地, 新平, 安定의 羌族과 胡族 가운데 항복해온 자가 10여만이었다.
秦王 符堅이 직접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요장을 공격하니, 後秦의 군대가 여러 번 패하였고 軍中에 우물이 없었다.
秦나라 사람이 安公의 골짝을 막아 물의 흐름을 차단해서 곤궁하게 하니, 후진의 군사 중에 목말라 죽은 자가 있었는데,注+② 胡三省이 “安公의 골짜기는 지금 耀州의 경계에 있다.” 하였다. 마침 하늘에서 큰비가 내려 후진의 진영 안에 물이 3尺이고, 진영 밖은 한 치 남짓일 뿐이었다.
이로써 후진의 군대가 다시 떨쳐 일어나니, 부견은 탄식하기를 “하늘 또한 賊을 돕는가.” 하였다.
【綱】 燕나라(西燕)의 여러 장수들이 慕容泓을 죽이고 慕容沖을 皇太弟로 삼았다.
【目】 慕容泓의 謀臣인 高蓋 등은 모용홍의 德望이 慕容沖만 못하고, 법을 집행함이 까다롭고 준엄하다 하여 마침내 모용홍을 죽이고 모용충을 세워 皇太弟로 삼았다. 모용충이 制命을 받들어 일을 행하고 百官을 설치하였다.
그러자 後秦王 姚萇이 아들 姚嵩(요숭)을 모용충에게 보내어 그의 인질이 되어 화친을 맺기를 청하였다.注+① 군대를 연합하여 秦나라를 피폐하게 하려 해서였고, 또 慕容沖의 군대가 강함을 두려워해서였다.
【綱】 燕나라(後燕) 장군 慕容麟이 常山과 中山을 함락하고, 〈西燕의〉 慕容沖이 秦나라(前秦) 군대를 대파하고 마침내 阿房城을 점거하였다.
【目】 秦나라 平原公 符暉가 洛陽과 陝城의 병력 7만을 거느리고서 長安으로 돌아갔다. 秦王 符堅은 慕容沖이 장안으로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서 부휘를 보내어 모용충을 막게 해서 鄭 지방의 서쪽에서 싸웠는데, 모용충이 부휘를 대파하고 마침내 阿房城을 점거하였다.注+① 〈阿房城은〉 바로 秦나라의 阿房宮城이다.
【綱】 가을 7월에 秦나라(前秦) 梓潼太守 壘襲이 涪城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였다.注+① 壘襲은 사람의 姓名이다.
【綱】 〈晉나라(東晉)가〉 康獻皇后(褚太后)를 장례하였다.
【綱】 燕나라(後燕)가 丁零의 翟斌을 죽였다.
【目】 翟斌이 功을 믿고 교만 방자하여 만족할 줄 모르고 계속 요구하였다.注+① 厭(만족하다)은 於鹽의 切이다. 또 鄴城이 오랫동안 함락되지 않는다 하여 남몰래 두 마음을 품자, 太子 慕容寶가 제거할 것을 청하니, 燕王 慕容垂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河南의 맹세를 저버릴 수가 없다.注+② 翟斌이 군대를 이끌고 慕容垂와 洛陽에서 만나자, 모용수가 그와 더불어 맹세하였는데, 그는 이때 河南縣에 있었다. 만약 그가 반란을 일으킨다면 죄가 적빈에게 있는 것이다.注+③ 難(난리)은 去聲이다. 일이 아직 형체가 드러나지 않았는데 그를 죽이면 사람들은 반드시 내가 그의 공과 재능을 시기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막 영웅호걸들을 거두어 大業을 높이려 하니, 사람들에게 좁은 도량을 보여 천하의 바람을 잃어서는 안 된다. 설령 그가 우리를 도모하는 계책이 있더라도 내가 지혜로써 막을 것이니, 그러면 그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을 것이다.”注+④ 藉는 가령이다.
