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資治通鑑綱目(12)

자치통감강목(1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자치통감강목(1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丁丑年(257)
二十年이라
魏甘露二年이요 吳太平二年이라
夏四月 하다
吳主亮親政事하니 大將軍孫綝 表奏 多見難問注+難, 去聲.하고
又科兵子弟十八已下十五已上三千餘人注+科, 程也. 程其長短小大也. 或曰 “科, 當作 音聊, 量度也.”하고 選大將子弟年少有勇力者하여 使將之하여
日於苑中敎習曰 吾立此軍하여 欲與之俱長注+長, 丁丈切.이라하고
數出中書하여 視大帝時舊事하고 問左右侍臣曰 先帝數有特制注+特制, 謂特出上意, 以手詔宣行也.어늘 今大將軍 問事 但令我書可邪注+問事, 猶言奏事, 不言奏者, 自卑挹之意. 書可, 畫可也.
嘗食生梅할새 使黃門至中藏取蜜하니 蜜中 有鼠矢注+中藏, 中藏府也. 蜜, 蜂餹也. 矢, 通作屎. 召問藏吏하니 藏吏叩頭어늘
亮曰 黃門從爾求蜜邪 吏曰 向求 實不敢與注+向求, 謂向者嘗求蜜也.니이다 黃門不服이어늘 亮令破鼠矢하니 矢中燥
因大笑하고 謂左右曰 若矢先在蜜中이면 中外俱濕이니 今外濕裏燥하니 必黃門所爲也라하고 詰之果服하니 左右驚悚하더라
誕素與夏侯玄等으로 友善이라 玄等死하고 王淩毌丘儉 相繼誅滅하니
誕內不自安하여 乃傾帑賑施하고 曲赦有罪하여 以收衆心하고 養輕俠數千人하여 爲死士注+振, 救也. 施, 與也.러니
司馬昭 初秉政 長史賈充 請遣參佐하여 慰勞四征하고 且觀其志注+魏置征東將軍屯淮南, 征南將軍屯襄‧沔以備吳, 征西將軍屯關‧隴以備蜀, 征北將軍屯幽‧幷以備鮮卑, 皆授以重兵.하다
充至淮南하여 見誕論時事할새 因曰 洛中諸賢 皆願禪代하나니 君以爲何如
誕厲聲曰 卿非賈豫州子乎注+充父逵, 先爲豫州刺史而卒, 故稱之. 世受魏恩이어늘 豈可以社稷輸人이리오 若洛中有難이면 吾當死之하리라
充黙然하고 還言於昭曰 誕 再在揚州하여 得士衆心注+誕先督揚州, 東關之敗, 改督豫州, 毋丘儉旣死, 復督揚州.하니 今召之 必不來 然反疾而禍小어니와
不召則反遲而禍大리니 不如召之니이다 充逵之子也
詔以誕爲司空하니 誕遂殺揚州刺史樂綝注+征東將軍與揚州刺史同治壽春. 魏四征之任, 率以其州刺史爲儲帥, 故誕疑綝間己.하고 斂屯田兵十餘萬及新附四五萬人注+魏郡縣皆置屯田, 凡屯田口悉官兵也.하고 聚穀足一年食하여 爲閉門自守計하고
遣長史吳綱하여 將小子靚至吳하여 稱臣請救注+將, 如字. 小, 少也. 靚, 少子之名.하니 司馬昭奉魏主髦 及太后討之注+昭若自行, 恐後有挾兩宮爲變者, 故奉之以討誕.어늘
吳使將軍全懌全端唐咨等으로 與文欽同救誕注+懌, 琮之子. 端, 其從子也.이러니 六月 昭督諸軍二十六萬하여 進屯丘頭注+水經 “潁水過南頓縣, 又東逕丘頭, 丘頭南枕水.”하고 使將軍王基陳騫圍壽春하니
