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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7)

자치통감강목(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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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元嘉十年이요 魏延和二年이라
◯北涼王沮渠牧犍永和元年이라
春正月 魏以樂安王範으로 爲長安鎭都大將注+範, 明元之子也. 都大將又在鎭大將之上.하다
魏主以範年少 更選舊德하여 將軍崔徽張黎爲之副注+徽, 宏之弟也.하니 範謙恭寛惠하고 徽務敦大體하고 黎淸約公平하니 政刑簡易하고 輕徭薄賦하니 關中遂安하다
二月 魏以馮崇으로 爲遼西王하다
◑魏以陸俟 爲散騎常侍하다
俟嘗爲懷荒鎭大將注+懷荒鎭, 魏降高車所置六鎭之一也.이러니 未期歲 高車諸莫弗訟호되 俟嚴急無恩하여 復請前鎭將郎孤注+高車, 酋長謂之莫弗. 一說 “諸莫弗其人名.”어늘
魏主徴俟還하고 以孤代之러니 俟既至言曰 不過期年 郎孤必敗하고 高車必叛이라한대 魏主怒하여 切責之러니 明年 諸莫弗果殺郎孤而叛이라
魏主大驚하여 立召俟問之한대 俟曰 高車不知上下之禮 故臣臨之以威하고 制之以法하여 欲以漸訓導하여 使知分限이러니 而諸莫弗 惡臣所爲하여 訟臣無恩하고 稱孤之美하니
臣以罪去하고 孤獲還鎭이라 悅其稱譽하여 益收名聲하여 専用寛恕待之하리니
無禮之人 易生驕慢이라 不過朞年 無復上下하면 孤所不堪이라 必將復以法裁之하리니 如此則衆心怨懟하여 必生禍亂矣리이다
魏主笑曰 卿身雖短이나 思慮何長也오하고 即日 以爲散騎常侍하다
宋荆州遣兵救成都하여 擊賊破之하다
劉道濟卒커늘 梁儁之裴方明詐爲道濟教命하여 以答籖疏하니 雖其母妻라도 亦不知也러라 方明出擊賊하여 大破之하니 賊退保廣漢이어늘
荆州刺史臨川王義慶 遣巴東太守周籍之將二千人하여 救成都할새 趙廣等 自廣漢으로 至郫 連營百數注+郫, 音疲. 郫縣, 自漢以來屬蜀郡.어늘 籍之與方明等으로 合攻克之하고 進擊廣漢하니 廣等走還涪하다
義慶 道規之子也
夏四月 涼王蒙遜卒하고 子牧犍立하다
蒙遜病甚이어늘 國人以世子菩提幼弱하고 而其兄牧犍 聰頴好學하여 和雅有度量이라하여 立以爲世子注+菩, 薄乎切. 蒙遜取佛書, 以名其子梵言. 菩提, 華言王道也.하다
蒙遜卒커늘 牧犍即位하고 遣使請命于魏한대 魏主謂李順曰 卿言蒙遜死牧犍立 皆驗하니 朕克涼州 亦不遠矣라하고 進號安西將軍하여 寵待彌厚하여 政事無巨細 皆與之參議하고 遣順拜牧犍河西王하다
牧犍尊敦煌劉昞하여 爲國師하여 親拜之하고 命官屬以下하여 皆北面受業하다
五月 林邑遣使하여 入貢于宋하다
◑宋裴方明 擊趙廣等하여 大破平之하다
◑魏人攻燕하다
◑秋九月 宋以甄法崇으로 爲益州刺史하다
法崇至成都하여 收費謙誅之하다
程道養逃入郪山하여 時出爲寇注+郪, 七西․千私二切. 郪山, 在廣漢郡郪縣.하다
冬十一月 楊難當襲宋漢中하여 據之하다
宋主聞호되 梁秦刺史甄法護 刑政不治하여 失氐羌之和注+法護, 法崇之兄也.하고 乃自徙中으로 起蕭思話하여 使代之注+思話前年, 坐繫尚方徒作, 今就徒中徴起而用之.러니
