目
遂守便宜上疏
하니 報聽
注+報基聽行其策.이라 於是
에 四面合圍
하여 塹壘甚峻
하고 擊欽異
하여 皆破走之
하니
秋
에 吳孫綝
이 大發卒
하여 出屯鑊里
注+鑊里, 當在巢縣界.하고 復遣異等
하여 解壽春之圍
어늘 魏人又擊破之
하니
異走歸綝한대 綝使異更死戰하니 異以士卒乏食으로 不從이어늘 綝怒斬異而還하니
綝旣不能拔出誕하고 而喪敗士衆에 自戮名將하니 吳人咸怨이러라
昭乃縱反間言호되 吳救方至로되 大軍乏食하니 勢不能久라하거늘 誕益寛恣食이러니 俄而乏糧하고 外救不至하니
蔣班焦彛
는 誕謀主也
라 言於誕曰 宜及衆心尙固
하여 幷力決死
하여 攻其一面
이면 猶有可全
이니 空坐守死
는 無爲也
注+言不若決死而求生, 無爲坐守而待斃.니이다
誕不聽하고 欲殺之한대 班彛踰城出降하고 全懌兄子輝等이 得罪於吳하여 奔魏하니
司馬昭作輝書
하여 告懌等說
호되 吳中
에 怒懌等不能拔壽春城
注+言不能拔壽春之衆於重圍也.하여
欲盡誅諸將家라 故逃來歸命이라하니 懌等이 遂帥其衆出降하다
目
是時에 維數出兵하니 蜀人愁苦라 譙周가 作仇國論하여 諷之曰 或問往古에 能以弱勝彊者는 其術何如오
曰 吾聞之호니 處大無患者는 常多慢이요 處小有憂者는 常思善이라
多慢則生亂
하고 思善則生治
가 理之常也
라 故周文養民
하여 以少取多
하고 句踐恤衆
하여 以弱斃彊
하니 此其術也
注+文王治岐, 由方百里起, 三分天下有其二, 所謂以少取多也. 句踐歸越, 弔死問疾, 十年生聚, 十年敎訓, 以弱越斃強吳.라
或曰 曩者에 項彊漢弱하니 約分鴻溝하여 各歸息民이어늘
張良이 以爲民志旣定하면 則難動也라하여 率兵追羽하여 終斃項氏하니 豈必由文王之事乎아
曰商周之際
에 王侯世尊
하고 君臣久固
하니 深根者
는 難抜
이요 據固者
는 難遷
注+世尊, 言世世居尊位也.이라
當此之時하여 雖漢祖나 安能杖劒鞭馬取天下乎아 及秦罷侯置守之後에 民疲秦役하여 天下土崩하니
於是
에 豪強竝爭
하여 虎裂狼分
하니 疾搏者
는 獲多
하고 遲後者
는 見呑
注+疾, 急也. 搏, 手擊也.이라 今我與彼
가 皆傳國易世矣
라
旣非秦末鼎沸之時요 實有六國竝據之勢라 故可爲文王이요 難爲漢祖라
夫民之疲勞하면 則騷擾之兆生하고 上慢下暴하면 則瓦解之形起하나니
諺曰 射幸數跌
이 不如審發
注+數, 頻也. 跌, 差也. 射數差而不中, 不如審而後發也.이라하니 是故
로 智者
는 不爲小利移目
하며 不爲意似改步
하여 時可而後動
하고 數合而後擧
注+爲, 去聲.라
故湯武之師
가 不再戰而克
하니 誠重民勞而度時審也
注+湯伐桀, 鳴條一戰, 而革夏命, 武王伐紂, 一戎衣而天下大定.라 如遂極武黷征
하여 不幸遇難
이면 雖有智者
나 將不能謀之矣
리라
目
[
目] 〈
王基가〉 마침내 수비하면서 편의를 따라 상소를 하니, 회답하여 그 계책을 따라주었다.
注+〈“報聽”은〉 王基에게 회답하여 그 계책을 행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에 사면에서 포위하여 참호와 보루를 매우 견고하게 하고
文欽과
朱異를 공격하여 모두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가을에
吳나라
孫綝이 크게 사졸들을 동원하여
鑊里로 나가서 주둔하고
注+鑊里는 마땅히 巢縣 경계에 있다. 다시 주이 등을 파견하여
壽春의 포위를 풀게 하였는데,
魏나라 군사들이 또다시 주이를 격파하였다.
주이가 도주하여 손침에게 돌아갔는데 손침이 주이에게 다시 결사적으로 싸우도록 하였다. 주이는 사졸들의 군량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명을 따르지 않았는데, 손침이 성을 내어 주이를 참수하고 돌아갔다.
