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資治通鑑綱目(15)

자치통감강목(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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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簡文皇帝咸安元年이라
秦建元七年이라
春正月 大司馬溫 拔壽春하고 獲袁瑾하여 斬之하다
袁瑾 求救於秦이어늘 遣將軍王鑑張蚝하여 帥歩騎二萬하고 救之러니 遣桓伊等하여 撃鑑蚝於石橋하여 大破之하고 遂拔壽春하고 擒瑾送建康하여 斬之注+① 伊, 宣之子也. 據桓溫傳, 石橋在肥水北.하다
徙關東豪傑及雜夷十五萬戶于關中하다
◑ 涼州張天錫 稱藩于秦하다
秦王堅 命王猛爲書하여 諭天錫曰 昔 貴先公 稱藩劉石者 爲審於彊弱也注+① 張茂稱藩於劉曜事, 見明帝太寧元年. 張駿稱藩於石勒事, 見成帝咸和五年. 今秦之威 旁振無外하여 關東旣平일새 將移兵河右하노니 恐非六郡士民所能抗也注+② 涼州六郡, 以張軌初鎭河西之時, 統治武威․張掖․酒泉․敦煌․西郡․西海六郡, 言之也. 元康以後, 張氏所分置其爲郡多矣.라하니
天錫 大懼하여 遣使稱藩이어늘 拜天錫涼州刺史西平公하다
吐谷渾 入貢于秦하다
吐谷渾王辟奚 遣使하여 獻馬千匹, 金銀五百斤于秦하니 秦以爲漒川侯注+① 辟奚, 葉延之子也. 漒, 音強, 水名, 在河南.하다 辟奚好學仁厚로되 而無威斷하여 三弟專恣한대
國人 患之러니 長史鍾惡地 與司馬乞宿雲으로 收殺之하니 辟奚由是發病恍惚注+② 人無精爽, 謂之恍惚.하여 命世子視連曰
吾禍及同生하니 何以見之於地下리오 國事 汝自治之하라 吾餘年殘命 寄食而已라하고 遂以憂卒하다
視連하여 不飲酒遊畋者七年이요 軍國之事 委之將佐하니
惡地諫하여 以爲人主 當自娛樂하여 建威布德이니이다
視連 泣曰 孤自先世以來 以仁孝忠恕相承이러니 先王 念友愛之不終하사 悲憤而亡하시니 孤雖纂業이나 尸存而已注+① 尸存, 言雖存而如尸也. 聲色遊娛 豈所安리오 威德之建 當付之將來耳로라
代世子寔하다
代將長孫斤 謀弑代王什翼犍이어늘 格之라가 傷脇이러니 至是卒注+① 脇, 脅同.하다 娶東部大人賀野干之女하여 有遺腹子하니 什翼犍 名之曰渉圭注+② 據北史, 賀野干卽賀蘭部酋長. 魏書官氏志 “北方賀蘭, 後改爲賀氏.”라하다
伐仇池克之하고 執楊纂以歸注+① 纂, 世之子也.하다
◑ 秦 以鄧羌爲鎭軍將軍하다
王猛 以潞川之功으로 請以羌爲司隷한대 秦王堅 下詔曰 司隷校尉 董牧皇畿하니 吏責甚重이라 非所以優禮名將注+① 董, 督正也. 牧, 養也.이니 光武不以吏事處功臣 實貴之也
羌有廉李之才注+② 廉․李, 謂廉頗․李牧.하니 方委以征伐之事하노니 北平匈奴하고 南蕩揚越 羌之任也 司隷何足以嬰之注+③ 嬰, 繞也.리오 其進號鎭軍將軍位特進하라
冬十月 秦王堅 如鄴하다
秦王堅 至鄴하여 獵于西山하여 旬餘忘返이라 伶人王洛 叩馬諫曰注+① 伶, 音零. 伶官, 樂官也. 伶氏世掌樂官而善焉, 故後世多號樂官, 爲伶官. 陛下 群生所繫어늘 今久獵不歸하시니 一旦患生不虞하면 奈太后天下何니잇고 爲之罷獵還宮하다
王猛 因進言曰 畋獵 誠非急務 洛之言 不可忘也니이다 賜洛帛百匹하고 拜官箴左右하고 自是 不復獵注+② 左傳 “昔周辛甲之爲太史也, 命百官, 官箴王闕, 於虞人之箴曰 ‘芒芒禹跡, 畫爲九州. 經啓九道, 民有寢廟, 獸有茂草, 各有攸處, 德用不擾, 在帝夷羿, 冒于原獸, 忘其國恤, 而思其麀牲, 武不可重, 用不恢于夏家. 獸臣司原, 敢告僕夫.’ 虞箴如是.” 以戒獵也. 堅倣其意, 拜洛爲官箴左右. 一說 “拜官, 加以職也. 箴左右, 使諷諫也.”이러라