적빈이 과연 은밀히 秦나라(前秦) 長樂公 符丕와 함께 모의를 通하다가 일이 발각되니, 모용수가 그를 죽였다.
【綱】 秦나라(前秦) 呂光이 龜兹를 대파하고 쳐들어가 그 城을 점거하였다.
【目】 龜兹王 帛純이 곤궁하고 급하여 獪胡(괴호)에게 많은 뇌물을 주어 구원을 요청하자,注+① 呂光이 지난해에 進軍하여 龜玆를 공격하였다. 獪는 음이 卦이다. 獪胡는 또 龜玆의 서쪽에 있었다. 獪胡王이 여러 나라의 병사 70여만을 거느리고 와서 구원하였는데 呂光이 그와 싸워 대파하니, 백순이 밖으로 도망하였다.
여광이 그 城으로 쳐들어가니, 성은 長安城과 같아서 시장과 도읍, 宮室이 매우 盛하였다. 여광이 西域의 나라들을 어루만져 편안히 하고 위엄과 은혜가 매우 드러나니, 먼 지방의 여러 나라 중에 前代에 복종시키지 못한 자들이 모두 와서 歸附하였다.
여광은 백순의 아우 帛震을 세워 龜兹王으로 삼았다.
【綱】 8월에 燕王(後燕) 慕容垂가 鄴城의 포위를 풀고 新城으로 달려갔다.
【目】 당초에 燕王 慕容垂는 鄴城이 아직도 견고하다 하여 관료와 보좌관들을 모아 의논하자, 右司馬 封衡이 漳水의 물을 끌어와 업성에 주입할 것을 청하므로 그 말을 따랐다.注+① 封衡은 封裕의 아들이다.
모용수는 포위한 지역을 순행하고서 인하여 華林園에서 술을 마셨는데,注+② 行은 순행함이다. 洛都와 鄴都에 모두 華林園이 있었는데, 업도의 華林은 魏나라 武帝(曹操)가 건축한 것이다. 秦나라(前秦) 사람이 은밀히 군대를 출동시켜 습격하여 화살을 비처럼 쏘아댔다.
모용수가 거의 탈출할 수 없었는데, 冠軍將軍 慕容隆이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돌격하자, 모용수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注+③ ‘冠軍隆’은 冠軍將軍 慕容隆이다.
【目】 이때 鄴城 가운데의 꼴과 곡식이 모두 소진되어 소나무와 나무를 깎아 말에게 먹였는데,
慕容垂가 말하기를 “符丕가 반드시 항복할 리가 없으니, 부비가 서쪽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 秦王 符堅이 옛날에 베푼 은혜를 보답하는 것만 못하다.” 하고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서 新城으로 달려갔다.注+① 新城은 바로 肥鄕의 新興城이다.
그러고는 慕容農을 보내어 淸河와 平原을 순행하여 조세를 징수하고 감독하게 하자, 모용농은 법규를 분명하게 세워서 백성의 재물의 있고 없음을 균등하게 조절하여 〈세금을 부과하였고,〉 軍令을 엄격하게 정돈하여 침해하고 포학한 바가 없도록 하였다.
이 때문에 곡식과 비단을 바치는 사람이 길에 끊이지 않아 군수물자가 풍족해졌다.注+② 屬(이어지다)은 음이 燭이다.
【綱】 〈晉나라(東晉)가〉 都督 謝玄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秦나라(前秦)를 공격하게 하여 황하 남쪽 지역을 점령하였다.
【目】 太保 謝安이 符氏가 기울고 패한 틈을 타서 中原을 개척할 것을 주청하자, 謝玄을 前鋒都督으로 삼아 桓石虔 등을 거느리고 秦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사현이 下邳에 이르니, 秦나라 徐州刺史 趙遷이 彭城을 버리고 달아났으므로 사현이 전진하여 팽성을 점거하였다.
그리고 彭城内史 劉牢之로 하여금 秦나라 兗州刺史 張崇을 공격하게 하니, 장숭이 鄄城을 버리고 燕나라(後燕)로 달아났다.
