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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8)

자치통감강목(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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壬寅年(102)
임인년壬寅年(102)
十四年이라 安定羌이어늘 郡兵 擊滅之하고 復置西海郡하다
나라 효화황제 영원孝和皇帝 永元 14년이다. 봄에 안정安定강족羌族이 배반하므로 의 군대가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다시 을 설치하였다.
安定降羌燒何種이어늘 郡兵 擊滅之注+燒何與燒當, 各是一種.하니 自是 西海及大小榆谷左右 無復羌寇
안정安定의 항복한 강족羌族소하燒何의 종족이 배반하자 의 군대가 공격하여 멸망시키니注+소하燒何소당燒當은 각각 한 종족이다., 이로부터 서해군西海郡대유곡大榆谷, 소유곡小榆谷의 부근에 다시는 강족의 침략이 없었다.
隃糜相曹鳳 上言注+隃, 音踰. 隃麋侯國, 屬右扶風.호되 燒當種 居大小榆谷하여 土地肥美하고 有西海魚鹽之利하며
유미후隃糜侯(유미후)의 조봉曹鳳이 다음과 같이 상언上言하였다.注+는 음이 이다. 유미후隃麋侯의 나라는 우부풍右扶風에 속하였다.소당燒當의 종족이 대유곡과 소유곡에 거주하고 있는데, 토지가 비옥하고 서해西海(청해靑海)의 어물과 소금의 이익이 있으며,
阻大河以爲固注+西海, 有允谷鹽池.하고 又近塞内諸種이라 犯法者 常從此起하니 宜及此時하여 建復西海郡縣하여 規固二榆하고
대하大河를 의지하여 견고함을 삼고注+서해西海윤곡允谷염지鹽池가 있었다. 또 변방 안에 있는 여러 종족들과 가깝습니다. 그러므로 법을 범하는 자가 항상 이로부터 일어나니, 마땅히 이때에 다시 서해西海군현郡縣을 세워서 대유곡과 소유곡을 도모하여 견고히 지키고,
廣設屯田하여 隔塞羌胡交關之路하고 遏絶狂狡窺欲之源注+建, 立也. 謂立策, 復置郡縣也. 規, 圖也. 固, 守也.하며 又殖穀富邊하여 省委輸之役이면 國家可以無西方之憂리이다
둔전屯田을 널리 설치해서 강족羌族호족胡族이 왕래하는 길을 막고, 미치고 교활한 자들이 엿보고 욕심내는 근원을 차단하며注+은 세움이니, 〈“건복서해군현建復西海郡縣”은〉 계책을 세워서 다시 군현郡縣을 설치함을 이른다. 는 도모함이고 는 굳게 지킴이다., 또 곡식을 많이 저축하여 변경을 부유하게 해서 수송하는 부역을 줄여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국가에 서방西方에 대한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
從之하여 繕修故西海郡하고 拜鳳爲金城西部都尉하여 戍之注+金城西部都尉府, 在金城縣.하고 增廣屯田하고 列屯夾河하니 合三十四部
이 이 말을 따라서 옛 서해군西海郡을 수선하고 조봉을 금성서부도위金城西部都尉로 임명하여 지키게 하고는注+금성서부도위부金城西部都尉府금성현金城縣에 있었다., 둔전을 더 넓히고 둔전을 하수河水 좌우에 나열하니 도합 34였다.
其功 垂立이러니 會永初中 諸羌하니 乃罷注+夾河, 夾逢留大河也.하다
그 효과가 막 이루어지려 하였는데, 마침 영초永初 연간(107~113)에 여러 강족羌族이 배반하니, 마침내 파하였다.注+협하夾河”는 봉류대하逢留大河의 좌우이다.
夏四月 荆州兵 討巫蠻하여 大破降之하다
】 여름 4월에 형주荆州의 군대가 무현巫縣만족蠻族을 토벌하여 대파해서 항복시켰다.
◑六月 하다
】 6월에 황후 음씨皇后 陰氏가 폐위되어 죽었다.
陰后妬忌恚恨이러니 有言后挾巫蠱道者하니 后坐廢하여 以憂死하다
음후陰后가 투기하고 원한을 품고 있었는데, 음후가 무고巫蠱의 방도를 사용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니, 음후가 이에 연루되어 폐위되어서 근심하다가 죽었다.
