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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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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酉年(193)
계유년癸酉年(193)
四年이라 春正月朔 日食하다
나라 효헌황제 초평孝獻皇帝 初平 4년이다. 봄 정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袁術 進兵封丘어늘 曹操擊破之하니 走壽春하여 自領揚州事注+封丘縣, 屬陳留郡.하다
원술袁術봉구封丘로 군대를 전진하자 조조曹操가 이를 격파하니, 원술이 수춘壽春으로 달아나 스스로 양주자사揚州刺史를 겸하였다.注+봉구현封丘縣진류군陳留郡에 속하였다.
爲劉表所逼하여 進兵北向이러니 爲曹操所破하여
원술袁術유표劉表에게 핍박을 받고는 군대를 전진하여 북쪽으로 향하였으나 조조曹操에게 격파당하자,
走歸하여 逐所置揚州刺史陳瑀하고 據壽春하여 領州事注+通鑑, 上年 “術以陳瑀爲揚州刺史.” 壽春縣, 屬九江郡, 揚州刺史治所.하니 李傕 欲術爲援하여 以爲左將軍하다
패주하고 돌아와서 자신이 설치했던 양주자사 진우揚州刺史 陳瑀를 쫓아내고 수춘壽春을 점거하여 의 일을 겸하였다.注+ 수춘현壽春縣구강군九江郡에 속하니, 양주자사揚州刺史치소治所가 있는 곳이다. 이각李傕이 원술을 외원外援으로 삼고자 하여 그를 좌장군左將軍으로 삼았다.
袁紹以其子譚爲靑州刺史하다
원소袁紹가 아들 원담袁譚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았다.
袁紹與田楷 連戰二年하니 士卒 疲困하고 糧食 竝盡하여 互掠百姓하니 野無靑草注+楷, 公孫瓚所置靑州刺史. 野無靑草, 謂在野無蔬食之物.러라
원소袁紹전해田楷와 2년 동안 연달아 싸움에 사졸士卒들이 피폐해지고 양식이 모두 소진되어 서로 백성들을 노략질하니, 들에는 푸성귀도 없게 되었다.注+전해田楷공손찬公孫瓚이 설치한 청주자사靑州刺史이다. “야무청초野無靑草”는
紹以其子譚爲靑州刺史러니 楷與戰하여 不勝이라 趙岐來和解하니 乃與紹和親하여 各引兵去하다
원소가 아들 원담袁譚청주자사靑州刺史로 삼았는데, 전해가 그와 싸워 승리하지 못하였다. 이때 마침 조기趙岐가 와서 화해시키니, 공손찬公孫瓚이 마침내 원소와 화친하여 각각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三月 注+魏郡, 屬冀州. 上二年, 紹領冀州牧.하다
】 3월에 위군魏郡의 군대가 흑산적黒山賊우독于毒 등과 함께 업성鄴城(업현鄴縣)을 전복하였다.注+위군魏郡기주冀州에 속하였다.
◑以陶謙爲徐州牧하다
도겸陶謙서주목徐州牧으로 삼았다.
徐州治中王朗 勸刺史陶謙하여 遣使奉貢이라 有是命하고 仍以朗爲會稽하다
서주徐州치중종사治中從事왕랑王朗자사 도겸刺史 陶謙에게 권하여 사자使者를 조정에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게 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 이어서 왕랑을 회계태수會稽太守로 삼았다.
夏六月 大雨雹하다
】 여름 6월에 우박이 크게 내렸다.
화산華山이 무너지고 갈라졌다.
◑袁紹擊于毒, 左髭丈八等하여 皆斬之하다
원소袁紹우독于毒좌자장팔左髭丈八(좌자장팔) 등을 공격하여 모두 참살하였다.
◑秋 曹操擊徐州하니 陶謙 走保郯하다
】 가을에 조조曹操서주徐州를 공격하니 도겸陶謙이 달아나 담현郯縣(담현) 지역을 지켰다.
