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北海太守孔融
이 志在靖難
호되 而才疏意廣
하여 訖無成功
注+難, 去聲. 訖, 竟也, 終也.하니 高談淸敎
를 可玩而誦
이로되 論事考實
하면 難可悉行
이라
但能張磔網羅而目理甚疏
注+磔, 陟格切, 張也, 開也.하고 造次
에 能得人心
호되 久久亦不願附也
요 所任
이 多剽輕小才
注+輕, 墟正切.러라
至於尊事名儒鄭玄하여는 執子孫禮하며 易其鄕名曰鄭公鄕이라하고
及淸雋之士左承祖, 劉義遜等하야는 皆備在座席호되 而不與論政하고 曰 此는 民望이니 不可失也라하니라
時에 袁, 曹, 公孫이 首尾相連호되 融이 孤立하여 不與通이러니 承祖勸融하여 自託彊國한대 融이 不聽而殺之어늘 義遜이 棄去하다
目
備合兵得萬餘人이어늘 布惡之하여 攻備하니 備敗走歸曹操한대 操厚遇之하고 以爲豫州牧하다
或이 謂操曰 備有英雄之志하니 今不早圖면 後必爲患하리라 操以問郭嘉한대
嘉曰 有是
니이다 然
이나 公起義兵
은 爲百姓除暴
어늘 推誠杖信
하여 以招俊傑
이라도 猶懼其未也
注+杖, 上聲. 左傳襄八年 “杖莫如信”, 註 “人之可倚杖者, 莫如誠信.”라
今備有英雄名이어늘 以窮歸己而害之면 是는 以害賢爲名也니 如此면 則智士將自疑하여 回心擇主하리니
公이 誰與定天下乎잇가 夫除一人之患하여 以沮四海之望은 安危之機也니 不可不察이니이다
操笑曰 君이 得之矣로다하고 遂益其兵하고 給糧食하여 使東至沛하여 收散兵以圖呂布하다
目
【목目】 동승董承과 장양張楊이 천자天子를 호위하여 낙양洛陽으로 돌아가고자 하였는데, 양봉楊奉과 이락李樂이 이를 원하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장수들이 돌아가며 서로 의심하여 딴마음을 품었다.
장양이 동승에게 먼저 낙양의 궁전宮殿을 수리하게 하였는데, 5월에 황제가 양봉楊奉, 이락李樂, 한섬韓暹의 군영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자신을 낙양으로 보내줄 것을 요구하니, 양봉 등이 조령詔令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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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目】
손책孫策이 군대를 이끌고
절강浙江을 건너가니,
회계會稽의
공조 우번功曹 虞翻이
태수 왕랑太守 王朗을 설득하기를 “손책이
용병用兵을 잘하니 피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으나, 왕랑이 이를 따르지 않고 군대를 내어
고릉固陵에서 손책을 막았다.
注+≪수경주水經注≫에 “절강浙江이 동쪽으로 고릉성固陵城의 북쪽을 지나간다. 옛적에 범려范蠡가 절강浙江 가에 성城을 쌓고서 ‘견고하게 지킬 수 있다.’ 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름을 고릉固陵이라 하였다. 절강浙江이 또 동쪽으로 사당柤塘(자당)을 지나가니, 이를 일러 사독柤瀆이라 한다.” 하였다.
손책이 자주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니, 손책의 숙부 손정孫靜이 다음과 같이 손책을 설득하였다. “왕랑이 지형의 험조險阻함을 믿고 성城을 의지해 수비하니, 갑작스럽게 함락시키기 어렵다.
사독査瀆(자독)이 여기에서 남쪽으로 수십 리 지점에 있으니, 마땅히 저곳을 따라 나가서 그 안을 점거해야 한다.
注+졸卒(갑자기)은 졸猝로 읽는다. 이렇게 한다면 이것이
병법兵法에 이른바
라는 것이다.”
손책이 이를 따라서 밤에 횃불을 많이 들어 올려
의병疑兵을 만들고, 군대를 나누어 자독의 길을 따라 나가서
고천둔高遷屯을 습격하였다.
注+≪삼국지三國志≫ 권卷51 〈오서 종실전吳書 宗室傳〉에 대한 배송지裴松之의 주注에 “살펴보건대, 지금 영흥현永興縣에 고천교高遷橋가 있다.” 하였다.
왕랑이 크게 놀라 주흔周昕(주흔)을 보내어 맞아 싸우게 하였는데, 손책이 격파하여 참살하였다. 왕랑이 달아나자 손책이 추격하여 대파하니, 왕랑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이에 손책이 스스로 회계태수會稽太守를 겸하고, 다시 우번을 임명하여 공조功曹로 삼아 교우交友의 예禮로써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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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目】
북해태수 공융北海太守 孔融이 천하의
화란禍亂을 평정할 뜻을 두었으나 재주는 부족한데 포부만 커서 끝내
공功을 이룬 바가 없었다.
注+난難(병란)은 거성去聲이다. 흘訖은 마침내이고 끝내이다. 그의 고상한 담론과 청아한 가르침은 사람들이
완미玩味하여
전송傳誦할 만하였으나 일을 논하고 실정을 고찰하면 모두 실행되기가 어려웠다.
다만 그물을 치는 데에만 능할 뿐 그물눈은 매우 엉성하고
注+책磔은 척격陟格의 절切이니, 벌림이고 엶이다., 잠시 동안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오랜 시일이 지나면 사람들 또한 다시는 그를 따르려고 하지 않았으며, 임용한 자들이 대부분 경박하며 잔재주만 부리는 사람들이었다.