大水하다
】 홍수가 졌다.
◑徵班超하여 還京師하다
반초班超를 불러 경사京師로 돌아오게 하였다.
班超年老乞歸호되 久之未報러니 超妹曹大家上書하여 爲超求哀注+超妹昭, 博學高才, 有節行法度, 帝數召入宮, 令皇后․諸貴人師事焉, 號曰大家. 大家者, 宮中相尊之稱也. 家, 讀曰姑.한대
반초班超가 늙어 돌아갈 것을 청하였으나 오래도록 답을 받지 못하였다. 반초의 누이인 조대가曹大家(조대고曹大姑)가 상서上書하여 반초를 위해서 애걸하자注+반초班超매씨妹氏반소班昭가 학문이 넓고 재주가 높고 절행節行법도法度가 있으니, 황제가 자주 궁중에 불러들여서 황후皇后와 여러 귀인貴人들로 하여금 그를 사사師事하게 하고 ‘대가大家’라고 불렀다. 대가大家란 궁중에서 서로 높이는 칭호이다. 로 읽는다.,
帝感其言하여 乃徵超還하다 八月 至洛陽하여 九月注+超在西域三十一歲, 年七十一.하다
황제가 그 말에 감동하여 마침내 반초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는데, 반초는 8월에 낙양洛陽에 이르러서 9월에 하였다.注+반초班超서역西域에 있은 지 31년으로, 나이가 71세였다.
任尙 代爲都護러니 謂超曰 小人 猥承君後하여 任重慮淺하니 宜有以誨之니라
임상任尙이 반초를 대신하여 도호都護가 되었는데, 반초에게 이르기를 “이 소인이 외람되이 당신의 뒤를 이어서 책임은 무겁고 생각은 얕으니, 마땅히 가르침을 주셔야 합니다.” 하니,
超曰 塞外吏士 本非孝子順孫이라 皆以罪過徙補邊屯이요 而蠻夷懷鳥獸之心하니 難養易敗
반초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변방의 관리와 병사들은 본래 효도하는 아들과 순한 손자가 아니고, 모두 죄와 허물을 짓고 변경으로 귀양 와서 주둔하고 있다. 만이蠻夷들은 새와 짐승의 마음을 품고 있으니, 기르기는 어렵고 화란禍亂이 되기는 쉽다.
今君性嚴急하니 水清이면 無大魚 察政이면 不得下和注+家語 “孔子曰 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 宜蕩佚簡易하여 寛小過하고 總大綱而已注+蕩, 如字. 佚, 音迭. 蕩佚, 寬大舒緩之意.니라
지금 그대는 성품이 너무 급하고 엄하니, 물이 맑으면 큰 물고기가 없고 정사를 지나치게 살피면 아래와 화합하지 못하는 법이다.注+공자가어孔子家語≫에 “공자孔子께서 ‘물이 지극히 맑으면 고기가 없고, 사람이 지극히 살피면 무리가 없다.’ 하셨다” 하였다. 마땅히 소탈하고 평이하게 하여 작은 허물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큰 기강만 총괄하면 될 것이다.”注+은 본음대로 읽고 은 음이 이니, “탕일蕩佚”은 관대하고 느긋한 뜻이다.
超去後 私謂所親曰 我以班君當有奇策이러니 今所言平平耳라하더니 後竟失邊和하여 如超言하니라
반초가 떠난 뒤에 임상이 친한 사람에게 은밀히 말하기를 “나는 반군班君에게 마땅히 기이한 계책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지금 말한 바가 지나치게 평이하다.” 하였는데, 임상은 뒤에 반초의 말과 같이 끝내 변경의 화합을 잃고 말았다.
冬十月 立貴人鄧氏하여 爲皇后하다
】 겨울 10월에 귀인 등씨貴人 鄧氏를 세워 황후皇后로 삼았다.
鄧禹嘗謂人曰 吾將百萬之衆하여 未嘗妄殺一人하니 後世 必有興者라하더니
】 처음에 등우鄧禹가 일찍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일찍이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았으니, 후세에 반드시 흥왕興旺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하였다.
其子訓 有女曰綏 性孝友하고 好書傳하여 常晝修婦業하고 暮誦經典이러니
그 아들 등훈鄧訓라는 딸을 낳았는데, 성품이 효도하고 우애하며 서책을 좋아하여 항상 낮에는 부인의 일을 닦고 저녁에는 경전經典을 외웠다.