未至 楊難當擧兵하여 襲法護한대 法護棄城奔洋川하니 難當遂有漢中之地注+洋, 音祥, 又如字. 後魏方立洋川郡於漢中之西鄕縣, 此蓋因其地有洋水. 故謂之洋川.하다
靈運好爲山澤之遊하여 窮幽極險하여 從者數百人 伐木開徑하니 百姓驚擾하여 以爲山賊이라
會稽太守孟顗 表其有異志한대 靈運詣闕自陳이어늘 上以爲臨川内史러니 靈運遊放自若하여 爲有司所糾어늘
遣使收之한대 靈運執使者하여 興兵逃逸하여 作詩曰 韓亡子房奮이요 秦帝魯連恥注+靈運自以世爲晉臣, 故賦是詩. 追討擒之하여 廷尉論正斬刑이어늘 上愛其才하여 降死徙廣州하다
或告호되 靈運令人買兵器하고 結徤兒하여 欲於三江口 簒取之라가 不果注+水經 “溫水出牂柯夜郞縣, 東至鬱林廣鬱縣爲鬱水. 灕水出陽海山, 南過蒼梧荔浦縣, 又南至廣信縣入于鬱. 封水出臨賀郡馮乘縣西牛屯山, 西南流入廣信縣, 南流注下鬱水.” 此蓋三水所會之地, 謂之三江口.라한대 詔於廣州 棄市하다
靈運恃才放逸하여 多所陵忽이라 故及於禍하다


宋나라 太祖 文帝 劉義隆 元嘉 10년이고, 北魏 世祖 太武帝 拓跋燾 延和 2년이다.
北涼王 沮渠牧犍 永和 원년이다.
[綱] 봄 정월에 北魏가 樂安王 拓跋範을 長安으로 삼았다.注+① 拓跋範은 明元帝의 아들이다. 都大將은 또한 鎭大將의 위에 있다.
[目] 魏主는 拓跋範의 나이가 적다고 해서 다시 오랫동안 덕망이 있는 이를 선발하여 將軍 崔徽와注+① 崔徽는 의 아우이다. 張黎를 副將으로 삼았다. 탁발범은 겸손하고 공손하며 관대하고 은혜가 있고, 최휘는 힘써 大體를 돈독하게 하였고, 장려는 청렴하고 검약하며 공평하였다. 정치와 형벌을 簡易하게 하고, 徭役이 가볍게 하며 부세를 줄이니 關中이 마침내 편안해졌다.
[綱] 2월에 北魏가 馮崇을 遼西王으로 삼았다.
[綱] 北魏가 陸俟를 散騎常侍로 삼았다.
[目] 예전에 陸俟가 일찍이 懷荒鎭大將이注+① 懷荒鎭은 北魏가 高車를 항복받고 설치한 의 하나이다. 되었는데 1년이 못 되어 高車의 여러 莫弗(酋長)들이 호소하기를 육사가 엄격하고 성급하여 은혜가 없다고 하여 다시 이전의 鎭將 郎孤를 〈임명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魏主가 육사를 소환하여 돌아오게 하고 낭고로 교대시켰다. 육사가 도착하고 나서 말하기를 “1년을 넘기지 않아 낭고는 반드시 실패하고 高車가 반드시 배반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魏主가 노하여 크게 꾸짖었다. 다음 해에 여러 莫弗들이注+② 高車에서는 酋長을 莫弗이라고 한다. 일설에 “諸莫弗은 사람 이름이다.”라고 한다. 과연 낭고를 죽이고 배반하였다.
魏主가 크게 놀라서 즉시 육사를 불러서 물었는데, 육사가 말하기를 “고차는 위아래의 禮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臣이 위엄으로 임하고 법으로 제재하여 그들을 점차 訓導하여 분수를 알게 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莫弗들은 신이 하는 것을 싫어하여 신을 은혜가 없다고 호소하고 낭고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였습니다.
