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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사마공司馬公(사마광司馬光)이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옛날 군자君子들은 나라에 도道가 있으면 벼슬하고 나라에 도道가 없으면 은둔하였으니, 은둔은 군자君子가 하고자 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자기를 알아주는 이가 없어서 도道를 행할 수 없고, 여러 간사한 자들과 함께 조정에 처하여 해害가 장차 자기에게 미치겠기에 깊이 은둔하여 피하는 것이다.
왕자王者가 일민逸民(은일隱逸)을 천거하고 미천한 이를 등용하는 것은 진실로 그가 국가에 유익하기 때문이요, 세속世俗의 귀와 눈이 좋아하는 것을 따르려는 것이 아니다.
이 때문에 〈군자가〉 충분히 군주를 높일 수 있는 도덕道德이 있고 충분히 백성을 비호할 수 있는 지모와 재능이 있는데도, 짧은 갈옷을 입고 옥玉을 품고서 깊이 은둔하여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면,
왕자가 마땅히 예를 다하여
초치招致하고 몸을 굽혀 낮추고, 마음을 비워 방문하고 자기의
이욕利慾을 이겨 따르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이익과 은택이
사해四海에 베풀어지고
공렬功烈이
상하上下(
천지天地)에 이르는 것이다.
注+갈褐은 짧은 옷이다. 성인聖人은 갈옷을 입고 옥玉을 품고 있으니, 옥玉은 지극한 보배인데 짧은 갈옷을 입고 옥을 품고 있는 것은 진기한 아름다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음을 비유한 것이다. 훌륭한 장사꾼은 〈좋은 물건을〉 깊이 감추어 없는 것처럼 하고, 장사꾼은 좋은 보화가 있으면 깊이 감추어 마치 가진 것이 없는 것처럼 하여 좋은 값을 얻지 못하면 팔지 않으니, 이는 모두 도道를 간직하고 재주를 품은 선비를 비유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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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혹 군주의 예禮가 구비되고 뜻이 간절한데도 나오지 않으면, 군주가 우선 안으로 자신을 살펴보아 감히 그 사람을 억지로 초치招致하지 않고서 말하기를 ‘아마도 내 덕德이 부족하여 사모할 만하지 못한가. 정사가 혼란하여 보필할 수 없는가.
여러 소인들이 조정에 있어서 감히 나올 수 없는가. 나의 성심誠心이 지극하지 못하여 자신의 말이 쓰이지 못할까 근심하는가. 어찌하여 현자賢者가 나를 따르지 않는가.’ 하니,
이 몇 가지가 없다면 어찌 군주가 부지런히 구하는데도 나오지 않는 자가 있겠는가. 혹 어떤 군주는 현자를 초치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해서 마침내 높은 지위로 유혹하고 엄한 형벌로 위협하니,
만일 저 초빙하려는 자가 진실로 군자君子라면 지위는 탐하는 바가 아니고 형벌은 두려워하는 바가 아니다. 〈높은 지위와 엄한 형벌로〉 오게 할 수 있는 자는 바로 지위를 탐하고 형벌을 두려워하는 사람일 뿐이니, 어찌 귀하게 여길 것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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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선비가 만약 효도하고 공경하고 삼가고 청렴하여 벼슬에 구차히 나아가지 않으며, 자기 몸을 깨끗이 하고 분수를 편안히 여겨 한가로이 노닐며 한 해(일생)를 마친다면, 이런 자는 비록 군주를 높이고 백성을 비호하지는 못하더라도 이 또한 깨끗하게 수행하는 길吉한 선비이다.
왕자王者는 마땅히 표창하여 우대하고 편안히 길러서 그로 하여금 뜻을 이루게 하여
처럼 하여
염치廉恥를 장려하고
풍속風俗을 아름답게 해야 옳으니,
진실로
범승范升과 같이 훼방해서도 안 되고 또
장해張楷와 같이 책망해서도 안 된다.
注+광무제 건무光武帝 建武 5년(29)에 범승范升이 처사 주당處士 周黨 등이 방자하고 교만하고 사나워서 화려한 이름을 취한다고 아뢰었다.
거짓으로 꾸며서 명예를 구하고 기이한 이름을 얻어 세속을 놀라게 하여, 군주의 녹봉을 먹지 않으면서 짐승을 도살하고 술을 파는 이익을 다투고, 작은 관직은 받지 않고 경상卿相의 지위를 엿보아서 이름이 실제와 상반되고 마음이 행적과 어긋나는 자로 말하면,
바로
화사華士와
소정묘少正卯의 부류로
성왕聖王의 주벌을 면하는 것도 다행일 것이니, 어찌 초빙하여 부를 것이 있겠는가?”