圍未合 懌等 將衆하여 因山乘險突入城注+壽春城外他無山, 唯城北有八公山耳.하니 昭勅基斂軍堅壁한대 基累求進討러니
會吳朱異 率三萬人하여 屯安豐하여 爲欽外勢注+安豐縣, 漢屬廬江郡, 魏分屬安豐郡.어늘 詔基轉據北山한대
基曰 今圍壘轉固하고 兵馬向集하니 當修守備하여 以待越逸이어늘
而更移兵守險하여 使得放縱하니 雖有智者 不能善其後矣注+越, 走也, 逾也. 逸, 奔也, 遁也.리이다하다
遂守便宜上疏하니 報聽注+報基聽行其策.이라 於是 四面合圍하여 塹壘甚峻하고 擊欽異하여 皆破走之하니
吳孫綝 大發卒하여 出屯鑊里注+鑊里, 當在巢縣界.하고 復遣異等하여 解壽春之圍어늘 魏人又擊破之하니
異走歸綝한대 綝使異更死戰하니 異以士卒乏食으로 不從이어늘 綝怒斬異而還하니
綝旣不能拔出誕하고 而喪敗士衆 自戮名將하니 吳人咸怨이러라
昭乃縱反間言호되 吳救方至로되 大軍乏食하니 勢不能久라하거늘 誕益寛恣食이러니 俄而乏糧하고 外救不至하니
蔣班焦彛 誕謀主也 言於誕曰 宜及衆心尙固하여 幷力決死하여 攻其一面이면 猶有可全이니 空坐守死 無爲也注+言不若決死而求生, 無爲坐守而待斃.니이다
誕不聽하고 欲殺之한대 班彛踰城出降하고 全懌兄子輝等 得罪於吳하여 奔魏하니
司馬昭作輝書하여 告懌等說호되 吳中 怒懌等不能拔壽春城注+言不能拔壽春之衆於重圍也.하여
欲盡誅諸將家 故逃來歸命이라하니 懌等 遂帥其衆出降하다
姜維伐魏하다
姜維聞魏分關中兵赴淮南하고 欲乘虛向秦川하여 率數萬人出駱谷하니
積穀多而守兵少注+此長城, 當在郿縣之南‧沈嶺之北. 魏都督司馬望及鄧艾 進據之하여 以拒維하니 維數挑戰하되 不應이러라
是時 維數出兵하니 蜀人愁苦 譙周 作仇國論하여 諷之曰 或問往古 能以弱勝彊者 其術何如
曰 吾聞之호니 處大無患者 常多慢이요 處小有憂者 常思善이라
多慢則生亂하고 思善則生治 理之常也 故周文養民하여 以少取多하고 句踐恤衆하여 以弱斃彊하니 此其術也注+文王治岐, 由方百里起, 三分天下有其二, 所謂以少取多也. 句踐歸越, 弔死問疾, 十年生聚, 十年敎訓, 以弱越斃強吳.
或曰 曩者 項彊漢弱하니 約分鴻溝하여 各歸息民이어늘
張良 以爲民志旣定하면 則難動也라하여 率兵追羽하여 終斃項氏하니 豈必由文王之事乎
曰商周之際 王侯世尊하고 君臣久固하니 深根者 難抜이요 據固者 難遷注+世尊, 言世世居尊位也.이라
當此之時하여 雖漢祖 安能杖劒鞭馬取天下乎 及秦罷侯置守之後 民疲秦役하여 天下土崩하니
於是 豪強竝爭하여 虎裂狼分하니 疾搏者 獲多하고 遲後者 見呑注+疾, 急也. 搏, 手擊也.이라 今我與彼 皆傳國易世矣
旣非秦末鼎沸之時 實有六國竝據之勢 故可爲文王이요 難爲漢祖
夫民之疲勞하면 則騷擾之兆生하고 上慢下暴하면 則瓦解之形起하나니
諺曰 射幸數跌 不如審發注+數, 頻也. 跌, 差也. 射數差而不中, 不如審而後發也.이라하니 是故 智者 不爲小利移目하며 不爲意似改步하여 時可而後動하고 數合而後擧注+爲, 去聲.
