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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7)

자치통감강목(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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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9권 중
漢 光武帝 建武 11년(A.D.35)~漢 光武帝 建武 27년(A.D.51)
乙未年(A.D.35)
岑彭 屯津鄕하여 數攻田戎等호되 不克이라
帝遣吳漢하여 率誅虜將軍劉隆等三將하여 發荊州兵凡六萬餘人 騎五千匹하여 與彭會荊門하다
裝戰船數十艘注+艘, 音騷, 船之總名.어늘 吳漢以諸郡棹卒 多費糧穀이라하여 欲罷之注+棹, 直敎切. 棹卒, 猶言篙師也, 謂持棹行船者也.한대
以爲蜀兵盛하니 不可遣이라하여 上書言狀하다
帝報彭曰 大司馬 習用步騎로되 不曉水戰하니 荊門之事 一由征南公爲重而已注+時, 彭爲征南大將軍, 故稱爲征南公. 言事權盡當歸重於彭.라하다
閏月 岑彭 令軍中하여 募攻浮橋하여 先登者上賞하니 於是 偏將軍魯奇 應募而前하다
東風狂急이라 魯奇船逆流而上하여 直衝浮橋 而欑柱 有反杷鉤하여 奇船 不得去注+反杷鉤者, 旣鉤住敵船, 使不得退, 又逆拒之, 使不得進也.
奇等 乘勢殊死戰하고 因飛炬焚之하니 風怒火盛하여 橋樓崩燒어늘
岑彭 悉軍順風竝進하여 所向無前하니 蜀兵大亂하여 溺死者數千人이라 斬任滿하고 生獲程汎하니 而田戎 走保江州하다
上劉隆爲南郡太守注+上, 時掌切, 謂上請而命之也. 隆, 安衆侯, 宗室也.하고 自率輔威將軍臧宮 驍騎將軍劉歆하여 長驅入江關하여
令軍中無得虜掠하니 所過 百姓 皆奉牛酒迎勞 復讓不受하니 百姓大喜하여 爭開門降이러라
詔彭守益州牧하고 所下郡 輒行太守事하고 彭若出界하면 卽以太守號 付後將軍하여
選官屬守州中長吏注+後將軍者, 將兵繼彭後而進者也.케하다 到江州하여 以其城固糧多하여 難卒拔이라하여 留馮駿守之注+卒, 讀曰猝.하고
自引兵하여 乘利直指墊江하여 攻破平曲하고 收其米數十萬石注+墊, 徒協切. 墊江, 縣名, 屬巴郡. 正義 “平曲, 地名, 在廣漢郡.”하다 吳漢 留夷陵하여 裝露橈繼進注+橈, 音饒, 短檝也. 露橈, 謂露檝在外, 人在船中.하다
先零羌이어늘 以馬援爲隴西太守하여 擊破之하다
◑公孫述 遣王元하여 拒河池어늘 六月 諸將 擊破之하다 使盜殺監護使者來歙이어늘 詔以將軍馬成代之하다
蓋延(≪雲臺三十二將圖≫)蓋延(≪雲臺三十二將圖≫)
公孫述 以王元爲將軍하여 使與領軍環安으로 拒河池注+環, 姓也. 河池縣, 屬武都郡.하다
六月 來歙 與蓋延等으로 進攻元安하여 大破之하고 遂克下辨하고 乘勝遂進注+下辨, 縣名, 屬武都郡.하니 蜀人大懼하여 使刺客刺歙이라
未殊 馳召蓋延注+殊, 絶也. 謂命未殊絶.하니 見歙하고 因伏悲哀하여 不能仰視어늘
叱延曰 虎牙何敢然注+延爲虎牙大將軍, 故以虎牙稱之. 今使者中刺客하여 無以報國이라 呼巨卿하여 欲相屬以軍事어늘 而反效兒女子涕泣乎注+中, 去聲, 下中臣同. 巨卿, 延字.