前太尉曹嵩 避難在琅邪러니 其子操迎之할새 輜重 百餘兩이라
전 태위前 太尉 조숭曹嵩이 피난하여 낭야琅邪에 있었는데, 그의 아들 조조曹操가 맞이해올 적에 조숭의 치중輜重이 100여 이었다.
陶謙別將 守陰平이러니 掩襲嵩於華, 費間하여 殺之注+陰平縣, 屬東海郡. 華, 胡化切. 前漢志, 華ㆍ費二縣, 皆屬泰山郡. 續漢志, 泰山有費縣, 無華縣, 蓋倂省也.하다
이때 도겸陶謙별장別將음평陰平을 지키고 있었는데, 화현華縣비현費縣 사이에서 조숭을 습격하여 그를 죽였다.注+음평현陰平縣동해군東海郡에 속하였다. 호화胡化이다. 아마도 합병하여 줄인 듯하다.
操引兵擊謙하여 攻拔十餘城하고 至彭城하여 大戰하니 敗走郯注+郯縣, 屬東海郡, 徐州刺史治所.이어늘
가을에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도겸을 공격하여 10여 개의 을 함락시키고 팽성彭城에 이르러 크게 싸우니, 도겸이 패하여 담현郯縣으로 달아났다.注+담현郯縣동해군東海郡에 속하였으니, 서주자사徐州刺史치소治所가 있는 곳이다.
操坑殺男女數十萬口於泗水하고 攻郯不克하고 乃去하여 攻破城邑하여 皆屠之注+通鑑 “攻取慮ㆍ睢陵ㆍ夏丘, 皆屠之.” 三縣皆屬下邳國.하니 鷄犬亦盡하고 墟邑無復人行이러라
조조는 사수泗水에서 남녀 수십만 명을 익사시킨 뒤에 담현郯縣 지역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마침내 떠나가서 성읍城邑을 격파하여 깨뜨려 모조리 도륙하니注+〈“공파성읍 개도지攻破城邑 皆屠之”는〉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조조曹操가〉 , 수릉睢陵, 하구夏丘를 공격하여 점령해서 모두 도륙하였다.” 하였으니, 이 세 은 모두 하비국下邳國에 속하였다., 닭과 개도 모두 남아 있지 못하고 폐허가 된 에 다시는 사람이 다니지 않았다.
冬十月 地震하다
】 겨울 10월에 지진이 있었다.
◑有星 孛于天市하다
패성孛星에 나타났다.
대사마 유우大司馬 劉虞공손찬公孫瓚을 토벌하다가 이기지 못하고 죽임을 당하였다.
虞與瓚으로 積不相能注+積, 日久也, 素也. 瓚初受虞節度, 瓚尙武暴, 而虞務仁恕, 屢違節度, 積不相能.이러니 虞遣使奉章하여 陳其暴掠之罪하니
유우劉虞공손찬公孫瓚과 오랫동안 서로 사이가 좋지 못하였는데注+은 날짜가 오램이요 평소이다. 공손찬公孫瓚이 처음에는 유우劉虞절도節度(지휘)를 받았는데 공손찬은 무력과 포악함을 숭상하고 유우는 인자함과 용서함을 힘써서 여러 번 유우의 절도節度를 어겨 오랫동안 서로 화합하지 못하였다., 유우가 조정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글을 올려서 공손찬이 포학하게 노략질한 죄를 아뢰니,
亦上虞稟糧不周하여 二奏交馳하여 互相非毁호되 朝廷 依違而已注+依違, 言甲奏上則依甲而違乙, 乙奏上則依乙而違甲, 無決然之是非也.러라
공손찬 또한 유우가 창고의 군량을 착복하였다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의 상주上奏가 서로 치달려 번갈아 비방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모호한 태도를 보일 뿐이었다.注+의위依違”는 주장奏章을 올리면 의 말을 따라 을 나쁘다고 하고, 주장奏章을 올리면 의 말을 따라 을 나쁘다고 하여, 분명하게 옳다 그르다 함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乃築小城於薊城東南以居어늘 虞恐其終爲亂하여 乃率兵十萬討之하니 瓚部曲 放散在外 倉卒掘城欲走러라
공손찬이 계성薊城의 동남쪽에 작은 을 쌓고 거주하였는데, 유우는 그가 끝내 을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마침내 10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하였다. 이때에 공손찬의 부하들은 밖에 흩어져 있었으므로 공손찬은 창졸간倉卒間이라 밑을 파고 달아나고자 하였다.
