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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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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巳年(A.D.33)
계사년癸巳年(A.D.33)
九年이라 春正月 하니 詔馮異하여 領其營注+潁陽縣, 屬潁川郡.하다
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 건무建武 9년이다. 봄 정월에 정로장군 영양후征虜將軍 潁陽侯 채준祭遵이 군중에서 하니, 풍이馮異에게 조령詔令을 내려 그의 진영을 거느리게 하였다.注+영양현潁陽縣영천군潁川郡에 속하였다.
爲人 廉約小心하고 克己奉公하여 賞賜 盡與士卒하고 約束嚴整하여 所在 吏民 不知有軍하다
채준祭遵은 인품이 청렴하고 검약하고 근신하였다. 그리하여 자신의 욕심을 이기고 공무公務를 받들어 으로 하사받은 것을 모두 사졸들에게 나누어주었고, 군대의 법령이 엄정하여 주둔해 있는 곳마다 관리와 백성들이 군대가 있는 줄을 알지 못하였다.
取士 皆用儒術하고 對酒設樂 必雅歌投壺注+雅歌, 謂歌雅詩也. 禮記投壺經曰 “壺頸修七寸, 腹修五寸, 口徑二寸半, 容斗五升, 壺中實小豆焉, 爲其矢之躍而出也. 矢以柘若棘, 長二尺八寸, 無去其皮, 取其堅而重. 投之, 勝者飮不勝者, 以爲優劣也.”하며 臨終 遺戒薄葬하고 問以家事호되 終無所言하다
선비를 뽑을 적에 모두 유학儒學하는 자를 등용하였고, 술잔을 대하고 음악을 연주할 적에 반드시 아시雅詩를 노래하고 투호례投壺禮를 행하였으며注+아가雅歌”는 아시雅詩(≪시경詩經≫의 〈대아大雅〉와 〈소아小雅〉)를 노래함을 이른다. ≪예기禮記≫ 〈투호投壺〉의 경문經文에 “투호하는 병의 목은 길이가 7, 몸통은 길이가 5, 주둥이의 지름은 2 반이며, 1(말) 5(되)이 들어가는데 병 안에 팥을 채우는 것은 화살이 튕겨 나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화살은 꾸지뽕나무와 가시나무로 만드는데 길이가 2 8이며, 껍질을 제거하지 않으니 이는 단단하고 무거운 것을 취한 것이다. 투호를 하여 이긴 자가 진 자에게 술을 마시게 해서 우열을 가른다.” 하였다., 임종할 때에 검소하게 장례하라고 유언하였고 집안의 일을 물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帝愍悼之尤甚하여 遵喪至河南이어늘 車駕素服臨之하여 望哭哀慟하고 親祠以太牢하다
황제가 몹시 애도하여, 채준의 상여가 하남河南에 이르자, 소복을 입고 가서 바라보고 곡하며 애통하고는 친히 태뢰太牢로 제사하였다.
詔大長秋, 謁者, 河南尹하여 護喪事하고 大司農給費注+大長秋, 皇后卿也. 西都, 或用中人, 或用士人, 東都之後, 純用閹人矣.하며 至葬 車駕臨其墳하고 存見夫人, 室家注+存者, 恤問也.하다
조령詔令을 내려 대장추大長秋알자謁者, 하남윤河南尹에게 초상을 감독하게 하고 대사농大司農에게 명하여 비용을 지급하게 하였으며注+대장추大長秋황후皇后이다. 서도西都(전한前漢)에서는 중인中人을 쓰기도 하고 선비를 쓰기도 했는데, 동도東都(후한後漢) 이후로는 순전히 환관을 썼다., 장례 때에는 직접 그의 무덤에 가서 곡하고 그의 부인과 집안사람들을 위문하였다.注+은 구휼하고 위문함이다.
其後朝會 帝每歎曰 安得憂國奉公 如祭征虜者乎注+遵爲征虜將軍.리오하니
황제는 그 뒤에 조회할 때마다 매번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채정로祭征虜처럼 국사를 걱정하고 멸사봉공할 자를 얻을 수 있겠는가.”注+채준祭遵정로장군征虜將軍이었다. 하니,
衛尉銚期曰 陛下至仁하사 哀念祭遵不已하시니 群臣 各懷慙懼注+言群臣愧不如遵, 各懷懼也.로소이다 帝乃止하다
위위 요기衛尉 銚期가 아뢰기를 “폐하께서 지극히 인자하시어 채준을 슬피 애도하여 마지않으시니, 신하들이 각기 부끄러워하여 두려운 마음을 품습니다.”注+〈“군신 각회참구群臣 各懷慙懼”는〉 신하들이 채준祭遵만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각각 두려운 마음을 품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하자, 황제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隗囂死하니 諸將 立其子純하다
외효隗囂가 죽으니, 장수들이 그의 아들 외순隗純을 세웠다.
