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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4)

자치통감강목(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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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年이라
趙建武三年이라
春正月 趙王虎稱趙天王하다
左校令成公段 作庭燎於杠末하니 髙十餘丈이라 上盤置燎하고 下盤置人하니 虎試而悦之注+成公, 複姓. 杠, 音江, 竿也. 竿之曰末. 鄭氏云 “在地曰燎, 執之曰燭.” 又云 “樹之門外曰大燭, 於內曰庭燎, 皆是照衆爲明.” 今成公段懸盤於杠, 以置燎, 創意爲之, 非有古法也.러니
至是하여 文武五百餘人 入上尊號할새 庭燎油灌下盤하니 死者二十餘人이라 虎惡之하여 腰斬成公段하다
立太學하다
國子祭酒袁瓌 太常馮懷 以江左寖安이라하여 請興學校注+瓌, 渙之曾孫也.한대 帝從之하여 立太學하고 徵集生徒로되 而士大夫習尙老莊하여 儒術 終不振이러라
邃素驍勇하니 虎愛之하여 常謂群臣曰 司馬氏父子兄弟 自相殘滅이라 使朕得至此하니 如朕有殺阿鐵理否注+阿鐵, 邃小字.아하더니
既而 邃驕淫殘忍하여 好粧飾美姬하고 斬其首하여 與賓客傳觀하고 又烹其肉하여 共食之러라
虎荒躭酒色하여 喜怒無常하니 使邃省可尙書事하여 誚責笞捶 月至再三이라
邃私謂中庶子李顔等曰 官家難稱하니 吾欲行冒頓之事하노니 卿從我乎注+稱天子爲官家, 始見於此. 西漢, 謂天子爲縣官, 東漢, 謂天子爲國家, 故兼而稱之. 或曰 “五帝官天下, 三王家天下, 故兼稱之.” 稱, 尺孕切. 漢高帝時, 匈奴冒頓, 以鳴鏑射殺其父, 遂自立. 顔等 伏不敢對하니 邃遂稱疾不視事하다
佛圖澄 謂虎曰 陛下不宜數往東宫이니이다 虎將視邃疾이라가 思澄言而還하고 命所親信女尙書하여 往察之하다 邃抽劒擊之한대
虎怒하여 收顔等詰問하니 具言狀이어늘 殺顔等三十餘人하고 廢邃殺之하고 并男女二十六人하여 同埋一棺하고
而立宣爲太子하다
慕容皝 自稱燕王하다
鎮軍長史封奕等 勸皝稱王注+帝拜皝鎭軍大將軍, 皝以弈爲左長史.하니 從之하고 因以奕爲國相하다
稱藩於趙하다
燕王皝 欲伐段氏할새 以其數侵趙邊이라하여 乃遣使稱藩於趙하고 乞師討遼하고 而請悉衆以會之한대
趙王虎大悦하여 厚加慰答하고 期以明年하다
趙納代王翳槐於代하니 紇那奔燕하다
◑楊初殺楊毅하고 自稱仇池公하여 附於趙注+初, 毅之族兄也.하다


[] 나라(동진東晉) 현종顯宗 성황제成皇帝 함강咸康 3년이다.
[] 나라(후조後趙) 태조太祖 석호石虎 건무建武 3년이다.
[] 봄 정월에 조왕趙王 석호石虎조천왕趙天王을 칭하였다.
[] 처음에, 좌교령左校令 성공단成公段이 장대 꼭대기에 를 만들었는데, 높이가 10여 이었다. 위 받침대(쟁반)에는 정료를 설치하고 아래 받침대에는 사람을 배치하니, 석호石虎가 이것을 시험해보고 좋아하였다.注+① 成公은 複姓이다. 杠은 音이 江이니, 대나무 장대이다. 장대의 끝을 末이라 한다. 鄭氏(鄭玄)가 말하기를 “땅에 있는 것을 燎라고 하고, 사람이 잡고 있는 것을 燭이라 한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문밖에 세우는 것을 大燭이라 하고 문안에 세우는 것을 庭燎라 하니, 모두 여러 사람을 비추어 밝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지금 成公段이 장대에 쟁반을 매달아 정료를 설치한 것은 창의적으로 그렇게 만든 것이지 옛 법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때에 문무관文武官 5백여 명이 들어와 존호尊號을 올릴 적에, 정료의 기름이 아래 받침대로 흘러내리니, 죽은 자가 20여 명이었다. 석호는 이를 끔찍하게 여겨서 성공단을 요참腰斬하였다.