故湯武之師 不再戰而克하니 誠重民勞而度時審也注+湯伐桀, 鳴條一戰, 而革夏命, 武王伐紂, 一戎衣而天下大定. 如遂極武黷征하여 不幸遇難이면 雖有智者 將不能謀之矣리라


丁丑年(257)
[] 나라(蜀漢) 後主 延熙 20년이다.
[] 魏主 曹髦 甘露 2년이고, 吳主 孫亮 太平 2년이다.
[] 여름 4월에 吳主 孫亮이 비로소 親政하였다.
[] 吳主 孫亮이 정사를 친히 처리하니, 大將軍 孫綝表文을 올릴 적에 힐문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注+(묻다)은 去聲이다.
또 병사의 子弟들로 18세 이하에서 15세 이상 된 자 3천여 명을 살펴서 뽑고,注+는 헤아린다는 뜻이니, 그 사람들의 키와 체격을 헤아리는 것이다. 혹자가 말하기를 “로 써야 하니, 음이 이고 헤아린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大將의 자제들 중에 나이 젊고 勇力이 있는 자를 뽑아서 그들에게 선발한 병사의 자제들을 거느리고서
날마다 궁정의 苑囿에서 敎習하게 하고 말하기를 “내가 이 군대를 설립하여 이들과 함께 성장하려 한다.”注+(자라다)은 丁丈이다.라고 하였다.
자주 으로 나가서 大帝(孫權) 때의 옛일을 살펴보고, 左右侍臣들에게 묻기를 “先帝께서는 자주 特制(황제가 친히 쓴 조서)를 내리셨는데注+特制”는 특별히 황상의 뜻을 내어 손수 조칙을 써서 선포함을 말한다. 이제 大將軍(손침)이 일을 물을 적에 다만 나에게 (認可함)자만 쓰게 하는가.”注+問事”는 奏事(아뢴 일)라는 말과 같다. 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스스로 겸손해하는 뜻이다. “書可”는 이다.라고 하였다.
일찍이 날 매실을 먹을 적에 黃門(내시)을 시켜서 中藏(궁중 창고)에 가서 꿀을 가져오게 하였는데 꿀 속에 쥐똥이 있었다.注+中藏中藏府이다. 은 벌꿀이다. (똥)는 와 통용하여 쓴다. 중장의 관리를 불러 물어보니 중장의 관리가 머리를 조아렸다.
손량이 말하기를 “황문이 너에게 꿀을 요구하였느냐?”라고 하니, 관리가 말하기를 “이전에 요구할 적에 실제로 감히 주지 않았습니다.”注+向求”는 이전에 꿀을 구한 적이 있음을 말한다.라고 하였다. 황문이 自服하지 않자 손량이 쥐똥을 부수게 하였는데 똥 속이 말라 있었다.
이어서 큰 소리로 웃고 좌우에게 말하기를 “만일 똥이 이전에 꿀 속에 있었으면 안팎이 다 젖었을 것이다. 지금 바깥만 젖고 안은 말랐으니 반드시 황문이 한 짓이다.”라고 하고, 황문을 힐책하여 과연 자복하니, 좌우의 측근들이 놀라 두려워하였다.
[] 나라 揚州都督 諸葛誕이 병사를 일으켜 司馬昭를 토벌하였다. 6월에 사마소가 魏主 曹髦를 받들어 제갈탄을 공격하자, 나라 사람들이 구원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
[] 諸葛誕이 평소 夏侯玄 등과 잘 사귀었다. 하후현 등이 죽고 王淩毌丘儉이 이어서 주멸되니
제갈탄이 속으로 불안해져서 창고 재물을 많이 내어 진휼하고 죄가 있는 사람을 특별히 용서해주어 인심을 수습하고 자신의 목숨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사람 수천 명을 길러 결사대를 만들었다.注+은 구원한다는 뜻이다. 는 준다는 뜻이다.