注+≪한비자韓非子≫에 말하였다. “태공太公을 재齊나라에 봉했을 적에, 동해東海 가에 임율任矞(임율)과 화사華士 형제 두 사람이 있었는데 태공이 이들을 죽였다. 주공周公이 급히 파발마를 보내어 묻기를 ‘두 사람은 모두 현인賢人인데, 이들을 죽인 까닭이 무엇입니까?’ 하자, 태공太公이 대답하였다. ‘이들 형제가 의논을 세우기를 「천자天子에게 신하 노릇 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신하로 삼을 수 없는 것이요, 「제후諸侯들과 벗하지 않겠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벗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이요, 「밭을 갈아 먹고 땅을 파 물을 마셔서 남에게 바라는 바가 없다.」 하였으니 이는 내가 상과 벌로써 권하고 금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성왕聖王이 사람을 부릴 적에 관작과 상이 아니면 형벌을 사용하였는데, 지금 네 가지로 부릴 수가 없다면 내 어찌 군주 노릇을 하겠습니까? 이 때문에 죽인 것입니다.’ 하였다.” ≪순자荀子≫에 말하였다. “공자孔子가 노魯나라 정승이 되어 7일 만에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시자, 문인門人이 나아가 묻기를 ‘저 소정묘는 노魯나라의 명망 있는 사람인데, 부자夫子께서 정사를 하시면서 첫 번째로 그를 주살하시니, 잘못하신 것이 아닙니까?’ 하자,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악행이 다섯 가지가 있는데 도둑질은 여기에 들지 않는다. 첫 번째는 마음이 사리에 통달했으나 음험한 것이고, 두 번째는 행실이 편벽되면서 굳센 것이고, 세 번째는 거짓을 말하면서 말재주가 좋은 것이고, 네 번째는 기괴한 일을 기억하면서 널리 퍼뜨리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잘못을 따르면서 꾸미는 것이니, 이 다섯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있는 사람은 군자君子의 주살을 면치 못하는데, 소정묘는 다섯 가지를 겸하여 소유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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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目】 이때 황제가 또다시
양후楊厚와
황경黃瓊을 불렀는데
注+황경黃瓊은 황향黃香의 아들이다., 양후가 와서
한漢나라에 350년의
곤액困厄이 있다고 미리 아뢰어 경계하니, 그에게
의랑議郞을 제수하였다.
注+〈“한유삼백오십년지액漢有三百五十年之戹”은〉 ≪춘추명력서春秋命歷序≫에 “400년 사이에 사방의 문을 닫고 있으나 외부의 환란을 그대로 두어서 여러 재이災異와 도적이 함께 일어나니, 관청에는 요망한 신하가 있고 주州에는 병란兵亂이 있어서 오칠五七이 약해져서 점점 나쁜 효험이 드러난다.”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오칠五七은 350년이니, 순제順帝 때를 당하여 점점 나라가 쇠약해져서 사방四方에 역적逆賊이 많은 것이다.” 하였다.
황경이 막 도착할 때쯤,
이고李固가 미리 편지를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생민生民이 있은 이래로 선善한 정사는 적고 어지러운 풍속은 많으니, 반드시 요순堯舜과 같은 성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려 출사하고자 한다면, 이는 선비가 자신의 뜻을 행할 때가 끝내 없게 될 것입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높디높은 것은 무너지기 쉽고, 희고 깨끗한 것은 더렵혀지기 쉽다.’
注+요嶢(높다)는 예요倪幺의 절切이다. “요요嶢嶢”은 산이 높음이고, “교교皦皦”는 옥과 돌이 흰 것이다. 하였으니, 성대한 명성 아래에서는 그 실제가 부응하기 어렵습니다.
근래에
노양魯陽 사람
번군樊君(
번영樊英)이 부름을 받고 처음 왔을 때에는
注+번영樊英은 남양 노양현南陽 魯陽縣 사람이다. 조정(황제)이
을 베풀어서
신명神明을 대하듯 하였습니다. 그런데 비록 크게 기이한 재주는 없었으나 말과 행실로 지키는 바는 흠잡을 것이 없었는데,
그를 향한 훼방이 사방으로 유포되어서 곧바로 명성이 훼손되었으니, 이는 어찌 보고 듣는 사람들의 바람이 커서
명성名聲이 너무 성대해진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注+절折(꺾이다)은 식렬食列의 절切이니, 〈“절감折減”은〉 그 명예가 훼손됨을 말한 것이다. “관청망심觀聽望深”은 처사處士의 명성이 성대하여 평소 사람들의 이목耳目을 동動하였기 때문에 그에게 바라는 바가 깊음을 말한 것이다.
이 때문에 세속의 의논이 모두 ‘처사處士들은 순전히 헛된 명성을 도둑질한다.’라고 말하니, 원컨대 선생先生은 이 큰 계책을 넓혀서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탄복歎服하게 하여 이 말이 잘못되었음을 분명히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황경이 오자 의랑議郞을 제수하였는데 차츰 승진하여 상서복야尙書僕射가 되었고, 여러 번 글을 올려 일을 말하니 상上이 자못 그의 말을 채택하여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