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操還官渡하니 紹乃議攻許어늘 田豐曰 曹操旣破劉備하니 則許下非復空虛요 且操善用兵하니 衆雖少나 未可輕也라
今不如以久持之하여 外結英雄하고 內修農戰이니 然後에 簡其精銳하여 乘虛迭出하여 救右則擊其左하고 救左則擊其右하여
使我未勞而彼已困이면 不及三年에 可坐克也리이다 今釋廟勝之策하고 而決成敗於一戰하니 若不如志면 悔無及也리이다
紹不從이어늘 豐이 彊諫한대 紹械繫之하다 於是에 移檄州郡하여 數操罪惡하고 二月에 進軍黎陽하다
目
權
이 悲號
하여 未視事
러니 昭曰 孝廉
아 此寧哭時邪
注+權先爲陽羨長, 郡察孝廉, 故以稱之.아하고 乃易權服
하고 扶上馬
하여 使出巡軍
하고
上表朝廷
하고 下移屬城
하고 中外將校
를 各令奉職
하다 周瑜自巴丘將兵赴喪
하여 留
하여 與張昭共掌衆事
注+通鑑上年 “留周瑜鎭巴丘.” 胡三省註 “裴松之曰 ‘案孫策于時, 始得豫章ㆍ廬陵, 尙未能得定江夏, 瑜之所鎭, 應在今巴丘縣也. 與後所卒巴丘處不同.’ 余據晉地理志, 廬陵郡有巴丘縣. 沈約曰 晉立. 今撫州崇仁縣, 卽其地. 梁改巴丘曰巴山.”러니
時策이 雖有會稽, 吳郡, 丹陽, 豫章, 廬江, 廬陵이나 然深險之地 猶未盡從이라
流寓之士 皆以安危去就爲意하여 未有君臣之固어늘 而昭, 瑜等이 謂權可與共成大業이라하여 遂委心而服事焉하다
目
八月에 紹進營稍前하여 東西數十里라 操亦分營與相當하여
出兵戰不勝하여 復還堅壁이어늘 紹爲高櫓, 起土山하고 爲地道하여 攻之하니
操衆少糧盡
하여 士卒疲乏
하고 百姓多叛
이라 操與荀彧書
하여 議欲還許
하여 以致紹師
注+致, 猶至也. 兵法 “善戰者致人, 不致於人.”러니
彧報曰 紹悉衆聚官渡하여 欲與公決勝敗니 公以至弱當至彊이라 若不能制면 必爲所乘이니 是天下之大機也라
且紹는 布衣之雄耳라 能聚人而不能用하니 以公之神武明哲으로 而輔以大順이면 何向而不濟리오
今榖雖少나 未若楚, 漢在滎陽, 成皐間也니 是時에 劉, 項이 莫肯先退者는 以爲先退則勢屈也라
公
이 以十分居一之衆
注+言與紹衆相懸也.으로 畫地而守之
注+言畫地作限隔也.하여 搤其喉而不得進
이 已半年矣
注+搤, 捉也. 喉, 咽也.라
情見勢竭
이면 必將有變
이니 此用奇之時
라 不可失也
注+見, 賢遍切.니이다 操乃堅壁持之
하다
目
操大喜하여 乃留荀攸, 曹洪守營하고 自將步騎五千하여 用袁軍旗幟하여 銜枚縛馬口하고 夜從間道出하여
人抱束薪
하고 至屯
에 放火急擊之
하다 紹聞操擊瓊
하고 謂其子譚曰 就操破瓊
이라도 吾拔其營
이면 彼固無所歸矣
注+就, 卽也, 言卽使操破淳于瓊, 而我攻拔其營, 將無所歸.라하고
乃使其將高覽, 張郃等으로 攻操營하니 郃曰 曹公精兵이 往必破瓊이니 請先救之하노이다 郭圖固請攻操營이어늘
郃曰 曹公營固하니 攻之라도 必不拔이요 若瓊等見禽이면 吾屬이 盡爲虜矣라한대
紹但遣輕騎救瓊하여 而以重兵攻營이러니 不能下하다 騎至烏巢에 操大破之하여 斬瓊等하고 盡燔其糧榖하다
目
紹軍恟懼어늘 郭圖慙하여 復譛張郃하니 郃이 遂與覽焚攻具하고 詣操營降하니 於是에 紹軍이 驚擾大潰라
紹及譚等이 幅巾乘馬하여 與八百騎渡河어늘 操追之不及하고 盡收其輜重, 圖書, 珍寳하고
餘衆降者를 操盡阬之하니 前後所殺이 七萬餘人이러라 沮授爲操軍所執하여 大呼曰 授不降也로라
操與之有舊라 遂赦而厚遇焉이러니 授尋謀歸袁氏하니 操乃殺之하다
操收紹書中得許下及軍中人書하여 皆焚之하고 曰 當紹之彊에 孤猶不能自保온 況衆人乎아하니 冀州城邑이 多降於操하다
目
【목目】 동승董承의 계획이 누설되자, 조조曹操가 동승 등을 죽이고 그들의 삼족三族을 모두 멸하였다. 조조가 직접 유비劉備를 토벌하려고 하자,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
공公과
천하天下를 다투는 자는
원소袁紹입니다. 지금 원소가 진군해 오려고 하는데 이를 버리고 동쪽으로 가시니, 원소가 우리의 배후에서 공격하면 어찌합니까?”