恃其材略位望하고 陰蓄不臣之志하여 嘗撫枕歎曰 男子不能流芳百世 亦當遺臭萬年이라하더라
術士杜炅 能知人貴賤注+① 炅, 古逈切.이러니 問之한대 炅曰 明公 勳格宇宙하고 位極人臣이리이다 不悅注+② 格, 至也. 其志願不止於此, 故不悅.하다
欲先立功河朔하여 以收時望하고 還受九錫이러니 及枋頭之敗하여 威名 頓挫注+③ 挫, 摧折也. 旣克壽春 謂郗超曰 足以雪枋頭之恥乎 超曰 未也로라
久之 超就溫宿이러니 中夜 謂曰 明公 不爲伊霍之擧 無以立大威權하여 鎭壓四海리이다
遂與定議注+① 超知溫心而迎合之, 溫遂與定議.하되 以帝素謹無過로되 而床易誣注+② (第)[笫], 側里․壯士二切. 床簀也. 左傳 “鄭伯享趙孟于垂隴, 伯有賦鶉之賁賁, 趙孟曰 ‘牀(第)[笫]之言不踰閾.’” 杜注云 “此詩刺淫亂, 故云牀(第)[笫]之言.”라하여 乃揚言帝早有痿疾이어늘 嬖人朱靈寶等 參侍内寢하여 二美人 生三男하여 將移皇基라하니
莫能審其虛實注+③ 痿, 人垂․於隹二切, 此蓋言陰痿也. 二美人, 田氏․孟氏也.이러라
乃詣建康하여 諷褚太后하여 請廢帝而立會稽王昱하고 幷作令草하여 呈之太后注+① 令草, 太后下令之草也. 先草定太后令, 而呈之於太后.하니
太后曰 我本自疑此라하고 便索筆益之하여 曰 未亡人 不幸罹此百憂하니 感念存没 心焉如割注+② 婦人旣寡, 自稱曰未亡人.이로라
集百官於朝堂한대 百官 震慄하니 溫亦色動하여 不知所爲러니 尙書僕射王彪之 命取霍光傳하여 禮度儀制 定於須臾하다 彪之朝服當階하니 神彩毅然이라
於是 宣太后令하여 廢帝爲東海王한대 帝乘犢車하고 出神虎門하니 侍御史 將兵衛送東海第注+① 晉制, 諸公給朝車․安車․皁輪犢車各一乘. 神虎門, 建康宮西門.하고
帥百官하여 迎昱卽帝位하다 有足疾이라 詔乘輿入殿하다
撰辭 欲陳述廢立本意注+② 預撰辭, 欲入見而陳之.러니 帝引見 便泣下數十行注+③ 行, 戶剛切.하니 兢懼하여 竟不能一言而出이러라
太宰武陵王晞 好習武事 忌之하여 表免其官하고 尊褚太后曰 崇德太后라하고
逼新蔡王晃하여 自列與晞及殷浩之子涓及庾蘊弟倩柔等謀反하여
收付廷尉注+① 晃, 汝南王亮之曾孫. 父邈嗣新蔡王後. 自列, 自陳列其事也. 蘊, 希之弟也. 倩, 倉甸切. 倩․柔, 庾蘊二弟名. 初殷浩卒, 溫使人齎書弔之, 涓不答, 亦不詣溫, 而與武陵王晞遊. 庾蘊素與溫有隙, 溫惡殷․庾宗彊, 欲去之.하고 又殺東海王三子及其母注+② 卽田氏․孟氏及所生三男也.하다
有司承溫旨하여 請誅晞한대 詔曰 悲惋惶怛하여 非所忍聞이로라
固請한대 帝手詔曰 若晉祚靈長이면 便宜奉行前詔 如大運去矣 請避賢路하노라
覽之流汗하여 乃奏廢晞徙新安하고 免晃爲庶人하고 涓, 倩, 柔 皆族誅注+① 吳孫權分丹楊, 立新都郡, 武帝大康元年, 更名新安郡.하다
侍中謝安 見溫遙拜한대 驚曰 安石 卿何事乃爾 安曰 未有君拜於前하고 臣揖於後니라 遂還姑孰하다
秦王堅 聞溫廢立하고 謂群臣曰 溫 前敗灞上하고 後敗枋頭어늘 不能思愆自貶以謝百姓하고 方更廢君以自說注+① 說, 載記作悅, 讀當從悅. 一曰 “說, 讀, 謂自解說也.”이라
六十之叟 擧動如此하니 將何以容於四海乎리오 諺曰 怒其室而作色於父라하니 溫之謂矣注+② 室, 妻也.니라
十二月 降封東海王하여 爲海西縣公하다
大司馬溫호되 廢放之人 不可以臨黎元이니 東海王 宜依昌邑故事라한대 太后詔封海西縣公하다
威震内外하니 帝雖處尊位 拱黙而已러라
先是 熒惑 守太微端門하여 踰月 而海西廢注+① 天文志 “太微南藩中二星間, 曰端門.”러니
至是 又逆行入太微하니 帝甚惡之하여 謂中書侍郞郗超曰 命之修短 本所不計어니와 故當無復近日事邪注+② 帝之爲撫軍也, 辟超爲掾, 故於今敢以情問之.