司馬昭가 막 정권을 잡게 되자 長史 賈充參佐(참모)를 파견하여 四征將軍들을 위로하고 또 그들의 의향을 살펴보게 하라고 청하였다.注+나라는 征東將軍을 두어 淮南에 주둔하게 하고, 征南將軍을 두어 에 주둔하게 하여 나라를 대비하게 하고, 征西將軍을 두어 에 주둔하게 하여 蜀漢을 대비하게 하고, 征北將軍을 두어 에 주둔하게 하여 鮮卑를 대비하게 하니, 모두 강한 병력을 주었다.
가충이 淮南에 이르러 제갈탄을 만나서 당시의 일을 논의할 적에 기회를 틈타서 말하였다. “洛中(洛陽)의 여러 현달한 인사들이 모두 황제의 禪位를 원한다. 께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제갈탄이 소리를 지르며 말하였다. “賈豫州의 아들이 아닌가?注+賈充의 아버지 賈逵는 이전에 豫州刺史를 지내고 하였으므로 賈豫州라고 칭한 것이다. 대를 이어 나라의 은혜를 받았는데 어찌 社稷을 남에게 줄 수 있겠는가? 만약 洛中에서 변란이 생기면 나는 당연히 〈나라를 위해〉 죽을 것이다.”
가충은 침묵하였고 돌아와서 사마소에게 말하였다. “제갈탄이 다시 揚州에 있으면서 군사들의 인심을 얻었습니다.注+諸葛誕은 이전에 揚州都督을 지냈는데, 東關의 패배로 豫州都督으로 바뀌고, 毌丘儉이 죽고 나자 다시 揚州都督이 되었다. 지금 그를 소환하면 반드시 오지 않을 것이지만 반란함이 빨라서 재앙이 적을 것입니다.
소환하지 않으면 반란함이 늦어져서 재앙이 클 것이니 소환하는 것이 낫습니다.” 가충은 賈逵의 아들이다.
[] 조칙을 내려 諸葛誕司空으로 삼으니, 제갈탄이 마침내 揚州刺史 樂綝을 죽이고注+征東將軍揚州刺史와 함께 壽春治所를 두었다. 나라 四征將軍(征東征南征西征北將軍)의 직임은 대부분 그 刺史儲帥(副帥)로 삼았다. 그러므로 諸葛誕樂綝이 자기를 엿본다고 의심하였다. 屯田兵 10여만 명과 새로 귀부한 4, 5만 명을 거두고注+나라 郡縣에는 모두 屯田을 두었으니, 무릇 屯田戶口는 모두 官兵이다. 1년 동안 충분히 먹을 수 있는 곡식을 모아서 문을 닫아걸어 스스로 지킬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長史 吳綱을 보내어 어린 아들 諸葛靚(제갈정)을 데리고 나라에 이르러 稱臣하고 구원을 요청하였다.注+(거느리다)은 본음대로 읽는다. 는 어리다는 뜻이다. 少子의 이름이다. 司馬昭魏主 曹髦太后를 모시고서 제갈탄을 토벌하자,注+司馬昭가 만일 스스로 출정하면 뒤에 兩宮(황제와 태후)을 끼고서 변란을 일으킬까 우려하였으므로 양궁을 모시고 諸葛誕을 토벌한 것이다.
나라는 將軍 全懌全端唐咨 등을 보내어 文欽과 함께 제갈탄을 구원하게 하였다.注+全懌全琮의 아들이고, 全端은 전역의 조카이다. 6월에 사마소는 여러 군대 26만 명을 감독하여 丘頭에 나아가 주둔하고注+水經≫에 “潁水南頓縣을 지나고, 또 동쪽으로 가서 丘頭를 지나는데, 丘頭 남쪽이 枕水이다.”라고 하였다. 將軍 王基陳騫을 보내어 壽春을 포위하게 하였다.
포위가 아직 견고하지 않았을 적에 전역 등이 군사들을 인솔하여 산에 의지해 험한 곳을 이용하여 성안으로 돌진해 들어갔다.注+壽春城 밖에는 다른 데에 산이 없고 오직 북쪽에 八公山이 있을 뿐이다. 사마소는 왕기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두어 들여 營壘를 굳게 지키라고 하였는데 왕기가 누차 진격하기를 청하였다.