選入宮爲貴人하니 恭肅小心하고 動有法度하여
선발되어 궁중에 들어와 귀인貴人이 되었는데, 공손하고 엄숙하고 조심하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
承事陰后하고 接撫同列호되 常克己以下之하고 雖宮人隷役이나 皆加恩借하니 帝深嘉焉注+克己以下之, 謂克去有己之私, 不欲上人也. 恩借, 謂旣有以恩之, 又假借以辭色.하니라
음후陰后를 받들어 섬기고 동렬들을 어루만지되, 항상 자신을 이겨 낮추고 궁인宮人과 하인들에게도 모두 은혜와 너그러움을 베푸니, 황제가 매우 가상히 여겼다.注+극기이하지克己以下之”는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을 이겨서 남보다 높아지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은차恩借”는 은혜롭게 대하고 또 말과 얼굴빛을 너그럽게 하는 것이다.
嘗有疾이어늘 帝特令其母兄弟 入視醫藥한대 貴人 辭曰 宮禁至重이어늘 而使外舍 久在内省이면
귀인貴人이 일찍이 병이 들자 황제가 특별히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로 하여금 들어와 의약醫藥을 보살피게 하였는데, 귀인貴人이 사양하기를 “궁궐은 지극히 소중한데, 외가 사람들로 하여금 오랫동안 내성内省(금중禁中)에 있게 하면,
上令陛下有私幸之譏 下使賤妾獲不知足之謗이니 上下交損이라 誠不願也注+外舍, 外戚之家. 內省, 猶言省中. 私幸, 謂私於所幸者.하노이다
위로는 폐하께서 사사로이 총애한다는 비난을 받게 되고 아래로는 천한 첩이 만족함을 알지 못한다는 비방을 얻게 될 것이니, 상하가 서로 손해가 됩니다. 진실로 원치 않습니다.”注+외사外舍”는 외척의 집이다. “내성內省”은 성중省中(금중禁中)이란 말과 같다. “사행私幸”은 총애하는 사람에게 사사로이 함을 이른다. 하였다.
毎有讌會 諸姬競自修飾호되 貴人 獨尙質素하고
매번 연회가 있을 때마다 여러 희빈姬嬪들이 다투어 스스로 몸을 꾸미고 단장하였으나, 귀인貴人은 홀로 질박함과 검소함을 숭상하였다.
其衣有與陰后同色者 卽時解易하고 若竝時進見이면 則不敢正坐離立하고 毎有所問 常逡巡後對注+離, 竝也, 禮記 “離坐離立.”러라
또 자기 옷이 음후陰后의 옷과 색깔이 같으면 즉시 벗어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만약 동시에 나아가 알현할 경우에는 감히 똑바로 앉거나 나란히 서지 않았으며, 매번 하문下問할 적에는 항상 머뭇거리면서 겸양한 뒤에야 대답하였다.注+는 나란함이니, ≪예기禮記≫ 〈곡례曲禮〉에 “나란히 앉고 나란히 선다.[이좌이립離坐離立]” 하였다.
帝數失皇子하니 貴人 數選進才人注+西漢宮中爵號, 有美人ㆍ良人. 若才人, 蓋東都所置也.이러니 及爲皇后 郡國貢獻 悉令禁絶하고 歲時 但供紙墨而已注+漢郡國貢獻, 進御之外, 別上皇后宮.
황제가 여러 번 황자皇子를 잃으니, 귀인貴人은 자주 을 뽑아 올렸다.注+서한西漢(전한前漢)의 궁중宮中작호爵號미인美人양인良人이 있다. 재인才人의 경우는 동도東都(후한後漢) 때에 두었다. 황후皇后가 되자 군국郡國에서 황후궁皇后宮에 바치는 물건을 모두 금하여 끊게 하고 세시歲時에 종이와 먹만 바치게 하였다.注+나라 군국郡國은 공물을 올릴 적에 황제에게 진어進御하는 외에 별도로 황후궁皇后宮에 올렸다.
帝每欲官爵鄧氏어든 后輒哀請謙譲故 兄騭 終帝世토록 不過中郎將하니라
황제가 등씨鄧氏에게 관작을 내리려 할 때마다 가 슬피 간청하고 겸양하니, 오라비인 등즐鄧騭(등즐)의 관직이 황제의 재위 기간에 중낭장中郎將에 불과하였다.