超曰 大司馬臣溫 方内固社稷하고 外恢經略하니 非常之事 臣以百口保之하노이다
及超請急省其父注+③ 急, 假也. 晉令, 急假者, 一月五急, 一年中以六十日爲限.한대 帝曰 致意尊公하라 家國之事 遂至於此하니 由吾不能以道匡衛라하고
因詠庾闡詩云 志士痛朝危하고 忠臣哀主辱이라하고 遂泣下霑襟이러라
帝美風儀하고 善容止하고 留心典籍하여 凝塵滿席호되 湛如也러라 雖神識恬暢이나 然無濟世大略이라
謝安 以爲惠帝之流로되 但清談差勝耳라하니라
超以溫故 朝中 皆畏事之 謝安 嘗與左衛將軍王坦之 共詣超하여 日旰未得前하여 坦之欲去하니 安曰 獨不能爲性命忍須臾邪注+① 爲, 去聲.아하니라


【綱】 晉나라(東晉) 太宗 簡文皇帝 咸安 元年이다.
【目】 秦나라(前秦) 符堅 建元 7년이다.
【綱】 봄 정월에 〈晉나라(東晉)〉 大司馬 桓溫이 壽春을 함락하고 袁瑾을 사로잡아 참수하였다.
【目】 袁瑾이 秦나라(前秦)에 구원을 청하자, 진나라가 將軍 王鑑과 張蚝(장자)를 보내어 보병과 기병 2만을 거느리고 가서 그를 구원하게 하였는데, 桓溫이 桓伊 등을 보내어 왕감과 장자를 石橋에서 공격하여 大破하고 마침내 壽春을 함락하고 원근을 사로잡아 建康으로 보내어 참수하게 하였다.注+① 桓伊는 桓宣의 아들이다. ≪晉書≫ 〈桓溫傳〉에 근거하면 石橋는 肥水의 북쪽에 있다.
【綱】 秦나라(前秦)가 關東 지방의 豪傑과 여러 오랑캐 15만 호를 關中 지방으로 옮겼다.
【綱】 涼州(前涼)의 張天錫이 秦나라(前秦)에 藩臣을 칭하였다.
【目】 秦王 符堅이 王猛에게 명하여 글을 지어 張天錫에게 유시하기를 “옛날 貴先公이 劉氏와 石氏에게 번신을 칭했던 것은 彊弱의 형세를 자세히 살폈기 때문이다.注+ 지금 우리 秦나라가 위엄을 사방으로 끝없이 떨쳐 關東 지방이 이미 평정되었으므로 장차 군대를 河西 지방으로 옮기려 하노니, 하서 6개 郡의 선비와 백성들이 항거할 수 있는 바가 아닐 듯하다.” 하였다.注+② 涼州 6郡은 張軌가 처음 河西에 진주했을 때에 武威, 張掖, 酒泉, 敦煌, 西郡, 西海의 6郡을 통치함을 말한 것이다. 元康 이후에 張氏가 나누어 설치한 郡이 많다.
장천석이 크게 두려워하여 使者를 보내어 번신을 칭하자, 부견은 장천석을 涼州刺史 西平公에 봉하였다.
【綱】 吐谷渾(토욕혼)이 秦나라(前秦)에 들어가 공물을 바쳤다.
【目】 吐谷渾의 王 慕容辟奚가 使者를 보내어 말 1천 필과 金銀 5백 근을 秦나라에 바치니, 진나라는 그를 漒川侯로 삼았다.注+① 慕容辟奚는 慕容葉延의 아들이다. 漒은 음이 強이다. 물 이름인데, 河南에 있다. 모용벽해는 학문을 좋아하고 마음씨가 인자하고 후덕하나 위엄과 과단성이 없으니, 세 아우가 방자하여 전횡을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이것을 근심하였는데, 長史 鍾惡地가 司馬 乞宿雲과 함께 그들을 체포하여 죽이니, 모용벽해가 이로 말미암아 병이 나고 제정신을 잃게 되자,注+② 사람이 제정신을 잃은 것을 ‘恍惚’이라 이른다. 世子 慕容視連에게 명하기를
“나는 禍가 아우들에게 미치게 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지하에서 만나보겠는가. 國事는 네가 스스로 다스려라. 나는 얼마 남지 않은 쇠잔한 목숨으로 빌붙어 먹고살 뿐이다.” 하였는데, 마침내 근심 때문에 卒하였다.
【目】 慕容視連이 즉위하여 술을 마시며 놀고 사냥하지 않은 지가 7년이었고, 軍國의 일을 장수와 보좌관들에게 위임하였다.