囂病且餓하여 餐糗糒라가 恚憤而卒注+糗, 擣熬穀也, 謂熬米麥使熟, 又擣之, 以爲粉也. 糒, 平秘切, 乾飯也, 糗糒, 是行軍之糧.하니 王元, 周宗 立囂小子純爲王하여 摠兵據冀하다
외효隗囂가 병들고 또 굶주려서 미숫가루와 마른밥만 먹다가 울분을 품고 죽었다.注+는 빻아서 볶은 곡식이니, 쌀과 보리쌀을 쪄서 익히고 또 빻아서 가루로 만든 것을 이르며, 평비平祕로 말린 밥이니, “구비糗糒”는 행군할 때에 먹는 식량이다. 왕원王元주종周宗이 외효의 작은아들 외순隗純을 세워 으로 추대하고서 병력을 총동원하여 를 점거하였다.
公孫述 遣將趙匡, 田弇助純이어늘 帝使馮異擊之하다
공손술公孫述이 장군 조광趙匡전감田弇을 보내 외순을 돕자, 황제가 풍이馮異로 하여금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다.
公孫述 遣兵하여 陷夷陵하고 據荊門하다
공손술公孫述이 군대를 보내 이릉夷陵을 함락하고 형문荊門을 점거하였다.
遣其翼江王田戎 大司徒任滿 南郡太守程況하여 將數萬人下江關하여 擊破馮駿等軍하고 遂拔巫及夷道, 夷陵하고
공손술公孫述익강왕 전융翼江王 田戎대사도 임만大司徒 任滿, 남군태수 정황南郡太守 程況을 보내 수만 명을 거느리고 강관江關으로 내려가 풍준馮駿 등의 군대를 격파하고 마침내 , 이도夷道, 이릉夷陵을 함락하였다.
因據荊門, 虎牙注+水經注 “江水東歷荊門․虎牙之間, 荊門山在南, 上合下開, 其狀似門, 虎牙山在北, 石壁色紅, 間有白文類牙, 故以名也. 此二山, 楚之西塞也.”하여 橫江水하여 起浮橋, 關樓하고 立欑柱以絶水道하고 結營跨山以塞陸路하여 拒漢兵注+胡三省曰 “關樓, 范書作闘樓, 猶今城上敵樓也.” 欑, 徂官․作管二切, 蕞木爲柱曰欑柱.하다
이어서 형문荊門호아虎牙를 점거하고서注+수경주水經注≫에 “강수江水가 동쪽으로 형문荊門호아虎牙의 사이를 지나는데, 남쪽에 있는 형문산荊門山은 위가 모여 있고 아래가 열려 있어 그 모양이 문과 비슷하고, 북쪽에 있는 호아산虎牙山석벽石壁이 붉은색을 띠고 중간에 흰무늬가 있어서 이빨과 유사하다. 그러므로 형문荊門, 호아虎牙라 이름한 것이다. 이 두 산은 의 서쪽 변방이다.” 하였다. 강수江水(장강長江)를 가로질러 부교浮橋관루關樓를 설치하고 찬주欑柱를 세워 물길을 끊었으며, 산을 둘러 진영을 설치하여 육로를 막아서 나라 군대를 막았다.注+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관루關樓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에는 투루闘樓로 되어 있으니, 지금 적을 방어하기 위해 위에 설치한 망루와 같다.” 하였다. (모으다)은 조관徂官작관作管의 두 가지 이니, 나무를 모아 만든 기둥을 찬주欑柱라 한다.
夏六月 吳漢等 擊盧芳이러니 匈奴救之하니 漢等 不利하다
】 여름 6월에 오한吳漢 등이 노방盧芳을 공격하였으나 흉노匈奴가 노방을 구원하니, 오한 등이 승리하지 못하였다.
吳漢 率王常等四將軍兵五萬餘人하고 擊盧芳將賈覽, 閔堪於高柳러니
오한吳漢왕상王常 등 네 장군의 병력 5만여 명을 거느리고 고류高柳에서 노방盧芳의 장수 가람賈覽민감閔堪을 공격하였으나,
匈奴救之하니 漢兵不利注+高柳, 縣名, 屬代郡. 於是 匈奴轉盛하여 鈔暴日增이라
흉노匈奴가 이들을 구원하니, 나라 군대가 승리하지 못하였다.注+고류高柳의 이름이니 대군代郡에 속하였다. 이에 흉노가 더욱 기승을 부려서 노략질과 포악함이 날로 증가하였다.