刃雖在身이나 不能勒兵斬公邪아하니 收淚彊起하여 受所誡하다
自書表曰 臣 夜人定後 爲何人所賊傷하여 中臣要害注+何人, 謂不知何人也.하니 臣不敢自惜이로되 誠恨奉職不稱하여 以爲朝廷羞하노이다
夫理國 以得賢爲本이니 太中大夫段襄 骨鯁可任이니 願陛下裁察하소서
又臣兄弟不肖하여 終恐被罪하오니 陛下哀憐하사 數賜敎督하소서하고 投筆抽刃而絶注+凡爲人所刺者, 刃在身, 猶未死, 抽刃則氣絶矣.하다
帝聞大驚하고 省書攬涕하고 以揚武將軍馬成으로 守中郞將하여 代之하다 歙喪 還洛陽 乘輿縞素臨弔하여 送葬하다
帝自將征蜀이러니 秋七月 次長安하다
◑岑彭及將軍臧宮 大破蜀兵하니 延岑하고 王元 以其衆降하다
公孫述 使其將延岑, 呂鮪, 王元, 公孫恢 悉兵拒廣漢及資中注+恢, 述弟也. 資中, 縣名, 屬犍爲郡.하고 又遣將侯丹하여 率二萬餘人하여 拒黃石注+黃石, 卽黃石灘也. 水經注 “江水自涪陵東出百里, 而屆于黃石.”하다
岑彭 使臧宮으로 將降卒五萬하고 從涪水上平曲하여 拒延岑注+涪, 音浮, 水出廣漢郡剛氐道徼外, 南入于漢. 上, 時掌切, 下同.하고
自分兵하여 浮江下還江州라가 泝都江而上하여 襲擊侯丹하여 大破之注+泝, 音素, 逆也. 都江, 卽成都江也, 在益州成都縣.하다
因晨夜하여 倍道兼行二千餘里하여 徑拔武陽하고 使精騎馳擊廣都하니 去成都數十里 勢若風雨하여 所至皆犇散注+武陽, 縣名, 屬犍爲郡. 廣都, 縣名, 屬蜀郡.하다
聞漢兵在平曲이라 遣大兵逆之러니 及彭至武陽 繞出延岑軍後하니 蜀地震駭注+繞, 纏繞也.
大驚하여 以杖擊地曰 是何神也오하다 延岑 盛兵於沅水注+沅水, 本紀, 作沈水. 水經註 “沈水, 出廣漢縣, 下入涪水.”하니 臧宮 衆多食少하고 轉輸不至
降者皆欲散畔하고 郡邑 復更保聚하여 觀望成敗 欲引還이나 恐爲所及注+及, 通鑑作反, 音翻.이러니
帝遣謁者하여 將兵詣岑彭할새 有馬七百匹이어늘
矯制하여 取以自益하고 晨夜進兵하여 多張旗幟하고 登山鼓譟하고 左步右騎挾船而引하니 呼聲動山谷注+
臧宮(≪雲臺三十二將圖≫)臧宮(≪雲臺三十二將圖≫)
引, 進也.
이라
不意漢軍卒至 登山望之하고 大震恐注+卒, 讀曰猝.이어늘 宮因縱擊大破之하니 斬首溺死者萬餘人이라 水爲之濁이러라
延岑 犇成都하니 其衆悉降하고 軍至陽鄕하니 王元 擧衆降注+陽鄕, 臧宮傳, 作平陽鄕, 逸平字. 平陽鄕, 當在綿竹縣界.하다
帝與公孫述書하여 陳言禍福하고 示以丹靑之信하니 述省書歎息하여 以示所親하다
太常常少 光祿勳張隆 皆勸述降한대 述曰 廢興 命也 豈有降天子哉아하니 左右莫敢復言이라 少, 隆 皆以憂死하다
帝還宮하다
岑彭(≪雲臺三十二將圖≫)岑彭(≪雲臺三十二將圖≫)
冬十月 公孫述 使刺客詐爲亡奴하여 降岑彭이라가 刺殺彭하다
太中大夫監軍鄭興 領其營하여 以俟吳漢至而授之하다 持軍整齊하여 秋毫無犯이라
邛穀王任貴 聞彭威信하고 數千里遣使迎降注+任貴, 越巂夷, 殺太守, 自立爲王.
