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目】 순숙荀淑이 젊어서 박학博學하고 높은 행실이 있으니, 이고李固와 이응李膺 등이 모두 스승으로 높였다.注+순숙荀淑은 순경荀卿의 11세손世孫이다.
일찍이 현량賢良에 천거되어 대책對策할 적에 신분이 귀하고 총애받는 자들을 비난하자, 양기梁冀가 꺼려서 낭릉후朗陵侯의 상相으로 내보냈는데, 부임하여 정사를 처리하기를 분명하게 하고 잘 다스려서 신군神君이라고 칭해졌다.注+낭릉후朗陵侯의 나라는 여남군汝南郡에 속하였다.
아들 여덟 명을 두었는데, 검儉, 곤緄, 정靖, 도燾(도), 왕汪, 상爽, 숙肅, 전專이 모두 명성이 있어서 당시 사람들이 이들을 8용龍이라 불렀고注+전專은 다른 본에는 혹 부旉로도 되어 있으니, 〈부旉는〉 음音이 부敷이다., 영음령 원강潁陰令 苑康은 그 마을 이름을 고쳐 고양리高陽里라 하였다.注+원苑은 성姓이다. 순숙荀淑이 거주하는 마을은 옛 이름이 서호西豪였는데, 옛날 고양씨高陽氏에게 재주 있는 아들 여덟 명이 있어서 이들을 팔개八凱라 하였으므로, 그의 마을 이름을 고쳐 고양高陽이라 해서 정표旌表한 것이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영천군潁川郡의 성城 서남쪽에 순숙의 고택故宅이 있다.” 하였다.
로 있었는데, 사도부司徒府의 벽소辟召를 받았다. 태수 고륜太守 高倫이 “누가 경卿을 대신할 만한가?”라고 묻자, 종호가 대답하기를 “밝으신 태수太守께서 반드시 적임자를 얻고자 하신다면, 서문정장西門亭長인 진식이 좋습니다.” 하니, 고륜이 그의 말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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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중상시 후람中常侍 侯覽이 고륜高倫에게 〈어떤 사람을〉 관리로 등용해줄 것을 부탁하자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이 아래에 “고륜高倫이 교敎를 내려 문학연文學掾으로 임명했다.” 하였다., 진식陳寔이 격檄(태수太守의 교명敎命)을 품고 고륜을 만나보기를 청하여 이르기를 “이 사람을 등용해서는 안 되나, 후람의 부탁을 어겨서도 안 됩니다.
제가 밖에서 그 사람을 임명하여 태수太守의 밝은 덕德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注+격檄은 교판敎板에 쓴 것이니, 고륜高倫의 교敎를 쓴 격檄을 품은 것은 일이 누설될까 염려한 것이다. 공조功曹는 사람을 선발하여 임명하는 일을 주관하니, 진식陳寔이 밖에서 자신이 임명함으로써 임명이 고륜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처럼 하기를 청한 것은, 고륜을 청탁請託에 빠뜨리지 않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였다. 이에 향리鄕里의 의논이 올바른 사람을 천거하지 않았다고 괴이하게 여겼으나, 진식은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륜이 뒤에 징소徵召를 받고 도성으로 가게 되자 마침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내 예전에 후상시侯常侍를 위하여 관리를 등용했었는데注+위爲(위하다)는 거성去聲이다., 진군陳君이 은밀히 내가 쓴 교敎를 가지고 돌아가서는 밖(외지外地)에서 ‘자신이 그를 임명하였다.’고 아뢰었으니注+군수郡守가 내는 명命을 교敎라 한다.,
진군陳君은 선善은 군君(상관)에게 돌리고 허물은 자기에게 돌리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하였다. 그러나 진식이 굳이 자신의 책임으로 돌리니, 이로 말미암아 천하 사람들이 그의 덕에 탄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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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진식陳寔이 뒤에 태구현장太丘縣長이 되어서注+태구太丘는 현縣의 이름이니, 패국沛國에 속하였다.덕德을 닦아 깨끗하고 고요하니 백성百姓들이 이 때문에 편안하였고, 이웃 현縣의 백성들 중에 귀의하여 따르는 자를 진식은 번번이 훈도訓導하여(타일러서) 본현本縣으로 돌려보냈다.
패국沛國의 관원이 부部를 순행할 적에 한 아전이 백성 중에 송사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아뢰어 금지하고자 하였는데注+사관司官은 주관하는 관원을 이른다. 항行은 거성去聲으로 순시巡視함이니,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현縣에 가서 조사하고 살피는 바가 있는 것이다., 진식이 말하기를 “송사는 자기가 옳다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것인데, 이를 금하면 자신의 논리를 장차 어디에다 펴겠는가.” 하였는데,
또한 끝내 송사를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패국沛國의 상相이 세금을 지나치게 거두어 법法을 위반한 일로 인해 진식이 인수印綬를 풀고 떠나가니, 관리와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였다.注+패상沛相은 패국沛國의 상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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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종호鍾皓가 평소 순숙荀淑과 명망이 대등하니, 이응李膺이 항상 탄식하기를 “순군荀君은 맑은 식견이 그보다 더할 수 없고, 종군鍾君은 지극한 덕이 스승 삼을 만하다.” 하였다.