신이 죄를 받아 떠나고 낭고가 懷荒鎭으로 돌아가게 되었으므로, 칭찬받는 것을 기뻐하여 더욱 名聲을 얻으려 하여 오로지 느긋이 용서하는 것으로 대하였을 것입니다.
禮가 없는 사람은 쉽게 교만함이 생기므로 1년을 넘기지 않아 다시 위아래의 예가 없으면 낭고는 감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반드시 다시 법으로 제어하게 되었을 것이니, 이와 같으면 대중들이 마음 속으로 원망하여 반드시 禍亂을 일으키게 되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魏主가 웃으면서 말하기를 “卿은 키가 비록 작으나 생각이 어찌 그리 장대한가.”라고 하고, 바로 그날에 散騎常侍로 삼았다.
[綱] 宋나라 荆州에서 군대를 보내어 成都를 구원하여 적도들을 공격해 격파하였다.
[目] 劉道濟가 卒하자 梁儁之와 裴方明이 유도제의 教命을 속여 만들어서 에 답을 하였는데, 비록 그의 어머니와 아내도 또한 알지 못하였다. 배방명이 출격하여 적도들을 크게 파괴하니 적도들이 후퇴하여 廣漢을 지켰다.
荆州刺史 臨川王 劉義慶이 巴東太守 周籍之를 보내어 2천 명을 지휘하여 成都를 구원하게 하였다. 趙廣 등이 廣漢에서 郫縣(피현)까지注+① 郫는 음이 疲이다. 郫縣은 漢나라 이래로 蜀郡에 속하였다. 1백여 군영을 연이어 놓았는데, 주적지가 배방명 등과 연합 공격하여 승리하고 廣漢으로 진격하니 趙廣 등이 도주하여 涪城으로 돌아갔다.
劉義慶은 劉道規의 아들이다.
[綱] 여름 4월에 北涼王 沮渠蒙遜이 卒하자 아들 沮渠牧犍이 즉위하였다.
[目] 沮渠蒙遜이 질병이 악화되자, 나라 사람들이 世子 菩提(보리)가注+① 菩는 薄乎의 切이다. 沮渠蒙遜은 佛書에서 취하여 그 아들 이름을 梵語로 지었다. 菩提는 중국말로 王道이다. 유약하고 그 형 沮渠牧犍이 총명하며 배움을 좋아하여 온화하고 고상하면서 도량이 있다고 하여 그를 세워 세자로 삼았다.
저거몽손이 卒하자 저거목건이 즉위하고 사신을 보내어 北魏에 〈이를 승인해주는〉 命을 청하였다. 그런데 魏主가 李順에게 말하기를 “卿이 말한 저거몽손이 죽으면 저거목건이 즉위한다고 한 것이 모두 맞았다. 朕이 涼州를 정복할 날도 멀지 않았다.”라고 하고, 이순의 호칭을 安西將軍으로 올려서 총애와 대우를 더욱 크게 하여 政事를 크고 작은 일에 관계없이 모두 그와 함께 상의하고, 이순을 보내 저거목건을 河西王으로 임명하였다.
저거목건은 敦煌 사람 劉昞(유병)을 높여서 國師로 삼아 직접 절을 올리고 官屬 이하 사람들에게 명하여 모두 北面을 하고 受業하게 하였다.
[綱] 5월에 林邑에서 사신을 보내어 宋나라에 공물을 바쳤다.
[綱] 宋나라 裴方明이 趙廣 등을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여 평정하였다.
[綱] 北魏 사람들이 北燕을 공격하였다.
[綱] 가을 9월에 宋나라가 甄法崇을 益州刺史로 삼았다.
[目] 甄法崇이 成都에 이르러 費謙을 체포하여 주살하였다.
程道養이 郪山으로注+① 郪는 七西와 千私의 두 가지 切이다. 郪山은 廣漢郡 郪縣에 있다. 도망해 들어가서 수시로 나와 약탈하였다.
[綱] 겨울 11월에 楊難當이 宋나라 漢中을 습격하여 점거하였다.