注+원소袁紹가 장차 침략하려고 하는데 도리어 이를 버리고서 돌아보지 않고, 동쪽으로 가서 유비劉備를 정벌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조조가 말하기를 “유비는 인걸人傑이다.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환이 될 것이다.” 하니, 곽가郭嘉가 다음과 같이 거들었다. “원소는 성격이 지둔하고 의심이 많으니, 그가 공격해 오더라도 틀림없이 빠르지 않을 것입니다.
유비는 이제 막 군대를 일으켜서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귀부歸附하지 않았으니, 급히 공격하면 틀림없이 패퇴시킬 수 있습니다.” 조조의 군대가 마침내 동쪽으로 출동하였다.
目
【목目】 조조曹操가 관도官渡로 돌아가자 원소袁紹가 이에 허도許都를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전풍田豐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조가 이미 유비劉備를 격파하였으니, 그렇다면 허도는 더 이상 텅빈 것이 아닙니다. 또한 조조는 용병用兵을 잘하니, 병력이 비록 적지만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지금 최선의 방법은 오래 시간을 끌어가며 버티는 것이니, 밖으로는 영웅들과 교분을 맺고 안으로는 농사와 전비戰備에 치중한 뒤에 정예 병력을 선발하여 적의 공허함을 틈타 번갈아 출격해서 적이 오른쪽을 구원하면 그 왼쪽을 공격하고 적이 왼쪽을 구원하면 그 오른쪽을 공격하여,
우리는 아직 피로하지 않은데 저들이 이미 피곤하게 되면 3년이 되기 전에 가만히 앉아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묘당廟堂에서 헤아려 승리를 결단하는 계책을 쓰지 않고 한 번의 싸움에서 성공과 실패를 결단하려고 하시니, 만약 뜻대로 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원소가 따르지 않자 전풍이 극력 간쟁하자, 원소가 형구刑具로 그를 구속하였다. 이에 원소는 주州와 군郡에 격문檄文을 돌려서 조조의 죄악을 낱낱이 열거하고, 2월에 진군하여 여양黎陽에 주둔하였다.
目
【목目】 4월에 조조曹操가 백마현白馬縣을 구원할 적에 순유荀攸가 말하기를 “지금 병력이 적어서 적수가 못 되니, 반드시 적의 형세를 분산시켜야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公이 연진延津에 이르러 군대를 도하시켜 그 후방을 습격하려는 것처럼 하면 원소袁紹는 반드시 서쪽으로 응할 것이니, 그러한 뒤에 경무장한 군대로 백마현을 습격하여 대비하지 않았을 때 몰래 공격하면 안량顔良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자, 조조가 이를 따랐다.
원소가 군대를 나누어 서쪽으로 향하자, 조조가 이에 군대를 이끌고 행군 속도를
배가倍加하여 백마현으로 향해 가니, 안량이 와서 맞이하여 싸웠다.
