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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北魏 世宗(元恪)이 殂하니, 侍中 中書監 崔光, 侍中 領軍將軍 于忠, 詹事 王顯, 中庶子 侯剛이 太子 元詡를 東宫에서 맞이할 적에 王顯이 날이 밝기를 기다려 즉위하게 하려 하였는데,
注+① 須는 기다림이다.
최광이 말하기를 “천자 자리는 잠시도 비워둘 수 없으니 어찌 날이 밝기를 기다릴 것인가.”라고 하니, 왕현이 말하기를 “반드시 中宫께 아뢰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광이 말하기를 “皇帝가 崩御했을 때 太子가 帝位에 오르는 것은 국가의 떳떳한 법인데 어찌 中宮의 명령이 필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자에게 哭을 멈춘 뒤 동쪽 곁방에 서게 하고, 우충이 태자를 부축해 서쪽을 향하여 십여 번 哭하는 소리를 내고 멈추자, 최광이 太尉를 대행하여 策書를 받들고 玉璽와 印綬를 올렸다.
태자가 무릎을 꿇고 이를 받은 뒤 곤룡포와 면류관을 갖추어 입고 太極殿에 나아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최광 등이 숙직하던 뭇 관료들과 궁정 가운데 서서 북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고 만세를 불렀다.
高皇后가 胡貴嬪을 살해하려고 하자 中給事 劉騰이 〈이를 알아차리고〉 후강, 우충, 최광에게 알리니
注+② 中給事는 환관이다. 北齊의 제도에 따르면, 中侍中省에 中侍中, 中常侍中, 給事中이 있으니 北魏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최광이 호귀빈을 별도의 장소에 안치시키고 빈틈없이 보호하게 하였다. 이런 이유로 호귀빈이 네 사람에게 깊이 감사해 하였다.
이때에 서쪽을 정벌하거나 동쪽에서 방비하는 병사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注+③ “西伐”은 蜀을 정벌하러 간 병사를 말한다. “東防”은 淮河를 방어하는 병사를 말한다.
廣平王 元懷가 병든 몸을 이끌고 궁중에 들어와 問喪하여 哭을 하고자 하였는데, 말하기를 “전각 위에 올라 大行皇帝께 곡을 하고 主上을 뵈려 한다.” 하자,
注+④ 元懷는 孝文帝의 아들이다. 臨(問喪하여 哭하다)은 力鴆의 切이다. 뭇사람들이 흠칫 놀라며 감히 대응하는 자가 없었다.
최광이 상복을 떨치고 일어나 喪杖을 짚고는 漢나라 趙熹의 고사를 인용하고서 매우 엄정한 태도를 취하자,
注+⑤ 衰는 상복이니, “攘衰”는 상복의 소매를 걷어붙이는 것과 같다. 振은 드는 것이고, 杖은 哭杖이다. 漢나라 光武帝가 崩御하자 太尉 趙熹가 喪禮를 주관했는데, 당시 황태자와 제왕들이 뒤섞여 앉고 〈제왕들의 관속들이 출입하여〉 백관들이 구별 없었다. 조희가 정색을 하고 전각 계단에서 칼을 비껴 차고 제왕들을 끌어 내리고서 모두 사저로 가게 한 뒤에 오직 아침나절에만 들어와 哭을 하게 하자 내외가 숙연해졌다. 원회가 말하기를 “侍中(최광)이 옛적의 의리로 나를 제어하는데 내가 감히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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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胡太后가 총명하고 영특하며 독서와 글짓기를 좋아하였다. 처음 조정에 나와 대리청정을 할 때 여전히 ‘令’이라 칭하며 일을 집행하였는데, 뭇 신하들이 글을 올릴 때 ‘殿下’라 칭하고, 정사를 모두 손수 재가하였는바, 胡國珍에게 侍中에 더하고 安定公에 봉하였다.
郭祚 등이 죽고 나서 조령과 생살여탈의 권한이 모두 于忠으로부터 나오자 王公들이 두려워하여 발을 조심히 딛고 숨을 죽였는데,
注+① “脅息”이란 숨을 죽여서 감히 코로 숨 쉬지 못하고 양어깨만 가만히 움직이며 숨을 내쉬는 것이다. 胡太后가 직접 정사를 다스리게 되어서는 곧바로 우충을 冀州刺史로 내보내고 司空 元澄에게 尙書令을 겸하게 하였다.
원징이 상주하기를 “안정공이 의당 궁중에 출입하여 중요 업무에 참여하여 논의하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조서를 내려 그것을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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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예전에 北魏 于忠이 권력을 행사할 때 스스로 社稷을 안정시킨 공로가 있다고 하여 뭇 관료들에게 은근히 자신에게 상을 더 내리게 하도록 하니, 太傅 元雍 등이 于忠을 常山郡公에, 崔光을 博平縣公에 봉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尙書 元昭 등이 계속 글을 올려 호소하자,
注+① 元昭는 元遵의 증손이다. 魏主(元诩)가 제위에 오를 때 태후가 명하여 公卿 등에게 다시 논의토록 하니,
太傅 元懌 등이 상주하기를 “새로운 군주를 삼가 맞이하고 모시며 보위하는 일은 신하의 정상적인 직분으로 이것을 공로로 삼을 수 없는데, 신들이 이전에 이를 논의한 것은 바로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그 포악함을 구차스레 모면하려 했기 때문이었으니, 봉작을 모두 추탈하소서.”라고 하자, 태후가 그의 말을 따랐다.
高陽王 원옹이 表文을 올려 스스로를 탄핵하여 말하기를 “우충이 권력을 전횡하여 생사여탈권을 멋대로 행사하였지만 신이 이를 거역하지 못하고 외람되이 관직을 차지하고 녹만 받으며 돌봐주신 은혜를 저버렸으니, 청컨대 신이 제 집으로 돌아가서 엎드려 司敗의 조처를 기다리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注+② 司敗는 바로 司寇이다.
태후가 이를 추궁하지 않고, 얼마 후 원옹을 太師로 삼은 뒤 司州牧과 錄尙書事를 겸임하게 하여, 太傅 元懌, 太保 元懷, 侍中 胡國珍과 함께 뭇 정사를 함께 다스리도록 하였다.