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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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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六年이라
秦太初六이요 燕建興六이요 後秦建初六이요 魏登國六年이라
苟曜 密召秦主登하여 許爲内應하니 自曲牢赴之하여 軍于馬頭原注+① 曲牢, 在杜縣東北. 馬頭原之地, 蓋在長安東.이러니 後秦主萇 引兵逆戰이어늘 擊破之하고 斬其右將軍呉忠하다
收兵復戰이어늘 姚碩德曰 陛下愼於輕戰하여 每欲以計取之러니 今失利而更前 何也잇고
萇曰 登 用兵遲緩하고 不識虛實이러니 今輕兵直進 此必苟曜與之有謀也 緩之則其謀得成이라 及其未合하여 急擊之耳니라
遂進戰하여 大敗之하니 退屯郿注+② 郿, 縣名, 屬右扶風.하다
西燕 寇河南이어늘 太守楊佺期 擊破之注+① 佺, 音銓. 佺期, 亮之子也.하다
◑ 魏王珪 遣其弟觚하여 如燕하다
遣趙王麟하여 會魏兵하여 伐賀訥破之注+① 賀染干謀殺其兄訥, 訥知之, 擧兵相攻. 魏王珪告于燕, 請爲鄕導以討之, 燕主垂遣麟, 將兵繫訥禽之.러니
하여 言於燕主垂曰 臣 觀拓跋珪擧動하니 終爲國患이라 不若攝之還朝하고 使其弟監國事니이다 垂不從注+② 攝, 錄也, 收也.이러니
至是하여 珪遣觚하여 獻見於燕하니 垂衰老하고 子弟用事 留觚以求良馬어늘 珪弗與하고 遂與燕絶하다
秋九月 注+① 餘杭縣, 漢屬會稽郡. 顧來曰 “縣, 秦始皇立, 後漢分屬吳郡, 吳分屬吳興郡.”하다
弘之 論殷浩宜加贈諡라하고 因敍桓溫不臣之迹注+① 弘之, 汪之孫也.하니 王珣 溫故吏也 以爲溫 廢昏立明하여 有忠貞之節이라하여 遂黜弘之注+② 珣先爲溫府主簿. 廢昏立明, 謂廢海西公, 拔立簡文帝也.하다
柔然部人 世服於代러니 及秦滅代 遂附於劉衛辰하다
魏王珪卽位 高車諸部 皆服注+① 高車, 敕勒也, 俗乘高輪車, 故亦號高車部. 李延壽曰 “高車, 蓋古赤狄之餘種也. 初號爲狄歷, 北方以爲高車․丁零. 其遷徙隨水草, 衣皮食肉, 與柔然同, 唯車輪高大, 輻數至多.”호되 獨柔然 不下어늘 珪引兵擊之하니 柔然 擧部遁走
珪追奔六百里하니 諸將曰 賊遠糧盡하니 不如早還이니이다 珪曰 殺副馬 足以爲三日食矣注+② 凡北人用騎兵, 各乘一馬, 又有一馬爲副馬.라하고
乃復倍道追之하여 及於大磧南牀山下하여 大破之하고 悉徙其部衆於雲中注+③ 是時, 魏盛, 跨有代北, 柔然西犇南牀山, 蓋在大磧之西. 北史帝紀, 作南商山.하다
翟遼死하니 子釗 代領其衆하다
◑ 劉衛辰 攻魏南部어늘 魏王珪 大破之한대 衛辰 走死하니 諸部悉降하다
劉衛辰 遣子直力鞮하여 率衆九萬하고 攻魏南部어늘 魏王珪 引兵五六千人하여 大破之하고 乘勝追奔하니 部落 駭亂이라
珪遂直抵其所居悅跋城注+① 考之載記, 悅跋城, 卽代來城也.하니 衛辰父子 出走어늘 分遣輕騎追之하여 獲直力鞮하니 衛辰 爲其下所殺이라
珪誅其宗黨五千人注+② 報元年衛辰藉兵於秦以滅代之怨也.하니 河南諸部 悉降이라 獲馬三十餘萬匹 牛羊四百餘萬頭하니 國用 由是遂饒
衛辰少子勃勃 亡奔薛干部注+③ 薛干, 本鮮卑別部之人名, 其後因以爲號焉.하니 薛干部 送於没奕干한대 没奕干 以女妻之하다
十二月 秦主登 攻安定이어늘 後秦主萇 擊敗之하다
