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0)

자치통감강목(10)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0)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庚辰年(200)
경진년庚辰年(200)
五年이라 春正月하고 遂擊備하여 破之하니 備奔冀州하다
나라 효헌황제 건안孝獻皇帝 建安 5년이다. 봄 정월에 조조曹操거기장군 동승車騎將軍 董承을 죽이고 마침내 유비劉備를 공격하여 격파하니, 유비가 기주冀州로 달아났다.
董承謀洩하니 操殺承等하고 皆夷三族하다 操欲自討劉備한대
동승董承의 계획이 누설되자, 조조曹操가 동승 등을 죽이고 그들의 삼족三族을 모두 멸하였다. 조조가 직접 유비劉備를 토벌하려고 하자,
諸將 皆曰 與公爭天下者 袁紹也 今紹方來而棄之東하니 紹乘人後 若何注+言紹方來冦, 乃棄而不顧, 而東征備也.
장수들이 모두 말하기를 “천하天下를 다투는 자는 원소袁紹입니다. 지금 원소가 진군해 오려고 하는데 이를 버리고 동쪽으로 가시니, 원소가 우리의 배후에서 공격하면 어찌합니까?”注+원소袁紹가 장차 침략하려고 하는데 도리어 이를 버리고서 돌아보지 않고, 동쪽으로 가서 유비劉備를 정벌함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操曰 劉備 人傑也 今不擊이면 必爲後患이리라 郭嘉曰 紹性遅而多疑하니 來必不速이요
이에 조조가 말하기를 “유비는 인걸人傑이다. 지금 공격하지 않으면 틀림없이 후환이 될 것이다.” 하니, 곽가郭嘉가 다음과 같이 거들었다. “원소는 성격이 지둔하고 의심이 많으니, 그가 공격해 오더라도 틀림없이 빠르지 않을 것입니다.
備新起하여 衆心未附하니 急擊之 必敗리이다 操師遂東하다
유비는 이제 막 군대를 일으켜서 사람들의 마음이 완전히 귀부歸附하지 않았으니, 급히 공격하면 틀림없이 패퇴시킬 수 있습니다.” 조조의 군대가 마침내 동쪽으로 출동하였다.
田豐說袁紹曰 劉, 曹連兵하니 未可卒解注+卒, 讀曰猝. 解, 判也. 擧軍而襲其後 可一往而定이니이다 紹辭以子疾하니
전풍田豐원소袁紹를 설득하기를 “유비劉備조조曹操가 전쟁을 계속하니, 대번에 결판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注+(갑자기)은 로 읽는다. 는 판가름이다. 이 군대를 일으켜 조조의 후미를 습격하면 한 번 가서 평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으나, 원소는 아들의 병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擧杖擊地曰 嗟乎 遭難遇之時어늘 而以嬰兒病失其會하니 惜哉 事去矣로다
전풍이 지팡이를 들어 땅을 치며 말하기를 “아!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좋은 때를 만났는데 어린 자식의 병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니, 안타깝다. 일이 틀려버렸구나.” 하였다.
操擊劉備하여 破之하고 獲其妻子하고 進拔下邳하고 禽關羽하니
조조가 유비를 공격해 격파하여 그 처자식을 사로잡고는 진군하여 하비下邳를 함락시키고 관우關羽을 사로잡으니,
備奔青州하여 歸袁紹한대 紹去鄴二百里하여 迎之注+紹遠出迎備, 重敬之也.하니 駐月餘 亡卒 稍歸之
유비가 청주青州로 달아나서 원소에게 귀의하였는데 원소가 업성鄴城으로부터 200리 되는 지점까지 나와서 맞이하였다.注+원소袁紹가 멀리 나와서 유비劉備를 맞이하니, 이는 그를 소중히 여기고 공경한 것이다. 유비가 업성에 머무른 지 한 달 남짓 되니, 그동안에 도망한 사졸들이 차츰 유비에게 돌아왔다.
二月 曹操還官渡하니 袁紹進軍黎陽이러니 夏四月 紹遣兵하여 攻白馬어늘 操擊破之하고 斬其將顔良, 文醜하다
】 2월에 조조曹操관도官渡로 돌아가자 원소袁紹가 진군하여 여양黎陽에 주둔하였다. 여름 4월에 원소가 군대를 보내어 백마현白馬縣을 공격하였는데, 조조가 격파하고 그 장수 안량顔良문추文醜를 참살하였다.
操還官渡하니 紹乃議攻許어늘 田豐曰 曹操旣破劉備하니 則許下非復空虛 且操善用兵하니 衆雖少 未可輕也
조조曹操관도官渡로 돌아가자 원소袁紹가 이에 허도許都를 공격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전풍田豐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조조가 이미 유비劉備를 격파하였으니, 그렇다면 허도는 더 이상 텅빈 것이 아닙니다. 또한 조조는 용병用兵을 잘하니, 병력이 비록 적지만 가볍게 여길 수 없습니다.
今不如以久持之하여 外結英雄하고 內修農戰이니 然後 簡其精銳하여 乘虛迭出하여 救右則擊其左하고 救左則擊其右하여
지금 최선의 방법은 오래 시간을 끌어가며 버티는 것이니, 밖으로는 영웅들과 교분을 맺고 안으로는 농사와 전비戰備에 치중한 뒤에 정예 병력을 선발하여 적의 공허함을 틈타 번갈아 출격해서 적이 오른쪽을 구원하면 그 왼쪽을 공격하고 적이 왼쪽을 구원하면 그 오른쪽을 공격하여,
使我未勞而彼已困이면 不及三年 可坐克也리이다 今釋廟勝之策하고 而決成敗於一戰하니 若不如志 悔無及也리이다
우리는 아직 피로하지 않은데 저들이 이미 피곤하게 되면 3년이 되기 전에 가만히 앉아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묘당廟堂에서 헤아려 승리를 결단하는 계책을 쓰지 않고 한 번의 싸움에서 성공과 실패를 결단하려고 하시니, 만약 뜻대로 되지 않으면 후회하여도 다시 어찌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紹不從이어늘 彊諫한대 紹械繫之하다 於是 移檄州郡하여 數操罪惡하고 二月 進軍黎陽하다
원소가 따르지 않자 전풍이 극력 간쟁하자, 원소가 형구刑具로 그를 구속하였다. 이에 원소는 격문檄文을 돌려서 조조의 죄악을 낱낱이 열거하고, 2월에 진군하여 여양黎陽에 주둔하였다.
沮授臨行 會其宗族하고 散財與之曰 勢存則威無不加 勢亡則不保一身하나니 哀哉
저수沮授가 출발하기에 앞서 그 종족宗族들을 모아놓고 자기의 재물을 나누어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를 보존하면 위엄이 가해지지 않는 바가 없고 를 망실하면 자기 한 몸도 보전하지 못하니, 슬프다!”
紹遣顔良하여 攻白馬注+白馬縣, 屬東郡.한대 沮授曰 良 性促狹하니 雖驍勇이나 不可獨任이니이다 紹不聽하다
원소袁紹안량顔良을 보내어 백마현白馬縣을 공격하자注+백마현白馬縣동군東郡에 속하였다., 저수가 말하기를 “안량은 성품이 조급하고 편협하니, 비록 용맹하지만 그에게 모두 맡겨서는 안 됩니다.” 하였으나 원소가 이를 듣지 않았다.
四月 操救白馬할새 荀攸曰 今兵少不敵하니 必分其勢라야 乃可
】 4월에 조조曹操백마현白馬縣을 구원할 적에 순유荀攸가 말하기를 “지금 병력이 적어서 적수가 못 되니, 반드시 적의 형세를 분산시켜야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公到延津하여 若將渡兵向其後者 紹必西應之하리니 然後 輕兵襲白馬하여 掩其不備 顔良 可禽也리이다 操從之하다
연진延津에 이르러 군대를 도하시켜 그 후방을 습격하려는 것처럼 하면 원소袁紹는 반드시 서쪽으로 응할 것이니, 그러한 뒤에 경무장한 군대로 백마현을 습격하여 대비하지 않았을 때 몰래 공격하면 안량顔良을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 하자, 조조가 이를 따랐다.