鍾惡地가 諫하기를 “군주는 마땅히 스스로 향락을 즐겨서 위엄을 세우고 은덕을 펴야 합니다.” 하니,
모용시련이 울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우리 王家는 先代 이래로 仁孝와 忠恕로 왕위를 계승해왔는데, 先王께서 형제간의 友愛를 제대로 끝마치지 못함을 염려하여 슬퍼하고 노하시다가 병을 얻어 별세하셨으니, 내 비록 기업을 이었으나, 살아 있는 송장일 뿐이다.注+① ‘尸存’은 비록 살아 있으나 시신과 같음을 말한 것이다. 음악과 여색, 즐기고 노는 것이 어찌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위엄과 은덕을 세우는 것은 마땅히 後人에게 맡겨야 한다.”
【綱】 代나라 世子 拓跋寔이 卒하였다.
【目】 처음에 代나라 장수 長孫斤이 代王 拓跋什翼犍을 시해할 것을 도모하자, 拓跋寔이 그를 공격하다가 갈비뼈를 상하였는데, 이때 卒하였다.注+① 脇(갈비뼈)은 脅과 같다. 탁발식이 東部大人 賀野干의 딸에게 장가들어 遺腹子가 있었는데, 탁발십익건이 그 아이의 이름을 渉圭라 하였다.注+② ≪北史≫를 근거해보면 賀野干은 바로 賀蘭部의 酋長이다. ≪魏書≫ 〈官氏志〉에 “北方의 賀蘭이 뒤에 이름을 고쳐 賀氏라 했다.” 하였다.
【綱】 秦나라(前秦)가 仇池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楊纂을 사로잡아 돌아갔다.注+① 楊纂은 楊世의 아들이다.
【綱】 秦나라(前秦)가 鄧羌을 鎭軍將軍으로 삼았다.
【目】 秦王 符堅이 조령을 내리기를 “사예교위는 경기 지방을 감독하고 다스리니, 관리의 책임이 매우 무겁다. 名將을 예우하는 방법이 아니니,注+① 董은 감독하여 바로잡음이다. 牧은 기름이다. 은 실제로 그들을 귀하게 여긴 것이다.
등강은 의 재능이 있으니,注+② 廉․李는 廉頗와 李牧을 이른다. 朕은 이제 그에게 征伐하는 일을 맡기려 한다. 북쪽으로 匈奴(代國)를 평정하고 남쪽으로 揚․越 지방(東晉)을 소탕하는 것이 등강의 임무이다. 사예교위로 어찌 그를 얽어놓을 수 있겠는가.注+③ 嬰은 얽어맴이다. 그의 칭호를 鎭軍將軍으로 올리고 特進의 자리에 있게 하라.” 하였다.
【綱】 겨울 10월에 秦王 符堅이 鄴城에 갔다.
【目】 秦王 符堅이 鄴城에 이르러 西山에서 사냥하여 열흘이 넘도록 돌아갈 것을 잊었다. 伶人인 王洛이 말고삐를 잡고 諫하기를注+① 伶은 음이 零이니, 伶官은 樂官이다. 伶氏는 대대로 악관을 맡아서 음악을 잘하였으므로 後世에 樂官을 伶官이라 많이 칭하였다. “폐하께는 여러 생민이 매여 있는데, 지금 오랫동안 사냥하고 돌아가지 않으시니, 하루아침에 예측하지 못하는 우환이 생기면 太后와 天下를 어찌하려 하십니까.” 하니, 부견이 그의 간언을 받아들여 사냥을 파하고 宮으로 돌아갔다.
王猛이 인하여 進言하기를 “수렵은 참으로 시급한 일이 아니니, 왕락의 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부견은 왕락에게 비단 1백 필을 하사하고 官箴左右를 제수하였으며, 이후로는 다시 사냥하지 않았다.注+② ≪春秋左氏傳≫ 襄公 4년에 “옛날 周나라 辛甲이 太史가 되었을 적에 百官에게 명하여 관원들로 하여금 임금의 잘못을 경계하게 하니, 虞人의 경계에 이르기를 ‘아득하고 아득한 禹임금의 발자취여, 구획하여 9州를 만들었네. 9주의 길을 경영하여 만드니, 백성들과 짐승들이 각각 거처할 수 있는 寢廟와 무성한 풀밭이 있어 德이 이 때문에 흔들리지 않았는데, 夷羿는 帝王이 되어 사냥만을 탐하여 국가의 근심을 잊고 야생 동물 잡는 것만 생각하였네. 〈사냥하는 데〉 무력을 거듭 사용해서는 안 되는데, 이예는 이 때문에 夏나라를 넓히지 못하였다. 짐승을 맡은 신하가 들판을 담당하였으므로 감히 僕夫에게 고하네.’ 하였다. 虞人의 경계가 이와 같다.” 하였으니, 이로써 사냥을 경계한 것이다. 符堅이 그 뜻을 따라 王洛을 官箴左右로 임명한 것이다. 일설에 “‘拜官’은 관직을 더 올려준 것이고, ‘箴左右’는 그에게 諷諫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綱】 11월에 大司馬 桓溫이 조정에 들어와 황제(司馬奕)를 廢하여 東海王으로 삼고 會稽王 司馬昱을 영입하여 즉위하게 하였다.