그래서 유뇌지가 견성을 점거하니, 황하 남쪽 지역의 城堡가 모두 와서 歸附하였다.
【綱】 〈晉나라(東晉)가〉 太保 謝安에게 都督十五州諸軍事를 가하고 黄鉞을 주었다.注+① 15州는 楊州, 徐州, 南徐州, 兗州, 南兗州. 豫州, 南豫州, 江州, 靑州, 冀州, 幽州, 幷州, 司州, 荊州, 雍州이다.
【綱】 〈西燕의〉 慕容沖이 전진하여 長安을 핍박하였다.
【綱】 겨울 10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綱】 〈晉나라(東晉)의〉 謝玄이 군대를 보내어 秦나라(前秦) 青州를 공격해서 항복시켰다.
【綱】 燕나라(後燕) 慕輿文이 劉庫仁을 죽였다.
【目】 劉庫仁이 符丕를 구원하고자 하여 雁門과 上谷, 代郡의 병사들을 징발하여 繁畤에 주둔하였다.
燕나라(前燕) 慕輿句의 아들 慕輿文이 유고인의 처소에 있었는데, 세 郡의 병사들이 멀리 정벌하러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음을 알고는 인하여 亂을 일으켜 밤에 유고인을 공격하여 죽이고, 駿馬를 훔쳐 燕나라(後燕)로 달아나니, 유고인의 아우 劉頭眷이 부족의 무리를 대신 거느렸다.
【綱】 〈晉나라(東晉)가〉 謝玄에게 都督七州軍事를 더해주었다.
【目】 秦나라(前秦) 長樂公 符丕가 전진하거나 후퇴할 길이 막혀서 관료와 보좌관들에게 상의하니, 司馬 楊膺이 스스로 晉나라로 귀의할 것을 청하자, 부비가 허락하지 않았다.
마침 謝玄이 劉牢之 등을 보내어 碻磝(교요)를 점거하고 郭滿이 滑臺를 점거하였다. 그리고 顔肱과 劉襲이 河北에 주둔하였는데, 유습이 黎陽을 함락하였다.注+① 碻는 丘交의 切이고, 磝는 牛交의 切이다. 碻磝城은 濟北郡의 治所가 있는 곳이니, 沿河의 중요한 지역이다. 滑臺는 漢나라의 白馬와 唐나라의 滑州이다. 河北은 滑州의 北岸이다.
그러자 부비가 두려워 마침내 參軍 焦逵를 보내어 사현에게 편지를 전달해서 길을 빌리고 양식을 구하여 서쪽으로 國難에 달려가고자 한다고 말하였다.
초규는 參軍 姜讓과 함께 은밀히 양응에게 고하여 편지를 고쳐 표문으로 만들어 王師(東晉의 군대)가 이르면 마땅히 몸을 바쳐 남쪽(동진)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하였다.
또 의논하여 부비가 만약 이 말을 따르지 않으면 핍박하고 포박하여 晉나라에 넘겨주기로 하였다.
【目】 이에 謝玄이 晉陵太守 滕恬之를 보내어 황하를 건너 黎陽을 지키게 하니, 朝廷에서는 兗州, 青州, 司州, 豫州가 이미 평정되었다 하여 사현에게 都督徐․兗․青․司․冀․幽․幷州諸軍事를 가하였다.
【綱】 後秦王 姚萇이 新平을 공격하였다.
【目】 後秦王 姚萇은 慕容沖이 長安을 공격한다는 말을 듣고 여러 관료들을 모아 진격할 것인지 멈출 것인지를 의논하니, 모두 말하기를 “마땅히 먼저 장안을 점령하여 근본을 세운 뒤에 사방을 경영해야 합니다.” 하였다.
