年度 | 在位年 | 역문쪽수 | 주요사건 |
B.C.73戊申年 | 漢 宣帝 本始 1 | 13 | ◈霍光이 宣帝에게 정권을 돌려주었으나 황제가 받지 않음. |
14 | ◈봉황이 膠東에 내려앉으므로 赦免을 하고 田租를 거두지 않음. ◈戾太子와 戾夫人, 悼考와 悼后를 追諡하고 園邑을 설치. | ||
15 | ◈黃霸를 불러 廷尉正으로 삼음. | ||
B.C.72己酉年 | 漢 宣帝 本始 2 | 16 | ◈大司農 田延年이 횡령한 죄가 있어 자살함. |
18 | ◈孝武皇帝의 묘호를 높여 世宗이라 하고, 황제가 행차하는 郡國에 모두 世宗의 사당을 세움. 夏侯勝과 黃霸가 이를 반대하였다가 하옥됨. | ||
20 | ◈田廣明 등을 보내어 校尉인 常惠와 함께 烏孫의 군대를 감독하여 匈奴를 공격하게 함. | ||
B.C.71庚戌年 | 漢 宣帝 本始 3 | 21 | ◈대장군 霍光의 아내인 顯이 女醫를 시켜 皇后 許氏를 독살함. |
24 | ◈恭哀皇后(許皇后)를 杜陵의 南園에 장례함. ◈田廣明이 적을 앞에 두고 전진하지 않은 죄가 있어 자살하였고, 常惠는 오환과 함께 흉노를 크게 무찌른 공으로 長羅侯로 봉함. | ||
26 | ◈丞相 蔡義가 사망하여 韋賢을 丞相으로 삼고 魏相을 御史大夫로 삼음. ◈潁川太守 趙廣漢이 경내를 잘 다스려 京兆尹으로 삼음. | ||
B.C.70辛亥年 | 漢 宣帝 本始 4 | 28 | ◈대장군 霍光의 딸을 황후로 세움. ◈큰 지진이 일어나 산이 무너지고 두 郡에 있던 祖宗의 사당이 무너지니, 황제가 소복을 입고 正殿을 피하였으며 詔令을 내려 經學한 자에게 묻고 賢良方正한 선비를 천거하게 함. |
29 | ◈夏侯勝을 諫大夫로 삼고 黃霸를 揚州刺史로 삼음. | ||
B.C.69壬子年 | 漢 宣帝 地節 1 | 31 | ◈于定國을 廷尉로 삼음. |
B.C.68癸丑年 | 漢 宣帝 地節 2 | 32 | ◈霍禹를 右將軍으로 삼음. 大司馬 大將軍 博陸侯 霍光이 사망함. |
33 | ◈張安世를 大司馬 車騎將軍으로 삼아 尙書의 일을 겸하게 함. | ||
34 | ◈霍山을 奉車都尉로 삼아 尙書의 일을 겸하게 하였는데, 御史大夫 魏相이 이를 비판하였으며 封書의 副封을 없애서 尙書가 부봉을 열어보고 봉서를 숨기지 못하도록 하자고 건의하자 황제가 이를 따르고 그를 給事中으로 삼음. | ||
38 | ◈匈奴의 壺衍鞮單于가 죽었으므로 아우인 虛閭權渠單于가 즉위함. | ||
B.C.67甲寅年 | 漢 宣帝 地節 3 | 38 | ◈膠東相 王成이 호구를 늘린 공으로 關內侯를 받음. |
39 | ◈許皇后의 아들 劉奭을 皇太子로 세움. ◈丞相 韋賢이 致仕하였는데, 丞相의 치사가 이때부터 시작됨. | ||
40 | ◈魏相을 丞相으로 삼고 丙吉을 御史大夫로 삼음. ◈疏廣을 太子太傅로 삼고 疏廣의 형의 아들 疏受를 少傅로 삼음. | ||
41 | ◈蕭望之를 謁者로 삼음. | ||
42 | ◈詔令을 내려 直言을 구하고 京師에 주둔하는 군대를 줄이고 郡國의 宮館을 파하고 가난한 백성들에게 곡식의 종자와 양식을 빌려주게 함. | ||
43 | ◈張安世를 衛將軍으로 삼아 모든 군대를 다 소속시키고, 霍禹를 大司馬로 삼고 그의 주둔하는 군대를 해산함. | ||
45 | ◈廷尉史인 路温舒의 건의로 廷尉平을 두어 옥사를 공평히 처리함. | ||
50 | ◈侍郞 鄭吉이 車師를 격파하고 그 땅에서 둔전함. | ||
