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 時
에 帝數出遊觀
하고 增廣聲樂
하니 太子家令譙周
가 諫曰
注+譙, 姓也. 昔王莽之敗
에 豪傑竝起
하여 以爭神器
나
然莫不快情恣欲하여 怠於爲善이러니 世祖初入河北에 馮異勸之曰 當行人所不能爲者라한대
遂理冤獄하고 崇節儉하니 北州歌嘆하여 聲布四遠이라
於是에 鄧禹自南陽追之하고 吳漢寇恂이 擧兵助之하고 其餘望風慕德하고 輿病齎棺하며 襁負而至를 不可勝數라
故能以弱爲彊
하여 而成帝業
하니이다 在洛陽
에 嘗欲小出
이러니 銚期進諫
한대 卽時還車
注+銚期傳 “光武嘗與期門近出, 期頓首車前曰 ‘臣聞古今之 變生不意, 誠不願陛下微行數出.’ 帝爲之回輿而還.”하니이다
及潁川盜起에 寇恂이 請身往臨賊한대 聞言卽行하니 故로 非急務면 欲小出不敢하고
至於急務하여는 欲自安不爲하니 帝者之欲善也如此라 傳曰 百姓이 不徒附라하니 誠以德先之也하다
今漢遭厄運
하여 天下三分
하니 雄哲之士 思望之時也
注+言思望賢主混一.니이다
臣願陛下는 復行人所不能爲者하여 以副人望하소서 且承事宗廟는 所以率民尊上也라
今四時之祀를 不臨하고 而池苑之觀을 仍出하시니 臣所不安也로이다
夫憂責在身者는 不暇盡樂하나니 願省減樂官後宮의 凡所增造하여 以成先帝之志하소서하니 不聽하다
目
[
目]
孫權의
長女 孫魯班은
全琮에게 시집을 갔고, 작은딸
孫小虎는
朱據에게 시집을 갔다.
注+두 딸은 의 소생이다. 全公主(
孫魯班)는
太子의 어머니
王夫人과 틈이 있었는데, 손권이 병으로 앓아눕자 태자를 보내어
長沙桓王(
孫策)의 사당에 가서 기도하게 하였다.
注+孫權이 建業에 도읍하고, 형인 長沙桓王 孫策의 사당을 朱雀橋 남쪽에 세웠다.
太子妃의 숙부 張休가 장사환왕의 사당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太子를 맞이하여 집안에 들르게 하였다. 전공주가 이를 틈타 말하기를 “태자는 장사환왕의 사당에 가지 않고 멋대로 태자비의 집에 가서 계책을 논의하고 있고,
왕부인은 폐하가 병을 앓아누워 있는 것을 보고 기뻐하는 기색이 있습니다.”라고 하자, 손권이 이로 말미암아 노여워하니, 왕부인은 근심하다 죽었고, 태자의 총애는 날로 줄어들었다.
孫霸의 무리인 楊笁과 全寄가 따라서 태자를 비방하자 손권이 그들에게 현혹되었는데, 陸遜이 간언하기를 “正統(태자)과 藩臣(손패)은 마땅히 총애와 질록에 차등이 있어야 하니, 피차간에 제자리를 얻게 되면 上下가 편안함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서너 차례 글을 올려서 위급하고 절실하게 실정을 말하였는데, 손권이 기뻐하지 않았다.
目
[目] 太常 顧譚은 陸遜의 생질인데,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국가를 소유하는 이는 반드시 嫡子와 庶子의 단초를 밝히고,
높은 자와 낮은 자의
禮를 달리하여
高下에 차별이 있게 하고, 등급을 크게 하니, 이렇게 되면 형제간의 은혜가 온전해지고, 윗자리를 엿보는 욕망이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注+邈은 멀다는 뜻이다.
신의 진언은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태자와 魯王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孫霸는 고담을 싫어하고 全琮도 또한 그를 싫어하여 서로 함께 참소를 하니, 吳主가 고담을 交州로 귀양 보냈다.
太子太傅 吾粲이 청하여 魯王으로 하여금 夏口에 鎭守하게 하고 楊笁 등을 내쫓아 京師에 있지 못하게 하고,
또 자주 육손에게 소식을 말해주었다.
注+吾粲은 姓名이다. 消는 점점 적어지고 점점 사라진다는 뜻이다. 息은 점점 생겨나고 점점 자라난다는 뜻이다. 손패와 양축이 오찬을 참소하자
吳主가 노하여 오찬을 주살하였다.
目
[
目] 이때에 황제(
後主)가 자주 나가서 유람을 하고 악공과 가인의 수를 늘리니,
太子家令 譙周가 다음과 같이 간언하였다.
注+譙는 姓이다. “옛날에
王莽이 패배했을 때에 호걸들이 아울러 일어나서
神器(황제의 자리)를 다투었으나,
자기 마음에 내키는 대로 하고 욕심을 부리면서 선행을 하는 데 태만하지 않은 자가 없었습니다. 世祖(光武帝)가 처음 河北으로 들어갔을 때에 馮異가 세조에게 권하기를, ‘마땅히 남들이 시행하지 못한 것을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원통한 獄事를 다스리고 절약과 검소함을 숭상하니, 북쪽 지방에서 노래하며 감탄하여 명성이 사방 멀리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이에 鄧禹가 南陽에서 세조를 따라왔고 吳漢과 寇恂이 병사를 동원하여 그를 도왔으며, 그 나머지 사람의 경우 풍모를 바라보고 공덕을 흠모하여 병든 몸을 가마에 싣고 棺을 가지고 오기도 하였으며, 어린아이를 강보에 싸서 업고 온 사람들의 경우는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약한 것을 강하게 하여
帝業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세조가〉
洛陽에 있을 때에 한번
微行하려 하였는데,
銚期가 나서서 간언하자 즉시 수레를 돌려 돌아갔으며,
注+≪後漢書≫ 〈銚期傳〉에 “光武帝가 銚期와 함께 성문 가까운 곳에 나아갔을 적에, 요기가 수레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말하기를, ‘신이 고금의 경계를 들으니, 변고는 뜻밖에 생긴다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폐하께서는 微行을 자주 나가지 않기를 바랍니다.’라고 하니, 광무제가 이 때문에 수레를 돌려서 돌아왔다.” 하였다.
潁川에서 賊들이 일어났을 때에 구순이 〈세조가〉 직접 나가서 적들을 대적해야 한다고 청하자, 그 말을 듣고서 즉시 나갔습니다. 그러므로 〈세조는〉 급한 일이 아니면 微行을 나가려는 생각을 감히 하지 않았고,
급한 일에는 스스로 편안하려고 하지 않았으니, 光武帝께서 선행을 하려고 한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옛 기록에, ‘百姓이 공연히 귀의하지 않는다.’라고 하니, 진실로 덕을 우선하는 것입니다.
지금
漢나라가 액운을 만나서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으니, 포부와 식견을 가진 선비들이
賢主가 통일하기를 기대하는 때입니다.
注+현명한 군주가 통일하기를 기대함을 말한 것이다.
臣은 바라건대 폐하께서는 다시 남들이 시행하지 못한 것을 시행하셔서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시기 바랍니다. 또 종묘를 받들어 섬기는 것은 백성들을 이끌고 군주를 높이는 길입니다.
지금 四時의 제사에 친림하지 않고 연못과 동산의 유람을 빈번히 나가시니, 신이 편안하지 못한 것입니다.
천하의 통치를 근심하고 책임지는 자는 향락을 다할 겨를이 없으니, 樂官과 後宮을 증원한 것을 줄여서 先帝의 뜻을 이루소서.”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