요장이 말하기를 “燕나라(西燕) 사람들은 그 무리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 함을 이용하여 군대를 일으켰으니, 저들은 만약 뜻을 얻으면 반드시 오랫동안 關中(長安)에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내 마땅히 진영을 옮겨 嶺北에 주둔해서 물자와 곡식을 널리 거두어놓고서 秦나라(前秦)가 망하고 연나라가 떠난 뒤에 팔짱을 끼고 취하겠다.” 하고는注+① 嶺北은 九嵕山의 북쪽을 이르니, 무릇 新平, 北地, 安定의 땅이 모두 이곳이다.
마침내 長子 姚興을 남겨 北地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병력을 거느리고 新平을 공격하였다.
【目】 처음에 新平 사람이 그 郡將(郡守)을 죽이자, 秦王 符堅이 그 城의 모퉁이를 허물어 치욕을 주니,注+① 石虎의 말년에 淸河의 崔悅이 新平의 相이 되었었는데, 郡 사람에게 피살되었다. 최열의 아들 崔液이 符堅에게 벼슬하여 尙書郞이 되었는데, 스스로 표문을 올려 “아버지의 원수와는 하늘과 땅을 함께 하지 않으니, 冀州로 돌아가게 해주시기를 청합니다.” 하자, 부견은 그를 가엾게 여겨 신평 사람들을 禁錮하고 그 城의 모퉁이를 허물어 치욕을 준 것이다. 신평의 民望들이 이것을 크게 부끄러워하여 忠義를 세워 설욕하고자 하였다.注+② 民望은 郡의 어진 자와 호걸로 한 군의 사람들에게 推重을 받는 자이다. 病은 부끄럽다는 말과 같다.
【目】 姚萇이 新平에 도착하자 太守 苟輔가 항복하고자 하니,注+① 苟輔는 氐族이니, 秦나라의 外戚이다. 郡의 사람 馮傑 등이 간하기를 “옛날 지금 秦나라(前秦)는 도리어 이어진 城이 100개가 넘는데, 어찌하여 대번에 배반하는 신하가 되려고 하십니까.” 하였다.
구보가 기뻐하여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본래 뜻이다. 다만 오랫동안 구원 세력이 없어 郡의 백성들이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을까 염려했었는데, 諸君이 능히 이와 같으니, 내 어찌 살기를 도모하겠는가.” 하고는 이에 성에 의지하여 굳게 지켰다.
後秦이 土山과 지하도를 만들어 공격하자, 구보 또한 성안에 토산과 지하도를 만들어 지하에서 싸우기도 하고 산 위에서 싸우기도 하니, 후진의 무리가 죽은 자가 만여 명이었다.
구보가 거짓으로 항복하겠다 하여 요장을 유인하였다. 요장이 장차 성으로 들어오려다가 속임수임을 깨닫고 되돌아가자, 구보가 군대를 매복하여 요격해서 거의 잡을 뻔하였으며, 또다시 만여 명을 죽였다.
【綱】 12월에 秦나라(前秦)가 新興侯 慕容暐를 죽였다.
【目】 鮮卑族으로서 長安城 안에 있는 자가 아직도 천여 명이었다. 慕容肅이 慕容暐와 함께 군대를 매복하여 符堅을 죽일 것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니,注+① 慕容肅은 慕容紹의 형이다. 부견이 모용위와 모용숙을 불러 이르기를 “내가 그대들을 어떻게 대우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생각을 가진단 말인가.” 하자, 모용숙이 말하기를 “집안과 나라의 일이 중하니, 어찌 意氣의 일을 논하겠습니까.” 하였다.注+② ‘意氣’는 符堅이 그들을 후대하였음을 이른다.
부견은 마침내 선비족을 아울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였다. 燕王 慕容垂의 어린 아들 慕容柔가 太子 慕容寶의 아들 慕容盛과 함께 틈을 타 탈출하여 慕容沖에게 달려갔다.
【綱】 燕王(後燕) 慕容垂가 다시 〈秦나라(前秦)의〉 鄴城을 포위하니, 〈晉나라(東晉)의〉 謝玄이 劉牢之를 보내어 구원하게 하고 또 곡식을 주었다.