虞兵 無部伍하고 不習戰하며 又愛民廬舎하여 不聽焚燒하고 戒軍士曰 無傷餘人하라 殺一伯珪而已注+伯珪, 瓚字.니라
유우의 군대는 편제編制가 없고 전투에 익숙하지 못하였으며 유우는 또 백성들의 집을 아껴서 불태우는 것을 허락하지 않고, 군사들에게 경계하기를 “나머지 사람들은 해치지 말라. 백규伯珪(공손찬) 한 사람을 죽일 뿐이다.”注+백규伯珪공손찬公孫瓚이다. 하였다.
攻圍不下러니 乃簡募鋭士數百人하여 因風縱火하고 直衝突之하니 虞衆 大潰어늘 執虞하다
유우가 계성薊城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는데, 공손찬은 마침내 정예병 수백 명을 선발, 모집해서 바람을 이용해 불을 놓고 곧바로 돌격하였다. 이에 유우의 군대가 크게 무너지니, 공손찬이 유우를 사로잡았다.
詔遣使者段訓하여 增虞封邑한대 乃誣虞前與袁紹等으로 謀稱尊號라하여 脅訓斬虞及妻子於薊市하고 傳首京師하니
】 이때 마침 조령詔令을 내려 사자 단훈段訓을 보내어 유우劉虞에게 봉읍封邑을 더해주었는데 공손찬公孫瓚이 마침내 유우가 예전에 원소袁紹 등과 함께 존호尊號를 칭할 것을 도모했다고 무함하고, 단훈을 위협해서 유우와 그의 처자妻子계시薊市에서 참수하고 유우의 머리를 경사京師로 올려 보냈다.
故吏尾敦 於路 劫歸葬之注+尾敦, 姓名.하다 虞以恩厚得衆心이라 北州流舊 莫不痛惜注+流者, 他州人流入幽州者也. 舊者, 舊著籍幽州者也.하니라
유우의 옛 관리인 미돈尾敦이 도중에 유우의 머리를 빼앗아 돌아가 장례하였다.注+미돈尾敦은 사람의 성명姓名이다. 유우는 은혜와 후덕함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얻었는바, 북주北州에 유리하여 들어온 자들과 옛날부터 살던 자들이 애통해하고 안타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注+는 다른 의 사람으로서 유주幽州로 흘러들어온 자이고, 는 옛부터 유주幽州에 토착하여 호적을 갖고 있는 자이다.
虞欲遣使奉章하여 詣長安이로되 而難其人이러니 咸曰 右北平田疇 年二十二 年雖少 然有奇才라하여늘
】 처음에 유우劉虞가 사자를 보내어 글을 받들고 장안長安에 가게 하고자 하였으나 그 적임자를 고르기가 어려웠는데,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우북평右北平 사람 전주田疇는 나이가 22세이니, 나이는 비록 적으나 기이한 재주가 있다.” 하였다.
虞乃備禮하여 請以爲掾而遣之하다 疇選家客二十騎하여 循間道하여 至長安致命注+間, 古莧切.이어늘
유우가 마침내 예를 갖추어 전주를 초청해서 을 삼아 장안으로 보내었다. 전주가 문객門客 중에 20명의 기병騎兵을 선발하여 사잇길을 따라 장안에 이르러서 명을 전달하였다.注+(사잇길)은 고현古莧이다.
田疇田疇
詔以爲騎都尉하니 不受하고 得報馳還이러니 比至 虞已死 疇謁祭虞墓하고 陳發章表하여 哭泣而去하다
그러자 조령詔令을 내려 전주를 기도위騎都尉로 삼았는데, 전주는 이를 받지 않고 회답을 얻어서 속히 돌아왔다. 그러나 도착하자 유우가 이미 죽었다. 전주는 유우의 묘를 찾아가 제사하고 받아온 글을 꺼내어 진열한 다음 곡하며 울고 떠나갔다.