관우關羽가 안량의 〈지휘하는〉 깃발과
일산日傘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注+“융거戎車”는 대장大將이 타는 것이니, 여기에 당휘幢麾(의장용 깃발)를 설치하고 산개傘蓋(일산日傘)를 펼쳐놓는다.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가 수많은 무리 가운데에서 안량을 찔러 머리를 베어 가지고 돌아오니,
關羽가 顔良의 목을 베다
원소의 병사들 중에 맞서는 자가 없었다. 조조가 마침내 백마현의 포위를 풀고는 이곳의 백성들을 옮겨서 서쪽으로 갔다.
目
【목目】 원소袁紹가 황하黃河를 건너서 조조曹操를 추격하려고 하자, 저수沮授가 말하기를 “승부勝負의 변화를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마땅히 연진延津에 머물러 주둔하고 군대를 나누어 관도官渡로 진군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만약 적을 이겨서 노획한 바가 있으면 돌아와서 〈연진에〉 주둔해 있는
대군大軍을 맞이하여 출동시켜도 늦지 않습니다.
注+〈“환영불만還迎不晚”은〉 돌아와서 연진延津에 머물러 주둔해 있는 대군大軍을 맞이하는 것이다. 만약 〈대군이 황하를 건너 남하하였다가〉 어려움이 발생하면 수많은 병사들이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원소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이에 저수가 황하를 건널 적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윗사람은 그 뜻(욕망)을 채우려고만 하고 아랫사람은 공功을 세우는 데에만 힘쓰니, 유유悠悠히 흐르는 황하黄河여, 내가 성공하여 다시 건너 돌아올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병病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니, 원소가 허락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하였다.
원소의 군대가
연진延津의 남쪽에 이르자, 조조가 병사들을 무장시켜서
남판南阪의 아래에 진영을 갖추어 주둔하고
기병騎兵들에게 말안장을 풀어 말들을 풀어놓게 하였다.
注+남판南阪은 백마산白馬山의 남쪽에 있다. 이때
백마현白馬縣의
치중대輜重隊가 이미 길에 올랐는데 장수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니 돌아가
영루營壘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순유荀攸가 말하기를 “이것은 적을 유인하여 낚는 것이니, 어찌 떠나가겠는가.” 하니, 조조가 순유를 돌아보면서 웃었다.
目
【목目】 원소袁紹의 기병장 문추騎兵將 文醜가 유비劉備와 함께 5, 6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후로 이르자, 조조曹操의 장수들이 아뢰기를 “말에 오를(싸울) 만합니다.” 하였으나 조조는 말하기를 “아직은 아니다.” 하였다.
잠시 후에 원소의 기병이 점점 더 많이 도착해서 혹은 군대를 나누어 조조군曹操軍의 치중輜重을 공격하자, 조조가 말하기를 “말에 오를 만하다.” 하니, 이에 모두 말에 올라 마음대로 공격해서 원소의 군대를 대파하고 문추를 참살하였다.
문추와 안량顔良은 모두 원소의 명장인데 조조군이 두 번 싸워 모두 잡아서 죽이니, 원소군袁紹軍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目
【
목目】 처음에
조조曹操는
관우關羽의 사람됨을 장하게 여겼으나 그가 자기의 곁에 머물 뜻이 없다는 것을 살펴보고
장료張遼를 시켜 그의 심정을 묻자,
關羽
관우가 탄식하기를 “조공曹公께서 나를 후대하시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으나 나는 유장군劉將軍(유비劉備)의 은덕을 입어서 함께 죽기로 맹세하였으니, 그를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공功를 세워서 조공에게 보답한 뒤에 비로소 떠날 것입니다.” 하였다.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니, 조조가 의롭게 여겼다. 관우가
안량顔良을 죽였을 때에 조조는 관우가 반드시 떠날 것을 알고 크게
상사賞賜를 더 하사하였는데, 관우는 하사받은 것들을 모두
봉함封緘하고 글을 올려 하직을 고하고
원소 군중袁紹 軍中의
유비劉備에게 달려갔다.
注+〈“원군袁軍”은〉 원소袁紹의 군대이다.
좌우左右가 그를 추격하려 하자 조조가 말하기를 “저 사람도 각기 그 주인을 위하는 것이니, 쫓지 말라.” 하였다. 조조가 관도官渡로 돌아와 주둔하였는데, 염유閻柔가 조조에게 사자를 보내오니 조조가 염유를 오환교위烏桓校尉로 삼았다.