【目】 桓溫은 자기의 재주와 지략, 지위와 명망을 믿고 은근히 皇帝의 자리를 탈취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일찍이 베개를 어루만지며 탄식하기를 “남자가 百世에 아름다운 명성을 남기지 못한다면 또한 마땅히 萬年에 악취를 남겨야 한다.” 하였다.
術士 杜炅(두경)이 사람의 貴賤을 잘 맞추었는데,注+① 炅은 古迥의 切이다. 환온이 그에게 묻자 두경이 말하기를 “明公은 공로가 온 천하에 이르고 지위가 신하 중에 비견할 자가 없다.” 하자, 환온이 기뻐하지 않았다.注+② 格은 이름이다. 그의 뜻과 소원이 여기에 그치지 않았으므로 좋아하지 않은 것이다.
환온은 먼저 河朔 지방에서 공을 세워 당시의 威望을 거두고 돌아와 九錫을 받고자 하였는데, 枋頭에서 패전하자 위엄과 명성이 크게 꺾였다.注+③ 挫는 꺾임이다. 壽春을 점령한 뒤에 郗超에게 이르기를 “방두에서 패전한 치욕을 설욕하기 충분한가.” 하자, 치초가 말하기를 “아직 아닙니다.” 하였다.
【目】 오랜 뒤에 郗超가 桓溫을 찾아가서 잠을 잤는데, 한밤중에 환온에게 이르기를 “明公이 을 하지 않으면, 큰 권위를 세워서 四海를 진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환온은 마침내 치초와 더불어 의논하여 계책을 정하였는데,注+① 郗超는 桓溫의 마음을 알고 영합하니, 환온이 마침내 그와 더불어 의논을 결정한 것이다. 황제(司馬奕)가 평소 조심하여 허물이 없으나 침상의 일을 가지고 誣陷하기 쉽다 해서,注+② 笫는 側里와 壯士 두 가지의 切이니, 침상의 자리이다. ≪春秋左氏傳≫ 襄公 27년에 “鄭伯이 垂隴에서 趙孟에게 연향을 베풀 적에 伯有가 ≪詩經≫ 〈鄘風〉의 〈鶉之奔奔(메추라기는 짝맞추어 날다.)〉의 시를 읊자, 조맹이 말하기를 ‘침상의 말은 문지방 밖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하였다.” 하였는데, 杜預의 注에 “이 시는 淫亂을 풍자한 것이다. 그러므로 침상의 말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마침내 “황제가 일찍부터 陰痿의 병환이 있었는데, 총애하는 신하 朱靈寶 등이 内寢에서 가까이 모시면서 두 부인이 세 아들을 낳으니, 장차 황제의 基業을 옮기려 한다.”고 소문을 퍼트렸다.
사람들은 그 소문의 眞僞을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다.注+③ 痿는 人垂와 於隹 두 가지의 切이니, 이는 陰痿를 말한 것이다. 두 미인은 田氏와 孟氏이다.
【目】 桓溫은 마침내 建康에 이르러 褚太后에게 넌지시 말하여 황제를 폐하고 會稽王 司馬昱을 황제로 세울 것을 청하고, 아울러 태후가 내릴 令의 초고를 지어서 태후에게 올리게 하였다.注+① ‘令草’는 太后가 내릴 令의 초고이니, 〈‘作令草 呈之太后’는〉 먼저 태후의 令을 초고로 정해서 태후에게 올린 것이다.
그러자 태후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부터 이 일을 의심했다.” 하고는 곧 붓을 달라 하여 더 보태 쓰기를 “未亡人이 불행하여 온갖 근심에 걸려드니, 돌아가신 임금님을 생각함에 가슴이 칼로 도려내는 듯하다.” 하였다.注+② 婦人이 과부가 되고 나면 자신을 未亡人이라 칭한다.
【目】 桓溫이 百官을 朝堂에 모아놓자, 百官이 떨고 두려워하니, 환온 또한 얼굴빛이 변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였는데, 尙書僕射 王彪之가 명하여 ≪漢書≫의 〈霍光傳〉을 가져오게 해서 廢位와 卽位에 대한 禮度와 儀制를 잠깐 사이에 결정하였다. 왕표지가 朝服을 입고 계단에 서 있으니, 정신과 풍채가 毅然하였다.
이에 太后의 令을 선포하여 황제를 폐하여 東海王으로 삼자, 황제가 송아지가 끄는 수레를 타고 神虎門으로 나가니, 侍御史가 군대를 거느리고 호위하여 동해왕의 집으로 전송하였다.注+① 晉나라 제도에 여러 公에게는 朝車와 安車, 검은 바퀴가 달린 송아지 수레 각각 한 대를 지급하였다. 神虎門은 建康宮의 서쪽 문이다.