하여 購求獲疇하여 謂曰 汝不送章報我 何也 疇曰 漢室衰頹하여 人懷異心호되 惟劉公 不失忠節하니
공손찬公孫瓚이 노하여 현상금을 내걸어 전주田疇를 체포하고 이르기를 “네가 답장을 나에게 보내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하니, 전주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가 쇠퇴하여 사람마다 딴마음을 품고 있는데 오직 유공劉公만이 충절을 잃지 않았습니다.
章報所言 於將軍 未美 恐非所樂聞일새 故不進也로라 且將軍 旣滅無罪之君하고 又讐守義之臣하니
답장에서 말한 것이 장군에게 좋은 내용이 아니어서 반갑게 들을 만한 것이 아닐듯 하기에 올리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장군이 죄 없는 주군(유우)을 죽이고 또 의리를 지키는 신하를 원수로 삼으니,
疇恐燕, 趙之士 將皆蹈東海而死하여 莫有從將軍者也注+蹈東海而死, 魯仲連語也.니라 乃釋之하다
저는 지방의 인사人士들이 장차 모두 동해東海에 뛰어들어 죽어서 장군을 따르는 자가 없게 될까 염려됩니다.”注+ 공손찬은 마침내 그를 풀어주었다.
疇北歸無終注+無終縣, 屬右北平郡, 疇蓋其縣人.하여 率宗族及他附從者數百人하여 掃地而盟曰 君仇不報하니 吾不可以立於世라하고
전주田疇는 북쪽으로 무종현無終縣에 돌아가서注+무종현無終縣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하니, 전주田疇는 아마도 이 사람인 듯하다. 종족과 기타 따르는 자 수백 명을 거느리고서 땅을 쓸고 맹세하기를, “주군의 원수를 갚지 못했으니, 나는 세상에 서서 살 수가 없다.” 하고는
遂入徐無山中注+徐無縣, 屬右北平郡, 有徐無山.하여 營深險平敞地而居하고 躬耕以養父母하니 百姓 歸之하여 數年間 至五千餘家注+間字, 當屬上句, 言百姓歸之, 數年之間, 多至五千餘家.
마침내 서무산徐無山 산중에 들어가서 깊고 험한 산중에서注+서무현徐無縣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하니, 여기에 서무산徐無山이 있다. 평평하고 넓은 땅을 찾아내어 거주하고 몸소 농사를 지어 부모를 봉양하니, 백성들이 그에게 귀의하여 수년 사이에 5천 여 가호家戶에 이르렀다.注+’자는 마땅히 윗구에 붙여야 하니, 백성들이 돌아와서 수년 사이에 무려 5천여 가호에 이름을 말한 것이다.
疇謂其父老曰 今衆 成都邑이어늘 而莫相統一하고 又無法制以治之하니 恐非久安之道
전주가 그 부로父老들에게 이르기를, “지금 무리가 모여 도읍을 이루었는데 서로 통솔하여 하나가 되지 못하고 또 법제法制로써 다스림이 없으니, 오랫동안 편안할 방도가 아닐 듯하다.
疇有愚計하여 願與諸君共施之하노니 可乎 皆曰 可라하여늘
나에게 어리석은 계책이 있어, 그대들과 함께 시행하기를 원하니 좋겠는가?” 하자, 모두 “좋다.”고 대답하였다.
疇乃爲約束注+以言語要結ㆍ戒令ㆍ檢束, 皆曰約束.하여 相殺傷, 犯盗, 諍訟者 随輕重抵罪하여 重者 至死하니十餘條注+諍, 讀曰爭.
전주는 마침내 약속約束(규약規約)을 만들어서注+언어로써 서로 약속하거나 경계하고 명령하거나 검속하는 것을 모두 약속約束이라고 한다. 서로 죽이고 상해傷害하며 죄를 범하고 도둑질하는 자와 다투고 송사하는 자를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받게 하여 죄가 무거운 자는 사형에 이르게 하니, 약속이 모두 20여 조항이었다.注+으로 읽는다.