秦主登 攻安定하니 後秦主萇 如陰密以拒之할새 謂太子興曰 苟曜聞吾北行하면 必來見汝하리니 汝執誅之注+① 自長安如陰密, 爲北行.하라
旣行 曜果至長安이어늘 誅之하다 敗登於安定城東하니 退據路承堡注+② 路承, 人姓名, 築堡自守, 時因以爲名.하다
置酒高會러니 諸將 皆曰 若値魏武王이면 不令此賊至今이니 陛下將牢太過耳注+① 姚萇僭號, 追謚兄襄, 爲魏武王. 將牢, 一作持牢, 謂持守牢固, 猶言持重. 兩秦兵相持七年, 萇愼於輕戰, 每欲以計取之. 故曰將牢太過.로소이다
笑曰 吾不如亡兄 有四하니 身長八尺五寸이요 臂垂過膝하여 人望而畏之一也 將十萬之衆하여 望麾而進하여 前無横陣 二也 溫古知今하고 講論道藝하며 收羅英儁 三也 董帥大衆하여 人盡死力 四也로되 所以得建立功業하여 驅策諸賢者 正望算略中有片長耳로라


【綱】 晉나라(東晉) 孝武皇帝 太元 16년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登 太初 6년이고, 燕나라(後燕) 世祖 慕容垂 建興 6년이고, 後秦 太祖 姚萇 建初 6년이고, 魏나라(北魏) 太祖 道武帝 拓跋珪 登國 6년이다.
【綱】 여름 5월에 秦主 符登이 後秦主 姚萇과 싸워 秦나라(前秦) 군대가 크게 패하였다.
【目】 苟曜가 은밀히 秦主 符登을 불러 内應이 될 것을 약속하니, 부등이 曲牢에서 달려가 馬頭原에 군대를 주둔하였다.注+① 曲牢는 杜縣 동북쪽에 있다. 馬頭原 지역은 아마도 長安의 동쪽에 있었을 것이다. 後秦主 姚萇이 병력을 인솔하고 가서 맞아 싸웠으나, 부등이 그를 격파하고 그의 右將軍 呉忠을 참수하였다.
요장이 병력을 수습하여 다시 싸우자, 姚碩德이 말하기를 “폐하는 가볍게 싸우는 것을 조심하여 매번 계략으로 취하려 하셨는데, 지금은 승리하지 못하였는데도 다시 전진함은 어째서입니까?” 하니,
요장이 말하기를 “부등은 용병하는 것이 더디고 허실을 모르는 자인데 지금 경무장한 군사가 곧바로 전진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구요와 함께 모의를 했을 것이다. 느슨히 대처하면 그들의 계책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직 연합하지 않았을 때에 미쳐서 급히 공격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나아가 싸워서 부등을 대파하니, 부등이 후퇴하여 郿縣에 주둔하였다.注+② 郿는 縣의 이름이니, 右扶風에 속하였다.
【綱】 西燕이 〈晉나라(東晉)의〉 河南을 침략하자, 太守 楊佺期가 격파하였다.注+① 佺은 음이 銓이니, 楊佺期는 楊亮의 아들이다.
【綱】 魏王(北魏) 拓跋珪가 아우 拓跋觚를 燕나라(後燕)에 보내었다.
【目】 처음에 燕나라가 趙王 慕容麟을 보내어 魏나라 군대와 회합하여 賀訥을 공격해서 격파하였는데,注+① 賀染干이 그 형 賀訥을 죽일 것을 도모하였는데, 하눌이 이것을 알고 군대를 일으켜 서로 공격하였다. 魏王 拓跋珪가 燕나라에 고하여 鄕導가 되어서 토벌할 것을 청하니, 燕主 慕容垂가 慕容麟을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하눌을 구속하여 사로잡았다.