紹分兵西어늘 操乃引軍兼行하여 趣白馬하니 來逆戰이어늘 關羽望見良麾蓋注+戎車, 大將所乘者, 設幢麾張蓋.하고 策馬刺良於萬衆之中하여 斬其首而還하니
원소가 군대를 나누어 서쪽으로 향하자, 조조가 이에 군대를 이끌고 행군 속도를 배가倍加하여 백마현으로 향해 가니, 안량이 와서 맞이하여 싸웠다. 관우關羽가 안량의 〈지휘하는〉 깃발과 일산日傘을 멀리서 바라보고는注+융거戎車”는 대장大將이 타는 것이니, 여기에 당휘幢麾(의장용 깃발)를 설치하고 산개傘蓋(일산日傘)를 펼쳐놓는다. 말을 채찍질하여 달려 나가 수많은 무리 가운데에서 안량을 찔러 머리를 베어 가지고 돌아오니,
關羽가 顔良의 목을 베다關羽가 顔良의 목을 베다
紹軍 莫能當이라 遂解白馬之圍하고 徙其民而西하다
원소의 병사들 중에 맞서는 자가 없었다. 조조가 마침내 백마현의 포위를 풀고는 이곳의 백성들을 옮겨서 서쪽으로 갔다.
紹渡河追之러니 沮授曰 勝負變化 不可不詳이라 今宜留屯延津하고 分兵官渡하여
원소袁紹황하黃河를 건너서 조조曹操를 추격하려고 하자, 저수沮授가 말하기를 “승부勝負의 변화를 자세히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 마땅히 연진延津에 머물러 주둔하고 군대를 나누어 관도官渡로 진군해야 합니다.
若其克獲이어든 還迎不晚注+還迎留屯大軍也.이니 設其有難이면 衆弗可還이니이다 紹不從하니
그리하여 만약 적을 이겨서 노획한 바가 있으면 돌아와서 〈연진에〉 주둔해 있는 대군大軍을 맞이하여 출동시켜도 늦지 않습니다.注+〈“환영불만還迎不晚”은〉 돌아와서 연진延津에 머물러 주둔해 있는 대군大軍을 맞이하는 것이다. 만약 〈대군이 황하를 건너 남하하였다가〉 어려움이 발생하면 수많은 병사들이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하였으나 원소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授臨濟 歎曰 上盈其志하고 下務其功하니 悠悠黄河 吾其濟乎아하고 遂以疾辭하니 紹不許而意恨之러라
이에 저수가 황하를 건널 적에 탄식하며 말하기를 “윗사람은 그 뜻(욕망)을 채우려고만 하고 아랫사람은 을 세우는 데에만 힘쓰니, 유유悠悠히 흐르는 황하黄河여, 내가 성공하여 다시 건너 돌아올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을 핑계로 관직을 사양하니, 원소가 허락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그를 원망하였다.
軍至延津南하니 操勒兵駐營南阪下하고 令騎解鞍放馬注+南阪, 在白馬山南. 白馬山, 南距白馬縣故城可五十里.러니 是時 白馬輜重就道 諸將以爲敵騎多하니 不如還保營이라한대
원소의 군대가 연진延津의 남쪽에 이르자, 조조가 병사들을 무장시켜서 남판南阪의 아래에 진영을 갖추어 주둔하고 기병騎兵들에게 말안장을 풀어 말들을 풀어놓게 하였다.注+남판南阪백마산白馬山의 남쪽에 있다. 이때 백마현白馬縣치중대輜重隊가 이미 길에 올랐는데 장수들은 “적의 기병이 많으니 돌아가 영루營壘를 지키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荀攸曰 此所以餌敵이라 如何去之리오 操顧攸而笑러라
그러자 순유荀攸가 말하기를 “이것은 적을 유인하여 낚는 것이니, 어찌 떠나가겠는가.” 하니, 조조가 순유를 돌아보면서 웃었다.
紹騎將文醜與劉備 將五六千騎하여 前後至하니 諸將白 可上馬라한대 操曰 未也
원소袁紹기병장 문추騎兵將 文醜유비劉備와 함께 5, 6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전후로 이르자, 조조曹操의 장수들이 아뢰기를 “말에 오를(싸울) 만합니다.” 하였으나 조조는 말하기를 “아직은 아니다.” 하였다.
有頃 騎至稍多하여 或分趣輜重이어늘 操曰 可矣라하니 乃皆上馬하여 縱擊大破之하고 斬醜하다
잠시 후에 원소의 기병이 점점 더 많이 도착해서 혹은 군대를 나누어 조조군曹操軍치중輜重을 공격하자, 조조가 말하기를 “말에 오를 만하다.” 하니, 이에 모두 말에 올라 마음대로 공격해서 원소의 군대를 대파하고 문추를 참살하였다.
醜, 良 皆紹名將이라 再戰禽之하니 紹軍 奪氣러라
문추와 안량顔良은 모두 원소의 명장인데 조조군이 두 번 싸워 모두 잡아서 죽이니, 원소군袁紹軍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操壯關羽之爲人이로되 而察其無留意하고 使張遼 以其情問之한대
】 처음에 조조曹操관우關羽의 사람됨을 장하게 여겼으나 그가 자기의 곁에 머물 뜻이 없다는 것을 살펴보고 장료張遼를 시켜 그의 심정을 묻자,
關羽關羽
羽歎曰 吾極知曹公待我厚 然吾受劉將軍恩하여 誓以共死하니 不可背之 要當立效하여 以報曹公하고 乃去耳로라
관우가 탄식하기를 “조공曹公께서 나를 후대하시는 것을 내가 잘 알고 있으나 나는 유장군劉將軍(유비劉備)의 은덕을 입어서 함께 죽기로 맹세하였으니, 그를 배반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를 세워서 조공에게 보답한 뒤에 비로소 떠날 것입니다.” 하였다.
遼以報操하니 操義之러니 及殺良 操知其必去하고 重加賞賜러니 羽盡封其所賜하고 拜書告辭하고 而犇劉備於袁軍注+袁紹軍也.하니
장료가 관우의 말을 조조에게 보고하니, 조조가 의롭게 여겼다. 관우가 안량顔良을 죽였을 때에 조조는 관우가 반드시 떠날 것을 알고 크게 상사賞賜를 더 하사하였는데, 관우는 하사받은 것들을 모두 봉함封緘하고 글을 올려 하직을 고하고 원소 군중袁紹 軍中유비劉備에게 달려갔다.注+〈“원군袁軍”은〉 원소袁紹의 군대이다.
左右欲追之어늘 操曰 彼各爲其主 勿追也하라 操還軍官渡하니 閻柔遣使詣操어늘 操以柔爲烏桓校尉하고
좌우左右가 그를 추격하려 하자 조조가 말하기를 “저 사람도 각기 그 주인을 위하는 것이니, 쫓지 말라.” 하였다. 조조가 관도官渡로 돌아와 주둔하였는데, 염유閻柔가 조조에게 사자를 보내오니 조조가 염유를 오환교위烏桓校尉로 삼았다.
鮮于輔來見이어늘 操以爲度遼將軍하여 還鎮幽土하다
선우보鮮于輔가 직접 찾아와서 조조를 만나보니, 조조가 그를 도료장군度遼將軍으로 삼아 돌아가서 유주幽州의 땅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孫策하니 弟權 代領其衆하다
손책孫策하자, 그 아우 손권孫權이 대신하여 그 군대를 거느렸다.
欲乘虛襲許 部署未發이러니 先所殺吳郡太守許貢奴客 因其出獵하여 伏篁竹中이라가 射之中頰하여 創甚注+中, 去聲. 頰, 面旁也.이라
손책孫策이 빈틈을 타 허도許都를 습격하려고 하였으나 배치한 군대가 아직 출동하지 않았는데, 때마침 이보다 앞서 손책이 죽였던 오군태수 허공吳郡太守 許貢가노家奴가 〈허공을 위해 복수하고자 하여〉 손책이 사냥을 나가는 것을 기회로 삼아 대나무 숲 속에 엎드려 있다가 화살을 쏘아 손책의 뺨을 맞추어서 그 창상創傷이 심하였다.注+(맞히다)은 거성去聲이다. 은 얼굴의 옆면이다.