이에 환온이 백관을 거느리고 司馬昱을 맞이하여 황제의 지위에 오르게 하였다. 이때 환온은 발에 병이 있었는데, 황제가 조령을 내려 수레를 타고 殿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환온이 글을 지을 적에 황제를 폐하고 다시 새로운 황제를 세운 本意를 진술하려 하였는데,注+② 〈‘撰辭 欲陳述廢立本意’는〉 미리 글을 지어놓고서 들어가 황제를 알현하고 아뢰고자 한 것이다. 황제가 그를 引見할 적에 한동안 눈물을 줄줄 흘리니,注+③ 行(줄)은 戶剛의 切이다. 환온은 조심하고 두려워해서 끝내 말을 한마디도 못 하고 나왔다.
桓溫廢主立新君桓溫廢主立新君
【目】 太宰인 武陵王 司馬晞가 군대의 일을 익히기를 좋아하였다. 환온은 그를 시기하여 表文을 올려서 그의 관직을 파면하고 褚太后를 높여 崇德太后라 하였다.
그리고 新蔡王 司馬晃을 핍박하여 사마희와 殷浩의 아들 殷涓과 庾蘊의 아우 庾倩, 庾柔 등과 모반했다고 自述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사마황을 체포해서 廷尉에 넘기고注+① 司馬晃은 汝南王 司馬亮의 曾孫인데, 그의 부친 司馬邈이 新蔡王의 뒤를 이었다. ‘自列’은 그 일을 스스로 진술하는 것이다. 庾蘊은 庾希의 아우이다. 倩은 倉甸의 切이다. 庾倩과 庾柔는 유온의 두 아우의 이름이다. 처음에 殷浩가 죽었을 적에 桓溫이 사람을 보내면서 위문하는 서신을 가지고 가서 조문하게 하였으나, 殷涓은 답하지 않았고 또한 환온에게 찾아가지 않았으며 武陵王 司馬晞와 교유하였다. 유온은 평소 환온과 틈(원한)이 있었으니, 환온은 殷氏와 庾氏의 종족이 강성함을 미워하여 두 종족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또 東海王의 세 아들과 그 어미를 죽였다.注+② 〈東海王의 세 아들과 그 어미는〉 田氏와 孟氏 및 이들이 낳은 세 명의 사내아이이다.
【目】 有司가 桓溫의 뜻을 받들어서 司馬晞를 주살할 것을 청하자, 황제는 조령을 내리기를 “내 마음이 비통하고 황공하여 차마 들어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였다.
환온이 굳이 청하자, 황제가 손수 조령을 쓰기를 “만약 晉나라의 국운이 계속 이어진다면 公은 곧바로 앞의 조령을 받들어 행해야 할 것이요, 만약 大運이 진나라를 떠난다면 내 임금의 자리를 현자에게 양보하겠다.” 하니,
환온이 이 조령을 보고서 진땀을 흘리고는, 마침내 奏請하여 사마희를 폐하여 新安으로 귀양 보내고, 司馬晃을 파면하여 庶人으로 삼고, 殷涓, 庾倩, 庾柔는 모두 그 일족을 멸하였다.注+① 吳나라 孫權이 丹楊을 나누어 新都郡을 세웠는데, 晉나라 武帝 太康 元年(280)에 이름을 新安郡으로 바꾸었다.
侍中 謝安이 환온을 보고 멀리서 절하자, 환온이 놀라며 말하기를 “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하는가.” 하니, 사안이 말하기를 “임금께서 그대의 앞에서 절하시는데 신하가 그대의 뒤에서 읍을 하는 도리는 없다.” 하였다. 환온은 마침내 姑孰으로 돌아갔다.
【目】 秦王 符堅은 桓溫이 군주를 廢하고 새 군주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환온이 지난번 灞水 가에서 패하고 뒤에 또 枋頭에서 패하였는데, 능히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자책하여 백성들에게 사죄하지 못하고, 이제 다시 군주를 폐하여 스스로 즐거워하는구나.注+① 說은 ≪晉書≫ 〈載記〉에 悅로 되어 있으니, 마땅히 悅로 따라 읽어야 한다. 일설에는 “說은 본음대로 읽으니, 스스로 해명함을 이른다.” 하였다.
60세 된 늙은이의 행동거지가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四海에 용납되겠는가. 속담에 ‘아내에게 화가 났는데, 〈오히려〉 자기 부친(황제)에게 화난 낯빛을 짓는다.’ 하였으니, 환온을 두고 한 말이다.” 하였다.注+② 室은 아내이다.
【綱】 12월에 〈晉나라(東晉)가〉 東海王(司馬奕)을 강등하여 海西縣公에 봉하였다.
【目】 大司馬 桓溫이 아뢰기를 “폐위되어 추방당한 사람은 백성들에게 군림할 수가 없으니, 東海王은 마땅히 를 따라야 합니다.” 하자, 太后(崇德太后)가 조령을 내려 海西縣公에 봉하였다.
환온의 위엄이 내외에 진동하니, 황제(晉 簡文帝)는 비록 帝位에 있었으나 拱手하고 침묵할 뿐이었다.