모용린이 돌아가서 燕主 慕容垂에게 말하기를 “신이 拓跋珪의 거동을 보니, 끝내 우리 나라의 우환이 될 것입니다. 그를 잡아들여 조정으로 데려오고 그의 아우 拓跋觚로 하여금 나랏일을 감독하게 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였으나 모용수가 따르지 않았다.注+② 攝은 체포함이고 거둠이다.
이때에 이르러서 탁발규가 탁발고를 보내어 연나라에 공물을 바치고 알현하니, 모용수가 노쇠하여 자제들이 권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탁발고를 머물러두고 좋은 말을 요구하자, 탁발규가 주지 않고 마침내 연나라와 절교하였다.
【綱】 가을 9월에 〈晉나라(東晉)가〉 博士 范弘之를 내쳐 餘杭令으로 삼았다.注+① 餘杭縣은 漢나라 때에는 會稽郡에 속하였다. 顧來가 말하기를 “여항현은 秦 始皇 때에 세웠는데, 後漢 때에 나누어 吳郡에 소속시켰고, 吳나라 때에 나누어 吳興郡에 소속시켰다.”라고 하였다.
【目】 范弘之가 논하기를 “殷浩에게 마땅히 贈諡를 내려야 한다.”라고 하고, 인하여 桓溫이 신하 노릇 하지 않은 자취를 말하니,注+① 范弘之는 范汪의 손자이다. 환온의 옛 掾吏였던 王珣이 말하기를 “환온은 어리석은 군주를 폐하고 밝은 군주를 세워서 忠貞의 절개가 있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범홍지를 내쳤다.注+② 王珣이 예전에 桓溫의 府中의 主簿가 되었었다. 어리석은 군주를 폐위하고 밝은 군주를 세웠다는 것은 海西公(司馬奕)을 폐위하고 簡文帝를 뽑아 세운 것을 이른다.
【綱】 겨울 10월에 魏王(北魏) 拓跋珪가 柔然을 공격하여 대파하고 유연을 雲中으로 옮겼다.
【目】 처음에 柔然의 부족 사람들이 대대로 代나라에 복종하였는데, 秦나라(前秦)가 대나라를 멸망시키자 마침내 劉衛辰에게 귀부하였다.
魏王 拓跋珪가 즉위하자 高車의 여러 부족이 모두 복종하였으나注+① 高車는 바로 이니, 세속에서 바퀴가 높은 수레를 타고 다니므로 또한 高車部라 하기도 한다. 李延壽가 말하였다. “고차는 옛날 赤狄의 남은 종족이다. 처음에는 狄歷이라고 이름했었는데, 北方에서는 高車․丁零이라고 하였다. 이들은 水草를 따라 옮겨다니고 짐승의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짐승의 고기를 먹는 것이 柔然과 같았는데, 오직 수레바퀴가 높고 크고 바큇살의 수가 지극히 많다.”라고 하였다. 홀로 유연이 항복하지 않았다. 탁발규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유연을 공격하니, 유연이 온 부족을 데리고 도망하였다.
탁발규가 유연을 추격하여 600리를 달려가니, 장수들이 말하기를 “적은 멀리 있는데 군량은 다하였으니, 서둘러 돌아가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탁발규가 말하기를 “副馬를 잡으면 충분히 3일의 양식이 된다.”라고 하고注+② 무릇 북쪽 지역 사람들은 騎兵을 사용할 적에 각각 한 마리의 말을 타고 또다시 한 마리의 말을 두어서 副馬로 삼는다.
마침내 다시 행군 속도를 倍加하여 추격해서 大磧의 南牀山 아래에서 따라잡아 유연을 대파시키고 그 부족의 무리를 모두 雲中으로 옮겼다.注+③ 이때에 魏나라(北魏)가 번성하여 代나라 북쪽 지역을 점유하자, 柔然이 서쪽 南牀山으로 달아났으니, 아마도 大磧의 서쪽에 있을 것이다. ≪北史≫ 〈魏本紀〉에는 南商山으로 되어 있다.