B.C.66乙卯年 | 漢 宣帝 地節 4 | 50 | ◈황제가 외조모 王媼에게 博平君이란 호칭을 하사함. |
51 | ◈詔令을 내려 조부모와 부모의 喪이 있는 자는 繇役(요역)을 시키지 말게 함. | ||
52 | ◈詔令을 내려 가족이 가족을 숨긴 것을 治罪하지 말게 함. ◈霍氏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죄를 지어 죽임을 당하고 삼족이 멸하였으며, 황후 霍氏는 폐위됨. | ||
B.C.66乙卯年 | 漢 宣帝 地節 4 | 61 | ◈詔令을 내려 소금 값을 낮추고 郡國으로 하여금 해마다 감옥에 갇혀있는 죄수들 중에 볼기를 맞아 죽은 자를 보고해서 考課의 殿最를 정하게 함. ◈北海太守 朱邑이 잘 다스려 大司農으로 삼음. |
62 | ◈龔遂를 水衡都尉로 삼아 渤海 지방의 도적을 다스림. | ||
B.C.65丙辰年 | 漢 宣帝 元康 1 | 64 | ◈황제의 壽陵인 杜陵을 만듦. |
65 | ◈悼考를 추존하여 皇考라 하고 寢廟를 세움. | ||
67 | ◈청렴하다는 명성이 있던 京兆尹 趙廣漢을 죽임. | ||
69 | ◈少府 宋疇를 좌천하여 泗水王 太傅로 삼음. | ||
70 | ◈諫大夫 蕭望之를 平原太守로 삼았다가, 다시 불러들여 守少府로 삼음. ◈東海太守 尹翁歸가 잘 다스려 右扶風太守로 삼음. | ||
72 | ◈莎車가 배반하므로 衛候 馮奉世가 皇命을 사칭하고 여러 나라의 군대를 징발하여 격파하니, 풍봉세를 光祿大夫로 삼음. | ||
B.C.64丁巳年 | 漢 宣帝 元康 2 | 74 | ◈倢伃 王氏를 세워 황후로 삼음. ◈二千石에게 명하여 관속 중에 獄事를 공평하게 다스리지 않는 자를 살피게 하고, 郡國에 疫病을 앓는 자는 금년의 조세를 내지 말게 함. |
75 | ◈백성들의 避諱의 불편함 때문에 황제가 이름을 詢으로 바꿈. ◈匈奴가 車師에서 屯田하는 자들을 소요시키므로 鄭吉에게 명하여 다시 渠犁에 주둔하게 함. | ||
79 | ◈蕭望之를 左馮翊太守로 삼음. | ||
B.C.63戊午年 | 漢 宣帝 元康 3 | 80 | ◈昌邑王 劉賀를 봉하여 海昏侯로 삼음. |
81 | ◈丙吉 등을 봉하여 列侯로 삼고, 옛날에 황제를 도와준 故人과 阿保한 공이 있는 자에게 차등을 두어 물건을 하사함. | ||
84 | ◈아들 劉欽을 세워 淮陽王으로 삼음. ◈疏廣과 疏受가 致仕를 청하므로 허락하고 황금을 하사함. | ||
87 | ◈潁川太守 黃霸를 守京兆尹으로 삼았는데, 죄에 걸려 다시 영천태수로 좌천시킴. | ||
B.C.62己未年 | 漢 宣帝 元康 4 | 89 | ◈ 詔令을 내려 나이 80세 이상은 무고하거나 남을 살상한 경우가 아니면 죄에 걸리지 않게 함. |
B.C.62己未年 | 漢 宣帝 元康 4 | 89 | ◈右扶風太守 尹翁歸 사망. |
90 | ◈高祖의 공신의 자손으로서 侯를 잃은 자를 찾아내어 황금을 하사하고, 집의 부역을 면제하게 함. ◈大司馬 衛將軍 富平侯 張安世 사망. | ||
91 | ◈韋玄成을 河南太守로 삼음. ◈光祿大夫 義渠安國을 보내어 서북변을 순행하게 하였는데, 이로 인해 羌族이 漢나라 영내로 들어옴. | ||
B.C.61庚申年 | 漢 宣帝 神爵 1 | 95 | ◈황제가 甘泉에 가서 泰畤에 郊祭를 지내고, 河東에 가서 后土에 제사하고, 諫大夫 王褒를 보내어 金馬와 碧雞의 神을 구하게 함. |