又制爲婚姻嫁娶之禮하며 興學校講授之業하여 班行於衆한대 衆皆便之하여 至道不拾遺하니 北邊 翕然服其威信하니라
또 혼인하여 딸을 시집보내고 아들을 장가들이는 를 제정하였으며 학교에서 경전을 강론하고 전수하는 학업을 일으켜서 여러 사람들에게 시행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편리하게 여겨서 길에 흘린 물건을 줍지 않음에 이르니, 북쪽 변방이 흡연翕然히 그의 위엄과 신의에 복종하였다.
烏桓, 鮮卑 各遣使致饋遺어늘 疇悉撫納하여 令不爲寇하다
오환烏桓선비鮮卑가 각각 사신을 보내어 선물을 바치자, 전주가 모두 어루만지고 받아들여서 도적질하지 못하게 하였다.
十一月 地震하다
】 11월에 지진이 있었다.
역주
역주1 資治通鑑에는……하였다 : ≪資治通鑑≫ 漢 獻帝 初平 3년(192)에 “揚州刺史인 汝南 사람 陳溫이 卒하자 袁紹가 袁遺로 하여금 揚州刺史를 겸하게 하였는데, 袁術이 원유를 격파하였다. 그러자 원유가 달아나 沛縣에 이르러 병사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에 원술이 下邳 사람 陳瑀를 양주자사로 삼았다.[揚州刺史汝南陳溫卒 袁紹使袁遺領揚州 袁術擊破之 遺走至沛 爲兵所殺 術以下邳陳瑀爲揚州刺史]” 하였다.
역주2 들에는……이른다 : 이 말은 ≪春秋左氏傳≫ 僖公 26년(B.C.634) 조에 보인다. 이해 여름에 齊나라 孝公이 魯나라의 북쪽 변방을 침공하였는데 魯나라의 대부 展喜가 齊나라 군대를 犒饋하기 위해 효공을 찾아갔다. 그러자 효공이 전희에게 “집에는 경쇠를 달아놓은 것과 같아 안이 텅 비었고 들에는 푸성귀 하나도 없는데, 무엇을 믿고 우리 齊나라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는가.[室如縣罄 野無靑草 何恃而不恐]” 하였는데, 이에 대한 杜預의 注에 “이때의 여름 4월은 지금의 2월이어서 들에 穀物이 성숙되지 않았기 때문에 居室에는 食糧이 다 떨어졌고 들에는 먹을 수 있는 푸성귀도 없으니, 당연히 두려워해야 한다는 말이다.[時夏四月 今之二月 野物未成 故言居室而資糧縣盡 在野則無蔬食之物 所以當恐]”라고 설명하였다.
역주3 魏郡兵……共覆鄴城 : “‘賊을 함락하였다.[寇陷]’라고 쓴 적은 많으나 ‘전복하였다.[覆]’라고 쓴 적은 있지 않으니, ‘鄴城을 전복하였다.[覆鄴城]’라고 쓴 것은 士民이 도탄에 빠짐이 심한 것이다. ≪資治通鑑綱目≫에 賊을 함락한 것에 대해 ‘覆’이라고 쓴 것은 1번뿐이다.[書寇陷 多矣 未有書覆者 書曰覆鄴城 士民之塗炭甚矣 綱目寇陷書覆 一而已]” ≪書法≫
역주4 앞의……겸하였다 : 본서 58쪽에 보인다.
역주5 (大)[太] : 저본에는 ‘大’로 되어있으나, ≪資治通鑑≫에 의거하여 ‘太’로 바로잡았다.