詔朱祜屯常山하고 王常 屯涿郡하고 破姦將軍侯進 屯漁陽하고 以討虜將軍王霸 爲上谷太守하여 以備匈奴하다
이에 조령詔令을 내려 주호朱祜상산常山에, 왕상王常탁군涿郡에, 파간장군 후진破姦將軍 侯進어양漁陽에 주둔시키고, 토로장군 왕패討虜將軍 王霸상곡태수上谷太守로 삼아 흉노를 방비하게 하였다.
遣來歙, 馬援하여 護諸將馮異等하여 屯長安하다
내흡來歙마원馬援을 보내 여러 장수와 풍이馮異 등을 감독하여 장안長安에 주둔하게 하였다.
帝使來歙으로 悉監護諸將하여 屯長安하고 太中大夫馬援으로 爲之副하다
】 황제가 내흡來歙을 보내 여러 장수를 모두 감독하여 장안長安에 주둔시키고, 태중대부 마원太中大夫 馬援로 삼았다.
上書曰 公孫述 以隴西, 天水 爲藩蔽故 得延命假息注+假, 權也. 息, 氣息也. 假息, 猶言苟延視息之義.하니 今二郡平蕩이면 則述智計窮矣
내흡이 글을 올리기를 “공손술公孫述농서隴西천수天水를 가림막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죽지 않고 겨우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니注+는 임시이고 은 숨 쉬는 것이니, “가식假息”은 구차히 생명을 연장하여 겨우 숨을 쉬고 있다는 뜻과 같은 말이다., 지금 두 이 평정되면 공손술의 지략과 계책이 곤궁해질 것입니다.
宜益選兵馬하고 儲積資糧이니이다 今西州新破 兵人疲饉하니 若招以財穀이면 則其衆可集이리이다
마땅히 군대와 말을 더욱 선발하고 물자와 양식을 많이 저축하여야 합니다. 지금 서주西州(천수天水)가 막 격파되어 병사와 사람들이 피곤하고 굶주린 상태이니, 만약 재물과 곡식을 주어 부르면 무리를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臣知國家所給非一하여 用度不足이나 然有不得已也니이다 帝然之하여 於是 詔於汧 積穀六萬斛하다
은 국가에서 공급하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어서 용도用度가 부족함을 알고 있으나, 이는 부득이한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조령詔令을 내려 에 곡식 6만 (석)을 저장해두게 하였다.
秋八月 率異等하고 討隗純於天水하다
】 가을 8월에 내흡來歙풍이馮異 등을 거느리고 천수天水에서 외순隗純을 토벌하였다.
◑以牛邯爲護羌校尉하다
우한牛邯호강교위護羌校尉로 삼았다.
諸羌 自王莽末 入居塞內하고 金城屬縣 多爲所有 隗囂不能討하고 因就慰納하고 發其衆하여 與漢相拒러라
】 여러 강족羌族왕망王莽의 말년부터 변경 안에 들어와 거주하고 금성金城속현屬縣들을 대부분 소유하였다. 외효隗囂가 이들을 토벌하지 못하고 인하여 위로하고 받아들이고는 이들 병력을 동원하여 나라에 항거하였다.
司徒掾班彪上言호되 今涼州部 皆有降羌하니 羌胡被髮左衽이어늘
사도연 반표司徒掾 班彪가 다음과 같이 상언上言하였다. “지금 양주부涼州部에는 모두 항복한 강족羌族이 있는데, 강족羌族호족胡族은 〈풍습이 달라〉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좌임左衽을 하고 있습니다.
而與漢人雜處하여 習俗旣異하고 言語不通하여 數爲小吏黠人所見侵奪하여 窮恚無聊 致反叛하니
그런데 한족漢族 사람과 뒤섞여 살면서 풍속이 다르고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낮은 관리와 간사한 사람에게 자주 침탈을 당하여, 곤궁하고 분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배반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니,
夫蠻夷寇亂 皆爲此也注+爲, 去聲.니이다 舊制 益州部 置蠻夷騎都尉하고 幽州部 置領烏桓校尉하고 涼州部 置護羌校尉하여
만이蠻夷가 침략하여 어지럽히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注+(때문에)는 거성去聲이다. 옛 제도에 익주부益州部만이기도위蠻夷騎都尉를 설치하고 유주부幽州部영오환교위領烏桓校尉를 설치하고 양주부凉州部호강교위護羌校尉를 설치하여,
皆持節領護하여 治其怨結하고 歲時巡行하여 問所疾苦注+領護, 統領保護之也.하니이다
모두 부절符節을 잡고 보호, 감독하여 원한이 맺힌 것을 다스리고, 세시歲時로 순행하여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는 바를 물었습니다.注+영호領護”는 거느리고 보호함이다.