[] 태학太學을 세웠다.
[] 국자좨주國子祭酒 원괴袁瓌(원괴)와注+① 袁瓌는 袁渙의 증손자이다. 태상太常 풍회馮懷가, 강좌江左 지역이 다소 안정되었다고 해서 학교를 일으킬 것을 청하자, 황제( 성제成帝)가 그의 말을 따라 태학太學을 세우고 생도生徒들을 불러 모았다. 그러나 사대부士大夫들이 노장老莊을 익히고 숭상하여 유학儒學이 끝내 진작되지 못하였다.
[] 가을 7월에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태자 석수石邃를 죽이고, 아들 석선石宣을 태자로 바꿔 세웠다.
[] 석수石邃는 평소 날래고 용맹하니, 석호石虎가 그를 사랑하여 항상 여러 신하들을 보고 말하기를 “ 그러므로 으로 하여금 이 자리(황제의 지위)에 이르게 하였으니, 짐이 아철阿鐵注+① 阿鐵은 石邃의 어렸을 때 字이다. 죽일 리가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나 얼마 후, 석수는 교만하고 음탕하며 잔인하여 미녀들을 아름답게 꾸민 다음 그 머리를 베어 손님들과 돌려가며 구경하기를 좋아하였고, 게다가 또 그 살을 삶아서 함께 먹기까지 하였다.
석호는 주색酒色에 빠져 기뻐하고 노여워하는 것이 일정함이 없으니, 석수로 하여금 상서尙書가 아뢰는 일을 재결하게 하고서 〈석수가 처결한 것이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으면〉 그를 꾸짖고 매를 때리는 것이 한 달에 두세 번에 이르렀다.
석수가 은밀히 중서자中庶子 이안李顔 등에게 이르기를 “관가官家(황제)의 뜻을 맞추기 어렵다. 내가 들은 나를 따르겠는가?”注+② 天子를 칭하여 官家라 한 것이 이때 처음 보인다. 西漢은 天子를 일러 縣官이라고 하고, 東漢(後漢)은 천자를 일러 國家라 하였으므로, 둘을 겸하여 관가라 칭한 것이다. 혹자는 말하기를 “五帝는 천하를 관청으로 여기고 三王은 천하를 자기 집안으로 여겼으므로 겸하여 관가라 칭했다.” 하였다. 稱(맞추다)은 尺孕의 切이다. 漢나라 高帝 때 匈奴 冒頓이 鳴鏑으로 자기의 아버지를 쏘아 죽이고, 마침내 스스로 즉위하였다. 하였다. 이안 등이 엎드려서 감히 대답을 하지 못하니, 석수는 마침내 병을 칭탁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 불도징佛圖澄석호石虎에게 이르기를 “폐하께서는 자주 동궁東宮에 가셔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석호가 석수石邃의 병을 살펴보러 가다가 불도징의 말을 생각하고 돌아와서는, 친애하고 신임하는 여상서女尙書(여관女官의 등속)를 보내서 석수의 병세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석수가 검을 뽑아 그녀를 공격하였다.
석호가 노하여 이안李顔 등을 체포해서 심문하니, 이안이 석수가 반란을 도모한 내용을 자세히 모두 말하였다. 이에 이안 등 30여 명을 죽이고 석수를 하여 죽이고는, 26명의 아들딸을 죽여 한 에 함께 묻었다.
석선石宣을 세워 태자로 삼았다.
[] 모용황慕容皝이 스스로 연왕燕王(전연前燕)이라 칭하였다.
[] 진군장사鎮軍長史 봉혁封奕 등이 모용황慕容皝에게 을 칭할 것을 권하니,注+① 황제가 慕容皝을 鎭軍大將軍으로 제수하니, 모용황이 封奕을 左長史로 삼았다. 모용황은 그 말을 따르고 인하여 봉혁을 국상國相으로 삼았다.
[] 나라(전연前燕)가 나라(후조後趙)에 번신藩臣을 칭하였다.
[] 연왕燕王 모용황慕容皝단씨段氏를 공격하고자 할 적에, 단씨段氏가 자주 나라의 변경을 침략한다고 하여 마침내 사신을 보내어 나라에 번신藩臣을 칭하고, 군대를 내어 요동遼東을 토벌할 것과 또 병력을 총동원하여 회합할 것을 청하였다.
조왕趙王 석호石虎가 크게 기뻐해서 후하게 위로하고 답례를 하고는, 명년明年에 회합할 것을 기약하였다.