마침 나라 朱異가 군사 3만을 이끌고 安豐에 주둔하여 문흠의 외부 세력이 되었다.注+安豐縣나라 때에 廬江郡에 속했고, 나라 때에 나누어 安豐郡에 속했다. 왕기에게 조칙을 내려 이동하여 北山(八公山)을 점거하라고 하였는데,
왕기가 말하기를 “지금 포위한 營壘가 더욱 견고하고 兵馬들이 결집하고 있습니다. 마땅히 수비를 강구하여 포위망에서 적이 도망치려는 것을 대비해야 하는데
다시 우리 군대를 이동하여 험한 곳을 지킨다면 저들에게 마음대로 드나들게 할 것이니, 그렇게 하면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그 이후를 잘 수습하지 못할 것입니다.”注+은 도주하고 넘어간다는 뜻이다. 은 달아나고 숨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 〈王基가〉 마침내 수비하면서 편의를 따라 상소를 하니, 회답하여 그 계책을 따라주었다.注+〈“報聽”은〉 王基에게 회답하여 그 계책을 행하도록 허락한 것이다. 이에 사면에서 포위하여 참호와 보루를 매우 견고하게 하고 文欽朱異를 공격하여 모두 격파하여 패주시켰다.
가을에 나라 孫綝이 크게 사졸들을 동원하여 鑊里로 나가서 주둔하고注+鑊里는 마땅히 巢縣 경계에 있다. 다시 주이 등을 파견하여 壽春의 포위를 풀게 하였는데, 나라 군사들이 또다시 주이를 격파하였다.
주이가 도주하여 손침에게 돌아갔는데 손침이 주이에게 다시 결사적으로 싸우도록 하였다. 주이는 사졸들의 군량이 모자란다는 이유로 명을 따르지 않았는데, 손침이 성을 내어 주이를 참수하고 돌아갔다.
손침은 이미 제갈탄을 구출해내지 못했고 사졸들을 잃은 데다 자신이 직접 名將을 죽이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원망하였다.
司馬昭反間(적군의 간첩을 역이용함)을 써서 말하기를 “나라 구원병이 장차 이를 것인데 우리 大軍은 양식이 부족하니 형세상 오래 있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諸葛誕은 더욱 느긋해져 군량을 마음대로 썼는데, 얼마 뒤에 군량이 부족해지고 외부의 구원병은 오지 않았다.
蔣班焦彛는 제갈탄의 謀主였는데 제갈탄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軍心이 아직 견고할 때에 힘을 합쳐 결사적으로 싸워 한 방면을 공격하면 그래도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만히 앉아서 지키다가 죽는 짓을 해서는 안 됩니다.”注+〈“幷力決死……無爲也”는〉 결사적으로 싸워서 살기를 구하는 것만 못하니, 앉아 지키면서 죽기를 기다려서는 안 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나
제갈탄은 따르지 않고 그들을 죽이려고 하자 장반과 초이는 성을 넘어 나가서 항복하였다. 全懌의 조카 全輝 등이 나라에서 죄를 얻어 나라로 도주하였다.
사마소는 전휘에게 편지를 쓰게 하여 전역 등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는 전역 등이 壽春城을 구원해내지 못한 것에 노하여注+〈“不能拔壽春城”은〉 겹겹의 포위망에서 壽春의 무리들을 구해낼 수 없음을 말한다.
여러 장군의 가족들을 모두 주살하려 하기 때문에 도망 와서 나라에 귀순하였습니다.”라고 하니, 전역 등이 마침내 그 무리들을 이끌고 나와 항복하였다.
[] 姜維나라를 정벌하였다.
[] 姜維나라가 關中의 군대를 나누어 淮南으로 나아갔다는 소식을 듣고, 빈틈을 타서 秦川으로 향하려고 하여 수만 명을 인솔하여 駱谷으로 출동하였다.