馬成(≪雲臺三十二將圖≫)馬成(≪雲臺三十二將圖≫)
이러니 彭已被害
帝盡以任貴所獻賜彭妻子하고 蜀人 爲立廟祠之하다
馬成等 破河池, 平武都하고 遂與馬援으로 擊破先零羌하다
先零諸羌數萬人 屯聚寇鈔하여 拒浩亹隘어늘 成與馬援 深入討擊하여 大破之하고 徙降羌하여 置天水, 隴西, 扶風하다
是時 朝臣以金城破羌之西塗遠多寇라하여 議欲棄之注+破羌, 縣名, 屬金城郡.러니
馬援 上言호되 破羌以西 城多完牢하여 易可依固 其田土肥壤하고 灌漑流通注+無塊曰壤.이라
如令羌在湟中이면 則爲害不休하리니 不可棄也라한대 帝從之하다
民歸者三千餘口어늘 爲置長吏하여 繕城郭하고 起塢候하고 開溝洫하여 勸以耕牧하니 郡中樂業注+塢, 於古切, 小障也. 一曰小城, 字或作隖.이러라
又招撫塞外氐, 羌하니 皆來降附 奏復其侯王君長하니 帝悉從之하고 乃罷馬成軍하다
以郭伋爲幷州牧하다
郭伋 爲幷州牧하여 過京師할새 帝問以得失한대 伋曰 選補衆職 當簡天下賢俊이니 不宜專用南陽人이니이다
是時 在位多鄕曲故舊 伋言及之하니라


사정전훈의 자치통감강목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9권 중
한 광무제漢 光武帝 건무建武 11년(A.D.35)~한 광무제漢 光武帝 건무建武 27년(A.D.51)
을미년乙未年(A.D.35)
나라 세조 광무황제世祖 光武皇帝 건무建武 11년이다. 봄 3월에 오한吳漢 등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잠팽岑彭과 회합하여 을 정벌해서 부교浮橋를 깨뜨리고 마침내 강관江關으로 들어갔다.
잠팽岑彭진향津鄕에 주둔하여 여러 번 전융田戎 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자,
황제는 오한吳漢을 보내 주로장군 유융誅虜將軍 劉隆 등 세 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형주荊州의 병력 6만여 명과 기마 5천 필을 동원하여 잠팽과 형문荊門에서 회합하게 하였다.
잠팽이 전선戰船 수십 척을 출발시킬 채비를 하자注+는 음이 이니 배의 총칭이다., 오한은 여러 도졸棹卒(도졸)들이 양곡糧穀을 많이 허비한다 하여 해산하고자 하였다.注+직교直敎이다. 도졸棹卒고사篙師라는 말과 같으니, 노[]를 가지고 배를 가게 하는 자(뱃사공)를 이른다.
그러나 잠팽은 의 군대가 강성하니, 이들을 보내서는 안 된다 하여 글을 올려 상황을 아뢰었다.
황제가 잠팽에게 답하기를 “대사마大司馬(오한)는 보병과 기병은 능숙히 사용하나 수전水戰은 잘 알지 못하니, 형문荊門의 일은 한결같이 정남공征南公(잠팽岑彭)의 의견을 중심으로 결정해야 한다.”注+이때에 잠팽岑彭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이었으므로 그를 정남공征南公이라 칭하였으니, 〈“일유정남공위중一由征南公爲重”은〉 군사지휘권은 모두 마땅히 잠팽에게 중함을 돌려야 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 윤달에 잠팽岑彭군중軍中에 명령하여 부교浮橋를 공격할 병사들을 모집해서 먼저 올라가는 자에게 중한 을 내리게 하니, 이에 편장군 노기偏將軍 魯奇가 모집에 응하여 앞으로 나왔다.
이때에 동풍이 미친 듯이 급하게 불었다. 노기의 배가 물을 거슬러 올라가서 곧바로 부교浮橋에 충돌하였으나 반파구反杷鉤가 있어 노기의 배가 갈 수가 없었다.注+반파구反杷鉤적선敵船을 갈고리로 걸어서 후퇴하지 못하게 하고 또 역으로 막아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노기 등이 형세를 타 결사적으로 싸우고 인하여 횃불을 날려 불사르니, 바람이 거세고 불길이 성하여 부교가 무너지고 망루望樓가 불탔다.