召張昭等하여 謂曰 中國方亂하니 以吳, 越之衆 三江之固 足以觀成敗注+三江, 謂吳松江ㆍ錢塘江ㆍ浦陽江也. 公等 善相吾弟注+相, 息亮切.하라하고
이에 손책이 장소張昭 등을 불러서 이르기를 “중국中國(중원中原)이 한창 혼란하니, 오월吳越 지역의 많은 사람과 삼강三江험고險固함을 가지고 충분히 성공과 실패를 관망할 수 있다.注+삼강三江오송강吳松江전당강錢塘江포양강浦陽江을 이른다. 등은 내 아우를 잘 보필하라.”注+(돕다)은 식량息亮이다. 하고,
呼權하여 佩以印綬하고 謂曰 決機於兩陳之間하여 與天下爭衡 卿不如我注+陳, 讀曰陣. 衡, 所以平輕重也. 爭衡, 言分爭之世, 兵力所加, 天下大勢爲之輕重也.
손권孫權을 불러서 인수印綬를 채워주고 이르기를 “두 진영 사이에서 기회를 노려 천하의 영웅들과 승패를 다툼은 이 나만 못하고注+(진영)은 으로 읽는다. (저울대)은 경중輕重을 공평하게 하는 것이다. “쟁형爭衡”은 분열하여 다투는 세상에서 병력兵力이 어느 한쪽에 더해지면 천하의 대세大勢가 이 때문에 가벼워졌다 무거워졌다 함을 말한다.,
擧賢任能하여 各盡其心하여 以保江東 我不如卿이라하고 遂卒하니 時年二十六이라
어진 사람을 들어 쓰고 유능한 사람에게 맡겨서 각각 그 마음을 다하게 하여 강동江東을 보존하는 것은 내가 만 못하다.” 하였다. 손책이 마침내 죽으니, 당시 나이가 26세였다.
悲號하여 未視事러니 昭曰 孝廉 此寧哭時邪注+權先爲陽羨長, 郡察孝廉, 故以稱之.아하고 乃易權服하고 扶上馬하여 使出巡軍하고
손권孫權이 슬퍼하며 울부짖어서 군사軍事를 돌보지 않자, 장소張昭가 말하기를 “손효렴孫孝廉아! 지금이 곡할 때란 말인가.”注+손권孫權이 이에 앞서 양선현장陽羨縣長이 되었는데, 에서 그를 효렴孝廉(효도하고 청렴한 사람)으로 살펴서 천거하였기 때문에 이것으로 그를 칭한 것이다. 하고, 마침내 손권의 의복을 갈아입히고 그를 부축하여 말에 태워서 밖으로 나가 군대를 순시하게 하였다.
上表朝廷하고 下移屬城하고 中外將校 各令奉職하다 周瑜自巴丘將兵赴喪하여하여 與張昭共掌衆事注+通鑑上年 “留周瑜鎭巴丘.” 胡三省註 “裴松之曰 ‘案孫策于時, 始得豫章ㆍ廬陵, 尙未能得定江夏, 瑜之所鎭, 應在今巴丘縣也. 與後所卒巴丘處不同.’ 余據晉地理志, 廬陵郡有巴丘縣. 沈約曰 晉立. 今撫州崇仁縣, 卽其地. 梁改巴丘曰巴山.”러니
그리고 위로는 조정朝廷표문表文을 올리고 아래로는 속성屬城(소속된 성읍城邑)에 이문移文을 돌리고 안팎의 장교將校들에게 각각 직분을 다하도록 명령하였다. 주유周瑜파구巴丘로부터 군대를 거느리고 에 달려와 머물면서 장소와 함께 군사軍事를 관장하였다.注+자치통감資治通鑑≫에서 지난해에 “주유周瑜를 남겨두어 파구巴丘진수鎭守하게 하였다.” 하였는데, 이에 대한 호삼성胡三省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배송지裴松之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손책孫策이 이때에 처음으로 예장豫章여릉廬陵을 얻었으나 여전히 강하江夏를 평정하지는 못하였다. 주유가 진주鎭駐한 곳은 응당 지금의 파구현巴丘縣에 있었을 것이니, 이후에 주유가 파구巴丘라는 곳과는 같지 않다.’ 내가 심약沈約이 말하기를 ‘〈이 파구현巴丘縣은〉 나라가 세웠다.’ 하였으니, 지금 무주 숭인현撫州 崇仁縣이 바로 그곳이다. 나라 때에 파구巴丘를 바꾸어 파산巴山이라고 하였다.”
時策 雖有會稽, 吳郡, 丹陽, 豫章, 廬江, 廬陵이나 然深險之地 猶未盡從이라
당시 손책孫策이 비록 회계會稽, 오군吳郡, 단양丹陽, 예장豫章, 여강廬江, 여릉廬陵을 점유하였지만 궁벽하고 험한 지역에서는 아직도 전부 복종하지 않았다.
流寓之士 皆以安危去就爲意하여 未有君臣之固어늘 而昭, 瑜等 謂權可與共成大業이라하여 遂委心而服事焉하다
유망流亡하여 우거하는 사인士人들은 모두 자신의 안위安危에 따라서 거취를 생각하여 확고한 군신 관계가 없었는데, 장소와 주유 등은 이르기를 “손권은 함께 대업大業을 성취할 수 있다.” 하여 마침내 마음을 다하여 그를 섬겼다.
】 가을에 원소袁紹유비劉備를 보내어 여남汝南영천潁川 지역 일대를 침략하자 조조曹操가 공격하여 패주시켰는데, 유비가 다시 원소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여남에 이르렀다.
汝南黄巾劉辟等 叛曹操하고 應袁紹어늘 紹遣劉備하여 將兵助辟하니 郡縣多應之러라
여남군汝南郡에 있는 황건적黃巾賊의 우두머리인 유벽劉辟 등이 조조曹操를 배반하고 원소袁紹에게 호응하자, 원소가 유비劉備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유벽을 돕게 하니, 주위의 이 대부분 호응하였다.
陽安都尉李通 急錄戶調注+操分汝南二縣, 置陽安都尉. 錄, 收拾也. 戶出綿絹, 謂之調.러니 朗陵長趙儼 以書與荀彧曰注+朗陵, 亦汝南縣, 分屬陽安. 今陽安百姓 困窮하고 隣城 竝叛하니
양안도위 이통陽安都尉 李通호조戶調(가호家戶마다 부과하는 무명과 비단)를 급히 징수하니注+조조曹操여남현汝南縣을 두 (낭릉朗陵양안陽安)으로 나누고 양안도위陽安都尉를 설치하였다. 은 거두어들임이다. 가호家戶마다 무명과 비단을 세금으로 내는 것을 調라고 이른다., 낭릉현장 조엄朗陵縣長 趙儼이 다음과 같이 편지를 써서 순욱荀彧에게 보내었다.注+낭릉朗陵 또한 여남현汝南縣이니, 양안陽安에 분속되었다. “지금 양안陽安의 백성들이 곤궁하고 인근의 들이 모두 배반하니,
易用傾蕩이라 乃一方安危之機也 且此郡人 執忠守節하여 在險不貳하니
이 때문에 형세가 기울어져 동요되기 쉬운바, 이는 바로 한 지역의 안위가 달려 있는 중요한 관건입니다. 또한 이 의 사람들은 충절忠節을 잡아 지켜서 어려운 상황에 처해서도 두 마음을 품지 않았습니다.
以爲國家宜垂慰撫 而更急斂綿絹이면 何以勸善이리오 卽白操하여 悉以綿絹還民하니 上下歡喜하여 郡內遂安하다
생각건대 국가國家에서는 마땅히 위무慰撫해주어야 하는데 더욱 급하게 무명과 비단을 징수하니, 그렇다면 어떻게 을 권할 수 있겠습니까.” 순욱이 즉시 조조에게 아뢰어 징수한 무명과 비단을 전부 다 백성들에게 돌려주니, 상하가 모두 기뻐하여 군내郡內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操制新科하고 下州郡하여 頗增嚴峻하고 而調綿絹方急하니 長廣太守何夔 言於操曰注+長廣縣, 前漢屬琅邪郡, 後漢屬東萊郡. 此蓋操遣樂進入靑州, 新收以爲郡.