이때 長城에는 쌓아놓은 곡식이 많았으나 수비 병력이 적었다.注+長城은 마땅히 郿縣의 남쪽 沈嶺의 북쪽에 있다. 나라 都督 司馬望鄧艾가 나아가 그곳을 점거하여 강유를 막았다. 강유가 자주 挑戰을 하였으나 응전하지 않았다.
[] 이때에 姜維가 자주 군대를 출동하니, 蜀漢 사람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였다. 譙周는 ≪仇國論≫을 지어 다음과 같이 풍자하였다. “어떤 사람이 묻기를 ‘과거에 약한 상황에서 강한 자를 이긴 자는 그 술법이 어떻습니까?’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내가 들으니, 대국에 살면서 환난이 없는 자는 늘 교만함이 많고, 소국에 살면서 우환이 있는 자는 늘 선행을 생각한다고 합니다.
교만함이 많으면 어지러움이 생기고 선행을 생각하면 다스림이 생겨나는 것은 항상적인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나라 文王은 백성을 길러 적은 것으로 많음을 취하고, 句踐은 민중을 구휼하여 약함으로 강함을 멸망시켰으니 이것이 그 술법입니다.’注+文王岐山을 다스릴 적에 사방 1백 리 땅을 가지고 일어나 천하의 3분의 2를 소유하였으니 이른바 적은 것으로 많음을 취한 것이다. 句踐나라로 귀국하여 죽은 이를 조문하며 병자를 위문하여 10년 동안 인구를 늘리며 저축을 하고 10년 동안 백성을 가르치고 훈련시켜서 약한 나라를 가지고 강한 나라를 멸망시켰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과거에 項羽가 강하고 高祖(劉邦)가 약하니, 각각 돌아가 백성을 쉬게 하였는데,
張良은 민심이 안정되고 나면 움직이기가 어렵다고 말하여 병사를 이끌고 항우를 추격하여 마침내 항우를 멸망시켰습니다. 어찌 文王의 고사를 따를 필요가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라와 나라 때에 諸侯가 대대로 존귀하고 임금과 신하 관계가 오래도록 견고하였으니 뿌리가 깊은 것은 뽑기 어렵고 견고하게 의탁한 것은 옮기기 어렵습니다.注+世尊”은 대물려 높은 지위에 있음을 말한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비록 高祖일지라도 어찌 칼을 잡고 말을 채찍질하여 천하를 차지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가 封侯의 제도를 없애고 郡守를 두게 된 뒤에 백성들이 나라 부역에 피로하여 천하가 땅이 무너지듯 파괴되었습니다.
이에 호걸들이 아울러 다투어 호랑이가 찢고 이리가 쪼개듯이 하니, 빨리 공격하는 자는 많이 얻고, 늦게 뒤처진 자는 병탄되었습니다.注+은 급하다는 뜻이다. 은 손으로 때리는 것이다. 지금 우리와 상대방은 모두 나라를 전하고 세대를 바꿨습니다.
이미 나라 말기의 솥에 물이 끓는 듯한 시기가 아니고 실로 六國(戰國時代)의 병립하고 웅거하는 형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왕처럼 할 수 있고 한 고조처럼 하기는 어렵습니다.
백성이 피로하면 소요의 조짐이 생기고, 위가 교만하고 아래가 포악하면 瓦解의 형세가 일어납니다.
속담에 말하기를 「활을 쏠 때에 요행을 바라다가 자주 빗나가는 것이 잘 살펴서 발사하는 것만 못하다.」고注+은 자주이고, 은 차이가 나는 것이니, 〈“射幸數跌 不如審發”은〉 활쏘기에 자주 빗나가서 맞지 않는 것은 잘 살펴서 발사하는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하니, 이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작은 이익을 위하여 눈을 돌리지 않으며 겉으로 비슷하나 실제 다른 것을 위하여 계획을 바꾸지 않아서 시기가 가능하게 된 뒤에 움직이고 형세가 합당해진 뒤에 거동합니다.注+(위하다)는 去聲이다.