종호의 형의 아들인 종근鍾瑾은 학문을 좋아하고 옛것을 사모하여 겸양하는 풍모가 있었는데, 이응과 동갑으로 두 사람 모두 명성이 있었다.
종근의 어머니는 이응의 고모인데注+근瑾은 거린渠遴의 절切이다., 이응의 할아버지인 태위 이수太尉 李脩가 항상 말하기를 “종근은 우리 집안의 성품과 유사하니注+근瑾은 이씨李氏의 외손이면서 겸양謙讓하므로 이수李脩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다시 이응의 여동생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이응이 종근에게 이르기를 “아우는 어찌 조백皁白(조백)이 없는가?”注+“조백皁白(검은 것과 흰 것)”은 구분하기가 쉬우니, 조백皁白이 없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구별하지 않음을 이른다. 하자, 종근이 이것을 종호에게 아뢰니,
종호가 말하기를 “국무자國武子가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좋아하여 원망과 미움을 받았으니, 지금이 아마도 그런 때가 아니겠는가.注+국國은 성姓이고 무자武子는 자字이고 이름은 좌佐이니, 춘추시대 재春秋時代 齊나라의 대부大夫이다. 교招는 음音이 교翹이니, 들추어냄이다. ≪국어國語≫ 〈주어周語〉에 “재齊나라 국좌國佐가 선양공單襄公(선양공)을 보고 할 말을 다하자, 단자單子가 말하기를 ‘음란淫亂한 나라에서 벼슬하면서 말을 다하여 남의 허물을 들추어내기를 좋아하니, 원망의 근본이 된다.’ 하였는데, 그 뒤에 재齊나라가 국무자國武子를 죽였다.” 하였다. 반드시 몸을 보전하고 집안을 온전히 하고자 한다면, 너의 방도를 귀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注+이爾(너)는 여汝와 같다. 하였다
역주
역주1地再震山崩 :
“元帝의 篇에 정월에 지진이 발생하고 7월에 다시 지진이 있었다고 썼는데, 여기서는 합쳐서 두 번 지진이 발생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같은 달이기 때문이다. 한 해에 두 번 지진이 있는 것은 異變이요, 한 달에 두 번 지진이 있는 것은 매우 큰 이변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지진을 쓴 것이 110번인데, 한 해에 두 번 지진이 있었던 것은 12번이고. 한 달에 두 번 지진이 있었던 것은 2번뿐이다.[元帝之篇 書正月地震 七月復震矣 此其幷書再震 何 同月也 一歲再震 異矣 一月再震甚大異也 終綱目書地震一百一十 歲再震十二 而一月再震 則二而已]다” ≪書法≫
역주2卒 :
“卒에 이전의 관직을 쓴 것은 어짊을 기록한 것이니, ≪資治通鑑綱目≫에 卒할 적에 이전의 관직을 쓴 것이 6번이다.[卒前官 錄賢也 綱目卒前官六]다” ≪書法≫
역주3(位)[涖] :
저본에는 ‘位’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涖’로 바로잡았다.
역주4功曹 :
漢代 지방 屬吏로 郡과 縣에 모두 존재하였다. 이는 太守와 縣令이 辟召를 통해 직접 임명한다. 특히 군현에는 役職에 따라 曹를 두었는데, 戶曹, 田曹, 倉曹, 法曹, 兵曹 등 諸曹를 가리킨다. 이 諸曹 이외에 특별한 직책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功曹이다. 공조는 여러 屬吏를 관장하는 직책으로 속리 중 지위가 가장 높으며 군현의 내외를 관장하고 속리에 대한 인사권을 가졌다. 특히 後漢 후기에는 太守나 縣令이 공조에게 주요 정무를 맡기는 경향이 많았다.(安作璋ㆍ熊鐵基, ≪秦漢官制史稿≫, 齊魯書社, 1984)
역주5而於外白署 :
陳寔은 太守에게 환관의 청탁을 들어주었다는 비난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밖에서 “자신이 그를 임명하였다.”고 아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訓義에서는 ‘白’을 ‘自’로 바꾸었는바 ‘아뢰었다.’고 하면 太守에게 누를 끼치게 되므로 바꾼 것으로 보인다. 郡의 功曹는 사람을 등용하는 것을 맡았으므로 자기 마음대로 임명한 것이다.
역주6(親)[視] :
저본에는 ‘親’으로 되어 있으나, ≪御批資治通鑑綱目≫에 의거하여 ‘視’로 바로잡았다.
역주7나라에……것이다 :
≪論語≫ 〈公冶長〉에서 孔子가 제자 南容을 두고 칭찬한 말씀이며, 공자는 이 말씀을 하면서 형의 딸을 남용에게 시집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