【綱】 秦나라(前秦) 梁州刺史 潘猛이 漢中을 버리고 달아났다.注+① 梁州 땅이 이로부터 다시 晉나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역주
역주1 [燕元] : 저본에는 ‘燕元’이 없으나, ≪資治通鑑綱目≫의 기술 방식에 따라 추가하였다.
역주2 承制 : 制는 황제의 명령이다. 承制는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일을 처리하는 뜻이지만, 실제로는 황제의 명령 범위 안에서 재가를 받지 않고 편의대로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한다. 황제의 권력이 약화되어 權臣이 이를 칭하거나 황제가 없을 경우 이를 칭하기도 하였다.
역주3 符丕를……것이다 : 符堅 재위 때 부비가 長樂公에 봉해져 襄陽과 鄴城을 나누어 다스린 것을 周나라 때 周公과 召公이 文王과 武王을 보좌하며 陝西城 서쪽 땅과 동쪽 땅을 나누어 다스리며 善政을 베풀었던 것에 견주어서 한 말이다. 주공은 주나라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아우인데, 어린 나이에 즉위한 조카 成王을 보필하여 예악과 법도를 제정하였다. 소공은 문왕의 서자인 奭으로, 성왕 때 주공과 함께 三公이 되어 섬서성 서쪽 땅을 다스리며 선정을 베풀었다.
역주4 (慕容)[符] : 저본에는 ‘慕容’으로 되어 있으나, 본문의 문맥에 의거하여 ‘符’로 바로잡았다.
역주5 燕慕容泓……自稱秦王 : “慕容垂에게는 ‘배반했다’고 썼는데, 慕容泓과 慕容沖에게는 ‘군대를 일으켰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이들은 燕나라의 遺民이기 때문이다. 멸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이음은 ≪資治通鑑綱目≫에서 인정하는 바이므로 용서한 것이다. 그렇다면 모용수는 연나라의 유민이 아닌가. 符堅의 命을 받아 羌族을 토벌하다가 도리어 강족과 연합하였으니, 모용홍과 모용충에 비할 바가 아니다. 이 때문에 군대를 일으킴은 똑같으나 翟斌은 강족이므로 討를 쓰고, 모용홍과 모용충은 연나라의 遺民이므로 擊을 썼으니, ≪자치통감강목≫에서 분명하게 판단한 것이다. 姚萇을 符叡의 司馬라고 썼으면 秦나라를 배반한 것인데, 어찌하여 배반했다고 쓰지 않았는가. 요장이 이미 싸우다가 패하고 사람을 보내어 부견에게 가서 謝罪하였으나, 부견이 노하여 그 사자를 죽이니, 요장이 두려워하여 마침내 馬牧으로 달아났다. 이에 尹詳이 요장을 추대하였으니, 이는 요장의 본심이 아니다. ≪자치통감강목≫에서는 이에 대해 헤아려 살핀 것이다.[垂書叛矣 泓沖書起兵 何 燕餘也 興滅繼絶 綱目所予也 故恕之 然則垂非燕餘乎 受命討羌 反與羌合 非泓沖比矣 是故起兵一也 翟斌羌種 則書討 泓沖燕餘 則書擊 綱目之權衡審矣哉 萇書叡司馬 則叛秦也 曷爲不以叛書 萇旣戰敗 遣人謝罪 堅怒殺之 萇懼遂奔馬牧 於是尹詳推萇 則非萇心也 綱目於此有以亮之矣]” ≪書法≫“符堅이 패배하자, 여러 오랑캐들이 기회를 틈타 고슴도치 털처럼 많이 일어났다. 그러나 慕容垂와 姚萇은 같은 처지의 사람인데, 모용수는 이미 ‘배반했다’고 썼으나, 요장은 마침내 ‘군대를 일으켰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모용수는 부견의 두터운 知遇를 받았으니, 요장에 비할 바가 아니다. 