101 | ◈諫大夫 王吉이 許氏, 史氏, 王氏 등의 비판하였는데, 황제가 받아들이지 않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감. | ||
104 | ◈先零의 羌族인 楊玉이 배반하자, 後將軍 趙充國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공격하게 함. | ||
105 | ◈趙充國이 병력을 이끌고 배반한 羌族을 공격하니, 배반한 강족인 䍐과 幵이 항복함. 上이 명하여 다시 장군 辛武賢 등을 보내어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이들을 공격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詔令을 내려 군대를 해산하고 조충국을 남겨두어 湟中에서 屯田을 하게 함. | ||
123 | ◈張敞이 膠東國을 잘 다스려 京兆尹으로 삼음. | ||
B.C.60辛酉年 | 漢 宣帝 神爵 2 | 127 | ◈趙充國이 군대를 정돈하여 돌아왔는데, 가을에 羌族이 楊玉을 斬首하고 항복하자, 金城屬國을 설치하여 거처하게 함. |
129 | ◈강직한 관리인 司隸校尉 蓋寬饒(합관요)가 황제를 비난한 죄에 걸려 자살함. | ||
132 | ◈匈奴의 虛閭權渠單于가 죽자 握衍朐鞮單于가 즉위하니, 日逐王 先賢撣이 항복해오므로 鄭吉을 西域都護로 삼음. | ||
134 | ◈烏孫의 昆彌인 翁歸靡가 죽자, 狂王 泥靡가 즉위함. | ||
B.C.59壬戌年 | 漢 宣帝 神爵 3 | 135 | ◈丞相 高平侯 魏相 사망. ◈丙吉을 丞相으로 삼음. |
136 | ◈蕭望之를 御史大夫로 삼음. ◈낮은 관리들의 봉급을 올려줌. | ||
137 | ◈東郡太守 韓延壽가 경내를 잘 다스려 左馮翊으로 삼음. | ||
B.C.58癸亥年 | 漢 宣帝 神爵 4 | 141 | ◈潁川太守 黃霸에게 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함. ◈酷吏 河南太守 嚴延年이 棄市刑을 받음. |
B.C.57甲子年 | 漢 宣帝 五鳳 1 | 144 | ◈握衍朐鞮單于가 呼韓邪單于에게 죽임을 당하자 匈奴가 어지러워 다섯 單于(呼韓邪單于, 屠耆單于, 呼揭單于, 車犂單于, 烏藉單于)가 다투어 즉위함. |
146 | ◈蕭望之가 左馮翊 韓延壽에게 협박당했다는 이유로 상주하여 한연수를 죽임. | ||
B.C.56乙丑年 | 漢 宣帝 五鳳 2 | 147 | ◈황제가 총애하는 승상 丙吉을 蕭望之가 비난하자 소망지를 太子太傅로 좌천시킴. |
148 | ◈匈奴의 呼韓邪單于가 屠耆單于를 공격하여 죽이니, 呼屠吾斯가 스스로 서서 郅支單于라 함. | ||
149 | ◈강직하고 청렴한 관리인 光祿勳 平通侯 楊惲을 면직하여 庶人으로 삼음. | ||
B.C.55丙寅年 | 漢 宣帝 五鳳 3 | 151 | ◈丞相 博陽侯 丙吉 사망. |
153 | ◈黃霸를 丞相으로 삼음. | ||
156 | ◈天下의 口錢을 줄임. | ||
157 | ◈西河와 北地에 屬國을 설치하여 항복한 匈奴들을 살게 함. | ||
153 | ◈黃霸를 丞相으로 삼음. | ||
156 | ◈天下의 口錢을 줄임. | ||