선우보鮮于輔가 직접 찾아와서 조조를 만나보니, 조조가 그를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아 돌아가서 유주幽州의 땅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目
【
목目】
손권孫權이 슬퍼하며 울부짖어서
군사軍事를 돌보지 않자,
장소張昭가 말하기를 “
손효렴孫孝廉아! 지금이 곡할 때란 말인가.”
注+손권孫權이 이에 앞서 양선현장陽羨縣長이 되었는데, 군郡에서 그를 효렴孝廉(효도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살펴서 천거하였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를 칭한 것이다. 하고, 마침내 손권의 의복을 갈아입히고 그를 부축하여 말에 태워서 밖으로 나가 군대를 순시하게 하였다.
그리고 위로는
조정朝廷에
표문表文을 올리고 아래로는
속성屬城(소속된
성읍城邑)에
이문移文을 돌리고 안팎의
장교將校들에게 각각 직분을 다하도록 명령하였다.
주유周瑜가
파구巴丘로부터 군대를 거느리고
상喪에 달려와 머물면서 장소와 함께
군사軍事를 관장하였다.
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지난해에 “주유周瑜를 남겨두어 파구巴丘를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호삼성胡三省의 주註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송지裴松之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손책孫策이 이때에 처음으로 예장豫章과 여릉廬陵을 얻었으나 여전히 강하江夏를 평정하지는 못하였다. 주유가 진주鎭駐한 곳은 응당 지금의 파구현巴丘縣에 있었을 것이니, 이후에 주유가 졸卒한 파구巴丘라는 곳과는 같지 않다.’ 내가 심약沈約이 말하기를 ‘〈이 파구현巴丘縣은〉 진晉나라가 세웠다.’ 하였으니, 지금 무주 숭인현撫州 崇仁縣이 바로 그곳이다. 양梁나라 때에 파구巴丘를 바꾸어 파산巴山이라고 하였다.”
당시 손책孫策이 비록 회계會稽, 오군吳郡, 단양丹陽, 예장豫章, 여강廬江, 여릉廬陵을 점유하였지만 궁벽하고 험한 지역에서는 아직도 전부 복종하지 않았다.
유망流亡하여 우거하는 사인士人들은 모두 자신의 안위安危에 따라서 거취를 생각하여 확고한 군신 관계가 없었는데, 장소와 주유 등은 이르기를 “손권은 함께 대업大業을 성취할 수 있다.” 하여 마침내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겼다.
目
【목目】 여남군汝南郡에 있는 황건적黃巾賊의 우두머리인 유벽劉辟 등이 조조曹操를 배반하고 원소袁紹에게 호응하자, 원소가 유비劉備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유벽을 돕게 하니, 주위의 군郡과 현縣이 대부분 호응하였다.
양안도위 이통陽安都尉 李通이
호조戶調(
가호家戶마다 부과하는 무명과 비단)를 급히 징수하니
注+조조曹操가 여남현汝南縣을 두 현縣(낭릉朗陵과 양안陽安)으로 나누고 양안도위陽安都尉를 설치하였다. 녹錄은 거두어들임이다. 가호家戶마다 무명과 비단을 세금으로 내는 것을 조調라고 이른다.,
낭릉현장 조엄朗陵縣長 趙儼이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순욱荀彧에게 보내었다.
注+낭릉朗陵 또한 여남현汝南縣이니, 양안陽安에 분속되었다. “지금
양안陽安의 백성들이 곤궁하고 인근의
성城들이 모두 배반하니,
이 때문에 형세가 기울어져 동요되기 쉬운바, 이는 바로 한 지역의 안위가 달려 있는 중요한 관건입니다. 또한 이 군郡의 사람들은 충절忠節을 잡아 지켜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생각건대 국가國家에서는 마땅히 위무慰撫해주어야 하는데 더욱 급하게 무명과 비단을 징수하니, 그렇다면 어떻게 선善을 권할 수 있겠습니까.” 순욱이 즉시 조조에게 아뢰어 징수한 무명과 비단을 전부 다 백성들에게 돌려주니, 상하가 모두 기뻐하여 군내郡內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目
【목目】 8월에 원소袁紹의 진주進駐한 군대가 차츰 전진하여 그 영루營壘가 동서로 수십 리나 되니, 조조曹操 또한 군영을 나누어 원소군袁紹軍의 영루에 상대하였다.