부견이 모용수로 하여금 翟斌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모용수가 도리어 적빈과 연합하였다. 그러므로 ‘배반했다’라고 써서 그 죄를 바로잡은 것이다. 요장으로 말하면 符叡를 도왔는데, 부예가 그의 간언을 따르지 못하고 적을 경시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요장이 이때 두려워하여 사자를 부견에게 보내어 謝罪하였으나, 부견이 마침내 노하여 그 사자를 죽였으니, 이는 부견이 요장을 몰아 반란을 하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대를 일으켰다’고 써서 본래 배반할 뜻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그러나 부견이 교만하고 음탕하고 도리를 잃어서 스스로 패망을 초래했으므로 적빈과 모용홍, 모용충 무리에 대해 모두 ‘군대를 일으켰다’고 쓴 것이다. 이로써 또 나라가 강하고 크다 하여 덕을 힘쓰지 않고 무력을 끝까지 동원하여 멀리 경략을 일삼는 자의 감계로 삼은 것이다.[符堅敗北 群寇乘之如蝟毛而起 然垂萇一體之人 垂旣書叛 萇乃書起兵 何耶 垂受堅知遇之厚 非萇之比 堅使垂討翟斌 而垂反與斌合 故書叛以正其罪 若萇則佐叡 叡不能用其諫 輕敵敗死 萇方恐懼 遣使謝罪 堅乃怒而殺之 是驅之使亂也 故書起兵以原其本無叛意爾 然堅驕淫失道 自取敗滅 故翟斌泓沖輩皆以起兵書之 又以爲强大不務德 黷武事遠略者之鑑也]” ≪發明≫
역주6 遣都督……取河南 : “신하가 병권을 전횡하는 일을 앞에서 이미 자세히 논하였다. 지금 謝玄이 秦나라를 공격할 적에 ‘遣’이라고 쓰고 이전에 謝石 등이 秦나라를 막을 때 ‘詔’라고 썼는데, 이때 謝安이 정승이 되어 명령이 朝廷에서 나왔으므로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이다. 만일 晉나라의 征伐이 모두 능히 이와 같다면 또 어찌 跋扈하여 조정을 제재하는 일이 있었겠는가. 아, 슬프다.[人臣專兵之事 前已論之詳矣 今此謝玄伐秦 則書遣 與前此謝石等拒秦則書詔者 是時 謝安爲相 命出朝廷 是以書法如此 使晉之征伐皆能若是 又安有跋扈制朝之事哉 噫]” ≪發明≫
역주7 (齊)[濟] : 저본에는 ‘齊’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濟’로 바로잡았다.
역주8 田單은……보존하였습니다 : 전국시대에 燕나라 昭王이 명장 樂毅를 시켜 齊나라를 공격하게 했는데, 제나라 湣王은 도망가고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지만, 이후 전단이 남아 있는 卽墨城과 莒城을 끝까지 고수하여 마침내 연나라를 물리쳐 빼앗겼던 70개의 성을 되찾은 일을 말한다.(≪史記≫ 권82 〈田單列傳〉)