【綱】 〈丁零의〉 翟遼가 죽으니, 아들 翟釗(적소)가 대신하여 그 무리를 거느렸다.
【綱】 〈匈奴의〉 劉衛辰이 魏나라(北魏)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자 魏王 拓跋珪가 대파하였는데, 유위신이 패주하다가 죽으니 여러 부족이 모두 항복하였다.
【目】 劉衛辰이 아들 劉直力鞮(유직력제)를 보내어 9만 명의 병력을 인솔하고 魏나라의 南部 지방을 공격하자, 魏王 拓跋珪가 5, 6천 명의 병력을 인솔하여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도망하는 적을 추격하니, 유위신의 부락이 놀라 혼란하였다.
탁발규가 마침내 직접 그들이 거주하는 悅跋城으로 쳐들어가니,注+① ≪晉書≫ 〈載記〉로 상고해보면 悅跋城은 바로 代來城이다. 유위신 부자가 나가 도망하였다. 탁발규가 경무장한 기병을 나누어 보내어 추격해서 유직력제를 사로잡으니, 유위신이 그의 부하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탁발규가 그의 宗黨 5천 명을 주살하니,注+② 太元 원년(376)에 劉衛辰이 秦나라(前秦)에서 군대를 빌려 代나라를 멸망시킨 원한을 보복한 것이다. 황하 남쪽의 여러 부락이 모두 항복하였다. 말 30여만 필과 소와 양 400여만 두를 노획하니, 국가의 재정이 이로 말미암아 마침내 풍족해졌다.
유위신의 작은 아들 劉勃勃이 薛干部로 달아나자,注+③ 薛干은 본래 鮮卑族의 別部의 인명이었는데, 그 뒤에 인하여 이것으로 부족의 칭호를 삼았다. 설간부가 그를 没奕干에게 보내었는데, 몰혁간이 그에게 딸을 시집보내었다.
【綱】 12월에 秦主(前秦) 符登이 安定을 공격하자, 後秦主 姚萇이 부등을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目】 秦主 符登이 安定을 공격하니, 後秦主 姚萇이 陰密에 가서 막을 적에 태자 姚興에게 이르기를 라고 하였다.注+① 長安에서 陰密에 가려면 북쪽으로 가야 한다.
요장이 이미 길을 떠나자 구요가 과연 장안에 왔는데, 요흥이 그를 주살하였다. 요장이 부등을 安定城 동쪽에서 패배시키니, 부등이 후퇴하여 路承堡를 점거하였다.注+② 路承은 사람의 성명인데, 보루를 쌓아 스스로 지켰으므로 당시에 인하여 보루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다.
【目】 姚萇이 술자리를 베풀어 크게 잔치하였는데,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만약 魏武王을 만났다면 이 적이 지금에 이르지 않게 하였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신중하게 지키는 것이 너무 지나치십니다.”라고 하니,注+① 姚萇이 황제를 僭稱하고 자기 형 姚襄을 追謚하여 魏武王이라 하였다. ‘將牢’는 一本에는 ‘持牢’로 되어 있으니, 잡아 지키기를 견고히 함을 이르니, 신중히 한다[持重]는 말과 같다. 두 秦나라(前秦과 後秦) 군대가 서로 대치한 지 7년에 요장이 가볍게 싸우는 것을 조심하여 매번 계략으로 적을 취하고자 하였으므로 ‘將牢太過’라 한 것이다.