注+경輕(가볍다)은 허정墟正의 절切이다.
공융이 명유 정현名儒 鄭玄을 높여 섬김에 있어서는 자손子孫의 예禮를 행하였으며 그가 사는 고을 이름을 정공향鄭公鄕이라고 바꾸었다.
그러나 청아하고 준수한 선비 좌승조左承祖와 유의손劉義遜 등에 대해서는 모두 좌석座席만 갖출 뿐 그들과 더불어 정사政事를 논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들은 백성들이 우러러 바라는 사람이니, 이들을 잃을 수 없다.” 하였다.
당시에 원소袁紹와 조조曹操와 공손찬公孫瓚의 세력이 머리와 꼬리로 서로 연결하였는데, 공융孔融은 고립孤立되어 그들과 왕래하지 못하였다. 좌승조가 공융에게 권하여 스스로 강국强國에 의탁하도록 하였는데, 공융이 이를 따르지 않고 그를 죽이자 유의손이 공융을 저버리고 떠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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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유비劉備가 군대를 수합하여 만여 명을 얻으니, 여포呂布가 이를 미워하여 유비를 공격하였다. 유비가 패주하여 조조曹操에게 귀의하자, 조조가 유비를 후하게 대우하고 예주목豫州牧으로 삼았다.
어떤 이가 조조에게 이르기를 “유비는 영웅英雄의 뜻을 품고 있으니, 지금 조속히 도모하지 않으면 뒤에 반드시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조조가 이것을 곽가郭嘉에게 물으니,
곽가가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이러한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공公께서
의병義兵을 일으키심은 백성을 위하여 포학한 자를 제거하려는 것인데, 정성을 미루고 신의에 의지해서
준걸俊傑들을 부르더라도 오히려 이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注+장杖(의지함)은 상성上聲이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양공襄公 8년(B.C.565) 조에 “의지할 것[장杖]은 성신誠信만 한 것이 없다.” 하였는데, 임요수林堯叟(임지기林之奇)의 주注에 “사람이 의지할 만한 것으로는 성신誠信만 한 것이 없다.” 하였다.
지금 유비는 영웅이란 명성이 있습니다. 곤궁함 때문에 자신(공公)에게 귀의하였는데 도리어 그를 해치면 이는 어진 이를 해쳤다는 이름을 남기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하면 지혜로운 선비들이 장차 스스로 의심하여 마음을 돌려서 다른 주인을 찾을 것이니,
공公이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평정하겠습니까. 근심거리가 되는 한 사람을 제거하려다가 사해四海의 기망期望을 막는 것은 안위安危의 기틀에 관계되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조조가 웃으며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맞다.” 하고 마침내 유비에게 군대를 더 보태 주고 양식을 공급해서 동쪽으로 패현沛縣에 이르러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해서 여포를 도모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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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처음에 유비劉備가 예주豫州에 있으면서 원환袁渙을 무재茂才로 천거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환이 여포呂布에게 억류되었다. 여포가 원환에게 유비를 꾸짖고 모욕하는 편지를 쓰게 하였으나 원환은 할 수 없다고 하였다.
여포가 크게 노하여 무기로 협박하자, 원환이 안색을 조금도 변치 않고 웃으며 다음과 같이 응대하였다. “저 원환은 오직 덕德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욕되게(부끄러워하게) 할 수 있다고 들었고, 욕설로써 〈부끄러워하게〉 한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저(유비)가 진실로
군자君子라면 또한 장군의 욕하는 말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요, 저가 진실로
소인小人이라면 장차 다시 편지로 장군의 뜻을 욕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모욕당함이 여기(장군)에 있고 저기(유비)에 있지 않습니다.
注+〈“사피고군자야使彼固君子邪……장부장군지의將復將軍之意”는〉 여포呂布가 편지로 유비劉備에게 욕할 경우 유비가 군자君子라면 진실로 〈여포呂布가〉 욕한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고, 유비가 소인小人이라면 장차 다시 편지로 여포에게 욕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그리고 또 저 원환이 지난날에 유장군劉將軍을 섬긴 것은 오늘날 장군을 섬기는 것과 같으니, 만일 하루아침에 이곳을 떠나가서 다시 장군을 욕한다면 옳겠습니까.” 여포가 부끄러워하여 중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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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目】
예형禰衡(예형)이 젊었을 때부터 재주가 있고 구변이 뛰어났으나 기개를 숭상하여 강하고 오만하였다.
注+예禰는 성姓이다. 공융孔融이
조조曹操에게 그를 천거하였는데 예형이 조조를 꾸짖고 욕하니
注+조조曹操가 예형禰衡을 불러서 고리鼓吏(북 치는 관리)로 삼았기 때문에 예형에게 꾸짖음과 욕을 받은 것이다.,
조조가 노하여 말하기를 “촌놈 예형을 내가 죽이는 것은 참새와 쥐를 죽이는 것처럼 쉬울 뿐이다. 다만 이 사람이 평소에 헛된 명성이 있으니, 〈그를 죽이면〉 원근에서 장차 나더러 사람을 용납하지 못한다고 말할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유표劉表에게 보내었다.
예형은 유표의 훌륭함을 극구 칭찬하여 마지않았으나 유표의 좌우左右를 비난하고 폄하하기를 좋아하니, 유표의 좌우左右가 예형을 참소하였다.
이에 유표가 노하여 강하태수 황조江夏太守 黄祖가 성질이 급하다고 하여 예형을 황조에게 보내었는데, 뒤에 예형이 사람들 앞에서 황조를 욕하니, 황조가 예형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