】 당시 조조曹操가 새로운 과조科條(법령法令)를 제정하고 에 내려서 시행하게 하였는데 〈이전에 비해〉 자못 더욱 준엄하였고 무명과 비단을 징수하는 것도 급하게 하자, 장광태수 하기長廣太守 何夔가 조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注+장광현長廣縣전한前漢 때에는 낭야군琅邪郡에 속하였고 후한後漢 때에는 동래군東萊郡에 속하였다. 여기서는 아마도 조조曹操악진樂進청주靑州로 들여보내어 장광현을 새로 거두어 으로 삼은 것인 듯하다.
先王 辨九服之賦하여 以殊遠近注+禮秋官大行人 “邦畿方千里. 其外方五百里謂之侯服, 歲一見, 其貢祀物. 又其外方五百里謂之甸服, 二歲一見, 其貢嬪物. 又其外方五百里謂之男服, 三歲一見, 其貢器物. 又其外方五百里謂之采服, 四歲一見, 其貢服物. 又其外方五百里謂之衛服, 五歲一見, 其貢材物. 又其外方五百里謂之要服, 六歲一見, 其貢貨物. 九州之外謂之蕃國, 世一見, 各以其所貴寶爲贄.” 注 “九州之外, 夷服ㆍ鎭服ㆍ蕃服.”하고 制三典之刑하여 以平治亂注+禮秋官大司寇 “掌建邦之三典, 以佐王刑邦國. 一曰刑新國用輕典, 二曰刑平國用中典, 三曰刑亂國用重典.”이라 愚以爲此郡 宜依遠域新邦之典하니
선왕先王구복九服부세賦稅를 분별하여 원근遠近에 따라 달리하였고注+〈“구복九服”은〉 ≪주례周禮≫ 〈추관 대행인秋官 大行人〉에 “방기邦畿(왕기王畿, 천자의 도읍)는 사방 1,000리이다. 방기邦畿의 밖 사방 500리 지역을 후복侯服이라 이르니, 1년에 한 번 천자를 조현朝見하고 공물은 사물祀物(제사에 쓰는 물건)이다. 또 후복侯服 밖 사방 500리 지역을 전복甸服이라 이르니, 2년에 한 번 천자를 조현하고 전복甸服 밖 사방 500리 지역을 남복男服이라 이르니, 3년에 한 번 천자를 조현하고 공물은 기물器物(종묘宗廟에 쓰는 제기祭器)이다. 또 남복男服 밖 사방 500리 지역을 채복采服이라 이르니, 4년에 한 번 천자를 조현하고 공물은 복물服物(제복祭服을 만드는 재료)이다. 또 채복采服 밖 사방 500리 지역을 위복衛服이라 이르니, 5년에 한 번 천자를 조현하고 공물은 재물材物(대나무와 목재木材)이다. 또 위복衛服 밖 사방 500리 지역을 요복要服이라 이르니, 6년에 한 번 천자를 조현하고 공물은 화물貨物(금옥金玉귀갑龜甲과 조개 등 자연물)이다. 구주九州(육복六服) 밖을 번국蕃國이라 하니, 한 왕대王代에 한 번 천자를 조현하고, 각각 귀하게 여기는 보물을 폐백으로 삼는다.” 하였는데, 정현鄭玄의 주에 “구주九州의 밖은 이복夷服진복鎭服번복蕃服이다.” 하였다., 삼전三典의 형벌을 제정하여 치란治亂을 고르게 하였습니다.注+〈“삼전三典”은〉 ≪주례周禮≫ 〈추관 대사구秋官 大司寇〉에 “대사구大司寇는 천하를 다스리는 세 가지 법을 세우고 반포하는 것을 관장하여 이 법을 어긴 제후국을 징벌하는 것을 보좌한다. , 세 번째는 를 징벌할 적에는 중법重法을 쓰는 것이다.” 하였다. 제가 생각하건대, 이 장광군長廣郡의 경우에는 마땅히 변방의 먼 지역과 새로 귀의한 나라에 적용하는 법을 따라야 하니,
其民間小事 使長吏臨時隨宜하여 上不背正法하고 下以順百姓之心이면
민간의 작은 일은 장리長吏에게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처리하여 위로는 조정의 정법正法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에 순응하게 해야 합니다.
比及三年 民安其業하리니 然後 乃可齊之以法也니이다 操從之하다
이렇게 하면, 3년이 지난 뒤에는 백성들이 생업生業에 편안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뒤에야 비로소 법으로써 다스릴 수 있습니다.” 이에 조조가 그의 말을 따랐다.
劉備略汝, 潁之間이어늘 操使曹仁擊破走之하고 盡復收諸叛縣注+仁, 操從弟也.하니
유비劉備여남汝南영천潁川 지역 일대를 침략하자, 조조曹操조인曹仁을 시켜 유비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배반한 들을 전부 수복하였다.注+조인曹仁조조曹操종제從弟이다.
備還說紹하여 南連劉表한대 紹遣備하여 復至汝南하니 操遣將擊之 爲備所殺하다
유비가 돌아와 원소袁紹를 설득하여 남쪽으로 유표劉表와 연합하게 하였다. 원소가 유비를 보내어 다시 여남汝南에 이르니, 조조가 장수를 보내어 공격하게 하였으나 유비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九月朔 日食하다
】 9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러니 冬十月 操襲破其輜重하니 紹軍 大潰하다
원소袁紹관도官渡에서 조조曹操를 공격하였는데 겨울 10월에 조조가 원소의 치중대輜重隊를 습격하여 격파하니, 원소의 군대가 크게 무너졌다.
袁紹軍陽武注+陽武縣, 屬河南尹, 在官渡水北.러니 沮授說曰 北兵雖衆이나 而勁果不及南하고 南兵雖精이나 而資儲不如北하니
원소袁紹양무현陽武縣에 주둔하였는데注+양무현陽武縣하남윤河南尹에 속하였으니, 관도수官渡水의 북쪽에 있었다., 저수沮授가 다음과 같이 설득하였다. “우리의 북쪽 군대는 비록 수효가 많으나 굳셈과 과감함이 조조曹操의 남쪽 군대에 미치지 못하고, 남쪽 군대는 비록 정예로우나 물자와 저축이 북쪽 군대만 못합니다.
南幸於急戰이요 北利在緩師 宜徐持久하여 曠以日月이니이다 紹不從하다
남쪽 군대는 급히 싸우는 것을 바라고 북쪽 군대는 이로움이 출병出兵을 늦추는 데에 있으니, 천천히 지구전持久戰을 하여 시일을 끄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원소가 이 말을 따르지 않았다.
八月 紹進營稍前하여 東西數十里 操亦分營與相當하여
】 8월에 원소袁紹진주進駐한 군대가 차츰 전진하여 그 영루營壘가 동서로 수십 리나 되니, 조조曹操 또한 군영을 나누어 원소군袁紹軍의 영루에 상대하였다.
出兵戰不勝하여 復還堅壁이어늘 紹爲高櫓, 起土山하고 爲地道하여 攻之하니
조조가 출병하여 싸웠으나 이기지 못하고는 다시 돌아와 영벽營壁을 굳게 지키고 나가서 싸우지 않으니, 원소가 를 만들고 토산土山을 일으키고 지도地道를 파서 공격하였다.
操衆少糧盡하여 士卒疲乏하고 百姓多叛이라 操與荀彧書하여 議欲還許하여 以致紹師注+致, 猶至也. 兵法 “善戰者致人, 不致於人.”러니
조조의 군대는 병력이 적고 군량이 다하여 사졸들이 피로하고 곤핍하였으며 많은 백성들이 배반하였다. 조조가 순욱荀彧에게 편지를 보내어 허도許都로 돌아가 원소의 군대를 유인하여 오게 하려는 것에 대해 의논하였는데注+(이르게 하다)는 와 같다. 병법兵法 하였다.,
彧報曰 紹悉衆聚官渡하여 欲與公決勝敗 公以至弱當至彊이라 若不能制 必爲所乘이니 是天下之大機也
순욱이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원소가 전군을 관도官渡에 결집시켜 승패勝敗를 결단하고자 하니, 은 지극히 약한 병력으로 지극히 강한 병력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만약 적을 제압하지 못하면 반드시 적에게 제압을 당할 것이니, 이는 천하를 취할 수 있는 중요한 관건입니다.