[目] 宋主가 “梁州․秦州刺史 甄法護가注+① 甄法護는 甄法崇의 형이다. 형법과 정무를 잘 다스리지 못하여 氐族․羌族과의 우호 관계를 그르쳤다.”는 것을 듣고 마침내 勞役 죄수 중에서 蕭思話를 기용하여 견법호의 후임으로 삼았다.注+② 蕭思話는 지난해에 죄에 연루되어 尙方에 구금되어 노역을 하였는데, 지금 노역자 중에서 부름을 받아 기용된 것이다.
아직 도착하기 전에 楊難當이 군사를 일으켜서 견법호를 습격하였는데, 견법호가 성을 버리고 洋川으로注+③ 洋은 음이 祥이고, 또 본음대로 읽는다. 後魏(北魏)가 막 洋川郡을 漢中의 西鄕縣에 설립하였으니, 이것은 그 지역에 洋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洋川이라고 하였다. 도주하니 양난당이 마침내 漢中 지역을 차지하였다.
[綱] 宋나라 謝靈運이 죄를 지어서 주살되었다.
[目] 謝靈運은 산과 못에 노니는 것을 좋아하여 깊고 험한 곳을 끝까지 가서 〈유람하였으므로〉 따르는 사람 수백 명이 나무를 자르고 길을 만드니, 백성들이 놀라고 동요하여 山賊이라고 하였다.
會稽太守 孟顗(맹의)가 표문을 올려서 사영운에게 반란할 의도가 있다고 하였는데 사영운이 대궐에 나아가서 스스로 진술하였다. 上이 사영운을 臨川内史로 삼았는데, 사영운은 놀며 방종하게 지내기를 태연자약하게 하여 有司에게 탄핵을 받았다.
魯仲連不肯帝秦(魯仲連이 秦을 帝로 여기려 하지 않다)魯仲連不肯帝秦(魯仲連이 秦을 帝로 여기려 하지 않다)
사신을 보내 사영운을 체포하게 하였는데 사영운이 사신을 잡아두고서 군사를 일으켜 도주하고는 詩를 지어 말하기를 “韓나라가 망하자 이 떨쳐 일어났고, 秦나라를 帝로 여기는 것은 이 부끄러워하였네.”注+① 謝靈運은 스스로 대대로 晉나라 신하라고 생각하였기에 이 詩를 지었다.라고 하였다. 추격하여 사영운을 토벌해 사로잡아서 廷尉가 斬刑으로 論定하니, 上이 사영운의 재주를 아껴서 사형에서 죄를 경감해주어 廣州로 유배를 보냈다.
어떤 사람이 고발하기를 “사영운이 사람을 시켜서 兵器를 구입하고 건장한 사람들과 결탁하여 자신을 三江口로注+② ≪水經注≫에 “溫水는 牂柯郡 夜郞縣에서 발원하여 동쪽으로 가서 鬱林郡 廣鬱縣에 이르러 鬱水가 된다. 灕水는 陽海山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가서 蒼梧郡 荔浦縣을 지나고, 또 남쪽으로 가서 廣信縣에 이르러 울수로 들어간다. 封水는 臨賀郡 馮乘縣 서쪽 牛屯山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가서 광신현으로 흘러 들어가고, 남쪽으로 가서 울수로 흘러 들어간다.”라고 하였다. 여기는 세 갈래 물이 모이는 곳이어서 三江口라고 한다. 탈출시키려다가 성공하지 못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조서를 내려서 廣州에서 棄市의 형벌에 처하게 하였다.
사영운은 재주를 믿고 방탕한 짓을 하여 능멸한 일이 많았으므로 재앙이 미친 것이다.


역주
역주1 鎭都大將 : 北魏가 변경에 鎭을 설치하였는데 그 관리들의 우두머리이다. 관할 지역 내의 군사와 민전을 담당하였다. 지위가 높아 宗室의 사람을 임명하였다. 보통 그 아래 都副將을 두었다. 다만 史書에는 鎭都大將과 鎭大將을 혼용하고 있다. ≪資治通鑑新註≫(陝西人民出版社, 1998)에서는 鎭都大將, 鎭大將, 鎭將으로 등급을 나누었으나 그 근거가 불명확하다.