조조가 출병하여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는 다시 돌아와
영벽營壁을 굳게 지키고 나가서 싸우지 않으니, 원소가
를 만들고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지도地道를 파서 공격하였다.
조조의 군대는 병력이 적고 군량이 다하여 사졸들이 피로하고 곤핍하였으며 많은 백성들이 배반하였다. 조조가
순욱荀彧에게 편지를 보내어
허도許都로 돌아가 원소의 군대를 유인하여 오게 하려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는데
注+치致(이르게 하다)는 지至와 같다. 병법兵法에 하였다.,
순욱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원소가 전군을 관도官渡에 결집시켜 공公과 승패勝敗를 결단하고자 하니, 공公은 지극히 약한 병력으로 지극히 강한 병력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만약 적을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적에게 제압을 당할 것이니, 이는 천하를 취할 수 있는 중요한 관건입니다.
또한 원소는 보통 사람들 가운데 영웅일 뿐이어서 인재를 모았으나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공公은 신무神武함과 명철함에다가 대순大順(천도天道에 순응함)으로 돕는다면, 어디로 향해 간들 이루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
지금 곡식이 비록 부족하지만 항우項羽의 초楚나라와 유방劉邦의 한漢나라가 형양滎陽(형양)과 성고成皐의 사이에서 서로 대치하던 상황과는 같지 않으니, 이때 유방과 항우가 먼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먼저 물러나면 세勢가 굽혀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공公이
원소군袁紹軍의 십분의 일 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
注+〈“이십분거일지중以十分居一之衆”은〉 원소袁紹의 병력과 그 차이가 현격함을 말한 것이다. 땅을 구획하여 지켜서
注+〈“획지이수지畫地而守之”는〉 땅을 구획하여 한격限隔(경계)을 만듦을 말한 것이다. 그
인후咽喉(
요지要地)를 죄어 나아갈 수 없게 한 지가 이미 반년입니다.
注+액搤는 잡아 쥠이다. 후喉는 목구멍이다.
정황이 드러나고
세勢가 다하면 반드시 변고가 있게 될 것인바, 이는 기묘한
계략計略을 써서 승리할 때이니 놓쳐서는 안 됩니다.”
注+현見(나타나다)은 현편賢遍의 절切이다. 조조가 이에 영벽을 굳게 지켜 원소와 대치하였다.
目
【목目】 조조曹操가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순유荀攸와 조홍曹洪을 남겨두어 본영本營을 지키게 하고, 자신이 직접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서 원소군袁紹軍의 기치旗幟를 사용하여 병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말의 입을 묶고서 밤중에 샛길로 나갔다.
그런데 사람마다 섶을 한 묶음씩 껴안고 가게 하여 원소군의
치중輜重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 불을 놓아 급히 공격하였다. 원소는 조조가
순우경淳于瓊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들
원담袁譚에게 이르기를 “설령 조조가 순우경을 격파하더라도 내가 그의
본영本營을 함락시키면 저 조조는 진실로 돌아갈 곳이 없게 될 것이다.”
注+취就(설령, 만약)는 즉卽이니, 〈“취조파경就操破瓊……피고무소귀의彼固無所歸矣”는〉 설령 조조曹操가 순우경淳于瓊을 격파하더라도 내가 그의 본영本營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 조조가 장차 돌아갈 곳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고,
이에 그 장수 고람高覽과 장합張郃 등에게 조조의 본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장합이 말하기를 “조공曹公의 정예병이 갔으니 반드시 순우경을 격파할 것입니다. 제가 먼저 가서 이를 구원하겠습니다.” 하였으나 곽도郭圖는 한사코 조조의 본영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다.
이에 장합이 말하기를 “조공의 영루營壘는 견고하니 공격하더라도 반드시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만약 순우경 등이 사로잡히면 우리들은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원소는 다만 경무장한 기병을 보내어 순우경을 구원하게 하고, 중병重兵(매우 강력한 군대)으로 조조의 본영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원소의 기병이 오소烏巢에 이르렀는데 조조가 이를 크게 격파하여 순우경 등을 참살하고 그 양곡을 전부 불태웠다.