且紹 布衣之雄耳 能聚人而不能用하니 以公之神武明哲으로 而輔以大順이면 何向而不濟리오
또한 원소는 보통 사람들 가운데 영웅일 뿐이어서 인재를 모았으나 제대로 쓰지 못합니다. 신무神武함과 명철함에다가 대순大順(천도天道에 순응함)으로 돕는다면, 어디로 향해 간들 이루지 못할 바가 있겠습니까.
今榖雖少 未若楚, 漢在滎陽, 成皐間也 是時 劉, 項 莫肯先退者 以爲先退則勢屈也
지금 곡식이 비록 부족하지만 항우項羽나라와 유방劉邦나라가 형양滎陽(형양)과 성고成皐의 사이에서 서로 대치하던 상황과는 같지 않으니, 이때 유방과 항우가 먼저 물러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은 먼저 물러나면 가 굽혀진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以十分居一之衆注+言與紹衆相懸也.으로 畫地而守之注+言畫地作限隔也.하여 搤其喉而不得進 已半年矣注+搤, 捉也. 喉, 咽也.
원소군袁紹軍의 십분의 일 밖에 안 되는 병력으로注+〈“이십분거일지중以十分居一之衆”은〉 원소袁紹의 병력과 그 차이가 현격함을 말한 것이다. 땅을 구획하여 지켜서注+〈“획지이수지畫地而守之”는〉 땅을 구획하여 한격限隔(경계)을 만듦을 말한 것이다.인후咽喉(요지要地)를 죄어 나아갈 수 없게 한 지가 이미 반년입니다.注+는 잡아 쥠이다. 는 목구멍이다.
情見勢竭이면 必將有變이니 此用奇之時 不可失也注+見, 賢遍切.니이다 操乃堅壁持之하다
정황이 드러나고 가 다하면 반드시 변고가 있게 될 것인바, 이는 기묘한 계략計略을 써서 승리할 때이니 놓쳐서는 안 됩니다.”注+(나타나다)은 현편賢遍이다. 조조가 이에 영벽을 굳게 지켜 원소와 대치하였다.
紹運榖車數千乘하여 至官渡어늘 操擊燒之하다 十月 紹復遣軍運榖할새 使淳于瓊等으로 將兵送之러니 沮授說紹호되
원소袁紹의 곡식을 운반하는 수레 수천 대가 관도官渡에 이르렀는데, 조조曹操가 공격하여 불태웠다. 10월에 원소가 다시 군대를 보내 곡식을 운반할 적에 순우경淳于瓊 등에게 군대를 거느려 호송하게 하였는데 저수沮授가 원소를 설득하기를
하여 以絶曹操之鈔注+支, 別也. 表, 外也.니이다 許攸曰 曹操悉師拒我하니 許下勢必空弱이니 若分遣輕軍하여 星行掩襲이면 可拔也注+星行, 戴星而行也.
“〈장기蔣奇를 파견하여〉 별도로 외부에 지군支軍(별동대)을 거느려서 조조군曹操軍의 노략을 차단하여야 합니다.”注+(별도)이고 는 밖이다. 하였고, 또 허유許攸가 말하기를 “조조가 전군을 동원하여 우리를 막고 있으니, 허하許下(허도許都)는 형세상 틀림없이 텅 비고 약할 것입니다. 만약 경무장한 군대를 나누어 보내어 밤을 새워 급히 가서 불의에 습격하면 허도를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注+성행星行”은 〈아침 일찍 나가고 밤늦게 돌아와〉 별을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다.
許拔則奉迎天子하여 以討操 操成禽矣 如其未潰라도 可令首尾犇命이니 破之必也리이다 紹皆不從이러라
허도가 함락되거든 천자를 받들어 맞이하여 조조를 토벌하면 조조를 사로잡을 수 있고, 만일 〈허도가〉 궤멸되지 않더라도 그 부대가 조조군의 앞뒤로 하여 분주히 응대하게 할 수 있으니, 틀림없이 격파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원소는 모두 따르지 않았다.
攸家犯法注+攸家, 許攸之家人.이어늘 審配收繫之한대 攸怒하여 遂犇操하니
】 이때 마침 허유許攸의 집안사람이 법을 범하였는데注+유가攸家”는 허유許攸의 집안사람이다., 심배審配가 그를 체포하여 옥에 가두자 허유가 노하여 마침내 달아나 조조曹操에게 의탁하였다.
操聞其來하고 跣出迎之하여 撫掌笑曰 子卿 遠來하니 吾事濟矣注+許攸, 字子遠, 今呼爲子卿, 貴之也. 或曰 “操字攸曰 ‘子遠, 卿來, 吾事濟矣.’ 於文爲順.”로다
조조는 허유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맨발로 뛰어나가 그를 영접하여 손뼉을 치고 웃으며 말하기를 “자경子卿이 먼 곳에서 왔으니, 나의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注+허유許攸자원子遠인데 지금 자경子卿이라고 부른 것은 그를 귀하게 여긴 것이다. 혹자는 말하였다. “조조曹操가 허유의 자를 부르며 ‘자원子遠아, 이 왔으니 나의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문세文勢에 순하다.” 하였다.
旣入坐 謂操曰 袁氏軍盛하니 何以待之 今有幾糧乎 操曰 可支一月이니 爲之奈何
허유가 들어가 자리에 앉은 뒤에 조조에게 이르기를 “원씨袁氏(원소袁紹)의 군대가 강성하니, 어떻게 대응할 것입니까? 지금 얼마의 양식이 있습니까?” 하고 물었다. 조조가 말하기를 “한 달 정도 버틸 수 있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니,
攸曰 袁氏輜重萬餘乘 在故市, 烏巢하여 屯軍無嚴備注+索隱曰 “故市, 縣名, 屬河南.” 胡三省曰 “據水經, 烏巢澤, 在陳留酸棗縣東南.”하니 若以輕兵襲之하여 燔其積聚 不過三日 袁氏自敗也리이다
허유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소袁紹치중거輜重車 1만여 대가 고시故市오소烏巢에 있는데 그곳에 주둔하여 지키는 군대는 경비가 삼엄하지 않으니注+사기색은史記索隱≫에 “고시故市의 이름이니, 하남河南에 속한다.” 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말하기를 “≪수경주水經注≫에 근거하면 오소택烏巢澤진류 산조현陳留 酸棗縣 동남쪽에 있다.” 하였다., 만약 경무장한 군대로 습격하여 쌓여 있는 양식을 불태우면 사흘도 못 되어 원소는 스스로 패할 것입니다.”
曹操가 烏巢에 쌓여 있는 袁紹의 군량을 태우다曹操가 烏巢에 쌓여 있는 袁紹의 군량을 태우다
操大喜하여 乃留荀攸, 曹洪守營하고 自將步騎五千하여 用袁軍旗幟하여 銜枚縛馬口하고 夜從間道出하여
조조曹操가 크게 기뻐하여 마침내 순유荀攸조홍曹洪을 남겨두어 본영本營을 지키게 하고, 자신이 직접 보병과 기병 5천 명을 거느리고서 원소군袁紹軍기치旗幟를 사용하여 병사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말의 입을 묶고서 밤중에 샛길로 나갔다.
人抱束薪하고 至屯 放火急擊之하다 紹聞操擊瓊하고 謂其子譚曰 就操破瓊이라도 吾拔其營이면 彼固無所歸矣注+就, 卽也, 言卽使操破淳于瓊, 而我攻拔其營, 將無所歸.라하고
그런데 사람마다 섶을 한 묶음씩 껴안고 가게 하여 원소군의 치중輜重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 불을 놓아 급히 공격하였다. 원소는 조조가 순우경淳于瓊을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 아들 원담袁譚에게 이르기를 “설령 조조가 순우경을 격파하더라도 내가 그의 본영本營을 함락시키면 저 조조는 진실로 돌아갈 곳이 없게 될 것이다.”注+(설령, 만약)는 이니, 〈“취조파경就操破瓊……피고무소귀의彼固無所歸矣”는〉 설령 조조曹操순우경淳于瓊을 격파하더라도 내가 그의 본영本營을 공격하여 함락시키면 조조가 장차 돌아갈 곳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고,
乃使其將高覽, 張郃等으로 攻操營하니 郃曰 曹公精兵 往必破瓊이니 請先救之하노이다 郭圖固請攻操營이어늘
이에 그 장수 고람高覽장합張郃 등에게 조조의 본영을 공격하게 하였다. 장합이 말하기를 “조공曹公의 정예병이 갔으니 반드시 순우경을 격파할 것입니다. 제가 먼저 가서 이를 구원하겠습니다.” 하였으나 곽도郭圖는 한사코 조조의 본영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다.