그러므로 湯王武王의 군사가 두 번 싸우지 않고 〈한 번에〉 이겼으니 진실로 백성의 노고를 중시하고 시기를 잘 살펴서 판단하였던 것입니다.注+을 정벌한 적에 鳴條에서 한 번 전투하여 나라의 天命을 바꾸었고, 武王를 정벌할 적에 한 번 갑옷을 입고 나가 싸우자 천하가 크게 안정되었다. 만일 마침내 무력을 다 쓰고 정벌을 남용하여 불행히 환난을 만나게 되면 비록 지혜로운 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계책을 낼 수 없을 것입니다.’”


역주
역주1 吳主亮 始親政 : “비로소 親政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孫峻이 독단했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이 끝날 때까지 비로소 親政했다고 기록한 것이 여섯 번이니(이해(257), 宋나라 을축년(425) 文帝, 정미년(467) 北魏 拓跋弘, 齊나라 신미년(491) 北魏 拓跋宏, 陳나라 기묘년(599) 北周 宇文毓, 임진년(572) 北周 宇文邕), 모두 혹은 정사를 독단한 자들이다.[始親政 何 峻專也 終綱目 書始親政六(是年 宋乙丑年文帝 丁未年魏弘 齊辛未年魏宏 陳己卯年周毓 壬辰年周邕) 皆或專之者也]” ≪書法≫
역주2 中書省 : 曹操가 魏王 시절에 王府에 秘書令을 두어서 尙書가 올린 奏文을 받고 圖書와 기밀 서류를 다루었는데, 三國時代 魏나라 黃初 초년에 秘書府와 中書府로 나누어 두었다. 중서부 즉 중서성은 中書監, 中書令 등을 장관으로 두었다. 중서성에서는 尙書에서 올린 奏文, 여러 신하의 章奏 등의 수납을 담당하고 황제의 詔令을 작성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중서성은 吳나라와 蜀漢에도 설치되었는데, 중서감은 蜀漢에서는 보이지 않으며 중서령은 삼국에서 모두 보인다.(黃惠賢 著, ≪中國政治制度通史 4 魏晉南北朝≫)
역주3 畫可 : 帝王이 신하의 奏章에 대하여 批答으로 可자를 써서 允許하여 시행하도록 표시한 것이다.
역주4 (科)[料] : 저본에는 ‘科’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註에 의거하여 ‘料’로 바로잡았다.
역주5 魏揚州都督諸葛誕……不克而還 : “이때에 諸葛誕이 소환에 나아가지 않고 揚州刺史 樂綝을 죽이고 병사를 거두어 자신만 지킬 뿐이었다. 그런데 〈제갈탄이〉 병사를 일으켜 〈사마소를〉 토벌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어째서인가. 허여해준 것이다. 어찌하여 허여해준 것인가. 제갈탄이 환난에 죽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資治通鑑綱目≫에서 이에 魏主 曹髦가 스스로 지휘했다고 기록하지 않고 〈사마소가〉 魏主 조모를 받들어 공격했다고 기록하였으니 조모의 뜻이 아니라 사마소에게 제재받은 것이 분명하므로 다만 ‘攻’이라고 기록할 뿐이었다. 무릇 ‘그 임금을 받들었다[奉其主]’라고 기록한 것은 모두 그 임금에게서 나오지 않은 것이다. ≪자치통감강목≫이 끝나도록 그 임금을 받들었다와 황제를 받들었다고 기록한 것이 네 번이다.(이해(257), 晉 惠帝 太安 2년(303)에 두 번, 永興 원년(304))[於是 誕不就徴 殺揚州刺史 斂兵自守耳 書起兵討何 予之也 曷爲予之 誕嘗有死難之語 近於以身殉國者 綱目於此 不書魏主髦自將 書奉其主髦 則非髦意而制於昭也 明矣 故止書攻 凡書奉其主云者 皆不出於其主者也 終綱目 書奉其主奉帝四(是年 晉惠帝太安二年再書 永興元年)]” ≪書法≫