요장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돌아가신 형님보다 못한 것이 네 가지가 있다. 돌아가신 형님은 신장이 8척 5촌이고 팔뚝이 무릎 아래에까지 내려와 사람들이 바라보고 두려워하는 것이 첫째요, 10만의 병력을 거느리고서 적의 대장기를 바라보며 전진하여 앞을 가로막는 적진이 없는 것이 둘째요, 옛일을 기억하고 지금을 알며 도학과 기예를 강론하고 영걸들을 거두어 망라함이 셋째요, 많은 병력을 독려하여 사람들이 사력을 다해 싸우게 하는 것이 넷째이다. 그런데도 〈내가〉 공업을 세워서 여러 현자인 그대들을 책려할 수 있던 것은 바로 계략 가운데에 조금 장점이 있었기를 바랄 뿐이다.”


역주
역주1 秦主登……秦師敗績 : “≪春秋≫에서 ‘戰(싸우다)’을 쓸 때에는 及者(더불어 싸운 자)를 위주하였다. 그러나 ≪춘추≫는 전쟁을 쓰는 것을 싫어한 글이다. 그리하여 무릇 전쟁에 있어, 及者에게 전적으로 죄를 주었다. 그러므로 부연 설명하는 자가 이르기를 ‘及은 汲汲과 같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가 되어서 급급히 남과 싸우는 자가 있겠는가. 그러나 복수를 하거나 역적을 토벌하는 것에 이르러서는 급급히 하는 것을 아름답게 여긴다. 이 때문에 莊公 9년에 ‘齊나라 군대와 더불어 乾時에서 싸워서 우리 군대가 크게 패했다.’라고 썼으니, 이는 장공이 능히 원수와 싸움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써서 인정한 것이다. 지금 姚萇은 符堅을 시해한 죄가 있는데 符登이 능히 그와 싸웠으니, 이는 복수하여 역적을 토벌하는 데에 뜻을 둔 것이다. 그러므로 ≪資治通鑑綱目≫에 이것을 쓴 것이 ≪춘추≫의 乾時와 의리를 같이하니, 이 또한 그를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는 전쟁을 좋아하고 살인을 즐기는 것을 일삼는 것이니, 어찌 ≪춘추≫의 필법이겠는가.[春秋書戰 以及者爲主 然春秋惡兵之書 凡戰 專罪及者 故傳者謂及猶汲汲也 烏有爲子民之君 而可汲汲與人戰者哉 至於復讐討賊 則汲汲爲美 是以莊公九年 書及齊師戰於乾時 我師敗績 蓋謂莊公能與讐戰 故書以與之 今姚萇有弑堅之罪 符登能與之戰 意蓋在於復讐討賊 故綱目書此 與乾時同義 是亦與之之意爾 不然則是以好攻戰樂殺人爲事也 豈春秋之法哉]” ≪發明≫
역주2 黜博士……爲餘杭令 : “博士를 현령으로 삼았는데 내쳤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桓溫의 도당인 王珣을 미워해서이다.[博士爲令 書黜 何 惡桓黨也]” ≪書法≫“范弘之가 내침을 당할 적에 그 죄를 쓰지 않았다. 分注(目)를 가지고 상고해보면 바로 王珣이 桓氏의 徒黨이 되어서 환온을 위하여 환온이 신하 노릇 하지 않은 자취를 숨기려 하여 사사로운 마음으로 무함하여 내친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서법이 이와 같은 것이다.[弘之之黜 不書其罪 以分注考之 乃王珣黨於桓氏 爲桓溫隠諱不臣之迹 私意誣而黜之爾 故其書法如此]” ≪發明≫
역주3 魏王珪……徙之雲中 : “柔然이 ≪資治通鑑綱目≫에 처음 보인다.[柔然 始見綱目]” ≪書法≫
역주4 敕勒 : 중국 북방 민족 가운데 하나로 匈奴의 후예이다. 뒤에 돌궐에 복속되어 지금의 淸海 지방에 거주하였다. 시대에 따라 鐵勒, 回紇, 回鶻, 畏兀兒 등으로 불리었고, 오늘날에는 위구르[維吾爾]라 불린다.
역주5 (服)[卽] : 저본에는 ‘服’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苟曜는……죽여라 : 苟曜가 符登에게 내응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본서 太元 16년(391) 5월 조 참조.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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