郃曰 曹公營固하니 攻之라도 必不拔이요 若瓊等見禽이면 吾屬 盡爲虜矣라한대
이에 장합이 말하기를 “조공의 영루營壘는 견고하니 공격하더라도 반드시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고, 만약 순우경 등이 사로잡히면 우리들은 모두 포로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紹但遣輕騎救瓊하여 而以重兵攻營이러니 不能下하다 騎至烏巢 操大破之하여 斬瓊等하고 盡燔其糧榖하다
원소는 다만 경무장한 기병을 보내어 순우경을 구원하게 하고, 중병重兵(매우 강력한 군대)으로 조조의 본영을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원소의 기병이 오소烏巢에 이르렀는데 조조가 이를 크게 격파하여 순우경 등을 참살하고 그 양곡을 전부 불태웠다.
紹軍恟懼어늘 郭圖慙하여 復譛張郃하니 遂與覽焚攻具하고 詣操營降하니 於是 紹軍 驚擾大潰
원소袁紹의 병사들이 놀라 두려워하니, 곽도郭圖가 부끄러워하여 다시 장합張郃을 참소하였다. 그러자 장합이 마침내 고람高覽과 함께 을 공략하는 기구를 불태우고 조조曹操의 군영에 나아가 항복하니, 이에 원소의 군대가 놀라고 소요하여 크게 무너졌다.
紹及譚等 幅巾乘馬하여 與八百騎渡河어늘 操追之不及하고 盡收其輜重, 圖書, 珍寳하고
원소와 원담 등이 복건幅巾 차림으로 말을 타고서 800명의 기병과 함께 황하黃河를 건넜는데 조조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고, 원소군袁紹軍치중輜重도서圖書와 진귀한 보물들을 모조리 거두었으며,
餘衆降者 操盡阬之하니 前後所殺 七萬餘人이러라 沮授爲操軍所執하여 大呼曰 授不降也로라
잔여 군사 중에 항복한 자들을 조조가 모두 산 채로 땅속에 묻으니, 전후로 죽인 것이 7만여 명이었다. 저수沮授조조군曹操軍에게 붙잡혔는데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나는 항복하지 않았다.” 하였다.
操與之有舊 遂赦而厚遇焉이러니 授尋謀歸袁氏하니 操乃殺之하다
조조가 그와 예로부터 사귄 교분이 있어서 마침내 사면하고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저수가 이윽고 원씨袁氏(원소袁紹)에게 돌아갈 것을 도모하자 조조가 마침내 그를 죽였다.
操收紹書中得許下及軍中人書하여 皆焚之하고 曰 當紹之彊 孤猶不能自保 況衆人乎아하니 冀州城邑 多降於操하다
조조가 거두어들인 원소의 편지들 중에서 허하許下군중軍中 사람들이 원소에게 보낸 편지를 얻었는데, 조조는 이를 모두 불태우고 말하기를 “원소가 강성했을 때엔 나도 오히려 스스로 보존할 수 없었으니, 하물며 중인衆人은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였다. 이에 기주冀州성읍城邑들이 대부분 조조에게 항복하였다.
紹走하여 至黎陽北岸하여 入其將蔣義渠營한대 義渠避帳而處之하고 使宣號令하니 衆聞紹在하고 稍復歸之러라
원소袁紹가 달아나 여양黎陽황하黃河 북쪽 기슭에 이르러서 그의 장수 장의거蔣義渠의 군영에 들어가자, 장의거가 〈원소를 위하여〉 자신의 군막을 피해주어 원소를 거처하게 하고 그 안에서 호령을 내리게 하였다. 그러자 흩어졌던 병사들이 원소가 살아 있다는 말을 듣고 차츰 다시 돌아왔다.
或謂田豐曰 君必見重矣로다 豐曰 公 貌寬而內忌하니 不亮吾忠注+亮, 信也, 明也.이라 若勝而喜 猶能赦之어니와 今戰敗而恚하니 吾不望生이로라
어떤 사람이 전풍田豐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반드시 중용重用될 것이다.” 하였는데, 전풍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원공袁公이 겉으로는 관대하지만 속으로는 시기하니 나의 충정을 믿지 않는다.注+은 믿음이며 밝음이다. 만약 싸움에 이겨서 기뻐하였더라면 오히려 나를 사면해줄 수 있겠지만 지금 싸움에 져서 화가 났으니, 나는 살기를 바랄 수 없다.”
紹謂(逄)[逢]紀曰 田別駕前諫止吾하니 吾亦慙之하노라 紀曰 豐聞將軍之退하고 拊手大笑하여 喜其言之中也니이다
원소가 봉기逢紀에게 이르기를 “전별가田別駕가 앞서 나에게 출병하지 말 것을 간하였으니, 내가 또한 이를 부끄럽게 여기는 바이다.” 하였는데, 봉기가 말하기를 “전풍이 장군께서 퇴각하신 것을 듣고서 손뼉을 치며 크게 웃고 자신의 말이 적중한 것을 기뻐하였습니다.” 하였다.
紹於是 謂僚屬曰 吾不用田豐言하여 果爲所笑라하고 遂殺之하다
원소가 이에 요속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전풍의 말을 따르지 않아서 과연 비웃음을 당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그를 죽였다.
紹爲人 寬雅有局度하여 喜怒 不形於色이나 而性 矜愎自高하여 短於從善이라 至於敗注+愎, 弼力切, 戾也, 狠也.하니라
원소는 사람됨이 너그럽고 고아하며 기국과 도량이 있어서 기쁨과 노여움을 얼굴빛에 나타내지 않았으나 성품이 교만하고 괴팍하여 스스로 높은 체해서 선언善言을 따르는 데에 부족하였다. 그러므로 실패함에 이른 것이다.注+필력弼力이니, 어그러짐이며 패려悖戾함이다.
有星孛于大梁注+自胃七度至畢十度, 曰大梁之次.하다
패성孛星대량大梁에 나타났다.注+위수胃宿 7도로부터 필수畢宿 10도까지를 대량大梁위차位次(분야分野)라고 한다.
◑以劉馥爲揚州刺史하다
유복劉馥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廬江梅乾等 聚衆數萬하여 在江, 淮間이러니 曹操表馥刺揚州하니
여강廬江 사람 매건梅乾 등이 수만 명의 무리를 모아 장강長江회하淮河 일대에 있었는데, 조조曹操표문表文을 올려 유복劉馥양주자사揚州刺史로 삼았다.
揚州獨有九江注+時廬江ㆍ丹ㆍ會稽ㆍ吳郡ㆍ豫章皆屬孫氏. 馥刺揚州, 獨有九江耳.이라 單馬造合肥空城하여 建立州治注+郡國志, 漢揚州刺史治歷陽. 今馥移合肥, 後又移治壽春, 而江左揚州治建業, 揚州分矣.하고 招懷乾等하니 恩化大行하여 流民歸者以萬數
당시 양주揚州는 오직 구강군九江郡만을 점유하였는데注+당시에 〈양주揚州 중에〉 여강廬江, 단양丹陽, 회계會稽, 오군吳郡, 예장豫章이 모두 손씨孫氏에게 속하였고, 유복劉馥이 맡은 양주자사揚州刺史는 오직 구강군九江郡만 점유하였을 뿐이다., 유복이 필마匹馬합비合肥의 빈 성에 이르러 치소治所를 건립하고注+ 지금 유복劉馥합비合肥로 옮기고, 뒤에 또 수춘壽春으로 치소를 옮겼는데, 강좌江左(강동江東, 나라)의 양주揚州건업建業에 치소를 두어서 양주가 나뉘었다. 매건 등을 초무招撫하여 회유하니, 은혜와 교화가 크게 행해져 유망流亡한 백성들 중에 돌아온 자가 만 명으로 헤아려졌다.