又數遣使譯하여 通導動靜하며 使塞外羌夷 爲吏耳目하니 州郡 因此可得警備하니이다
또 자주 사자使者역관譯官을 보내 동정動靜을 알렸으며, 변방 밖의 강족羌族이족夷族들로 하여금 관리의 첩자[이목耳目]가 되게 하였으니, 주군州郡이 이를 통하여 경비警備할 수 있었습니다.
今宜復如舊制하여 以明威防하소서 帝從之하여 以牛邯爲護羌校尉하다
지금 마땅히 다시 옛 제도와 같이 하여 밝음과 위엄으로써 방비하소서.” 황제가 그의 말을 따라 우한牛邯호강교위護羌校尉로 삼았다.
封陰就하여 爲宣恩侯하다
음취陰就를 봉하여 선은후宣恩侯로 삼았다.
盜殺陰貴人母鄧氏及弟訢하니 帝甚傷之하여 封貴人弟就하여 爲宣恩侯注+帝追爵貴人父陸, 爲宣恩哀侯, 以就嗣哀侯. 後漢舊制, 惟皇后父封侯, 貴人未正位中宮, 而追爵其父, 非舊也.하고
】 자객이 음귀인陰貴人의 어머니 등씨鄧氏와 아우 음흔陰訢(음흔)을 살해하니, 황제가 몹시 서글퍼하여 음귀인의 아우 음취陰就선은후宣恩侯로 봉하였다.注+황제가 귀인貴人의 아버지 음육陰陸을 추봉하여 선은애후宣恩哀侯로 삼고, 음취陰就애후哀侯의 뒤를 잇게 하였다. 후한後漢의 옛 제도에 황후皇后의 아버지만 에 봉하였는데, 음귀인陰貴人중궁中宮(황후)의 자리를 받지 못하였는데도 그녀의 아버지를 추봉한 것은 옛 제도를 따른 것이 아니다.
復召就兄侍中興하여 欲封之하여 置印綬於前이러니 固讓曰 臣未有先登陷陳之功이어늘
다시 그의 형인 시중 음흥侍中 陰興을 불러 를 봉하고자 해서 인수印綬를 앞에 놓았는데, 음흥이 굳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은 높은 에 먼저 올라가고 적진을 무너뜨린 공이 없습니다.
而一家數人 竝蒙爵土하여 令天下觖望 誠所不願注+登, 上城也. 陳, 讀曰陣.이니이다 帝嘉之하여 不奪其志하다
한 집안의 몇 사람이 모두 관작과 봉토를 받아 천하로 하여금 원망하게 하는 것은 진실로 원치 않는 바입니다.”注+에 오름이다. (진을 치다)은 으로 읽는다. 하니, 황제가 가상히 여겨 그의 뜻을 빼앗지 않았다.
貴人 問其故한대 興曰 夫外戚家 苦不知謙退하여 嫁女 欲配侯王하고 取婦 眄睨公主하니
음귀인이 그 연고를 묻자, 음흥이 대답하기를 “외척外戚의 집안이 겸손할 줄을 몰라서, 딸을 시집보낼 때에는 후왕侯王을 배필로 삼고자 하고 며느리를 취할 적에는 공주公主를 넘보려 하다가 곤궁에 처하니,
愚心實不安也注+眄睨, 斜視也. 富貴有極하니 人當知足이니 夸奢 益爲觀聽所譏니이다
어리석은 나는 마음이 실로 편안치 않습니다.注+면예眄睨”는 흘겨봄(넘보다)이다. 부귀는 한계가 있으니, 사람은 마땅히 만족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지나치게 사치하면, 보고 듣는 이의 비난을 더하게 됩니다.” 하였다.
貴人 感其言하여 深自降挹하여 卒不爲宗親求位注+挹, 音揖. 以器俯而取水曰挹, 人之謙下者, 亦曰挹.하니라
음귀인은 그의 말에 감동하여 깊이 스스로 몸을 낮추고 겸손해서 끝내 종친宗親을 위하여 벼슬자리를 청하지 않았다.注+은 음이 이다. 그릇을 아래로 하여 물을 뜨는 것을 이라 하니, 사람이 겸손하여 몸을 낮추는 것 또한 이라 한다.
역주
역주1 征虜將軍……卒於軍 : “‘卒於軍(군중에서 卒하였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國事에 죽은 것을 가상히 여긴 것이니,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卒于軍’이라고 쓴 것이 8번이다.[卒於軍 何 嘉死事也 終綱目 書卒于軍者八]” ≪書法≫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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