157 | ◈西河와 北地에 屬國을 설치하여 항복한 匈奴들을 살게 함. | ||
B.C.54丁卯年 | 漢 宣帝 五鳳 4 | 157 | ◈匈奴의 呼韓邪單于가 臣을 칭하고 아우를 보내와 모시게 하니, 변경에 수자리 사는 병사 10분의 2를 줄임. ◈大司農 中丞 耿壽昌의 건의로 三輔와 가까운 郡의 곡식을 매입하여 京師에 공급하고, 常平倉을 설치함. |
158 | ◈대역무도죄로 平通侯 楊惲을 죽임. | ||
162 | ◈匈奴의 郅支單于가 呼韓邪單于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單于庭에 도읍함. | ||
B.C.53戊辰年 | 漢 宣帝 甘露 1 | 162 | ◈楊惲의 일과 연좌되어 京兆尹 張敞을 파면하였다가, 다시 冀州刺史로 삼음. |
164 | ◈韋玄成을 淮陽國의 中尉로 삼음. | ||
167 | ◈呼韓邪單于와 郅支單于가 모두 아들을 보내 황제를 모시게 함. | ||
169 | ◈烏孫國이 혼란하므로 사신을 보내 元貴靡를 세워 大昆彌로 삼고 烏就屠를 小昆彌로 나누어 세움. | ||
B.C.52己巳年 | 漢 宣帝 甘露 2 | 169 | ◈丁口稅인 算賦를 30錢 감함. |
170 | ◈珠厓郡이 배반하여 군대를 보내 공격함. ◈營平侯 趙充國 사망◈匈奴의 呼韓邪單于 조회할 것을 청하자, 蕭望之의 의견에 따라 單于의 지위를 제후왕의 위에 있게 하고, 贊謁할 적에 臣이라 칭하고 이름을 부르지 말게 함. | ||
B.C.51庚午年 | 漢 宣帝 甘露 3 | 174 | ◈匈奴의 呼韓邪單于가 조회하러 왔다가 돌아가 사막의 남쪽 변방 아래에 거주함. |
176 | ◈功臣들(張安世, 韓增, 趙充國, 魏相, 丙吉, 杜延年, 劉德, 梁丘賀, 蕭望之, 蘇武 등)의 畫像을 麒麟閣에 그림. | ||
177 | ◈丞相 黃霸가 죽자, 于定國을 丞相으로 삼음. ◈여러 儒者들에게 명하여 五經의 異同을 石渠閣에서 講하게 함. | ||
178 | ◈皇孫 劉驁가 탄생함. | ||
179 | ◈烏孫公主(楚主)가 돌아옴. | ||
B.C.50辛未年 | 漢 宣帝 甘露 4 | 180 | ◈呼韓邪單于와 郅支單于가 모두 使臣을 보내 조회하고 공물을 바침. |
B.C.49壬申年 | 漢 宣帝 黃龍 1 | 180 | ◈匈奴의 呼韓邪單于가 와서 조회함. 郅支單于가 堅昆으로 옮겨 거주함. |
181 | ◈皇帝의 병세가 위독하므로 史高를 大司馬 車騎將軍으로 삼고 蕭望之를 前將軍 光祿勳으로 삼고 周堪을 光祿大夫로 삼아, 遺詔를 받아 정사를 보필하고 尙書의 일을 겸하게 함. | ||
182 | ◈宣帝 사망. | ||
183 | ◈太子 奭이 즉위하여 皇太后를 높여 太皇太后라 하고, 皇后를 皇太后라 함. | ||
B.C.48癸酉年 | 漢 元帝初元 1 | 184 | ◈宣帝를 杜陵에 장례함. ◈倢伃 王氏를 세워 皇后로 삼음. ◈公田과 동산으로써 가난한 백성들을 진작하여 생업을 갖게 하고 곡식의 종자와 양식을 주거나 대여해줌. ◈큰 疫病이 유행하자, 詔令을 내려 황제의 음식을 줄이고 樂府의 樂工 인원을 줄이고 동산의 말을 줄여서 궁핍한 자들을 구휼하게 함. |
B.C.48癸酉年 | 漢 元帝初元 1 | 185 | ◈貢禹를 諫大夫로 삼고, 그의 건의에 따라 宮館 중에 황제의 행차가 드문 곳을 파하였으며, 곡식을 먹이는 말과 肉食하는 짐승을 줄임. |
187 | ◈戊己校尉를 설치하여 車師의 옛 땅에 屯田을 함. | ||