잠팽이 군대를 총동원하여 순풍을 타고 함께 전진하여 향하는 곳마다 앞을 가로막는 자가 없으니, 의 병사들이 크게 혼란하여 익사한 자가 수천 명이었다. 임만任滿을 참수하고 정범程汎을 사로잡으니, 전융田戎이 달아나 강주江州를 지켰다.
잠팽岑彭은 황제에게 아뢰어 유융劉隆남군태수南郡太守로 삼고注+시장時掌이니, 위로 청하여 명령함을 이른다. 유융劉隆안중후安衆侯이니 종실宗室 사람이다., 자신이 직접 보위장군 장궁輔威將軍 臧宮효기장군 유흠驍騎將軍 劉歆을 거느리고서 멀리 치달려 강관江關으로 들어갔다.
잠팽이 군중軍中에게 명하여 노략질을 못하게 하니, 지나가는 곳마다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여 소고기와 술을 받들어 맞이해 위로하였다. 잠팽이 다시 사양하고 받지 않으니, 백성들이 크게 기뻐하여 다투어 성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황제는 조령詔令을 내려 잠팽을 수익주목守益州牧으로 삼고 항복시킨 마다 곧바로 태수太守의 일을 대행하게 하고, 잠팽이 만약 경내를 나가게 되면 즉시 태수太守의 칭호를 뒤에 오는 장군將軍에게 맡기게 하였다.
그리고 잠팽에게 관속 중에서 선발하여 익주 장리益州 長吏의 직무를 대행하게 하였다.注+후장군後將軍”이란 잠팽岑彭의 뒤를 이어서 군대를 거느리고 나오는 자이다. 잠팽은 강주성江州城에 이른 다음, 성이 견고하고 군량이 많아서 대번에 함락하기 어렵다고 판단하여 풍준馮駿을 남겨두어 지키게 하고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자신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승리한 틈을 타서 곧바로 점강墊江(점강)으로 향해 평곡平曲을 공격하여 깨뜨리고 이곳의 쌀 수십만 을 거두었다.注+도협徒協이다. 점강墊江의 이름이니 파군巴郡에 속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평곡平曲은 지명이니 광한군廣漢郡에 있다.” 하였다. 오한吳漢이릉夷陵에 남아서 노요露橈(전선戰船의 일종)를 정비하고서 계속 전진하게 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짧은 노이다. “노요露橈”는 노는 밖에 드러나 있고 사람은 배 안에 있음을 이른다.
】 여름에 선령강先零羌이 배반하자, 마원馬援농서태수隴西太守로 삼아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공손술公孫述왕원王元을 보내 하지河池에서 막자, 6월에 장수들이 이를 격파하였다. 공손술이 자객을 보내 감호사자 내흡監護使者 來歙을 죽이자, 황제가 조령詔令을 내려 장군 마성將軍 馬成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공손술公孫述왕원王元을 장군으로 삼아 영군 환안領軍 環安과 함께 하지河池에서 막게 하였다.注+이다. 하지현河池縣무도군武都郡에 속하였다.
6월에 내흡來歙갑연蓋延 등과 함께 진격하여 왕원과 환안을 대파하고는 마침내 하변下辨을 점령하고 승세를 타고서 진격하니注+하변下辨의 이름이니 무도군武都郡에 속하였다., 사람(공손술)이 크게 두려워하여 자객을 시켜 내흡을 찔러 중상을 입혔다.
내흡이 죽기 전에 말을 달려 갑연을 부르게 하니注+는 숨이 끊어지는 것이니, 〈“미수未殊”는〉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음을 이른다., 갑연은 내흡을 보고는 엎드려 슬피 울면서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내흡이 갑연을 꾸짖기를 “호아虎牙가 어찌 감히 이런단 말인가.注+갑연蓋延호아대장군虎牙大將軍이었으므로 호아虎牙라고 칭한 것이다. 지금 사자使者(내흡)가 자객에게 칼을 맞아 나라에 보답할 수 없게 되어 거경巨卿(갑연)을 불러서 군대의 일을 부탁하고자 하는데, 아녀자처럼 눈물을 흘린단 말인가.注+(해치다)은 거성去聲이니 아래의 “중신中臣”도 같다. 거경巨卿갑연蓋延의 자이다.