司空堪하니 以徐防爲司空하다
사공 소감司空 巢堪이 면직되니, 서방徐防사공司空으로 삼았다.
上疏하여 以爲 漢立博士十有四家注+漢官儀 “光武中興, 恢弘稽古, 易有施孟ㆍ梁丘賀ㆍ京房, 書有歐陽和ㆍ伯ㆍ夏侯勝ㆍ建, 詩有申公ㆍ轅固ㆍ韓嬰, 春秋有嚴彭祖ㆍ顔安樂, 禮有戴德ㆍ戴聖, 凡十四博士.”하고 設甲乙科하여 以勉學者注+前書 “博士弟子, 歲課, 甲科四十人爲郞中, 乙科二十人爲太子舍人, 丙科四十人爲文學掌故.”러니
서방徐防이 다음과 같이 상소上疏하였다. “우리 나라는 박사博士 14를 세우고注+한관의漢官儀≫에 “광무제光武帝중흥中興함에, 고경古經을 널리 상고해서 ≪주역周易≫에는 시맹施孟, 양구하梁丘賀, 경방京房이 있고, ≪서경書經≫에는 구양화歐陽和구양백歐陽伯, 하후승夏侯勝하후건夏侯建이 있고, ≪시경詩經≫에는 신공申公, 원고轅固, 한영韓嬰이 있고, ≪춘추春秋≫에는 엄팽조嚴彭祖, 안안악顔安樂이 있고, ≪예기禮記≫에는 대덕戴德대성戴聖이 있어서, 모두 14명의 박사博士가 있었다.” 하였다. 갑과甲科을과乙科를 설치해서 배우는 자들을 권면하였는데注+〈“설갑을과 이면학자設甲乙科 以勉學者”는〉 ≪한서漢書≫에 “박사 제자博士 弟子를 해마다 고과해서, 갑과甲科 40명은 낭중郞中으로 삼고, 을과乙科 20명은 태자사인太子舍人으로 삼고, 병과丙科 40명은 문학장고文學掌故로 삼았다.” 하였다.,
今太學試博士弟子 皆以意說하여 不修家法하며 不依章句하고 妄生穿鑿하여 輕侮道術하여 寖以成俗하니
지금 태학太學에서 박사 제자博士 弟子를 시험할 적에 모두 자기 마음대로 설명하여 명가名家의 법을 닦지 않으며, 장구章句를 따르지 않고 제멋대로 천착穿鑿하는 뜻을 내어서 도술道術을 경시하고 하찮게 여겨 점점 풍속을 이루니,
誠非詔書實選本意注+意說者, 創意而爲之說. 家法, 謂諸經爲業, 各自名家. 改薄從忠 三代常道 專精務本 儒學所先注+夏之政忠, 忠之敝, 小人以野, 故殷人承之以敬. 敬之敝, 小人以鬼, 故周人承之以文. 文之敝, 小人以僿, 故救僿莫若以忠. 三王之道, 若循環, 周而復始. 先, 悉薦切. 僿, 西志切, 史記作薄.이니
진실로 조서詔書를 내려 진실하게 인재를 선발하려던 본의가 아닙니다.注+의설意說”은 자기의 새로운 뜻을 세워 해설하는 것이다. “가법家法”은 여러 경서經書를 업으로 삼아서 각각 명가名家가 됨을 이른다. 함을 고쳐 을 따르는 것은 삼대三代의 떳떳한 요, 전심전력하여 근본을 힘쓰는 것은 유학儒學이 앞세우는 바이니注+나라의 정사政事인데, 의 폐해는 소인들이 촌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은 으로 이어받았다. 의 폐해는 소인들이 귀신을 너무 숭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라 사람은 으로 이어받았다. 의 폐해는 소인들이 경박해지는 것이었다. 경박함을 구제하는 것은 만 한 것이 없다. 삼왕三王는 고리가 도는 것과 같아서 한 바퀴를 돌면 다시 시작한다. (앞세우다)은 실천悉薦이다. (경박하다)는 서지西志이니, ≪사기史記≫에는 으로 되어 있다.,
以爲博士策試 宜從其家章句하여 開五十難以試之하여 解釋多者爲上第 引文明者爲高說注+策, 編簡也. 策試, 卽射策也. 作簡策難問, 列置案上, 在試者意投射, 取而答之, 謂之射策. 難, 去聲.이요
은 생각건대 박사博士책시策試(사책射策)는 마땅히 그 장구章句를 따라 50문제를 제출하여 시험해서 해석을 제일 많이 한 자가 상제上第(1등)가 되고, 글을 인용하기를 분명히 한 자가 고설高說(고명高明한 해설)이 되어야 합니다.注+편간編簡이니, 책시策試는 바로 사책射策이다. 간책簡策에 질문을 제출하여 책상 위에 나열해놓으면 시험 보는 자가 자기 생각에 맞는 것을 가져다가 답하는 것을 사책射策이라 한다. (질문하다)은 거성去聲이다.