B.C.47甲戌年 | 漢 元帝初元 2 | 188 | ◈황제가 甘泉에 가서 泰畤에서 郊祭를 지냄. ◈中書令 弘恭과 僕射 石顯, 외척 史高가 손을 잡고 蕭望之와 周堪 및 宗正 劉更生을 탄핵하여 下獄하고 모두 면직하여 庶人으로 삼게 함. |
193 | ◈黃門에서 기르는 애완동물인 개와 말을 파하고 禁苑을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주었으며, 直言하고 極諫하는 선비를 천거하게 함. ◈아들 劉驁를 세워 皇太子로 삼음. ◈蕭望之에게 關內侯의 관작과 給事中을 하사하여 초하루와 보름에 조회하게 함. | ||
194 | ◈弘恭과 石顯이 탄핵하여 周堪과 劉更生을 中郞으로 삼았는데, 얼마 후에 감옥에 갇혀 면직되었고, 蕭望之는 자살함. 홍공이 죽자 石顯을 中書令으로 삼음. | ||
B.C.46乙亥年 | 漢 元帝初元 3 | 198 | ◈珠厓郡에서 반란이 일어나 진압하지 못하자 주애군을 없앰. |
201 | ◈甘泉宮과 建章宮의 호위하는 병사를 파하여 농사짓게 하고, 百官은 각각 비용을 줄이는 일을 아뢰게 함. | ||
202 | ◈周堪을 光祿勳으로 삼고, 張猛을 光祿大夫 給事中으로 삼음. | ||
B.C.45丙子年 | 漢 元帝初元 4 | 202 | ◈황제가 河東에 가서 后土에 제사함. |
B.C.44丁丑年 | 漢 元帝初元 5 | 202 | ◈周子南君을 周承休侯로 삼음. |
203 | ◈황제가 雍 땅에 가서 五畤에 제사함. ◈貢禹를 御史大夫로 삼고 그의 건의로 鹽鐵官과 常平倉 및 博士의 弟子 인원을 없앰. | ||
204 | ◈匈奴의 郅支單于가 漢나라 使者를 죽이고 서쪽 康居로 이동함. | ||
B.C.43戊寅年 | 漢 元帝永光 1 | 205 | ◈泰畤에서 郊祭를 지냄. |
206 | ◈詔令을 내려 질박하고 돈후하고 겸손하고 사양하고 훌륭한 행실이 있는 자를 천거하게 함. ◈上이 宗廟에서 새로운 술[新酎]로 제사함. | ||
207 | ◈丞相 于定國과 御史大夫 薛廣德이 파면됨. | ||
208 | ◈城門校尉 諸葛豐이 죄가 있어 면직하고, 周堪을 좌천하여 河東太守로 삼았으며, 張猛을 좌천하여 槐里令으로 삼음. | ||
215 | ◈石顯을 비방한 죄로 賈捐之를 棄市하고 楊興을 城旦에 처함. | ||
216 | ◈匈奴의 呼韓邪單于가 북쪽의 王庭으로 돌아감. | ||
B.C.42己卯年 | 漢 元帝永光 2 | 217 | ◈韋玄成을 丞相으로 삼음. ◈匡衡을 光祿大夫로 삼음. |
221 | ◈隴西에 있는 羌族이 배반하자, 右將軍 馮奉世를 보내어 공격하게 하여 羌族을 大破함. | ||
B.C.41庚辰年 | 漢 元帝永光 3 | 224 | ◈아들 劉康을 세워 濟陽王으로 삼음. ◈鹽鐵官을 다시 회복하고 博士의 弟子 1,000명을 둠. |
B.C.40辛巳年 | 漢 元帝永光 4 | 225 | ◈周堪을 光祿大夫로 삼고 張猛을 太中大夫로 삼았는데, 石顯이 장맹을 참소하여 장맹을 자살하게 함. |
226 | ◈郡國에 있는 祖宗의 祠堂을 파함. | ||
227 | ◈初陵을 만듦. | ||
B.C.39壬午年 | 漢 元帝永光 5 | 228 229 | ◈韋玄成의 의논에 따라 太上皇과 孝惠皇帝의 寢과 廟, 園을 헐음. ◈匡衡을 太子少傅로 삼음. |