칼날이 아직 내 몸에 박혀 있으나, 병사들에게 명하여 을 참수하지 못하겠는가.” 하니, 갑연이 눈물을 거두고 억지로 일어나서 경계하는 말을 받았다.
내흡來歙이 직접 표문을 써서 아뢰기를 “은 밤 이 지난 후에 어떤 사람에게 상해를 당하여 의 치명적인 부위를 다쳤습니다.注+하인何人”은 어떤 사람인지 모름을 이른다. 은 감히 제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으나, 직책을 받들어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조정의 수치가 되는 것을 진실로 안타깝게 여깁니다.
나라를 다스림은 현자賢者를 얻는 것을 근본으로 삼습니다. 태중대부 단양太中大夫 段襄은 임무를 맡길 만한 강직한 신하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잘 살피소서.
의 형제들은 불초不肖하여 끝내 죄를 입을까 염려됩니다. 폐하께서는 가엽고 불쌍히 여기시어 자주 가르침과 독책督責을 내려주소서.” 하고는, 붓을 던지고 박힌 칼날을 뽑아내고 숨을 거두었다.注+무릇 남에게 찔려 부상을 당한 자는, 칼날이 몸에 박혀 있을 때에는 그래도 죽지 않다가 칼날을 빼내면 숨이 끊긴다.
황제는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놀라고 또 편지를 보고 눈물을 흘리고는, 양무장군 마성揚武將軍 馬成수중랑장守中郞將으로 삼아서 내흡을 대신하게 하였다. 내흡의 상여가 낙양洛陽으로 돌아오자, 황제[승여乘輿]가 소복을 입고 가서 조문하여 장송葬送하였다.
】 황제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을 정벌하였는데, 가을 7월에 황제가 장안長安에 머물렀다.
잠팽岑彭장군 장궁將軍 臧宮의 군대를 대파하니, 연잠延岑은 달아났고 왕원王元은 자기의 병력을 데리고 항복하였다.
공손술公孫述이 자신의 장수 연잠延岑여유呂鮪, 왕원王元공손회公孫恢로 하여금 병력을 총동원하여 광한廣漢자중資中에서 나라 군대를 막게 하고注+공손회公孫恢공손술公孫述의 아우이다. 자중資中의 이름이니 건위군犍爲郡에 속하였다., 또 장수 후단侯丹을 보내 2만여 명을 거느리고서 황석탄黃石灘에서 막게 하였다.注+황석黃石황석탄黃石灘이다. ≪수경주水經注≫에 “강수江水부릉涪陵에서 동쪽으로 100리를 흘러서 황석탄黃石灘에 이른다.” 하였다.
잠팽岑彭장궁臧宮으로 하여금 항복한 병졸 5만 명을 거느리고 부수涪水(부수)를 따라 평곡平曲으로 올라가서 연잠을 막게 하고注+는 음이 이니, 물이 광한군 강저도廣漢郡 剛氐道 변방 밖에서 흘러와서 남쪽으로 한수漢水로 들어간다. (올라가다)은 시장時掌이니 아래도 같다.,
자신은 직접 군대를 나누어 강에 배를 띄워 내려와 강주江州로 돌아왔다가 도강都江을 거슬러 올라가 후단侯丹을 습격해서 대파하였다.注+는 음이 이니 거슬러 올라감이다. 도강都江은 바로 성도강成都江이니 익주 성도현益州 成都縣에 있다.
잠팽은 이른 새벽과 밤을 이용하여 평소보다 두 배의 속도로 2천여 리를 행군하여 곧바로 무양武陽을 함락하고, 정예 기병으로 하여금 치달려 광도廣都를 공격하게 하니, 성도成都와의 거리가 수십 리에 불과하였다. 형세가 풍우風雨와 같아 이르는 곳마다 적들이 모두 달아나 흩어졌다.注+무양武陽의 이름이니 건위군犍爲郡에 속하였고, 광도廣都의 이름이니 촉군蜀郡에 속하였다.