[] 나라(후조後趙)가 대왕代王 탁발예괴拓跋翳槐나라에 받아들이게 하니, 〈대왕代王이었던〉 탁발흘나拓跋紇那나라(전연前燕)로 달아났다.
[] 양초楊初注+① 楊初는 楊毅의 族兄이다. 양의楊毅를 죽이고 스스로 구지공仇池公이라 칭하고서 나라(후조後趙)에 귀의하였다.


역주
역주1 庭燎 : 밤중에 입궐하는 신하를 위해 대궐 뜰에 밝힌 횃불을 이른다.
역주2 (抄)[杪] : 저본에는 ‘抄’로 되어 있으나, 문맥에 의거하여 ‘杪’로 바로잡았다.
역주3 趙王虎殺其太子邃……更立子宣爲太子 : “石邃가 弑逆하는 큰 죄를 모의하였는데, ‘伏誅’라고 쓰지 않은 것은 어째서인가. 石虎를 죄책한 것이다. 처음에, 석호가 태자로 하여금 尙書의 일을 재결하게 하였다. 태자는 아침저녁으로 임금의 음식을 살펴보는 자인데 그로 하여금 정사에 참여하게 한 것은 잘못이다. 〈그리고 또 자신의 뜻에〉 합하지 않는 것이 있으면 꾸짖고 매를 때린 것이 한 달에 두세 번에 이르렀으니, 비록 석수의 성질이 잔인하고 포악하였으나 그를 악으로 빠뜨린 자는 석호였다. ≪資治通鑑綱目≫은 근원을 맑게 하고 근본을 바로잡았으므로 특별히 ‘殺’이라고 썼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날 때까지 태자에게 ‘殺’이라고 쓴 것이 3번이고(趙나라 石邃, 北魏 元恂, 蜀나라 王元膺), ‘廢殺’이라고 쓴 것이 3번인데(晉나라 司馬遹, 唐나라 太子 李賢․太子 李瑛), 清河王 司馬覃과 梁나라 太子 蕭大器와 唐나라 陳王 李成美는 다른 사람이 죽인 것이니,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다.[邃謀弑逆大罪也 不書伏誅 何 咎虎也 初虎使太子省可尙書事 太子朝夕視君膳者也 而使與政 非矣 其有不合 則又誚責笞捶 月至再三 雖邃性殘虐 然陷之惡者 虎也 綱目澄源正本 故特書殺 終綱目 太子書殺三(趙邃 魏恂 蜀元膺) 書廢殺三(晉遹 唐太子賢 太子瑛) 清河王覃 梁太子大器 唐陳王成美 他人殺之 不與焉]” ≪書法≫
역주4 司馬氏는……괴멸하였다 : 291년부터 306년까지 이어진 八王의 亂으로 西晉이 멸망하게 된 일을 이른다. 서진의 초대 황제인 武帝 司馬炎은 건국 후 황족의 권위와 국가의 힘을 과시하고 지방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아들, 조카 등 황족을 王으로 임명하여 군대와 조세권 등을 주고 해당 지방을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무제 사후 황실의 권한이 약화되면서 지방 藩王들은 그들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앙정부에 도전하여 오랫동안 정치 혼란의 빌미를 제공하였고, 이어진 흉노의 침입으로 서진이 멸망하였다. 8명의 왕은 무제의 숙부인 汝南王 司馬亮, 무제의 5남인 楚王 司馬瑋, 무제의 숙부인 趙王 司馬倫, 무제의 조카인 齊王 司馬冏, 무제의 16남인 長沙王 司馬乂, 무제의 6남인 成都王 司馬穎, 무제의 6촌인 河間王 司馬顒, 무제의 6촌인 東海王 司馬越이다.
역주5 冒頓의……하노니 : 石邃가 아버지 石虎를 죽이고자 한 것이다. 漢나라 때 흉노의 單于 頭曼이 태자인 묵특을 폐하고 후처에게서 난 아들에게 태자의 지위를 물려주기 위해, 묵특을 月氏(월지)에 볼모로 보내고는 월지를 공격하였다. 월지가 묵특을 죽이려 하자, 묵특이 도망쳐 돌아와 鳴鏑으로 아버지 두만을 쏘아 살해하였다. 後母와 후모의 아들, 자신을 따르지 않는 대신들을 모두 주벌하고는, 스스로 두만을 이어 선우에 올랐다.(≪史記≫ 권110 〈匈奴列傳〉)

자치통감강목(14) 책은 2021.11.1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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