目
【목目】 원소袁紹의 병사들이 놀라 두려워하니, 곽도郭圖가 부끄러워하여 다시 장합張郃을 참소하였다. 그러자 장합이 마침내 고람高覽과 함께 성城을 공략하는 기구를 불태우고 조조曹操의 군영에 나아가 항복하니, 이에 원소의 군대가 놀라고 소요하여 크게 무너졌다.
원소와 원담 등이 복건幅巾 차림으로 말을 타고서 800명의 기병과 함께 황하黃河를 건넜는데 조조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원소군袁紹軍의 치중輜重과 도서圖書와 진귀한 보물들을 모조리 거두었으며,
잔여 군사 중에 항복한 자들을 조조가 모두 산 채로 땅속에 묻으니, 전후로 죽인 것이 7만여 명이었다. 저수沮授가 조조군曹操軍에게 붙잡혔는데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나는 항복하지 않았다.” 하였다.
조조가 그와 예로부터 사귄 교분이 있어서 마침내 사면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저수가 이윽고 원씨袁氏(원소袁紹)에게 돌아갈 것을 도모하자 조조가 마침내 그를 죽였다.
조조가 거두어들인 원소의 편지들 중에서 허하許下 및 군중軍中 사람들이 원소에게 보낸 편지를 얻었는데, 조조는 이를 모두 불태우고 말하기를 “원소가 강성했을 때엔 나도 오히려 스스로 보존할 수 없었으니, 하물며 중인衆人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기주冀州의 성읍城邑들이 대부분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目
【목目】 원소袁紹가 달아나 여양黎陽의 황하黃河 북쪽 기슭에 이르러서 그의 장수 장의거蔣義渠의 군영에 들어가자, 장의거가 〈원소를 위하여〉 자신의 군막을 피해주어 원소를 거처하게 하고 그 안에서 호령을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흩어졌던 병사들이 원소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차츰 다시 돌아왔다.
어떤 사람이
전풍田豐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반드시
중용重用될 것이다.” 하였는데, 전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원공袁公이 겉으로는 관대하지만 속으로는 시기하니 나의 충정을 믿지 않는다.
注+양亮은 믿음이며 밝음이다. 만약 싸움에 이겨서 기뻐하였더라면 오히려 나를 사면해줄 수 있겠지만 지금 싸움에 져서 화가 났으니, 나는 살기를 바랄 수 없다.”
원소가 봉기逢紀에게 이르기를 “전별가田別駕가 앞서 나에게 출병하지 말 것을 간하였으니, 내가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는데, 봉기가 말하기를 “전풍이 장군께서 퇴각하신 것을 듣고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자신의 말이 적중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하였다.
원소가 이에 요속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전풍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 과연 비웃음을 당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그를 죽였다.
원소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고아하며 기국과 도량이 있어서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성품이 교만하고 괴팍하여 스스로 높은 체해서
선언善言을 따르는 데에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실패함에 이른 것이다.
注+퍅愎은 필력弼力의 절切이니, 어그러짐이며 패려悖戾함이다.
目
【목目】 조조曹操가 손책孫策의 죽음을 듣고 그의 상喪을 기회로 삼아 공격하려고 하자, 장굉張紘이 간하기를 “다른 사람의 상喪을 기회로 삼는 것은 이미 옛날의 바른 도리가 아니고, 만약 〈그렇게 하고서도〉 이기지 못하면 원수가 되어 우호 관계를 버리니, 이를 기회로 삼아서 후하게 대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조조가 곧바로
표문表文을 올려서
손권孫權을
토로장군討虜將軍으로 삼고
회계태수會稽太守의 직을 겸하게 하였다.
注+토로장군討虜將軍이라는 호칭이 이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조조가 장굉으로 하여금 손권을 보좌해 자기에게
내부內附하게 하려고 하여, 마침내 장굉을
회계도위會稽都尉로 삼았다.
장굉이 오吳에 이르자, 오태부인吳太夫人은 손권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장굉과 장소張昭에게 함께 손권을 보좌해줄 것을 부탁하니, 장굉이 오직 손권의 허물을 보완補完하고 득실得失을 살필 것을 생각하여 아는 것을 힘써 실천하지 않음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