손침은 이미 제갈탄을 구출해내지 못했고 사졸들을 잃은 데다 자신이 직접 名將을 죽이니, 吳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司馬昭는 反間(적군의 간첩을 역이용함)을 써서 말하기를 “吳나라 구원병이 장차 이를 것인데 우리 大軍은 양식이 부족하니 형세상 오래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諸葛誕은 더욱 느긋해져 군량을 마음대로 썼는데, 얼마 뒤에 군량이 부족해지고 외부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蔣班과
焦彛는 제갈탄의
謀主였는데 제갈탄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軍心이 아직 견고할 때에 힘을 합쳐 결사적으로 싸워 한 방면을 공격하면 그래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지키다가 죽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
注+〈“幷力決死……無爲也”는〉 결사적으로 싸워서 살기를 구하는 것만 못하니, 앉아 지키면서 죽기를 기다려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제갈탄은 따르지 않고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장반과 초이는 성을 넘어 나가서 항복하였다. 全懌의 조카 全輝 등이 吳나라에서 죄를 얻어 魏나라로 도주하였다.
사마소는 전휘에게 편지를 쓰게 하여 전역 등에게 말하기를 “
吳나라에서는 전역 등이
壽春城을 구원해내지 못한 것에 노하여
注+〈“不能拔壽春城”은〉 겹겹의 포위망에서 壽春의 무리들을 구해낼 수 없음을 말한다.
여러 장군의 가족들을 모두 주살하려 하기 때문에 도망 와서 魏나라에 귀순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전역 등이 마침내 그 무리들을 이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目
[目] 이때에 姜維가 자주 군대를 출동하니, 蜀漢 사람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였다. 譙周는 ≪仇國論≫을 지어 다음과 같이 풍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과거에 약한 상황에서 강한 자를 이긴 자는 그 술법이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들으니, 대국에 살면서 환난이 없는 자는 늘 교만함이 많고, 소국에 살면서 우환이 있는 자는 늘 선행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교만함이 많으면 어지러움이 생기고 선행을 생각하면 다스림이 생겨나는 것은 항상적인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周나라
文王은 백성을 길러 적은 것으로 많음을 취하고,
句踐은 민중을 구휼하여 약함으로 강함을 멸망시켰으니 이것이 그 술법입니다.’
注+文王이 岐山을 다스릴 적에 사방 1백 리 땅을 가지고 일어나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였으니 이른바 적은 것으로 많음을 취한 것이다. 句踐이 越나라로 귀국하여 죽은 이를 조문하며 병자를 위문하여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며 저축을 하고 10년 동안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약한 越나라를 가지고 강한 吳나라를 멸망시켰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과거에
項羽가 강하고
漢 高祖(
劉邦)가 약하니,
각각 돌아가 백성을 쉬게 하였는데,
張良은 민심이 안정되고 나면 움직이기가 어렵다고 말하여 병사를 이끌고 항우를 추격하여 마침내 항우를 멸망시켰습니다. 어찌 文王의 고사를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商나라와
周나라 때에
王과
諸侯가 대대로 존귀하고 임금과 신하 관계가 오래도록 견고하였으니 뿌리가 깊은 것은 뽑기 어렵고 견고하게 의탁한 것은 옮기기 어렵습니다.
注+“世尊”은 대물려 높은 지위에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비록 漢 高祖일지라도 어찌 칼을 잡고 말을 채찍질하여 천하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秦나라가 封侯의 제도를 없애고 郡守를 두게 된 뒤에 백성들이 秦나라 부역에 피로하여 천하가 땅이 무너지듯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호걸들이 아울러 다투어 호랑이가 찢고 이리가 쪼개듯이 하니, 빨리 공격하는 자는 많이 얻고, 늦게 뒤처진 자는 병탄되었습니다.
注+疾은 급하다는 뜻이다. 搏은 손으로 때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상대방은 모두 나라를 전하고 세대를 바꿨습니다.
이미 秦나라 말기의 솥에 물이 끓는 듯한 시기가 아니고 실로 六國(戰國時代)의 병립하고 웅거하는 형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왕처럼 할 수 있고 한 고조처럼 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성이 피로하면 소요의 조짐이 생기고, 위가 교만하고 아래가 포악하면 瓦解의 형세가 일어납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활을 쏠 때에 요행을 바라다가 자주 빗나가는 것이 잘 살펴서 발사하는 것만 못하다.」고
注+數은 자주이고, 跌은 차이가 나는 것이니, 〈“射幸數跌 不如審發”은〉 활쏘기에 자주 빗나가서 맞지 않는 것은 잘 살펴서 발사하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하니, 이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작은 이익을 위하여 눈을 돌리지 않으며 겉으로 비슷하나 실제 다른 것을 위하여 계획을 바꾸지 않아서 시기가 가능하게 된 뒤에 움직이고 형세가 합당해진 뒤에 거동합니다.
注+爲(위하다)는 去聲이다.
그러므로
湯王과
武王의 군사가 두 번 싸우지 않고 〈한 번에〉 이겼으니 진실로 백성의 노고를 중시하고 시기를 잘 살펴서 판단하였던 것입니다.
注+湯이 桀을 정벌한 적에 鳴條에서 한 번 전투하여 夏나라의 天命을 바꾸었고, 武王이 紂를 정벌할 적에 한 번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자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만일 마침내 무력을 다 쓰고 정벌을 남용하여 불행히 환난을 만나게 되면 비록 지혜로운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계책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