於是 廣屯田, 興陂堨하니 官民有畜注+陂, 池也. 堨, 於葛切, 以土壅水曰堨.이라 乃聚諸生立學校하고 又高爲城壘, 多積木石하여 以修守戰之備하니라
유복이 마침내 둔전屯田을 확대하고 못과 보를 일으키니, 관부와 백성들 모두 저축이 있게 되었다.注+는 못(저수지)이다. 어갈於葛이니 흙으로 〈둑을 쌓아〉 물을 막은 것을 이라 한다. 이에 제생諸生을 모아 학교學校를 세우고, 또 성벽과 보루를 높게 만들고 나무와 돌을 많이 쌓아놓아서 수비하고 전투하는 대비를 갖추었다.
以孫權爲討虜將軍하다
손권孫權토로장군討虜將軍으로 삼았다.
曹操聞孫策死하고 欲因喪伐之러니 張紘 諫曰 乘人之喪 旣非古義 若其不克이면 成讐棄好 不如因而厚之니이다
조조曹操손책孫策의 죽음을 듣고 그의 을 기회로 삼아 공격하려고 하자, 장굉張紘이 간하기를 “다른 사람의 을 기회로 삼는 것은 이미 옛날의 바른 도리가 아니고, 만약 〈그렇게 하고서도〉 이기지 못하면 원수가 되어 우호 관계를 버리니, 이를 기회로 삼아서 후하게 대우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操卽表權爲討虜將軍하고 領會稽太守注+討虜將軍之號, 創置於此.하고 操欲令紘輔權內附하여 乃以紘爲會稽都尉하다
조조가 곧바로 표문表文을 올려서 손권孫權토로장군討虜將軍으로 삼고 회계태수會稽太守의 직을 겸하게 하였다.注+토로장군討虜將軍이라는 호칭이 이때에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조조가 장굉으로 하여금 손권을 보좌해 자기에게 내부內附하게 하려고 하여, 마침내 장굉을 회계도위會稽都尉로 삼았다.
紘至 吳太夫人 以權年少라하여 委紘與張昭하여 共輔之하니 思惟補察하여 知無不爲러라
장굉이 에 이르자, 오태부인吳太夫人은 손권의 나이가 어리다고 하여 장굉과 장소張昭에게 함께 손권을 보좌해줄 것을 부탁하니, 장굉이 오직 손권의 허물을 보완補完하고 득실得失을 살필 것을 생각하여 아는 것을 힘써 실천하지 않음이 없었다.
魯肅 將北還이어늘 周瑜止之하고 因薦於權曰 肅 才宜佐時하니 當廣求其比하여 以成功業이니이다
魯肅魯肅
노숙魯肅이 북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주유周瑜가 그를 만류하고 인하여 손권孫權에게 천거하기를 “노숙의 재주는 시정時政을 보좌하기에 마땅하니, 응당 이러한 인재들을 널리 구하여 공업功業을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權卽見肅하고 與語悦之하여 賓退 獨引肅合榻하고 對飲問計注+胡三省曰 “榻, 牀也. 有坐榻, 有卧榻. 今江南又呼几案之屬爲卓牀. 卓, 高也. 以其比坐榻ㆍ卧榻爲高也. 合榻, 猶言合卓也.”한대
손권은 곧바로 노숙을 만나보고 그와 더불어 대화한 뒤에 기뻐하여 빈객들이 물러가자 홀로 노숙을 들어오게 하여 (탁상卓牀)을 합하고 그와 마주하여 술을 마시며 계책을 물으니注+호삼성胡三省이 말하였다. “이니, 좌탑坐榻이 있고 와탑卧榻이 있다. 지금 강남江南 지역에서는 또 궤안几案의 등속을 탁상卓牀이라고 부른다. 은 높음이니, 좌탑坐榻와탑卧榻에 견주면 높기 때문이다. ‘합탑合榻’은 탁상卓牀을 합하였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肅曰 漢室 不可復興이요 曹操 不可卒除 爲將軍計컨대 惟有保守江東하여 以觀天下之釁耳
노숙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 황실은 다시 일으킬 수 없고 조조曹操는 대번에 제거할 수 없으니, 장군을 위하여 헤아려 보건대 오직 강동江東을 보전해 지켜서 천하의 틈(변화)을 지켜볼 뿐입니다.
若因北方多務하여 勦除黄祖하고 進伐劉表하고 竟長江所極하여 據而有之 此王業也注+勦, 絶也.니이다 張昭毁肅年少麤疏 益貴重之하니라
만약 북쪽의 조조가 일이 많을 때를 틈타 황조黄祖를 제거하고 나아가 유표劉表를 정벌하고 장강長江 유역을 모두 점거하여 소유한다면 이는 제왕帝王공업功業입니다.”注+는 끊음이다. 장소張昭가 노숙은 나이가 어려 거칠고 서투르다고 비방하였는데, 손권이 그를 더욱 귀중하게 여겼다.
料諸小將兵少而用薄者하여 幷合之注+料, 力條ㆍ力弔二切, 量也.하니 別部司馬呂蒙 軍容鮮整하고 士卒練習이라
손권孫權소장小將(하급 무관)들 중에 거느린 병력이 적고 능력이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자들을 헤아려서 병합하였는데注+력조力條력조力弔의 두 가지 이니, 헤아림이다., 별부사마 여몽別部司馬 呂蒙의 군대는 군용軍容이 정돈되고 사졸들의 훈련이 잘되어 있었다.
大悦하여 增其兵하여 寵任之하다 功曹駱統 勸權尊賢接士하여 勤求損益하여
이에 손권이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병력을 더해주고 총애하며 신임하였다. 공조 낙통功曹 駱統이 손권에게 권하여 어진 이를 높이고 선비를 대접하여 시정時政의 이로움과 폐단을 부지런히 묻도록 하였으며,
饗賜之日 人人別進하여 問其燥濕하고 加以密意하여 誘諭使言하여 察其志趣하니 納用焉注+統, 俊之子也. 人之居處, 避濕就燥. 問其燥濕者, 問其居處何如也.하다
연회를 베풀어 상사賞賜하는 날에 사람마다 개별적으로 나아오게 하여 거처가 어떠한지를 묻고 친밀한 뜻을 더하여 말을 하도록 유도하고 타일러서 그 뜻을 살피게 하니, 손권이 그의 말을 받아들여서 따랐다.注+낙통駱統낙준駱俊의 아들이다. 사람이 거처할 적에 습한 곳을 피하여 건조한 데로 나아간다. “문기조습問其燥濕”라는 것은 그 거처가 어떠한지를 묻는 것이다.
劉表攻長沙, 零, 桂하여 皆下之하다
유표劉表장사군長沙郡영릉군零陵郡계양군桂陽郡을 공격하여 모두 함락하였다.
劉表攻長沙, 零陵, 桂陽하여 皆平之하니 於是 表地方數千里 帶甲十餘萬이라
유표劉表장사군長沙郡영릉군零陵郡계양군桂陽郡을 공격하여 모두 평정하니, 이에 유표의 땅이 사방 수천 리이고 갑옷 입은 병사들이 십여만 명이었다.
遂不供職貢하고 郊祀天地하고 居處服用 僭擬乘輿焉이러라
유표는 마침내 조정에 직공職貢(공물貢物)을 바치지 않고 천지天地교사郊祀를 지내고 거처와 사용하는 물건들을 참람하게 승여乘輿(천자天子)에게 견주었다.
益州司馬張魯據漢中하고 從事趙韙作亂하다
익주사마 장로益州司馬 張魯한중漢中을 점거하고 종사 조위從事 趙韙(조위)가 난을 일으켰다.
張魯以劉璋闇懦라하여 遂據漢中注+闇, 與暗同. 闇懦, 謂暗昧而懦弱也.하다 南陽, 三輔民流入益州者 數萬家 劉焉 悉收以爲兵이러니
장로張魯유장劉璋이 우매하고 나약하다고 하여 마침내 한중漢中을 점거하였다.注+과 똑같으니, “암나闇懦”는 우매하고 나약함을 이른다. 처음에 남양군南陽郡삼보三輔 지역의 백성으로서 유망流亡하여 익주益州에 들어온 자들이 수만 가호였는데, 〈유장의 아버지〉 유언劉焉이 이들을 전부 거두어 군사로 삼았다.