“分注(目)를 살펴보면 諸葛誕은 순수한 뜻으로 起義한 것이 아니고 다만 마음에 압박을 받아 스스로 불안했을 뿐이다. 그러나 ≪資治通鑑綱目≫에서 ‘起兵’이라고 기록하고 ‘討昭’라고 기록하여 조금도 폄하하는 말이 없다. 司馬昭가 이미 임금을 모시고 〈전장에〉 나아가서 分注(目)의 글에는 ‘討’라고 썼는데 ≪자치통감강목≫에서는 다만 ‘攻’이라고 기록했을 뿐이니 어찌 서로 모순되는가. 分注의 글은 이전의 史書의 글을 갖추어 쓴 것이지만 ≪자치통감강목≫의 글(綱의 글)은 특별한 필법에서 나왔으므로 기록한 것이 이와 같다. 이때를 만나서 사마소가 임금을 위협했는데 앞에서는 스스로 大都督이 되고 일을 아뢸 때 이름을 부르지 않고 黃鉞을 주었다고 기록하였으니 그렇다면 이는 찬탈할 형세가 〈曹芳을〉 폐출한 뒤에 이미 이루어졌던 것이다. 이에 천하 사람들 중에 팔꿈치를 걷어붙이고 의리를 창도하는 자가 있으면 모두 군자가 허여한 것이니, 그밖에 것은 돌아볼 겨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을 토벌하는 데에 시급하면 무릇 마음의 순수함과 잡스러움, 人品의 高下와 事業의 成敗를 모두 불문에 부친 것은 다만 簒逆한 죄인을 주살하고 난 뒤에 그치기를 바란 것이다. 사마소가 비록 임금을 끼고 威重함을 행하였지만 모든 명령이 그의 손에 달려 있으니 어찌 천자의 명을 받들어 역적을 토벌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의리가 진실로 시행되면 사마소 등과 같은 사람은 천지의 사이에서 용서받을 수 없을 것이고 천하 후세에 또한 명분을 속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치통감강목≫이 편찬되자 亂臣賊子들이 두려워하였다고 하는 것이다.[考之分注 誕非純於起義者 特迫於內 不自安耳 然綱目書起兵 書討昭 略無貶詞 昭旣奉主而行 分注曰討 而綱目止書曰攻 豈自相矛盾哉 分注備前史之言 而綱目出於特筆 故所書如此 當是之時 司馬昭脅制其君 前書自爲大都督 奏事不名 假黃鉞 則是簒勢已成於廢放之後矣 天下之人 有能奮臂倡義 皆君子之所予 不遑恤其他 故夫急於討賊 則凡心跡之純駁 人品之高下 事業之成敗 皆置不論 直欲誅簒逆之人而後已 昭雖挾主爲重 然皆命在其手 豈得謂之奉辭伐叛 此義苟行 則如昭等 比將無所容於天地之間 而天下後世亦不可以名欺矣 故曰綱目修 而亂臣賊子懼]” ≪發明≫
역주6 長城 : 기존에는 이를 魏나라에서 축조한 장성으로 보았다. 근래 나온 ≪今注本二十四史 三國志≫ 〈鄧艾傳〉에서는 地名으로 보았다.
역주7 鴻溝를……약속하고서 : 鴻溝는 運河의 이름이다. 漢나라와 楚나라가 천하를 다툴 때 張良의 계책으로 천하를 반으로 나누어 홍구 서쪽은 漢이, 동쪽은 楚가 관할하기로 약속하였다. 漢 高祖가 군사들을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가려고 하자, 張良과 陳平이 그 약속을 어기고 項羽의 군사가 지치고 주린 틈을 타서 공격할 것을 권하였다. 劉邦은 그 계책을 따라 항우를 추격하여 마침내 垓下에서 승리를 거두었다.(≪史記≫ 〈高祖本紀〉)

자치통감강목(12) 책은 2021.01.0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