역주9 秦梁州刺史潘猛棄漢中走 : “무릇 ‘구원했다’고 씀은 의로움을 인정한 것인데, 여기에서 ‘구원했다’고 씀은 어째서인가. 원수를 잊음을 비난한 것이다. 그러므로 符丕가 원군을 청했을 때 쓰지 않다가 ‘구원하게 하고 또 곡식을 주었다.’고 썼으니, ‘또[且]’라는 것은 심하다는 말이다.[凡書救 予義也 此其書救 何 譏忘讐也 故符丕請帥 不書 書救之且饋之粟 且也者 甚辭也]” ≪書法≫“≪春秋≫에 ‘구원했다’고 쓸 적에 좋게 여기지 않은 경우가 없었다. 더구나 남의 곤궁하고 급함을 구원함은 그 善함이 더욱더 더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鄭나라를 구원하고 許나라를 구원했을 적에 經文에서 霸主에게 中夏를 편안히 한 공을 인정하였고, 蔡나라에 곡식을 보냈을 적에 傳에서 諸侯들이 위급함을 구휼한 의리를 찬미하였다. 그런데 지금 晉나라 사람들이 鄴城을 구원하여 곡식을 주자, ≪資治通鑑綱目≫에서 특별히 이것을 썼으니, 또한 인정한 것인가. 대답은 다음과 같다. ‘經文에 말은 같으나 뜻이 다른 경우가 있고, 또한 표창함을 통하여 폄하함을 드러낸 경우가 있고, 또 말은 여기에 있으나 뜻은 저기에 있는 경우가 있으니, 요컨대 때와 일을 살펴보고서 본의가 어디에 있는가를 살피면 이것을 알 것이다. 晉나라가 江南으로 천도한 것은 겨우 끊기지 않은 제사를 연장한 것일 뿐이었다. 秦나라(前秦) 사람들이 여러 번 국경을 침략하여 梁州와 益州를 함락하고 襄陽을 함락하고 魏興을 함락하였을 적에 그러한 사실을 특별히 쓰거나 누차 쓴 것이 어찌하여 한 번만 쓰고 그치지 않았는가. 돌아보건대 秦나라에서 막 군대를 크게 일으켜 晉나라로 쳐들어와 침략했을 때에는 반드시 吳․越 지방을 소탕하고 평정한 뒤에 그만두고자 하였는데, 다행히 하늘이 晉나라를 도와주어 淮水와 肥水에서 秦나라를 물리쳤다. 이는 晉나라 군주가 나라가 없다가 나라가 있게 되었고, 晉나라 신하가 집이 없다가 집이 있게 된 것이다. 지금 符丕는 바로 符堅의 아들이다. 도적과 적에게 곤궁을 당하여 계략을 세워 우리에게 왔으니, 다만 창을 휘둘러 상대하여 싸우지 않은 것이 한스러운데, 하물며 따라서 구원해준단 말인가. 재난을 구원하고 이웃 나라를 구휼함은 예로부터 있었다. 그러나 재난을 구원함은 괜찮지만 원수를 구원함은 불가하고, 이웃을 구휼함은 괜찮지만 적을 구휼함은 불가하다. 晉나라 사람들이 大義를 알지 못하고 가볍게 원수와 적을 도와주었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 이것을 쓰되 대략 「이미 장수를 보내어 오랑캐를 구원하고 또 곡식을 주었다.」 하였으니, 「또[且]」라는 한마디 말은 晉나라 사람들을 부족하게 여긴 뜻을 나타낸 것이다. 그렇지 않고 구원함을 좋게 여기는 데다 곡식을 준 것을 가지고 곤궁함을 구휼하는 의리로 삼기까지 한다면 ≪자치통감강목≫의 본지를 잃는 것이다.’[春秋書救 未有不善之者 況賙人困急 則其善尤不可加 是故救鄭救許 經所以予伯主安夏之功 而歸粟于蔡 傳所以美諸侯周亟之義 今晉人救鄴 饋之以粟 綱目特筆書之 亦予之乎 曰 經有詞同而義異者 亦有因褒以見貶者 又有言在此而意在彼者 要在觀其時察其事 考其旨意之所在 則得之矣 晉遷江表 僅足以延不泯之祀 夫何秦人屢寇疆埸 陷梁益 陷襄陽 陷魏興 特書屢書 不一書而止 顧方大擧入寇 必欲蕩平吳越而後已 幸而天誘其衷淮肥奏捷 是晉君無國而有國 晉臣無家而有家也 今符丕乃堅之子 困於寇敵 以計投我 特恨不能奮戈相待 況從而援之乎 夫救災恤隣 自古有之 然救災可也 救讐則不可也 卹隣可也 卹寇則不可也 晉人不知大義 輕助讐賊 綱目書此 若曰旣遣將救虜 又且饋之以粟 且之一詞 所以示其不足於晉人之意也 不然 旣以救爲善 而又以饋粟爲賙窮之義 則失綱目之旨矣]” ≪發明≫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