璋性寬柔하여 無威略하여 東州人 侵暴舊民호되 不能禁注+東州人, 謂南陽郡及三輔流民.이라
유장은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위엄과 지략이 없어서 동주東州의 사람들이 익주益州에 본래 거주하던 백성들을 침탈하고 포악하게 굴었으나 유장이 이를 금하지 못하였다.注+동주東州의 사람들은 남양군南陽郡삼보三輔 지역의 유망流亡한 백성들을 이른다.
趙韙素得人心이러니 因士民之怨하여 遂作亂攻璋하고 賂荊州하여 與連和注+韙從劉焉入蜀, 璋又韙所立, 益州之大吏也. 荊州, 劉表也.하니 蜀郡, 廣漢, 犍爲 皆應之하다
조위趙韙가 평소 인심을 얻었는데, 사인士人과 백성들이 원망하는 것을 이용하여 마침내 난을 일으켜 유장을 공격하고 형주荊州유표劉表에게 뇌물을 보내 그와 연합하니注+조위趙韙유언劉焉을 따라 에 들어왔고 유장劉璋은 또 조위가 세운 사람이니, 익주益州대리大吏(대신大臣, 고관高官)이다. 형주荊州유표劉表이다., 촉군蜀郡광한군廣漢郡건위군犍爲郡이 모두 호응하였다.
역주
역주1 操殺車騎將軍董承 : “董承이 劉備와 함께 曹操를 주살할 것을 모의하였는데 일이 누설되어 죽임을 당하였으니, 그렇다면 어찌하여 ‘故’를 쓰지 않고 ‘殺’을 썼는가. ‘故’를 쓰는 것은 역적을 토벌한 것으로 董承을 인정하는 것이다. 역적을 토벌한 것으로 동승을 인정하지 않음은 어째서인가. 조조가 入朝하여 정권을 장악한 것은 동승이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董承與備同謀誅操 事泄被殺 則曷爲不書故書殺 書故 是以討賊與承矣 其不以討賊予承 何也 操之入 承爲之]” ≪書法≫
역주2 [東] : 저본에는 ‘東’자가 없으나 ≪水經注≫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3 白馬山은……있다 : ≪水經注≫ 권5 〈河水〉에 “동남쪽으로 白馬縣 故城과의 거리가 50리쯤 되니, 아마도 곧 ≪開山圖≫에서 말한 白馬山인 듯하다.[東南距白馬縣故城可五十里 疑卽開山圖之所謂白馬山也]”라고 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4 晉書……있다 : ≪晉書≫ 권15 〈地理志〉 ‘揚州 廬陵郡’ 조에 의하면, 廬陵郡이 統轄하는 縣은 西昌, 高昌, 石陽, 巴丘, 南野, 東昌, 遂興, 吉陽, 興平, 陽豐 등 총 10곳이다.
역주5 袁紹遣劉備……至汝南 : “劉備에 대해서 일찍이 ‘曹操를 토벌하였다.’라고 썼으니, 이는 또한 조조를 적으로 여긴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어찌하여 略을 쓰고 至를 쓰기를 常辭(보통의 말)와 같이 하였는가. 이는 의로운 토벌이 아니어서이다. 의로운 토벌이 아님은 어째서인가. 袁紹가 보냈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은 원소를 미워하기 때문에 汝南의 전투에서 유비가 조조의 장수를 죽인 것을 쓰지 않았다.[備嘗書討操矣 是亦敵操也 曷爲書略書至如常辭 非義討也 其非義討 何 紹遣之也 綱目惡(오)紹 故汝南之戰 備殺操將不書]다” ≪書法≫
역주6 공물은 嬪物이다 : 이에 대한 鄭玄의 주에 “鄭司農이 말하였다. ‘嬪物은 婦人이 만드는 물건이다.’……내가 생각건대, 嬪物은 생사와 모시이다.[鄭司農云 嬪物 婦人所爲物也……玄謂 嬪物絲枲也]”라고 설명하였으며, 또한 ≪周禮≫ 〈天官 太宰〉의 ‘嬪貢’에 대한 정현의 주에 “嬪은 옛 책에 賓으로 되어 있다.[嬪 故書作賓]”라고 설명하였다. 淸代의 王引之는 ≪經義述聞≫ 권8 〈周官 上〉 ‘嬪貢 其貢嬪物’ 조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賓은 本字이고 嬪은 借字이니, 마땅히 本字와 같이 읽어야 하고 借字를 따라서 풀이해서는 안 된다.……또 살펴보건대, ≪周禮≫ 〈秋官 大行人〉에 ‘侯服의 공물은 祀物이고, 甸服의 공물은 嬪物이다.’ 하였는데, 여기의 嬪 역시 마땅히 賓으로 읽어야 하니, 祀物은 제사 지내는 일에 사용하는 물건이고, 賓物은 빈객을 접대하는 일에 사용하는 물건이다.[賓本字也 嬪借字也 讀當如其本字 不當依借字爲解……又案 秋官大行人 侯服其貢祀物 甸服其貢賓物 嬪亦當讀爲賓 祀物 祭祀之事所用之物 賓物 賓客之事所用之物也]”
역주7 첫 번째는……것이고 : 이에 대한 鄭玄의 주에 “그 백성들이 아직 가르침에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爲其民未習於教]”라고 설명하였다.
역주8 두 번째는……것이고 : 원문의 ‘平國’에 대해서 孫詒讓의 ≪周禮正義≫에 “나라를 세운 지 오래되어서 태평하여 아무런 일이 없는 것을 이른다.[謂立國日久 承平無事者也]”라고 설명하였다.
역주9 어지러운 나라 : 이에 대한 鄭玄의 주에 “찬탈하고 시해하며 반역하는 나라[簒殺叛逆之國]”라고 설명하였다.
역주10 袁紹攻曹操於官渡 : “袁紹가 州와 郡에 檄文을 돌려서 曹操의 죄악을 낱낱이 열거하였는데, ≪資治通鑑綱目≫은 어째서 ‘曹操를 토벌하였다.’라고 쓰지 않았는가. 원소는 본래 勤王하려는 마음이 없었으니, 사실 이 또한 조조가 한 짓을 하고자 한 것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니 어찌 帝室을 보좌하고 높여서 漢나라의 忠純한 신하가 될 수 있겠는가. 만약 曹操가 성공하지 못했다면 진실로 漢나라를 찬탈할 수 없었을 것이요, 원소가 공만일 성공함이 있었다면 이 역시 한 명의 조조일 뿐이다. 그러니 군자가 어찌 지나치게 원소를 인정할 수 있겠는가.[袁紹移檄州郡 數操罪惡 綱目何不以討操書之 蓋紹素無勤王之心 其實不過亦欲爲操所爲耳 豈能翊戴帝室 爲漢氏之純臣耶 使操無成 固不能以簒漢 紹而有成 是亦一操而已 君子豈得過予之哉]” ≪發明≫
역주11 高櫓 : 樓櫓라고도 하는바, 고대에 軍中에서 망을 보거나 공격하고 수비하는 데에 쓰였던 높은 누대이다. 지붕이 없으며 지면 또는 수레나 배의 위에 세웠다.
역주12 전쟁을……것이다 : 이 내용은 ≪孫子≫ 〈虛實〉에 보인다.
역주13 可別爲支軍於表 : ≪資治通鑑≫에는 “可遣蔣奇別爲支軍於表”로 되어 있다.
역주14 (楊)[陽] : 저본에는 ‘楊’으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陽’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5 後漢書……두었다 : 이와 관련된 내용은 ≪後漢書≫ 권32 〈郡國志〉 ‘揚州 九江郡’ 조에 보인다.
역주16 [陵] : 저본에는 ‘陵’자가 없으나 校點本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8,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7 [陽] : 저본에는 ‘陽’자가 없으나 校點本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8, 上海古籍出版社)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자치통감강목(10) 책은 2019.09.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18 By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