若不依先師하여 義有相伐이어든 皆正以爲非니이다 從之注+義有相伐, 謂文義各相矜伐也. 一說 “伐, 謂自相攻伐也.”하다
만약 선사先師를 따르지 않고서 뜻에 서로 자랑하는 내용이 있으면, 모두 시비를 가려 잘못으로 여겨야 합니다.” 이 그의 말을 따랐다.注+의유상벌義有相伐”은 글에 각각 자랑하는 뜻이 있음을 이른다. 일설에 “은 상호 공격함을 이른다.” 하였다.
注+賞誅竇憲功也. 鄛, 士交切. 鄛鄕, 在南陽郡棘陽縣.하다
정중鄭衆을 봉하여 소향후鄛鄉侯(소향후)로 삼았다.注+두헌竇憲을 주벌한 공을 상준 것이다. 사교士交이다. 소향鄛鄕남양군 극양현南陽郡 棘陽縣에 있다.
宦者封侯 自此始하다
환자宦者에 봉한 것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역주
역주1 西海郡 : 平帝 元始 4년(4)에 王莽이 서쪽 변방 밖의 羌族을 회유하여 처음으로 설치하였다. 郡을 설치하면서 이곳에 中國의 백성을 이주시키기 위해 50개 조항의 법을 증가시켰고, 이를 통해 천 혹은 만여 명의 백성을 이주시켰다. 자세한 내용은 ≪資治通鑑綱目≫ 제8권 상에 보인다.
역주2 皇后陰氏廢死 : “‘皇后 陰氏가 폐위되었다.’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죄를 책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死’라고 쓴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皇后에게 ‘廢(폐위)’를 쓴 것이 21번인데, 〈后를 폐위시킨 자가 없고〉 스스로 폐위된 것처럼 쓴 것이 세 번(武帝의 陳后, 宣帝의 霍后, 和帝의 陰后)이고, 폐위된 后에게 死라고 쓴 것은 한 번뿐이다.[皇后陰氏廢 何 罪辭也 故書死 終綱目皇后書廢者二十一 而以自廢爲文者三 廢書死 一而已]다” ≪書法≫
역주3 才人 : 宮中의 女官을 가리키는 말로서, 대부분 妃嬪을 호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역주4 封鄭衆爲鄛鄉侯 : “元帝의 篇에 환관이 中書令이 된 것을 썼을 뿐 侯에 봉해진 자는 없었다. 환관을 侯에 봉하여 漢나라 말기의 화가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환관을 侯에 봉한 일을 쓴 것이 이때 처음 시작되었다.[元帝之篇 書宦者爲中書令而已 未有封侯者也 宦者封侯 漢末之禍 始此矣 書宦者封侯 始此]” ≪書法≫ “鄭衆이 侯에 봉해졌을 적에 어찌하여 환관이라고 게시하여 쓰지 않았는가. 이미 앞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하늘의 형벌로 후손을 낳지 못하는 사람(환관)에게 띠풀을 나누어주고 흙을 나누어주어서 장차 봉지를 세습하여 후손에게 전하고자 하였으니, 어찌 다만 비웃음거리가 될 뿐이겠는가, 깊이 경계로 삼을 만하다.[鄭衆封侯 何不揭宦者書之 蓋已見之於前矣 夫以天刑絶嗣之人 而使之分茅胙土 将欲襲封傳後 豈不適足爲笑 而深足爲戒哉]” ≪發明≫

자치통감강목(8)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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