역주6 華山 崩裂 : “華山은 어디인가. 西嶽이다. 예전에 岱山이 갈라졌다고 썼으니 갈라짐은 이변이지만 무너진 데다가 갈라진 것만은 못하다. 이 때문에 ‘華山이 무너졌다.’고 쓰자 漢나라가 망하였고, ‘恒山이 무너졌다.’고 쓰자 晉나라가 망하였으니(安帝 義熙 5년(409)) 모두 황제의 기업이 시작된 곳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嶽이 무너진 것이 2번이다.[華山 何 西嶽也 前書岱山裂矣 裂 異也 未若崩且裂之甚也 是故書華山崩而漢亡 書恒山崩而晉亡(安帝義熙五年) 皆帝業所由起也 終綱目嶽崩者 二]다” ≪書法≫
역주7 漢書……있다 : 현재 ≪漢書≫ 권28上 〈地理志〉 泰山郡 條에는 華縣만 보이고 費縣은 보이지 않는다.
역주8 續漢志에는……없으니 : 현재 ≪後漢書≫ 권31 〈郡國志 兗州〉의 泰山郡 조에 費縣은 ‘費侯國’이라고 보이며, 華縣은 보이지 않는다.
역주9 天市 : 별의 명칭으로 ≪史記≫ 권27 〈天官書〉에 “〈房宿의〉 동북쪽 모퉁이에 있는 12개의 별을 旗라 하고, 旗 가운데에 있는 4개의 별을 天市라 한다.[東北曲十二星曰旗 旗中四星曰天市]” 하였다.
역주10 大司馬劉虞……見殺 : “袁紹가 公孫瓚에 대하여 擊이라고 썼는데 여기서는 討라고 쓴 것은 어째서인가. 袁紹는 上(황제)을 무시하였기 때문이니, 오직 劉虞만이 討라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죽일 적에 ‘見殺’이라고 쓴 적이 있지 않은데 ‘見殺’이라고 쓴 것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에게 가하지 않게 한 말이니, ≪資治通鑑綱目≫을 편수함은 명분을 바로잡았을 뿐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見殺’이라고 쓴 것이 한 번뿐이다.[袁紹於瓚書擊 此其書討 何 無上也 唯劉虞得書之 殺未有書見殺者 書見殺 不以下加上之辭也 綱目之修 名分而已矣 終綱目 書見殺一]” ≪書法≫ “大司馬라고 썼으면 그 관직을 잃지 않았음을 볼 수 있고, 公孫瓚을 토벌했다고 썼으면 꼬투리를 잡을 만한 명분이 있음을 볼 수 있고, 이기지 못하여 죽임을 당했다고 썼으면 죽은 것이 절개를 잃지 않았음을 볼 수 있으니, 공손찬은 본래 劉虞의 節度를 받았는데 마침내 횡포를 부리고 항거하자 유우가 군대를 일으켜 그를 토벌해서 명분과 의리가 매우 바르다. 그러므로 그 書法이 이와 같은 것이다.[書大司馬 則見不失其官 書討公孫瓚 則見有詞可執 書不克見殺 則見死不失節 蓋瓚本受虞節度 而乃暴横抗拒 虞興兵討之 名義甚正 故其書法如此]” ≪發明≫
역주11 東海에……말이다 : 전국시대 齊나라의 高士인 魯仲連이 趙나라에 있을 때에 秦나라가 趙나라를 공격하여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다. 이때 魏나라에서 장군 新垣衍을 趙나라로 보내 趙王을 설득해서 함께 秦나라를 높여 황제로 삼아 秦나라의 군대를 퇴각하게 하고자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노중련은 신원연을 찾아가서 말하기를 “저들이 만약 방자하게 황제가 되어 주제넘게 천하를 다스리려 한다면 나는 東海에 뛰어들어 죽음이 있을지언정 그 백성이 되기를 원치 않노라.[彼卽肆然而爲帝 過而爲政於天下 則連有蹈東海而死耳 不願爲之民也]”라고 하여 이 계획이 무산되었다.(≪史記≫ 권83 〈魯仲連列傳〉)
역주12 : 저본에는 ‘二’로 되어 있으나, 淸代 武英殿刊本 ≪御批資治通鑑綱目≫에는 ‘三’으로 되어 있으며, ≪資治通鑑≫에는 ‘一’로 되어 있다.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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