B.C.38癸未年 | 漢 元帝建昭 1 | 233 | ◈孝文太后의 寢과 祠堂, 園을 없앰. |
B.C.37甲申年 | 漢 元帝建昭 2 | 233 | ◈아들 劉興을 세워 信都王으로 삼음. ◈≪周易≫에 능한 京房을 총애하여 그의 의견에 따라 弟子 중에 공적을 상고하여 관리를 考課하는 일을 주관하게 함. 石顯과 五鹿充宗이 그를 탄핵하여 죽임. |
242 | ◈石顯을 비난한 御史中丞 陳咸을 下獄하여 머리를 깎고 城旦으로 삼음. | ||
245 | ◈太皇太后 上官氏 사망. | ||
B.C.36乙酉年 | 漢 元帝建昭 3 | 246 | ◈丞相 韋玄成이 사망하자 匡衡을 丞相으로 삼음. ◈西域副校尉 陳湯이 制命을 사칭하고 군대를 징발하여 都護 甘延壽와 함께 匈奴의 郅支單于를 康居에서 습격하여 목을 벰. |
B.C.35丙戌年 | 漢 元帝建昭 4 | 251 | ◈郅支單于의 首級을 京師로 옮겨 와서 稾街에 10일 동안 매달아놓음. |
B.C.34丁亥年 | 漢 元帝建昭 5 | 252 | ◈여러 寢, 廟, 園을 다시 회복함. |
253 | ◈濟陽王 劉康을 옮겨 山陽王으로 삼음. | ||
B.C.33戊子年 | 漢 元帝竟寧 1 | 254 | ◈匈奴의 呼韓邪單于가 와서 조회하고 중국의 변방을 담당할 것을 청함. |
258 | ◈張譚을 御史大夫로 삼음. | ||
260 | ◈河南太守 召信臣이 잘 다스려 少府로 삼음. | ||
261 | ◈石顯과 匡衡이 반대하였으나 劉向의 상소로 甘延壽를 봉하여 義成侯로 삼고, 陳湯에게 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함. | ||
266 | ◈元帝 사망. ◈여러 寢과 廟, 園을 다시 파함. | ||
267 | ◈太子 劉驁가 즉위함. | ||
273 | ◈皇太后를 높여 太皇太后라 하고, 皇后를 높여 皇太后라 함. ◈元舅인 王鳳을 大司馬 大將軍으로 삼아 尙書의 일을 겸하게 함. ◈元帝를 渭陵에 장례함. | ||
B.C.32己丑年 | 漢 成帝建始 1 | 273 | ◈石顯이 죄를 짓고 파면되어 故郡으로 돌아갔는데, 도중에서 죽음. 五鹿充宗은 玄菟太守로 좌천됨. 司隸校尉 王尊이 匡衡과 張譚을 탄핵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음. |
275 | ◈외숙인 王崇을 봉하여 安成侯로 삼고, 王譚과 王商, 王立과 王根, 王逢時에게 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함. | ||
276 | ◈南郊와 北郊를 만들고 甘泉과 汾陰의 사당을 파함. | ||
B.C.31庚寅年 | 漢 成帝建始 2 | 277 | ◈雍縣의 五畤와 陳寶祠를 파함. |
278 | ◈황제가 직접 南郊에서 天神에게 제사하고 천하의 賦錢 중에 算賦 40錢을 줄임. | ||
B.C.31庚寅年 | 漢 成帝建始 2 | 278 | ◈渭城에 있는 延陵亭部를 初陵으로 만듦. ◈北郊에서 后土에게 제사함. |
279 | ◈北郊에서 后土에게 제사함. ◈皇后 許氏를 세움. | ||
281 | ◈匈奴의 呼韓邪單于가 죽자, 아들 復株累若鞮單于가 즉위함. | ||
B.C.30辛卯年 | 漢 成帝建始 3 | 282 | ◈천하의 徒役하는 자들을 사면함. |
283 | ◈홍수가 나서 京師의 백성들이 ‘큰 홍수가 닥쳐올 것이다.’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림. | ||