【目】 이보다 앞서 熒惑星이 太微垣의 端門에 자리하였는데, 한 달 뒤에 海西公이 폐위되었다.注+① ≪晉書≫ 〈天文志〉에 “太微垣 南藩 가운데의 두 별 사이를 端門이라 한다.” 하였다.
이때 이르러 형혹성이 역행하여 태미원으로 들어가니, 황제는 이것을 몹시 싫어하여 中書侍郞 郗超에게 이르기를 “목숨의 길고 짧음은 본래 예측할 수 없지만 진실로 마땅히 근래의 사태가 더 이상 없겠는가.” 하자,注+ 그러므로 지금 감히 실정을 가지고 물은 것이다.
치초가 말하기를 “大司馬 臣 桓溫이 막 안으로는 社稷을 견고히 하고 밖으로는 經略을 넓히니, 非常한 일이 〈다시 발생하지 않을 것을〉 臣의 온 식구의 목숨을 가지고 保障하겠습니다.” 하였다.
치초가 급히 휴가를 내어 아버지(郗愔)를 문안할 것을 청하자,注+③ 急은 휴가이다. 晉나라 법령에 휴가를 받는 자는 한 달에 다섯 번 휴가를 받을 수 있는데, 1년 중에는 60일을 한도로 삼았다. 황제가 말하기를 “尊公에게 나의 뜻을 전달하라. 나라와 집안일이 마침내 여기에 이르렀으니, 이는 내가 도리로 나라와 집안을 바로잡아 保衛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였다.
황제는 인하여 의 詩를 읊기를 “志士는 조정의 위태로움을 애통해하고 忠臣은 군주의 욕됨을 슬퍼한다.” 하고는 마침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셨다.
【目】 황제는 風儀가 아름답고 행동거지가 훌륭하였으며 典籍 공부에 마음을 쏟고 〈거처에는 마음을 쓰지 않아〉 자리에 먼지가 가득하였으나 편안해하였다. 비록 정신과 의식이 편안하고 활달하였으나, 세상을 구제할 큰 經略이 없었다.
謝安은 평하기를 “의 부류인데, 다만 혜제에 비해 清談이 조금 나을 뿐이다.” 하였다.
【目】 郗超는 桓溫과 가까웠기 때문에 조정의 사람들이 모두 그를 두려워하며 섬겼다. 謝安이 일찍이 左衛將軍 王坦之와 함께 치초에게 찾아갔을 적에 해가 저물어도 치초를 만날 수 없자 왕탄지가 돌아가려 하니, 사안이 말하기를 “그대는 목숨을 위하여 잠시를 참지 못하는가.” 하였다.注+① 爲(위하다)는 去聲이다.


역주
역주1 張茂가……보인다 : 張茂는 前涼의 3대 군주이고 張駿은 전량의 4대 군주이다. 당시 전량은 東晉과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前趙․後趙와는 때에 따라 자세를 달리하여 전조와 후조가 강성할 때에는 臣屬하고 약해질 때에는 영토를 다투었다.
역주2 : ≪資治通鑑綱目≫〈≪朱子全書≫ 9, 上海古籍出版社)에는 ‘耶’자로 되어 있으나, ≪資治通鑑≫과 저본에는 ‘也’로 되어 있고 의미에 지장을 주지 않기 때문에 저본의 글자를 따랐다.
역주3 王猛은……청하였는데 : 본서 太和 5년(370) 9월에 보면, 王猛이 前燕 慕容評의 군대와 潞川에서 대치하였는데, 왕맹이 鄧羌에게 잘 싸울 것을 면려하였다. 등강이 司隷校尉의 자리를 요구하자 왕맹이 安定太守와 萬戶侯를 약속하였다. 전연의 군대와 교전할 때 왕맹이 등강을 불렀으나 등강이 응하지 않았다. 왕맹이 등강에게 사예교위를 약속하자 비로소 진격하여 전연의 진영을 무너뜨렸다.
