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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의 中山王 元英이 義陽에 도착하여 三關 지역을 빼앗으려고 먼저 그 계책을 세워서 말하기를
“삼관이 서로 의지하는 것이 좌우의 손과 같으니, 만약 하나의 관문을 점령한다면, 두 곳의 관문은 공격하지 않고도 격파할 수 있다. 어려운 곳을 공격하는 것은 쉬운 곳을 공격하는 것만 못하니, 먼저 東關을 공격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注+① 東關은 武陽關이다.
또 그들이 동관에서 세력을 합칠까 두려워 長史 李華에게 다섯
을 거느리고 西關으로 향하게 하여 그들의 軍勢를 분산시키게 하고,
注+② “五統”은 다섯 統軍이 거느리는 병력이다. 西關은 平靖關이다. 자신은 여러 군대를 감독하여 동관으로 향하여 공격하였다.
6일 만에 성을 함락하고 진격하여 廣峴과 西關을 취하니, 梁나라의 장수 馬仙琕 등이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梁主(蕭衍)가 韋叡를 시켜서 마선변을 구원하도록 하니, 위예가 安陸에 도착하여 성의 높이를 2丈 남짓 증축하고, 다시 커다란 해자를 파고 높은 망루를 세웠다.
군사들이 그가 겁을 먹었다고 비방하자, 위예가 말하기를 “장수가 되어 겁을 낼 때가 있어야 하니, 오로지 용맹만 앞세워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다.
원영은 급히 마선변을 추격하여
을 복수하려고 하다가 위예가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침내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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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魏主(元恪)가 中書舍人 董紹를 보내어 반란을 일으킨 성의 백성들을 위로하도록 하였는데, 白早生이 동소를 가두어 建康으로 보냈다.
呂僧珍이 동소와 말을 나누어 보고는 그의 文才를 아껴서 梁主(蕭衍)에게 말하니, 梁主가 사신을 보내어 동소에게 말하기를 “이제 卿의 귀환을 허락하고, 卿으로 하여금 두 나라의 우호관계를 맺게 하고자 하니, 피차간에 백성들을 쉬도록 하는 것이 어찌 좋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이어서 불러 만나보고 위로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러 해 동안 전쟁을 벌여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으니, 나는 이 때문에 〈우호관계를 맺고 싶다고〉 먼저 말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 卿은 마땅히 나의 이런 뜻을 자세히 알려야 할 것이다. 君主를 세우는 것은 백성을 위해서인데, 백성들의 윗자리에 있으면서 어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동소가 北魏로 돌아가서 말을 전하였는데, 魏主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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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당시에 魏主(元恪)가 오로지 釋氏만을 숭상하고, 유학의 經傳을 숭상하지 않았는데,
中書侍郎 裴延儁이 상소를 올리기를 “漢나라 光武帝와 魏나라 武帝(曹操)는 비록 전쟁터에 있을 때에도 책을 읽지 않은 적이 없었고, 先帝(孝文帝)께서는 도읍을 옮기고 행군하는 도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으셨으니, 참으로 학문에 많은 유익한 점이 있어서 잠시라도 그만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께서는 친히 〈佛書의〉 큰 깨달음을 강론하시니, 티끌만큼 가려진 것도 모두 열리게 될 것입니다.
注+① 〈“塵蔽俱開”가〉 ≪資治通鑑≫에는 “凡在瞻聽 塵蔽俱開(무릇 보고 듣는 것에 티끌만큼 가려진 것도 모두 열리게 될 것입니다.)”로 되어 있다. 그러나 五經은 세상을 다스리는 모범이니, 응당 일을 처리하는 데 우선으로 삼아야 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불경과 오경을〉 교대로 열람하여 양쪽을 모두 갖추신다면 안팎이 모두 온전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당시 佛敎가 洛陽에서 융성하여 沙門으로 西域에서 온 자들이 3천여 명이었는데, 魏主가 별도로 그들을 위해 1천여 칸의 永明寺를 건립하여 그들을 거처하도록 하였다.
處士인 馮亮이 좋은 생각이 있어서 魏主가 그에게 嵩山에서 경치가 좋은 곳을 택하여 閑居寺를 세우도록 하였는데, 바위와 골짜기 및 토질과 나무가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원근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풍속을 계승하여 부처를 섬기지 않는 이가 없어 延昌 연간에 이르러서는 州와 郡에 모두 1만 3천여 곳의 사찰이 있었다.
注+② 延昌은 北魏 世宗 말년의 연호(512~515)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