】 처음에 공손술公孫述나라 군대가 평곡平曲에 주둔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리하여 대군大軍을 보내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잠팽岑彭무양武陽에 이르러 연잠延岑의 진영 후미를 돌아 나오니, 지역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注+는 감아 도는 것이다.
공손술이 크게 놀라서 지팡이로 땅을 치며 말하기를 “어찌 이리도 신속한가.” 하였다. 연잠이 원수沅水에 많은 병력을 결집하였는데注+원수沅水는 ≪후한서後漢書≫ 〈광무제본기光武帝本紀〉에 침수沈水로 되어 있다. ≪수경주水經註≫에 “침수沈水광한현廣漢縣에서 발원하여 아래로 흘러 부수涪水로 들어간다.” 하였다., 장궁臧宮은 병력이 많고 양식이 부족한데 수송되어오는 물자까지 제때에 도착하지 못하였다.
이에 항복한 자들은 모두 해산하여 배반하려 하였고, 군읍郡邑은 다시 스스로를 지키며 모여서 성패를 관망하였다. 장궁은 군대를 이끌고 돌아가고 싶었으나 적에게 따라잡힐까 두려워하던 터에注+은 ≪자치통감資治通鑑≫에 ,
마침 황제가 알자謁者를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잠팽에게 가게 하였는데, 이때 말 700이 있었다.
장궁은 황제의 명을 사칭하고 말을 취하여 자신의 군대에 보태고 새벽부터 밤늦도록 진군하면서 깃발을 많이 펼치고 산에 올라가 북을 치고 함성을 질렀으며, 왼쪽의 보병과 오른쪽의 기병이 배를 호위하여 나아가니, 고함소리가 산골짜기에 진동하였다.注+은 나아감이다.
연잠延岑은 뜻밖에 나라 군대가 갑자기 이르자, 산에 올라가 바라보고는 크게 두려워하였다.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장궁臧宮이 그 틈을 타고서 군대를 풀어 공격하여 대파하니, 참수되거나 익사한 자가 만여 명이 되어 강물이 이로 인해 흐려졌다.
연잠이 성도成都로 달아나니 그 무리가 모두 항복하였고, 나라 군대가 평양향平陽鄕에 이르니 왕원王元이 군대를 들어 모두 항복하였다.注+양향陽鄕은 ≪후한서後漢書≫ 〈장궁전臧宮傳〉에 평양향平陽鄕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자가 없어졌다. 평양향平陽鄕면죽현綿竹縣 경계에 있다.
황제가 공손술公孫述에게 편지를 보내 화복禍福을 자세히 말하고 단청丹靑과 같은 약속을 보이니, 공손술은 편지를 보고 탄식하면서 친한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태상 상소太常 常少광록훈 장륭光祿勳 張隆이 모두 공손술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자, 공손술이 말하기를 “나의 흥망은 천명天命이다. 어찌 항복한 천자天子가 있겠는가.” 하니, 좌우의 측근들은 감히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상소와 장융은 모두 이를 걱정하다가 죽었다.
】 황제가 환궁하였다.
】 겨울 10월에 공손술公孫述이 자객을 보내 정남대장군 무음후征南大將軍 舞陰侯 잠팽岑彭을 찔러 죽였다.
】 겨울 10월에 공손술公孫述이 보낸 자객이 거짓 도망해온 종으로 위장하여 잠팽岑彭에게 항복하였다가 밤에 잠팽을 찔러 죽였다.
태중대부 감군太中大夫 監軍 정흥鄭興이 그 진영을 통솔하여 오한吳漢이 이르기를 기다려 물려주었다. 잠팽은 매우 질서정연하게 군대를 단속하여 추호도 군율을 범하여 〈민간에 피해를 주는〉 일이 없었다.
공곡왕 임귀邛穀王 任貴는 잠팽의 위엄과 신의를 듣고 수천 리에서 사자使者를 보내서 잠팽을 영접하여 항복하려고 하였는데注+임귀任貴월수越巂(월수)의 이족夷族이니, 태수太守를 죽이고 스스로 서서 이 되었다., 마침 잠팽이 살해를 당한 뒤였다.
황제는 임귀가 바친 물건을 모두 잠팽의 처자에게 하사하였고, 지역 사람들은 그를 위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하였다.