284 | ◈策書를 내려 大司馬 車騎將軍 許嘉를 면직함. ◈밤에 未央宮 대궐 안에 지진이 일어나니, 詔令을 내려 直言하고 極諫하는 선비를 천거하게 함. | ||
285 | ◈丞相 樂安侯 匡衡이 죄를 짓고서 면직하여 庶人이 됨. | ||
B.C.29壬辰年 | 漢 成帝建始 4 | 285 | ◈中書의 환관을 파하고 처음으로 尙書 다섯 명을 둠. |
286 | ◈王商을 丞相으로 삼음. ◈王鳳이 집권하자, 자신을 옹호하기 위해 直言하고 極諫하는 선비를 불러서 白虎殿에 나와 對策을 하게 함. | ||
290 | ◈황하에 큰 홍수가 남. | ||
292 | ◈王鳳의 천거로 王尊을 京兆尹으로 삼으니, 남산의 도적들이 사라짐. ◈大將軍 王鳳이 건의하여 陳湯을 從事中郞으로 삼음. | ||
B.C.28癸巳年 | 漢 成帝河平 1 | 296 | ◈王延世를 河隄使者로 삼아서 황하가 터진 것을 막게 함. |
298 | ◈太上皇의 寢과 廟, 園을 복구함. | ||
299 | ◈死刑을 경감하고 律令을 줄임. | ||
B.C.27甲午年 | 漢 成帝河平 2 | 300 | ◈匈奴가 사신을 보내어 조회하고 공물을 바침. |
302 | ◈山陽王 劉康의 封地를 옮겨 定陶王으로 삼음. ◈王譚을 平阿侯로 삼고 王商을 成都侯, 王立을 紅陽侯, 王根을 曲陽侯, 王逢時를 高平侯로 삼으니, 이들 다섯 사람이 같은 날 봉해졌으므로 세속에서는 이들을 五侯라 칭함. | ||
303 | ◈御史大夫 張忠의 탄핵으로 京兆尹 王尊을 면직하였는데, 다시 그를 徐州刺史로 삼음. | ||
305 | ◈西夷(夜郎王 興, 鉤町王 禹, 漏臥侯 兪)가 서로 공격하므로, 陳立을 牂柯太守로 삼아 토벌하여 평정함. | ||
B.C.26乙未年 | 漢 成帝河平 3 | 308 | ◈楚王 劉囂가 와서 조회함. |
309 | ◈謁者인 陳農으로 하여금 서적을 天下에서 구하게 하고 光祿大夫 劉向에게 교정하게 함. | ||
310 | ◈황하가 다시 터졌으므로 다시 王延世에게 명하여 이를 막게 함. | ||
B.C.25丙申年 | 漢 成帝河平 4 | 310 | ◈匈奴의 單于가 와서 조회함. |
311 | ◈王鳳이 사람을 시켜 丞相 樂昌侯 王商을 탄핵하게 하여 그의 印綬를 거두게 하니, 왕상이 사망함. | ||
312 | ◈張禹를 丞相으로 삼음. | ||
313 | ◈罽賓이 사신을 보내 와서 공물을 바침. | ||
B.C.24丁酉年 | 漢 成帝陽朔 1 | 316324 | ◈京兆尹 王章을 하옥하여 죽임. ◈能吏인 薛宣을 左馮翊으로 삼음. |
B.C.23戊戌年 | 漢 成帝陽朔 2 | 325 | ◈王音을 御史大夫로 삼음. 劉向이 상서하여 외척의 위험을 아룀. |
330 | ◈定陶王 劉康 사망. ◈信都王 劉興의 封地를 옮겨 中山王으로 삼음. | ||
B.C.22己亥年 | 漢 成帝陽朔 3 | 331 | ◈潁川에 있는 鐵官의 무리들이 난을 일으켰는데, 토벌하여 평정함. ◈大司馬大將軍 王鳳이 사망하자, 9월에 王音을 大司馬車騎將軍으로 삼고 王譚을 명하여 特進의 자리에 있게 해서 城門의 군대를 거느리게 함. |
B.C.21庚子年 | 漢 成帝陽朔 4 | 333 | ◈王駿을 京兆尹으로 삼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