역주2 崔宏 : 崔浩의 아버지이다.
역주3 六鎭 : 北魏 太武帝 때 설치된 북방의 6개 軍鎭을 말한다. 이는 柔然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지금의 山西省 북쪽에서 內蒙古 지역에 설치하였다. 沃野鎭, 懷朔鎭, 武川鎭, 撫冥鎭, 柔玄鎭, 懷荒鎭으로 이루어졌다. 北魏 초기에는 이 六鎭을 중시하여 종실의 자제나 주요 무장이나 인물들을 鎭將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北魏가 洛陽으로 천도한 이후 그 지위가 격하되었다. 이에 불만을 가진 육진의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北魏가 멸망하게 된다. 이들은 北周, 隋, 唐으로 이어지는 지배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역주4 籖疏 : 의견을 써넣은 公文과 上疏를 말한다.
역주5 宋謝靈運 有罪誅 : “謝靈運의 죄는 〈漢나라〉 薄昭에 비교할 만하니 ‘誅’라고 기록하는 것이 마땅하다.[靈運之罪 薄昭之比也 書誅宜矣]” ≪書法≫ 薄昭는 漢 文帝의 어머니인 薄太后의 오빠로, 代王으로 있던 文帝를 옹립하고 장군에 올랐으나 훗날 사신을 죽였다. 문제는 외숙을 차마 죽일 수는 없고, 그렇다고 법을 폐지하고 살려둘 수도 없어 公卿과 여러 신하들을 시켜 그 집에 가서 哭을 하게 하니, 박소는 자살하였다.(≪史記≫ 권10 〈孝文帝本紀〉)“謝靈運은 謝奕의 손자인데, 그 詩를 살펴보면 ‘韓亡子房奮(韓나라가 망하자 張良이 격분하였다.)’의 구절이 있는 것은 의도가 없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謝靈運은 이미 宋나라에 벼슬하여 그 녹봉을 받아먹었으니 이미 子房과는 다른데도 군사를 일으켜서 도주하였으니 그 의도가 장차 무엇을 하려는 것인가. 기록하기를 ‘宋謝靈運’이라고 하였으니 사영운은 진실로 宋나라 신하이다. 그런데 ‘有罪’라고 하고 ‘誅’라고 하였으니, 사령운이 비록 자기의 패악을 스스로 꾸미려 하였으나 오히려 할 수 있겠는가.[靈運謝奕之孫 觀其詩 有韓亡子房奮之句 似不爲無意 然靈運既仕宋朝而食其禄 已與子房異矣 興兵逃逸 其志將何爲哉 書曰宋謝靈運 則靈運固宋之臣也 曰有罪曰誅 靈運雖欲自文其悖 尚可得乎]” ≪發明≫
역주6 子房 : 漢나라 張良의 자이다. 그의 先代는 戰國時代 韓나라의 다섯 왕에 걸쳐 재상이 되었다. 韓나라가 망한 뒤에 장량은 博浪沙에서 秦 始皇을 습격했으나 실패하고, 下邳에 은신하고 있을 때 黃石公으로부터 ≪太公兵法書≫를 물려받았다고 한다. 陳勝․吳廣의 난이 일어났을 때 漢 高祖의 진영에 속하여 謀臣으로서 크게 업적을 남겨 마침내 秦나라를 멸망시키고 漢나라 시대를 열게 하였다.(≪史記≫ 권55 〈留侯世家〉)
역주7 魯仲連 : 戰國時代 사람이다. 유세하는 사람이 秦나라를 帝로 받들자고 말하자, 노중련이 말하기를 “저 秦나라는 禮義를 버리고 首功(전쟁에서 얻은 적의 머리)을 숭상하는 나라이다. 만일 秦나라를 황제로 받든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겠다.”라고 하니, 의논이 중지되었다.(≪史記≫ 권83 〈魯仲連列傳〉)

자치통감강목(17) 책은 2021.11.0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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