역주4 漢나라……것 : 이 내용은 漢 光武帝 建武 13년(37)에 보인다.(≪思政殿訓義 資治通鑑綱目≫ 제9권 中)
역주5 廉頗와 李牧 : 모두 전국시대 趙나라의 뛰어난 장수로, 염파가 장군이었을 적에는 강한 秦나라조차도 감히 조나라를 얕보지 못하였으며, 이목이 흉노족을 방비하고 있을 때에는 흉노가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史記≫ 권81 〈廉頗藺相如列傳〉)
역주6 大司馬溫……入卽位 : “‘入’이라고 쓰고 ‘廢’라고 쓰고 ‘迎卽位(영입하여 즉위하게 하였다.)’라고 썼으니, 여기에서 환온의 兇惡하고 悖倫한 氣燄을 볼 수 있다.[書入 書廢 書迎卽位 兇悖之氣燄 可見矣]” ≪書法≫“여러 조정에서 군주를 폐하고 새로운 군주를 세울 적에 만일 霍光처럼 충성스러운 자가 아니면 또한 모두 그 跋扈한 자취를 드러냈다. 桓溫에 이르러서는 그렇지 않아서 겨우 ‘조정에 들어왔다.[入朝]’고 쓰자마자 즉시 황제를 廢하고 會稽王을 세웠음을 썼는데 나뭇가지를 꺾는 것처럼 쉽게 하였고 또한 여러 신하들이 항거하고 이견을 세우며 목숨을 걸고 배척한 사람을 볼 수 없는 것은 어째서인가. 환온이 오랫동안 큰 권한을 독점하여 晉나라 조정이 그의 손안에 있었으니, 天子는 다만 有名無實할 뿐이었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이에 군주 바꾸는 것을 바둑알 바꾸듯이 하여 거리끼는 바가 조금도 없음을 드러내었으니, 만일 환온이 이때 그대로 문물제도(왕조)를 바꾸었다면 또한 무슨 어려움이 있었겠는가. 書法이 이와 같으니, 이는 나라를 소유한 자가 은미한 것을 삼가서 서리를 밟는 조짐을 엄하게 방비하지 않을 수 없음을 경계한 것이다. 환온에게 무슨 책할 것이 있겠는가.[累朝廢立 自非如霍光之忠 亦皆先著其跋扈之迹 至溫則不然 纔書入朝 卽書廢帝 立會稽王 易若折枝 亦不見群臣有抗拒立異 死斥之人 何哉 溫久專大權 晉朝在其掌握 天子特擁虛器 故立談之頃 視置君 如奕棊 略無少齟齬其間者 使溫是時 因而改物 則亦何難之有 書法若此 所以戒有國者 不可不謹其微 而嚴履霜之漸爾 於溫乎 何誅]” ≪發明≫ ‘서리를 밟는 조짐’은 일의 조짐을 보고 미리 그 禍를 경계하라는 말로, ≪周易≫ 坤卦 初六에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른다.[履霜堅冰至]”라는 말에서 유래하였다.
역주7 伊尹과 霍光의 일 : 국가의 重臣으로서 군주를 廢立한 일을 말한다. 이윤은 殷나라 湯王을 도와 夏나라 桀王을 정벌하고 재상이 되었다. 탕왕이 죽은 뒤 그의 손자 太甲이 즉위하여 탕왕의 법을 무너뜨리자 이윤은 그를 桐宮으로 내쫓았는데, 3년 후에 태갑이 잘못을 뉘우치자 다시 맞아들여 복위시켰다.(≪史記≫ 권3 〈殷本紀〉) 곽광은 漢나라 武帝 때 大司馬 大將軍으로 遺詔를 받아 어린 昭帝를 보좌하였다. 소제가 죽은 뒤 昌邑王을 황제로 세웠는데, 그가 음란한 행동을 자행하자, 폐위시키고 宣帝를 세웠다.(≪漢書≫ 권68 〈霍光傳〉)
역주8 (第)[笫] : 저본에는 ‘第’로 되어있으나, ≪春秋左氏傳≫에 의거하여 ‘笫’로 바로잡았다. 아래도 같다.
역주9 安石 : 謝安의 字이다.
역주10 如字 : 한 글자에 여러 독음이 있는 경우 본음대로 읽으라는 것이다.
역주11 漢나라……故事 : 漢나라 昭帝가 죽은 뒤에 후사가 없자, 霍光 등이 武帝의 손자인 昌邑王 劉賀를 옹립하였으나, 창읍왕의 행실이 음란하고 無道하자 즉위한 지 27일 만에 곽광이 上官太后의 허락을 받아 결국 창읍왕을 폐위시키고 宣帝를 황제로 옹립하였는바, 이 고사를 가리킨다.(≪資治通鑑≫ 권24 〈漢紀16〉 漢 昭帝 元平 元年)
역주12 庾闡 : 字는 仲初로, 東晉 때 문장가이며 官員이다. 9세 때부터 글을 잘 지었는데, 江東의 鄕試에 응시하여 秀才로 뽑혔다. 西陽王 司馬羕의 掾屬과 尙書郞을 지내다가 蘇峻의 난리 때 도망하여 郗鑒의 아래에 들어가 給事中이 되어 글 짓는 일을 담당하였다. 문집 10권이 있었는데 모두 일실되었고, 몇몇 문헌에 그의 작품들이 산견된다. 시호는 貞이다.
역주13 황제가……삼았다 : ≪資治通鑑≫ 권97 〈晉紀 20〉 晉 穆帝 永和 원년(345)에 보면 司馬昱(簡文帝)이 郗超를 辟召하여 撫軍掾으로 삼았다.
역주14 晉 惠帝 : 西晉의 제2대 임금이다. 어리석기 그지없던 인물로, 황후인 賈氏가 전횡을 하도록 내버려두었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였다. 혜제는 또한 수행원과 개구리 울음소리의 公과 私를 밝히려 한 일화와 飢餓에 허덕이는 백성에게 왜 고기 죽을 먹지 않느냐고 물은 일화로 유명하다.(≪晉書≫ 권4 〈孝惠帝紀〉)

자치통감강목(15) 책은 2022.12.07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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