마성馬成 등이 하지河池를 격파하고 무도武都를 평정하고서, 마침내 마원馬援과 함께 선령강先零羌을 격파하였다.
선령先零의 여러 강족羌族 수만 명이 모여 주둔하고 노략질하면서 호미浩亹(고문)의 협소한 곳을 막자, 마성馬成마원馬援이 깊이 쳐들어가서 토벌하여 대파하고는 항복한 강족들을 천수天水, 농서隴西, 부풍扶風으로 이주시켰다.
이때에 조정의 신하들은 금성군 파강현金城郡 破羌縣 서쪽이 길이 멀고 적의 침략이 많다 하여 의논하여 버리고자 하였는데注+파강破羌의 이름이니 금성군金城郡에 속하였다.,
마원이 상언上言하기를 “파강破羌의 서쪽은 이 대부분 견고해서 의지하여 지키기가 쉬우며, 또 농지가 비옥하고 물을 대기가 좋습니다.注+덩어리가 없는 흙을 이라 한다.
만약 강족들이 황중湟中에 있으면 폐해가 그치지 않을 것이니,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자, 황제가 그의 말을 따랐다.
나라로 돌아온 백성이 3천여 명이었는데, 마원은 이들을 위하여 장리長吏를 배치해서 성곽을 수리하고 보루를 축조하고 구혁溝洫(구혁)을 개통하여 밭을 갈고 목축할 것을 권장하니, 안이 생업을 즐거워하였다.注+어고於古이니 작은 성채이다. 일설에는 소성小城이라 하니, 혹 자로도 되어 있다.
또 변방 밖의 저족氐族강족羌族을 불러 진무하니, 모두 와서 항복하고 귀의하였다. 마원이 그들의 후왕侯王군장君長의 지위를 회복시켜줄 것을 청하니, 황제는 그의 말을 모두 들어주고 마침내 마성의 군대를 해산하였다.
곽급郭伋병주목幷州牧으로 삼았다.
곽급郭伋병주목幷州牧이 되어 경사京師를 지날 적에 황제가 정사의 득실을 묻자, 곽급이 대답하기를 “여러 관직을 선발하여 보임할 때에는 마땅히 천하天下현재賢才준걸俊傑을 가려 써야 하니, 오로지 남양南陽 지역의 사람만을 써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때에 지위에 있는 자들 중에 황제의 고향(남양南陽) 친구가 많았으므로 곽급이 이를 언급한 것이다.


역주
역주1 遣吳漢等……遂入江關 : “특별히 쓴 것이다. 浮橋를 깨뜨리지 않으면 江關에 들어갈 수 없으니, 蜀을 쉽게 공격할 수 없다. 공격하여 점령하는 즈음에 성패에 관계되는 일은 ≪資治通鑑綱目≫에서 반드시 특별히 썼다. 漢나라에서는 蜀의 浮橋를 깨뜨린 것을 쓰고, 南唐에서는 後周의 浮梁을 끊은 것을 쓴 것은 모두 특별히 쓴 것이다.[特筆也 浮橋不破 則江關不可入 蜀未易攻也 攻取之際 事有關於成敗者 綱目必特筆書之 漢書破蜀浮橋 唐書斷周浮梁 皆特筆也]다” ≪書法≫
역주2 欑柱 : 나무를 빽빽하게 모아서 묶어 만든 기둥으로, 이것을 물에 박아 넣은 것이다.
역주3 人定 : 사람들이 안정을 찾고 잠자리에 든다는 뜻으로, 亥正(밤 10시)을 가리킨다.
역주4 反으로……翻이다 : 反(번)으로 읽을 경우 뒤집히는 것으로 해석한다.
역주5 (北)[此] : 저본에는 ‘北’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此’로 바로잡았다.
역주6 公孫述……岑彭 : “이때에 公孫述이 자객을 보내 죽인 것을 다시 썼으니, 공손술이 적을 방비하는 방도가 매우 낮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자객을 보내 죽인 것을 쓴 것이 3번이다.[於是 再書述使盜殺 述之所以備禦者下矣 終綱目 書使盜殺 三]다” ≪書法≫

자치통감강목(7) 책은 2019.10.2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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